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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

 

국민국가의 집단기억과 역사교육·역사교과서

 

 

김유경 金裕慶

경북대 사학과 교수. 주요 논문으로 「독일대학의 역사학 전공과정 편제와 교과운영─괴팅겐 대학의 사례를 중심으로」 「중세유럽 필사본사료 연구의 과제와 방법」 등이 있음. leor@bh.knu.ac.kr

 

 

1. 머리말

 

한국과 일본의 대표적인 역사연구단체들이 1월 18일에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을 비판하고 진실을 밝히기 위한 공동회의 합의문을 발표했다고 한다.1 이른바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 편찬한 중학교용 역사교과서(扶桑社 간행)가 일본 문부과학성의 검정을 통과하고서도 채택률이 저조했던 사실과 신년에 발표된 양국 학계의 합의로 사태는 외관상 진정되었다. 그러나 이로써 동아시아에서 역사전쟁의 소용돌이가 재발할 소지가 완전히 불식된 것으로 보기에는 아직 시기상조일 것이다.

작년 봄 한국의 역사학관련 15개 학회가 개최한 심포지엄2을 시발로 하여 각종의 언론매체와 평론지가 이 문제를 계속 논의하면서 마침내 관심은 우리 역사학과 역사교육의 방향에까지, 나아가 몇가지 다른 교과의 교과서가 안고 있는 문제점에까지 미쳤다.3 1982년의 경우에도 그러했듯이, 일반대중과 적지 않은 학계 인사들에게조차 ‘역사교과서=일본 역사교과서 파동’을 연상시킬 정도로 우리 사회에서 역사·역사교육·역사교과서라는 주제는 평소에는 관심의 외곽에 놓여 있다가, 일본에서 부는 이상한 바람에 따라 갑자기 여론과 학계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존재가 되었다.

역사교과서 문제가 자꾸 정치화되는 분위기는 우리의 역사교과서·역사교육의 모습이 어떠해야 할 것인가라는 원칙적인 과제를 더욱 깊이 고민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서양사를 전공하면서, 주 전공분야 외에 유럽의 역사교육 및 역사교과서에 어쩔 수 없이 관심을 기울여온 필자로서는 유럽의 예와 견주어 일본의 역사교과서 문제가 우리에게 던져준 더 본질적인 측면, 즉 우리의 역사교육·역사교과서 문제 몇가지를 생각하게 되었다.

 

 

2. 역사문화·역사학·역사교육

 

우리는 일상에서 과거가 남긴 무수한 흔적을 만나고 있으며, 긴 시간의 흐름을 통해서 형성된 사회구조 속에서 삶으로써, 과거에 놓인 원인의 결과를 경험하고 있다. 과거는 이와같이 오늘날을 살아가는 인간에게 여전히 구속력을 발휘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 그 자체는 우리에게 저절로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과거에 대한 일정한 그림 즉 상(像)을 그려내고, 이를 전달하고 변경하는 데는 일정한—경우에 따라서는 과중한—노고가 필요하다. 결국 우리가 가지고 있는 과거에 대한 이해와 이미지는 과거가 남긴 흔적(사료)에 질문하는 의식적인 탐구행위 끝에 얻어지는 구성물(construction), 또는 그림에 불과하다.

인간이 그려내는 과거의 그림은 지극히 개인적인 차원의 것일 수도 있고, 사회가 그 구성원의 합의 속에서 그려내는 것일 수도 있다. 이렇게 형성된 역사상(像)은 사회구성원의 정체성(identity)을 확보해주는 집단기억으로서 하나의 공공적 기능을 발휘한다. 과거파악의 공공적 측면, 즉 하나의 사회가 과거를 역사(상)로서 인지(認知)하는 방식, 역사지식이 사회 안에서 현존하는 방식과 형태를 ‘역사문화’라는 개념으로 포괄할 수 있다. 역사문화는 현재 속에서 과거가 제시되는 여러가지 형태와 양식으로서, 당연히 매우 다양하고 서로 보충하거나 중첩되며, 상황변수에 따라 끊임없이 변동한다.4 역사문화의 요소는 모든 종류의 집단적 기억행위, 즉 각종의 기념물·기념행사·의식(儀式), 심지어 과거를 소재로 한 예술과 문학작품, 영상물까지 포함한다. 고도로 전문화된 오늘날의 역사학, 그리고 다수의 사회구성원과 접촉하고 있는 역사교육 및 역사교과서는 이러한 역사문화에서 매우 큰 구성요소의 하나이면서 역사문화의 다른 요소와 상보관계 또는 긴장관계에 있다.

근대 역사학을 태동시킨 19세기 유럽의 역사문화는 국민국가의 탄생·발전과 짝을 이루어 전개되었다. 이 무렵 사람들은 낭만적 민족주의의 동기에서 과거를 열광적으로 탐구했고, 갖가지 방식으로 재현해내었다. 기념물, 예술 및 문학작품, 의식(儀式), 그리고 고도로 세련되고 규율화된 형태의 역사학이 그것이다. 근대역사학이 수립되어갈 때 많은 역사가들은 ‘객관적 진리의 탐구’에 봉사한다고 믿었으며, 또 이 신념을 설파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행해진 당시의 역사서술과 연구는 이를 목표로 과학성을 표방하고 정제된 방법론을 구사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눈으로 보면 일정한 정치적·사회적 이해관계와 목적에 부합하고 있었다. 유럽의 근대 역사학은 일부의 개별적 예외가 없지 않으나 대부분이 당시에 비로소 형성되거나 공고해지던 국민국가(nation state)를 역사적으로 정당화하는 ‘집단기억’을 만들어내어 국민을 국민국가체제 내로 통합하는 일에 봉사하였다.5 20세기 중반에 이르기까지 유럽 각국에서 다수의 역사가들은(심지어 다른 분야의 지식인들까지) 때로는 노골적으로, 때로는 암묵적으로 민족과 국민의 유구함과 영원성, 나아가 국가의 신성함을 설파하면서, 국가의 국민동원체제에 협조하거나 적어도 그러한 국가정책의 시행에 도움이 되는 정신적 분위기를 만들어내었다.6

근대 유럽의 국민국가들은 국민의 체제내적 통합을 위해서, 또한 치열한 국가간의 경쟁에서 우월한 지위를 확보하는 데 필요한 역량을 양성하기 위해서 초등 의무교육을 비롯한 각급의 교육체제를 정비하게 되었다. 이런 제도적 조건에서 역사학은 국가별로 시간과 강도의 차가 있지만 최초로 독일에서, 이어 프랑스·영국·이딸리아 등지에서 고등교육기관 즉 대학체제 내의 전문가 양성과정을 획득하였고, 또 그 이하 단계의 교육기관에서 국민교육을 위한 필수적이고 유효한 수단으로서 동원되었다. 역사학의 전문화와 제도화는 오랜 동안에 이루어진 지적 활동의 발달에 의해서도 추진되었지만, 그 최종적 실현과정에서 국가의 지원과 역할은 매우 중요한 동력이 되었다. 더욱이 전문적인 역사학은 국민을 위한 역사교육이라는 일거리를 얻었을 때 안정된 제도적 기반을 마련하고 융성할 수 있었다.

익히 알려진 바대로 20세기에 두 번의 세계대전으로 체현된 유럽 문명의 파국적 경험은, 당시 국민적·민족적 정체성의 확립을 넘어서 타민족·국민·인종에 대한 자민족·국민 우월감을 조장하는 지경으로까지 진전된 근대 유럽의 역사인식 및 선전, 교육과 무관하지 않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에서 활발해진 역사인식의 방향전환, 유럽적 정체성(正體性)의 강조는 그들이 겪은 경험에 대한 반성과 긴밀한 관계를 갖고 있다. 역사파악의 자세가 달라지고 이에 따라 역사교육의 목표와 방법이 달라진 것도 물론이다.

과거 자체가 아니라 현실적으로 존재한 인간의 과거 파악, 즉 역사학은 불가피하게 현재적 관심과 이해관계의 그물망 속에 놓이기도 하지만, 사료의 부족과 인간능력의 한계로 과거의 작은 측면조차 남김없이 그려낼 수가 없는 불완전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역사파악의 진실성, 역사적 진리의 존재 가능성이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건전한 상식을 가지고 있는 역사학도는 자기 작업의 결과가 나중에는 극복되고 수정될 것이라는 각오를 하고 있지만, 또한 수많은 동업자들의 노고가 모이고, 동업자 및 역사를 알고 싶어하는 대중들과의 의사소통과 토론을 통한 검증 속에서 역사적 진리에 접근한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다. 요컨대 역사적 진실은 부지런하고 겸허한 사람들의 노력 속에서 축적되고 공유되는 ‘의사소통적 진실’이다. 요즈음 널리 이야기되는 소위 포스트모더니즘의 논의를 빌리지 않더라도 우리는 경험적으로 시간이 흘러가면서 과거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변화하고, 그 심도가 깊어지고 시야가 넓어지며, 또 알고 싶어하는 과거의 측면, 즉 연구주제와 대상이 달라져왔고, 하나의 대상도 보는 관점에 따라서 상호보완적이거나 상충하는 다양한 역사상이 그려질 수 있다는 제한성을 알고 있다.

역사의 과학성은 최소한도로 역사인식의 이러한 속성을 이해하는 데서 출발한다고 하겠다. 유럽인들이 2차대전 이후부터 개선해온 역사교육은 이런 점을 전제하여 학습자들의 ‘역사의식’ ‘역사적 사고’를 함양하는 데 주된 촛점을 맞추고 있다. 그리하여 역사교육은 어린 학생들이 역사인식의 이러한 원리적 속성을 인식하고, 제한된 학습상황에서 이를 실천하는 ‘방법지향적’ ‘문제지향적’ 구조를 따르고 있다.7 즉 역사교육에서 추구하는 과거청산은 단순히 과거의 잘못을 인식하는 것, 즉 일종의 모범답안을 일방적으로 흡수하는 것만이 아니다. 사회 전체가 그러한 과거를 생성하는 데 긴밀히 연관되어 있던 과거의 오만한 역사학, 역사파악 자세를 반성함으로써, 역사를 학습하는 이들이 역사학의 특유한 작업 경로를 통해서 비판적 이성을 갖춘 ‘작은 역사가’(little historian)로 형성되도록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역사학·역사교육은 단순히 완제품으로서의 집단기억과 역사상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학습자가 학습과정을 종료하고 나서도 시간의 흐름과 상황의 변동에 따라 기억을 지속적으로 수정·관리하는 역동적 과정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3. 역사교육의 목표와 내용: 민족정체성?

 

일본의 역사교과서가 제기한 문제의 핵심은 일단 민족·국민적 정체성의 문제로 집약된다. 학계 일각에서는 일본의 네오내셔널리즘을 성토하면서도 시선을 내면화하여 한국 역사학·역사교육의 중심가치로서 오래되었으나 여전히 선명하게 정리되지 못한 민족주의·민족정체성의 문제를 다소 객관화해 보거나, 심지어 비판적으로 보려는 논의도 나타났다.8 일본 문부성이 역사교과서 집필자에게 개작을 강요함으로써─예를 들면 19세기 말 일본제국의 대륙‘침략’을 ‘진출’로 개서하도록 요청한 경우─야기된 1982년의 교과서 파동 때와는 달리 이번에는 한국 학계의 일각에서 한국의 민족주의, 소위 민족주의사관에 대한 비판적 논의가 제기될 정도로 상황은 매우 달라졌다.

하나의 사회적 행위로서 역사학이 ‘무엇을, 왜, 어떻게 연구하는가?’라는 문제가 이 기회에 전문연구자들 사이에서 진지하게 논의되고 고민되어야 한다. 나아가 반드시 전문역사가가 될 것으로 상정되지 않는 미성년 학습자를 대상으로 하는 역사교육에서 ‘무엇을, 왜,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역사학의 사회적 존재의의에 연결되는 문제가 된다. 역사교육의 목표, 특히 역사교육이 추구하는 가치는 역사학의 내부 논리와 규율에서 전적으로 제공된다고 보기는 어렵다. 대부분의 국가의 경우 제도교육의 틀에서 행해지는 역사교육에는 결국 국가와 사회의 관심, 가치관, 합의가 투영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당연히 역사교육의 목표와 방법도 해당 사회 및 국가의 역사적 경험, 또 그 사회가 역사를 인지하는 방식과 형태 즉 역사문화에 의해 형성, 변모하게 마련이다. 앞에서 잠깐 언급하였듯이 유럽의 근대 역사학, 근대 역사교육은 1945년을 고비로 자국·자국민 중심의 역사파악 자세를 고집하는 태도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1950년대부터 서서히 전개된 유럽통합 운동의 물결에 발맞추어, 유럽적 정체성의 발견과 앙양, 저들의 전통이 수세기에 걸쳐 명시적으로 발전시켜온 보편적 인권, 인본주의가 역사교육의 기본적인 지도노선이 되었다. 특히 대전중의 반인류적 행위의 당사국이었던 독일에서는 소위 과거극복의 과제가 강조되면서 민족·국민이라는 개념 자체가 역사학과 역사교육에서 퇴조하는 경향을 보였다. 또 유네스코를 비롯한 국제기구, 독일의 게오르크 에커트 국제교과서 연구소의 활동으로 독일과 프랑스 그리고 독일과 폴란드 사이에 교과서 협의가 30여년 동안 진행되면서 역사교과서로 표출되는 집단기억의 갈등을 해소한 성과도 있다.9 유럽의 역사학·역사교육·역사교과서는 온통 ‘유럽 열풍’에 사로잡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이미 한 세대 전부터 유럽 주요국가에서는 자국사를 별도로 독립시킨 교과목 및 교과서를 편성하지 않고, 유럽 전체의 역사를 대상으로 삼고 있다.10 유럽이라는 더 큰 정체성 속에서 이루어지는 이들의 역사교과서 협의활동이나, 탈민족주의적 역사파악·서술·교육이 가능한 것은 동아시아의 사정과는 너무도 다른 저들의 역사적 경험과 조건, 역사문화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우선 저들의 국민국가(nation state) 또는 국민·민족(nation)은 비교적 가까운 과거에 형성되었고, 그 형성원리가 2차사회적 속성을 매우 강하게 지니고 있음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동양어로 애매하게 국가(國家)로 번역되는 ‘state’ ‘etat’ ‘Staat’는 어원적으로 상태·처지 등을 의미하는 라틴어 ‘status’에서 나왔고 중세 후기부터 17세기 심지어 19세기에까지 걸쳐 서서히 오늘날의 어형과 의미─영토·주권·주민을 포괄하는─를 갖추었다. 국민·민족으로 혼란스럽게 번역되는 ‘nation’도 ‘태어나다, 태어났음’을 의미하는 중세 라틴어 ‘nascor’ ‘natus’에서 기원하여 중세 대학구성원 및 성직자들의 출신지역별 동향인 조직체를 지칭하는 ‘natio’를 거쳐, 18,9세기 무렵의 부르주아 혁명기에 오늘날과 같은 의미를 획득하였다. 유럽의 역사에서 국민국가의 시대는 매우 단기간이며, 강력한 통합성을 가진 이 국가체제가 등장하기 전에는 말할 것도 없고 그후에도 사람과 물자, 문화의 상호교통과 삼투작용은 매우 활발했다. 근대초, 절대왕조 국가들의 등장기부터 2차대전에 이르기까지 치른 무수한 전쟁으로 상호간의 적대감정도 뿌리깊었으나, 역사의 전개과정에서 영토와 사람의 귀속이 복잡하게 얽혀 있어, 가치지향을 바꾸면 유럽 전체를 관통하는 정체성의 계기를 풍부한 증거에 의거하여 쉽게 찾을 수 있다. 근본적으로 유럽의 역사는 유럽 전체의 문맥을 떠나서 현재에 존재하는 개별 국민국가를 역사파악의 단위로 설정하는 것이 불가능하고, 또 그러할 경우 어이없는 시대착오에 빠지게 마련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유럽통합이 저들의 의식과 현실의 삶 모든 면에서 속속들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고 보는 것도 너무나 순진한 생각이다. 1989〜90년 동구권의 붕괴 이후에도 기존 유럽연합 가맹국의 이해득실 계산으로 동유럽권의 유럽연합 편입문제가 여전히 지지부진하게 논의되고 있고, 이주민 문제, 실업문제, 구식민지 출신의 인종문제 등등 크고 작은 까다로운 문제가 허다하다. 특히 모범적인 과거극복, 청산을 했다고 칭송받고 있는 독일에서는 한 무리의 신우익 역사가 및 지식인들이 (재)통일 후에 부쩍 ‘독일 역사의식의 정상화’ ‘자의식 있는 국민’을 운위하면서, 새삼스럽게 1945년 이후에 ‘강요된 독일의 서방편입’에 의문을 제기하는 경향조차 나타나고 있다.11 민족적·국민적 정체성의 문제는 어디에서나 끈질기게 논의가 재연되면서 쉽사리 해소될 것 같지 않아 보인다.

동아시아 3국이 겪는 소위 역사전쟁은 이와는 다른 역사적 문맥에서 벌어지고 있다. 현실의 역사세계가 오래 전부터 비교적 선명하게 구별된 역사체로 이루어진 이 3국은 100여년 전 제국주의에 의해 갑자기 서구적 근대체제의 질서에 편입되면서, 세계사적 모순이 중첩된 갈등을 경험하고 심각한 정체성의 위기에 빠졌다. 1945년 2차대전의 종식도, 냉전체제의 붕괴도 이 지역이 안고 있는 내외 갈등과 정체성 위기를 완전히 해소하지 못했다. 공통적으로 이 지역의 근대화는 국가권력에 의해 지도되는 바가 많았고, 시민사회의 역량은 국가권력의 압력과 지도를 충분히 거부하거나 그것에 대항할 정도로 성장하지도 못했다. 따라서 국가권력의 개입 정도는 국민의 집단기억을 만드는 역사문화에서도 거대한 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리하여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은 어느 연구에서 지적된 바대로 불안정한 동아시아 질서에서 일본의 국가주의가 취하려는 패권주의의 다른 표현으로서 단기적인 돌출현상이 아니라, 오랜 뿌리를 갖고 있으며 또 한때의 항의로 쉽사리 교정될 것으로 보이지도 않는다.12

식민통치를 겪었고, 애매하게 해방이 되자마자 분단이 되고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은 한국사회에서 역사가·지식인들이 ‘민족정체성’ 문제로 고민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일 것이다. 더욱이 민족정체성과 자존의 문제를 현실의 국가가 품위있게 정리하지 못한 처지에서 역사가들이라도 이 문제를 고민하고, 민족에게 직접 호소하고 싶은 욕구를 지니게 됨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대한민국 사회에서는 ‘민족’이란 말이 각 개인 또는 이해집단의 입지에 따라 다양하게 사용되고 이해되어왔다. 건국 이후 시기마다 부침이 있었지만 대한민국의 국가권력, 또 이와 친화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유력한 사회세력은 자신들의 입지를 ‘민족주의’로 주장해왔다. 그리고 권력체제에 비판적이거나 힘겹게 저항을 한 사람들도 스스로의 입장과 가치지향을 ‘민족’ 또는 ‘민족주의’로 주장해왔다. 역사교육을 통한 ‘민족정체성의 확보’라는 목표진술 자체에 대해서는 대한민국 국가체제, 국민 모두가 반대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민족’에 대한 상이한 이해방식이 있었던 지난 세월의 경험에서 감지할 수 있듯이, 모두가 동의하는 것처럼 보이는 ‘역사교육을 통한 민족정체성의 확립’이라는 목표를 이해하는 방식에서도 다양한 스펙트럼이 존재한다. 이러한 현실은 대다수 국민의 집단기억과 민족정체성 형성에 직접적으로 관여하는 우리의 역사교육·역사교과서에서 조화롭게 처리하기에 매우 어려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더욱이 제도교육이 국가권력에 의해 조직되고 운영되는 현실에서 역사교육의 틀과 내용의 향방은 현실의 ‘국가권력 또는 그 주도세력’이 생각하는 바에 의해 결정될 소지가 너무도 많다. 아마도 이 문제는 모든 나라에서 역사교육이 발전해가는 과정에서 거칠 수밖에 없었던 고민이었을 것이다.

역사적 경험으로 보아 단일국민국가, 더구나 권위주의적 국가체제가 제도적으로 실현하는 역사교육은, 국가체제에 포섭된 사회구성원이 처지와 이해관계, 신념과 이상을 달리하는 여러 집단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현실을 가급적 잊어버리고 싶어한다. 그리고 학습방식으로서 ‘완제품으로서의 집단기억’을 학습자가 무조건 흡수하라고 강요하는 오만한 자세를 취하게 마련이다. 이러한 사고방식이 구현된 역사교재(교과서)를 ‘경전적 교과서’라고 하겠다.

인간에게는 모두 개인의 정체성, 그가 귀속된 각종의 집단·가족·향토·직장·성·계급·사회·민족·국가 등등의 구성원으로서 갖는 다면적·다층적 정체성이 있게 마련이다. 그리고 이러한 정체성 역시 선험적으로 또는 역사의 시발과 함께 자동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흐름 속에서 형성되는 결과일 것이리라. 말하자면 시간축에서 형성된 역사적 존재로서의 자기인식이 전제될 때, 인간은 자기정체성을 확보할 수 있으리라. 아마도 우리의 역사교육은 학습자가 시간의 흐름 속에서 펼쳐진 다양한 인간의 경험을 관찰하고, 개인과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자신에 대하여 더 많은 이해를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개방성이 요구될 것이다. 더구나 오늘날 한국사회의 구성원이 스스로의 존재와 정체성을 이성적으로 질문한다면, 한반도 공간 내에서 전개되고 축적된 역사경험만으로 해명되지 못하는 요소가 허다하게 있음을 발견하게 되리라. 여기에서 인식주체의 중심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인식의 시야를 인간 삶의 다층면으로, 또 세계사적 범위로 넓혀야 할 필요가 제기된다. 역사교육이 추구하는 가치목표는 본질적으로 역사학 자체의 목적이 그러하듯이 어느 개인, 나아가 국가권력과 사회의 특정세력이 독점적으로 제시할 수 없을 것이다. 결국 이것은 오늘날의 역사학이 경험적으로 터득한 ‘의사소통적 진리’의 원리에 입각하여, 사회구성원의 논의와 의사소통 속에서 지속적으로 형성해가고 다듬어가는 수밖에 없으리라. 그리고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많은 갈등과 논쟁에서 합의를 도출하기 위한 수고를 각오하는 수밖에 없다. 동시에 학습자가 역사인식과 역사형성의 주체로서의 학습과정에 자발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하는 자료제공(교과서)과 교육방식이 요망된다.

기왕의 우리 역사교육, 역사교과서가 그러하지 못했음은 두말할 것도 없다. 일견 한국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합의할 수 있는 ‘민족정체성’을 목표가치로서 강조하는 국사교육의 정신을 가시화한 국정교과서의 내용편성과 서술은, 크고 작은 오류와 함께—아마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모든 역사서술이 견해차이와 함께, 다소의 오류를 포함하는 것도 불가피할 것이다—전체적으로 결국 대한민국적 국가주의를 선전·강요하고 있다는 평을 받고 있다.13 이러한 평도 수긍이 가지만 더욱 의미심장한 것은 현장에서의 교육실패이다. 혼란스럽게 편성된 교과과정(제도적 윤곽), 지루하고 재미없는 교육내용과 방법에 대해 고객(학생)들은 과목에 대한 염증과 무관심, 교육목표가 제시하고 기대하는 정반대의 태도와 행위로 보답하고 있는 것이다.14 아마도 다른 종류의 목표를 강조한다 해도, 결국 역사교육에서 다루어지는 내용의 편성과 실천방법이 합당하게 개선되지 않으면 실효를 거두기 어려울 것이다. 이 문제의 개선을 위해서는 역사학 및 역사업 종사자 모두가 오랫동안 진지하게 고민해야 하겠지만, 무엇보다 이 고민이 생산적으로 이루어지고 실천될 수 있는 제도적 윤곽, 특히 교육과정의 합리적 정착이 시급하다.

 

 

4. 제도적 윤곽과 역사교과서

 

역사교육·역사교과서는 모든 교과가 그러하듯이 국가가 구성하는 교육체제의 제도적 윤곽에 매우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다. 역사교과서를 파악할 때, 교육체제를 운영하는 제도와 정신의 가시적인 산물인 교과서 한둘이 문제가 아니라 배경이 되는 제도적 윤곽─학제, 전체 교과목편성, 시험제도, 교사양성체제, 교과서 편찬제도 등등─을 아울러 고려해야 함은 이러한 까닭에서이다.

해방 이후 한국 사회의 교육체제를 지도하는 흐름은 소위 미국식 자유민주주의와 실용주의를 표방하긴 하였으나, 그 내면에서는 일제식의 황국신민 교육의 관성이 여전히 작용했다. 교육체제의 운영도, 오늘날까지 겉으로는 자유민주주의 선진국을 모범으로 한다고 하면서 속으로는 구식의 국가주의 이데올로기와 통제방식을 관행하는 형국이었음을 우리 사회의 성원 모두 피부로 느끼고 있다. 이런 조건에서 역사교육의 목표와 내용이 혼란을 일으킴은 너무도 당연하겠다. 건국 당시부터 대한민국의 교육체제는 국민의 역사교육을 위하여 ‘역사과’라고 하는 교과목상의 합당한 자리매김을 하지 않았다. ‘사회생활과’라는 어정쩡한 명칭 아래 지리·일반사회와 병렬로 편제하여 ‘민주시민의 양성’ ‘민주주의적 가치의 함양’을 주된 목표의 하나로 내걸어왔으나 그 내용과 실천방식, 교육의 성과가 기대에 미치지 못했음은 우리의 경험이 충분히 입증하고도 남는다. 애초부터 우리의 역사교육과정은 국권상실로 강요된 자기정체성 상실을 회복하기 위한 중심의 설정 즉 국사와, 이를 바탕으로 하여 세계대세를 바로 인식하고 전망하기 위한 방도 즉 세계사를 역사학이라는 모학문과 순조롭게 조화할 수 있는 ‘역사’교과로 올바로 세워놓지를 못했다. 이 관성은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다. 그리하여 역사교육과정은 전체적인 교과목 편성과 관련하여 그 위치와 정체성이 소멸될 정도로 부실하고 파편화되어 있다.

1974년 박정희정권 때의 제3차 교육과정부터 소위 ‘국사’는 독립교과로 편성되었고, 세계사는 여전히 사회과에 속해 있다. 자기 인식(국사)과 타자 인식(세계사)이 조화를 이루고 진정한 정체성의 확립으로 이어지는 계기는 마련되지 못했다. 올해부터 시행되는 7차 교육과정에서도 세계사에 해당하는 내용은 정치·경제·지리의 내용요소와 함께 인간과 환경, 인간과 자연, 인간과 시간이라는 그럴듯한 개념어로 포장한 통합사회과의 한 영역에 속해 있다. 통합사회과 운영에 따른 부작용, 특히 학생들이 겪는 혼란, 부실한 교사양성과정에 따른 문제는 오래 전부터 지적되어왔다.15 더구나 7차 교육과정 전반에 대해서는 교과목 편성, 운영방식 등 모든 부문에 대해서 교사개인, 단체, 각 교과영역의 전문가들이 여러차례 문제제기를 해왔으나, 교육부는 별다른 대책 없이 익숙한 밀어붙이기와 결정적인 싯점에서의 애매모호한 발뺌으로 일관할 태세다.16

7차 교육과정에서는 8,9학년(중학교 2,3학년)에서 한국사를 통사체제로 이수하고, 이어 10학년(고교 1학년)에서 한국의 전근대사를 분류사체제로 학습한 후, 11,12학년(고교 2,3학년)에서 한국 근·현대사를 선택과목으로 이수하도록 규정되어 있다. 요컨대 자국민의 역사도 기이하게 토막쳐서 앞부분은 모두 배우고, 뒷부분 그것도 ‘국민’으로서 시민으로서 더 깊이 이해할 필요가 있는 근·현대사는 배우고 싶으면 배우고 말고 싶으면 말라는 식으로 팽개쳐져 있다.17 중학과정에서 예의 통합사회과 체제로 편성된 공통사회라는 교과목 속에 실종된 ‘세계사’ 과목은 고교과정 마지막에 해당하는 11,12학년 단계에서 비로소 선택과목으로 이수하도록 되어 있다. 즉 한국 근·현대사와 세계사는 같은 선택군에서 경합하도록 구성되어 있는 것이다. 대한민국 교육부와 소위 세계화 시대의 새로운 교육을 외치는 선진국 좋아하는 교육개혁론자들이 생각하는 역사는 ‘기형적으로 토막난 국사’와 ‘배워도 좋고 안 배워도 좋은 세계사’밖에 없는 것이다. 반대로 이들이 모범준거로 자주 들먹이는 미국의 교육과정은 1994년부터 1996년 사이에 완성된 국민교육 표준지침(National Standards)을 통해 5학년부터 12학년까지 미국사와 세계사를 이수하도록 선명한 기준을 세워놓고 있는 판국이다.

이와같이 부실하고 모호한 역사교육과정의 편성과 함께, 대한민국 정부는 민주주의 정체를 표방하는 나라에서 상상하기 어려운 국사교과서의 국정체제를 고집하고 있다. 국사교과서의 국정화는 1974년 3차 교육과정 시기부터 지금까지 약 30년에 가까운 기간 동안 지속되었다. 일견 역사, 그것도 국사교육을 강화한다는 미명 아래 시행된 단일 국정교과서 체제는 사실상 관심있는 연구자 및 교사들 다수가 역사교과서의 연구와 편찬을 통해 역사교육에 참여하거나 관심 가질 기회를 차단해버린 셈이었다. 이 점이 매우 중요하다. 일본의 역사교과서로 쌍방간에 논쟁이 격화될 때, 문제의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과 이 단체를 지원하는 것으로 알려진 『산께이신문』의 보도, 일본 문부성 모두 우리네 역사교과서의 ‘국정체제’와 ‘자유롭고 다양한 역사파악을 보장하는 그들의 검인정제도’를 대조시키고 있었음을 상기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일본 역사교과서의 소위 ‘몰염치한 사실왜곡’에 못지않게 우리의 거룩한 ‘국정교과서’도 그 배경에는 권위주의적 국가권력 또는 그러한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일부 세력이 국민의 집단기억을 통제하려고 하는 낙후한 역사문화가 자리잡고 있다. 그런데 7차 교육과정에서는 10학년까지의 국사교과서는 여전히 국정을 고집하고 11,12학년의 한국 근·현대사는 소위 2종 검인정체제로 개방되는 어리둥절한 모양으로 짜여졌다.

폐쇄적인 교과서제도와 그 편찬을 주관하는 정부의 경향성은 익히 알려져 있는 터이므로, 주관기관이 교과서 편찬 준거안의 마련에서부터 집필과정에 역사학자들의 참여를 환영하고 요청해도 학계는 자주 미온적인 반응을 보여왔다. 그리고 자의반 타의반 교과서 집필에 참여하는 인사들조차도 결과물에 대해서 기꺼이 책임지고 싶은 마음은 없고, 학계에서는 교과서 내용을 비판하더라도 집필자(들)로 인하여 문제가 야기됐다고 생각하지 않는 분위기이다.18 2종 검인정체제에서도 미세한 항목까지 규정하고 있는 교과서 ‘편찬준거안’이 집필진의 창의적인 재량을 심각하게 제약하기 때문에 교과서에 대한 학계 및 일선교사의 불신과 부정적 인식이 불식되기 어려운 실정이고, 당분간 이런 악순환의 고리는 연속될 전망이다.

이와같은 교육과정 편성, 교과내용의 구성을 볼 때, ‘열린 민족주의’ ‘세계사적 보편성 속의 한국사’는 널리 지적되어오듯이 모습이 허름하고 애매하기 짝이 없다. 요컨대 제도와 공식적 교육매체(교과서)로 실현된 대한민국의 역사교육은 무엇을 하겠다는 것인지 알 수가 없고, 좀더 나아가 국민의 사고를 안팎으로 차단하는 우민화정책의 일환이라는 비난을 받아도 할말이 없는 지경에 처해 있다. 수학능력 고사를 비롯한 각종의 시험제도도 이러한 관성을 부채질하고 있다.

 

 

5. 맺음말

 

일본의 역사교과서가 야기한 문제는 우리의 역사교육·역사교과서를 반성하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필자의 눈에는 일본과 한국의 역사교육 및 역사교과서가 모두 국가권력의 간섭과 낙후한 역사문화의 지배를 받고 있음이 발견된다. 우리네 역사교육의 목표로서 인간의 보편적인 가치, 역사적 사고와 의식을 좀더 부각시켜야 한다는 의견도 개진되었지만,19 이를 위해서는 역사학·역사업 종사자와 학습자의 자발적 분발과 참여가 넓어질 수 있는 합당한 제도적 윤곽의 마련이 가장 시급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학생의 자발적 참여를 전제하고 역사적 사고와 의식의 고양에 역점을 두는 유럽의 역사교과서들은 역사적 상황을 직접 설명하는 서술을 가급적 줄이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보는 관점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중요한 부분은 학습자가 소화할 수 있도록 원사료를 적절하게 가공하여 제시하고, 이에 대한 질문을 연결하여 학습자가 자립적인 해석을 시도하도록 구성되어 있다. 이와같은 교과서 편찬방식, 교과운영이 가능한 것은 우선 그럴 만한 제도적 배려가 있기 때문이며, 더욱 중요하게는 역사가 무엇이며 어떻게 탐구되고 전달되는 것인가 하는 점에서 우리와는 판이한 성질의 역사문화가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필자가 비교해본 한국과 일본의 역사교과서는 교과서의 판형, 분량, 내용구성 방식, 서술방식 등 모든 면에서 유럽의 그것에 비해 매우 빈곤하게 편제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더욱 흥미롭게도 국정체제인 우리의 국사교과서나 검인정체제인 일본의 역사교과서 모두 현재까지는 판형·분량을 비롯한 외관에서부터, 자료의 제시와 서술방식에 이르기까지, 학습자의 의문과 탐구가 개입될 여지가 없는 강압적인 서술구조가 지배하고 있다. 학생들은 교과서가 담고 있는 정보에 의문을 제기하거나, 비판하거나, 독자적 사고로 재구성할 필요가 없이 착실히 머릿속으로 위치변경만 하면 되도록 구성되어 있다. 다음 세대의 미래를 위해 가치가 의문스러운 권위주의적인 국가와 사회의 역사문화, 집단기억 관리방식이 실현되어 있는 역사교과서·역사교육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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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중앙일보』 2002.1.21, 14면.
  2. ‘일본의 역사교과서 문제와 네오내셔널리즘의 동향’, 한국사연구회 주관, 역사학 관련 15개 학회 공동주최 심포지엄, 2001.3.19.
  3. 이 점에 대해서는 『당대비평』 2001년 가을호에서 수록된 특집과 일련의 논고, 그리고 『역사비평』 2001년 가을호의 집중토론 「한국역사학·역사교육의 쟁점」을 비롯한 일련의 논고가 참조된다.
  4. Wolfgang Hartwig, Geschichtskultur und Wissenschaft (München: dtv 1990) 8〜9면.
  5. 잘 알려진 바와 같이 ‘nation/nationalism’은 ‘국민·국민주의’ 혹은 ‘민족·민족주의’로 혼용 번역되고 있다. 이 글에서는 서구적 상황을 언급할 때, 가급적 ‘국민’이라는 표기를 사용하려고 하지만 문맥의 뉘앙스에 따라 ‘국민·민족’과 같은 형태의 표기도 사용한다.
  6. 19세기 유럽역사학에 내재한 민족주의 또는 국민주의적 바이어스(성향)를 집중적으로 검토한 최근의 연구성과로 다음의 논문집을 참조할 수 있는데, 이 논문집에서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중반까지 영국·프랑스·독일·이딸리아의 역사학이 이런 점에서 ‘유럽적 공통성’을 지니고 있었음이 논의되고 있다. Stefan Berger, Mark Donovan and Kevin Passmore (eds.), Writing National Histories: Western Europe since 1800 (London: Routledge 1999).
  7. Bodo von Borries, “Methods and Aims of Teaching History in Europe: A Report on Youth and History,” Peter N. Stearns et al. (eds.), Knowing, Teaching, and Learning History: National and International Perspectives (New York and London: New York University Press 2000).
  8. 집중토론 「한국역사학·역사교육의 쟁점」, 『역사비평』 2001년 가을호 66〜68면의 지수걸 교수의 발언.
  9. 이 연구소의 활동과 성과에 대해서는 아직 충분하지는 않지만 일단 다음의 연구를 참고할 수 있다.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엮음 『21세기 역사교육과 역사교과서─한·일 역사교과서 문제해결의 새로운 대안』, 오름 1998.
  10. 대개의 경우 유럽의 역사교과과정 및 교과서는 우리나 일본에 친숙한 ‘자국사’ 및 ‘세계사’ 식으로 분리되어 있지 않고 하나의 ‘역사과’로 편성되어, 지구촌 전체의 역사를 단일한 역사교과 내에서 포괄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그러나 인류 전체의 역사내용을 균형있게 배열하고 조화를 이루는 과업은 매우 까다로운 난제로서, 충분히 만족스러운 해결책을 마련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11. Stefan Berger, “Historians and the search for national identity in the reunified Germany,” Stefan Berger et al. (eds.), 앞의 책.
  12. 하종문 「일본 역사교과서 왜곡의 바로보기」, 『한국근현대사연구』 18, 한국근현대사연구회 2001.
  13. 국사교과서의 내용분석에 관한 논고는 오래 전부터 허다하게 발표되었다. 최근의 것으로 서중석 「국가교과서 현대사 서술, 문제 많다」, 『역사비평』 2001년 가을호 참조.
  14. 최근에 이 문제를 광범한 경험자료 채집에 의거하여 심도있게 정리한 논고로 다음이 참조된다. 유승렬 「21세기 중등학교 역사교육의 방향 정립을 위한 제언」, 한국역사연구회 엮음 『20세기의 역사학, 21세기의 역사학』, 역사비평사 2000.
  15. 같은 글 참조.
  16. 이 문제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어느 현장교사의 보고를 손쉽게 참고할 수 있다. 최정윤 「요란한 빈 수레」, 『창작과비평』 2001년 가을호.
  17. 이 글을 쓰고 있는 싯점에서, 10학년에 이수하는 국사교과과정의 불균형성이 지적되어 황급하게 근·현대사 부분을 끼워넣기로 했다는 소문이 들린다.
  18. 서중석, 앞의 글
  19. 집중토론 「한국역사학·역사교육의 쟁점, 『역사비평』 2001년 가을호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