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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이병천 李柄天
1956년 전주 출생. 1982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소설 당선. 소설집 『사냥』 『모래내 모래톱』 『홀리데이』, 장편 『저기 저 까마귀떼』 등이 있음. 2000esprit@hanmail.net
개똥의 쓸모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는 속담이 있다. 이 속담에는 적어도 두 가지 사실이 숨어 있다. 하나는 원래 말하고자 했던 대로 주변에 지천으로 널린 것조차 정작 필요할 때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는 세상의 이치, 그리고 또하나는 어떤 질병에도 개똥은 결코 약으로 쓰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쓸데가 없다 싶으면 이를 두고 “개방귀 같다”는 속담을 들먹이기도 하거니와 개똥이나 개방귀의 쓸모라고는 전혀 다른 얘기를 하기 위해 그 이름만 잠시 빌려쓰는 경우가 아니면 아예 없는 것이다. 그러니 ‘개’자 항렬이 붙은 족속치고 번듯한 것들이 있을 리도 없다. 개살구, 개떡, 개꿈, 개죽음, 개코망신, 개소리괴소리, 개씨바리, 개좆불, 개뿔, 개다리참봉, 개발코……
내 자신이 개를 싫어한다거나 무서워해서 초장부터 이렇듯 개에 관련된 개소리괴소리를 늘어놓는 것이냐고? 천만에, 그게 아니다. 내 동생의 어릴적 별명이 ‘개터럭’이었던 때문이다. 개터럭도 좀전에 열거한 족속보다 더하면 더했지 모자라거나 떨어지는 부류는 아니다. 엄동설한에 아무리 추워도 개가죽이나 개털로는 옷을 지어입지 않는 우리 민족이다. 개터럭은 그 개털보다 어감에서부터 질이 더 떨어지는 것이니 말해 무엇하랴. 그것들에 무슨 언감생심 질(質)이란 게 따로 있을 리도 만무하지만.
어린 동생을 처음으로 개터럭, 개털이라고 부른 사람은 할아버지였다. 마을에 엿장수가 나타나자 동생은 엿목판이 가득 실린 리어카를 졸졸 따라다녔다. 생각만 해도 입안에 침이 고이는 엿도 엿이지만 저절로 흥겨운 가락을 내는 듯한 가위에 관심이 쏠린 탓이었다.
“아저씨, 나도 가위질 한번 해보면 안돼요?”
“늬가 엿장수냐?”
“그럼요. 나도 커서 엿장수를 헐 건디.”
그렇게 해서 엿가위를 받아든 동생은 신이 났다. 엿장수를 따라다니면서 어깨 너머로 가위질을 익혔는지 가위를 넘겨받자마자 양손을 손잡이에 찔러넣고 두드려대는 솜씨도 보통이 아니었다.
“얘야, 소리도 질러라. 빈 병이나 머리크락, 고무신짝 떨어진 거……”
“둘이 먹다가 셋이 죽어도 모르는 맛난 엿이 왔어요. 에, 할머니 어머니 누님 동생이 머리 빗다가 빠져나온 머리크락도 받고, 깨진 무쇠솥에 우그러진 양은냄비 동지섣달 북풍한설에 짝 잃은 기러기마냥 외톨이로 남은 고무신 한짝도 다 받습니다요. 소가 웃다가 하품허는 소리나 개가 방귀뀌는 소리만 말고 손에 잽히는 것들 어서 들고 엿으로 바꿔 가시오. 깨엿도 있고 콩엿도 있고 꿀엿, 찹쌀엿……”
“늬가 아주 도가 텄구나. 풍월도 그 정도면 됐다.”
지금처럼 녹음기를 육장 틀어대는 시절도 아니어서 엿장수가 목을 좀 쉬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동생은 동생대로 부스러기 엿토막을 당당하게 얻어먹는 재미로 신이 났을 것이다. 그러다가 녀석이 새로운 제안을 했다.
“아저씨, 이 판에는 리어카를 내가 끌게요.”
“늬가 무신 심이 있다고?”
“나도 리어카는 많이 끌어봤어요.”
“거 참! 딴은 그렇구나. 엿장수를 헐람사 리어카도 끌어야겄지.”
비록 자기가 다 먹을 수 있는 건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 맛있는 것들을 한번쯤은 직접 이고 지면서 몸으로 나르고 싶었으리라. 배고픈 시절에는 그랬다. 남의 엿목판을 대신 지고 가기만 하더라도 배가 반쯤은 불렀다.
“리어카는 심으로만 끄는 거이 아니다. 그냥 지 달린 발통으로 저절로 굴러가도록 놔두고 너는 소를 몰드끼 이랴 저랴, 갈 길만 잡아주면 되는 거여.”
“아, 예.”
말인즉슨 그렇다는 것이지 어린애한테는 요령부득의 주문일 수도 있었다. 소든지 리어카든지 그걸 평생 끌어온 사람들끼리 겨우 통할 얘기였는지도 모른다. 동생은 그 말을 듣자마자 그나마 젖 먹던 힘까지 발휘하여 버티던 손목의 힘을 슬쩍 풀어버리고 말았던 모양인데 그 순간 리어카는 정말이지 살아 있는 소처럼 길가를 벗어나더니 냇물 쪽으로 줄달음쳤다.
“저, 저런!”
순식간의 일이었다. 엿장수의 탄식이 채 끝나기도 전에 리어카는 냇가 바위에 부딪혀 뒤집히면서 엿목판을 물속으로 패대기쳤다. 엿 위에 뿌려둔 밀가루가 물에 풀어지면서 금세 하얗게 흘러갔다. 놀라서 흩어졌던 송사리떼가 고물거리며 모여들었다. 밀가루옷이 벗겨진 채 물속에 잠긴 엿가락들은 제 본래 색깔로 돌아와 노랗게 물살에 흔들리고 있었다.
“아이고오, 이걸 어쩐다냐?”
엿장수가 사색이 돼서 목판을 들어올리고 이리저리 튀어나간 엿토막들을 이삭 줍듯 건졌다. 그렇지만 이미 늦어버렸다. 한번 물에 젖자마자 그 색깔도 색깔이지만 통통하던 엿은 실망스러울 만큼 홀쭉하게 몸피가 줄어들었던 것이다. 게다가 서로 엉겨붙기 시작해서 엿꼴이 영 말이 아니었다.
동생은 그것을 보고 있다가 겁이 났는지 엿장수가 엿토막을 주워모으는 데 열중한 틈을 타서 잽싸게 줄행랑을 놓아버렸다. 누가 보더라도 동생 탓만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엿장수가 동생에게 책임추궁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데 동생이 도망치는 바람에 일이 엉뚱하게 풀리고 말았다.
동네 조무래기들에게 묻고 물어서 우리집을 찾아온 엿장수는 때마침 집안에 있던 할아버지에게 일의 자초지종을 고하고 손자를 너무 야단치지 말아달라고 덧붙였다. 야단치지 말라고 할 것 같으면 애초에 발설할 필요도 없다. 그런데 엿장수로서는 손해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관대한 처분이 있기를 기대한 모양이었다. 할아버지는 상대의 그런 의중을 미리 간파한 게 틀림없었다. 그분의 눈꼬리가 위로 솟아올랐다.
“머셔? 당신이 머시간디 넘의 손자를 이래라 저래라 허는 거셔? 그것도 엿장시 맘이여?”
“얼씬네, 지가 언지 이래라 저래라 했습니까? 이렇게도 저렇게도 허지 마시라고 말씸디렸지요.”
“그게 말이여 막걸리여, 시방? 그러면은, 이렇게도 저렇게도 허지 말라는 건 간섭이 아녀?”
“허어, 이거 참!”
“이 작자가 시방 여그가 어디라고 L바닥을 함부로 끌끌 차고 놀리는 거셔, 엉?”
“지가 언지 혀를 찼다는 겁니까? 얼씬네도 솔찮이 부앙부앙 허시네요.”
“머셔, 부앙?”
물속에 처박혔던 리어카처럼, 누군가 한사람은 궤도를 자꾸 이탈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어른들의 다툼이란 늘 그 모양이었다. 엿값 보상문제는 뒷전에 두고 우선은 서로 협상에 유리한 기선을 잡기 위해 말꼬리도 잡아보고 억지도 부려보는 것이다.
이렇듯 자꾸 얽히고 꼬이기만 하는 사태를 해결한 건 할머니였다. 읍내에 나가 새로 들기름을 짜오던 할머니는 얘기의 전말을 듣고 그냥 말없이 웃었다. 할머니의 웃음에도, 그리고 치마폭에도 들기름의 고소한 냄새가 배어났다.
“이리 쪼깨 와보시우. 저 냥반은 원체 승질머리가 급허신 분잉게 상관을 말고.”
“……?”
할머니는 쌀 서너 됫박과 함께 콩도 몇줌을 싸서 엿장수에게 내밀었다. 그러고는 양이 적다는 뜻인지 난감한 표정으로 서 있는 그에게 당신이 방금 짜온 들기름도 병에 덜어주는 것이었다. 엿장수는 몇번씩 허리를 굽실거렸고 할아버지에게도 죽을 죄를 졌다며 거듭 사과를 하고 돌아갔다. 녹아서 엉겨붙은 엿가락들을 고스란히 우리집에 남기고 떠났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그날 저녁 밥상머리에는 새로 짠 들기름이 놓여 할아버지를 제외하고는 언제나처럼 모두가 밥을 비빌 것이었다. 그 자리에서 할아버지가 동생을 불러세웠다.
“개터럭 같은 놈!”
처음에 나는 그게 무슨 뜻인지를 알 수 없었다. 웬 난데없는 개털인지, 엿가락에도 들기름에도 그렇다고 비빔밥에도 얼토당토않은 것이었다.
“차제에 엿값을 다 갚을라먼, 어디든 나갔다가 들어올 때마다 기양 손바닥을 빳빳이 편 채로 집구석에 들어설 생각은 아예 말어라. 밥을 굶길 팅게! 허다 못허먼 땔감으로 쓸 나뭇가쟁이 하나라도 주워들고 와야 쓴다. 알었냐?”
“예.”
할머니가 동생의 손을 잡아 자리에 앉혔다. 뭐가 불만인지 동생은 철푸덕 소리나게 방바닥에 주저앉았고 그 바람에 들기름 냄새가 또 요동쳤다.
그뒤로 동생은 할아버지로부터 두어 차례는 더 그 말을 들었을 것이다. 나를 포함한 가족이야 물론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문제는 삼베바지에 방귀 새듯 소리소문 없이 동네방네 그 말이 퍼져서 별명으로 점차 굳어져버렸다는 데 있었다. 세상에 그 많고 흔한 별명들을 다 두고 하필 개터럭이라니!
동생이 저지른 일들을 떠올려보면 확실히 엉뚱하기 그지없었던 건 사실이다. 꽹과리 사건만 해도 그렇고 내 교과서를 비 퍼붓는 마당에 던져버린 일도 그랬다.
난데없이 풍장을 치겠다고 마을창고에 침입한 것까지는 좋았다. 늘 어른들 차지만 될 뿐이니까 아이들끼리 밤에 모여서 풍물을 배우겠다고 나선 짓을 탓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밤중에 갑자기 울려퍼진 풍장소리 때문에 혹시 저 멀리 바다 건너 왜구(倭寇)가 노략질을 하러 들어온 건 아닌지, 도깨비들이 떼로 몰려와 느닷없는 생 난리굿을 벌이는 건 아닌지 마을사람들이 한순간 놀라 자빠진 일은 별일이 아니랄 수도 있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어른들이 쫓아오자 녀석들은 아예 동네 고샅길로 내빼고 다니면서 꽹과리며 북, 징 등을 마구 난타해댔다. 엇박자든 섞박자든, 자기들끼리 두드려대는 소리에 도취돼 무동(舞童)들처럼 잔뜩 신명이 오른 게 분명했다. 그런데 다른 아이들이 어른들에게 멱살을 잡혀 끌려나온 뒤에도 꽹과리를 든 상쇠 녀석은 누군지 좀체 잡히지 않았다. 녀석은 밤그늘에 몰래 숨어 있다가 어른들이 지나간 뒷전에 대고 약 올리듯 쇠를 쳐대기도 하고 어느 집 울바자를 뚫다가 된장독 몇개를 박살내기도 했다. 녀석은 결국 그 집에서 잡혔다. 된장독 주인은 그가 누군지 확인해보기도 전에 뺨부터 한대 철썩 내갈겼다. 아이는 깨진 된장독 사이로 나가떨어져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도망다니느라 숨이 가빠진 것인지 뺨을 얻어맞은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누군가가 그애 얼굴에 등불을 비췄다.
“아니, 이놈! 이장님 둘째 그, 개터럭 아녀?”
“머셔? 그려, 그럴 줄 알었지. 갸말고는 우리 동네서 이럴 만한 인재는 없다 싶었지.”
“날이 가뭉게 비오라고 날굿을 허고 댕겼는가만. 앙 그러냐?”
“누구 아들인가는 몰라도 초저녁에 밥이고 시루고 달팍 엎었다. 참말로 싸가지가 뇌랗다, 뇌랴.”
“뭔 소리여? 마을에 광대 났응게로 되야지도 잡고 술도 빚어서 잔치를 해야 쓰겄고마는?”
“가만있자, 야가 광대가 아니라 참말로 무당들맹키로 뭔 조상신이라도 혹시 내린 것 아니다냐?”
뺨을 싸쥔 동생을 사이에 두고 한동안 말이 분분할 적에 이윽고 아버지가 그 자리에 나타났다. 아버지는 동생을 보자 양쪽 손에 고무신을 벗어들고는 침을 퉤액 뱉었다. 신짝에 묻은 진창의 더러움도 모자라서 거기다 침까지 뱉는 것인지, 아니면 과장을 섞어 멈칫하는 사이에 누가 좀 말려달라는 주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아버지라면 능히 후자 쪽일 수도 있었다. 아닌게아니라 먼 친척뻘 되는 아저씨 하나가 아버지의 손목을 꽉 붙들었다.
“벌써 귀싸대기를 한대 되게 맞어놔서 장독이 올랐겄소. 아예 자식새끼를 잡을 생각이 아니먼 손때는 더 묻히지 말아야 쓰겄소.”
“이거 놓게. 내 저것을 이 판에 아조 요절을 낸 다음에 뼉다구까장 추려내서 오도독오도독 씹어삼켜야 쓰겄응게. 그러고도 모잘라서 분이 안 풀리거든 내 손으로 피떡을 빚고 직접 육젓도 담근 다음에는 설(舌)을 뽑아 전을 붙여갖고 가가호호 맛뵈기로 다 돌릴 생각이네.”
“아따 이장님, 우리 아직 배곯았다고 환장까지 헌 적은 없소. 그렁게로 애 잡을 생각일랑 접어두고 집구석에 메칠만 처박아두고 쪼깨 타이르기나 허쇼.”
아버지가 동생의 귓불을 잡아끌었다. 우악스럽게 사로잡힌 산토끼처럼 질질 끌려가면서도 동생은 울지 않았다. 그런데 집 앞 골목에 이르자 아버지는 귓불 잡은 손을 슬그머니 놓아주었다. 그걸로 끝이었다. 대신 할아버지는 그 밤에도 개터럭 같은 놈이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바로 그 다음날은 정말이지 비가 내렸다. 누군가가 말한 것처럼 동생이 이른바 ‘날굿’이라는 걸 한 때문인지도 몰랐다. 학교가 끝나고 돌아온 뒤에 나는 마룻바닥에 엎드려 숙제를 하고 있었고 동생은 무릎을 꿇고 앉아 간밤 일로 벌을 받고 있었다. 동생의 뺨은 손독이 오르지 않도록 어머니가 발라준 된장으로 아주 우스꽝스러워 보였다. 나는 그 모습을 훔쳐보면서 킥킥대고 혼자 웃었다.
“왜 웃어?”
“안 웃었어.”
“안 웃었다고? 그먼 왜 입을 쪼개? 공부 잘헌다고 거짓말을 해도 괜찮어?”
동생이 방안을 힐끗 살피더니 내게로 걸어왔다. 그리고 내 책을 휙 낚아채더니 진창이 된 마당에 그대로 던져버렸다. 나는 놀랄 새도 없이 맨발로 뛰어내려가 책을 집어들었다.
“개터럭 같은 놈!”
급기야 내 입에서도 그 말이 새어나왔다.
양복점 미싱보조 서너달, 중국집 배달 두달, 또 철공소와 정비공장의 기름밥만 여섯달, 사진관 심부름꾼으로 일년, 인조가죽공장 생활 반년, 목재소 잡역부로 또 일년 여!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인근 도시로 진출했던 동생의 행적이다. 일자리 하나 얻기 위해 그 무렵 나이 어리고 배운 것 없이 도시로 뛰어든 가난한 시골아이들이 공통적으로 거쳐간 길이 그랬다. 동생도 어머니를 아직 엄마라고 부르던 나이에 그 길을 갔다.
동생이 학교 대신 간 길은 가족과 본인 스스로의 묵계로 이루어졌다. 우리집은 둘은커녕 나 하나도 가르칠 형편이 아니었다. 그 사실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는 게 바로 동생의 묵계쯤 될 것이다.
“엄마! 양복점서 일하러 와도 된대요.”
“양복점?”
“나중에 내 손으로 식구들 양복 한벌씩 다 맞춰주고, 좋지 뭐.”
“………”
어머니는 더이상 묻지 않았다. 그날 이후 동생은 새벽 버스를 타고 일터로 갔고 나는 그 다음쯤에 오는 버스를 기다려 학교에 가곤 했다. 어쩌다 막차를 타고 돌아올 때면 일찌감치 뒷좌석 하나를 차지한 동생이 그 버스의 엔진소리처럼 드르렁드르렁 코 고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렇게 동무도 없이 홀로 졸다보면 동생은 내려야 할 곳을 그냥 지나치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
어머니가 내게 처음으로 크게 실망을 하신 건 바로 그 일 때문이었다. 졸던 동생이 스스로 잘 내리겠지 했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그런데 어머니가 그 밤에 정류장에서 등불 하나를 받쳐들고 우리 형제를 기다리다가 그 꼴을 다 목격한 것이었다. 나는 동생을 보지 못했다고 거짓말을 했지만 어머니는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달빛조차 없는 그믐밤이었다.
“늬 동생이 부끄러운 거냐? 참으로 그런 것이냐?”
나는 대꾸하지 못했다. 어머니는 들고 있던 호롱불을 땅에 떨어뜨렸다. 등은 기우뚱거리다가 용케 제자리에 바로 섰다. 찌르륵 찌르륵! 길가 풀숲에서는 풀벌레 한마리가 내 대답을 강요하며 울고 있었다. 그 사이로 어머니의 한숨소리가 이어졌다. 그런데 한숨이 고르지 않았다. 어머니는 숨을 죽이며 흐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할 수 없이 나는 가방을 내려놓는 대신 등불을 집어들었다. 그리고 버스가 달려간 방향으로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버스 종점이 그리 멀지는 않았다. 멀더라도 상관은 없었다. 걷다보면 길 어딘가에서 동생을 만날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동생이 그 버스를 그대로 타고 오면 길이 서로 어긋날 수는 있었다. 그렇더라도 불만스럽게 여길 일은 아니었다. 어쩌면 동생보다 늦게 귀가함으로써 내 죄에 대해 어느정도 보상을 받을 수도 있겠기 때문이었다.
“거기, 엄마여?”
몇번 그런 일들이 있었던 때문인지 동생은 내가 들고 간 등불을 보며 반가움과 울음이 반반 섞인 목소리를 냈다. 나도 덩달아 눈물이 솟아났다.
“나여.”
“아, 형?”
신작로를 따라 우리는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등불이 발밑을 비추고는 있었지만 자갈을 깔아놓은 길이라서 걸음이 편치는 않았다. 우리는 말없이 걸었다.
동생을 버스에서 다시 만난다면 아는 체를 하거나 잠을 깨워줄 수도 있을까? 내릴 곳을 지나쳐버린 동생을 위해 등불을 들고 마중을 나갈 수도 있겠지만 그것만큼은 난 자신이 없었다. 그렇다면 막차는 타지 말아야 한다, 적어도 당분간은.
“양복점은 안되겄어. 주인이 싸가지가 없어!”
침을 찍 뱉으며 동생은 묻지도 않은 말을 꺼냈다. 어머니가 우리를 기다리는 자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나는 동생에게 호감을 보이기 위해 무슨 말이든 해야 했다.
“그럼, 어떻게 하려고?”
“중국집을 알아놨거덩. 집에서 왔다갔다 안허고 거그 빈방에서 자도 된당게로 괜찮지?”
“그, 글쎄.”
어머니는 거기 있지 않았다. 내 책가방도 거기 없었다. 우리는 개가 짖어대는 마을 고샅길을 터벅터벅 걸었다. 오래 전, 꽹과리를 쳐대다가 붙잡혔던 집의 울타리 앞에 이르자 동생은 멋들어지게 휘파람을 불기 시작했다. 밤에 휘파람을 불면 도둑으로 오인받는다고 해서 금기로 되어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동생은 이미 아이가 아닌 듯이 보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소리가 참으로 듣기 좋았다. 동생은 우리집 사립문을 들어설 때까지 휘파람을 불었다.
“우리 강아지 새끼들 오능가?”
“예, 할머니.”
“하이고, 동기간에 우애도 참말 좋지.”
할머니가 우리를 맞이했다. 어머니는 그날 밤부터 머리를 싸매고 자리에 누워버렸다. 병인(病因)이 무엇인지 식구들은 아무도 알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알고도 남았다. 그리고 알면서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다.
동생은 그후 집을 떠나서 객지를 전전했기 때문에 글자 뜻 그대로의 식구(食口)라는 범주에서는 영영 멀어지고 말았다. 자주 만나볼 수도 없었다. 동생이 시내버스 차장을 하고 있을 때만은 사정이 조금 달랐다. 운이 좋으면 학교를 오가다 더러 동생을 만날 수도 있었다. 동생은 아주 힘차게 ‘오라잇’과 ‘스돕’을 외치곤 했다. 물론 버스문에 기대어 꾸벅꾸벅 졸 때가 많았다. 내가 버스에서 내리는 순간이면 동생은 내 책가방 안으로 무엇인가를 재빨리 한움큼씩 떨어뜨리곤 했다. 승객에게 받은 지전과 동전이었다. 운이 좋다는 것은 바로 생각지도 않았던 그 공돈이었다.
개똥이든 개터럭이든, 쓸모가 아주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쯤 되는 것일까? 누군가의 별명이 아닌 실물로서의 그것들이 말이다.
“형, 미안하지만 보증 한번만 더 서줘야겠어.”
동생이 음악이라는 걸 하게 된 것은 한참 뒤의 일이었다. 장마 끝에 줄지어 버섯들이 돋아나듯, 한때 성황을 이루던 ‘음악학원’이 그 시작이었다. 밤이면 밴드를 이끌고 나가서 룸쌀롱이나 호프집을 찾아다니며 손님의 노래에 반주를 입혀주고 낮에는 학원 사무실에 틀어박혀 유행가를 작곡한다고 했다. 돌이켜보면 어릴 때부터 재능을 보인 게 그 분야이기도 했다.
“또 무슨 일 때문인데?”
“노래를 몇곡 만들어봤는데, 약을 좀 발라야겠거든.”
“노래에 무슨 약을 바른다는 거야? 늬 형수에게 지난번 일이 발각돼서 인감도장을 빼앗겼어, 야.”
“걱정 마. 이번엔 틀림없으니까 한목에 다 해결할게.”
할아버지의 고희잔치 때 동생은 드럼이며 전자오르간 등의 음향기기를 마을에 싣고 와 할아버지를 흐뭇하게 해드린 적이 있다. 가족과 친척들이 한데 모여 먹고 시끌벅적하게 노는 게 최고의 잔치라고 여기던 시절이었다. 그 때문에 한때는 개털이라고 구박했어도 동생이 학원을 열 수 있도록 대출보증을 서주신 분이 바로 할아버지였다. 그뒤 웬 고가의 악기를 구입한다고 할 때와 전세방을 얻는다고 할 때는 부모님이 빚보증을 섰고, 급전을 쓰느라고 이자가 커져서 배보다 배꼽이 크다는 하소연을 할 때는 자연스럽게 내 차례가 돼서 내가 보증을 섰다. 그런데 주머닛돈이 쌈짓돈이라는 말이 그런 뜻인지는 모르겠지만 할아버지가 선심을 썼든, 부모님이 마련해주었든 사실은 그게 다 내 빚이기도 했다.
“흐유, 세상에 그 많은 돈들이 뉘 집 돈궤에서 다들 배를 곯고 있길래 우리 같은 사람은 귀경을 좀 허랴 허고 눈을 찢고 찾아봐도 없다냐?”
“어머니, 또 무슨 일 때문에 그러세요?”
“늬 동생 일 말이다. 배우지도 못해 안쓰런 것이 뭐라도 좀 해보겄다고 가랑이가 매양 찢어지는 모냥이다만……”
“이번에는 또 무슨 일이랍디까?”
“그게 아니다. 저번 보증건으로 집안살림이 불에 탄 개껍질 오그라들 듯 허더니 인자는 아예 서까래가 내려앉을 지경이고 느 아부지 등도 다 휘어져서 허는 소리다.”
이자를 갚아주고 나면 뒤에 숨어 있던 원금이 생쥐처럼 다시 새끼를 불렸다. 정말이지 피투성이가 되면서까지 어떻게든 그 어미를 잡아 요절을 내놓고 보면 어느 구석에서 또다른 놈이 새끼를 치고 있었다. 참으로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같았고 눈(雪)으로 우물을 메우겠다는 일 같았다.
“당신, 뭘 믿고 이래요?”
아내가 묻곤 했다. 그 말처럼 적절한 표현도 없었다. 생각해보면 제 앞가림도 못하는 주제에다 뒤돌아보면 기댈 언덕조차 없는 게 바로 내 처지였다. 쥐꼬리 같다는 월급으로는 아무래도 한푼짜리 푸닥거리에 두붓값은 오푼인 격이었다.
“난 이 집 가장일 뿐 아니라 떠나온 그쪽 집 가장이기도 하잖아. 집안의 장손이고 장남인 걸 받아들여야지.”
“글쎄, 그건 알겠지만 도대체 뭘 믿고 그러냐구?”
“뭔가를 꼭 믿어야만 돼?”
“……?”
나로서는 매번 그 억지뿐이었다. 사내들이야 불알 두 쪽을 최후로 믿는다지만 그건 아내로부터 어디 한번 푼돈이라도 받을 수 있다면 나가서 팔아오라는 핀잔 들을 소리였다. 그 무렵 슬그머니 아내가 무서워지기도 했다.
아마도 그 때문이었으리라. 참으로 불알 두 쪽을 믿어볼 요량이었는지도 모른다. 혼자 술 한잔을 마시고 비틀거리며 돌아오다가 나는 호객꾼의 유혹을 못 이기는 척하며 룸쌀롱에 덜컥 따라 들어섰던 것이다. 주량의 앞뒤를 재봐도 거기서 마신 술은 양주 한병이 고작이었을 게 틀림없다. 그런데 화장실을 다녀오겠다며 밖으로 나간 뒤 좀체 돌아오지 않는 아가씨를 기다리다가 얼핏 졸았던 게 화근이었다. 내가 마신 술이 양주 몇병으로 부풀려진데다가 생전 구경해보지도 못한 안주며 화대로 술값은 이미 사태가 나 있었다. 외상이든 할부든 내가 그걸 낼 형편은 못되었다. 그렇지만 아무리 버티고 항의해도 술집 주인녀석은 코방귀도 뀌려고 하지 않았다. 그때 내가 왜 동생에게 전화를 걸 생각을 했는지 알 수 없다.
“형, 꼼짝 말고 거기 그대로 있어. 내가 갈 테니까.”
“늬가 뭘 어떻게 하려고?”
“하여간 술값을 내지 말고, 차라리 한잔 더 들고 있으라구.”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 아니었으면, 처음 입주(入酒)할 때부터 동생의 얼굴이 오락가락한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동생을 만나서 무슨 얘기든 한번 속시원히 들어보고 싶던 차에 술에 취하자마자 우선 그를 찾았을 것이란 얘기다.
동생은 이내 물지게처럼 어깨가 떡벌어진 건장한 사내 셋을 거느리고 나타났다. 처음부터 그를 믿은 건 아니어서 나는 좀 어이가 없기도 하고 사실 웃음도 나왔다.
“형님들께서는 여기 좀 앉아 계시죠.”
어깨 중의 하나가 동생과 나를 방으로 끌었다. 일이 어떻게 될지는 몰라도 혈육이 와 있고 건달들까지 있으니 마음이 놓이기는 했다.
“애들은 잘 지내? 형수님도 안녕하시고?”
동생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형제라고는 해도 남이나 다를 바 없이 살아온 사이였다. 명절에 집에도 잘 나타나지 않는 동생이었다. 그가 묻는 내 아내의 안부는 늘 편치 않았다. 그 아내가 나를 금치산자로까지 취급하고 있으니 동생은 사실 누구보다 먼저 내 안부를 물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그래, 그럭저럭…… 저 사람들은 누구냐?”
“그냥, 아는 애들이야.”
“요즘은 무슨 일을 하는데?”
“뭐, 이것저것.”
묻는 말이나 답변이나 서로 심드렁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세월은 벌써 많이도 흘러갔지만 동생이 내 책을 집어던지고 난 다음날의 서먹함에서 우리는 한치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건 어찌됐든 내 책임이라는 회한이 일었다. 아내는 그게 다 부모 책임이라면서 시부모에게 좀 따져야겠다고 으르렁거리곤 했지만.
“형님들, 나가시죠.”
“됐냐?”
“작은 양주병 하나로 낙착을 봤습니다.”
동생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는 기꺼이 그 술값을 계산했다. 술집 주인은 뭔가 착오가 있었던 모양이라며 내게 사과했다. 그렇다고 비굴한 기색은 결코 아니었다. 한치도 빈틈없이, 그저 세상에 순응하면서 온당하고도 객관적으로 일을 처리하고 있다는 그런 평온한 얼굴빛이었다. 어쨌거나 동생은 그렇게 해서 오래 전부터 내게 졌던 빚의 일부를 껐다.
그건 동생과 나만 아는 비밀이 됐다. 그렇지만 우리 가족이나 집안에서 동생 덕을 봐야 하는 일이 그뒤로 아주 없지는 않았다. 할머니가 교통사고를 당했을 때만 해도 그랬다.
할머니는 버스에서 내리다가 쓰러졌다고 했다. 버스회사측에서는 할머니가 버스에서 완전히 내린 뒤 서 있다가 갑자기 넘어졌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할머니는 당신이 발을 다 내리기도 전에 차가 출발하는 바람에 몸이 뒤틀리며 떨어졌다는 주장을 끝내 굽히지 않았다.
억울하다고 자꾸 눈물을 찍어내는 할머니를 위해 나는 버스회사를 찾아갔다. 그런데 회사측에서는 이미 목격자라는 사람들로부터 자기들에게 유리한 진술을 충분히 받아두고 있었다. 사정이 그렇다는 데야 더이상 따지고 자실 건더기도 없었다. 그렇다고 무어라고 배짱을 부려볼 만한 입장도 아니었다.
할말이 궁색해진 내가 그냥 멍하니 서 있자 회사 상무라는 자가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10만원을 넣었으니 할머님께 빈혈에 좋은 약이라도 한병 사드리라는 것이었다. 나는 봉투를 보면서 잠시 갈등했다. 내가 돌아간 뒤에 이 교활한 자는 나를 바보 천치라고 손가락질할까? 아니면 법 없이도 살 수 있을 만큼 좋은 사람이라고 평가할까? 마음속으로 저울질을 해보았지만 저울추가 어디로 기울게 될지는 너무도 명백했다. 나는 그 때문에 봉투를 덥석 받아들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자리를 그냥 뜰 수도 없었다. 짐작되는 바가 없지는 않았다. 경로우대권으로 버스를 타는 노인들이 어떤 대우를 받는지는 익히 봐왔던 일이다.
동생이 버스회사 사무실로 뛰어든 건 바로 그때였다. 그의 뒤로 건장한 사내들이 줄을 이었다.
“이런 순, 나이 자신 노인들만 죽인다는 그 살인마 새끼, 어디로 토깠어?”
“당신들 누구요?”
“나는 진짜 자격증이 있는 저승사자요. 알겄소?”
“……?”
“후레자식들만 보이면 끌어다가 뼈를 하얗게 발라주었지. 놈들이 죽어가면서 입을 아주 쩌억 벌리더라구. 고마웠던 모양이지?”
목걸이로 쓰기에는 좀 굵다 싶은 쇠사슬을 빙빙 돌려 검지에 감았다 풀었다 하면서 동생이 목소리를 낮추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단 한번도 볼 수 없었던 잔인하고 소름끼치는 미소가 한순간 그의 입가에 그려졌다가 사라졌다. 이애가 정말 내 동생일까? 사내들은 사내들대로 마치 실내가 비좁다는 듯이, 아니면 버스회사 상무에게 어떤 친밀감을 드러내고 싶어서 안달이라도 하듯 그가 앉아 있는 의자 팔걸이에 엉덩이를 걸치거나 몸을 바짝 붙여 섰다.
“그나저나 이건 뭐지?”
동생이 봉투를 집더니 부욱 소리가 나도록 세로로 찢었다. 그러고는 돈을 꺼내어 세어보려고도 하지 않고 그냥 휙 던져버렸다.
“우리 할머님께 껌이나 몇통 사다가 드리라굽쇼?”
“이거, 왜 이러십니까?”
“뭐, 이거?”
동생이 그 순간 거친 막말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뼈다귀며 피와 혀 등이 차례로 등장하는, 어린시절 아버지로부터 동생이 들어야 했던 바로 그 욕설이었다. 그렇지만 동생의 욕설에 정겨움 따위는 담겨 있지 않았다. 그 대신 독기어린 살의만이 잔뜩 배어났다.
나는 그뒤의 상황을 지켜보지는 못했다. 회사로 들어가봐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솔직하게 실토하자면 일이 잘못 풀리게 될 경우 덤터기를 쓰게 될까봐 자리를 슬쩍 피한 측면이 아주 없다고는 할 수 없다.
그날 저녁, 병원에 들른 동생은 할머니에게 백만원짜리 수표 두 장을 말없이 내밀었다. 그 수표를 받아쥐던 할아버지의 떨리는 손을 우리 가족은 빙 둘러서서 자랑스럽게 지켜보았다. 버스회사로부터 얼마를 받아냈는지, 가족들은 물어볼 생각조차 없는 듯했다. 동생도 애써 그걸 밝히지는 않았다. 다만 동생은 그 돈으로 이번에는 할아버지께 빚진 돈의 일부나마 갚은 셈이 됐다.
어찌되었거나, 할머니는 그뒤로 기력이 크게 떨어졌던 모양인데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가시고 말았다. 노인네들이야 멀쩡하다가도 어느날 갑자기 숨을 놓아버리니까 그 사고 탓이라고 꼭 집어 얘기할 수는 없었다. 당신이 입에 자주 올리던 얘기처럼 자빠진 김에 쉬어가더라고, 쉬던 김에 그냥 아주 가셨다고 보는 게 옳았다.
물론 그게 중요한 얘기는 아니다. 할머니는 돌아가시던 그날까지 당신의 둘째손자를 찾고 또 찾곤 했다. 내가 할머니 방에 들어서면 동생을 데리고 오지 않았다고 아예 고개를 돌린 적도 있었다. 내가 베개 밑에 넣어드린 용돈도, 늘그막에 당신이 모아둔 비상금도 동생에게 주고 싶어했음을 나는 잘 알고 있다.
생각해보면 나와 동생은 서로 정반대의 출발점과 도착점을 가족들에게 보여준 셈이다. 없는 시골살림에 식구들의 고혈까지 빨아서, 그것도 앞뒤야 어찌됐든 동생의 희생을 발판으로 대학을 졸업한 나로서는 그들의 가치관에 부합되는 무엇인가가 당연히 되어 있어야 했다. 그게 아니라면, 적어도 동생을 이끌어주는 한편 동생의 생활까지 내 어깨에 함께 짊어져야 했다. 그런데 지금 이 꼴이 무엇인가? 그 반면에 동생은 출발선상에서 상대적으로 불우했으며 식구들로부터도 소외됐다. 그리고 아직도 비록 그 길 언저리에서 헤매고 있지만 그건 결코 그의 탓이 아니었다. 식구들이 볼 때는 명명백백 오로지 세상 탓이었다.
아무래도 그 얘기만큼은 마저 해야겠다.
다름아니라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의 일이다. 천수를 다 누린 탓인지 장례는 잔치마당처럼 보였다. 문상객도 적지 않았다. 그런데 어디서 그 많은 사람을 끌어모았는지 동생의 손님이 유난히 많았다.
“후손덜이 헐 수 있는 마지막 효도는 조문객 숫자란 말이 있느니라. 여러 사람이 상여를 메면 개볍디끼 망자도 문상을 많이 받어야 저승길이 홀가분헌 거셔.”
일가친척이 두셋이라도 모여 있으면 할아버지는 그렇게 말씀하셨다. 할머니를 배려하는 마음이 그 말에 담겨 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이만허면 망자도 흡족허시지 않으까요?”
“암먼! 도리는 다헌 셈이다. 아매도 둘째 땜시 덩실덩실 춤을 춤서나 날아가고 있을 것잉만.”
내 얼굴을 보고 찾아온 조문객들은 많지 않았다. 회사에서 스무 명 남짓, 그리고 모임에서 예닐곱과 친구들 대여섯이 고작이었다. 나부터 그래왔지만 이제 배웠다는 사람들은 조부모 상까지 꼬박꼬박 챙겨주지는 않는다. 그리고 찾아왔다가도 서둘러 돌아가기에 바쁜 사람들이다.
나는 아마 그런저런 상념들로 우울해졌을 것이다. 음복(飮福)을 핑계로 마을 사람들과 멍석 한구석을 차지하고 앉아서 권하는 술을 마다하지 않고 들이켜고 있었다. 그때 중년의 사내 하나가 내 앞으로 다가와 허리를 굽혔다.
“저는 제씨(弟氏)하고 아주 잘 아는 사람입니다. 형님 되시지요?”
“그런데요?”
무엇 때문에 인사가 삐딱해졌는지 모를 일이다. 언젠가 동생은 낯선 사내 하나를 앞세워 나를 찾아와서는 황당하다 못해 웃음이 터질 만한 부탁을 한 적이 있다. 자기가 빚을 갚지 못하면 형인 내가 대신 청산해주겠다는 약속을 한마디만 들려달라는 것이었다. 얼마나 다급했으면 그랬을까 동정심도 들던, 그리고 잊어도 좋을 만큼 오래 전의 일이기는 했다.
“동생과는 어떻게 아는 사입니까? 보나마나, 내 동생이 빚을 지고 있겠지요?”
“하하하, 그건 맞아요. 그렇지만 오래 전에 깨끗이 포기했고, 지금은 얼마든지 더 갖다쓰라고 쫓아다니며 제가 애걸복걸을 할 정도예요.”
그냥 넘겨짚었던 말인데 사실이라고 했다. 그 무렵만 해도 동생을 두고 대추나무에 연 걸렸다고 했으니 아무런 가지나 잡고 흔들어봐도 방패연 아니면 가오리연이 펄럭거리고 있을 게 뻔하기는 했다. 그런데 더 빌려주겠다고 오히려 부탁을 할 지경이라니, 동생도 그쪽 분야에서는 대단한 경지에 오른 모양이었다.
“이제 동생 신용이 좀 높아지기라도 했습니까?”
“아직도 어렵죠, 뭐. 사실은 오랫동안 형제처럼 지내왔기 때문에 제씨 사정이야 누구보다 잘 알고 있거든요.”
“그럼 형씨가 바보 아닙니까?”
“아, 맞습니다. 새로 얻은 동생을 좋아하는 바보지요. 그런데 제씨는 세상에서 오직 친형 하나만을 가장 믿을뿐더러 또 존경한다니, 원!”
“………”
나는 어이가 없어졌다. 동생이 그 비슷한 말을 나에게 실토한 적이 있었던가? 하다 못해 잠꼬대를 통해서라도? 믿어지지 않는 얘기였다. 내가 사내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자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제씨는 요즘 몇몇 분과 동업해서 신문을 하나 창간하려고 합니다. 뭐, 검찰이나 경찰 업무와 관련이 있는 신문이니까 일단 시작만 해놓으면 그 다음부터는 땅 짚고 헤엄치기죠. 문제는 지금인데, 형님께서 격려라도 한번 해주셨으면 하고…… 제 돈을 갖다쓰라는 얘기도 바로 그 얘기지요.”
벌린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소리였다. 밑천이 드는 건 아니라고 해도 격려라는 건 해야 할 때가 있고 삼가야 할 때가 있는 법이다. 이를테면 동생이 조그만 슈퍼마켓이나 정육점을 개업한다면 내가 격려를 아끼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무엇이라고?
멀리 사라져간 옛 꿈을 다시 불러모으듯
자, 술잔을 머리 위에 높이 들어라. 높이
그곳 아득한 하늘에 빛나는 푸른 별들이
하나둘 잔에 떨어져 녹아내리고 있구나.
연인을 잃고 헤매다 밤이슬에 젖어 돌아온 친구여
사랑을 점지(點指) 못하던 별은 유성으로 지고 말았느니
보아라. 이제 눈물을 닦고 보아라. 해맑은 별 하나
꿈도 사랑도 지워져버린 검은 술잔에 새로 돋는다.
「검은 술잔」이라는 제목의 유행가다. 동생이 오래 전에 만든 이 곡은 지금도 노래방 기기마다 깔려 있다. 자주 찾지는 않지만 노래방에 들르게 될 때면 이 노래를 부르곤 한다. 거적때기처럼 칙칙하게 젖은 것들을 들추고 이제 막 얼굴을 내밀어보는 노란 새싹을 본 적이 있는가? 그렇듯 처연한 분위기를 배경으로 깐 채 실낱 같은 희망이 알게 모르게 솟아나도록 하는 노래들을 나는 좋아한다. 그런데 이 노래는 동생이 일부러 내 취향에 맞춰 만들었다는 곡이다. 그렇지만 그의 표현대로 약을 충분히 발라주지 못한 때문인지 히트하는 데는 실패했다.
감옥에 노래방이 있다면 동생 역시 이 노래를 자주 부를 것이라고 믿는다. 물론 죄수들이 이용할 수 있는 그런 시설이 있는지 나는 아직 확인해보지 못했다.
그곳에서 동생은 이따금 내게 편지를 보낸다. 때로는 후회하고 반성하는 내용을 써보내기도 하고 더러는 어린시절의 추억들을 담기도 한다. 이미 오래 전에 잊었던 얘기들이 적혀 있는 동생의 편지를 통해서 나는 앞의 일화들을 기억할 수 있었다. 그런데 동생이 편지마다 빠뜨리지 않는 구절이 있다. 자기 식구들을 좀 보살펴달라는 당부가 그것이다. 그를 기꺼이 따르던 그 많은 사람들은 다들 어디로 갔는지 모를 일이다. 물론 그게 세상의 참모습이기도 하리라. 그러니 누구를 탓하겠는가? 나는 아는 사람을 찾아가 변통을 하거나 아내 몰래 은행에서 대출을 받기도 한다.
동생의 죄목이 무엇이었는지 나는 굳이 알려고 하지 않았다. 사람을 죽게 한 흉악범 따위는 아니라는 사실이 그나마 고마울 뿐이다. 그는 우리 사회의 질서를 어지럽혔다는 혐의가 인정돼 댓가를 치르고 있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한다는 얘기는 위계질서라는 걸 지켜내기 위해 송충이가 아닌 무리들, 송충이보다는 낫다고 자부하는 족속들이 강조해온 윤리규범일 수도 있다. 숲속에 사는 송충이든, 물속의 피라미나 쏘가리든 제각각 영역이라는 게 있으며 텃세도 있기 마련이다. 동생은 분명 그걸 어기고 우리 사회의 이른바 상류라는 곳으로 잠입해 들어가기 위해 과욕을 부리고 질서도 무시했을 것이다. 밤낮으로 나는 그저 복무(服務)할 뿐인 상류에.
개똥밭에도 이슬 내릴 때가 있다는 속담이 있다. 동생은 그곳에서 그것을 마냥 기다리면서 앉아 있기는 싫다고 뛰쳐나갔다. 그런데 알 수 없는 일이 하나 있다. 그가 이따금 한없이 부러워진다는 사실이다. 한때 동생의 경우처럼 나를 조금씩 압박하기 시작하는 빚 때문일까? 아니면 동생이 지은 노랫말처럼, 동생과는 달리, 바로 누워서 잠을 자든 엎어지고 고꾸라져져 잠을 자든 내가 이제 더는 새로운 꿈을 꿀 수 없게 됐다는 서글픈 자각 때문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