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시
김진경 金津經
1953년 충남 당진 출생. 1974년 『한국문학』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으로 『갈문리의 아이들』 『별빛 속에 잠자다』 『슬픔의 힘』 등이 있음. jinkyungeco@hanmail.net
봄 나무
세상을 다 살아본 뒤에도
몸이 남아 있으므로 살아야 하는
성자들의 표정 없는 슬픔처럼
나무들은 겨울을 난다.
눈이 가지를 덮고
녹아 흐르며 고드름으로 달려 빛날 때
나무는 찬찬히 오랜 노동으로 옹이진
제 손끝을 들여다본다.
나무는 기실
제 손끝을 보고 있는 게 아니라
한 슬픔의 끝을 보고 있는 것이다.
몸이 남아 있으므로 살아야 하는
모든 것들의 감금과 슬픈 노동을
나무는 필사적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보고 있는 동안
옹이진 손끝에서 움찔움찔
마침내 날개를 접은 새 움이 돋는 것이다.
새잎이 파랑새처럼 작고 파란 날개를 펴는 것이다.
나무는 파랑새가
어디서 왔는지 묻지 않는다.
그것이 뭉툭한 가지에서 돋아난 건지
필사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에서
살짝 날아 앉은 건지 묻지 않는다.
이팝나무 꽃 피었다
1
촛불연기처럼 꺼져가던 어머니
“바─압?”
마지막 눈길을 주며
또 밥 차려주러
부시럭부시럭 윗몸을 일으키시다
마지막 밥 한그릇
끝내 못 차려주고 떠나는 게
서운한지
눈물 한방울 떨어트리신다.
2
그 눈물
툭 떨어져 뿌리에 닿았는지
이팝나무 한그루
먼 곳에서 몸 일으킨다.
먼 세상에서 이켠으로
가까스로 가지 뻗어
툭
경계를 찢는지
밥알같이 하얀 꽃 가득 피었다.
나무가 악기인 것은
눈발이 가득히
바람에 불려간다.
허공이 거대한 모슬린천처럼
하얗게 겹쳤다 펼쳐지고
겹쳤다 펼쳐지고
그 너머로 나무들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위태롭게 껌벅인다.
나무가 악기인 것은
지워지지 않으려 온몸으로 울기 때문이다.
나무들이 우는 소리
능선을 넘어
온 산을 쏟아져 내리는 폭포를 이룬다.
나무가 악기인 것은
지워짐과 지워지지 않음을 넘어
전력을 다해 울기 때문이다.
눈 갠 하늘 아래
기진한 나무들이 하얗게 얼어붙었다.
녹아내린 눈이 가지 끝에 고드름으로 달려 흔들리며
풍경소리를 낸다.
나무가 악기인 것은
소리의 끝에서 무심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