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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권지숙 權智淑
1949년 경남 진주 출생. 1975년 『창작과비평』으로 등단. naespace@hanmail.net
오후에 피다
너를 기다리는 이 순간
한 아이가 태어나고
한 남자가 이 세상을 떠나고
한 여자가 결혼을 하고
그러고도 시간은 남아
너는 오지 않고
꽃은 피지 않고
모래시계를 뒤집어놓고 나는 다시
기다리기 시작하고
시간은 힐끗거리며 지나가고
손가락 사이로 새는 모래
아무도 간섭하지 않는 소란스런 오후에
찻잔 든 손들은 바삐 오르내리며
의뭉한 눈길을 주고받으며
그러고도 시간은 남아
생애가 저무는 더딘 오후에
탁자 위 소국 한송이
혼자서 피네 지쳐서 피네
나비, 날아가고
초록빛 굴참나무 잎이 바람도 없이 흔들린다
주름진 각질 속에 숨죽인
산제비나비 번데기
(어머니는 하얀 천 속에 묶여)
지상의 가장 환한 대낮
온몸 천천히 비틀고 뒤틀어
소스라치는 羽化
(마침내 캄캄한 흙속에 갇히고)
신생의 이 황홀한 회오리
온 산이 잠시 날카로운 빛 속에 쓰러진다
이내 허리 곧추세우고
날개를 말리는 나비
최대한 가벼워지기 위해
(그녀의 육탈은 어떤 모습일까)
홑눈으로 보는 연둣빛 하늘
잠시 머뭇거리는 어지러운 생
나비 한마리 기어이
온 우주를 난다
그리운 밤섬
건너갈 다리도 없다 반쯤 물에 잠긴
금방 가라앉을 듯이 포기한 듯 지친 빛깔로
아예 길게 누워버린, 뿌리 없이
흔들리는 수양버들이 한낮에 꾼 꿈마냥
허황하게 둥둥 떠 있다
헤엄쳐서 갈 수밖엔 없다 그곳에
언젠가는 작은 방 하나
숨겨놓고 그 속에서 내 지리멸렬의 생을
되돌려주겠다 낮이면
죽은 듯 잠만 자다가
밤이면 귀를 세우고 캄캄한 기억들을
불러모으겠다
그 부유하는 기억들 속에 몸을
담그고 긴 밤을 견디겠다
어느 여름 지독한 폭우 속에 섬과 함께
가마우지 황새 청둥오리들과 함께
흔적 없이 떠내려가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