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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고운기 高雲基
1961년 전남 벌교 출생. 198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으로 『밀물드는 가을 저녁무렵』 『섬강 그늘』 등이 있음. poetko@hanmail.net
말 이야기
눈 내리는 밤
사박사박 눈길을 걸어 淸酒 한병 사오고, 그 술을 닮은 나라의
기숙사에서 만난 선배는 홋까이도 이야기를 한다
거기 경주마 키우는 목장의 우리에서 여섯달 된 망아지와
어미 말을 처음 떼어놓는 날의
畜舍에 들어서면 가운데 통로가 있고, 양옆으로 한마리씩 들어가는 우리가 나란하고, 어미와 한 우리에 살던 망아지를 처음 제 우리에 혼자 넣을 때는 우물쭈물해선 안된다.
망아지 날뛰는 것 본 적 있어? 그거 아무도 못 말려…… 선배는 목을 축이고.
망아지 제 우리 앞에 이르면 잽싸게 들여넣고 문을 쾅 닫는다. 훈련된 어미 말은 주루주루 주인을 따라가지만, 돌연 혼자 된 망아지는 지쳐 잠들도록 울어쌓는데, 그렇다고 가여워해서도 안된다.
아이들아, 이 아비도 그러고 떠나왔을까
아침이면 놀이방에 들여보낼 때
경주마도 아닌 나는 어찌 그다지 모질었을까
기숙사의 밤은 깊어가고, 눈은 내리고
이제 들판의 풀밭이 망아지의 어미, 경주장의 모래를 박차고 달릴 억센 다리를 키우는 대지,라고 나는 머리에 쓴다.
잠시 온풍기 돌아가는 소리만
눈 섞인 淸酒 한모금 넘어가는 소리만.
먼 곳에서의 離別
京都로 간다는 한 선배가 있어
八重洲 서점 커피숍에서 東京驛을 바라보고 있었다
비가 내린다, 노랗고 빨간 택시들이 사람들을 내려놓기도 하고
세차게 와이퍼가 돌아가며 빗물을 털어내기도 하였다
─덩굴 뻗는 칡처럼 뒤에 가서 다시 만나자고
아욱이 꽃이 피네*
신문이 나오지 않는 월요일 아침이다, H氏賞을 받았다고
타이완系 시인의 기사를 읽은 것은 지난 월요일이었다
그의 시집 『TAIWAN』은 서점에 없었다
낯선 땅 자기 나라에서 시인은 외롭게 자랐단다
그래서 시인이 되었을까, 그런 영혼을 만나보고 싶었던 것은
우리에게, 소독약을 바른 아물지 않는 상처의 습관일까
─덩굴 뻗는 칡처럼 뒤에 가서 다시 만나자고
아욱이 꽃이 피네
비가 내린다 월요일 아침이다
플랫폼에 서성이는 사람들이 보인다, 누구에게 이별하는 자가 되어
가볍게 손을 들어주며 돌아서고 싶었다
세월이 한 상 가득 차려 내놓은 식탁의 어느 언저리에 앉아
무엇부터 먹을까 자꾸만 손은 물컵을 잡았다.
✽『萬葉集』의 노래 가운데 하나.
毒이 毒과 싸우는
아이가 벌레에 물리면
장모는 내게 담배를 피라 하신다
합법적으로 담배를 피울 기회, 나는 니코틴이 묻어 있을 침을
아이의 벌레 물린 자국에 바른다
毒을 毒으로 물리치는 고소한 기회
그러나 내 침에는 毒이 없다
담배라도 한대 피워야 毒이 생기는
나는 그것이 슬펐던 경험을 한 적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