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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박완서 朴婉緖
1931년 경기도 개풍 출생. 1970년 『여성동아』 공모에 장편 『나목』 당선. 소설집 『한 말씀만 하소서』 『너무도 쓸쓸한 당신』, 장편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등이 있음.
후남아, 밥먹어라
공항엔 달랑 조카며느리 혼자 마중나와 있었다. 누구 팔에 먼저 안겨야 좋을지 모를 만큼 많은 일가친척들의 마중을 받은 삼년 전 귀국과는 딴판이었다. 삼년 전 귀국은 아버지의 부음을 듣고 부랴부랴 달려온 귀국이었고 앤이 미국으로 시집간 지 30년 만에 처음 한 친정나들이였지만 상중인 집에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마중나올 줄은 몰랐다. 가족들말고도 조문객들까지 묻어나온 듯 누가 누군지 하나도 알아볼 수가 없었다.
앤은 오남매의 가운데여서 위로 언니가 둘 아래로 남동생이 둘이었다. 오남매에서 불어난 사촌간이 열넷이나 되었고 그중 앤이 낳은 삼남매를 빼도 조카뻘 되는 아이들이 열한 명은 될 터였다. 다 앤이 이민간 후 불어난 식구들이라 얼굴은 고사하고 이름도 모를 수 있었다. 그러나 앤은 열한 명 조카들의 신상을 환히 꿰뚫고 있었다. 누가 기혼이고 누가 미혼이며, 다니는 직장이나 학교가 어디라는 것 정도는 기본이고, 좋은 대학에 가 부모의 콧대를 한껏 높인 아이, 머리는 안 좋은데 집념은 강해 삼수까지 한 아이, 심성 좋고 학벌 좋은데 키가 작아 좋은 혼처가 안 들어와서 부모 속을 태우는 아이, 비만 치료중인 아이, 돈을 곧잘 벌다가 성형수술에 이골이 난 후 빈털터리가 된 아이, 준재벌급 집안으로 시집가면서 수준을 맞춘답시고 친정을 거덜낸 아이, 조카들에 대한 이런 시시콜콜한 정보와 그애가 뉘집 자식이고 이름이 뭐고 어떻게 생겼는지를 정확하게 꿰맞출 수 있는 기억력을 가지고 있었다. 동기간과 조카들의 생일까지 일일이 다 외진 못하지만 만약 그런 것들을 적어놓은 수첩을 어디다 놓고 찾지 못하면 식구들까지 동원해서 찾을 때까지는 그 생각 외에 다른 생각은 못할 정도로 어쩔 줄 몰라 했다. 피붙이들의 기념될 만한 날엔 비록 작은 거라도 며칠 전부터 요모조모 궁리하고 설레는 마음으로 고른 선물을 보내는 걸 잊어본 적이 없다. 남편은 자상하지는 않았지만 순한 사람이어서 너무 싼 물건을 부칠 때면 송료도 안되는 선물을 안 반기면 어쩌나 넌지시 귀띔을 한 적도 있다. 그럼 앤은 너무도 당당하게 미젠데 그럴 리가 없다고 남편의 걱정을 일축했다. 앤의 수첩은 고국의 피붙이로부터 잊혀질까봐 시시때때로 더듬고 확인해보고자 하는 집요한 촉수를 간직하고 있는 그녀의 일부였다.
피붙이 중한 걸 시집가기 전엔 몰랐다. 중하기는커녕 이를 갈고 앙심을 먹은 적도 있다. 셋째딸은 선도 안 보고 데려간다지만 앤은 언니들보다 공부도 잘 못하고 영악하지도 못했다. 순해빠져서 샘도 없었다. 언니들은 둘 다 대학에 갔는데 앤만 고졸로 학력을 마감했다. 언니들이 나온 정도의 대학은 그녀도 갈 수 있었건만 무슨 배짱인지 수재만 가는 대학에 응시해 낙방하고 이차는 보지 않았다. 실업학교 기술직 공무원인 아버지의 월급으로 자그마치 오남매가 다 대학에 가겠다는 건 아버지의 목을 조르는 것처럼 잔인하게 느껴졌다. 아버지는 술만 한잔 들어갔다 하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계집애들을 대학에 보내야 하는 자신의 팔자를 저주했다. 전생에 무슨 죄를 많이 졌기에……로 시작하는 우울한 술주정을 듣고 있으면 자신이 아버지의 운명적인 재앙이란 생각이 들었다. 집안형편이 그런 중에 위로 딸 둘이 대학에 갈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의 생활력과 무식의 덕이 컸다. 어머니는 돈 될 만한 일이라면 체면이나 귀천을 가리지 않았다. 미제물건 장사를 화장품 장사로 전환했는데 다 보따리 장사였다. 한편 계도 여러가지 들기도 하고 스스로 오야노릇도 했다. 오야노릇을 하다가 계가 깨져 도망을 다닌 적도 있다. 아버지가 쪼들리는 살림살이를 타고난 팔자로 돌리고 체념한 것과는 달리 어머니는 원인을 분석하고 같은 실수를 자식에게는 물려주지 말아야겠다는 강한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어머니의 분석은 단순하고도 명쾌했다. 못 배운 여자가 최선의 선택으로 기술자하고 결혼할 때에는 이 정도의 고생은 각오했다는 투였다. 아버지가 죽지 못해 사는 사람처럼 남까지 우울하게 한 것과는 달리 어머니는 고생을 고생인 줄 모르는 사람답게 씩씩했다. 앤은 어머니가 사계절 씩씩한 것은 뭘 모르기 때문이기도 하다고 여겼다. 앤은 언니들이 다니는 대학을 은근히 깔보고 있었다. 앤은 꼭 하고 싶은 공부가 있는 것도 아닌데, 순전히 간판을 따기 위해 그것도 남들이 알아줄 것 같지도 않은 시시한 간판 때문에 부모에게 못할 노릇을 시킬 만큼 모질지도 못했지만 부모 동기간을 위해 내 한몸 희생할 각오를 할 만큼 착하지도 않았다. 부모의 등골이 빠진 등록금으로 다니는 삼류대학은 금의(錦衣)가 아니라 남루였다. 남루는 교복까지 언니 것을 물려입어야 했던 고교시절로 끝내고 싶었다. 그래도 낙방은 낙방이니까 체면상 실의에 빠져 있는 그녀에게 어머니가 넌지시 고맙다, 네가 효녀다라고만 속삭이지 않았으면 머나먼 미국땅으로 시집 같은 거 안 갔을지도 모른다. 어머니가 그녀에게 비굴하고도 은근한 목소리로 고마워했을 때 그녀는 있지도 않은 희생정신을 들킨 것처럼 느꼈고 그 느낌이 여간 고약한 게 아니었다. 누가 누구를 위해 희생한단 말인가. 희생할 만한 가치가 없는 것들한테 속아서 희생당한 것을 빨리 만회하고 싶었다. 꼴도 보기 싫은 식구들한테 뭔가 본때를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속에서 지글거릴 때 친척의 소개로 미국서 참한 신부를 물색하러 나온 신랑을 만나 단시일 안에 뜻이 맞아 혼사가 이루어졌다. 서로 맞아떨어진 건 뜻이라기보다는 조급증이 아니었을까. 그녀는 어머니가 고맙다고 말하면서 한참이나 쥐고 있던 손의 거칠고 끈적한 습기를 잊지 못했다. 하루속히 떨쳐버리지 않으면 미칠 것 같았다. 조실부모한 신랑은 군복무를 마치자마자 미국에서 식당을 하는 누나의 초청으로 이민을 가 이제는 누나의 없어서는 안될 오른팔 노릇을 하고 있었다. 미국생활에 대한 허황한 꿈을 가진 여자만 아니라면 같이 안 벌어도 먹여살릴 자신이 있었다. 남자는 먼저 장모 마음에 들었다. 남자는 미국서 잘사는 것처럼 부풀릴 마음이 조금도 없었고, 장모의 그에 대한 평가는 안식구 밥은 안 굶기게 생겼다는 거였다. 전후 한때 밥이나 안 굶길 남자를 최고의 신랑감으로 친 적이 있었지만 그 정도의 궁상은 벗어난 70년대였다. 그런 촌스러운 소리가 미국물을 십년 가까이 먹고 난 남자에겐 오히려 시대착오적으로 들리지 않고 신선하고도 정답게 와닿았다. 그녀를 미국으로 시집보내기로 마음을 정한 어머니는 대학도 안 나온 딸이 그런 최고 인텔리 신랑을 만날 줄은 몰랐다고 만나는 사람마다 붙들고 자랑을 늘어놓았다. 어머니 눈에도 가식이라고는 없어 보이는 소박한 청년이 영어도 할 줄 아느냐는 질문에 밥 벌어먹고 살 정도는 한다고 대답한 게 어머니에게 그런 비약적인 사고를 하게 했다. 어머니가 뭘 너무 몰라서라기보다는 시대가 그렇게 어수룩한 시대이기도 했다. 대학 나와 판판이 노는 큰언니하고 재학중인 작은언니까지도 그녀가 재미교포한테 시집가게 된 것을 집안에 신데렐라가 난 것처럼 질시할 정도였으니까. 피붙이들의 착각과 선망 때문에 신랑쪽 하객이 거의 없는 결혼식이 섭섭한 줄도 몰랐다. 헹가래질을 당하는 것만큼의 불안감도 없이 공중에 붕 뜬 것 같은 무중력감이 그냥 즐겁기만 했다. 신랑은 매우 미안해하면서 신혼여행은 생략하고 곧장 미국으로 데려가고 싶다고 했다. 친정붙이 중 누구도 그 사실을 섭섭하게 여기지 않았다. 신랑 신부를 비행장에서 전송할 수 있다는 사실에 정신없이 들떠 있었다. 그건 여태까지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신분상승의 황홀경이었다.
만약 누군가 한사람을 신나게 헹가래치던 사람들이 공중에 뜬 사람을 무사히 착지시키기 전에 일제히 그 자리를 떠나버린다면 어떻게 될까. 헹가래질당한 사람은 아마 골통이 터지든지 척추가 부러지고 말 것이다. 김포공항을 뜬 지 거의 이십시간 만에 엘에이공항에 내려 시집식구들의 대대적인 환영을 받은 그녀의 기분이 꼭 그러했다. 척추가 부러진 것 같은 충격적인 착지감은 그녀가 두발 딛고 살아야 할 땅에 그녀의 피붙이는 한사람도 없다는 사실이었다. 공항이 떠들썩하게 마중나온 사람들은 다들 신랑과는 사촌 이내의 친척들이었다. 그건 그녀에게도 해당되는 촌수였지만 피붙이는 아니었다. 피붙이끼리의 관계망 속으로 복귀한 신랑은 한국에서 볼 때와는 달리 편안하고도 의젓해 보였다. 그녀는 그런 신랑이 의지가 되기보다는 달랑 외톨이라는 소외감만 더했다. 신랑은 오남매 중 막내였다. 큰누나가 먼저 와서 음식장사로 자리잡은 후 줄줄이 따라온 동기간들이 이제는 나름대로 독립해서 살 만한 듯했다. 독립을 못하고 큰누나 밑에 있는 건 그녀의 신랑밖에 없었다. 욕심이 덜하든지 큰누나의 신임이 특별하든지 둘 중의 하나일 것이다. 신랑은 결혼식 올리기 전에 신부가 미국 가면 불가불 부대끼게 될 시집식구들에 대해 간략한 사전정보를 준 적이 있는데 표현을 조금씩 다르게 하긴 했어도 억척스럽지만 친절하다는 걸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개인적인 특징은 다 잊었는데 큰누나를 처음 대면하는 순간 퍼뜩 그게 생각났다. 개같이 벌어서 정승같이 살자가 생활신조라고 했던가. 여장부형의 당당한 몸집에 짙은 화장을 하고 알이 큰 준보석급의 장신구를 목에, 귀에, 팔목에 줄줄이 늘어뜨린 양이 난 개같이 벌어서 정승같이 산다, 어쩔래? 이렇게 시위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나 그녀가 큰누나한테 압도당한 건 그런 거침없는 생활력의 과시 때문만이 아니라 단신으로 미국땅에 건너와서 부모 없는 동생들을 다 끌어들여 거느리고 사는 그 강한 피붙이의 카리스마였다. 그녀를 환영하고 새 식구로 받아들이는 잔칫상이 큰누나 집에 차려져 있었다. 미국 내에서 치르는 또 한번의 결혼식이라고 볼 수 있는 자리니까 그녀는 미리 준비해가지고 간 한복으로 갈아입었다. 곱고 얌전하단 칭찬의 소리가 쏟아졌다. 그들은 큰소리로 웃고 떠들고 조그만 의견 차이에도 으르렁거리며 덤벼들기도 잘했다. 점잔을 빼는 사람은 한사람도 없었다. 먹는 건 또 얼마나 잘 먹는지, 푸짐하고 지글거리는 고깃덩어리를 소리내어 씹고 우거지처럼 아낌없이 먹어치우는 그들의 맹렬한 식욕은 맹수들의 향연을 연상시켰다. 새신랑이 그중 비실이로 보였다. 행여 그런 신랑이 색시에게 변변치 못해 보일까봐 걱정이 되는지 큰누나는 누구에게랄 것도 없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쟤가 어려서 젖을 실컷 못 얻어먹어 저렇다니까. 워낙 노산인데다 왜놈들이 망해갈 때였으니까 우유는커녕 암죽도 변변히 못 먹였어. 쟤가 젖 달라고 마른 입술을 내휘두를 때 내 속이 다 바작바작 타들어가는 것 같았으니 우리 엄마 마음은 오죽했겠어. 또 그 소리, 신랑이 얼굴을 찡그리며 듣기 싫어하는 걸 보면 툭하면 듣는 소리인 듯했다. 그래도 누나는 한마디 덧붙이는 걸 잊지 않았다. 보긴 저래도 강단은 제일로 있다고. 그러면서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애틋한 시선으로 동생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바로 저거다 싶었다. 피붙이간에만 있을 수 있는 건 근본을 안다는 것, 그래서 비록 흉악한 범죄를 저질렀다 해도 어릴 적의 천사 같은 미소를 기억하며 착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는 맹목의 믿음, 마지막 보호막 같은 거 말이다. 그녀를 위한 잔치답게 그들은 그녀에게도 자주 관심과 호의를 보이며 말을 시키기도 하고 대견해하는 시선으로 바라보기도 했다. 그러나 당하는 그녀는 그들 중 가장 처지는 비실이가 획득해온 전리품 취급을 받고 있는 것처럼 서럽고 비참했다.
누나가 강단이 있다고 말한 것은 몸에 대해서가 아니라 성깔에 대해서가 아니었을까. 그녀는 살면서 차차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다. 아마 극성맞고 생활력 강한 누나들에게 질려서였을 것이다. 그는 여자는 집에서 조신하게 살림하고 애나 낳고 남자는 밖에서 열심히 일해서 처자식을 책임지고 먹여살려야 한다는 가부장적 사고방식에 투철했다. 그는 그녀보다 여덟살이나 위였다. 미국서도 노총각이었다. 동기간들이 교포 중에서 물색한 색싯감은 그에게 하나같이 건방지지 않으면 억척스러워 보였다. 둘 다 그가 가장 싫어하는 타입이었다. 그는 태어나자마자 젖도 실컷 못 얻어먹은 걸로 시작해서 조실부모, 이민, 식당 웨이터에서 지배인까지 어느 하나도 그가 원해서 된 건 아니라는, 원한 게 뭔지는 모르지만 다 놓쳤다는 원초적인 결핍감을 가지고 있었다. 원하는 게 뭔지 구체적으로 확실하게 알고 있는 이상 꼭 이루고 싶었다. 그 유일한 것마저 못 이룰 거면 왜 태어났나, 태어난 게 너무 억울한 것 같은 그의 심정을 큰누나는 이해해주었다. 누나가 이해해주었기 때문에 색싯감을 찾아 한국까지 갈 수 있었다. 누나는 그를 혹사했지만 보수는 충분히 주었다. 그러면서 입버릇처럼 말해왔다. 네 색시는 네가 어떻게 번 돈인지 모르고 그냥 그 돈을 소중하게 아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그런 점에서 성격이 판이한 두 사람이 그리는 이상형은 결국 같은 사람이 되었다. 그가 한국에서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 바로 이 사람이구나 싶었다. 그도 결혼을 전제로 하지 않은 연애경험은 몇번 있었지만 찾아헤매던 사람을 만난 것 같은 느낌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누나가 마련해준 그들의 신접살림 집은 한국에서 같으면 꿈도 못 꿀 대저택이었다. 없는 것 없이 갖춰져 있고 정결하고 널찍널찍하고 편리하고 주위에 녹지대가 많아 공기가 상쾌했다. 계단 밑을 이용한 깊숙한 창고에는 새하얗고 보드라운 화장지가 길길이 쌓여 있었다. 그건 그녀가 감히 꿈도 못 꿔본 부티였다. 황홀했다. 친정에선 재래식 변소에서 신문지를 뒤지로 쓰다가 미국으로 시집온 거였다. 언니들은 어쩌다 가본 호텔 화장실에서 흰 두루마리 화장지를 둘둘 말아 핸드백 속에 숨겨가지고 와서 화장을 지울 때만 아껴가며 썼다. 크리넥스를 쓴다는 건 곧 부의 척도였다. 신혼기간 동안 차례를 정해가며 그들 내외를 초대해준 남편의 친구나 동기간의 집을 돌면서 느낀 것도 이 나라엔 어쩌면 이렇게 종이가 흔할까 하는 거였다. 저것들을 언니들한테 몇통만 부쳐주면 얼마나 좋아할까. 눈을 빛내며 탄성을 지르고 나서 곧 질투심으로 배가 아플 것이다. 흔해빠진 것과의 긴장감을 계속해서 유지하기 위해서도 언니들은 있어야 했다. 아무리 없는 것 없이 살면 무엇하나. 그걸 보고 대견해하거나 샘을 낼 부모 형제가 없는데. 그녀는 집에서 특징없는 오남매의 중간인 것처럼 학교에서도 특별히 잘하는 과목도 못하는 과목도 없는 존재 희박한 학생이었다. 남의 무관심에 익숙해왔기 때문에 남이 나를 부러워하기를 바라는 이렇게도 강력한 욕망이 자기 안에 숨어 있는 줄을 미처 몰랐다.
화장지 다음으로는 온갖 편리하고 아름다운 주방용품에 경탄을 하다가도 같이 신기해하며 탐을 낼 언니들이 못 보는데 이런 물건들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맥이 빠지면서 그가 소유한 미제물건들이 무의미해졌다. 미국생활에 익숙해지면서 다들 그 정도는 살고 있다는 걸 알게 됐지만 비교하고 싶은 욕망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이웃엔 한국사람 중국사람 인도사람 들이 주로 살고 있어서 피부색 때문에 기죽을 일도 없었다. 신랑은 보기보다 예민한 사람이었다. 색시가 곧 권태로워지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는 잠시도 한가할 틈 없이 바쁘게 살고 있었지만 실은 같은 일의 반복과 미래에 대한 꿈도 불안도 없는 생활을 권태로워하고 있었기 때문에 권태가 얼마나 지독한 불행감인지 알고 있었다. 식당을 쉬는 날 아내를 데리고 집에서 가까운 라구나 비치로 피크닉을 간 적이 있다. 이민 초기 이 큰 나라에서 툭하면 왜 그렇게 가슴이 답답해지곤 했던지, 가슴이 옥죄어 미칠 것 같을 때 그 바닷가에 가면 속에 맺혔던 게 탁 터지면서 갈매기처럼 미소하고 자유로워지는 걸 느끼곤 했다. 그는 아내에게도 그 아름다운 비치가 위안이 되길 바랐다. 어머머, 지구가 정말로 둥그네. 그게 아내의 첫 탄성이었다. 뭘 보고 지구가 둥글다는 건지 처음에 그는 아내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아내가 수평선을 가리켰다. 섬도, 곶[岬]도, 시야를 방해하는 아무것도 없이 열린 수평선은 아닌게아니라 완만한 호(弧)로 보였다. 그는 그런 아내가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다음에 아내의 관심은 물새로 옮겨갔다. 무슨 갈매기가 저렇게 크냐고, 저렇게 큰 갈매기는 징그럽다고 말했다. 그건 그도 동감이었지만 될 수 있으면 아내의 마음을 신선한 감동 쪽에 붙들어두고 싶었다. 그래서 이건 태평양이고 이 바다는 한국에 닿아 있다고 말해주었다. 그들이 지금까지 지구상에 생겨난 교통수단 중 가장 빠르다는 비행기로도 스무 시간이나 걸려서 날아온 바다가 고국에 닿아 있다는 말에 난 왜 그런 생각을 못했을까, 바닷바람 때문인지 숨차게 말하며 그를 바라보는 아내의 눈길은 얼마나 유순한지. 모르는 게 아니라 단지 생각이 못 미쳤을 뿐인 것을 상기시켜줬을 따름인데 그걸 마음으로부터 고마워하는 여자가 안쓰러웠다. 해안도로 언덕에는 호화주택이 드문드문하고 노란 겨자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제주도 같아. 아내의 목소리가 한결 명랑해졌다. 겨자꽃을 유채꽃인 줄 알았을까, 아내는 아마 제주도에 가본 적이 없을 것이다. 그도 신혼여행지로 꿈꾼 적은 있어도 가보지는 못했다. 아내도 그러리라 생각하며 유채꽃 대신 겨자꽃의 고장으로 데려온 것이 미안해 마음이 찔린 듯이 아팠다. 그는 아픔을 참을 수 없어 차를 세우고 아내를 안았다. 품속의 여자가 그렇게 애틋할 수가 없었다. 그는 그녀에게 처음으로 사랑을 느꼈다.
그는 식당에서 먹고 자다가 새신랑이 된 후에는 집에서 출퇴근했지만 세끼 식사는 여전히 식당에서 해결했다. 아내가 혼자 하는 식사를 대충 할까봐 신랑은 밑반찬이나 양념한 갈비 같은 것을 부지런히 식당에서 날라왔다. 그래도 그녀는 동네 공터에서 야생근대를 뜯어다가 된장국을 끓여놓는 걸 잊지 않았다. 근대가 남아돌아 데쳐서 말린 적도 있다. 그도 어느틈에 그녀가 줄기차게 끓이는 된장국에 맛들여 될 수 있으면 아침저녁은 집에서 먹게 되었다. 아내의 정성을 헛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아내를 가장 생기있게 하는 건 태평양을 바라볼 수 있는 비치로 피크닉을 가는 거였다. 그는 비치에 가잔 소리를 지구가 아직도 둥근가 보러 가자고 했다. 그는 농담을 잘 못하는 사람이었다. 사랑이 그를 농담도 할 수 있게 만들었다. 그러나 아내가 수평선을 끌어당길 듯이 강하게 바라보는 걸 보면 가슴이 미어졌다. 지구가 찌그러지기 전에 그만 갑시다. 그는 슬프게 말했다. 여자는 시들시들 수척해갔다. 그 헛되고 힘겨운 끌어당김을 위해 여자의 생명력이 하루하루 소진해간다는 게 눈에 보이는 듯했다. 남자는 안타까웠다. 아내가 거죽만 남기 전에 고국의 피붙이들로부터 완전히 떨어져나온 게 아니라는 걸 확인할 수 있는 끈 같은 걸 마련해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이 확실해진 건 아내가 미국이름을 정할 때였다. 그녀는 여자가 결혼하면 남편 성을 따라야 한다는 미국식을 좀처럼 납득하려 들지 않았다. 그런 상실감을 무마하기 위해 친한 사이에 일상적으로 부를 수 있는 이름을 친정 성에서 따올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녀의 친정 성은 안씨였고 그의 미국식 이름은 존이어서 존과 안이 다같이 짧고 부르기 좋아 잘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도 일조를 했다. 그녀는 그의 제안에 기대 이상으로 반색을 했다. 그는 꼬박꼬박 안이라고 불렀지만 친척들은 앤 아니면 앤 아줌마라고 불렀다. 여자는 그 정도는 개의치 않는 듯했다. 남자는 어떻게든 정체성을 놓치지 않으려는 여자가 눈물겨워 더 확실하고 구체적인 끈을 마련해주고 싶었다. 처음에 아내가 크리넥스를 보고 감격한 나머지 언니들한테 부쳐주고 싶어했을 때는 말렸지만 그는 한국서 환영받을 만한 값싼 미제물건들을 많이 알고 있었다. 남편의 도움으로 그녀는 차차 생기를 회복했다. 그녀는 집요한 열정으로 고국의 명절과 피붙이들의 대소사와 생일을 챙겼다. 태평양을 보러 피크닉을 가는 것보다는 프라이스클럽으로 쇼핑 가는 걸 더 좋아하게 되었다. 명절이나 생일 등 때마다 보내는 선물은 그녀가 신기하게 여긴 잗다란 생활용품이나 슈퍼마켓에 진열된 값싼 화장품이나 영양제 또는 썬글라스나 장신구 같은 거였다. 어떤 선물에도 빠지지 않고 포함되는 건 초이스나 맥스웰의 인스턴트 커피였다. 한국에서는 피엑스에서 흘러나온 걸 암시장이나 보따리 장수를 통해 사쓸 때라 그 가격 차이가 엄청났다. 봉지에 넣어서 더욱 싸게 파는 커피를 짐 속에 챙길 때마다 그녀는 마치 자기가 그 차익을 남겨먹는 것처럼 흐뭇해했다. 크리스마스를 앞두고는 각종 초콜릿을 큰 상자로 하나 가득 사모아 미리 배편으로 부치기도 했다.
선물할 일은 해마다 늘어났다. 앤이 제일 먼저 아이를 낳고 한국의 언니들도 시집을 가서 아이를 낳고 동생들도 약혼을 하고 결혼을 하고 부모들은 회갑이 되기도 하고 고희를 바라보기도 했다. 선물목록 중에서 아이들 장난감이나 학용품이 차지하는 비율이 늘어났다. 그쪽에서도 고춧가루나 된장, 동생이 장가들 때 받은 예단 등을 부쳐왔다. 사진들을 교환하면서 이쪽의 사는 형편은 십년 전과 달라진 게 없는데 그쪽은 해마다 잘살게 된다는 게 눈에 띄었다. 이사들은 잘도 다녔다. 뉘 집이 어디 살다 어디로 아파트 평수를 늘려갔단 소리를 안 듣는 해가 없었다. 몇년에 한번씩 늘려가도 여러 집이니까 듣는 쪽에선 해마다 이사를 다니는 것처럼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앤의 관심은 오로지 피붙이들한테만 가 있었지만, 존은 한국사람들이 주로 드나드는 데서 일하느니만큼 한국사회 전반에 대한 현장감이 한국 내에서만 살아온 사람보다도 뛰어났다. 그는 눈치껏 아내가 챙기는 선물의 질을 업그레이드 시켰다. 단골을 정해놓고 명품의 쎄일기간을 적절히 이용했고 약방의 감초 격인 가루커피도 원두커피로 바꾸었다. 이젠 사회적으로 한가락하게 된 동생들이나 형부들이 미국으로 출장을 올 때도 있었다. 마당에서 연기를 풍겨가며 엘에이갈비를 구우며, 영어도 잘하지만 한국어밖에 모르는 엄마 말도 잘 알아듣는 아이들한테 이것저것 심부름도 시키고 잔소리도 할 때는 마치 미국땅을 다 정복한 것처럼 당당하고 흡족해 보였다. 앤은 이제 귀여운 여인이 아니건만 존은 한국땅에 대한 라이벌 의식을 버리지 못했다. 미국으로 시집온 지 이십여년 만에 앤이 원하기 전에 존이 먼저 그러자고 해서 드디어 부모님을 초청하고 비행기표를 부쳤다. 앤은 눈물까지 그렁그렁하며 고마워했다. 존은 용의주도한 사람이었다. 장인 장모를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 치밀한 여행계획을 짜놓고 충분한 저축을 한 것도 그랬지만, 그동안 아이를 셋씩이나 낳고 그 아이들을 잔손 안 갈 만큼 키울 때까지 아내에게 한번도 친정나들이의 빌미를 주지 않은 것도 그랬다. 그가 ‘나무꾼과 선녀’에게서 배운 건 아이 셋 낳을 때까지가 아니라 죽을 때까지가 가장 안전하다는 거였다. 그는 휴가를 내어 장인 장모를 모시고 쌘프란씨스코도 가고 요쎄미티도 가고 그랜드캐년도 가고 라스베이거스도 갔다. 노인네들 눈엔 좋은지 만지 얼떨떨한 것도 어머니 아버지 모시고 오려고 아껴뒀던 곳이라고 말해 앤까지 함께 감동먹게 했다. 그건 사실이었다. 남들이 부모님을 초청해 호강시켜드리는 걸 볼 때마다 나도 꼭 한번 그래보고 싶다고 별렀으니까. 노인들이 귀국할 때는 네모나게 꽝꽝 얼린 엘에이갈비를 잘 포장해 부치는 짐에 넣어드렸다. 그동안 비행시간이 많이 단축된 것도 일조를 했겠지만 그 기상천외한 선물이 조금도 상하지 않고 도착해서 여러 집이 나누어 포식했단 전갈이 왔다. 그걸 그대로 자랑삼아 풍긴 게 잘살게 된 조국에서 반길 만한 마땅한 선물이 없어 고민하던 교포사회를 한동안 풍미했다.
그후 몇년 더 있다가 장인이 위독하단 소식이 오고 아내를 보낼까 말까를 망설일 새 없이 곧 부음이 왔다. 앤은 존에게 같이 갈지 남을지를 물었지 자기가 못 갈 수도 있단 생각은 해보지도 않은 것 같았다. 세 아이들은 하나같이 동부로 가서 취직도 하고 대학도 다니고 있었다. 거칠 것이 없었다. 존은 지점을 몇개씩이나 내놓고 은퇴한 누나를 대신해서 총지배인이 돼 있었다. 한가하달 수도 바쁘달 수도 있는 위치였는데 그는 바쁜 쪽으로 부풀려 말하고 아내 혼자 비행기를 태워 보냈다. 장례를 치르러 가는 상제답지 않게 흥분하고 들떠 보이는 아내를 배웅하면서 존은 막연하고도 우울한 자기모멸감에 사로잡혔다. 마치 이를 갈고 성공한 라이벌에게 아내를 빼앗기는 기분이 들었다. 집에 돌아와 홀로 끊은 지 오래된 담뱃갑을 헛되게 찾다 말고 자기의 이런 어처구니없는 망상에 실소를 금치 못했다. 호상이어서 그런지 장례와 삼우제를 치를 때까지도 전화기를 통해 듣는 아내의 목소리는 평상시나 다름없이 침착하고 명랑했다. 한국서도 이젠 곡을 안하나보지? 그렇게 물어볼 정도로 아내의 목소리에 슬퍼한 흔적은 묻어 있지 않았다. 애통이 심하지 않은 걸로 미루어 삼우제까지만 보면 돌아올 줄 알았는데 어머니나 동기간들이 앞다투어 자기 집에서 다만 며칠이라도 묵어가라고 붙든다는 핑계로 차일피일 하더니 사십구재까지 치르고야 겨우 돌아왔다. 돌아온 아내는 체중이 불어나 둔해 보였고 마중나온 남편을 보고 한 첫인사도 아아, 피곤해였다. 시차 때문일 거라고 눙쳐주면서 부아가 치밀었다. 아내는 정말 지치고 기운없어 보였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하다가 왔기에…… 그는 마치 바람을 피우고 나서 시침떼는 아내에게 하듯이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다. 그는 한국하고도 서울을 마치 정숙한 아내의 마음을 빼앗은 외간남자처럼 인격화하면서 걷잡을 수 없는 적의를 느꼈다. 회갑을 바라보는 나이답지 않은 맹목의 격정이었다. 한국에서 있었던 일을 시시콜콜 알고 싶어하는 그에게 돌아온 아내의 대답은 늘 대접받은 음식얘기에서 맴돌았다. 큰언니네선 며느리가 정통 궁중요리를 선보였고, 작은언니는 허영심이 여전해서 요리사까지 불러다가 차렸고, 남동생은 어찌나 애처간지 앞치마를 두르고 아내하고 음식장만을 같이하고도 맛있다고 칭찬해준 음식은 다 아내의 손맛으로 돌리더라는 둥. 어느 집에서나 극진한 대접을 받은 것 같았다. 그들은 집에서만 먹인 게 아니라 소문난 음식점도 골고루 끌고 다닌 듯했다. 어느 호텔의 프랑스식당 메뉴에서 음식값을 보고 기절할 뻔했다느니, 어느 호텔 뷔페식당에선 값을 생각하고 억울하지 않을 만큼 먹느라 배가 터지는 줄 알았다느니, 교외의 이름난 두부집, 산채백반집 온통 먹는 얘기 천지였다. 음식점이고 동기간 집이고 한우고기를 썼다는 걸 어찌나 밝히는지 미제고기만 먹고사는 자기가 지지리도 가난한 것 같은 기분이 들더라는 얘기도 했다.
“허구한 날 그렇게 잘 얻어처먹고 다녔는데 왜 그렇게 초죽음이 돼서 왔냔 말야, 이 여편네야.”
그는 아내가 뭔가를 숨기기 위해 딴청을 부리는 것만 같아 눈을 부라리며 때릴 듯이 위협도 해보았다.
“당신이 몰라서 그렇지 매일같이 이리저리 끌려다니면서 진수성찬만 먹는 일이 얼마나 피곤한 줄 알아요. 피곤해서 죽는 줄 알았다니까요.”
아내는 정말이지 피곤하고 피곤해 보였다. 죽을 때까지 낫지 않을 것 같은 아내의 피곤증을 보면서 그는 피곤하도록 잘 먹는 나라는 도대체 어떤 나라일까, 그가 태어난 나라에 대해 생소한 혐오감을 느꼈다. 앤의 피곤증은 점점 깊어졌다. 음식에 대해서뿐 아니라 손때 묻은 살림살이, 깍듯이 도리를 지키던 시집식구들, 남편까지 허드레 물건 보듯 시들하게 대했다. 저 여자는 누구인가, 라구나 비치의 수평선을 끌어당기고 말 것처럼 강렬한 눈빛의 잔광은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았다. 시들해하는 건 미워하는 것보다 더 견디기 힘들었다. 그리고 그 일이 났다.
그가 없는 사이 앤은 아이들이 어려서 쓰던 물건들을 다락방에서 내려다가 정원에 설치해놓은 소각통에 집어넣고 불을 지른 것이다. 장난감, 놀이기구, 아이들 키와 체중에 맞게 설계한 의자나 책상 등 그녀가 그 편리함과 우아함에 감탄 감탄하면서 장만한 것들이었다. 사용하는 동안에도 그런 것들은 그녀의 최초의 감탄을 배반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앞으로 몇 아이를 더 기르고도 남을 만큼 튼튼했다. 그래서 손자를 보면 대물림해서 주려고, 또한 한국의 동기간들이 손자를 보면 미제물건 자랑삼아 선물로 보내려고 알뜰하게 모아둔 거였다. 가볍고 색상이 고운 그런 어린이용 가구들은 거의가 합성수지 제품이었다. 검은 연기와 고약한 냄새가 아름다운 풍치를 자랑하는 한적한 교외마을을 덮치자 그녀는 고발당했고, 경찰에서 정신과 의사를 거쳐 심리치료사한테까지 넘어가게 되었다. 그 전문가는 한국에선 지방대학 영문과를 나왔는데 남편 따라 미국에서 살면서 마흔이 다 된 나이에 다시 대학에 가 상담심리학을 전공해 학위를 따고 그 일을 하게 됐다고 했다. 수수한 여자가 잘난 척하지 않고 친하게 굴면서 남의 말을 잘 들어주었다. 남의 속에 든 이야기를 이끌어내는 특별한 재주가 있는 사람처럼 보였지만 앤의 마음의 병을 고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병이 없다고 단정적으로 말했으니까. 스스럼이 없어지면서 앤을 언니라고 부르게 되었고, 자기의 사소한 고민을 털어놓으면서 앤의 조언을 구할 적도 있었다. 주객전도였다. 그가 언니라고 부르는 데 익숙해져서 앤도 그에게 반말을 하게끔 친해졌을 때 그는 앤에게 한국에 다시 한번 다녀올 것을 권했다. 자기는 대학생일 때 이모의 초청으로 미국구경을 해봤는데 보는 것마다 어찌나 좋아 보이던지 한국에 돌아간 후에도 그것만 눈에 밟히고 한국의 모든 것이 후지고 너절해 보여 도무지 살맛이 안 나더라는 것이었다. 우울증에 빠진 딸을 보고 아버지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다시 한번 갔다오라고 여비까지 마련해주어 두번째로 오니까 사람사는 건 다 비슷하다는 게 비로소 보이더라고 했다. 앤은 그 팔자 좋은 얘기가 자신의 우울증과 무슨 상관인지 잘 이해되지도 않거니와 남편에게 더는 미안한 짓을 하고 싶지 않아 그냥 지나가는 말 정도로 들어넘겼다. 그녀의 증세가 그럭저럭 소강상태로 접어든 걸 그녀도 남편도 느끼고 있을 무렵 큰언니로부터 어머니의 건강이 급속히 나빠졌단 소식을 들었다. 소강상태란 덧들이지 않을수록 오래 유지되는 상태라는 걸 그들 부부는 암묵적으로 알고 있었다. 서로 눈치보며 조심스럽게 알아본 결과 몸도 안 좋지만 정신을 놓을 적도 많다고 했다. 모시던 아들네서 버거워해 큰언니네가 모셔왔는데 자주 집을 나가는 일이 생겨 시골 사는 이모네로 보냈다고 했다. 이모라면 어머니의 동기인데 어머니에게 언니가 한분 있다는 건 알지만 서로 멀리 살아서 자주 왕래한 것 같지는 않다. 앤의 이모에 대한 기억은 집에 전화를 처음 놓고 어머니가 처음 한 전화통화가 시골 이모하고였다는 것 정도이다. 그때 이모네는 전화를 놓기 전이어서 이장네로 걸어서 불러낸 이모하고 하도 오래 통화를 해서 아버지가 옆에서 혀를 차던 생각이 나는 걸 보면 왕래는 자주 못해도 서로 그리워하는 자매간이었다는 건 틀림없다. 그뿐이었다. 아버지 장례 때도 이모를 본 것 같지 않고, 그후 한국에 머무는 동안도 이모 소식을 들은 것 같지도 궁금해한 것 같지도 않다. 여태까지의 그런 무관심 때문이었을까, 어머니가 거기 가 있다는 게 생뚱맞게 들렸다. 이건 구박이 아니라 유기라고 생각했다. 서로 잘사는 걸 그렇게 뽐내던 사남매가 어머니 한분을 못 모시고 어머니보다 더 나이먹은 노인한테로 보내다니. 전화로 길길이 뛰는 그녀에게 언니는 누누이 어머니가 원해서 그렇게 해드렸을 뿐이라는 걸 강조했다.
“내가 이럴 줄 알고, 안 알리려고 했는데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가 돌아가셨다면 네가 또 충격받을까봐 알리는 거야. 아버지 장례 치르고 가서도 너 많이 힘들어했다며? 김서방이 얼마나 걱정한 줄 알아.”
“그럼 쉬 돌아가신단 말야?”
“오래 사실 건 아니잖아. 연세가 있잖니? 우리 엄마처럼 경위 바른 분이 치매에 걸릴 줄 누가 알았겠냐?”
“몰라 몰라, 내가 가서 당장 모셔다가 미국병원에서 고쳐놓고 말 거야.”
“이 철부지야, 미국 대통령도 못 고치는 병을 네가 무슨 수로 고쳐. 김서방 속 좀 작작 썩이고 엄마가 정신 아주 놓기 전에 한번 다녀가려면 다녀가. 그렇다고 억지로 오라는 건 아냐. 네 건강도 생각해야 되니까 김서방하고 잘 의논해서 결정해.”
“그러니까 엄마가 정신 아주 놓은 건 아니구나, 그치?”
“가끔 네 생각은 나시나봐. 우리 딸막내 어디 가서 밥이나 안 굶나, 하시면서 먼산을 바라보신단다.”
“딸막내가 뭐야?”
“네가 딸로는 막내 아니냐?”
“그럼 엄마가 내 이름도 생각 안 난단 말야?”
“누구 이름은 생각난다던? 글쎄 병수한테도 댁은 뉘시유, 하신단다. 병수가 누구냐? 엄마가 하늘같이 받들던 맏상제 아니더냐.”
그런 어머니가 딸막내를 찾는단다. 딸막내, 얼마나 예쁜 이름인가. 막내딸보다 더 마음에 들었다. 진작 좀 그렇게 불러주지. 원망인지 그리움인지 모를 격정이 복받쳐 더는 통화를 잇지 못했다.
“비행기에서 못 주무셨나봐요. 시차적응하려면 며칠 걸리실 텐데.”
서울에 거의 다 온 모양이다. 할말이 없어 줄창 눈을 감고 있는 앤에게 조카며느리가 조심스럽게 말을 시켰다. 조카며느리는 큰언니의 며느리였다. 창밖에 대도시의 불빛이 찬란하고 차는 가다 서다를 되풀이했다.
“날 어디로 데려가는 거냐?”
“네?”
“우리 어머니한테로 곧바로 가고 싶은데.”
“오늘밤은 저희 집에서 주무시고 내일 아침에 가셔요. 어머님이 그렇게 하라고 하셨어요.”
“할머니 계신 시골이 그렇게 머냐?”
“여주, 안 멀어요. 한시간에서 두시간 사이. 내일 아침 출근시간 전에 떠나 좀 밟으면 한시간 안에도 갈 수 있을 거예요.”
“너 참 운전을 편안하게 하는구나. 느이 시어머니도 가끔 모시고 다니냐?”
“잘 못 그래요. 바라시지도 않구요.”
“공항이 멀어져서 그런지 김포로 들어올 때보다 마중들을 덜 나오는 것 같더라. 나말고 딴사람들도 말이다.”
“이젠 외국인이고 내국인이고 거의 다 공항버스를 이용하지요. 리무진이 안 닿는 데가 없으니까요. 달랑 저 혼자 마중나온 거 섭섭하신가보다. 이모님 그렇죠?”
“너 혼자라서 섭섭한 게 아니라 핏줄들이 하나도 안 보이는 게 좀 허전하구나.”
“미국서 이모부님이 어머님한테 이모님을 흥분시키지 말라고 신신당부하셨다나봐요. 참 애처가세요.”
앤은 쓸쓸하게 웃기만 하고 대꾸하지 않았다. 그녀가 다시 한국에 나올 수 있기까지 두 사람 사이에 뻔질나게 전화통화가 있었다는 건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오나 가나 병자취급이 다시 그녀를 피곤하게 했다. 아닌게아니라 언니집엔 언니네 식구들 외엔 아무도 와 있지 않았고 저녁상도 조촐했다. 며느리가 나란히 봐놓은 잠자리에 들어서도 언니는 회포를 풀 생각은 안하고 하품 먼저 했다.
“엄만 어느 정도 나쁜 거야? 언니 며느리 착하던데 그런 착한 며느리도 눈치 보였어?”
“눈치는 나도 보여. 여긴 미국보다 더 핵가족이야. 외시할머니가 당키나 하냐?”
“그럼 차라리 양로원으로 보내지 우리가 이모를 언제 봤다고 그리로 보내.”
“그건 엄마가 원해서야. 그쪽에 가셔서 겨우 안정되셨어. 몇집이 다리 뻗고 자게 된 지 얼마 안되니까, 이제 와서 효년 척 평지풍파 일으키지 마라, 알았지?”
“그 정도야? 우리 엄마가. 말해봐.”
“이랬다 저랬다 종잡을 수가 없어. 너도 보면 알 거야. 백문이 불여일견이지.”
“엄마가 무슨 경치야?”
앤은 휙 돌아눕고 이내 언니의 코고는 소리가 들렸다. 잠자리가 뒤숭숭했지만 아주 못 잔 건 아닌 듯했다. 지금쯤 출발해야 하는데 어쩌나 하는 조카며느리의 목소리에 깨어났다. 언니는 벌써 일어났는지 어제 남은 국이라도 데우지 미국서 온 분한테 아메리칸 브렉퍼스트는 좀 그렇지 않니, 하는 잔소리도 들렸다. 그런 두런거림이 싫지 않고 아늑했다. 앤은 벌떡 일어나서 간단히 소세만 하고 조반은 사양했다. 으레 언니가 동행해줄 줄 알았는데 다녀온 지 며칠 안된다며 집에 있겠다고 했다. 왜 그렇게 야박하게 구는지 얄미웠지만 뭐라고 그러지 않고 꾹 참았다.
그녀에게 여주라는 고장은 별로 낯설지 않았지만 전에 와본 적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아마 여주 이천 쌀이라는 소리를 잊지 않고 있어서 친밀감을 느끼는 듯했다. 기름이 자르르 흐르게 잘 지어진 이밥을 풀 때면 어머니는 여봐라 여주 이천 쌀은 다르지, 하며 만족해했다. 행여 조금이라도 윤기가 덜하거나 푸석푸석하면 속여먹었다고 싸전 욕을 할 적도 있었다. 어쩌다 목돈이 생겨 여주 이천 쌀을 가마니로 들일 때는 그리도 흡족해하더니만 안에는 쌀가마니를 싸놓고 밖에는 큰 맷방석에다 입쌀을 고봉으로 담아놓고 됫박질을 하던 옛날 싸전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특산물도 바뀌었는지 도자기를 도매하는 집도 자주 보이고, 여주 특산 맛있는 고구마를 판다는 간판도 심심찮게 보였지만 고구마를 밖에 내놓고 팔지는 않는 듯 실물을 구경할 수는 없었다.
번창한 읍내에서 어머니가 있는 마을까지는 반시간도 더 걸리는 것 같았다. 곡창지대니까 무조건 평야려니 했는데 차가 헐떡거릴 만큼 가파른 고개를 넘고 넘어야 하는 외진 동네였다. 외진 동네지만 몇채 안되는 집들이 다 번듯한데 어머니와 이모가 사는 집은 폐가처럼 퇴락하고 썰렁해 보였다. 이모네 자식들도 다 도회나 읍내로 나가고 이모도 따라나가 한동안 서울 큰아들네서 살다가 갑갑해 못 살겠다고 비워두었던 집을 조금 손보고 사는 중이라는 걸 조카며느리가 운전하면서 도란도란 일러주었다. 다행히 마을에 남아 있는 이모네 시집쪽 친척들이 가까이에서 두 노인을 보살펴주고 무슨 일이 있으면 즉각 자식들에게 연락을 취해줘서 그나마 안심이 된다고 했다. 그 대신 양쪽 자식들이 그 친척이 섭섭하지 않을 만큼 보내는 돈도 쏠쏠하니까 노인들이 구박을 받는 일은 없을 거라는 소리도 했다. 그러니까 혹시 집이 비어 있을지도 모른다고 했는데 인기척에 두 노인이 안방에서 손잡고 나왔다. 처음엔 누가 어머니인지 앤이 분간을 못할 정도로 두 노인은 닮아 있었다. 한 노인이 다른 노인에게
“네 미국딸 왔다. 너 보러 미국서 여기까지 왔대. 아는 척 좀 해봐, 이 등신아.”
그제야 앤은 등신이라고 불린 노인을 얼싸안으며 목멘 소리를 질렀다.
“엄마, 나야 나. 딸막내. 엄마의 딸막내. 뭐라고 좀 그래봐. 미국서 여기까지 엄마 보러 왔단 말야. 착한 딸막내가.”
그러나 어머니의 표정에서 어떤 변화도 읽을 수 없었다. 세 사람은 어둑한 안방에 들어앉고 조카며느리는 구경꾼처럼 조금 떨어져 서 있었다. 이윽고 어머니의 흐릿한 눈동자에 어떤 느낌이 돌아오는 듯하더니 밥먹고 가야지 하면서 일어서려고 했다.
“이모, 엄마가 날 알아봤어요. 봐요, 밥먹고 가라지 않아요.”
“야, 그건 누구한테든지 느이 엄마가 하는 소리야. 느이 엄마가 할 수 있는 소리는 밥, 똥 그런 것밖에 몇마디 안돼야아.”
이모는 흥분하는 앤에게 이렇게 찬물을 끼얹으면서 뭉그적거리며 일어서려는 동생의 어깨를 찍어눌렀다. 조카며느리도 맞아요, 그 소리는 저한테도 하시는 걸요, 라고 서늘한 목소리로 맞장구를 쳤다. 딸막내 왔다고 아무리 외쳐봐도 그 이상의 반응은 얻어내지 못했다.
“야아 미국댁아, 넌 조금 나가 있었음 좋겄다. 동네귀경도 헐 겸 우리 두 늙은이한테 고맙게 구는 우리 일갓집에 인사도 갈 겸. 느이들이 식전에 떠났단 소리 듣고, 밥은 지어놓으라고 벌써부텀 일러놨으니까 곧 올 거다. 니가 그러구 앉았으면 이 화상은 계속해서 밥지러 나갈 테니 찍어누르기도 힘들어 죽겠어야아.”
앤도 더는 참을 수 없는 기분이어서 밖으로 뛰쳐나가긴 했어도 따라나올 줄 안 이모가 안 나오기에 친척집에 인사가는 건 미루고, 동네 한가운데로 난 한길로 걸음을 옮겼다. 인가가 얼마 없는 동네 길답지 않게 반듯하게 포장된 넓은 길이었다. 아마 읍내로 통하는 버스길인 듯했다. 처음엔 도망치듯 빨리 걷다가 마음을 가라앉히면서 차차 천천히 걸었다. 맑은 시냇물이 졸졸 새처럼 지저귀며 길을 따라오고 있었다. 길과 시냇물 사이 누렇게 시든 풀섶에 푸릇푸릇한 건 쑥잎일까, 민들레일까. 오면서 먼산에 잔설을 본 것도 같으나 등덜미에 내려앉은 햇살은 무게가 느껴질 정도로 도타웠다. 무디어졌던 계절감각이 눈뜨는 것 같은 설렘을 따라, 걸어오던 길을 벗어나 시냇가를 바싹 붙어 길 없는 길을 걷다가 편안해 보이는 둔덕을 찾아 앉았다. 시차보다도 더 깊은 피로, 뭔지 모를 것을 찾아 여러 생을 헤맨 것 같은 지독한 피로를 이기지 못해 그녀는 따습고 폭신한 둔덕에 점점 깊이 파묻혔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후남아, 밥먹어라. 후남아, 밥먹어라.”
어머니가 저만치 짧게 커트한 백발을 휘날리며 그녀를 부르며 달려오고 있었다. 아아 저 소리, 생전 녹슬 것 같지 않게 쇠되고 억척스러운 저 목소리, 그녀는 그 목소리를 얼마나 지겨워했던가. 밖에서 놀이에 정신이 팔려 있을 때나 동무 집에서 같이 숙제를 하고 있을 때도 온 동네를 악을 악을 쓰면서 찾아다니는 저 목소리가 들리면 그녀는 어디론지 숨고 싶었다. 왜 그냥 이름만 불러도 되는 것을 꼭 밥먹어라는 붙이는지. 하긴 끼니때 아니면 찾아다니지도 않았으니까 그 소리가 꼭 끼니나 챙겨먹이면 할 도리 다했다는 소리처럼 들렸다. 아침에 늦잠 자는 그녀를 깨울 때도 마찬가지였다. 학교 늦겠다 어서 일어나라 하면 될 것을 꼭 후남아 밥먹어라로 깨웠다. 급한 건 학교가 아니라 밥이라는 듯이. 어렸을 때는 밥먹어라 소리가 그리도 듣기 싫더니 자라면서 후남이라는 이름을 더 싫어하게 되었다. 학교 선생님이 출석을 부르다가 그녀를 한번 볼 거 두번 보면서 이상하게 웃는 것도 기분 나빴는데 너 사내동생 봤냐? 혹은 너 몇째딸이야? 이렇게 물어보는 어른도 있었다. 그녀의 동기간들은 다 병자돌림이었다. 언니들 이름에도 병자를 넣어 지었는데 그녀의 이름만 얻어온 자식처럼 항렬자에서 제외시켰다. 밑으로 사내동생 보라고 그렇게 지었다는 걸 나중에 알았다. 투박하기 이를 데 없는 어머니가 어쩌다 딸에게 애정표현을 할 때도, 밑으로 사내동생을 줄줄이 둘이나 본 신통한 내 새끼, 하는 식이었다. 그럼 난 오직 사내동생을 보기 위해 태어났단 말인가. 처음부터 자식의 고유한 존재가치를 인정하지 않은 이름을 지은 부모, 고유한 존재가치 없이 태어난 인생, 둘 다 싫었다.
“후남아 밥먹어라, 후남아 밥먹어라.”
백발의 어머니가 젊고 힘찬 목소리로 악을 악을 쓰고 있었다.
하여튼 우리 엄마 밥 좋아하는 건 알아줘야 해. 아들자식을 원할 때도 그런 마음이었겠지만 딸들 앞에서 아들을 특별대우할 때도 변명처럼 말하곤 했다. 야아는 제삿밥 떠놓을 애니까라고. 아아, 가엾은 우리 엄마. 그녀는 달려오는 엄마를 한길 한가운데서 맞이했다.
“어디 갔었냐, 밥 뜸드는데. 야아는 꼭 끼니때면 싸돌아다닌다니까.”
그것도 어려서 많이 듣던 소리였다.
“엄마 나 알아? 나 후남인 거, 알아보고 하는 소리야”
“야아가 에미를 놀리네. 밥 다 타겄다. 어여 가자.”
아닌게아니라 집안에선 밥 뜸드는 냄새가 구수하고, 부뚜막 앞에 서 있던 이모와 조카며느리와 그밖의 낯선 여자들이 신기한 얼굴로 제각기 한마디씩 했다.
“미국딸 보고 정신이 돌아오셨나봐요. 안 그래요? 아주머니.”
“얼마나 보고 싶었으면 진작 오시지.”
“정신이 돌아온 건지, 더 달아난 건지 원. 난 십년감수했다. 귀한 손님 왔으니까 반찬 한가지라도 더 챙겨오려고 야아네로 건너가서 찌개 간도 보고 나중에 고구마도 좀 쪄오라고 일르고 있다가보니까 우리집 굴뚝에서 연기가 나지 뭐냐. 마당에도 연기가 자욱하고. 불난 줄 알았어. 이 화상이 이제 안하던 불장난까지 하니 어쩔꺼나 한달음에 달려와 보니 멀쩡하게 밥을 짓고 있지 뭐냐. 곧잘 지었어. 안 쓰던 무쇠솥도 깨끗이 가셨나봐. 밥에 녹물이 하나도 안든 거 보렴.”
녹물은 안 들었는지 몰라도 밥 뜸드는 냄새에는 무쇠냄새도 섞여 있었다. 매캐한 연기냄새도, 연기가 벽의 균열을 통과하면서 묻혀온 흙냄새도, 그 모든 냄새와 어우러진 밥 뜸드는 냄새가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아아 이 냄새, 이 편안함, 몇 생을 찾아헤맨 게 바로 이 냄새가 아니었던가 싶은 원초적인 냄새, 이열치열이라더니 음식 때문에 뒤집힌 비위를 부드럽게 위로하는 이 편안한 냄새. 어머니는 왜 아무 연고도 없는 이리로 왔을까. 나는 또 생전 처음 맡아보는 이 냄새가 왜 이렇게 좋은가. 어머니는 셋째딸을 낳을 때 또 딸일까봐 산파비용 아끼려고 쌀 한말을 이고 시골 친정집에 가서 몸을 풀었다고 한 적이 있었다. 외가는 가난했고 외할머니는 일찍 돌아가셔서 그녀는 철나고 한번도 외갓집이라는 데를 가본 적이 없었다. 난 혹시 이런 집 이런 방에서 이 세상 첫 빛을 본 건 아니었을까.
“나 안방에 조금 누웠다가 밥먹으면 안될까.”
“그랴 그랴, 몸 좀 녹여라. 뺨이 시퍼렇다. 밥 좀 눌으면 어떠냐. 무쇠솥에 눌은 밥은 별미야. 요샌 시골서도 그런 밥 잘 못 얻어먹어. 야아네서도 전기밥솥을 통째로 들고 왔잖냐.”
후남이는 알맞게 부숭부숭하고 따끈한 아랫목에 편안히 다리 뻗고 누웠다. 그리고 평생 움켜쥐고 있던 세월을 스르르 놓았다. 밥 뜸드는 냄새와 연기냄새와 흙냄새가 어우러진 기막힌 냄새가 콧구멍뿐 아니라 온몸의 갈라진 틈새로 쾌적하게 스며들었다. 잠깐만, 어머니가 후남아 밥먹어라, 다시 한번 불러줄 때까지 잠깐만 눈붙이고 나면 모든 것이 다 좋아지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