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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서정인 徐廷仁

1936년 전남 순천 출생. 1962년 『사상계』로 등단. 소설집 『강』 『붕어』 『베네치아에서 만난 사람』, 장편 『달궁』, 연작소설 『용병대장』 등이 있음. sujisn@hanmail.net

 

 

 

쟁몽두

 

 

“전산기 장만했소?”

“했다.”

“반년 버텼으면 오래갔소. 그것 없을 때도 그것 썼지 않소?”

“썼다.”

“그렇다면야 그것 있고 없고 무슨 차이요?”

“차이 없다. 불편만 하더라.”

“공연히 공해 없앤다고 공해를 찾아갔소. 어떻게 불편했소?”

“전자우편 헐라고 우체국도 갔고, 동사무소도 갔다.”

“근천 떨었소. 젊은 아들이 존경했겄소.”

“궁기야 흘렀겄냐, 허라고 놔둔 거 했는디? 귀찮더라. 옛날 편지 부칠라고 우체국에 다닌 것은 까맣게 잊었다. 사람이 간사하더라. 존경이사 했겄냐? 쳐다도 안 보더라.”

“십년 너머 쓰던 것을 하루아침에 끊을 수 있소?”

“왜 못 끊냐? 헌 차 한대 몰다가 처분했더니, 그렇게 가뿐하더라. 옛날 얘기다.”

“이번에도 내친짐에 끝을 볼 걸 그랬소? 안 서운허요?”

“불편하다.”

“있어도 불편허고 없어도 불편허고, 그요?”

“시간을 뺏겨. 그것 벌라고 자가용 굴리고, 비서 두고, 비행기 탄다.”

“그것으로 시간을 버는 사람들도 있소. 도서관, 백화점, 여행사, 우체국, 은행, 병원, 소식, 미인, 그 밖에 그 안에 없는 것이 없소.”

“집에 책 많다. 살 물건 없다. 매일 여행허냐? 편리해서 빠져들면 한나절이 후딱 간다. 손해더라.”

“손익을 따지자면 이익이 많지요.”

“나는 손해가 많다.”

“그러면 안되지요. 일반적으로 사회에 좋다 나쁘다를 따져야지, 내 좋다고 좋고, 내 싫다고 나쁘면, 어떻게 가치가 정립되겄소?”

“왜 안되냐? 나는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좋다고 하는 것들 거의 전부를 나쁘다고 생각한다. 못된 것들만 가려서 좋아한다. 하나도 마음에 드는 것이 없다.”

“말세론이요?”

“아니. 고치고 끝내야지. 지옥 갈 일 있냐?”

“벌써 갔소. 무엇이 그렇게 비위에 안 맞소?”

“니가 대라. 맞는 것을 찾아봐라. 그게 빠를 거다.”

“젊었으면 부모 구존하고, 늙었으면 자식들 잘 자라고, 그러면 복 아니요?”

“니는 양친부모 모시고, 초가삼간 집을 짓고, 토란 같은 새끼들하고, 천년만년 살래?”

“나야, 뭐.”

“왜?”

“축에 낄 자격이 없소.”

“아무도 천년만년 못 산다.”

“집도 오두막이 아니고 서른평 공동주택이요.”

“괜찮어. 요즘 양회궤짝에서 안 사는 사람 어디 있냐?”

“나는 안 괜찮소. 그 얘기 그만 하쇼. 이 갈리요.”

“니도 내 딸 얘기 하지 마.”

“내가 언제 소장 말 꺼냈소?”

“아까 쟁몽두에서 봤단 아는 대장이냐?”

“아, 그건 사실 아니요? 허위를 혐오하고 의견은 의심해도, 진실은 직면허쇼.”

“내 입을 통해서 나오는 모든 나의 말은 내 의견이다. 니 말도 같다. 사실이 어딨냐?”

“왜 없소? 내가 영순이를 오거리에서 만난 것은 사실 아니요?”

“그때 거기에 가 하나만 있었냐? 가 하나만 만났냐?”

“아, 딴사람들이야 관심 없소.”

“니가 걸어간 길거리가 거기뿐이냐? 딴 오거리, 딴 네거리, 딴 세거리는 안 갔냐?”

“왜 딴소리요? 내가 딴사람들 만난 것하고 이것하고 무슨 상관이요? 그건 만난 것도 아니고 부딪힌 거요. 부딪힌 것도 아니고 스친 거요.”

“선택은 니가 했다. 니 의견이고, 니 욕심이다. 누구는 안 스쳤냐? 누구는 안 스치냐?”

“누군지 모르고 지나치는 것이 스치는 것 아니요?”

“사람의 만남은 스치는 것 이상이 되기 어렵다.”

“십년 같이 산 여자하고 저자에서 어깨를 부딪힌 여자하고 같소?”

“같다. 다른 것보다 같은 것이 많으면 같은 것 아니냐? 둘 다 모른다. 찬거리 사러 나온 동네 처자가 더 알기 쉽다.”

“동네 각시가 아니란 말이요.”

“그 여편네라고 사는 데가 없겄냐?”

“내가 모르는데 그것이 무슨 소용이요?”

“그건 니 탓이지 그 여자 잘못이냐? 댁의 사정 아니면, 다 똑같어.”

“이쁜 여자들을 보면 눈알이 튀어나오요. 그것도 내 불찰이요? 저쪽 책임 아니요?”

“관심이 없으면 안 보인다. 니가 가를 본 것, 그것을 나한테 얘기한 것, 다 니 욕심이다. 탐욕에서 주장말고 무엇이 나오겄냐? 탐진치를 버려야 뭣이 보인다.”

“내가 가한테 무슨 못된 마음을 가졌겄소?”

“그야 니가 알지. 지나가는 처녀 보고 반죽 한번 잘됐다고 감탄하는 사람도 있고, 싫다는 여자 염치없이 좇아다니는 찰거머리도 있고, 생각이야 천차만별이다.”

“탄식도 욕심이요? 여자가 머리가 좋으면 용모가 빠지고, 이목구비가 반듯하면 골이 비기 일쑨디, 영덕이는 재색 겸비한 재원이요. 언제 봐도 괜히 기분이 좋소. 미인은 가만있어도 기쁨이고, 의사는 남자가 해도 선생소리 듣소. 이게 바로 금상첨화요.”

“안 이쁜 여의사는 보기에 즐거움이 아니다. 영덕이가 누구냐?”

“덕철이라는 놈 말이요, 그놈이 음흉허요.”

“내버려둬라. 동네 크네기 쳐다보도 못허냐?”

“못 올라갈 나무를 왜 쳐다보요? 지가 어디라고 언감생심!”

“가 나이 서른다섯이다. 낼모래 마흔이여. 여자 나이 마흔이면 잘생긴 년이나 못생긴 년이나 같고, 쉰이면 배운 년이나 못 배운 년이나 차이 없고, 예순이면 서방 있는 년이나 없는 년이나 마찬가지고, 일흔이면 자식 있는 년이나 없는 년이나 매일반이고, 여든이면 돈 있는 년이나 없는 년이나 매한가지고, 아흔이면 밥술 든 년이나 논 년이나 다를 것 없다. 근데, 니가 왜 화를 내냐?”

“걱정도 마쇼. 스물에 배우한테 시집가고, 서른에 감독하고 눈이 맞고, 마흔에 가수하고 배가 맞고, 쉰에 의사하고 살림허요. 이런 일은 옆에서 챙겨야 해요. 중이 어떻게 제 머리 깎소? 동네에서 말도 못허요?”

“줄줄이 줄을 섰냐, 번호표 탈라고?”

“앞뒤뿐만이 아니요. 좌우로도 장사진이요.”

“시집도 안 간 아한테 니가 지금 헐 소리냐? 누구 복장 터지는 꼴 볼 일 있냐?”

“과년한 딸을 촌구석에 처박아둔 죄요. 대처에다 내다놔야 짝이 나설 것 아니요?”

“누가 처박았냐? 헌 고리짝이냐? 누가 가 짝 없다더냐? 그걸 왜 니가 걱정허냐?”

“자식이 처박혔으면 부모가 꼴아박은 거요. 학교를 일등으로 졸업했으면 대학병원에 떨어지요. 보건소가 뭐요, 보건소가? 짝이 있소? 짚신짝도 짝이 있는디 짝 없을라고? 내가 괜한 염려를 했나?”

“가 배필이 없어도 니보고 근심허라는 말 안한다. 좋은 데 있으면 중신은 해라. 보건소가 아니라 보건지소다.”

“남자가 있소, 없소?”

“있다. 감옥소에 있다.”

“그 좁은 데서 뭘 헌다요?”

“들어앉아 있는 놈 나무랠 것 없다. 학생 때는 학생 때고, 졸업을 하고 어른이 됐으면 넓은 세상으로 눈을 돌려야지, 옛날 소꿉장난을 못 잊냐? 그것이 성한 년이냐? 과 껍데기가 뭣이다냐? 공부하는 것들이 어느 겨를에 쌍쌍이냐?”

“공부할 때 눈 맞춰뒀다가 나중에 짝짓소.”

“식 안 올렸으면 백번 눈도장 찍어봤자 소용없다. 열녀 났냐? 지가 무슨 로미오라고.”

“줄리엣.”

“동거하다가도 돌아선다.”

“이혼도 허요.”

“그건 평생 가는 불도장이지만, 언약은 흔적이 없다. 말이 허공에 남긴 형체는 시간을 거슬러올라가기 전에는 찾을 수 없다. 젊은것들이 미래에 살아야지 과거에 연연하냐? 갈길 다 간 늙은이도 뒤돌아보면 눈을 못 감는다. 앞길이 구만린데 몇년 정분을 못 벗어나냐?”

“정이라는 것이 그런 것 아니요? 그게 있으면 눈도장도 금강쇠줄이고, 그게 없으면 불도장도 얼라들 불장난이요.”

“그것도 변한다. 세상에 안 변하는 것이 어디 있냐? 정이 있으면 인연이 생기고, 인연이 있으면 정이 생긴다. 정이 다하면 인연이 끊어지고, 인연이 다하면 정이 끊어진다.”

“세상사 쓸쓸하네요. 왕관을 주고 바꾼 사랑이 변하다니요? 차라리 얼라들 장난 같은 모자가 더 오래갈 뻔 봤소.”

“오셀로가 데스데모나를 목 졸라 죽일 때 뭐라고 한 줄 아냐? ‘애비 말 안 들은 년이 남편 말 듣겠냐?’ 여자가 왜 베니스 원로원 의원 말을 안 들었겠냐? 무어 출신 깜둥이 장군 따라갈라고 안 들었다.”

“오막이 아니라 일막. 남편이 아니라 아버지. ‘그녀는 애비를 속였다. 서방 못 속이겠냐?’”

“부모가 말라면 말아야지, 부모 말 안 들어서 좋을 것이 없다.”

“그것이 장인이 사위 될 놈한테 헐 소리요?”

“무어면 회교도냐? 까무잡잡하지만 흑인은 아니냐?”

“요새는 흑인도 옛날하고 많이 달라졌소. 색깔도 많이 하얀해지고, 아래턱도 많이 들어가고, 입술도 많이 얇아졌소. 십년 전에 중동전쟁을 지휘한 미국 최고위 군인이 지금 같은 곳에서 같은 전쟁을 교섭하는 미국 최고위 관리요. 그는 거의 흑인이 아니요.”

“얼마나 용맹했으면 회교도가 기독교도들의 군사령관이 되었을 거나? 흑인이 미국 합참의장 되기보다 더 어려웠겄다.”

“일본 이세가 그곳 육참총장 되었소. 유태인이 국무장관을 했소.”

“여자 말이냐, 남자 말이냐? 피가 반반씩 섞이면 어느 쪽이냐? 양쪽 다냐, 어느 쪽도 아니냐?”

“모계요. 엄마가 흑인이면 흑인이요.”

“유태인들이 그런다더라. 그 사람들은 씨보다 밭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종자가 아니라 경작이 사람을 만든다고 생각하는 것을 보면 그들은 분명히 성악설을 믿을 것이다. 우리는 안 그런다. 우리는 본성을 믿는다. 하늘이 준 것이 품성이고, 성품을 따르는 것이 도덕이고, 덕성을 닦는 것이 교육이다. 우리는 성선설이다.”

“씨받이는 남의 씨를 받는 거 아니요? 남의 씨도 믿소?”

“대리모는 몸만 튼튼하면 된다.”

“남자가 무충일 때 남의 씨를 받아오는 것 말이요. 말하자면 대리부. 타성바지도 우리집에 오면 우리집 식구가 되는 것은 종자가 아니라 가문, 풍속, 양육 아니요?”

“씨내리는 대가 끊길 때나 한다. 망하는 것보다는 낫다는 말이다. 외손을 젖혀두고 그렇게 해서라도 친손 시늉을 하는 것은 씨 애착 아니냐?”

“흑인도 모계가 아니겄소. 백인 여자가 흑인 씨를 낳으면 백인이 될 리가 없소. 흑인 배에서 나온 백인 씨가 흑인이라면 백인이 낳은 흑인은 백인이어야 하지 않소? 흑인이 낳은 백인도 흑인, 백인이 낳은 흑인도 흑인이라면 불공평허요.”

“흑인은 모계 부계 할 것 없이 검은 피 한방울만 섞여도 흑인이다. 흑인 피가 사분의 일이 섞였을 때는 사분의 일이 흑인이고, 십육분의 일이 섞였으면 십육분의 일이 흑인이고, 조금 섞였으면 조금이 흑인이다. 이것이 그 사람들 법이다. 아마 백인 유전인자가 열성인갑다.”

“십육분의 일이 섞일라면 십육대를 가야 허요?”

“사오백년이사 가겄냐? 순종 흑인이 순종 백인만 만난다고 가정하고, 피가 반감하면 삼사대 안 걸리겠냐? 잡놈을 만나면 더 짧고.”

“조금이라도로 정하기 잘했소, 반 이상이 원칙이겠지만. 만일 말이요, 백인 피가 조금이라도 섞였으면 백인이라고 하면 잘못이요?”

“아프리카 어디 오지에 가면 그런 데가 있을 것이다. 숯덩이 같은 순종들끼리 모여 사는데, 희멀건 것이 하나 태어나면 불결하기 이를 데 없다. 미리를 본 것이 몇시경이었냐?”

“미리라니요? 영옥이 말이요?”

“아예 영애라고 해라. 오늘 가 허탕쳤다.”

“왜 일미터 육십삼센티 나가는 처녀를 천미리라고 허요?”

“별걸 다 안다.”

“동네에서 소장 신상 모르는 것 있간디요? 나는 소장 선생을 영덕이라고 부르고, 되통이는 영순이라고 하고, 조성달이한테는 영옥이요. 딴사람들은 또 딴 이름들을 지었소. 우리는 영짜 돌림으로 부르기로 했소.”

“왜 하필 영짜냐?”

“그것을 모르겄소. 혹시 선상님 아명이 영애 아니요?”

“나 지금 서면 교도소 가야겠다.”

“왜 여기 사람들은 북쪽을 서쪽이라고 하는지 모르겄소. 거긴 왜 가요?”

“선상님 만나로 간다. 니는 병원으로 갈래?”

“아니요. 아직 투석이 안 끝났을 거요. 그거 오래 걸립디다.”

“그것 헐 때 옆에 있어야 하는 것 아니냐?”

“그때는 옆에 사람들 많소. 가족 있어봤자 걸거치기만 해요.”

“언제는 안 걸거치냐?”

“입원실에서는 보호자가 간병허요. 밤낮으로 환자 곁에 붙어 있소.”

“간호원은 뭣허냐? 머리맡에 초인종 누르면 복도에서 졸다가 달려오지 않냐?”

“주삿바늘이 팔목에서 빠지거나 피가 약병으로 역류하면, 간병인이 간호원실로 달려가요. 초인종이라니요? 그런 것이 있소? 아침에 순찰 나온 간호원한테 잘 보일라고 오줌통을 미리 비웠다가 간호 보조원한테 얼마나 혼이 났다고요. 아직 모자도 안 쓴 어린 견습생한테 환자 소변량이 얼마나 귀중한 자료인가를 톡톡히 훈계받았소. 알았어, 내가 말했소. 아저씨는 처음이지만 우리는 맨날 되풀이란 말이요, 그녀가 말했소. 다음부터 조심허시오.”

“청 마지막 황제의 영국인 시의가 아침에, 요강에 싼 똥을 보고 어린 황제의 건강을 진단하더라. 똥 냄새를, 포도주 감별사가 포도주 잔을 코밑에 대고 손바닥으로 바람을 내면서 살살 맡는 것처럼, 심각하게 콧구멍을 벌름거리면서 들이마시더라.”

“오줌 조께 더 싸고 덜 싼 게 그렇게 중요허냐? 내가 또 말했소. 누가 중요하다고 그요? 조무사가 말했소. 여기 안 써넣으면 언니한테 혼이 난단 말이요. 그녀는 언니 때문에 오줌이 중요했소.”

“맞다. 일하는 사람은 하는 일에 만전을 기하고 싶다. 남의 실수나 부주의로 생긴 결함은 자기의 무능이나 나태로 일어난 잘못보다 더 견딜 수 없다. 아마 그의 상사는 딴사람들의 잘못도 그의 능력부족이나 근무태만으로 돌린다. 그것은 옳다. 그는 불평할 수가 없다. 억울하면 화가 더 난다.”

“언니가 아니더라도, 오줌 양은 신장 환자한테는 대단히 중요허요.”

“어떤 것은 안 그러냐? 의사나 간호사가 간섭하는 것치고 환자의 생명에 관련 안된 것이 없다.”

“콩팥이 오줌 걸러내는 데 아니요? 환자가 오줌을 얼마나 쌌느냐를 보고 콩팥이 얼마나 망가졌냐, 다시 말하면 얼마나 덜 망가졌냐, 얼마나 기능이 아직 남았냐, 이걸 알 수 있단 말이요.”

“그러겠다.”

“그걸 알아야 투석량을 조절할 수 있소.”

“그렇구나.”

“투석은 세 가지가 있는데, 크게 두 가지요.”

“그런 걸 다 아냐? 전문가 다 됐구나.”

“환자는 물론이고 보호자도 병을 알아야 해요.”

“그래. 아프면 의사 된다. 좀 어렵겄다만.”

“아니요. 아주 간단해요.”

“다섯 가지나 되는디 간단해야?”

“두 가지라니깐요. 콩팥이 기능을 상실하면 핏속의 잉여수분과 노폐물을 오줌으로 걸러내지 못해요. 과다한 물은 몸을 팅팅 붓게 하고, 피가 더러우면 피로, 구토, 두통, 불면, 식욕감퇴, 성욕감퇴가 오요.”

“똥으로는 안 나가냐? 대소변이 같은 배설 아니냐? 입구는 하나고, 출구는 이웃이다.”

“소화기관하고 순환기하고 구별을 못허요? 이웃이라고 남의 집 함부로 들어가요? 식도로 들어가야 할 물방울이 기도로 한번 들어가보시요. 난리 나요.”

“술 취하면 실수한다.”

“취해도 집에 와서 정신 놓소.”

“옆집 문을 두드렸으면 평소 그 집에 감정이 있었냐?”

“엉큼한 생각이 취중에 진담 됐소.”

“대문짝에다 오줌을 깔겼으면, 술이 덜 취했지?”

“알맞게 올랐소. 그것이 뉘 집 대문인 줄은 알았을 것 아니요?”

“물론이지. 지린내가 오래가더라.”

“그것이 몸속에 쌓이면 사람이 혼수에 빠지요.”

“무엇이든지 쌓이면 해롭다. 더러운 피를 맑게 하는 것은 허파 아니냐?”

“산소가 없으면 몇분 안에 죽소. 오줌을 못 누면 그보다는 오래 사요.”

“투석허라고 기다리는갑다.”

“숨을 쉬자면 공기만 필요하지만, 온몸 방방곡곡에서 수거해온 쓰레기의 독을 피에서 제거하자면 장비와 기술과 시간이 필요허요.”

“그래. 인공 콩팥. 야, 어떻게 신이 만든 장기를 사람이 만드냐?”

“투석기는 콩팥 역할을 하는 가짜요. 진짜와는 하늘과 땅 차이가 있소.”

“가짜라도 놀랍다. 천양지판이 있는 건 당연하지. 만든 데가 다르지 않냐?”

“요강허고 물통보다 조금 더 낫소. 두 가지가 있는데.”

“그래, 두 가지. 세 가지도 있고. 어서 계속해라.”

“고맙소. 하나는 피를 몸 밖에서 투석하고, 또 하나는 피를 몸 안에서 투석허요. 첫번째 것은 관을 목이나 팔목이나 허벅지 정맥에다 꽂아 피를 빼서 독을 걸러내고 정화된 피를 목이나 팔목이나 허벅지 동맥을 통해서 몸 안으로 들여보내요. 장비는 둬 뼘 되는 합성수지 줄 두 개하고, 그 줄들이 들어가고 나온 그릇 하나면 돼요. 그 용기에는 투석액이 절반 채워져 있고, 그 옆을 피가 지나가면 그 사이의 반투막을 통해 핏속의 노폐물들이 용액 속으로 삼투 흡출되어 독이 걸러지요. 이 투석기가 말하자면 인공신장이요. 한번 하는 데 네시간이 걸리요. 그것을 일주일에 서너번 허요. 이틀에 한번 꼴이요. 처음에는 매일 허요. 투석실은 칠층에 있소.”

“가봤냐?”

“아니요. 가보면 뭣허겄소? 노인들은 다 죽어서 목에다 바늘들을 꽂는디, 젊은 사람들은 팔목에다 바늘들을 꽂고 피야 돌든 말든 다른 손으로 부지런히 음식물을 입으로 가져간다요.”

“나 같으면 가본다.”

“나도 마찬가지요. 남의 일 같으면 구경허요.”

“막상 내 일이 아니면 병원엘 안 가지더라.”

“나도 그요. 남의 일에 뭣이 좋다고 궂은일을 도시락 싸가지고 다님서 들여다보요?”

“면회간 짐에 점심은 병원 앞에 나가서 생태탕으로 먹고, 시간이 남으면 한번 볼만허겄다.”

“나도 그럴 작정이요. 법대 졸업생의 환자가 칠층에 가면 한번 따라가 볼 참이요.”

“법대냐? 의대가 아니고?”

“그젯밤에 일일구에 실려온 노인네 아들이 어젯밤에 서울에서 면회를 왔소.”

“빨리 왔구나.”

“반주를 한잔 걸쳤는지, 병든 노친이 불쌍하다고 집안 내력을 소상히 밝힙디다.”

“시끄러웠겠다.”

“입원실이 칠인실이요. 방이 커서 그렇게 비좁지 않소. 간병인까지 보통 열네 사람이 마주보고 있는디, 심심치 않고 마침맞소. 이인실에 입원한 적이 있는디, 거기가 오히려 사생활이 없습디다. 여럿이 있으면 모르는 척할 수가 있는디, 둘이 있으면 화가 났거나 무례하지 않고는 혼자 있는 시늉을 할 수가 없소.”

“환자가 옆의 환자 신경쓰게 됐냐? 법률가 횡설수설이 싫지 않았구나.”

“그는 쌍암 면사무소 소재지에서 십리를 걸어 들어가는 산골에서 태어났소. 매일 왕복 이십리를 걸어서 국민학교를 마치고, 여기로 유학와서 먼 친척집에 얹혀서 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가서 법대를 들어가자, 면에 난리가 났소. 항상 일등을 해서 기대는 했지만, 법대에 들어갈 줄은 아무도 몰랐소. 법대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도 덩달아 법석을 떨었소. 다들 좋아하는디 가만있을 수 있소? 면장이 십리 길 행차를 했고, 면 상설 꽹과리패가 사흘 낮 사흘 밤을 면 구석구석을 누볐소.”

“밤에는 쉬었겠지. 무슨 대학인데?”

“하여튼 어디 법대요. 그게 그렇게 좋소? 똥구먹이 찢어지게 가난헌디, 지가 무슨 대학이요? 면에 법대생 후원회가 결성됐소. 그가 소식을 처음 가지고 왔을 때, 밭에서 일을 하고 있던 그을리고, 지치고, 일에 찌든 그의 어머니는 얼굴에 아무 표정을 나타내지 않았소. 그녀는 흙 묻은 손으로 굽은 허리를 치면서, 왔냐, 고생했다, 하고 말했소. 그건 그가 올 때마다 했던 소리였소. 그는 항상 고생을 했소. 그뿐이었소. 그녀는 그녀의 아들이 하는 소리의 내용을, 그것의 함의를, 충분히 알지 못했소. 며칠 뒤 읍내 술집 각시한테 빠져 있던 그의 아버지가 왔소. 이야기를 들은 그는 그의 멱살을 잡고 헛간으로 끌고 가서 소매통에다 그의 머리를 처박았소. 그는 그를 대항할 충분한 힘이 있었지만, 그를 하고 싶은 대로 하도록 내버려두었소. 그것은 존속에 대한 존경이나 조심이 아니었소. 그때까지 수없이 되풀이돼온 학대에 대한 맹목적 복종의 타성일 뿐이었소. 그는 그 앞에서 언제나 기가 죽었소. 온몸에서 맥이 빠져나가는 것을 어쩔 수 없었소. 나중 그의 장학회가 결성된 다음에도 그의 냉대는 달라지지 않았소. 애초에 돈 때문이 아니었소. 그의 아버지는 자식 학비 걱정할 사람이 아니었소. 그는 그의 자식에 대해서 뿌리깊은 혐오와 멸시를 가지고 있었소. 그도 마찬가지였소. 오줌통 사건이 그의 그에 대한 마지막 기억이 되었소. 그가 서울로 공부하러 간 뒤 그는 집을 나갔고, 그는 그를 다시 만나지 못했소.”

“변호사는 가산을 탕진하고 패가망신한 아버지를 노후에 돕지 않았냐?”

“그 병실의 환자들은 모두 늙은 여자들이요. 일흔 줄의 일곱 노파들은 끼니때 방바닥으로 내려와서 둥글게 모여앉아 원족 나가 들밥 먹는 것처럼 반찬을 같이 나눠먹소. 법대 졸업생의 어머니와 비슷한 청춘을 보낸 노파가 또 있소. 여럿이요. 그의 아버지가 말년에 가난 속에서 비참하게 죽어갔다는 말을 듣고, 한 노파가 업보라고 말했소. 그 말을 들은 그녀의 아들이 화를 벌컥 냈소. 옆 병상에서 노인이, 병든 늙은 에미한테 아직 젊은 아들이 불손하게 목청을 높이는 것을 보고, 천벌이라고 거들었소. 더이상 반론이 없었소. 그 성질 급한 노파는 영상방송을 틀면 시끄럽다고 소리를 질러서, 모르고 켰다가 무안당한 사람들이 얼른 방송을 벙어리로 돌리요. 그 방 방송은 백원짜리 엽전을 넣으면 켜졌다가 삼십분이 되면 저절로 꺼지요. 법대생은 변호사는 아니었소. 그는 그의 이야기만 하고, 그것에 대한 그 방안의 반응에는 아무 의견이 없었소.”

“당사자는 담담한데, 왜 옆에서 열들을 냈을 거나?”

“아무리 남의 일이라고 악담을 허면 쓰겄소?”

“지복순 여사도 원한이 많구나. 험한 세상에 험담 안 나오냐?”

“감방에 안 갈라요?”

“니는 투석 걱정이나 해라. 거기는 하루에 면회가 한번 허용된다. 내가 오전에 오늘치를 했다. 오후에 간 사람은 허탕친다.”

“헛걸음도 시간 정해놓고 허요?”

“면회시간이 돼야 성산지 허산지 알 것 아니냐? 거 뭐냐, 또 한가지가 무엇이냐?”

“무슨 가지?”

“피 거르기. 피 가르기. 피가 우리 몸에 얼마쯤 되냐? 둬 되 되냐? 그걸 다 뽑을라면 시간 걸리겄다.”

“어떻게 다 뽑소? 사람 죽일라요? 사점오 리터면 두 되가웃이나 되겄소. 사람에 따라 다르요. 조금씩 나오고 조금씩 들어가요. 그래서 시간이 걸리요.”

“몸 안에서 허면 인조 콩팥을 몸 안으로 집어넣냐? 그것이 조막만헐 거다.”

“하늘이 만든 것은 담배 두 갑보다 작은디, 사람이 만든 것은 배 안에 넣기는 좀 크요. 인조고 신조고, 아예 투석기가 필요 없소. 배꼽 밑에 옆에, 어느 쪽이든 좋소, 한 치 되는 데다 구멍을 뚫고 합성수지 관을 꽂은 다음, 그 관을 통해서 복강에다가 투석액을 채우요. 한 십분 동안 채우고는 잊어버리고 일상활동으로 돌아가요. 너댓 시간 동안 수업도 하고, 근무도 하고, 정구도 치고, 수영도 하고, 정상생활을 하면, 그동안 복막을 통해서 핏속의 독이 투석액 속으로 스며나가요. 용액이 더러워지면 어디 깨끗한 곳에서 한 십분, 이십분, 합성수지 관을 통해서 만유인력의 힘으로 그것을 몸밖으로 내보내요. 깨끗한 용액의 병은 어깨 높이에 매달고, 더러운 용액을 받을 병은 땅바닥에 내려놓으면 위치에 의해서 동력이 생기요. 이 교환을 하루종일 밤낮으로 너댓 번 하면 그날 일은 끝나요. 지속적 보행 복막투석이 불편하면, 밤에 잘 때만 하는 자동화 복막투석이 있소. 관을 밤에 기계에다 연결해놓으면 기계가 자지 않고 알아서 여덟 시간 동안 너댓 번 투석액을 교환해주요. 그 액이 복막을 통해서 피의 독을 빨아내는 것은 보행 투석과 같소. 낮에 깨어 있는 동안에는 콩팥을 잊어버려도 좋소.”

“병 걱정은 없냐? 돈타령만 남았냐?”

“옛날 같으면 죽을 사람들 많이 연명허요.”

“연명이라니, 죽지 못해 산단 말이냐?”

“병들었다 허면 죽은 목숨이요. 의술이요? 그게 어질인자 인술이건 아낄인자 인술이건, 인술은 사람의 기술이요. 사람의 공사가 하늘의 조화를 따라가겄소? 명의가 오진율 오십 백분율이요. 반은 틀렸다는 얘기요. 최선의 의원과 시설로도 한번 망가졌다고 하면 사람의 몸은 회생불능이요. 오개월 시한부를 오년으로 연장하면 최고의 성과요. 인색한 인술을 만나면, 살 사람이 의료 옆에도 못 가보고 죽는 것은 기본이고, 살아도 참 안할 말로 더럽게 사요. 무엇이 더럽냐? 죽은 것만 못하게 산단 말이요. 그건 어진 인술을 만나도 마찬가지요. 어진 기술이 뭐요? 무료 시혜요? 아니요. 명의가 인술이요. 병을 고치는 것이 인술이요.”

“모두가 명의가 될 수 있냐? 그러면 그 말이 없다.”

“무지와 태만과 불손이 보통이요. 시거든 떫지나 말고, 검거든 얽지나 말지. 전공분야에서 무식은 몰상식이 아니라 직무유기요. 범죄행위요. 몰라서 게으른지, 느려서 멍청한지 모르겄소만, 나사 풀린 바보하고 오만은 인과관계나 선후관계가 아니라 상호 보완관곈 것 같소. 불친절이 다 이유가 있소. 그 주제에 친절했다가는 사기요.”

“야, 직업이라는 것이 창의적이고 아름다운 점도 있지만, 기계적이고 진 빠지는 면도 있다. 환자야 평생에 한번, 몇십년에 한번이지만, 의사는 매일이다. 어쩌다가 긴장도 하고 흥분도 해야지, 날마다 하냐? 몸이 못 견딘다. 의사가 그나마라도 놀라거나 놀라는 척하는 것은 아마 환자가 매번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의사야 급할 것 없다. 환자의 허둥지둥이 아마 전염되었을 것이다. 마찬가지. 의사의 냉담이 옮아서 환자도 그나마 천방지축을 덜할 것이다. 무식도 그렇다. 그게 말이다, 내가 폐병을 앓았다마는 나는 사진 읽을 줄 모른다. 그 병이 걸렸다 하면 오륙년 간다. 그거 투병해가지고 살아남으면 그 분야에서는 도사가 된다. 철문 철커덕하고 닫히는 소리 수백번 듣고 나면, 서당개 삼년에 어쩐다고 사진판독을 한다. 검은 점 흰 점 뒤섞인 혼란에서 숨은 그림이 모습을 드러낸단 말이다. 나도 읽을 줄은 모르지만, 잘못 읽는 것은 옆에서 알겄더라. 그렇다고 내가 의사냐? 어느 작은 것 하나 안다고, 알더라도, 그것 되는 것 아니다. 몸과 병을 다 알아야 한다. 죽지 못해 사는 것도 삶인데, 삶은 그 속에 들어가면 안 보인다. 떨어져서 봐야 나타난다. 보여야 고칠 것 아니냐? 죽고 못 사는 것은 환자 하나로 충분하다.”

“환자가 왜 죽고 못 사요? 살라고 왔소.”

“살아야 사는 것이지, 산다고 다 살았냐?”

“환자는 죽지 못해 사는 것이 아니라, 살지 못해 죽소. 노처녀 시집 안 간다는 말, 노인 죽고 싶다는 말, 장사치 밑지고 판다는 말, 다 거짓말이요. 환자도 마찬가지요. 옆에서 볼 때, 저러고도 살고 싶을까, 저것이 산 것일까, 비쩍 말라가지고 걷지도 못하고, 손목에는 바늘을 하도 꽂아서 더 바늘끝 하나 들어갈 데가 없고, 식염수 병 줄렁줄렁 달고, 정신은 오락가락하고, 비참허요. 그건 보는 사람 생각이요. 당사자는 전혀 참혹하다는 생각이 없소. 참담하다니요? 행복허요. 아직 숨쉬고 있는 것이 기적이요. 기적이 축복 아니면 무엇이 행운이요? 경이를 보고도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은 서 있는 사람들이요. 누워 있는 사람은 마지막 남은 촌각이 금싸라기처럼 귀중허요. 죽으면 무엇이요? 흙이요. 아무리 병신스럽고, 아무리 망측한 꼴을 했어도, 한줌 재보다는 낫지 않소? 사람이 당하면 못할 일이 없소. 중풍으로 반신불수가 된 사람의 걸음마 연습은 전혀 진지허요. 왜? 그는 죽어도 진작 죽었소. 설마 육상선수처럼 걷지 못한다고 불평허겄소? 느그도 아파봐라. 이 말 한마디면 옆에서 그의 한쪽 팔과 한쪽 다리를 질질 끄는 걸음걸이를 비웃는 사람들은 다 해결돼요. 느그도 늙어봐라. 노인은 젊은것들이 안 부럽소. 왜? 그도 왕년에 청춘이었소. 어제 일처럼 선명허요. 젊음은 사랑과 낭만이 아니라 방황과 좌절이었소.”

“사람은 현실을 더 붙잡고 있을 수 없을 때 그것과의 접촉을 끊어버린다. 머리의 가는 동맥이 터져서 피가 뇌를 압박하면 심한 두통을 잊을라고 몸이 졸도한다. 미친 사람이나 중풍환자는 남 보기에는 불쌍하고 처량하지만, 당사자에게는 그것들이 살아남는 최선의, 더러 유일한 방법이었다. 환자의 육신이라고 자구책이 없겠냐?”

“병든 사람이 어떻게 제 몸을 구허요?”

“누가 구허냐? 병든 몸이 병을 안 고치면 누가 고치냐?”

“누가 고치는지는 모르겄소만, 누가 안 고치는지는 알겄소.”

“자연의 자정능력은 제 몸을 깨끗하게 하냐?”

“그럼 더럽게 허요?”

“더럽히면 안되냐? 몸은 깨끗해야 하냐? 사람은 똑똑하고, 잘나고, 멋져야 허냐? 더럽고, 남루하고, 모자라고, 아프면 안되냐? 무엇이 깨끗하고 무엇이 더럽냐? 무엇이 건강이고 무엇이 병이냐?”

“무슨 말을 헐라고 또 그요? 무슨 트집을 잡을라고?”

“장자의 큰 꿈 얘기를 하려는 건 아니다만, 꿈에 술을 마시는 자 아침에 소리쳐 울고, 꿈에 소리쳐 우는 자 아침에 사냥한다. 바야흐로 꿈속에서는 그 꿈임을 모른다. 꿈속에서 그 꿈의 길흉을 점친다. 깬 다음에 그 꿈임을 안다. 또한 큰 깸이 있어야 그 다음에 이것이 큰 꿈임을 안다. 그러나 어리석은 자들이 스스로 깨었다고 여기고, 좀도둑들처럼 그것을 아는 체하여, 군이라 목이라 하니, 고루하다. 죽음을 싫어하는 것이 일찍 고향을 떠나서 돌아갈 줄 모르는 것이 아닌지 어떻게 아냐? 죽은 사람들이 처음에 삶에 매달렸던 것을 뉘우치지 않는다고 어떻게 아냐? 애나라 봉인의 딸 여희는 진나라가 처음 그녀를 붙잡았을 때 울고불고 옷깃을 적셨는데, 왕의 처소에 이르러 왕과 더불어 큰 침대에서 자고 기른 고기를 먹자, 그녀는 울었던 것을 후회했다.”

“이야기 안한다고 하면서 다 했소.”

“니도 병원 이야기 안한다고 하고 다 했다. 안할라면 안한다는 소리를 안한다. 법률가의 어머니는 어떻게 일일구를 타고 왔냐? 죽어가면서도 거기 전화할 줄은 알았냐?”

“이웃 남자가 했소.”

“이웃간에 죽은 줄도 모르고, 죽어도 송장이 썩어야 코를 킁킁거리는 세상인디, 아짐차니 고맙구나.”

“이웃집이라도 아마 백미터는 떨어졌을 거요.”

“집이 그렇게 커? 하나가 크냐, 둘 다 크냐?”

“크다니요? 그 사이에 딴 집이 없다는 이야기요. 어째 이상해서 저녁 무렵에 한번 들러봤다가 사람이 죽어가는 것을 본 거요. 어째 안 이상했더라면, 이상했더라도 그냥 안 들러봤더라면, 환자는 혼자 이를 부드득부드득 갈다가 입에 거품을 물고 기진해서 갔을 거요. 먼 세상은 구급차 없이도 가요. 서울에 잘사는 아들 백이 있으면 뭣허요? 그런 사람들 많소. 그 병실에 희한한 사람들 쌨소. 벌이가 없고 자식이 없어도 의료보험이 나오는 수가 있습디다. 그런 구호환자도 있소. 어디 안 가요?”

“어디?”

“면회.”

“그렇지, 면회. 시간이 안 끝나겄냐? 가는 데 삼십분은 걸릴 거다.”

“오분이면 가요. 차가 많아졌어 봤자요.”

“미국 유타가 모르몬 주냐?”

“모르몬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아마 그런 거 같소.”

“폭이 백리, 길이가 삼백리 되는 소금호가 있다.”

“거기가 산골 아니요?”

“그래. 그 호수 표면이 광양 백운산 꼭대기보다 높다. 거기에 선지자가 나타났다.”

“산세가 험하면 사이비 종교가 창궐허요.”

“신흥종교겠지. 안에서 보면 다 종교고, 밖에서 보면 다 미신이다.”

“거기가 동계올림픽 유치하면서 돈을 썼네 마네로 말썽이 많더니, 경기할 때 우리나라가 얼음타기에서 일등을 하고도 금을 몰수당했소. 텃세가 심했소.”

“이사야가 일곱 금강석 하나 더라는 예수 그리스도 약속 연구회를 만들었는데, 그의 실천요강들 중 하나가 일부다처였다. 원래 말일성도들은 여러 여편네들 거느리는 것을 좋아했는데, 근래에 개명을 해서 그것을 금했다. 이사야는 파문당한 성도였다. 선각은 어디서나 고생을 한다. 그는 신으로부터 마누라를 일곱을 가지라는 계시를 받았다. 머리를 기르고 수염을 깎지 않았지만, 그가 가진 마누라 하나로는 모양새를 갖출 수 없었던 모양이다. 그는 마흔아홉이고 그의 처는 쉰일곱이었다. 그는 길거리에서 구걸을 하다가 오불인가를 적선받은 인연으로 알게 되어 어느 가을 하루 다섯 시간 지붕 고치는 일을 도와준 적이 있는 형편이 괜찮은 집에 여름밤 한시경에 이층 창문을 뚫고 들어가 열네살 난 그 집 딸을 끌고 나왔다. 그녀는 그녀의 동생과 같이 잤는데, 아홉살 난 그녀의 동생이 자는 척하면서 남자를 보았다. 얼마쯤 지난 뒤 문득 생각이 나서 어린 그녀가 그녀의 부모에게 그녀의 언니를 납치한 것은 전에 날품을 팔았던 엠마뉴엘인 것 같다고 말했다. 그녀의 부모는 즉시 경찰에 알렸다. 경찰은 그 신고를 받고도 그들이 용의자로 지목한 리치라는 사람을 딴 죄목으로 옭아다 넣고 조졌다. 그도 그 집에서 막일을 한 적이 있었다. 그는 아니라고 결백을 주장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어디나 경찰은 비슷했다. 아니라고 하면 더 의심했다. 그러는 동안 임마뉴엘 (일할 때는 엠마뉴엘) 다윗 이사야는 그의 늙은 처와 어린 신부를 데리고 그녀의 부모 집에서 멀지 않은 산등성이를 유유히, 또는 총총히, 옮겨다니면서 야영을 했다. 날이 추워지자 그들 셋은 따뜻한 남쪽, 정확히는 서남쪽 서해안 국경 근처 도시에서 월동을 했고, 그를 대신해서 원옥살이를 하던 사람은 여름을 나지 못하고 뇌출혈로 쓰러져서 일어나지 못했다. 해가 바뀌고 봄이 되자 예언자 일행은 소금못으로 돌아왔다. 거의 삼십만불의 현상금이 붙은 그들은 행인들의 신고로 소녀의 부모의 집 남쪽 칠십리쯤 되는 곳에서 붙잡혔다.”

“행복하게 끝난 단순 납치극 아니요?”

“개구리 소년들은 왜 죽었을 거나? 혹시 반항하거나 도주하려다가 참변을 당한 것 아닐 거나?”

“뭘 반항하고, 뭘 도주허요?”

“이 아이는 처음 붙잡혔을 때 동네 사람들이 산기슭을 뒤지면서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듣고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야 옆에 칼 같은 것을 가진 납치자들이 있었을 것 아니요?”

“그렇겠구나. 바닷가 도시에서 피한했을 때는 하루종일 그녀를 혼자 놔둬도 그녀는 달아나지 않았다.”

“앵벌이가 껌을 팔고 소굴로 돌아오요.”

“그들이 붙잡혔을 때, 그녀는 가명에 가장에 가발을 하고 있었는데, 경찰의 심문에 그녀는 그녀의 정체를 밝히지 않았다.”

“대학을 다니던 멀쩡한 처녀가 종교단체에 들어가서는 길거리에서 동냥질을 허요. 집에서 금붙이를 들고 나오는 유부녀들도 있소.”

“그들은 자발적이고, 여기는 납치 아니냐?”

“시작이야 어떻게 됐든, 끝이 같소. 자발적이라고 하지만, 제정신인 사람도 자진하고 강요하고 오락가락허요. 어린아이가 사탕 준다는 말에 졸래졸래 따라갔으면 그게 자의요? 거기 선지자는 여기 선지자들보다 모자란 모양이요. 여기서는 납치 같은 유치한 짓은 안허요. 유괴도 할 필요가 없소. 제 발로 걸어오요. 걸어와서 한우충동이 아니라 복도까지 송곳 꽂을 데가 없소. 아는 무사했소?”

“아홉달 동안 같이 지냈는디, 아무 일이 없었겄냐? 적어도 세 번 성적 교접이 있었던 것으로 조사됐다. 선구자는 그의 본처와 함께 옥중에서 그의 길 잃은 어린 양이 그에게 돌아올 것을 기다리고 있다. 그는 그의 두번째 부인을 버릴 생각이 없다.”

“그의 죄목이 뭐요? 혹세무민이요? 약취유괴요?”

“가중 유괴, 가중 강도, 가중 강간. 신의 의로운 오른팔은 언제 어디서나 외롭다.”

“사람을 안 죽였으니 사형은 안 받았겄소?”

“누구는 사람을 죽여서 십자가형을 받았냐? 사람을 살려서 죽었다. ‘그는 딴사람들을 구했다. 그러나 그 자신을 구하지 못한다.’ 제사장들과 법률가들의 말이다. 아직 재판소로 안 넘어갔다. 유치장에 천만불 보석으로 갇혀 있다. 처음에는 무보석 감금이었다.”

“양아치를 왕초한테 묶어두는 보이지 않는 끈은 공포고, 주부를 가정을 버리고 기도원으로 들어가게 만드는 것은 세뇌요.”

“세뇌하고 공포는 같은 것 아니냐?”

“세상에 같은 물건이 어디 있소? 무서우면 교조주입이 잘되고, 억지로 남의 생각을 바꾸는 것은 폭력이겠지요.”

“맞어. 재편성을 평화적으로 하면 성장이고, 강제로 하면 세뇌다. 예술과 사랑은 나무에 꽃이 피듯 자연스럽게 사람을 키우고, 공포와 혐오는 송나라 사람처럼 모의 싹을 손으로 뽑아주는 법으로 사람을 잡아늘인다.”

“교육과 문화, 전통과 습관은?”

“포로들은 아마 공포에 의한 세뇌를 당한다. 군대는 대개 예방접종을 하느라고 평소에 아무 뜻이 없는 구호를 되풀이한다. 요즘 사람들치고 그 폐해에 노출되지 않은 사람이 없는 광고는 아마 혐오에 의한 세뇌다. 선망일 수도 있는 것을 반복에 의해서 지긋지긋한 증오로 바꾼다. 그게 아마 효과다. 학교, 사찰, 가정, 방송, 체면, 친구는 잘하면 평화고 잘못하면 전쟁이다.”

“깜빵은요? 거기 안 가요?”

“지가 오면 안되냐? 애비는 보건소에 갔다. 왜 왔냐고 하더라. 지가 여기 왔으면 나부터 찾아보는 것이 순서 아니냐? 지가 여기 온 것도 니가 가를 쟁몽두서 안 봤으면 나 모른다. 이게 체면이 됐냐? 내가 니헌테 지킬 체면이 없는 것이 천만다행이다.”

“나도 그렇게 생각헐라요.”

“뭘?”

“병원. 쟁몽두가 어디요? 왜 거기를 쟁몽두라고 허요?”

“남교 오거리. 나도 몰라.”

“여기가 거긴 줄은 어떻게 아요?”

“어려서 들었거든. 그것 허면 할머니가 생각나.”

“쟁몽두라. 다툴쟁자, 꿈몽자, 머리두자요.”

“니는 옳은 소리를 가끔 한다. 바보 같은 소리도 더러 한다. 나는 많이 맞고 가끔 틀린다. 우리는 둘 다 옳기도 하고 잘못되기도 한다. 이왕이면 교대로 하자. 내가 정신이 들 때는 니가 넋이 나가고, 내가 나사가 빠질 때는 니가 꽉 조여라.”

“친구 좋다는 것이 무엇이요?”

“질병과 죽음은 무엇일 거나? 성장이냐, 세뇌냐?”

“그야 공포 아니요?”

“나는 크기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