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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
검은 아테나 여신
오늘의 미국과 고대 그리스
김경현 金炅賢
고려대 서양사학과 교수. 공저로 『서양고대사 강의』 『서양사 강의』 등이 있고, 최근 논문으로 「아우구스투스 시대 문학과 조형물에 나타난 로물루스 왕의 이미지」 「고대 로마의 동성애」 「로마제국과 다문화주의」 등이 있음. cicero@korea.ac.kr
1. 『검은 아테나 여신』의 무대
1980년대 이래 미국은 소위 다문화주의(multiculturalism)의 홍역을 치르고 있다. 아니, 문화혁명의 소용돌이에 빠져 있다. 다수자인 백인남성이 이룩한 주류문화에 동화나 소외의 양자택일을 강요받아온, 소수민족·여성·동성애자 등 다양한 소수자집단이 반란하고 있는 것이다. 반란 목표는 잃어버린 정체성의 회복이며, 그것은 결국 소수집단마다 고유한 문화를 인정받는 것을 뜻한다. 다양한 것들을 하나로 녹여내는 ‘용광로’는 이제 그들이 원하는 미국사회의 이미지가 아니다. 그들은 갖은 야채를 그냥 섞어놓은 ‘쌜러드 그릇’ 같은 다문화적 사회를 꿈꾼다. 다문화주의자들은 동화와 통합 대신 차이·다양성·다원주의의 가치가 존중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대학은 다문화주의운동의 주요 거점이었다. ‘진보’ 성향이 강한 그곳이야말로 그 반문화주의운동에 최적의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먼저 대학내 소수집단에 대한 차별이 주요 표적이 되었다. 입학, 교수임용, 재정배정과 같은 대학행정 일반에서 소수집단에 대한 차별의 시정(혹은 보상)이 요구되었다. 그러나 캠퍼스의 다문화주의운동은 결국 교육기관으로서 대학의 가장 핵심적 기능, 즉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를 쟁점화하기에 이르렀다. 현행 교과과정은 오직 백인·남성 문화만을 반영하고 있다는 것이다. 교과과정 투쟁의 주도세력은 흑인교수와 학생조직이었다. 그들은 유럽중심주의적인 백인문화 일변도의 교육내용, 특히 인문학(그중에서도 역사) 및 사회학 분야의 교과과정을 거부하고, 그 속에 흑인문화도 반영해줄 것을 요구했다.1
그 무렵 흑인 다문화주의운동이 제시하는 흑인문화에는 일견 다소 특이한 면이 있었다. 미국 흑인(Afro-Americans)의 역사와 문화에 못지않게 그 뿌리인 아프리카의 역사와 문화가 강조된 것이다. 사실 그 사정은 이해할 만하다. 노예제와 인종차별의 어두운 기억으로 점철된, 그리고 좋게 보아도 기껏 주류문화에의 성공적 동화라는 의미밖에 찾을 수 없는 미국 흑인의 역사는, 정체성 회복에 그리 유익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흑인 다문화주의자들은 인종적 자긍심을 줄 수 있는 자료를 찾아 아프리카로 돌아갔다. 그리하여 ‘아프리카중심주의’(Afrocentrism)는 흑인 다문화주의의 대명사처럼 되었다. 고대 이집트문명은 ‘아프리카의 영광스러운 과거’로의 여행에서 가장 명백한 목적지 중의 하나였다. 그 여행을 위해 아프리카중심주의는 그동안 미처 가치를 깨닫지 못했던 소중한 안내서들을 재발견했다. 이미 한 세대 이전에 나온 그 출판물들은 몇가지 공통된 메씨지를 담고 있었다. 고도의 문명을 이룬 이집트는 아프리카의 일부이며, 무엇보다 흑인문화라는 점, 고대 그리스문명은 그 전역사를 통해 이집트에서 배웠다는 점 등이었다. 한 흑인저자는 『훔쳐간 유산』(Stolen Legacy)이라는 도발적인 제목의 책에서 고대 그리스의 발명이라고 알려진 철학과 과학이 사실 이집트에서 유래한 것임을 주장했다.2 물론 이런 내용의 아프리카 고대사가 당장 대학의 교과내용에 공식으로 편입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철학 및 역사과목의 강의실 안팎에서, 그 ‘사실’에 대해 부인하거나 침묵하는 백인교수와 흑인학생 사이에 종종 갈등이 일어나곤 했다.3
다문화주의로 인한 이 ‘학원혁명’의 와중에 고전학은 대체로 ‘전문화’의 안전과 평온을 지키고 있었다. 백인의 전유물 같은 그 분야에서 소수집단의 문화적 도전이란 고작 페미니즘에 한정된 것이었다. 그런데 고전학에서 여성연구자의 성비가 비교적 높은 점, 그리고 연구주제와 방법에 있어서 성(gender)문제의 대두는 어차피 세계적인 추세라는 점 등을 감안할 때, 그 도전과의 타협은 그리 심각한 문제가 아니었다. 흑인 아프리카중심주의가 제기한 그리스문명의 기원에 대한 주장에 고전학자들은 거의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저 터무니없는 얘기로 치부되어버렸을 뿐이다. 하지만 버널(Martin Bernal)의 『검은 아테나 여신』(Black Athena)이 출간되면서 사정은 완전히 달라졌다. 버널이 다문화주의운동의 주연급 지식인으로 부각되는 것과 때를 같이해, 미국 고전학계는 다문화주의의 소용돌이 속에 아주 깊숙이 휘말리게 되었기 때문이다.4
적어도 대중적이란 점에서 버널이 거둔 성공은, 몇가지 요인들의 적절한 타이밍이 가져온 상승효과 덕분이었다. 우선 그는 고대 이집트와 그리스문명에 대해 흑인 아프리카중심주의자들과 비슷한 주장을 한 최초의 백인학자였다. ‘검은 아테나 여신’이란 제목을 선택한 것은 특히 흑인독자층을 겨냥한 일종의 상술이었다. 그는 비록 중국학 전문가였지만, 아이비 리그(코넬대학)의 정교수이며, 무엇보다 그의 주장은 고전학의 연구성과를 풍부히 활용한 꽤 전문적 형식을 갖추고 있었다. 당연히 아프리카중심주의자들과 흑인사회로부터 상당한 반향이 있었다. 둘째, 그의 책 두 권이 출간된 시기는, 다문화주의운동이 마침내 대학의 담장을 넘어 초·중등 교과과정의 개정운동으로까지 번지고 있을 때였다. 버널의 책은 분명 그 운동에 플러스 요인이었다.5 고전학은 이 학문외적 상황 외에 학문적인 이유에서도 『검은 아테나 여신』에 적극 대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버널은 고전학이 백인(유럽인) 중심의 인종주의 학문이며, 그래서 이집트를 비롯한 비유럽세계가 그리스문명에 크게 기여한 역사적 사실을 은폐해왔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그의 책 1권이 나온 2년 뒤부터 고전학 및 고대사 관련학계는 버널을 초대해 토론회를 가졌고, 그의 책에 대한 전문가의 비평이 봇물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다문화주의의 상품가치에 예민하던 대중매체가 캠퍼스와 학계에서 일고 있는 이런 선풍적 사건을 그냥 지나칠 리 없었다. 버널의 책을 90년대 최대의 문화현상으로 끌어올린 셋째 요인은 대중매체의 홍보효과였다.
이 글은 『검은 아테나 여신』을 주장과 반향이란 두 각도에서 조명하려 한다. 우선 그 책의 주요 논지들을 다음과 같은 질문을 중심으로 설명하려 한다. 그가 서양의 고전문명, 즉 그리스문명이 아프리카와 아시아적 뿌리를 갖는다고 주장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그 영향은 언제 어떤 형태로 이루어졌다는 것인가? 그리고 고전학이 그 영향의 사실을 인종주의적 목적에서 은폐했다는 음모론의 논거는 무엇인가? 다음으로 그 책에 대한 미국사회의 다양한 반응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검은 아테나 여신』에 대한 아프리카중심주의의 입장은 구체적으로 어떠하며, 아프리카중심주의에 대한 버널의 입장은 무엇인가? 한편 자신의 먼 혈통에 유태적 요소가 있음을 밝힌 버널의 메씨지에 대한 미국 유태인사회의 반응은 어떤가? 마지막으로 고전학 및 고대사 학자들은 버널의 책을 어떻게 평가하는가? 특히 주요한 비판적 논점들은 무엇인가?
2. 『검은 아테나 여신』의 주장
두 권으로 이루어진 버널의 책에는 “고전문명의 아프리카 및 아시아적 뿌리”란 부제가 달려 있다.6 고전문명이란 그리스, 그중에서도 가장 절정기였던 기원전 5~3세기의 문명을 가리킨다. 자유와 민주주의, 문학과 사상 등 그야말로 서양문명의 주요 자산이라 할 것들이 태동한 시기였다. 버널은 그 고전문명을 일으킨 그리스의 주민·문화·언어에 아프리카와 아시아적 요소가 상당하다고 주장한다. 그 단적인 증거는 고대 그리스어의 어원분석 통계이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그리스어의 약 40〜50%만 인도-유럽어 계통일 뿐 나머지는 아프리카의 이집트어와 아시아의 셈어 계통이다. 그리스의 주민과 문화가 그처럼 뒤섞이게 된 경위를 알기 위해, 그는 고전기에서 천년 이상 거슬러올라간다. 특히 청동기시대 후기, 즉 기원전 18〜기원전 17세기를 전후한 시기에 동지중해에서 일어난 인간과 문물의 교류에 그는 주목한다. 물론 그 점에 관한 지식체계가 이미 존재하지만, 그는 그것을 딛고 넘어서려 한다. 1권이 기존의 지식체계에 대한 비판적 검토라면, 2권은 버널 자신의 체계를 구축하려는 시도이다. 첫 시도는 우선 고고학 및 문헌증거에 근거했지만, 언어학 등 다른 증거를 다루는 두 권이 더 기획되어 있다.
1, 2권의 내용을 살피기에 앞서, 먼저 버널의 학문에서 나타나는 전체적 특징 몇가지를 확인해두자. 그것은 두 권의 책에서는 물론, 그후 토론과정에서 버널이 자신의 학문적 전제로 부단히 강조한 점들이다. 비록 그 전제가 『검은 아테나 여신』에서 일관되게 실천되었는가는 따져볼 문제지만, 어쨌든 그 특징은 버널의 세부적 주장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우선 그는 근대의 ‘과학적 역사’와 그것의 실증주의적 방법에 대해 근본적으로 불신하고 있다. 역사 지식의 객관성과 확실성은 환상이거나 현상을 옹호하는 위장술이었을 뿐인 것이다. 증거 자체가 주관적이고 여러가지 해석의 여지가 있으므로, 우리는 다만 ‘더 그럴듯해 보이는 것’–그는 이것을 경쟁적 개연성(competitive plausibility)이라 부른다–을 말할 수 있을 뿐이다. 둘째로, 학문의 변화는 내적 논리에 의해서만 아니라 외부요인, 즉 사회환경의 영향을 받는다. 따라서 한 시대의 학문을 비판적으로 이해하는 데 지식사회학의 접근방식이 반드시 요구된다. 셋째, 지금의 고전학과 역사학은 터무니없을 정도로 ‘전문화’의 수렁에 빠져 있다. 이 신형 스콜라주의의 폐해는 큰 그림(big picturism)을 그릴 때 얻는 새로운 전망을 봉쇄하며, 동시에 대중으로부터 소외된다는 데 있다. 마지막으로, 문명의 발달에 관한 버널의 원칙적 입장은 전파론(diffusionism)이다. 이는 그리스 청동기문명의 성격에 관해 영국의 인류학자 콜린 렌프류(ColinRenfrew)의 고립주의론(Isolationism)에 맞서는 가정이지만, 궁극적으로 문명 일반에 대한 그의 비전을 담고 있다. 문명이란 모름지기 개방적이고 잡종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미디어와의 한 대담에서 “순수성이란 개념은 나의 본질적 적이다”라고 천명한 적이 있다. 분명 그는 다문화주의자이다.
이제 버널이 어떻게 아프리카·아시아에서 그리스문명의 뿌리를 찾아가는지를 살펴보자. 앞서 말했듯이 『검은 아테나 여신』 1권은 그 근원에 관한 기존 정보를 비판적으로 분석한 것이다. 기존 정보는 그리스의 고전기부터 그 책의 출간 직전, 즉 1985년까지 걸쳐 있다. 그 속에서 버널은 아주 상반된 두 지식체계를 발견한다. 하나는 고전기(기원전 480〜기원전 323년)와 헬레니즘기(기원전 323〜기원전 30년)의 그리스 문헌에 나타나는 통념이고, 다른 하나는 최근 200년 동안 서양 고전학이 제시한 가설이다. 두 체계를 버널은 각각 ‘고대 모델’(Ancient Model)과 ‘아리안 모델’(Aryan Model)이라 명명한다. 그는 궁극적으로 ‘고대 모델’이 ‘아리안 모델’보다 더 ‘경쟁적 개연성’이 크다고 생각한다. 아니, 사실 후자는 유럽인 즉 아리안족의 인종주의에 의해 날조된 것으로 간주된다. 그래서 1권에는 “1785〜1985년의 고대 그리스 날조”라는 부제가 붙여졌다.
‘고대 모델’을 구성하는 데 버널이 주로 의존한 것은 역사가 헤로도토스이다. 그밖에 고전기 비극작가 아이스퀼로스와 에우리피데스, 철학자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그리고 헬레니즘기의 역사가 디오도로스의 증거도 동원된다. 그 증거는 대개 전승·신화의 형태를 취하지만, 대체로 여러 작가의 얘기가 일치하는 것으로 보아, 그 속에 ‘사실의 핵’이 담겨 있다고 버널은 판단한다. 그 핵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그리스인은 이집트와 페니키아인으로부터 문자·철학·수학·종교 등 고급 문물을 전해받았다고 믿었다. 이는 그들이 그 동방지역 주민과 혈연관계임을 가정했다는 사실과 깊은 연관이 있다. 가령 헤로도토스와 플라톤은 아테나이(Athenai)인이 나일 삼각주 혹은 리비아의 주민과 혈연관계를 가짐을 시사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동방인과의 문화적·혈연적 유대에 대한 믿음에 대한 가장 적극적인 표현은, 어느 때인가 이집트와 페니키아인이 그리스에 이주, 정착했다는 전승이다.
동방인의 그리스 식민에 관한 전승에서 버널은 두 가지를 가장 주목한다. 하나는 제우스에게 납치된 누이 에우로페(Europe)를 찾아 그리스에 간 페니키아 왕자 카드모스(Kadmos)의 얘기다. 그는 일단의 페니키아인을 이끌고 수색에 나선다. 거쳐가는 그리스의 이곳저곳에 페니키아인을 정착시키고, 그 자신은 남은 페니키아인과 함께 발칸반도 중부의 테바이(Thebai)에 머무른다. 그는 마침내 테바이의 왕이 되고, 그로써 그 도시는 제2건국기를 맞는다는 내용이다. 요컨대 카드모스의 전승은 페니키아의 그리스 식민을 상징한다. 하지만 그것만이 아니다. 그리스인은 그들의 문자(즉 알파벳)가 페니키아에서 유래한다는 믿음을 그 전승과 결부시켰다. “카드모스와 함께 온 페니키아인이 이땅에 정착하면서 많은 것을 들여왔지만,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때까지 그리스에 없던 문자기술이었다.” 헤로도토스만 그렇게 믿었던 것이 아니다.
또다른 전승은 이집트인 다나오스(Danaos) 집안의 ‘출애급’에 관한 것이다. 그는 형제 아이귑토스(Aigyptos)와 그의 50명 아들들에 쫓겨 50명의 딸들을 데리고 이집트를 탈출한다. 방랑 끝에 그들은 그리스의 아르고스(Argos)에 정착하고, 다나오스는 아르고스의 왕이 된다. 이 전승 역시 그리스문화의 기원론을 담고 있다. 다나오스의 딸들이 그리스에 데메테르 여신과 아테나 여신을 들여왔다는 믿음이 그것이다. 버널은 거기서 ‘검은 아테나 여신’의 착상을 얻는다. 그는 아테나이와 나일 삼각주, 리비아의 혈연관계에 대한 전승, 그리고 그 지역에 ‘네이트 여신의 신전’(Ath-Neit=Athena)이 있었다는 점, 그리고 이집트인이 어두운 피부색을 가졌다는 헤로도토스의 증언 등을 엮어, 아테나이의 수호신 아테나가 검은 피부였다고 추론하는 것이다.
버널에 의하면, ‘고대 모델’은 적어도 17세기까지 서양인의 상식이었다. 하지만 18세기 중엽 몇가지 새로운 사조들이 융합하면서 사정은 달라졌다. 우선 계몽사상의 진보관은 유럽의 우월감과 표리를 이루면서, 동양 그중에서도 이집트문명의 역사적 의의를 폄훼하는 쪽으로 작용했다. 오히려 유럽의 일부인 그리스 고대문명이 부각되기 시작했고, 그리스 애호주의는 특히 독일의 낭만주의와 긴밀한 연관을 갖게 된다. 18세기 말, 독일의 괴팅엔대학에서 그리스 문헌을 주로 연구하는 ‘고전문헌학’(Classical Philology)이 탄생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그리고 새로운 요소는 아니지만, 기독교 역시 이집트에 대한 유럽인의 반감을 고조시키는 데 한몫했다고 버널은 주장한다. 하지만 서양에서 ‘고대 모델’의 퇴조가 심화된 것은 1830〜1860년대였다. ‘아리안 모델’이 탄생한 것도 바로 그때였다.
버널은 ‘더 우수한 지식’(Besserwissen)임을 자처한 독일 학문, 특히 괴팅엔의 고전학 교수 카를 뮐러(Karl O. Müller)가 그 패러다임 전환에 결정적이었다고 주장한다. 뮐러의 그리스 연구는 그동안의 두 가지 흐름을 종합한 것이었다. 언어·문헌학 분야에서 성립된 ‘인도-유럽어족’ 가설이 그 하나였다. 그 가설은 대강 오늘날 유럽의 언어와 인도의 산스크리트어 사이에는 언어학적 친족관계가 존재하며, 그것은 아마 그들이 동일한 언어집단의 후예이기 때문일 것이란 내용이다. 그 인도-유럽어족은 기원전 2300년경 북쪽, 그러니까 흑해 주변의 초원지대에서 사방으로 퍼져나간 것으로 짐작된다. 원래 그리스에는 미상(未詳)의 언어를 사용하던 주민–그리스인은 그들을 가리켜 펠라스고스인(Pelasgoi)이라 불렀다–이 살고 있었으나, 파상적으로 침입한 인도-유럽어족에 의해 정복, 동화되고 말았다. 그러니까 그리스문명을 이룩한 주인공은 북쪽에서 온, 대체로 오늘날의 유럽인과 같은 종족이었다.
‘아리안 모델’의 성립에 뮐러의 지대한 공헌은 또다른 흐름에 관련된다. 그것은 사료 비판 혹은 실증주의라는 역사학 방법론으로, 그는 그것을 활용해 ‘고대 모델’을 무너뜨렸던 것이다. 그의 공격전술은 두 가지였다. 우선 그는 어원론과 증거비교의 방법으로 신화·전승의 내용을 분석한 뒤, 그 골자를 해체해버렸다. 다시 말해, 그리스 전승의 메씨지에 확실한 증거가 없음을 논증한 것이다. 나아가 그는 그처럼 근거없는 전승이 형성된 이유를, 그리스인이 실제 동방인과 접촉한 것은 기원전 5〜기원전 1세기이며 그때의 경험을 아득한 과거에 투영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뮐러의 연구성과는 결국 그리스 고전문명은 오직 인도-유럽인이 이룩한 것이며,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기여에 대한 그리스인의 믿음은 다른 증거가 없는 한 신뢰할 수 없다는 의미였다. 독일 고전학의 이 성과는 독일식으로 교육을 개혁한 영국 등 유럽의 다른 나라로 확산되어갔다.
버널에 의하면, 19세기 중엽 독일에서 인도-유럽어족 가설은 이미 비교언어학의 차원을 넘어 인종주의로 전환되고 있었다. 인도-유럽어족은 푸른 눈, 금발, 흰 피부를 가진 아리안족(즉 독일인)과 동일시되고, 그들이 말과 전차로 취약한 남쪽 사람들을 정복한 사실은 아리안족의 인종적 우수성에 대한 증거로 간주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버널은, ‘고대 모델’이 완전히 해체된 것은 인종주의가 절정에 달한 1890년대에서 1930년대 사이였다고 주장한다. 그때까지만 해도 사실 그리스에 대한 이집트의 영향은 무시된 반면, 페니키아인의 식민과 문화전파의 가능성은 부인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반유태적(anti-Semitic) 인종주의가 고조되면서 셈족(Semites)에 속하는 페니키아와 그리스의 관련설도 크게 약화되었다. 이 단계의 그리스 고전학을 버널은 ‘극단적 아리안 모델’(Extreme Aryan Model)로 분류한다. 2차대전 후, 몇몇 유태인 학자가 다시 에게해와 근동, 특히 페니키아 사이에 장기간의 상호교섭을 논증하는 연구를 내놓았지만, 거의 주목을 끌지 못했다. 오히려 1970년대에 이르면 ‘초유럽주의 모델’(Ultra-Europeanist Model)이 학계를 장악한다. 에게해 선사문화를 인도-유럽어족의 ‘고립적’ 발전으로 설명한 케임브리지의 인류학자 렌프류는, 버널이 보기에 절정에 달한 그 인종주의 학문의 두목이었다. 버널은 특히 그 악당 두목을 혼내주려 한다.
『검은 아테나 여신』 2권에는 ‘아리안 모델’을 대체할 버널 자신의 가설이 제시되어 있다. 그런데 1권에 비해 분량도 많을 뿐 아니라(700여면), 지루하고 산만하며 어렵기까지 하다. “정보와 지식은 많지만 정리가 잘 안되는 똑똑한 사람의 얘기를 듣는 기분”이라거나 “대학원 쎄미나에 참석한 느낌”이라는 평이 지나쳐 보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어쨌든 버널이 얘기하고자 하는 큰 그림이 있으며, 그것을 그는 ‘수정된 고대 모델’(Revised Ancient Model)이라 부른다. 아니, 실은 그 자신도 인정하고 있듯이, 기존의 두 모델의 절충안이라 말해야 옳다. ‘고대 모델’을 근간으로 삼지만 ‘아리안 모델’이 이룬 연구성과를 상당히 활용하기 때문이다.
‘수정된 고대 모델’은 앞의 두 모델에 비해 아주 웅장한 시간 스케일을 갖는다. 신석기시대 즉 기원전 7천년까지 거슬러올라가기 때문이다. 이는 무엇보다 인도-유럽어족이 발칸반도에 들어오기 전, 선주민이었던 펠라스고스인의 언어와 문화의 성격을 구명하기 위함이다. 버널에 의하면, 펠라스고스인은 신석기시대 초, 아나톨리아(오늘의 터키)에서 이주해온 인도-히타이트(Indo-Hittite)어의 사용자였다. 한편, 기원전 7000~기원전 3000년 동안 그리스는 아프리카·아시아와 활발한 문물교류를 계속했다고 버널은 주장한다. 그러니까 펠라스고스인은 인도-유럽어족 계통이지만,문화적으로는 꽤 동방화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그후 기원전 2500년 무렵 북쪽에서 인도-유럽어족이 침입해 에게해까지 진출한다. 펠라스고스인의 실체에 대한 버널의 설명은 좀 애매해 보이지만, 크게 문제되지 않는다. 그의 새 모델은 인도-유럽어족이 침입한 이후의 단계에 역점을 두기 때문이다.
버널이 고전기 그리스의 혼성적 주민구성을 입증하기 위해 주목하는 시기는 대략 기원전 1700〜기원전 1570년경이다. 청동기문명이 한창이던 그때, 그리스에는 또 한차례의 민족이동, 즉 정복과 식민이 있었다는 것이다. 버널은 그 식민자 집단을 사료에 힉소스(Hyksos)인이라 기록된 사람들과 동일시하고 그들의 기원을 추적해간다. 그들의 뿌리는 기원전 18세기 쿠르디스탄(Kurdistan), 즉 오늘의 터키·시리아·이라크 3국의 접경지역에 살던 후리아(Hurriah)인이었다. 그곳에 들어오기 전 그들은 이미 인도-유럽어족과 종족·문화적으로 섞인 상태였다. 거기서 다시 남진하면서, 후리아인은 시리아·팔레스타인의 셈족 문화에 크게 동화되고, 또 그 집단에 셈족도 합류한다. 기원전 1740〜기원전 1730년대 무렵 나일 삼각주에 이를 무렵, 그 이주집단을 가리켜 힉소스인이라 부른 기록이 남아 있다. 그들 중 더러는 삼각주 동부지역에 정착하고, 일부는 바다로 나가 크레타 등 에게해 섬들과 그리스 본토까지 진출한다. 그 무렵 동지중해 일대는 그야말로 ‘힉소스인의 세계’였다.
고고학과 문헌은 힉소스인이 그리스의 도처에 진출한 사실을 뒷받침한다. 크레타의 중기 청동기(Middle Minoan) 문물 가운데서 스핑크스, 그리핀(Griffin) 등이 발견되는 것이 그 한 예다. 그리스 본토의 청동기문명을 대표하는 미케네 유적에서 유례없이 화려한 부장품이 출토된 사실도, 정복자 힉소스인이 그 주인이라고 가정할 때 비로소 납득할 수 있게 된다. 그들은 동지중해에 국제적 교역망을 구축한 부유한 동족집단의 일부였기 때문이다. 힉소스인의 침입과 정착은 무엇보다 그리스문화의 최종형성에 아주 결정적 사건이었다. 셈어와 이집트어를 습득한, 혹은 두 언어집단과 합류한 그들이 그리스에 정착함으로써, 그리스어는 인도-유럽어 계통과 이집트-셈어 계통이 각각 절반씩 섞인 혼성어가 되었기 때문이다. ‘고대 모델’의 카드모스와 다나오스의 전승은 동지중해의 그 군사·문화적 사건의 신화적 잔영이었던 셈이다. 힉소스인 가설은 분명 ‘수정된 고대 모델’의 가장 중요한 버팀목이다.
3. 『검은 아테나 여신』에 대한 반향
『검은 아테나 여신』이 출간되자 흑인 및 아프리카중심주의자들로부터 큰 호응이 있었는데, 아프리카중심주의의 대부로 통하는 템플대학의 몰레피 아싼테(Molefi K. Asante) 교수의 반응은 그를 잘 예시한다. 그는 버널을 아프리카중심주의의 원조 역사가로 그 운동의 ‘파라오’로 추앙받는 세네갈의 체이크 디오프(Cheikh A. Diop)와 같은 반열의 학자로 치켜세웠던 것이다.7 사실 버널의 책은, 그 번쇄한 학문적 방법만 제거하면, 아프리카중심주의의 길잡이 역사책과 대체로 비슷한 주장을 담고 있었다. 이를테면 디오프는 이미 30여년 전에 고대 그리스 문헌을 근거로 고전문명의 아프리카적 뿌리를 얘기했고, 나아가 서구학계의 유럽중심주의와 인종주의를 비판한 터였다. 하지만 아프리카중심주의자들에게 아이비 리그의 백인교수 버널의 ‘이단’은 반갑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그때까지 주류에게 대접받지 못하던 미국 흑인문화의 전통이 그를 통해 엄청난 수의 대중에게 전달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프리카중심주의가 전폭적으로 그 책을 지지한 것은 아니었다. 버널이 아프리카중심주의의 ‘고전’을 전혀 참조하지 않은 데 대해 ‘오만하다’는 혹평이 있었지만, 그것은 차라리 사소한 문제였다. 비판적인 아프리카중심주의자는 더욱 본질적인 차이를 의식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버널의 ‘수정 고대 모델’의 힉소스인 가설은 아프리카=이집트=흑인종의 등식에 근거한 아프리카중심주의와 타협하기 어려웠다. 전자는 그리스문명에 결정적 영향을 준 힉소스인을 인도-유럽어족, 셈족, 이집트인의 혼성집단으로 설명하는 반면, 후자는 오직 아프리카 흑인의 역할만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버널이 서양중심주의와 아리안주의를 혐오해 고전문명의 ‘아프리카·아시아적 뿌리’를 기본적으로 문화집단이란 개념으로 접근한 반면, 아프리카중심주의는 훨씬 더 인종주의적 성향을 띠고 있었던 것이다. 다문화주의의 관점에서도 양자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아프리카중심주의가 고유한 문화들의 공존을 주장하는 ‘특수주의적 다문화주의’라면, 문화의 고유성과 순수성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버널은 ‘근본주의적 다문화주의자’인 셈이다.
버널 자신도 그 차이를 알고 있었다. 그는 아프리카중심주의에 공감하지만, ‘나 자신 아프리카중심주의자는 아니며 또 그런 적도 없다. 나는 모든 좋은 것이 하나의 대륙에서 나온다고 생각지 않는다”고 천명했다. 이집트인은 흑인이었는가? 전문가들이 이런 의문을 제기했을 때, 아프리카중심주의와 달리 버널이 한발 물러서는 입장을 취했던 것도 그 차이와 무관하지 않다. 사실 ‘검은 아테나 여신’이라는 도발적 제목에도 불구하고, 정작 책 속에 이집트인의 인종적 특징에 대한 본격적 논의는 거의 없었다. 한곳에서, 그는 이집트 파라오들의 피부색에 대해 아리송한 논평을 하고 지나갈 뿐이다. “그들을 흑인이라 말하는 것이 유익할 수 있다.”(paraohs whom one can usefully call black) 나중에 이집트인의 피부색이 큰 쟁점이 되자 그는 토론과정에서 애당초 구상한 책 제목은 ‘아프리카의 아테나’(African Athena)였지만 결국 “흑인(Black)과 여성(Athena)이 함께 가야 책이 잘 나간다”는 출판업자의 제안을 받아들였다고 실토했다. 요컨대 버널은 대중성을 의식해 아프리카중심주의와 전략적으로 제휴한 측면이 있었다. 스스로 ‘학계의 엘비스 프레슬리’(academic Elvis)란 자조적 별명을 붙인 데서 드러나듯이, 버널 역시 그 점을 부인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를 아프리카중심주의자로 여기는 것은 보수적 백인들뿐이다.
아프리카중심주의에서 나온 가장 강도높은 비판은, 웰즐리대학의 아프리카학 교수 토니 마틴(Tony Martin)이 제기한 것이었다. 그는 아프리카중심주의자들이 너무 성급하게 유태인 버널을 왕처럼 떠받들었음을 개탄했다. 『검은 아테나 여신』을 면밀하게 읽으면, 저자가 그리스문명에 대한 아프리카의 영향보다 셈족의 영향에 더 관심이 있음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8 부분적으로는 일리가 있는 주장이었다. 버널이 밝혀낸 힉소스인의 역사를 보면, 이집트보다는 시리아·팔레스타인이 역사무대로서 더 비중을 갖고 있었다. 그는 그곳의 서부 셈족, 특히 페니키아인의 역할을 중시했다. 하지만 토니 마틴이 버널의 혈통에 유태적 요소가 있음을 빗대어, 그 책의 유태주의를 암시한 것은 분명 부당한 처사였다. 그것은 버널보다는 오히려 반유태주의자로 악명 높은 토니 마틴의 정체성을, 그리고 악화일로에 있는 미국내 흑인사회와 유태인사회의 갈등을 드러내줄 뿐이었다.
버널의 가계에 언제인가 유태인의 피가 흘러든 것은 사실이다.9 바로 그 때문에 버널은 그 뿌리를 찾아, 40대의 나이에 그때까지 해오던 중국학을 팽개치고, 『검은 아테나 여신』으로 결실을 맺은 새 연구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사실 그는 충분히 안전하게 느낄 만큼 ‘영국인’이었다. 영국에서의 교육배경뿐 아니라, 그의 가문의 최근 역사가 그랬다. 그래서 그는 오히려 “만일 내가 유태인이라면 지금과 같은 호응을 받진 못했을 것”이라고 얘기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뿐이 아니다. 그는 공격적 유태주의(Zionism)와 이스라엘의 친서방정책에 대해 아주 비판적이었다. 또한 미국내 유태인 지식인들이, 보수주의자 앨런 블룸(AllanBloom)처럼 서구문명의 유산을 옹호하면서, 아리안주의에 동조하는 경향을 아주 못마땅하게 여겼다. 버널의 책에 대한 미국 유태인사회의 싸늘한 반응, 특히 유태인 고전학자들이 버널의 가장 공격적인 비판자였다는 점은 전혀 의외의 현상이 아니었다. 버널은 이념적으로 미국의 유태계 지식인보다 팔레스타인 출신의 동양학자 에드워드 싸이드(Edward Said)에 더 가까워 보인다.10 그는 한편으로 서구중심주의의 비판자요, 다른 한편으로 유태주의를 넘어서 시리아·팔레스타인의 모든 셈족의 역사와 문화를 아끼는, 말하자면 범셈주의자(Pan-Semitist)이다.
이제 마지막으로 버널의 책에 대한 전문학계의 반향을 살펴보자. 학계의 대응은 1989년 미국고전학회(American Philological Association)가 버널을 참여시킨 토론회를 개최한 이래 본격화되었다.11 특히 버널이 자신의 체계를 제시한 『검은 아테나 여신』 제2권이 나오자 수많은 서평이 쇄도했다. 반응은 전반적으로 부정적이었다. 하지만 “그를 제대로 다루려면 위원회가 필요한 실정”이라 했던 고전학자 몰리 러바인(Molly M. Levine)의 푸념처럼, 다양한 분야의 주제를 다루는 버널의 학제적 연구에 대한 개별적 비평은 그리 효과적 대응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그 푸념은 곧 현실이 되었다. 버널이 취급한 큰 주제마다–이집트사·인종·근동·언어학·그리스사·서양의 근대역사학–몇몇 전문가가 비평을 써 한권의 책으로 엮었다. 1996년에 나온 『검은 아테나 여신 재론』(Black Athena Revisited, Univ. of North Carolina Press)이 바로 그것이었다. 한편 버널 자신도 그간 썼던 비평들에 대한 반론을 모아, 최근 『검은 아테나 여신의 반론』(Black Athena Writes Back)을 출간했다. 아래에 소개되는 버널에 대한 주요 비평은 주로 『검은 아테나 여신 재론』에 의존하고 있다.
우선, 버널이 ‘고대 모델’을 구성한 방법이 타당한가라는 의문이 제기되었다. 그는 지식사회학의 방법을 ‘아리안 모델’에만 적용하고 ‘고대 모델’에는 적용치 않는 이중잣대를 갖고 있다. 그 결과 서양의 근대 고전학자는 모두 인종주의자, 반유태주의자로 매도되지만, 그리스 작가의 신화와 전승은 거의 맹목적으로 신봉된다. 그처럼 일방적인 버널을, 한 평자는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에 비유한다. 오직 성서만(sola scriptura)을 신성시하고, 그에 대한 비평은 무조건 불경하게 여긴 점에서 둘은 비슷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실제 ‘고대 모델’에 관련된 그리스 전승에 지식사회학의 방법을 적용해, 그 신빙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논문도 나왔다. 왜 카드모스·다나오스 전승처럼 몇몇 도시국가가 외부(즉 동방) 식민자에 의해 지배받았다는 전승이 나왔는가? 그 이유는 이렇다. 그런 전승은, 가령 아테나이처럼 토착기원을 자랑하는 도시국가가 적성국가의 평판을 깎아내리기 위해 날조해낸 선전술의 잔영이라는 것이다.
둘째, 버널의 ‘아리안 모델’에도 비판이 가해졌다. 무엇보다 18〜19세기 학자들에게 인종주의 혐의를 씌운 논거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특히 독일의 헤르더(J.G. von Herder), 뮐러, 막스 베버(Max Weber), 그리고 영국의 그리스역사가 죠지 그로트(Gorge Grote)에 대해서는 면밀한 반론이 나왔다. 그 비평의 공통점은 버널의 일반화가 학문적으로 성실치 않다는 지적이다. 그는 문제의 인물들이 남긴 작품 전체가 아니라 극히 일부만 참조하거나, 아니면 주로 2차연구에 의존해 일반화하곤 했다. 게다가 그로트와 막스 베버의 경우에는, 반유태주의 혐의를 근거로 그들을 ‘아리안 모델’로 분류하면서 전혀 논거를 제시하지 않았다. 그러나 몇몇 학자들에 대한 이런 세부적 비판에도 불구하고, 체계적 논증으로 그간의 서양 고전학에 인종주의 경향이 농후했음을 깨우친 점이 버널의 최대공헌이라고 평가하는 견해도 적지 않다.
셋째, 역시 가장 집중적으로 비판받은 것은 버널 자신의 체계인 ‘수정된 고대 모델’이다. 이집트인의 인종적 특징을 둘러싼 논쟁에 대해서는 앞에서 언급한 바 있는데, 현재 논쟁을 촉발시킨 당사자 버널은 다소 뒷전으로 처지고, 다른 이집트 연구자들 사이에 논쟁이 뜨거워진 양상이다. 이 모델의 가장 큰 논란거리는 힉소스인 가설이다. 어째서 근동과 그리스에서 힉소스인의 그리스 정복에 대한 언급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가? 또 이집트와 그외 지역에서 기원전 18〜기원전 17세기를 풍미했던 힉소스인 지배자의 이름이 한번도 발견된 적이 없는 까닭은 무엇인가? 버널이 상상한 힉소스인의 규모와 활약상에 비추어볼 때, 그런 증거 부재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는 것이다.
넷째, 버널의 언어학은 헛점투성이다. 우선 힉소스인의 침입에 의해 그리스의 주민과 언어 구성이 최종 확정되었다는 주장은 자가당착이다. 버널은 기원전 7000〜기원전 3000년 사이에도 아프리카·아시아인의 유입이 계속되었다고 가정했는데, 그렇다면 힉소스인의 침입을 그리스 주민의 언어 형성에 결정적 사건으로 볼 이유가 없다. 이 점은 고전기 그리스어의 3원 구성(인도-유럽어, 셈어, 이집트어 계통)을 어원론에만 의존해 설명하는 그의 방법론의 문제와도 연결된다. 그렇게 수천년 동안 파상적 이민에 의해 두터운 언어층이 형성되었다면, 언어연관은 단지 어휘 차원이 아니라 문법구조에서도 확인되어야 하지 않는가? 버널처럼 그저 어원론만을 탐구하는 방법은 설득력이 약하다. 게다가 버널은 어원론에서조차 문제가 심각하다. 그것은 단지 음성적 유사성을 근거로 억측을 쌓아가는 아마추어의 유희다. 한마디로 그의 언어학은 괴물이다.
그런데 버널에 대한 숱한 비평 중에서 유럽 고전학계의 참여가 드물다는 점은 무엇을 뜻하는가? 『검은 아테나 여신』은 다만 오늘날 미국사회의 특수성을 반영하는 현상에 불과한가? 일견 그렇게 생각된다. 미국 고전학계가 민감하게 대응한 것도 실은 전례없는 ‘학문의 정치화’에 위기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1992년 로마역사가 그루언(Erich S. Gruen)이 미국고전학회의 회장취임연설에서 한 다음 발언은 그런 정황을 잘 집약한다. “흔히 고전학은 엘리뜨주의를 대표하고, 서구전통의 수호자요, 유럽중심주의의 기둥이라 불리며, 공격의 주요 표적이 되곤 한다. 그런 의미에서 요즘 유행하는 다문화주의는 적으로 보인다 (…) 분명히 우리 학문은 이 이상의 적을 필요치 않는다 (…) 다문화주의는 도전이요 자극으로 활용되어야 한다.”12 하지만, 버널에 대한 비평의 대부분이 부정적인 채, 고전학의 자기 재확인에 다름없는 경향을 띠는 것을 보라. 버널과 다문화주의의 도전이 조만간 잠잠해질 정치적 소용돌이에 그치지 않고, 어떻게든 학문적으로 기여할 것을 확신할 수 있을까? 내 생각은 부정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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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inesh D’Souza, Illiberal Education: the Politics of Race and Sex on Campus, Free Press 1991; Nathan Glazer, We are All Multiculturalists Now, Havard Univ. Press 1997, 1〜3장 참조.↩
- 아프리카중심주의의 주요문헌으로는 William E.B. Du Bois, The World and Africa, New York: Viking 1947; George G.M. James, Stolen Legacy, Philosophical Library 1954; Cheikh Anta Diop, The African Origin of Civilization: Myth or Reality, Lawrence Hill & Co 1974(1967년에 출간된 프랑스어판의 번역)가 있다.↩
- 이에 대해서는 아프리카중심주의의 기원과 현황을 분석한 Stephen Howe, Afrocentrism, Mythical Pasts and Imagined Homes, Verso Books 1998, 그리고 아프리카중심주의의 이집트문명에 대한 주장들을 비판한 Mary Lefkowitz, Not Out of Africa: How Afrocentrism Became an Excuse to Teach Myth as History, Basic Books 1996 참조.↩
- 고전학과 다문화주의에 관련된 참고문헌, 특히 로마제국과 다문화주의의 연관에 대한 미국 고전학계의 논의에 대한 비판적 해설을 위해서는 『역사와 문화』 7호에 게재될 필자의 논문 「로마제국과 다문화주의」 참조.↩
- Arthur M. Schlesinger Jr., The Disuniting of Aamerica: Reflection on a Multicultural Society, W.W. Norton & Company 1991, 3장(The Battle of the Schools) 참조.↩
- Martin Bernal, Black Athena: The Afroasiatic Roots of Classical Civilization. Vol. I: The Fabrication of Ancient Greece 1785~1985, Free Association Books 1987; Vol. II: The Archaeological and Documentary Evidence, Free Association Books 1991.↩
- 『검은 아테나 여신』의 출간 직후에 나온 아싼테의 Kemet, Afrocentricity, and Knowledge, Africa World Press 1990 참조. 필자는 그 책 대신 웹페이지상에 있는 그의 다른 글을 참조했음. “Race in Antiquity: Truly Out of Africa,” http://www.asante.net/articles/lefkowitz.html.↩
- Tony Martin, The Jewish Onslaught: Despatches from the Wellesley Battlefront, Majority Press 1993 참조.↩
- 버널은 자신의 조부가 반(半)유태계, 반(半)아일랜드계였음을 밝히고 있다. Martin Bernal, Black Athena Writes Back: Martin Bernal Responds to his Critics, Duke Univ. Press 2001, 402면 주 2번 참조.↩
- 버널과 유태인사회의 관계에 대해서는 Jacques Berlinerblau, Heresy in the University, Rutgers Univ. Press 1999, 162〜77면 참조. 그리고 싸이드의 버널의 책에 대한 반응으로는 『문화와 제국주의』(김성곤 외 옮김, 도서출판 창 1995) 65면 참조.↩
- 그 토론 결과는 존스 홉킨즈 대학에서 발행하는 고전학 잡지 Arethusa의 1989년 특집호(The Challenge of Black Athena)로 출간되었다.↩
- “Cultural Fictions and Cultural Identity,” Transactions of the American Philological Association 123호, Amer Philological Assn 1993, 1〜2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