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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
근대를 다시 본다
동아시아사의 관점에서
미야지마 히로시 宮嶋博史
일본 쿄오또(京都)대학에서 학부와 대학원을 졸업하고 토오꾜오도립(東京都立)대학, 토오꾜오(東京)대학 동양문화연구소 교수로 재직한 후 2002년 5월부터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교수로 재직중. 주요 저서로 『朝鮮土地調査事業史の硏究』 『양반』 등이 있음. 이 글의 원제는 「近代再考–東アジア史の立場から」임. miyajima@hanmir.com
ⓒ 宮嶋博史 2003/한국어판 ⓒ 창작과비평사 2003
머리말
21세기에 들어 세계는 점점 더 혼미해져가고 있다. 미·영 연합군의 이라크 공격이 상징하듯이 국제분쟁을 무력으로 해결하려는 움직임이 강해질수록 무력행사와 테러가 더욱 심해지는 악순환에 빠지고 말았다. 미국은 패권을 유지하기 위해 거침없는 행동을 결의하고 있다. 북한의 핵개발 문제를 둘러싼 움직임도 앞을 예측할 수 없는 채로 여전히 동아시아 지역 최대의 불안정 요인이 되고 있다. 18세기부터 19세기에 걸쳐 유럽에서 생겨난 국민국가체제와 그것을 단위로 한 국제질서의 형성이 두 번의 세계대전과 동서냉전을 경험하면서도 현재까지 그 기본구조를 지속하고 있으며, 그것을 대신할 수 있는 새로운 세계상(世界像)은 불투명한 상태이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세계질서로는 민족·종교·환경 문제 등 여러가지 문제가 계속 분출하는 상황을 피할 수 없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이러한 싯점에서 역사를 되돌아볼 때, 다시 생각해보아야 할 문제가 많다고 여겨지지만, 근대에 생겨났다고 하는 국민국가와 그것을 단위로 한 국제질서의 존재상태를 재검토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과제의 하나가 될 것이다.
특히 동아시아라는 지역에 사는 사람으로서 근대 문제, 국민국가 문제는 절실한 과제라고 생각한다. 19세기 이후의 동아시아야말로 국민국가 문제를 둘러싸고 세계에서도 가장 격심한 변화를 거쳐온 지역이며, 현재도 그러한 고뇌가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이라는 거대국가가 정말 국민국가라는 틀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인가, 또한 대만과 중국의 관계, 한반도의 남북문제와 통일문제는 국민국가의 형성이라는 형태로 이루어질 것인가 등등의 문제가 여전히 21세기에 남겨진 커다란 의문이다. 동아시아가 끌어안고 있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근대 혹은 국민국가라는 틀에 대한 근본적인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데, 동아시아의 지적(知的) 세계에서 이러한 재검토를 시도하는 것은 아직 시작단계에 있다. 이 글에서는 이러한 재검토를 본격적으로 수행할 준비작업으로서, 동아시아 근대사, 근대사상(近代史像)에 대하여 종래의 일반적인 인식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최근에 경제사 분야에서 진행되고 있는 동아시아사의 재조명 움직임을 소개함과 더불어 그러한 새로운 동향이 가지는 문제점을 지적하기로 한다.
1. 동아시아의 역사소외
동아시아 근대 역사상을 드러내는 전형적인 예로서, 우선 한일 양국의 역사교과서에 나타나는 근대사 인식을 보기로 하자. 한일 역사교과서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몇번의 논의가 있었는데, 그 중심적 논점은 한일관계사에 관한 기술이었다. 그런데 여기서는 교과서에 나타나는 근대사 인식의 문제를 검토해보고자 한다. 한일 양국 모두 역사교과서의 내용은 정부가 정한 기준에 따르고 있어 제도적으로 역사연구의 성과를 자유롭게 반영하고 있지는 못하다. 그러나 한편으로 교과서에는 양국 연구자의 일반적인 역사파악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교과서에 보이는 근대사 인식은 양국 역사학계의 평균적인 이해가 반영되어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한일 양국 모두 고등학교 역사교육은 자국사와 세계사로 나누어져 있다. 이러한 사실도 중요한 문제라고 여겨지는데, 우선 일본 교과서부터 보기로 하자. 일본 고등학교 세계사 교과서의 기준이 되는 ‘교육지도요령’을 보면, 전체적으로 크게 다섯 부분으로 되어 있다. (1) 세계사 입문, (2) 여러 지역세계의 형성, (3) 여러 지역세계의 교류와 재편, (4) 여러 지역세계의 결합과 변용, (5) 지구세계의 형성이라는 5부 구성이 그것이다. 그 가운데 ‘근대’에 해당하는 것은 (4)부분인데, 그것은 다시 다음과 같은 다섯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 ① 아시아 여러 지역세계의 번영과 변용, ② 유럽의 확대와 대서양세계, ③ 유럽·아메리카의 변혁과 국민 형성, ④ 세계시장의 형성과 아시아, ⑤ 제국주의와 세계의 변용. 각 교과서는 기본적으로 이 ‘지도요령’에 따라 집필하도록 되어 있지만, 구체적으로 어느 시대를 어디서 기술하는가는 교과서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현재 일본의 고등학교 역사교과서로서 가장 많이 이용되는 Y출판사 교과서의 아메리카를 포함한 유럽(이하, 유럽으로만 기술함)과 동아시아 부분을 예로 들어보면, 다음과 같이 구성되어 있다(제2차 세계대전 이후는 생략함). 우선 유럽을 다룬 부분을 보면, ‘1장 고대문명의 성립’의 ‘2절 지중해문명’(18면), ‘4장 유럽세계의 형성과 발전’(29면), ‘5장 근대 유럽의 형성’(32면), ‘6장 18세기까지 세계문명의 교류’의 ‘2절 유럽문명의 확대’(3면), ‘7장 19세기의 유럽과 아메리카’(42면), ‘8장 아시아의 변혁과 제국주의’의 ‘3절 제국주의의 성립과 열강의 정세’(6면)로, 전체 130면이 할당되어 있다. 한편 동아시아에 대해서는 1장의 ‘5절 중국의 고대문명’(8면), ‘2장 동아시아 세계의 형성과 발전’(33면), 8장의 ‘1절 유럽제국의 아시아 진출’의 동아시아 관련 부분(8면), 같은 장의 ‘4절 아시아 여러 국가의 변혁’ 가운데 동아시아 관련 부분(6면)으로 모두 55면 분량이다.
이렇듯 세계사 교과서는 유럽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시기를 제외하고 유럽·아메리카에 관한 기술은 130면에 이르는 데에 반해, 동아시아 관련 기술은 그 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55면이다. 그러나 이러한 유럽중심주의는 근대 부분뿐만 아니라 고대에도 마찬가지여서, 지중해문명(그리스·헬레니즘·로마 문명)이 18면에 걸쳐 서술되어 있는 데 반해, 중국 고대문명은 8면뿐이다. 이상과 같은 구성은 이 교과서가 세계사 수업에서 유럽 근대의 의미를 가르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과제라고 하는 인식에 기초하여 작성되었다는 것을 단적으로 나타내준다. 유럽 중세, 나아가 고대 지중해문명에 대해서도 그것이 근대 유럽문명을 배태한 원천이기 때문에 상세히 기술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이 Y출판사 교과서에는 2장의 ‘동아시아 세계의 형성과 발전’에서 중국사의 위·진·남북조 시대부터 청(淸)대의 아편전쟁 이전까지 천년 이상에 걸친 시기를 일괄해서 다루고 있다. 이런 구성이라면 보기에 따라서는 이 기간 동안 동아시아 사회는 근본적인 변화가 없었던 것처럼 받아들여질 수도 있을 것이다. 이 교과서 구성상, 교육지도요령에서는 (4)의 근대부분에 들어가야 하는 ‘아시아 여러 지역세계의 번영과 변용’도 이 부분에서 서술하고 있으므로 특히 그러한 인상을 준다. 또 동아시아를 다루는 부분에 한해서 본다면 그 대부분이 중국에 관한 기술이며, 주지하듯이 한국사에 관한 기술은 극히 적다는 특징을 보인다. 전근대 부분에서 한국사에 관련한 기술은 모두 32줄(한 면과 여섯 줄)뿐이다. 이와 같은 특징은 다른 교과서에도 기본적으로 공통된 사항이다. 교과서에 따라 장별 구성이 다르다든지 동아시아 관계에 대한 서술이 조금 많다든지 하는 정도의 차이에 지나지 않는다.
다음으로 일본사 교과서를 보자. 여기서도 세계사 경우와 마찬가지로 Y출판사의 교과서를 예로 들면, 전체가 4부로 구성되어 있고, 제1부 원시·고대, 제2부 중세, 제3부 근세, 제4부 근대·현대로 되어 있다. 분량은 제4부가 전체의 3분의 2를 점하고 제1부, 2부, 3부는 거의 비슷한 분량이다. 일본사 교과서에서 주목되는 것은 세계사와의 관련을 어떻게 파악하려 하는가라는 문제다. 이 교과서에서는 각 부마다 첫 면에 그 부에서 다루는 시기의 세계사 움직임에 대해 간략하게 해설하고 있다. 여기서 세계사와 일본사의 관련에 대한 교과서 집필자의 파악방법이 단적으로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가령 제2부 중세는 다음과 같은 말로 시작된다.
12세기에서 13세기에 걸쳐 유럽은 봉건사회가 하나의 전기를 맞이하는 시기였다. 11세기 말에 시작된 십자군 운동은 성지회복을 기치로 내건 로마교황의 권위를 높였을지언정 봉건사회를 지탱하고 있던 기사계급의 몰락을 촉진하고 오히려 운동의 기지가 되었던 이딸리아 여러 도시를 비롯하여 각지의 도시에서 상공업자의 활동을 이끌어내었다.
이러한 도시의 번창을 배경으로, 르네쌍스나 종교개혁이라는 정신면에서, 봉건사회로부터의 해방이 진행되었다. 나아가 신천지를 찾는 대항해(大航海) 시대가 개막되어 그때까지 닫혀 있던 유럽문화권의 틀을 일거에 걷어치우는 결과를 낳았다.
중세의 주역을 유럽에서 찾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동아시아에 대해서는 송(宋)에서 명(明)에 걸친 움직임이 간단히 서술되면서, “대체로 아시아 사회는 유럽에 비해서 정체적(停滯的)이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제3부 근세에 대해서도 세계사의 주역을 유럽에서 찾고 있다. 우선 15세기 대항해 시대 이후의 유럽 동향을 서술하고 시민혁명, 국민국가의 형성에 대해서 지적하는데, 그에 대해 중국은 “근대화로의 활력이 부족했다”고 서술되어 있다.
이처럼 일본사 교과서에서도 세계사의 주역은 유럽이다. 그것은 세계사 교과서의 유럽중심주의와 대응한다. 그 결과 일본사의 근대는 19세기의 소위 ‘개항’ 이후로 설정된다. 유럽과의 본격적인 접촉, 즉 ‘웨스턴 임팩트’(Western impact)에서 그 근거를 찾기 때문이다.
아시아적, 고전고대적, 봉건적, 근대부르주아적 생산양식을 세계사 발전단계로 파악한 것은 주지하는 바와 같이 맑스였다. 맑스의 이러한 역사파악에 대해서는 많은 비판이 행해져 아직도 그것을 신봉하는 연구자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앞에서 본 일본 역사교과서의 역사상은 맑스적 세계역사상과 훌륭하게 일치한다. 더구나 묘하게도 이념적으로는 맑스주의에 적대적인, 일년 전에 문제가 되었던 후소오사(扶桑社)의 일본사 교과서도 유럽중심주의라는 면에서는 다른 교과서와 똑같이 매우 맑스적이다. 왜 이러한 기묘한 현상이 존재하는가? 그것은 맑스도, 후소오사의 교과서 집필자도, 유럽중심주의라는 패러다임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 역사교과서에 나타나는 이러한 유럽중심사관은 한마디로 19세기적인 역사관이다. 즉 유럽 근대야말로 지향해야 할 목표이며, 유럽적인 국민국가체제를 수립하는 데에 필요한 국민적 역사의식을 심는 것이 역사교육의 목적이었던 단계에서 기본적으로 한걸음도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유럽에서는 16세기의 ‘대항해 시대’ 혹은 더 거슬러올라가서 14세기의 르네쌍스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하는 근대가 일본에서는 19세기 중엽의 웨스턴 임팩트에서 시작했다고 하는 괴리가 발생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전의 일본은 세계사 교과서에 나타나지 않는 ‘근세’라고 하는 매우 기묘한 시대구분에 기초하여 파악되는 결과를 낳은 것이다.
역사교과서가 이상과 같이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이것을 사용하여 역사를 배우는 학생들은 틀림없이 다음과 같은 역사상을 갖게 된다. 하나는 ‘근세’까지 일본의 역사는 유럽 근대사 이상으로 먼 세계의 일처럼 느껴질 것이다. 또 하나는 일본사를 이해하는 데에 동아시아라는 지역틀을 필요로 하지 않는 역사상이다. 그리고 이러한 역사상에 동반된 당연한 현상으로 일본의 고교생들은 유럽에 관한 지식은 풍부하나 동아시아에 관해서는 기초적인 지식조차 없는 채로 대학에 진학하거나 사회인이 된다는 것이다.
가령 홉스·로크·몽떼스끼외·루쏘·칸트 등 유럽 사상의 형성에 큰 역할을 한 인물에 대해서는 상세히 배운다. 하지만 동아시아 역사에서 그들 사상가보다 나으면 나았지 못지않은 의의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되는 송대의 여러 사상가에 대해서는 거의 아무것도 배우지 않는다. 앞에서 언급한 Y출판사 교과서에는 송대 사상가로서 등장하는 사람은 주자(朱子)밖에 없으며, 더구나 주자학에 대해서는 ‘송대의 문화’라는 제목으로 “경전의 자구 해석에 사로잡히지 않고 유학의 정신을 분명히하려 한 송학(宋學)이 일어났다. 남송의 주희(朱熹)가 이것을 집대성하여 주자학이라 불린다”라고 서술될 뿐이다. 이런 서술로 주자학이 어떠한 사상이며 그 역사적 의미는 무엇인가를 이해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할 것이다. 주자학을 이렇게 취급하는 것은 다름아니라 유럽 근대사상에 비해서 특별히 상세하게 가르칠 필요가 없는 것, 현재적인 가치를 갖지 못하는 것으로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동아시아라는 틀 안에서 일본사를 위치짓는다고 하는 시각이 완전히 결여되어 있는 것도, 설령 일본이 과거에 중국이나 한국과 깊은 관계를 가지고 여러가지 영향을 받았다고 해도 그러한 과거는 현재적인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고 이해되고 있음을 나타낸다. 이러한 교과서의 구성이 동아시아의 역사소외를 낳는 최대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일본사 교과서가 일국사적 관점에 익숙해져서 마치 유사 이래 일본사라는 것이 존재했던 것처럼 구성하는 것도 유럽중심사관과 그 이면의 동아시아적 관점의 결여라는 문제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생각한다. 국민국가적 역사학에 대한 비판적 검토가 필요하다고 주장되고 있지만, 그것은 현행 교과서에는 거의 반영되어 있지 않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지면관계상 상세히 설명할 수 없으나 일본교과서의 이러한 문제점은 한국 역사교과서에도 공통으로 나타난다. 유럽의 근대를 가장 중시하는 구성이나 동아시아 역사의 중국중심주의(한국 교과서에서 일본사의 비중은 전근대에 한해서 보아도 일본 교과서의 한국사 비중보다는 상당히 높고, 비교적 균형이 잡혀 있다)가 그러하며, 한국사에서 ‘근세’라는 독특한 시기구분을 설정하는 것에서도 참으로 유사한 특징을 볼 수 있다. 한일 양국의 관계사, 특히 근대 일본에 의한 침략과 식민지 지배의 문제에 대해서는 일본 교과서와 큰 차이를 보이나,세계사를 파악하는 시각이나 그 안에서 자국사를 위치짓는 등의 기본적인 구성은 똑같다고 할 수 있다.
현싯점에서 근대를 재고(再考)하려 할 때, 앞에서 언급한 역사교과서의 근대 역사상을 극복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단지 유럽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에 그치지 않고 그것을 대신할 수 있는 역사상을 제시할 필요가 있다. 이때에 동아시아 전체를 시야에 넣어서 역사를 구상해야 하는데, 다음엔 그러한 새로운 동아시아상의 모색에 관한 최근의 연구동향을 비판적으로 검토해보자.
2. 리오리엔트(reorient)?
새로운 근대 역사상을 구상하기 위해 여기서 주목하고 싶은 것이 있다. 최근 들어 16세기부터 18세기에 걸친 동아시아 역사상의 재조명이 획기적으로 진전되고 있다는 점, 더구나 그것이 단지 16〜18세기만의 문제가 아니라 19세기 이후의 동아시아사가 그전의 역사와 강한 연속성을 갖는다고 주장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 대표적 일례가 최근에 한국어로 번역된 프랑크(Andre G. Frank)의 저서 『리오리엔트』이다.1
일찍이 신종속론 주창자로 명성을 떨친 프랑크는 그 이론이 그리는 세계역사상이 현실적으로 파산한 가운데 이번에는 이전의 주장을 크게 전환해 18세기 말까지의 비유럽지역, 특히 중국·인도의 경제성장을 높이 평가하고 세계경제의 중심이 아시아에 있다고 하며, 18세기 말까지의 유럽은 유라시아 세계경제의 주변부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신종속이론은 어떤 의미에서 극단적인 유럽중심주의라고 할 수 있으나, 그 주장의 기수였던 그가 이번에는 전면적으로 유럽중심주의를 비판하면서 논단에 재등장하였다. 그 배경에는 일본·동아시아 니즈(NIEs)의 고도경제성장에 이어 1980년대 초부터 시작된 중국의 개방정책과 사회주의 시장경제하의 경제성장이라는 일련의 사태가 발생한 가운데 21세기에는 동아시아권이 세계경제의 견인차가 될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점이 작용한 것이다.
프랑크의 저서는 구미 학계에서의 유럽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이라는 성격이 강하고 다소 이념적인 것으로 21세기 동아시아상을 무조건 낙관시하는 점이 두드러진다. 그런 의미에서 전적으로 찬성할 수 없는 면이 있지만, 중요한 것은 그의 이러한 역전이 최근의 새로운 연구동향에서 강한 영향을 받았다는 데에 있다. 즉 미국 학계를 중심으로 아시아, 특히 중국의 경제사에 관한 재검토가 진행되어, 적어도 18세기 말까지는 중국이야말로 세계경제의 중심이며, 16〜18세기 사이에 인구증가나 일인당 GDP 성장률에서 중국이 서구에 비해 결코 뒤지지 않았음이 밝혀지고 있다. 포머런즈(Kenneth Pomeranz), 빈 웡(R. Bin Wong) 등의 연구가 대표적이다.2 그들의 연구는 18세기 말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나기 이전의 중국과 서구의 경제를 비교하면 시장경제의 발달, 농업의 상업화, 소위 프로토(proto) 공업화의 진전 등 여러 측면에서 양자 사이에 큰 격차가 없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따라서 영국에서 최초로 산업혁명이 일어났던 것은 그전에 영국경제가 다른 지역에 비해 발전했기 때문이 아니라, 말하자면 우연의 일치로, 포머런즈에 의하면 ‘일탈’(the great divergence)로 이해된다.
이들 연구의 주된 관심이 산업혁명까지인 것에 대해 일본의 스기하라 카오루(杉原薰)는 이러한 연구동향을 수용하면서 20세기까지의 동아시아 경제사 장기동향을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관점에서 분석한 논문을 발표했다.3 스기하라는 여기서 OECD(경제협력개발기구)의 개발쎈터를 거점으로 한 메디슨(Angus Maddison)의 장기통계분석4에 의거하여 20세기까지의 동아시아 경제사를 1500년부터 1820년까지, 1820년부터 1945년까지, 1945년 이후 등 세 시기로 구분하여 분석하고 있다.
스기하라 논문의 요지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① 제1기와 제3기에서는 동아시아 경제성장이 서구(미국·캐나다를 포함함)를 상회하고 있으며, 다만 제2기에만 역전됐다. ② 동아시아 공업화의 패턴은 서구가 자본집약적·자원집약적인 데에 반해 노동집약적이다. ③ 동아시아의 이러한 패턴은 제1기의 농업을 중심으로 한 ‘근면혁명’(영국의 산업혁명industrial revolution에 대해 비유적으로 사용되는 industrious revolution의 번역이며, 일본의 저명한 인구사 연구자, 하야미 아끼라速水融에 의해 제창된 개념이다)을 기반으로 한 공업화로 파악할 수 있다. ④ 지금까지의 역사적 경험에 비추어 비(非)구미지역의 공업화 방향은 서구적인 패턴보다 동아시아적인 패턴이 더 적합하다.
지금까지는 영국의 공업화 패턴을 전형적인 것으로 이해하고 그것에 비해 동아시아의 패턴은 노동생산성 면에서 열등한, 다소 비효율적인 것으로 여겨져왔다. 이에 대해 스기하라 논문은 동아시아의 노동생산성이 상대적으로 낮음을 인정하면서도 이는 동아시아의 요소부존(要素賦存, 노동력이 풍부하고 자원·자본이 희소함)을 고려하면 오히려 합리적인 선택이었다는 것이다. 나아가 이러한 동아시아의 공업화 패턴이 세계 많은 지역에 더 적합하다는 것을 적극 주장함으로써 공업화의 유럽적 패턴의 지위를 상대화하였다. 이것은 공업화라는 문제를 파악하는 시각에서 유럽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다. 그로부터 일보 전진하여 동아시아적 패턴을 공업화의 중심에 둔다는 의미에서 종래와 정반대의 시각을 제공하는 것이며, 프랑크의 주장과 통하는 바가 있다.
이처럼 최근에 많은 경제사가들이 동아시아의 ‘복권(復權)’을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20세기 후반부터 동아시아지역의 급속한 경제성장, 20세기 말부터 중국의 거대한 변화 등의 현실에 직면하여 이러한 동향의 역사적 배경을 규명할 필요성이 이들 연구를 출현시켰다고 볼 수 있다. 지금 동아시아의 ‘복권’은 주로 경제사 분야에 한정되어 있고, 또한 이들 연구에 여러가지 문제점이 있는 것은 사실이나 앞으로 이러한 연구경향이 점점 강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문제는, 이들 최근 연구가 주장하는 것을 인정한다면, 앞에서 본 역사교과서의 근대사 인식이 근본적으로 개정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즉 현재의 한일 양국 교과서는 르네쌍스로부터 ‘대항해 시대’, 종교개혁, 절대주의, 계몽사상의 등장, 시민혁명, 산업혁명으로 이어지는 16〜19세기 유럽의 발흥을 세계사 편성의 기축으로 삼고 있으나, 이는 19세기 유럽과 동아시아의 ‘역전’, 그에 기초하여 수립된 유럽중심사관을 그대로 받아들인 역사인식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스기하라 논문의 인상적인 한 구절을 소개해두기로 하자.
만약 1820년에 세계라는 존재가 끝이 났다면 가상의 세계사 서술가는 분명 (동아시아의) 근면혁명에 촛점을 맞춘 경제사를 서술했을 것이다. 근대 서구 유럽의 발흥이 중요하긴 하지만 부수적인 장으로 취급되었을 것이다. 우리는 유럽의 우월성을 투영하고자 하는 경향의 저 19세기적 관점을 따라가서는 안된다.
3. 동아시아 근대에 대한 재고
나 자신도 위에서 소개한 최근의 연구동향,즉 16〜18세기 동아시아에 대한 새로운 파악에 기본적으로 찬성하는데, 이 점을 전제로 근대역사상을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16〜18세기 동아시아사를 다시 보고자 하는 작업은 지금까지 기본적으로 경제사 분야에 한정되어 있으며, 또한 19세기 이후 동아시아사와의 관련성에 대해서 여전히 초보적인 언급에 머물러 있다는 측면에서 앞으로 더욱 검토를 요하는 문제가 많다. 무엇보다 이들 새로운 연구동향의 최대 결함은 21세기의 동아시아상이 지나치게 낙관적으로 묘사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낙관론은 종래의 유럽중심주의를 비판한다는 점에서 유효한 관점일지도 모르나, 동아시아에 사는 우리로서는 곧바로 추종하기는 어렵다. 동아시아가 현재 안고 있는 여러가지 문제점을 역사적으로 파악하기 위해서도 18세기까지의 역사를 다시 볼 필요가 있다. 동아시아의 ‘성공 이야기’를 넘어서 21세기를 전망하는 근대역사상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문제들이 밝혀져야 할 것이다.
먼저 경제사 분야에 대해서 말하자면 동아시아의 ‘근면혁명’이 생긴 과정에 대해 더욱 구체적으로 구명(究明)할 필요가 있다. 최근 연구는 중국 송대에 출현한 농업상의 획기적인 변화와, 16세기 이후에 그것이 동아시아 전체에 확산돼간다는 점을 중시하고 있다. 여기서 농업상의 획기적인 변혁이란 강남델타의 개발이 진전되었다는 것인데, 송대의 강남델타 벼농사에 대해서 그것이 매우 조방(粗放)적인 기술로 이루어졌다는 유력한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나 자신도 중국농업의 참된 획기적 변화는 16세기 강남델타의 집약적 벼농사의 확립이며, 이것이 동아시아 ‘근면혁명’을 가능케 한 가장 기초적인 요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나, 이러한 점에서 더욱 구체적으로 밝힐 필요가 있다. 동시에 더 큰 문제로 지적할 수 있는 것은 동아시아의 집약적 벼농사의 발전을 올바르게 위치짓기 위해서는 지금까지의 생산력 파악에 있어 유럽중심주의적 관점, 즉 노동용구(농업으로 말하면 농구)의 발전을 기준으로 파악하는 방법에 대한 비판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동아시아의 벼농사 발전에는 노동용구보다도 토지 자체의 개량과 그를 위해 시행되는 토지에 대한 장기적 투자가 결정적으로 중요하며, 이것이 노동집약적 생산력 발전의 기초를 이루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하나 농업생산력 문제와 관련해 중요한 것은 동아시아 농업의 획기적인 변화가 단지 농업상의 변화에 머무르지 않고 사회의 존재형태 자체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는 시각을 확립하는 것이다. 최근의 연구는 농업 변화를 중시하면서도 그것만을 강조하는 경향이 강하고 상업적 농업의 발전이나 화폐경제의 진전, 국제무역의 활발화 등 그 영향을 순경제적인 측면에 한정해서 파악하는 데에 머무르고 있다. 그러나 집약적 벼농사의 확립과 그에 수반되는 인구의 급속하고 지속적인 증대는 단지 경제면에서만 일련의 변화를 초래한 것은 아니며, 사회구조, 나아가 국가의 존재형태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가령 집약적 농업의 발전은 사적 토지소유 의식의 향상을 가져왔을 것이며, 따라서 국가에 의해 토지소유권에 대한 제도적인 보장의 필요성도 높아졌을 것이다. 이러한 문제까지 시야에 넣지 않으면 농업상의 변화에 대한 의미도 충분히 파악할 수 없다.
이 점은 16〜18세기 동아시아상을 재구축하기 위해서는 단지 경제적인 문제에 머무르지 않고 사회적, 정치적, 나아가 문화적인 문제도 포함한 전구조적(全構造的)인 새로운 이해가 필요하다는 것을 강하게 시사한다. 그리고 최근 연구의 최대 문제점 역시 이러한 전구조적인 파악의 필요성이라는 시각이 매우 약하고 너무 경제주의적이라는 것에 있다(빈 웡의 저서는 예외이지만). 즉, 16〜18세기 동아시아에서 생활수준의 악화를 동반하지 않은 인구의 지속적인 증가(‘맬서스의 올가미’ 극복)나, 세계경제쎈터로서의 위치가 사실이라 해서 그런 것들이 가능하게 된 요인을 순경제적인 면으로만 파악하기에는 너무나 불충분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가령 16〜18세기의 경제적 번영을 가져온 기본요인의 하나가 ‘평화’의 유지였다고 생각되는데, 국내적으로도 대외적으로도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던 요인은 말할 것도 없이 정치적인 것이었다.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전반에 걸친 동아시아의 동란은 경제적으로 성장국면이던 시기에 발생했으므로 그 원인을 경제면에서 파악할 수는 없다. 이 동란이 종식된 뒤에 동아시아의 장기적 ‘평화’가 실현되고 그것이 경제성장을 지탱했던 것인데,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기본적으로 정치적·사회적인 요인이었다고 여겨진다.
그렇다면 왜 최근의 경제사적인 연구가 정치적·사회적인 측면까지 파고들어가서 16〜18세기 동아시아사를 재검토하지 않았는가? 그것은 이러한 문제를 시야에 넣자마자 동아시아를 공통된 전체로 파악하기가 곤란해지기 때문이다. 즉, 농업생산이나 상업의 발전이라는 경제적인 면에 한정하면 동아시아의 공통성을 비교적 용이하게 파악할 수 있으나, 정치적·사회적인 면에서는 오히려 동아시아 내부의 차이가 크다고 여겨지므로 경제면에 한정해서 분석하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고 생각된다. 스기하라의 논문이 중국과 일본의 노동집약형 경제성장과 그것을 출현시킨 ‘근면혁명’이라는 공통성을 논하면서, 봉건제 등의 사회구성체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논하기를 꺼렸던 데에서 이는 단적으로 나타난다. 봉건제 문제를 끄집어내면 일본은 봉건제인 데 반해 중국은 집권적 관료제였다는 상식적인 역사 이해에 부딪혀서 동아시아를 한덩어리로 논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논의를 경제적인 면에 한정해버림으로써, 앞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이 시기의 경제성장 요인에 대한 정확한 파악을 어렵게 할 뿐 아니라, 더욱 본질적인 문제로 19세기 동아시아의 곤란에 대한, 유럽과 역전된 사태에 대한 파악을 불가능하게 하고 말았다. 프랑크나 스기하라의 논의가 낙관주의적이며, 어쩌면 동아시아의 ‘성공 이야기’에서 자화자찬에 빠질 위험성을 느끼게 되는 것도 이것과 깊은 관계가 있다.
나는 동아시아에서 16〜18세기는 단지 경제적인 대변동기였을 뿐만 아니라, 정치적·사회적으로도 큰 변동기였다고 생각한다. 정치적인 면에서는 과거제도와 주자학의 결합이 중국·한국에서 14〜15세기에 정착하며, 일본에서는 16세기부터 17세기 전반에 걸쳐 종래보다 훨씬 집권적인 성격을 띠는 정치체제가 전국시대의 동란이 종말을 고하면서 확립되기에 이르렀다. 또한 사회적인 면에서는 가족·친족제도라고 하는 가장 기초적인 부문에서 큰 변화가 보이는 것도 16세기를 중심으로 한 시기였다. 즉, 중국에서는 종족의 결합이 이 시기에 본격화하고, 한국·일본에서는 쌍계적인 혈연관념에서 부계적 혈연관념으로 바뀌는 대변화가 역시 이 시기에 일어났다. 사상적으로 보면, 주지하듯이 중국·한국에서는 주자학이 국가교학의 위치를 차지하고 예교(禮敎)체제가 확립되었다. 일본에서도 주자학은 국가교학의 위치를 점하지는 못했으나 주자학적 통치이념의 침투가 적극적으로 도모되었다.
이상과 같은 대변화는 결코 우연히 같은 시기에 생긴 것이라 이해해서는 안되며, 경제적인 변화와 깊이 연결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나는 이러한 일련의 변화를 동아시아 소농사회의 성립이라는 관점에서 파악한 바 있다.5 내가 주장하는 소농사회란, 단지 농업경영 담당자로서 소농이 일반적으로 형성되었다는 한정적인 의미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고, 전체제적인 구조전환의 의미를 포함한 개념이다.
16〜18세기의 동아시아, 특히 중국이 경제적인 면에서 세계시장의 중심이 될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었다면, 그러한 경제력을 가능하게 한 정치·사회체제까지도 포함해 동아시아가 유럽보다 우수했다고 볼 수 있다. 나는 이 기초에 주자학 이념을 기반으로 과거제도를 통해 선발된 관료에 의해 성립된 집권적 통치체제가 존재했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동아시아의 ‘평화’와 번영을 가져온 최대의 요인이었다. 빈 웡이 지적하듯이 동아시아의 국가들은 유럽에서는 근대가 되어서야 비로소 가능했던, 주민 파악과 그에 기초한 높은 징세능력을 이때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이러한 체제 때문에 가능했다.
그와 동시에 이러한 18세기까지의 국가체제 문제를 시야에 넣어야만 19세기의 동아시아에서 고유하게 발생한 곤란을 파악할 수 있다. 즉, 높은 인구 압박과 환경적 제약 아래서 새로운 국제적 조건에 대응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게 되는 19세기에 들어, 지금까지의 국가체제·사회체제가 심각한 질곡의 상태에 빠졌던 것이다. 그로부터 시작된 드라마는 동아시아의 ‘전통’과 유럽적 근대의 갈등·대립·융합의 과정이지만, 이 과정은 결코 ‘전통’을 해소하는 방향으로 진행됐던 것이 아니라 스기하라가 주장하듯이 ‘전통’에 강하게 각인되면서 진행되었다.
동아시아라는 지점에서 근대를 재고하고자 할 때, 앞에서 서술한 바와 같은 문제들을 시야에 넣을 필요가 있다. 역사교과서에 나타나는 역사소외를 극복하고 21세기의 동아시아를 전망하는 시각은 이러한 준비 가운데 논의되어야 할 것이다. 한국사 연구도 19세기적 관점을 넘어선 새로운 시각에서 조선시대부터 식민지 시기, 그리고 해방에서부터 현재에 이르는 장기적 변동의 파악이 절실히 요구되고 있다.
[孫炳圭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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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ndre Gunder Frank, ReOrient: Global Economy in the Asian Age,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8; 『리오리엔트』(이희재 옮김) 이산 2003.↩
- Kenneth Pomeranz, The Great Divergence,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01; R. Bin Wong, China Transformed, Cornell University Press 2000.↩
- Sugihara Kaoru, “The East Asian Path of Economic Development: A Long-term Perspective,” Discussion Papers in Economics and Business: 00-17, Osaka University 2000.↩
- Angus Maddison, et al, The World Economy: A Millennial Perspective, Development Centre of the Organization for Economic Co-operation and Development 2001.↩
- 宮嶋博史 「東アジア小農社會の形成」, 『アジアから考える 6 長期社會變動』, 東京大學出版會 19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