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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최영숙 유고시
■편집자 주
1960년 서울에서 출생한 최영숙(崔英淑) 시인은 1992년 『민족과 문학』에 「회복기의 노래」 외 9편을 발표하면서 시단에 나왔다. 시집 『골목 하나를 사이로』(1996)에서 시인은 예민한 촉수로 생명의 움직임을 포착해내는 긍정적인 슬픔의 시세계를 보여주었다. 투병중이면서도 마지막까지 시에 대한 열정을 내보이던 시인은 여섯 편의 시를 보낸 지 보름 후인 지난 10월 29일 지병인 ‘확장성 심근증’으로 타계했다. 죽음을 예감하면서도 고통의 일상을 그러안은 시인을 추모하며,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옛날 손만두집
삼각으로 기울어진 좁은 분식집
나는 김밥을 먹고 그녀는 만두를 빚었다
대나무발이 늘어진 벽을 비스듬히 바라보며
하나씩 김밥을 먹는 동안 그녀의 손에서는 하나씩 만두가 빚어졌다
나는 김밥을 먹고, 그녀는 만두를 빚고
내가 뜨거운 오뎅국물을 불어가며 김밥을 먹는 동안
그녀는 등뒤에서 말없이 만두를 빚었다
색바랜 그림처럼 그녀와 내가 앉아서
잘 반죽된 기억을 한덩어리 떼어내 주무르는 그녀
김밥을 하나 먹는 나
도막낸 밀가루덩어리를 하나씩 밀대로 밀기 시작하는 그녀
김밥을 하나 먹는 나
둥글고 얇아진 만두피를 손바닥에 올려놓고 꾹꾹 소를 눌러넣는 그녀
김밥을 하나 먹으며,
어쩐지 말이 없는 그녀는 내가 김밥을 다 먹도록 하나하나 만두를 빚어나가는 것이, 저 먼 누이나 오라비쯤 되어 안 보는 듯 나를 본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나 또한 암말 않고 부어주는 오뎅국물을 마시며 나의 오랜 出이 여기서 끝나주었으면 하였고
다 된 만두 소쿠리를 들고 나가 솥뚜껑을 열자 확, 끼치는 하얀 김 속에 서서히 떠오르는 그녀와 솥단지 안에 얌전히 들어앉은 만두꽃이 꿈인 듯 만개한지라, 이마가 뜨거운 만두를 집어내고 다시 새 만두를 올려놓으니, 내가 그녀의 손안에서 빚어졌을 때 다만 만두로서 순해져서는
가리라, 저 화엄의 거리로 지금 난 잘 익어가는 중이니
내 안의 나무
여기 검은 필름 한 장이 있다
형광 불빛을 받자 환하게 드러나는
내 안의 나뭇가지들
척추와 늑골
열매처럼 매달린 폐와 심장이
한그루 나무를 닮았다
한그루 나무이고 싶던 때를 기억하는
나는 한그루 나무
(놀라워라, 나도 모르는 속을 볼 수 있다니!)
심장이 부풀어올랐군요,
무슨 가슴 벅찬 일이라도 있었는가
손을 대기에는 차마 뜨거운
내 안의 붉은 열매
그 열매 쪼아먹고 살던 새 어디로 날아갔나
내 안의 가지들을 들여다본다
새는 날아가고 텅 빈 어둠만 남은
공허한 갈빗대
활처럼 휘어져 어디라 방향할 수 없는 시간이 흐르고
빈 둥우리를 치는 새 울음소리
환하고 따스한 겨울 한때에
두 팔 벌리고 크게 숨 멈추면
등을 뚫고 지나가는 한줄기 빛,
한그루 나무이고 싶던 때를 기억하는
내 안의 나뭇가지들
바람 든 무
몸을 빠져나간 바람은 어디로 갔을까 얇은 살 흰뼈에 공명하는 소리 우 우 바람이 든다 귓바퀴가 돈다 뼈에 바람이 지나가 속이 텅 빈 무의 생은 얼마나 가벼울 것인가 바람이 지날 적마다 바람을 껴안아 바람이 없으니 이제 무는 아무것도 아닌 무가 되었다 생을 완성하였다 도마 위에 무 한토막 형광등 불빛 아래 고요하구나
용미리 어머니 무덤 이제는 육탈해 거기 아니 계시겠지
옷 벗는 여인
오래 전 일이다
그날
온몸으로 악쓰는 소리 지나간 후
한 여인이 옷을 벗기 시작했다
한 겹
두 겹
발목까지 오는 긴 치마가
길바닥으로 흘러내렸을 때
까만 브래지어와 팬티 한 장
먹잇감을 포획한 거미처럼
서서히 조여드는 시선 속에서 여인은
스타킹을 벗어내렸다 숨죽인
저 알몸의 저항
내 일찍이 부끄러워했던
벼랑 끝 말없는 절규, 그렇구나
저게 내 몸인 걸, 어느날 목욕탕 뿌연 거울 앞에서
깊고 검은 음부와
물기 없는 유방과
아이를 낳은 칼자국이 선명한 주름진 뱃살의 중년여인이
남자도 여자도 아닌 아줌마가 저렇게 서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거리에 알몸으로 선 내게 돌을 던져라
기꺼이 그 돌을 맞으리니
모든 여자의 이름은 쓸쓸하고 가없이 슬픈 몸이라서
천지간에 바람 어지러울 때면
마구 소리치고 싶다 옷 벗고 싶다, 하니 그것이 욕되다면
돌로 쳐라, 네 상처 위에 내 간을 포개놓으마
뜨개질하는 소녀
소녀는 오늘 머리를 감았다
갈색으로 물든 머리칼이 파도처럼 일렁인다
마리 로랑생의 소녀처럼 맑고 깨끗한 피부
헐렁한 옷의 주름이 부드럽게 겹친다
소녀는 너무 일찍 이곳에 왔다
시간에 먹혀버린 몸
여기서는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
못물처럼 고여 서서히 잊혀진다는 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털실이 풀려나간다
한 코 한 코 실을 걸어 뜰 때마다
둥근 실뭉치가 한바퀴 빙글 돈다
1초에 수십만 킬로를 달아나는 빛
머릿속이 하얗게 빈다
한곳에 멈춰버린 시곗바늘
시간을 거꾸로 돌리는 물레와 같이
한없이 풀려나오는 털실은 이제
소녀를 뜨고 소녀의 몸을 칭칭 감는다
단단한 고치가 되도록 빈틈없이 감싼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소녀는 잠이 들었다
가슴을 납작하게 내리누르는 어둠속에서
나뭇잎 쏘는 소리 같기도 하고
벽을 긁어대는 것도 같은, 그 소리는
구멍이 점점 커지더니 이내 병실을 가득 채웠다
막 떨어지는 잠결이었을 것이다
천장을 덮을 듯 펄럭이는 날개, 그건
고치를 뚫고 나온 나비였다
門
내 앞에 문이 있다
열리지 않는 건 문이 아니다
문을 열고
들어오거나 나가야 한다
이 문을 어쩔 것인가
밀거나 혹은 당기거나 둘 중 하나가 될 것이다
문에 다가가기 3미터 전 나는
문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2미터,
1미터,
문 앞이다
잠시 망설인다
이번에도 실수를 되풀이할 수 없으므로
신중을 기해야 한다
밀 것인가 당길 것인가
문의 구조로 봐서 이 문은 당김이다
아니, 밀어야 될 것 같다
문고리를 비틀어 천천히 민다
꽉 다문 입처럼
열리지 않는 문
이 문은 당김이었다
앞뒤 없이 밀봉된 상자처럼
문이 많은 건물에 나는 갇힌다
밤새도록 문 앞에서 쩔쩔맨다
불이 나도 문 앞에서 고민하는 사람
지금까지 내 앞에 선 많은 문들이
밀거나 혹은 당김이었을 것이고
통과하지 못한 문을
여느라 시간을 전부 써버렸다
지금도 여전히 고민하는
내 앞에, 餘生이라는
문이 있다
어떻게 살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