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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일 金源一

1942년 경남 김해 출생. 1966년 대구매일신문 신춘문예 당선. 장편 『불의 제전』 『늘푸른 소나무』 『마당 깊은 집』 『슬픈 시간의 기억』 등이 있음. pine2545@hanmail.net

 

 

 

고난일지

 

 

74년 4월

통행금지 시간이 가까워서인지 집집마다 전등불이 꺼졌고 주위가 조용했다. 후줄근한 점퍼 차림에 등산모를 눌러쓴 김씨는 한길을 피해 골목길만 골라 길을 둘러서 집으로 가는 걸음이었다. 김씨는 친지집이나 후배들 자취방을 옮겨다니며 하루나 이틀씩 기식했으나 때가 때인지라 재워주는 측이 시한폭탄이라도 들여놓은 듯 두려워했고 그 역시 눈치가 보여 닷새 만에 귀가를 결정한 참이었다. 긴급조치 4호라는 전대미문의 초강경 대통령 특별담화 발표가 있은 지난 3일 이후 그는 신변에 불안을 느껴 집을 나와선 며칠에 한번꼴로, 그것도 통금을 앞둔 야밤에만 집에 들렀다가 어둠이 걷히기 전에 집을 나섰다. 그렇게 집 떠나 한달 가까이 바깥에서 싸돌 동안 집안 생계를 책임진 처보다 두 딸애 모습이 자주 눈에 밟혔다. 김씨는 여염집 벽에 붙어 걷다 후딱 뒤돌아보거나 걸음을 멈추고 한참 동안 인적 없는 어두운 골목길 뒤쪽을 살피기도 했다. 가로등이 없는 컴컴한 골목길은 어둠속에 희미한 꼬리를 보인 채, 따라붙는 미행자가 감지되지는 않았다. 그래도 누군가가 자기 뒤를 밟고 있다는 불안감이 마음을 옥죄어왔다. 펄떡이는 가슴을 널빤지가 누르고 군홧발이 널빤지를 밟고 지나갈 때마다 심장이 터질 듯 펌프질했다. 구토 증세마저 있어 속이 매스껍고 신물이 목구멍을 넘어왔다. 그는 점심때 서문시장 채소전 어귀의 노점에 쭈그리고 앉아 지게꾼 둘과 함께 국수 한그릇을 먹었다. 갓 삶아낸 국수에 멸치국물 한 국자를 붓고 호박 고명을 얹어 간장 양념친 국수였는데, 좌판을 벌인 젊은 새댁과 제 엄마 일손을 거드는 단발머리 딸애를 보니 예전 엄마와 누이 생각이 나서 자꾸만 목이 메었다. 그게 체했는지도 몰랐다. 육이오전쟁 와중 적수공권(赤手空拳)으로 고향을 떠나 어린 세 자식을 거느리고 대구로 나온 엄마는 오갈 데가 없어 한동안 역 대합실 피난민 사이에 섞여 노숙하며 구걸질부터 시작했다. 김씨는 숙식만 해결해주면 된다며 일자리를 찾아 떠돌다 칠성동 기찻길 옆 방앗간의 심부름꾼이 되었다. 먼 친척의 도움으로 엄마가 처음 잡은 일거리는 역전 마당에서 벌인 좌판으로, 채를 썬 묵 한줌을 콩국물에 얹어주는 묵장사였다. 엄마는 돈을 조금 모으자 비산동 판잣집에 방 한칸을 사글세로 얻고는 교동시장 골목 모퉁이에 좌판 펴고 국수장사를 시작했고 초등학교조차 그만둔 어린 누이가 엄마 장사일을 도왔다. 엄마는 연세 들고도 일손을 놓지 않고 그렇게 억척스레 살았으나 강원도 최전방에서 군복무중이던 김씨 아우가 총기오발 사고로 죽은 뒤부터 상심해하며 자주 자리에 눕더니 환갑을 못 넘겨 아들 뒤를 따라갔다.

봄밤의 부드러운 대기를 뚫고 먼데서 숨가쁜 호루라기 소리가 들렸다. 김씨는 걸음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고함소리나 발걸음 소리는 들리지 않고 호루라기 소리만 단절음으로 몇차례 이어지다가 그쳤다. 학원강사 겸 근로자학교 교사인 박군의, 오늘은 밤도 늦었으니 주무시고 가라는 말을 뿌리치고 그의 자취방을 나설 때가 밤 열한시였으니 아직은 통금시간이 일렀다. 야간순찰에 나선 사찰형사가 앞서 가는 거동 수상해 뵈는 통행인을 쫓거나 밤늦게 다니는 청년학생을 불심검문하려 뒤쫓고 있는지 몰랐다. 도망치는 자를 따라가는 어지러운 발걸음 소리가 환청으로 들렸다. 그는 요즘 신경이 극도로 예민해져 대수롭지 않은 작은 일에도 금방 연상이 그런 쪽으로만 줄기를 뻗었다. 신경의 가닥들이 난마처럼 얽혀 극도로 날카롭다는 것쯤은 김씨 자신도 알고 있었다. 자기 목을 벨 듯 면도날이 눈앞에 스쳐가 깜짝깜짝 놀랄 때도 있었다. 유신헌법이 선포되기 전까지만도 내가 이토록 과민반응으로 들볶이지는 않았는데, 하고 자신의 나약함을 딱하게 여겼으나 성격 탓이려니란 결론에 이르면 더 무엇을 탓할 수 없었다. 그는 빈농의 자식으로 시골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대구로 나와 어린 나이에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야간학교를 다니며 청년기에 이르기까지 몸소 터득한 신조가 있다면, 의리있는 진실한 인간이 되자, 하층 민중들의 복지 향상을 위해 그들과 함께 살아야 한다는 다짐이었으나 자신을 실천력 강한 배포 큰 성격이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소년기부터 세상살이에 부대껴 매사에 회의적인 소심한 성격이었다. 어쩌다 뜻 맞는 동지들을 만날 때도 열심히 자기주장을 떠드는 쪽이 아니라 조용히 듣는 편이었고, 좌중의 언성이 높아지면 “누가 듣겠심더. 목소리 좀 낮추이소” 하고 주위를 둘러보며 들뜬 분위기를 자제시키곤 했다.

박통은 72년 10월 17일 국회 및 정당을 해산하고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한 뒤, 개헌 국민투표를 실시하여 유신헌법을 확정했다. 이어 12월 17일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를 실시한 끝에 23일 첫 집회를 열어 간접선거로 제8대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27일에 취임했다. 요식행위로 일사불란하게 진행된 공포 분위기의 두달 여, 뜻있는 사람들은 유신헌법을 두고 웬 전제군국주의의 부활이냐 싶어, 박통이 한시절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동아시아 제패 성전’에 앞장섰던 타까끼 마사오(高木正雄)였음을 새삼 환기했다. 유신헌법 철권통치 아래 세상은 한동안 숨죽여 고즈넉했으나 73년 10월 2일 서울대학교에서 처음으로 유신반대 데모가 터졌다. 연이어 여러 대학이 유신헌법철폐 데모에 나서고 동맹휴학에 들어갔다. 대학은 조기방학이 실시되었으나 12월에 들어 종교계와 지식인들의 개헌지지서명운동이 확산되자 74년에 들어 1월 8일, 박통은 유신헌법 논의를 금지하는 초헌법적인 긴급조치 1호와 비상군법회의를 설치한다는 긴급조치 2호를 선포하고, 시범삼아 이를 위반한 민주인사들을 체포해 군법회의 재판에 회부시켰다. ‘겨울 공화국’이 된 한반도는 한파가 휩쓸었고 사람들은 밟으면 꺼질 살얼음판을 딛듯 조심스럽게 운신했다. 대학이 새 학기로 문을 여는 3월을 시작으로 학내 써클활동이 본궤도에 오르는 4월을 두고 ‘3·4월 위기설’이 파다하더니, 4월 3일 동시다발로 서울의 각 대학들이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이란 이름으로 유신헌법철폐 전단을 뿌리고 반정부 데모에 나섰다. 그날 저녁 10시에 대통령은 특별담화를 통해 ‘이 조치를 위반한 자 및 비방한 자는 사형·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한다’는 긴급조치 4호를 선포했다. 이어 대학이 집결한 서울을 필두로 지방대학이 있는 도청 소재지 대학가와 시내 거리에는 사복형사와 경찰들이 깔렸다. 수사당국은 각 대학의 운동권 학생 수배자 명단에 따라 이들을 색출 연행하느라 거주지를 덮쳤고, 거리에서는 청년학생의 불심검문이 무작위로 행해졌다.

김씨는 서른아홉 나이로, 대학을 졸업한 지 햇수로 십년에 가까웠다. 그는 방앗간, 철공소, 자동차 정비소, 방직공장 직공으로 옮겨다니며 야간고등학교를 졸업하자 대구 청구대학 법학과 야간부에 적을 두고는 군복무를 마쳤고, 등록금 조달이 어려워 서른에 들어서야 가까스로 대학 졸업장을 쥘 수 있었다. 나이가 나이인지라 나한테까지 닥칠 절박한 상황이 아니니 과민성부터 털어버려야 한다고 다짐해도 그는 그게 쉽지 않은 나날이었다. 김씨는 사일구학생혁명 이후, 반공법 위반으로 2년 6월 실형선고를 받고 감옥생활을 겪었기에 그 당시의 암울했던 나날들이 자꾸 떠오름은 어쩔 수 없었다. 한국 헌정사상 그 사례가 없는 초법적인 긴급조치 4호가 발동된 이번엔 아무래도 신변에 위해가 닥칠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을 떨쳐내기가 쉽지 않았다. 지난 3일 박통의 특별담화 선포가 있은 뒤, 우선 연락을 끊고 몸을 피하라는 전갈이 전화를 통해 동료로부터 날아든 이후, 김씨는 일체의 연락선을 끊었다. 동료들의 안부가 궁금해도 이를 자제하지 않으면 안되었고, 자신의 일터였던 ‘침산공단 직업상담쎈터’와 ‘근로자 학교’에도 발을 끊었다. “봇물 터질 듯한 대학생들의 유신헌법철폐 데모를 차단하자는 데 우선 목적이 있겠지만 진보적인 민주인사의 대량구속 또한 시작될 걸세. 우선 몸부터 피하고 보세. 당분간 연락을 끊겠네.” 이선생 사무실에 김씨가 공중전화를 냈을 때 선생 말이 그랬다. “지난 삼월 하순에 들어 운동권 학생들의 대대적인 검거가 시작되었다는 정보가 있심더. 지금 서울에선 그 색출로 이 잡듯 뒤지고 있어 나도 쫓기듯 대구로 내려왔어예. 이럴 땐 피신하는 게 상책입니더.” 서울을 다녀온 홍형도 전화에서 그런 말을 했다. 김씨도 일면 머리기사로 대문짝만하게 실린 박통의 특별담화를 4일자 조간신문에서 읽은 바 있다. ‘작금 우리 사회의 일각에서 공산주의자들이 상투적으로 전개하는 적화통일을 위한, 이른바 통일전선 초기 단계적 불법활동 양상이 대두되고 있다. 이같은 불순요인을 발본색원함으로써 국가의 안전보장을 공고히 다지고자 헌법 절차에 따라 긴급조치를 선포하게 되었다.’ 박통의 이 발언은 선언적인 위협을 넘어서서 반정부 활동을 주도하는 청년학생이나 유신헌법에 비판적인 인사들을 공산계열과 연계시켜 그 어떤 올가미를 씌울 계획적인 음모가 당국에 의해 은밀히 진행되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었다. 김씨는 출옥 후 64년에 중앙정보부가 조작한, 자신도 처음 들어본 당 명칭인 ‘인민혁명당 사건’에 연루되어 스무날에 걸쳐 고문을 당한 끝에 기소되었으나 무죄로 석방된 바 있었다. 그는 사일구학생혁명 직후 고조된 통일열망과 남북협상 재개에 발맞추어 출범한 사회당 민주자주통일 중앙협의회 산하 경북지역 민주민족청년동맹(민민청)의 대학책 총무간사 일을 맡은 바 있었다. 총무간사 직책은 밖으로 나서서 눈에 띄게 활동하는 일이 아닌, 기부금과 회비의 출납을 관장하는 서무일이었다. 그러다 오일륙군사쿠데타로 박이 권력을 잡자 혁신계 수배자 명단에 그의 이름이 올랐다. 그는 피신하던 중에 고향에서 체포되어 2년 6월형을 산 바 있다. 출옥 뒤 내성적인 성격과는 상관없이 어느 사이 진보적인 투사로 알려져 곤혹스러웠으나, 외유내강이 바로 김형을 두고 하는 말이란 주위의 부추김을 그는 내심 수긍했다. 같은 생각을 가졌던 대구지방 혁신계 동지들과 친분을 맺자 그는 그들이 추천하는 사회과학 이론서로 학습하는 과정을 거쳐 냉전체제 종식, 외세 없는 자주적 민족통일에 열성적인 지지자가 되었다. 그가 뜻이 맞는 동료들과 자주 만나 군사정권의 통치행태를 두고 비판적인 대화를 나누곤 했던 게 인혁당으로 둔갑되었던 것이다. 박통의 발언이 왠지 십년 전 악몽과 연계되어 그의 마음을 압박해옴을 어쩔 수 없었다.

다시 고향으로 내려간다? 오늘낮 달성공원에서 석간신문을 훑어보다 김씨는 그 생각을 했다. 열흘 전 고향으로 피신해 재종숙네 과수원 창고에 숨어 사흘을 지냈는데, 아무래도 여기가 안전한 곳이 못된다는 재종형의 말에 따라 새벽같이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창녕경찰서 정보과에서 형사가 두 차례나 마을로 들어와 친인척 집을 샅샅이 돌며, 근간에 김종호가 고향을 다녀간 사실이 없냐고 꼬치꼬치 캐물었다는 것이다. 언제까지 수사기관의 눈 기이며 대구 바닥을 헤매고 다닐 수야 없지 않은가. 김씨는 다시 고향으로 내려가 양식과 반찬감을 지고 고향 뒷산 성산성터에 땅굴이라도 파고 들어앉아 곧 닥칠 당국의 검거선풍이 가라앉을 때까지 두더지처럼 생활하는 게 첩경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고향에서 돌아온 뒤 그는 주로 달성공원과 그 옆 서문시장을 어슬렁거리며 낮시간을 보냈다. 사람들 틈에 섞여 있는 게 그래도 처신에 안전했던 것이다. 달성공원은 벚꽃놀이가 한창이라 들놀이나 소풍 나온 사람들로 밤이 이슥토록 왁실덕실 붐볐다. 우리나라 몇 손가락에 드는 공설시장인 서문시장에서는 사람이 많이 끓는 곡물전, 어물전, 채소전을 배회했다. 물건을 사고파는 장사꾼과 장꾼들의 흥정을 뒷전에서 넘겨다보노라면 초조하고 불안한 상념에서 잠시나마 헤어날 수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근로대중이 살아가는 생활현장은 장거리에서 가장 잘 드러났다. 한푼이라도 더 받으러 뜨세지게 구변을 풀고, 한푼을 깎겠다고 시세를 따지고 물건 트집을 잡는 그들의 입씨름을 보면, 한여름 무성하게 자라는 잡초 같은 그들의 팍팍한 삶에 코끝이 찡해지기도 했다.

김씨의 코끝에 꽃향기가 은근하게 묻어왔다. 눈을 주니 판자담장 위로 가지를 뻗은 앵두나무의 튀밥같이 자잘한 흰 꽃이 어둠속에 뽀얗게 드러났다. 김씨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꽃에 눈을 주었다. 문득 영국 시인의 유명한 시 「황무지」 첫 구절이 떠올랐다. ‘4월은 잔인한 달……’ 시인의 시작 의도야 어쨌든, 사실이 그랬다. 진정 74년 4월은 잔인한 달로 역사에 남게 될 것이다. 꽃샘추위조차 자취를 감추어 본격적인 봄날로 접어드는 4월이면 자연은 순환에 맞추어 푸나무들이 잎 피워 푸르름을 떨치고 갖가지 꽃이 피어나는 좋은 절기이다. 달성공원에는 벚꽃과 진달래에 이어 철쭉이 잇달아 꽃망울을 터뜨렸다. 그러나 올해 4월의 이땅은 동서남북조차 분간할 수 없는 암흑천지가 되고 말았다. 경찰국가이듯 철저한 통제로 자유를 묶고 전제정치로 장기집권을 획책하는 독재자가 계절을 거꾸로 돌려세워 4월을 혹한의 잔인한 달로 바꾸어놓았다. 김씨의 후각은 앵두꽃의 향기조차 순수한 마음으로 감지할 수 없었다. 시대의 형편을 읽지 못한 채 무심하게 피는 꽃이 원망스럽고, 한편으로 자신의 처지처럼 절기를 잘못 짚고 피어난 듯 잔망스런 꽃이 불안해 보였다. 앵두나무 밑둥치를 잘라버리면 꽃과 잎이 금방 시들 테지. 그러나 뿌리가 튼튼하다면 내년에 밑둥치에서 다시 연약한 줄기가 나와 잎을 피울 거야. 한두 해 기운을 추슬러 줄기가 성큼 자라 가지를 치면 4월에 다시 꽃이 피고 여름이면 숯불 같은 빨간 열매를 맺겠지. 그러나 인간은? 나무의 가지에 해당되는 팔다리는 몰라도 몸통이 잘리면 그것으로 생명이 다하는 것 아닌가. 그의 생각이 또 엉뚱한 비약으로 옮아가 불안이 마음을 저몄다. 인간의 태어남과 죽음이 자연의 섭리대로 관장되어야 하는데, 인간이 인간의 죽음을 강제함으로써 비극을 낳는다. 전쟁 전후의 격동기에 수많은 사람이 억울하게 죽었고, 아버지 역시 허무히 죽임을 당했으니 그들은 지금도 지하에서 그 원한으로 눈 부릅뜨고 있을 것이다.

이제 집과의 거리가 일백 미터 정도 남았다. 집으로 들어가자면 어차피 한길을 건너야 했다. 김씨는 골목 끝에서 얼굴을 내밀고 한길 좌우를 살폈다. 중년사내 둘이 무슨 말을 나누며 지나가고 건너 쪽에서는 고무들통을 머리에 인 아낙 하나가 어린아이 손을 잡고 종종걸음칠 뿐, 거리는 통행인이 뜸했다. 실내등을 환하게 켠 버스 한대가 승객 몇을 태운 채 빠르게 지나쳤다. 길 건너 들어서야 할 골목 모퉁이에 있는 식당에서 술 취한 사내 둘이 비틀걸음으로 나서자, 곧 식당 안의 전등불도 꺼졌다. 그와 동료들이 종종 들렀던 실비식당으로, 막걸리 한되를 시키면 우거지 술국에 콩자반, 썬 생고구마가 덤으로 나왔다. 마음을 다잡은 김씨는 길을 건너기로 했다. 그는 좌우를 살피며 걸음을 도두 떼어 한길을 얼른 건너 컴컴한 골목 입구로 들어섰다. 여염집들 담장 사이의 손수레나 다닐 수 있는 좁은 골목길은 어둠속에 비어 있었다. 그는 잠시 골목길 안쪽을 주시했다. 인기척에 놀란 듯 고양이 한마리가 골목을 빠르게 건너 개구멍으로 사라질 뿐 달리 움직이는 것이라곤 없었다. 골목길 가운데는 하수구라 시멘트 뚜껑을 줄지어 덮어두었는데 그것을 밟으면 더러 삐꺽대는 소리가 나기에, 그는 한 손을 주머니에 꽂고 담 옆에 바싹 붙어 걸었다. 주머니에는 사흘 전에 산 아이들에게 줄 땅콩캐러멜 두 곽이 땀 밴 꼽꼽한 손에 집혔다. 그가 육십 미터쯤 걸어들어가, 자기 집과의 거리가 사십 미터쯤 남았을 때였다. 그는 한차례 긴 숨을 내쉬었다. 그 순간, 골목길에서 두어 발 들어앉은 여염집 대문 앞에서 갑자기 두 사람이 불쑥 나타나 김씨 앞을 막았다. 하나는 재빨리 김씨 뒤로 돌아가 퇴로를 차단했다. 중앙정보부 대구분실 기관원이 아니면 경찰서 대공과 수사관임에 틀림없을 그들 앞에서 김씨는 그럴 마음도 없었지만, 설령 날랜 장사라 해도 도망칠 틈새가 없었다. 그는 난데없이 날아온 돌멩이에 머리를 맞은 듯 정신이 아찔했고 다리가 절로 접혔다. “당신, 김종호 맞지?” 하고 점퍼 입은 앞쪽 사내가 물었다. 김씨는 대답이 목에 걸려 말을 할 수 없었다. 결국 불안의 예감이 코앞에 현실로 닥쳤고 기어코 올 것이 왔다는 절망감과 함께 팔다리에 쥐가 나고 온몸이 경직되었다. 그는 순간적으로 저 앞쪽 자기 집 대문에 눈을 주었다. 아래채 방 두 칸에 세들어 사는 집이 바로 앞에 있는데 못 가게 되다니, 하는 안타까움부터 들었다. 집 안에 들여놓은 편물기 앞에 앉아 뜨개질할 처의 파리한 모습이 떠올랐다. 처는 아직도 일손을 놓지 않고 창문을 조금 열어놓은 채 바깥에서 들릴는지 모르는 서방 기침소리에 귀를 기울일 것이다. 두 애 얼굴이 눈앞을 빠르게 스쳐갔다. 서른 넘어 결혼을 해서 큰애는 지난달에 입학한 초등학교 일학년이고 둘째애는 여섯살이었다. 이제 캐러멜을 그애들 손에 쥐여줄 수 없었다. 자신이 집을 비운 사이 수사관들이 들이닥쳐 물적 증거품을 찾느라 집 안을 온통 뒤졌을는지 몰랐다. 이렇게 체포되는 걸 식구가 차라리 모르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 안에서 이런 꼴을 당했다면 처도 그렇겠지만 한창 자라는 아이들이 얼마나 놀라겠으며 그 충격이 얼마나 오래가랴 싶었다. 그는 그런 생각을 하며 자포자기했다. 울컥 구역질이 솟아 손으로 입을 막았다. 긴급조치 4호는 영장 없이도 체포할 수 있다고 말하며 앞에 선 사내가 김씨 손을 낚아챘다. 사내는 허리춤에서 풀어낸 수갑으로 그의 두 손목을 채웠다. 조사할 게 있으니 서로 가자며 사내가 김씨를 거칠게 돌려세웠다. “내가 멀 우쨌다고 연행합니껴?” 하고 김씨가 벋섰다. “우리사 모르지만 서로 가보모 알 끼다.” 사내가 침착하게 말했다. 처음은 뒤에 섰다가 앞서 걷게 된 긴팔남방 입은 사내가 들고 있던 무전기로 “오호 낚았어. 곧 도착할 거야” 하고 어디론가 연락을 했다. 김씨는 두 사내와 함께 왔던 골목길을 다시 빠져나왔다. 김씨가 한길을 건널 때는 분명 없었는데 골목 입구에는 시동을 건 지프차가 전조등을 끈 채 대기하고 있었다. 앞선 사내가 차 뒷자리에 오르고, 뒤따르던 사내가 김씨 목덜미를 꺾어 욱여넣듯 차에 태웠다. 지프차는 전조등을 켜고 출발했다. 김씨는 헛구역질이 계속 치받쳐 수갑찬 손으로 입을 막았다. 지프차는 한적한 한길을 함부로 급회전하여 대구경찰서 쪽, 시내 중심부로 내달았다.

 

74년 9월

대구경찰서에 도착하자 김씨는 정보과에서 계급장을 달지 않은 군복차림의 수사관으로부터 간단한 인정신문을 받았고, 유치장에 홀로 수감되었다. 수사관은 폭력이나 폭언을 쓰지 않았고 무슨 혐의로 연행했다는 말 대신, 당신 자신이 먼저 알지 않느냐란 암시 끝에, 임의동행이 아닌 비상시국과 관련된 상부의 지시에 의한 강제연행이라고만 말했다. “우리는 연고지가 대구인 당신 신병을 확보해서 모처로 인계하라는 지시만 받았어. 그곳에 가면 확인이 될걸.” 수사관이 무뚝뚝하게 말했다. 통금이 해제되고 어둠이 그치자, 김씨는 수갑을 찬 위에 포승줄로 상반신을 결박당한 채 유치장에서 끌려나와 경찰서 뒷마당에 대기한 지프차에 태워졌다. 운전사 외 차에 탄 수사관은 하나였다. 차가 출발하기 전, 사복한 수사관은 김씨의 얼굴을 광목천으로 싸매 눈을 가렸다. 무슨 중죄인이라고 이렇게까지 할까 싶어 김씨는, 내가 무슨 대역죄를 저질렀단 말이요 하고 한마디 외치고 싶었으나 그런 하소연이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 같아서 참았다. 조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 묻고 싶은 질문일까 권력의 말단 하수인에게 연행사유를 물어본들 그가 바른 답을 알 리 없었고 말해주지도 않을 것이다. 순간적으로 천에 가린 희붐한 눈앞에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황소가 떠올랐다. 목을 내두르고 벋대며 소리쳐 우는 덩치 큰 짐승이 연상되자 앞으로 얼마 동안 자신을 인간이 아닌 짐승으로 대할, 그쪽 역시 인간이기를 포기한 비인간적인 추궁과정이 떠올랐다. 군사정권이 일반 형사범이 아닌 체제비판이나 이념문제에 따른 확신범은 더욱 가혹하게 다룸을 그는 경험과 견문을 통해 알고 있었다. 무슨 이유로 자신을 압송하는지 아직은 구체적인 내용을 모르지만 이런 비상시국에 그쪽 수사관이 족쳐댈 까탈은 자명했다. 현정부가 지향하는 유신헌법 정신에 의거한 국가경영과 대내외 정책에 반대한 이유를 물고 늘어질 우격다짐이 고문과 함께 자행될 터였다. 십년 전 악몽이 눈앞을 스쳐가자, 밤내 시달리던 헛구역질이 가라앉는 대신 온몸이 닭살이 되고 난데없이 딸꾹질이 시작되었다. 뭘 묻는다 해도 대답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몸이 떨리고 딸꾹질이 심했다. 다행히도 옆자리에 탄 수사관이나 운전사는 내내 말이 없었다. 김씨 역시 딸꾹질만 껄떡거릴 뿐 침묵했다. 차가 멈춤 없이 계속 질주하는 것으로 보아 70년에 개통된 경부고속도로임을 알았고, 자신이 서울로 연행된다면 도착할 종착점이 중앙정보부 남산분실이 아닐까 짐작했다. 채탄을 한껏 실은 무개차가 브레이크 고장으로 힘겹게 올라왔던 지하갱도를 거꾸로 무한질주하듯, 정보부를 연상하자 그의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넘어지는 갱목에 다리를 다쳐 광원생활을 그만두었지만 군에서 제대한 직후 복학비를 마련하려 그는 문경탄광에서 일곱달 동안 막장노동을 했던 경험이 있었다. 빠져나가기 힘든 올가미가 목에 걸렸음을 거니채자, 그는 도살될 황소가 최후 순간에는 넋이 빠져 운명에 순응하듯 자포자기 상태로 빠져들었다. 대구를 출발한 지 시간 반쯤 흘렀을까, 그토록 불안에 시달리던 마음에 차츰 안정이 깃들었다. 깜깜한 끝을 보고 모든 것을 체념했을 때야 한줄기 희망의 빛이 보인다던가. 종교인들이 말하는 죽음 막바지에서 본 내세의 구원처럼, 설령 내가 죽음의 길을 향해 질주하고 있다 해도 그 죽음이 하루살이가 죽듯 아무렇지 않은 죽음은 아니다란 떳떳함이었다. 청년기로 들어선 뒤부터 품어온 그의 생각을 요약한다면, 양심이 시키는 대로 사회정의와 경제정의 실현에 이바지할 희망을 품고 살아왔다는 자기긍정이 따뜻한 물처럼 온몸에 번졌다. 딸꾹질의 진폭이 느려지더니 잠시 뒤 껄떡거림이 자연스럽게 소멸되었다. 밤을 새웠는지 옆자리 형사가 낮게 코를 불며 잠에 들었고, 뜬눈으로 밤을 새운 김씨도 무거운 눈꺼풀을 덮었다.

김씨는 중앙정보부 제6국 남산분실 삼층 조사실에서 사흘 동안 다섯 명의 수사관이 번갈아 가며 족쳐대는 신문 탓에 눈 한번 붙일 짬이 없었다. 나흘째부터 김씨는 발가벗긴 채, 저들이 사전에 만들어놓은 각본을 열거하며 이를 실토하라는 집요한 추궁과 함께 매타작을 당하기 시작했다. 대구에 잠복한 골수 공산분자들이 인혁당을 재건한 뒤 대한민국 정부를 전복할 목적으로 비합법적인 정치조직체를 결성하여 좌익폭동 획책에 암약한 경위를 자백하라, 인혁당이 민청학련을 배후조종하며 유신헌법 철폐와 정부 전복을 목적으로 민중폭동을 지원한 경로를 실토하라는 것이 신문의 핵심이었다. 김씨는 그 신문과정을 통해 대구에 거주지를 둔 선배와 동료들이 지난 열흘여 사이 하나 둘씩 강제 연행되어 이곳에서 자신과 같은 처지로 신문당하고 있거나 수배중임을 알았고, 수사관들이 자신을 인혁당 재건위원회의 중심인물로 지목하고 있음을 인지했다. 지난날의 행적이 거짓없는 사실이라면 직수굿하게 실토하면 그뿐 지독한 고문만은 피할 수 있었다. 피의자 신문조서를 작성하고 수인을 찍는 확인과정으로 끝났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날조한 각본을 들이밀고 이를 사실로 시인하라고 강요하면, 그 왜곡이 진실과는 동떨어진 허위사실이기에 최소한의 반론권을 제기할 수밖에 없었다. 라디오의 다이얼을 돌리다보면 어쩌다 이북방송 주파수가 잠시 잡히기도 하는데 그게 무슨 대단한 죄인지, 북괴 방송을 정기적으로 청취하고 이를 기록한 자백을 받아내려는 저들의 추궁만도 그랬다. 김씨는 호기심으로 이북방송을 더러 청취한 적 있었으나 어떤 목적을 위해 정기적으로 청취했거나 방송내용을 기록한 사실이 없었다. “민청학련 적화 교양자료로 이용하려 너도 인혁당 지도부 놈들과 함께 열성적으로 청취했다는 다른 놈의 자백이 있었는데도 발뺌해! 그놈이 쓴 자술서를 보여줘야 알겠어? 아직 덜 맞았군. 그렇담 아주 죽여주지. 네놈 하나 죽인다고 내가 법정에 서게 되지는 않아!” 이렇게 고문은 다시 시작되었다. 서울로 연행될 때는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듯한 자포자기의 심정이었지만, 밑둥치가 잘린 나무에서 다시 소생의 움이 촉수를 내밀듯 양심이 그를 자포자기의 상태로 방치해두지 않았다. 한동안 그는 저들의 덮어씌우기 작전에 맞섰다. 십년 전에도 인혁당이란 이름의 정당 조직체는 없었다. 그 사건 당시 정강^정책조차 없이 다만 진보를 지향하는 친목회 정도의 모임을 두고 남한 적화를 목표로 한 북괴 이념에 동조한 당이라 이름붙일 수 없다며 사법당국도 무죄를 인정했다. 당시도 실재하지 않았던 당인데 십년이 지난 이 싯점에 재건 운운이 웬 말이냐. 나를 포함해서 십년 전 그 사건의 연루자를 불온분자로 분류해 당신들이 여지껏 미행해왔고, 그래서 나의 경우 안정된 직장조차 갖지 못하고 지내왔음을 누구보다도 잘 알 텐데 정부 전복이란 거창한 모의를 몇사람이 어디서, 어떻게, 무슨 힘과 자금이 있기에 논의할 수 있었겠느냐. 십년 전에 있었던 경북대학교 학생써클인 ‘정사회(正思會)’의 당시 회장은 64년 한일회담 반대 ‘6·3시위’를 주도하여 학교로부터 제적당한 직후, 대구 반월동 소재 다방에서 이선생을 만날 때 그가 동석했는데 가정교사 자리를 구하는 중이란 말을 들은 바 있다. 언변이 당찬 활달한 청년으로 기억되나 그 뒤 연락이 없어 그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지 알지 못한다. 현재 그가 서울에 거주하며 민청학련 대구지방 담당책이란 사실도 여기 와서 처음 알았고, 그런 청년학생단체의 명칭조차 금시초문이다. 그러므로 청년학생들의 전국적인 조직망이 어떠한지도 전혀 모른다. 도표로 만든 사건 얼개의 ‘민청학련 지도부’에 적힌 그들은 이름조차 생소하며, 그들 중 어느 누구와도 만난 적이 없다. 오직, 일일 평균 작업시간이 열네 시간에 이르는 중소공장 노동자들의 열악한 근로조건을 개선시키려 노력했고 배움이 부족한 그들을 가르친 게 죄가 된다면 그 죄는 달게 받겠다고 김씨가 말했다. 그의 그런 진술이 계속되자 수사관은 물리적인 힘을, 차츰 그 강도를 높여가며 육체적 고통을 넘어서서 정신의 마지막 기까지 빼앗겠다고 달려들었다. 보일러실같이 어두컴컴한 지하 고문실에서 사정없이 내려치는 몽둥이질은 다반사였고, 십자형틀에 사지를 묶어 눕혀놓고 물 먹이는 고문조차 성에 안 찼던지, 손발을 수건으로 묶어선 그 사이에 긴 막대기를 끼워 책상 두 개에 몸뚱이를 통닭구이처럼 매달아놓고 수건 씌운 얼굴에 주전자 물을 부었다. 폐에 물이 차서 기절했다가 깨어나면 조사실로 다시 끌고 올라가서 저들이 불러주는 대로 자필진술서를 쓰게 했다. 이에 응하지 않거나 진술내용이 저들 소견에 합당하지 않으면 다시 지하실로 끌고 내려가 이제는 엄지발가락에 전선을 감은 쇠막대를 끼워 직류 오백 볼트, 교류 삼백 볼트를 한계로 처음은 짧고 약하게, 차츰 길고 강하게 전류 세기를 높여 일초에서 삼초 정도 손잡이 돌리기를 되풀이하자, 그는 심장이 파열하는 듯한 고통 끝에 실신에 이르렀다. 엄지발가락 주변 살점이 꺼멓게 탔다. 수사관은 비몽사몽의 비정상적인 상태에 있는 김씨에게 피의자 신문조서를 부르는 대로 받아쓰게 하고 강제로 손을 끌어다 날인하게 했다. “당신이 골수 공산주의자가 아님은 우리도 알아. 우리가 어디 이런 수사 한두 번 해봤냐. 매타작 몇번하면 그쯤은 감을 잡지. 진보당 수괴 조봉암 사건 이후 암약한 혁신계 명단을 검토하는 과정에서 골수 좌익 뿌리가 가장 많이 잠복한 대구가 수사 물망에 올랐고, 너희들이 찍힌 거야. 지명도 높은 전국적인 인물이 아닌데다 민청학련 패거리와의 확실한 고리가 수사과정에서 포착되었거든. 이건 분명하잖아. 당신은 사일구 직후에 생긴 가장 악질적인 공산분자들이 조직한 사회당 산하 민민청 경북지구 대학책 간사였잖은가. 그런 전력이 있으니 비상시국에 조사 안 받게 됐어? 그쯤 알더라구. 대법까지 가서 형이 확정되고 나면 특사가 있을 것이니 참는 김에 조금만 더 참아.” 날마다 얼굴 맞대어 몰아붙이다 보니 인간적인 연민이 들었던지, 수사관은 검찰로 송치하기 전 마지막 단계에서는 넌덜머리를 내며 이런 말을 흘리기도 했다.

사일구가 나던 그해, 김씨는 침산동의 중소기업체인 직물공장에서 수납담당 일을 보고 있었는데, 7월 중순 어느날 해가 진 뒤였다. 만학도로 마지막 학기를 남겨둔 김씨는 방학이 막 시작되어 대학 야간부도 수업이 없었기에 전표 맞추는 잔업을 끝내고 봉산동에 있는 민민청 사무실로 바삐 가던 길이었다. 땅거미 내린 계산성당 앞을 지나는데 약전골목 쪽에서 확성기 소리에 이어 군중들의 함성이 들렸다. 김씨가 짚이는 생각이 있어 골목길을 질러 남성로로 빠지니 횃불을 든 데모대열이 현수막을 앞세워 몰려오고 있었다. “평화통일 촉구한다, 남북협상 재개하라!” “남북은 한 민족, 휴전 철책 분쇄하라!” “서울 평양 상호방문, 학생회담 개최하자!” 데모대열이 주먹을 내두르며 확성기 선창에 따라 복창했다. 일백 미터 넘게 대열을 이룬 데모대는 대부분이 청년학생들이었으나 장년층도 많았고 아녀자들도 더러 섞였는데, 그 외침은 냉전논리를 깨고 분단의 벽을 허물자는 통일을 향한 절규였다. 순간, 그는 온몸의 피가 갑자기 달구어져 혈관을 가속도로 관통하듯, 뜨거운 감동에 사로잡혔다. 목이 메고 눈물이 솟았다. 그는 오후 4시에 역전 광장에서 ‘민족일보’ 주최 ‘남북협상 촉진대회’가 열렸음을 상기했다. 그 집회에 참석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폭주한 업무로 공장을 빠져나갈 수 없었기에, 그는 데모대열에 기꺼이 합류했다. 내 내면에도 이런 행동력이 숨겨져 있었던가 하고 스스로 놀라며, 그는 선두에서 목청이 터져라 구호를 따라 외쳤다. 데모대는 달성공원 앞 광장에서 ‘민족통일 결의문’을 채택하고 해산했다. 그가 군중 속에 섞여 앞으로 나서기는 그때가 처음이었고, 그 뒤로 그런 기회는 한번도 없었다.

수사당국이 처음에는 인혁당과 민청학련을 별개의 단체로 취급하며 추궁했으나 차츰 두 단체를 연관시켜 인혁당이 민청학련 배후에서 행동지침 지령을 내린 상급단체로 몰아갔다. 그러나 마지막 단계에 이르자 두 단체의 연계성을 인정하는 한편, 민청학련은 학생운동에 전력이 있는 운동권 대학생들이 유신체제를 뒤엎을 목적으로 결성한 불온단체로, 인혁당은 북괴의 적화통일을 사주받은 골수 공산주의자들로 분리해서 다루었다. 민청학련은 몰라도 인혁당만은 실재하지 않은 조작된 사건이기에 김씨는 진실을 밝힐 수 있는 기회가 반드시 올 것임을 믿었다. 검찰청 검사실이 아니라 난데없이 나타나 정보부 남산분실에서 행해진 검사 신문 때 그는 이제야 그런 기회가 왔음을 알고, 조서가 강제에 의해 작성된 허위사실이라며 그 내용을 전면 부인했다. 그러자 검사는 “이 새끼가 아직 정신을 못 차렸군. 꿇어앉아!” 하곤, 구둣발로 정강이를 걷어찼다. 피의자 진술을 듣기엔 골통 개조가 더 필요하다며 검사는 입회한 수사관에게, 실토할 때까지 따끔한 맛을 더 보여주라고 재우쳤다. 64년 ‘인혁당 사건’ 때와 판이하게 이번은 검찰관조차 수사관과 한통속이었다. 김씨는 그길로 다시 지하실로 끌려가 전기고문대에 묶여졌다. 그래서 그는 재판정에서나 피의자 신문조서가 강제에 의해 날조되었음을 밝히는 길밖에 없다고 체념했다. 그는 한달이 넘게 당한 무차별 고문으로 육체는 물론 정신마저 처참하게 무너져갔다. 어디에도 진실은 통하지 않았다. 김씨는 지난날 수사과정에서 정신차릴 수 없게 무차별 폭행을 당해보았지만 이번만은 고문의 잔혹함과, 잠시도 쉴 틈을 주지 않는 얼빼기와, 마치 단기전을 치르는 듯한 속도전이 너무나 혹독해, 그 진통에서 헤어나는 길은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고 여겨, 동맥을 끊으려 시도하거나 삼층 조사실 창문에서 뛰어내려 자살을 기도하기도 했다. 폐농양증으로 기침을 할 때마다 피가 묻어났고 탈장이 되어 응급조치를 받기 위해 관구실로 끌려나갔다가 얼치기 치료도 잠시, 다시 조사실로 되끌려가곤 했다. 김씨는 인간을 살려놓은 채 육체를 산적으로 만들고 정신을 공황상태로 몰아가는 이런 비인간적인 형벌이 일제 강점기 조선인 독립운동가에게도 가해졌을까 하는 의문마저 들었다.

여름이 닥쳤으나 한평 못되는 감방 공간에서 김씨는 더위조차 느낄 수 없을 만큼, 여기가 이승인지 저승인지도 모르는 탈진상태에 있던 어느날 오후였다. 뼁끼통(감방 안 변소)의 높게 뚫린 작은 창으로 석양이 비스듬히 비껴들고 있었다. 그날 그는 만신창이 몸으로 시멘트 바닥에 늘어져 있었고 비몽사몽에서 헤매고 있었다. 그 순간, 그는 감방으로 들어온 뒤 처음으로 흐릿하게 떠오르는 아버지 모습을 보았다. 아버지는 김씨가 초등학교를 졸업한 이듬해 여름에 세상을 떠났어도 살아생전 함께한 추억이 많았다. 일년 내내 쌀밥 한끼 들퍽지게 먹어본 적 없는 가난 속에서 집안의 장남으로 억척스럽게 아버지 농사일을 도왔다. 강마을이라 주위에 높은 산이 없었기에 겨울철이면 양말이나 버선조차 신지 않은 짚신발로 아버지를 따라 이십리 길이 넘는 미타산까지 땔감나무를 하러 다니곤 했다. 군불 안 땐 방에서 겨울을 날망정 그 삭정이 나뭇단은 닷새장에 내다팔았다. 그렇게 길을 걸을 때 그는 아버지와 숱한 대화를 나누었는데, 그날 떠오른 아버지는 태풍이 억수를 몰고 온 어느해 여름 때 모습이었다. 낙동강 천변 자갈밭을 개간하여 감자를 심었던 아버지는 장맛비에 강물이 붇자 장대비가 쏟아지는 한밤중에, 아무래도 감자밭이 유실되겠다며 물꼬를 보겠다고 바소쿠리 얹은 지게에 삽을 들고 나갔는데, 밤을 보내고 날이 밝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종호는 빗발이 뜸해진 새벽에 아버지를 찾으러 강변으로 나갔다. 삼베 등거리가 비에 쫄딱 젖은 아버지는 쓰러져 누운 갈대를 깔고 꾸부정히 앉아 물굽이를 이루며 요동치는 강물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풋바심으로 한여름을 허기지게 넘기던 그해는 전쟁 나기 전이었다. 큰물이 져서 강 가녁까지 채워 도도히 흐르는 강물에 뿌리째 뽑힌 나무들이며 가재도구가 붉은 흙탕물에 실려 떠내려왔다. 평소에는 수면보다 어른 키만큼 지대가 높은 감자밭은 물속에 잠겨 자취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우리 감자밭이 몽땅 읎어져뿌렸네예?” 하고 묻는 종호에게 아버지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밤내도록 죽을 동 살 동 모르고 용을 썼건만 만사가 허사데이. 감자 거둬 너댓 가마라도 건지모 니 중학교 입학 학자금이나 우째 마련해볼라 캤는데……” 소작지 논 다섯 마지기로는 여섯 식구 입에 풀칠도 빠듯해 해토머리부터 할머니에 어린 종호까지 나서서 자갈과 잡석을 골라내고 흙을 져다 날라 개간한 밭이었다. “우리집 행핀으로는 아무래도 니가 중학교에는 몬 가겠다. 니가 집안 장자 아이가. 조선글마 개우 깨친 이 애비가 안될라모 사람은 모름지기 많이 배아야 되는데 말이다.” 아버지는 30년대 초반 러시아의 나로드니끼 운동에 자극받은 대학생들이 방학중 농촌계몽활동을 벌일 때, 그들이 문을 연 면청 소재지의 야학에 나가 글을 깨친 바 있었다. “……그런데 종호야, 감자 농사는 망쳤지마는, 저 엄청난 강물 좀 바라. 살아 꿈틀대는 저 무서븐 기백이 을매나 대단하노. 손바닥으로 물을 뜨모 개미들처럼 서로 살겠다고 손가락 사이로 뿔뿔이 새나가는 물이, 이렇게 뭉쳐서 흐르이 증말로 장관 아이가. 누대로 지주 밑에 빌붙어 살아온 우리 같은 소작농이 바로 저런 물인 기라. 물 한방울은 아무것도 아이지만, 우짜든동 뭉치모 저래 되는 기라. 왜늠 물러가고 해방된 시상 만냈으이 우리가 모 심고 타작한 논을 우리한테 돌리달라는 기 머가 잘못이고? 그래서 내가 지난 장날에도 여게 작인을 뭉쳐 읍내 농지개혁사무소로 찾아간 기라. 농지개혁에 유상몰수 유상분배는 절대 안된다고. 거머리 무섭다고 논에 발도 안 당가본 지주가 타작한 알곡을 육할이나 뺏아가는 시상에서 더 몬 살겠다고. 무지랭이 농민들도 뭉치모 이 강물맨쿠로 심을 얻는데 말이다. 사람 우에 사람 읎고 사람 밑에 사람 읎이 다함께 같이 사는 대동시상이 도래해야 되는데……” 아버지가 한숨 끝에 말을 접었다. 아버지의 말이 그랬듯, 종호는 마을에서 이십리 밖 안리초등학교 졸업을 끝으로 중학교 진학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전쟁 난 그해 7월 초순, 인민군이 창녕 땅을 덮치기 전, 예비검속에 걸린 아버지는 낙동강 된여울 둔치를 감싼 성산성터 골짜기로 끌려가 제 묻힐 구덩이를 판 뒤 CIC(방첩대) 대원들에 의해 총살당했다. 함께 소작쟁의를 벌였던 빈농 가장들과 46년 10월 1일 대구에서 시작한 민중항쟁이 ‘추수 봉기’로 발전되어 석달 동안 경상도 일대를 휩쓸 때 거기에 가담했던 농민들과 합쳐 서른세 명이 한 장소에서 변을 당했다. 인민군이 홍수진 듯 밀고 내려오자 보도연맹 가입자들과 무고한 양민학살이 남한 곳곳에서 자행되던 때였다. 어림잡아 20여만 명이 정당한 재판절차 없이 그렇게 살해당했다. 김씨가 현실정치와 사회현상에 관심을 갖게 된 가닥을 거슬러 올라가면 그의 나이 열네살 때, 홍수로 범람한 낙동강 둑에서 아버지가 들려준 그 말에 닿았다.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며 평등세상을 소망한 아버지 말의 진정한 의미를 그는 성장하며 차츰 깨달았고, 허구한 날 연장 들고 공장 기름밥 먹어온 체험을 통해 어떻게 사는 길이 바르게 사는 길인지를 터득해갔다.

정보부는 사건의 골격을 각본에 의거 구성을 마치자 4월 25일, 민청학련 관련자와 인혁당 재건위원회 관련자 240여 명을 검거했고 구속 송치된 주동자가 60명에 이른다며, 그들의 조직체계를 도표로 만들고 범죄사실을 장문으로 발표했다. 민청학련 관련자들을 엄단할 목적 아래 인혁당 재건위가 민청학련을 사주한 지휘부 조직체로 둔갑되었다. 5월 27일에는 피의자 신문조서만으로 인혁당 관련자 23명을 따로 떼어 반공법과 내란예비음모 등의 혐의로 기소했다. 6월 15일 민청학련 관련자와 인혁당 재건위 관련자의 1심 공판이 삼각지 언덕에 있는 국방부 청사 뒤 퀀셋(Quonset) 건물인 육군본부 비상보통군법회의 법정에서 비공개로 열렸다. 김씨는 피고인 진술에서 그동안 응어리졌던 진실을 밝혔다. 자필진술서는 고문에 의해 조작되었다. 자신은 북괴에서 남파된 간첩과 접선한 적 없으므로 북괴 지령을 사주받은 바 없다. 공산주의국가 건설을 목적으로 남한정부를 전복시킬 변란을 생각해본 적 없다. 그러므로 근로대중과 대학생을 상대로 한 사상 적화공작, 노동자와 근로대중의 과도기적 임시정부 옹립을 위한 혁명 전위대 조직 육성공작이란 혐의를 부인한다. 자본주의사회의 시장경제 논리에 입각한 자유민주주의를 선호하나 진정한 의미의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서는 경제정의 실현,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에서 신음하는 노동자를 위한 조합 설립권 인정, 서민대중을 위한 민족적 복지정책이 더욱 강화되어야 한다는 소신을 가졌다. 조그마한 힘이라도 모아 이를 실천하는 길을 찾고자 뜻이 맞는 동료들을 만나왔을 뿐이라고 진술했다. 1심은 피고인 가족 한명만이 입회가 허락되었으며 인정신문, 사실심리, 결심, 선고 등 네 번의 출정으로 끝났다. 1심에서는 인혁당 관련자 7명, 민청학련 관련자 2명이 사형선고를 받았다. 9월 7일 비상고등군법회의 선고공판에서는 제1심에서의 내용과 중복된다 하여 피고인의 사실심리를 생략하고 항소이유에 관한 검찰측 변론만을 시행한 끝에 결심(結審)이 있었다. 그 결과, 인혁당 관련자 일곱 명은 항소가 기각되어 1심에서 선고한 사형이 그대로 유지되었고, 1심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민청학련측 한명만이 사형에서 무기로 감형되었다. 1심과 2심 공판이 있기 이삼일 전까지도 변호인측은 수사기록을 제대로 접할 수 없었다. 각종 진술서는 그 증거능력을 제대로 탄핵하지 않은 채 증거로 채택되었다. 재판이 진행될 동안 피고측 변호인들이 가택연금당한 상태에서 42명의 검찰측 증인들만 나섰고, 변호인측 증인은 한사람도 채택되지 않았다.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사건 전모를 잘못 이해하여 잘못 전할 위험이 있다는 이유로 외신기자의 방청이 허용되지 않았다. 비상군법회의 재판 진행과정은 국내외 들끓는 비판여론에 시위라도 하듯 사전에 정해놓은 형량대로 선고만 내리는 요식행위의 속전속결이었다. 진실이 세상에 알려질까 두려워한 수사당국은 그동안 가족 면회는 일절 허용하지 않았고 인혁당 관련자들의 처까지 정보부 남산분실로 연행해 남편이 공산주의자임을 인정하라고 추궁했다. 그러나 김씨는 민간인으로 구성된 사법부 최고기관인 대법원 확정판결이 마지막으로 남아 있었기에, 중앙정보부의 조작된 각본으로 누명을 쓰고 사형이 선고된 피고인들에게 특별사면은 어렵더라도 감형조치는 있을 것이란 양심적인 판결에 한가닥 기대를 걸었다.

 

75년 4월 9일

훗날 역사에서 인명 경시의 극단적인 사례로 기록될, 사형과 무기형을 무작위 남발한 긴급조치에도 불구하고 유신헌법 철폐와 민주화 회복 열망이 광범위하게 확산되고 명동성당과 원주성당, 종로 5가에 있는 기독교회관이 민주화의 성역으로 자리잡았다. 이에 위기를 느낀 박통은 정국 수습을 겸한 유신정권 유지의 최후 수단으로 75년 1월 22일 현행 헌법과 유신체제에 대한 찬반·신임을 두고 국민투표에 부친다는 담화를 발표했다. 민주화 회복을 지지하는 재야 14개 단체가 즉각 국민투표를 거부한다는 성명을 발표했으나 박통은 그런 국민적 저항을 외면한 채 전국에 비상경계령을 선포한 뒤 2월 12일 국민투표를 강행했다. 투표율 79.84퍼센트에 찬성 73.1퍼센트를 얻자 박통은 사흘 뒤인 15일에 큰 시혜나 베풀듯 대통령 특별조치로 ‘국민총화를 더욱 굳게 다지며 민족중흥의 역사적 과업 수행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하고자’ 긴급조치 위반자의 석방을 발표하곤 그날과 17일에 인혁당 관련자들과 민청학련 주동자 몇을 제외하고, 논리에 맞지 않게 유신헌법 지지 국민투표 승리를 빌미로 유신헌법 반대데모로 투옥된 대학생 대부분을 석방했다. 정권 당국과 정보부는 이제 마지막 남은 인혁당 관련자들의 처리문제에 부닥쳤다. 민청학련 사건으로 수감되었다 2월 15일 형집행정지로 석방된 한 시인은, 인혁당은 정보부의 무자비한 고문에 의해 조작되었다는 글을 신문에 발표하여 공산주의자란 혐의에 따른 그들의 사형 누명을 벗겨주려 했다. 한편 민청학련 관련자들 대부분이 석방된 마당에, 그들이 ‘민청학련 배후 지도세력으로 인혁당이 존재하지 않았다’며 진실 규명을 촉구하면 그러잖아도 국내외 여론에 의해 군사독재정권의 강압수사란 지탄을 받는 마당에서 수수방관하고 있을 입장이 아니었다. 칼자루를 쥔 자가 조속히 결단을 내리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처하자, 진실을 빨리 사장시켜버리기로 최종 결단을 내렸다. 4월 8일 오전 10시, ‘인혁당 재건위 사건’ 대법원 선고공판은 피고인들을 출석시키지 않은 가운데 열렸고, 대법원장을 포함한 대법원 판사(대법관) 열세 명 중 한사람만이 비상고등군법회의 재판과정에서 재판절차에 위법이 있었다는 소수의견을 냈으나, 사전에 조율이 끝난 각본대로 ‘비상고등군법회의에서 내려진 중형이 합당하며 인혁당 관련 피고인들의 상고를 기각한다’는 판결을 내렸다. 인혁당 관련자 일곱 명, 민청학련과 인혁당의 고리 역할을 한 한명은 1심, 2심과 동일하게 사형이 확정되었다.

서대문형무소 독거감방에 갇혀 있던 김씨가 대법원의 확정판결을 전해 듣기는 그날 정오를 넘겨서였다. 교도관이 운동시간이라며 감방문을 열곤 김씨에게, 오전에 인혁당 관련자 대법원 상고심이 기각되었음을 알렸다. 교도관은 피고인에게 그런 소식을 귀띔하는 게 미안했던지 김씨와 눈을 맞추지 않고 말했다. 그 말을 듣자 김씨는 전기고문을 당할 때처럼 정신이 아찔했고 숨이 멎는 가슴의 통증을 느꼈다. 마치 딛고 선 교수대 발판이 아가리를 털컹 벌리고 몸이 공중에 대롱대롱 매달린 채 올가미가 숨통을 죄는 듯한 충격이었다. 그는 수갑을 찬 채 어지럼증으로 벽에 등을 붙였다. 몸을 제대로 가눌 수 없는 현기증에 순간적으로 눈앞에 뭇별이 스쳤다. “이제 사형집행 절차만 남았단 말인가?” 하고 수꿀해져 중얼거리자, 그는 감방에서 되씹어온 의문이었던, 자신이 과연 사형에 처해질 무슨 중대한 범죄를 저질렀는지를 자신에게 되물었다. 그럴 위치에 있지도 않았지만 남파 간첩과 접선해 국가의 중요한 정보를 제공한 적도, 인민혁명당이란 좌익 지하정당 창당과 조직에 간여한 적도, 사상 불온한 자들과 남한정부를 전복시킬 목적으로 모의한 적도, 좌파이론의 실천적 방법론을 누구에게 전파한 적도, 심지어 살인을 했거나 공모한 적도 없다. 설령 만에 하나 그런 범법사실의 일부를 판사가 인정해 선고한다 해도 사형이란 극형에 처해야 마땅한지, 선악의 판별을 관장하는 지혜로운 자가 있다면 묻고 싶은 심정이었다. 신에게? 그러나 김씨는 종교인이 아니었고, 이 지상에서 자신의 결백을 판결해줄 그 어떤 권능있는 자가 없었다. 최소한의 인간적인 권리마저 가차없이 말살된 ‘사법살인’의 희생자일 뿐이었다. 온몸에서 기운이 빠져나가자 그는 갑자기 바보가 된 듯 멍청해진 채 컴컴한 복도를 어뜩비뜩 걸어 햇빛 맑은 형무소 마당으로 나섰다. 바람 자는 따뜻한 봄날 오후라 마당 공간에는 버드나무 꽃가루들이 실밥처럼 부유하고 있었다. 마당 저쪽에 웅기중기 모여선 사람들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웬일로 인혁당 사건 관련자 모두가 수갑을 찬 채 끼리끼리 귀엣말을 나누고 있었다. 김씨는 정보부 남산분실에서 조사받을 때 복도를 지나치다 더러 선배와 동료들과 눈을 맞추는 기회가 있었고, 감방 뼁끼통을 통해 아래 위층에 수감된 ‘4·3데모’ 관련자들과 통방(재소자들이 교도관 몰래 창을 통해 나누는 대화)을 하기도 했으나 인혁당 관련자를 이렇게 한꺼번에 보기는 처음이었다. 김씨는 그들을 보자 마치 구원자라도 만난 듯 어찌나 반가웠던지 눈물부터 울컥 솟았다. 분하고 원통해서 통곡하고 싶을 때는 눈물이 안 나왔는데 같은 입장에 처한 그리운 얼굴들을 보자 그 얼굴들을 지우기라도 할 듯 눈물이 앞을 가렸다. 작년 4월과 5월에 걸쳐 강제연행된 이래 일년 가까이 고문에 따른 후유증을 견뎌내느라 그들은 넋이 빠진 듯 자세조차 꾸부정했는데 모두의 피폐한 얼굴이 근심 걱정으로 차 있었다. 그들 사이에 섞여 있던 홍형이 김씨를 보자 어설픈 미소를 띄웠고 이리 오라며 눈짓으로 불렀다. “김형, 아무래도 우리를 금방 쥑일라 카는 거 같심더. 자꾸만 그런 예감이 들어예.” 홍형이 꺽 쉰 쇳소리로 말했다. 퀭하게 들어앉은 눈동자가 절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설마 그래까지 다급하게 처리하겠습니껴.” 김씨도 어떤 불길한 예감으로 마음을 졸였으나 물에 빠진 자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이 미제 수정 좀 보이소. 아츰에 이걸로 새로 갈아끼아줬잖습니껴. 교도관이 열어주지 않으모 안 열리는 새걸로 말입니더. 전에는 젓가락으로도 풀어지는 헐렁하고 낡은 수정이라 감방에서 그걸 풀어놓고 화장실에도 댕겼잖습니껴.” 홍형이 자기 두 손목을 채운 수갑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꺼먼 고문자국이 남은 여윈 손이 풍 맞은 듯 떨렸다. “아츰에 교도관이, 오늘 대법원 선고가 있는 날이라 만약을 위해 수갑을 바꾼다고 말합디더마는……” 김씨도 자기가 찬 새 수갑을 내려다보며 어물쩍 말했다. 그도 어느 장기수에게 들었던 말이 있어, 교도관이 변명삼아 하던 그 말을 의심했다. “수갑을 새걸로 갈아끼우고 사형집행실을 청소하는 날 다음 새벽에는 어김읎이 집행한다 안캅니껴. 그기 형무소 관례라 카데예.” 김씨가 교도관 말에 품었던 의심을 홍형이 그대로 읊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예, 우리나라가 법치 민주주으국가 아입니껴. 변호인단이 형집행정지 재심신청을 낼 끼고, 감형 탄원 기회가 안죽 남아 있지 않습니껴.” 김씨는 마지막으로 걸고 있는 기대를 별 자신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법률으 일반적인 상식대로 그렇게 감형이 되모 우째 좀 명줄을 늘였다가 이담에 억울한 옥살이 누명이라도 벗겠구마는, 대법원이 판결을 이래 빨리 내리다이, 아무래도 예감이 이상합니더. 이 군사정권이 어데 제정신 가지고 국정을 운영합니껴. 삼선개헌 때부터 보다시피, 하는 짓이 미쳐도 보통 미친갱이가 아닌 기라예.” 교도관이 잡담을 말라며 이쪽으로 다가와 둘은 대화를 중단했다.

감방으로 돌아온 김씨는 정좌하고 앉아 눈을 감았다. 떠오르는 갖가지 상념을 지우고 무[空]의 상태에 몰입해보려 애썼으나 마음만 그럴 뿐 그게 쉽지 않았다. 그러나 애써 생각을 비워 그 끈의 가닥을 거의 놓고 무아경에 들 무렵, 슬며시 안중근 의사의 모습과 그의 단지혈맹(斷指血盟) 수인(手印)이 떠올랐다. 안의사가 옥중에서 ‘동양평화론’을 집필하다 일제의 재빠른 사형집행으로 순국함으로써 미완에 그쳤는데, 마지막 옥중생활의 초조함도 달랠 겸 자신이 생각하는 ‘민족통일해방론’을 집필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안의사와 견줄 때 자신은 대의를 위해 이룬 일이 아무것도 없었고 민족통일을 두고라도 그 열망은 마음을 채우지만 냉철한 이론적 지식의 부피가 얇았다. 평소 숭모했던 의사의 담대한 최후 자세를 따름은 좋으나 자신은 그 발치에도 못 미치는 시정인이라 그런 집필은 만용이 아닐 수 없었다. 설령 그가 만용을 무릅쓰고 한 인간이 지상에 살았던 자취라도 남기겠다는 목적 아래 집필에 착수한대도 그럴 시간적 여유가 남았을 것 같지 않았다. 아니나다를까, 해가 지고 땅거미가 내릴 무렵에 뼁끼통 창문을 통해 위층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리더니 “아래층에 인혁당 수감자 맞지요?” 하고 물었다. 김씨가 화장실로 들어가 높이 달린 창문에 대고 그렇다고 말하자, “재소자를 데려다 사형집행실을 청소했대요. 그렇게 아시라고……” 말끝을 맺지 못한 최후통첩이었다. 그 말을 듣자 김씨는 비로소 ‘사형집행’ ‘교수형으로 처형’이란 말이 대학 때 전등불 아래 강의실에서 배운 법률적인 용어로 사전에 박힌 활자가 아니라 자기가 몸소 당할 형벌임을 실감했다. 빠져나갈 수 없고 벗어날 수 없는 운명적인 필살(必殺)이란 섬쩍지근함이 가슴을 훑었다.

“무섭고 더러븐 이땅에서는 몬 살겠다. 아무 죄 읎는 너그들 애비 끌고 가서 쥑인 이 바닥에서는 더이상 살 수 읎어. 우리 식구 몽땅 새끼줄 친친 감고 낙동강에 뛰어들지 않을라 카모 고향땅을 떠날 수밖에 읎어. 새 시상 찾아 신천지로 떠나야 해!” 엄마가 뒤돌아보며 소리쳤다. 까맣게 탄 엄마 얼굴은 팬 주름마다 눈물이 번질거렸다. “어무이, 거게가 어덴데, 어데로 간다는 깁니껴?” 종호가 겁먹어 물었다. “가자. 내만 따라오니라. 어서 이 에미만 따라오라이깐.” 엄마는 바리바리 엮은 등짐을 졌고 머리에는 가재도구를 담은 광주리를 머리통 짜부라지게 이고 있었다. 종호도 지게짐을 졌다. 어린 남매 동생도 제가끔 보따리나 망태기를 들고 데바삐 따라왔다. 겹겹이 껴입은 누더기 입성에 네 식구는 새까만 맨발이었다. 삭풍이 몰아쳐 가랑잎이 흩날리는 속에 일가족은 그루터기만 남은 황량한 들판길을 나선 참이었다. “인자 집도 절도 읎는 서러운 걸뱅이 신세지마는 새 땅 찾아가모 우리 겉은 불쌍한 인간을 잘 맞아줄 끼다. 날으는 갈가마구야, 불쌍한 우리 식구 거게로 어서 데리다 도고.” 엄마가 빈 하늘에 맴을 도는 갈가마귀떼를 보고 말했다. 구름 낀 나지막한 하늘 아래 갈가마귀들이 자욱 날고 있었다. “그 땅 도회지으 공장은 직공들 천국이고 그 땅 시골은 지주 따로 읎고 작인 따로 읎는 시상이라 카잉께 우리 겉은 빈농이사 그런 땅에 가서 살아야지러. 일한 만큼 묵을 수 있고 인간 천대 읎는 그런 시상이 있다고 니 애비가 살아생전 말했으이, 그 땅 찾아가야 해. 니들 애비 저승차사가 질 안내 자알 할 끼다.” 잰걸음을 걷는 엄마 말에 뒤따르던 종호가 홀연히 깨달았다. “어무이, 혹시 아부지 혼령이 가 있는 데 찾아가자는 거 아입니껴?” 종호가 놀라 물었다. 그 땅은 한창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살육의 현장, 총알과 시체를 피해서 넘어야 도달할 수 있는 그 위쪽 지역이 분명했다.

김씨는 놀라 눈을 떴다. 앉은 채 무아경에 빠졌다 깜박 노루잠에 들었는데, 짧게 꾼 토막꿈이었다. 섬뜩한 꿈이라 온몸이 식은땀으로 흥건히 젖어 있었다. 깜깜한 어둠이 앞을 막았고 사위는 조용했다. 김씨는 왜 그런 꿈을 꾸었을까를 되짚어보았다. 전쟁 초다짐에 아버지가 비명횡사당한 뒤 소작하던 논마지기마저 빼앗기고, 엄마는 친척집을 돌며 드난살이해서 얻어온 잡곡으로 시어미와 자식 셋을 거두었다. 기운없이 방구석에 늘어져 누운 자식들을 차마 볼 수 없었으나 엄마는 누대로 살아온 고향땅을 감히 떠날 엄두를 못 내었다. 무지렁이 과수댁 촌아낙들이 그렇듯, 물설고 낯선 한데로 나서면 그 길이 송장 되는 길이요 들짐승이나 까마귀밥이 되는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빨갱이 집안이라며 이웃들이 상종하려 들지 않았고 친척들조차, 지서 순경 감시가 무섭다며 제발 어디로든 살길을 찾아나서라고 고용살이마저 거절했다. 할머니가 영양실조 끝에 숨을 거두고 끼니 잇기가 더욱 힘이 들자 엄마는 죽기를 각오하고 보퉁이를 싸지 않을 수 없었다. 전쟁이 중부전선에서 소강상태로 접어든 51년 늦가을, 엄마는 자식 셋을 달고 추석에 성묘차 고향에 들렀던 먼 친척을 찾아 한뎃바람 맞으며 대구로 나섰다. 그렇게 식구들이 쫓기듯 길 나섰을 때의 행색은 꿈에서 보았던 그대론데, 엄마는 꿈에서처럼 아버지가 원했던 그런 땅을 찾아가자고 말하지는 않았다. 대처로 나가면 어쨌든 너희들 먹여살릴 길이 있을 거란 말만 되뇌었다. 김씨가 청년이 된 뒤 아버지의 생각을 유추해보면, 아버지는 빈농과 노동자가 천대받지 않고 계급차별이 없는 대동세상의 도래를 꿈꾸지 않았을까, 더듬어 짐작할 수 있었다. 농촌계몽 나와 야학당을 개설한 대학생들이 러시아 혁명을 두고 설명했을 때, 아버지는 농민·노동자들의 투쟁과 그 승리에 감복당했을 수 있었다. 들은 말로는, 아버지가 일제시대 적색농민조합(赤農) 운동에도 관여한 적이 있었다 했다. 그러나 김씨는 아버지의 희망이었던 그런 세상이 반드시 인류의 이상적인 국가라고 수긍하지는 않았다. 노·농 계층이 법적 보호 없이 빈곤 속에 방치되었던 19세기나 20세기 초, 아니면 빈부격차가 심한 후진국 독재정권의 진보적 좌파는 지금도 그런 혁명을 꿈꿀 수 있다.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반공통치와 자본제사회를 국가 이념으로 삼는 남한 역시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지만, 계급 없는 사회라는 북한도 일사불란한 국가통제 아래 거주 이동, 사상과 표현, 종교의 자유를 강제당하는 일인독재사회였다. 물이 밥이라면 공기는 자유라 인간은 물과 공기를 함께 먹어야 생명을 보전하므로, 김씨는 그 두 가지를 안분하여 더 나은 삶의 조건을 충족시킬 수 있는 국가형태를 두고 동료들과 머리 싸매고 고뇌해왔던 게 사형을 당할 만큼의 중죄로 인정된 셈이었다.

김씨는 꿈에서 깨어나 아버지의 죽음을 떠올리자, 부전자전이란 말대로 무슨 운명인지 자신이 아버지와 똑같은 길을 밟아가고 있다고 느꼈다. 흔히 하는 말로 냉전 분단의 희생양이었다. 이런 개 같은 죽음이 이땅에서 더이상 자행되지 않으려면 민중이 그 무엇보다 민족통일부터 앞당기는 데 발벗고 나서서 참여해야 함이 마땅할 터였다. 그러자면 반공과 독재의 족쇄를 풀 남한의 민주화가 선행되어야 했다. 그 길에 나름대로 매진했으나 그는 나이 마흔살 목전에서 생의 종지부를 찍게 된 셈이었다. 그 점이 서럽고 안타까울 뿐 이세상을 떠남에 남는 미련은 없었다. 부당한 형벌은 역사 이래 끊임없이 이어져왔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못난 지아비로 고생만 시켜온 처와 철모르고 자라는 두 딸애에게 좋은 아비노릇 한번 못하고 떠나는 게 미안했고, 그들 기억에 자랑스러운 아비의 모습을 남기지 못하고 떠남이 아쉬웠다. 김씨는 교수형을 당하기에 앞서 유언으로 남길 말을 머릿속에 그려보았다. ‘나는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란 극단적인 이념 차이로 대립하고 있는 남북 냉전의 벽을 허물고 빠른 시일 안에 남북이 평화적으로 만나 가슴을 열고 민족통일 문제를 허심탄회 논의하기를 소원해왔다. 그런 의미에서 남북 공히 외세를 업고 싸운 육이오전쟁과 같은 동족상잔의 전쟁 재발을 반대한다. 남북 공히 현재와 같이 일인독재정권 유지를 빌미로 한 전체주의적 통치방법 역시 반대한다. 나는 남북한이 외세를 배제하고 인구 비례에 따른 평화적인 자유선거를 통해 중립국으로 통일되기를 희망해왔기에, 분명히 말하지만 공산주의자는 아니다. 통일될 그날까지 남한정부 당국에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만연된 부정부패를 척결하여 국민의 기본권을 보장하고, 공명선거와 평화적 정권교체의 길을 열어 참다운 민주주의를 실현하고, 민족적 경제정의를 실천하여 부익부 빈익빈의 불평등 현상을 바로잡고, 기층민중 복지정책을 더 강화해달라고……’ 김씨의 머릿속 유언장 작성은 거기에서 멈추었다. 20세기 후반에 명실상부한 법치국가가 거리낌없이 모살(謀殺)을 자행하는 야만의 시대에 유언장 작성마저 조작되지 말라는 법이 없었다. ‘공산주의자인 나로서는 적화통일의 그날을 못 보고 죽는 것이 원통할 뿐이다.’ 그들은 이렇게 유언장을 날조하고도 남을 자들이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 김씨는 유언장을 그들에게 넘겨주느니 차라리 할말이 없다고 침묵하며 교수대에 오르는 게 정당하지 않을까 싶었다. 그러나 그 정당함이 원수조차 용서하여 사랑으로 감싸안는 평화로운 죽음의 길일까? “아니다, 억울하다! 이렇게 억울 절통하게 죽을 수는 없다. 고난을 이기고 이땅에 민주화 시대가 오면 누군가가 이 혐의를 꼭 벗겨주어야 한다! 그래야만 나는 저승에서도 부릅뜬 눈을 감을 수 있을 것이다!” 김씨는 갑자기 울부짖는 자기 목소리에 놀라 감고 있던 눈을 떴다. 마지막 밤이 너무 짧게 흘러가고 어쩌면 초조하게 너무 긴데, 아직 날이 샐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사위가 깜깜하고 조용했다. 내가 왜 이러나. 통분으로 이렇게 이빨 갈며 죽음을 받아들이지 말자. 그는 대범하지 못한 자신을 꾸짖었고 일회성의 생애 끝에 누구나 한번은 맞게 되는 죽음이 자기에게도 때 이르게 찾아왔음을 다시 환기했다.

드디어 새벽 6시쯤, 바깥이 희뿌옇게 밝아왔다. 복도를 울리는 발걸음 소리에 이어 어느 감방인가 자물쇠 따는 쇳소리가 났고 두런거리는 말소리도 들렸다. 꿈에서 깨어난 뒤부터 눈을 감고 정좌해 있던 김씨는 드디어 최후의 시간이 당도했음을 알았다. 그는 들숨으로 선선한 새벽공기를 폐 가득 채웠다. 한시간 전부터인지 두시간 전부터인지 줄곧 다짐해온 게, 불의가 그 수치스러움을 감추려면 정의를 죽일 수밖에 없으므로 내 죽음을 떳떳하게 받아들이자는 것이었다. 시멘트 바닥을 울리는 구둣발 소리가 다가왔다. 이제야말로 그 지독했던 육신고에서 영원히 해방된다고 생각하자 김씨의 숨소리가 고르게 자리잡고 마음에 안정이 찾아왔다. 죽음이 죽음을 이길 수 있다는 안도감이었다. 교도관 발소리가 김씨 감방 앞에서 멎고 열쇠 푸는 소리가 났다. 김씨는 눈을 번쩍 떴다. 자기와 생각을 함께 나누었던 동료들의 죽음이 눈앞에 보였다.

대법원 확정판결이 있은 지 하루가 채 못되는, 스무시간 만에 이루어진 사형집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