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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윤영수 尹英秀
1952년 서울 출생. 1990년 제1회 현대소설신인상으로 등단. 소설집 『사랑하라, 희망 없이』 『착한 사람 문성현』 『자린고비의 죽음을 애도함』 등이 있음. yeongsuyoon@hanmail.net
새떼
박윤명이 까페에 나타난 때는 작년 12월 초였다. 내리는 눈이 땅에 닿기도 전에 행인들의 옷자락에 휘말려 자취를 감추던, 겨울치고는 꽤 푸근한 날의 오후였다.
물론 나는 일을 하고 있었다. 한사람당 오천원. 젊은 여대생들, 남녀 커플들, 간간이 끼어들지만 일단 보기 시작하면 남편에 자식에 시어머니 남은 명줄까지 한번에 네댓 명분을 거뜬히 해치우는 아줌마들을 상대로 신명나게 사주풀이를 하고 있었다. 결혼운에 취직운, 재물운, 건강운…… 누가 뭐라 해도 나는 강남 일대의 까페에서 그리 빠지지 않는 사주쟁이였다. 생년생월생일생시 여덟 글자의 조합으로 나는 내 입의 풀칠과 까페 사장 김승우에게 건네는 월세 30만원과 전처 송현숙 계좌로 부치는 아들양육비 40만원과 열세평형 헌 오피스텔을 구입하기 위해 융자를 받는 대신 든 은행 적금 50만원을 해결하고 있었다.
사주까페에 둥지를 튼 지 3년째였다. 그동안 까페에서 친구들과 마주치지 않았다는 사실은 따지고 보면 신기한 일도 아니었다. 커피나 주스 한잔 값이 웬만한 식사 두 끼에 해당되는 강남의 호화로운 골목 까페에 하릴없이 드나들 인간은 우리 또래 중에 별로 없었다. 내 나이 올해로 서른여덟, 내 연배라면 한창 생업의 현장에서 눈코 뜰 새 없이 돌아치거나 아니면 아예 백수가 되어 자판기 커피를 뺄 동전푼에도 가슴을 조이거나 둘 중 하나였다. 딱 한번, 여자친구와 들어서는 대학 후배녀석을 맞닥뜨릴 뻔한 적은 있었다. 녀석을 알아본 순간 내가 먼저 자리를 피했다.
박윤명. 나와는 초등학교 중고등학교 동창. 20년이 지났음에도 그는 별로 달라진 구석이 없었다. 바짝 치켜 깎은 스포츠형 머리에 넓은 이마, 고등학생들이 입음직한 진회색 더플 반코트에 삼십대 후반의 나이와는 어울리지 않는 무구한 표정. 내가 쳐다보자 어린애처럼 반가워하며 손을 쳐들었다가 이내 어색하여 제 가슴 옷자락을 만지작거렸다.
물론 나는 반갑지 않았다. 무표정한 얼굴로 그대로 일을 계속했다. 여자분 사주에 불이 많으시군요. 그런데 남자분은…… 다행이네, 나무가 많네. 서로 돕는 궁합이에요. 커플로 보이는 남녀가 서로 마주보며 웃었다. 이들이 각기 내게 궁합을 보았더라면 결과는 다를 수 있었다. 여자 성질이 불이네요. 뭣하러 사귀어요? 이 남자 사주에는 돈이 없네. 각오해야지 뭐. 그들의 사주풀이가 끝나고 나는 또다른 테이블의 여대생 둘을 대했다. 손님은 개띠하고는 맞지 않아요. 개도 키우지 말고 보신탕도 먹지 말고. 어머머 어떡해, 우리집에 개 있잖아. 쌍꺼풀에 턱뼈까지 교정한 것이 분명한 여자가 옆 친구의 어깨를 치며 호들갑을 떨었다. 나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절대 안돼. 취직도 안되고 시집도 못 가.
한 시간이 넘도록 윤명의 시선은 내게 박혀 있었다. 하는 수 없었다. 2층 홀 전체에 사주풀이를 원하는 사람이 더이상 없음을 확인하고 나는 그가 자리잡은 테이블로 다가갔다. 바쁘구나, 그가 손을 내밀었고 나는 소파에 앉았다.
“생년월일이나 불러라. 오천원 선금이다.”
메모 준비를 하는 나를 보고 윤명은 겸연쩍어 몇번이고 안경코를 추어올렸다.
우연히 내 전처 송현숙을 만났다고 했다. 그녀와 내가 갈라선 지도 벌써 4년이 되었다. 그러나 그녀라면 내 소식을 알고 있을 터였다. 몇달 전, 까페에서 처제와 마주친 적이 있다. 언니와 열한살 터울이 지는 막내처제는 아직 대학생이었다. 친구들과 함께 까페에 들렀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끝이었다. 친구들이 자기들의 테이블에 나를 불러 사주풀이를 하게 할 때에도 그녀는 모르는 사람인 척 행동했다.
그런데 박윤명과 송현숙은 서로 어떻게 알아보았을까. 송현숙, 송정희. 그가 이것저것 얘기하는 것을 듣고 나서야 나는 내 전처와 윤명의 처가 8촌간인 사실을 기억해내었다. 희한했다. 전처와 관계된 일들은 수백년 수천년 전, 전생에 있었던 일처럼 아스라했다.
그러고 보니 윤명을 마지막 본 때도 고등학교 시절인 20년 전이 아니라 10년 전이었다. 내가 윤명보다 몇달 먼저 결혼했는데 그도 나도 서로의 결혼식에 참석했던 것이다. 윤명의 신부는 피부가 백인처럼 하沍다. 그녀가 자신의 드레스 앞자락을 밟아 하마터면 고꾸라질 뻔하자, 괜찮아? 어디 안 다쳤어? 하며 윤명이 꽤 당황해했다. 별로 즐겁지 않은 날이었다. 결혼식장에서 녀석의 장모와 내 장모가 사위의 학벌과 집안 등을 일일이 들추며 비교하는 통에 집에 와서 아내와 한바탕 말다툼을 한 적이 있다. 윤명은 그때 미국에서 사회학 박사과정을 밟는 중이었다.
“용진아, 너…… 나한테 유감 있냐?”
표정을 풀지 못하는 나를 보고 녀석이 물었다.
“승우씨, 사랑해.”
잠깐 동안이나마 내가 까페 사장 김승우가 되어보는 것은 사장의 계집인 현미 덕이었다. 일주일에 한두 번, 까페 일을 끝낸 자정 가까운 시각에 그림자처럼 내 오피스텔에 스며들었다가 이른 아침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그녀는 사장의 담배, 사장의 썬글라스처럼 내게는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사랑해 승우씨. 현미와 처음 몸을 섞던 날 그녀는 나를 사장의 이름으로 불러놓고 움찔했다. 나를 사장으로 상상하고 일을 치렀던 게 분명했다. 사랑해 현숙아. 그 순간 나 역시 현미에게 아무렇지 않게 내 전처 송현숙의 이름을 씌워주었다. 이후로 우리는 자유로워졌다. 까페 사주쟁이 장용진과 까페 여종업원 김현미가 아니었다. 사장 김승우와 바람난 유부녀 송현숙이었다. 현미는 나를 만나 사장 김승우를 향한 자신의 못다 푼 사랑을 쏟아놓았고 나는 사장의 강한 카리스마로 가학적인 쾌감을 즐기며 내 전처인 송현숙을 능멸했다.
딴놈하고 흘레붙으니 남편이고 자식이고 뵈는 게 없지? 더러운 암캐 같은 년.
잘못했어 승우씨. 내가 미쳤어. 나한테는 자기뿐이야. 사랑해 승우씨.
사장의 원래 이름이 김대풍이라는 사실도 나는 현미를 통해 처음 알았다. 명함에도 김승우 석자를 박아놓았으니 달리 생각할 수가 없었다. 사장 김승우는 탤런트 김승우를 흉내내는 일에 목숨을 걸었다. 똑같은 머리 스타일, 똑같은 썬글라스, 티셔츠, 담배. 관자놀이에 셋째 넷째 손가락을 대는 자질구레한 버릇까지 탤런트 김승우를 그대로 따라하고 있음을 우연히 잡지책에서 확인했을 때, 나는 사장에게 정신병 징후가 있는 게 아닌가 하고 의심했다. 까페에 드나드는 손님들 중에도 썬글라스를 낀 사장을 탤런트 김승우로 착각하는 사람이 있었다. 까페가 탤런트들의 단골집이라는 소문도 바로 사장의 그런 행동에 기인했을 터이다.
사장은 사주까페 외에도 같은 골목 안에 또다른 까페 하나와 호프집을 경영하고 있다. 개점휴업이니 불황의 여파가 구제금융시대보다 더 혹독하다느니 사람들마다 앓는 소리를 해대지만 그의 업소 셋은 모두 흑자를 기록하는 중이었다. 올해로 서른여섯, 나보다 나이가 두살이나 어린 사장이 자수성가하여 이 무서운 강남에 어엿하게 뿌리를 박은 데에는 그 나름의 독특한 경영방식이 있었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자신은 명품시계에 최고급 양복을 걸치고 다니면서 단돈 천원에 벌벌 떤다거나 주방에서 내놓은 쓰레기까지 도로 들여와 잔소리를 해대는 버릇은 탐욕스런 부자들의 어쩔 수 없는 한계라 쳐도, 업소마다 자기 계집을 공공연히 찍어놓아 자신의 주도권과 이익을 이중삼중으로 챙기는 배포는 여간하여 흉내낼 수 없는 비장의 무기라 할 만하다.
어리석은 여자들의 허영과 기대심리에 그가 던져준 떡밥은 바로 사장의 아내자리다. 부인과 네살짜리 아들을 거느리고도 사장은 ‘마누라는 언제든 바꿀 수 있다’고 호언했다. 그때마다 들먹이는 것이 술집 호스티스 출신인 아내의 전력이었다. 현미가 사장의 계집이 된 지도 4년, 자신의 기대가 허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 떡밥을 입에 물고 차마 뱉을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희한한 일이다. 사내가 공개적으로 계집 여럿을 거느리고 큰소리를 치면 오히려 그 모양이 당당하고 자연스러워 보인다. 거느리는 암탉이 많을수록 수탉이 그럴듯해 보이는 이치다. 송현숙에게도 그런 배짱으로 대했어야 옳았다. 돈을 벌어오지 못한다는 열등감에 비루먹은 거지처럼 구는 것이 아니었다.
“여기, 담배.”
현미가 담배를 물려주었다. 몸을 섞은 후 천장을 보고 누운 채 담배연기를 피워올리는 것도 현미가 일러준 사장의 버릇이었다.
그랬다. 나는 사장을 닮기로 결심했다. 사장이 탤런트 김승우의 겉모습을 드러내고 베끼는 데 반해 나는 사장의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베끼기로 마음먹었다. 영어단어가 조금만 길어져도 입으로 옮기지 못하는 무식함과 부모 혈육에게도 쌍욕을 서슴지 않는 그의 난폭한 성격과 돈이라면 엎드려 남의 발바닥이라도 핥을 수 있는 그의 철저한 황금숭배주의를 나는 온전히 내 것으로 하기로 했다. 돈이 최고인 세상에서 돈벌이를 제대로 하는 것만큼 훌륭한 미덕도 없다. 중학교 중퇴면 어떤가. 방바닥에 칼을 꽂아 제 부모의 논밭 문서를 갈취했으면 어떤가. 성공하지 않았는가.
현미의 맨가슴이 어깨에 들러붙었다.
“큰일났어. 갈수록 승우씨하고 사장하고 헷갈려서. 사장한테 ‘자기야’ 했다가 얼마나 놀랐는지.”
“죽고 싶냐? 끝장 보고 싶어?”
나는 현미를 밀어젖혔다. 사장에게 걸리면 끝이었다. 평소에 사장이 읊는 대로 그녀는 당장 포주에게 넘겨질 것이고, 나 역시 사장이 사주한 조직폭력배에 의해 목숨마저 위태로울지 몰랐다. 사나이로서의 뚝심 키우기도 둘의 관계가 들통나지 않는 한에서만 가능했다.
“걱정 마. 사장은 눈치 못 챘어. 진짜라니까.”
현미가 반죽 좋게 다시 달라붙었다.
내가 까페의 사장이 된다 해도 나 역시 현미를 정식 아내로 삼지는 않을 것이다. 현미는 미련하다. 마음에 드는 구석이라고는 몸을 섞을 때 내는 비음과 쓸 만한 각선미 정도다. 사장 부인이 잠자리에서는 더 나을지 모른다. 아이 엄마임에도 불구하고 사장 부인의 허리는 그야말로 한줌이다. 잠자리뿐 아니다. 계집에 둘러싸여 사는 사장이 그녀를 내치지 않는 데에는 비단 아이 어미라는 이유만 있는 것은 아닐 터이다. 호스티스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사장 부인은 항상 싸늘하고 도도하다. 사장 부인에 걸맞은 권위가 그녀에게는 있다. 현미가 아니라 송현숙 정도라면…… 사장 부인자리를 걸고 붙어볼 만하리라. 오만함, 냉정함, 부도덕함.
송현숙이 키우는 내 아이가 과연 내 씨인지는 아이를 낳은 어미만이 알 일이다. 그녀가 웬 놈과 승용차 안에서 얼크러져 있는 것을 본 이후로 내 악몽은 시작되었다. 물구나무서서 아파트로 엘리베이터로 주차장으로 돌아다니는 꿈. 허공으로 쳐든 두 다리 사이에는 큼지막한 빈 종이박스를 끼우고. 꿈에서 깨어나면 온몸이 땀에 절고 팔과 어깻죽지가 끊어질 듯 아팠다.
“그런데 자기 친구 박선생, 그렇게 내버려둘 거야? 안됐더라. 벌써 일주일짼데 오만원도 못 벌었을걸. 사람만 착해빠져서는.”
“입 닥쳐. 바보 같은 년.”
대꾸야 강퍅하게 쏘아붙였지만 윤명의 서투름은 나로서도 봐줄 수가 없었다. 어렸을 때 수술하셨지요? 아뇨, 안했는데요. 몸에 칼자국 같은 거 없으세요? 그런 거 없어요. 이상한데, 칼자국이 있어야 되는데. 칼이 있다고 사주에 나오거든요. 혹시 직업에 칼이…… 아니라니까요. 윤명의 어설프고 답답한 집착에 여대생 둘은 한껏 미간을 찌푸렸다. 됐어요, 안 볼래요. 사주풀이 값도 챙기지 못하고 무안하게 일어서는 윤명을 나는 모른 척 외면했다.
나는 왜 순간순간 사장이 되기를 잊어버리는지. 사장 같으면 어림없었다. 친구가 아니라 부모, 그보다 더한 이의 간청이라 해도 자신에게 득 되지 않는 일에는 눈도 깜빡이지 않을 사람이 사장이다. 그런데…… 윤명에게 정말 다른 선택이 없었을까? 국립대학 출신에 미국 명문대 사회학 박사, 그 잘난 녀석이 아무리 잠시 동안이라 해도 사주쟁이를 해야 할 만큼 막막했을까?
윤명의 학벌이나 경력은 사장에게 밝히지 않았다. 본인이 원치 않기도 했거니와 밝힌다고 도움이 될 것도 없었다. 알고 보면 강남의 까페 사주쟁이들의 학력도 무시할 것은 아니었다. 석박사까지는 아니더라도 버젓한 대학 출신이 꽤 섞여 있었다.
만 6년이 넘게 시간강사를 했잖아, 전임자리 준다는 약속만 믿고. 이번에 다른 사람으로 확정됐어. 재단에 1억을 주었다는 소문도 있고. 그러니 뭘 해. 3년 계약직이라 언제 쫓겨날지 모르는 걸. 이젠 포기해야지. 어차피 시간강의 맡아가지고는 먹고살기도 어렵고. ……부탁한다. 몰랐던 인생을 새로 배울 수도 있을 것 같아. 제자들한테 들키면 창피하기야 하겠지만. 내가 돈을 벌지 못하면 우리 네 식구 굶어죽는다. 특히 우리 마누라, 심장이 안 좋잖아. 약값만 해도 그렇고. 임용 안되었다는 사실, 마누라한테 알리지도 못했어.
유달리 하얗던 윤명의 신부가 떠올랐다. 그녀에게 심장병이 있다는 것은 처음 안 사실이었다. 그녀와 팔촌간인 송현숙도 몰랐던 것 같다. 남의 불행을 즐기는 그녀가 그 사실을 알았더라면 떠벌려도 여러번 침을 튀겼을 것이다.
과외교습도 해봤지, 영어선생 자리. 가정교사도 해보고 학원 취직도 하고. 요새 학원선생은 코미디언이더라. 가짜 코를 매달고 삐에로 옷을 입은 선생한테 몰려가더라. 군중 속의 고독이라고, 사람들 속에 파묻혀 몸을 가릴 수 있으면 더욱 좋고. 당분간만이라도.
“자기가 거들어주면 훨씬 나을 텐데. 사장한테 삼십만원도 벌써 냈다며. 집이 양수리라나, 출근하는 데만 두시간……”
“그만 하랬지, 송현숙. 이년이 지금 누구한테!”
나는 벌컥 소리를 질렀다.
“알았어 승우씨. 아니, 사장님.”
자기, 화난 것 아니지? 현미가 더욱 달라붙으며 어리광을 떨어댔다. 사장처럼 냉혹하게, 마치 내 눈앞에 윤명이 서 있는 것처럼 나는 눈을 부라렸다.
녀석이 사주풀이를 제대로 하지 못해 쩔쩔매는 꼴도 보기 싫었지만, 사주쟁이로서 제대로 자리잡는 꼴은 더더욱 보고 싶지 않았다. 지금 내가 이 꼴로 사는 이유가 지난 세월 동안 내가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이라 한다면 불만스럽기는 하지만 그런대로 받아들일 용의가 있었다. 그러나 녀석은 아니었다. 성실, 노력, 근면, 모범. 녀석은 학창시절 내내 학교와 부모들이 칭찬해 마지않던 좋은 낱말들의 표상이었다. 천하의 박윤명이 까페에 앉아 심심풀이땅콩 사주풀이를 하다니, 도대체 말이 되지 않는 노릇이었다.
녀석이 왜 갑자기 내 앞에 나타나 심사를 불편하게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의 영락(零落)이 왜 아무 관계 없는 내 자존심을 건드리는지 그것도 알 수 없었다. 그와 그의 식구가 굶어죽건 말건 내 알 바 아니었다. 내가 해결해줄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사장에게 녀석을 소개하다니 내가 내 발등을 찍은 셈이었다. 내가 바라는 것은 이제 하나밖에 없었다. 녀석이 하루빨리 사주쟁이 노릇에 데어 눈앞에서 영원히 사라져주는 일이었다.
“너무 엉터리야. 사주쟁이라고 어디 순 초짜를 데려다놓고.”
“글쎄, 이 까페 안되겠네.”
계산대에서 찻값을 치르며 중년 부인들 셋이 일부러 들으란 듯 구두덜거렸다. 이삼 미터 떨어져 엉거주춤하게 서 있던 박윤명이 슬그머니 홀을 빠져나갔다. 나오지도 않는 오줌을 빼며 화장실에서 면벽을 하든지 아니면 건물옥상 앞 층계참에 앉아 애꿎은 담배를 태울 터였다. 녀석이 사주풀이를 시작한 지 보름째였다. 심씨가 카운터에 다가섰다.
“정말 초짜네. 이러다가 우리 손님까지 끊어놓는 거 아냐? 장도사 친구라기에 너무 잘할까봐 겁을 먹었더니.”
“막말하지 마. 그 녀석 입 터지면 우리보다 더 잘할지 몰라.”
계산대에 서서 나는 음료주문서와 전표들을 추리기 시작했다. 심씨가 사주쟁이로서 선배일 뿐 아니라 나이가 많은데도 나는 자연스럽게 그를 제압하고 있었다. 사장의 신임을 받는다는 게 그만큼 대단한 일이었다.
“우리라니? 나하고야 어떨지 모르지만 장도사 입심이야 따라갈 수 있나. 자네는 처음부터 환상적이었어. 계룡산에서 방금 내려온 도인 같더라니까.”
사실이 그러했다. 내게는 사주풀이가 배운 도둑질이었다. 미아리 칠선녀 점집에 얹혀산 어린시절이 이런 식으로 도움이 되리라고는 나 역시 몰랐다.
어머니, 나, 동생. 우리 식구는 모두 셋이었다.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는 아버지는 동생이 태어나고 얼마 되지 않아 교통사고를 당했고, 어머니 혼자 우리 형제를 키웠다. 동회 서기였던 아버지가 남긴 방 두칸짜리 헌 슬레이트집 한채가 있을 뿐 먹고살 돈도 여의치 않았지만 어머니는 항상 여유로웠다.
번듯한 거지가 밥을 얻어도 더 얻는 법이다.
어머니의 풍모가 어엿한 것은 사실이었다. 어머니가 시장 떡방앗간에서 품을 팔면 손님들은 방앗간 주인이 어머니인 줄 알았고, 길거리에서 야채나 과일 광주리를 놓고 앉아 있으면 남의 장사를 대신 보아주는 것으로 오해했다.
내가 중학교 2학년, 동생 호진이 초등학교 4학년 때 어머니가 다리를 다쳤다. 강도 때문이었다. 아니, 키우던 개 때문이었다. 집에서 십여 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골목 안쪽 집에 강도가 들어 반항하는 집주인을 찔러죽이는 끔찍한 사고가 터지자 엄마는 시골 먼 친척에게서 큼지막한 셰퍼드를 얻어왔다. 그 개가 엄마에게 달려든 것이었다. 개밥을 들고 마당으로 내려서는 어머니를 보고 개는 단지 앞발을 번쩍 들어 반가워했을 뿐이었는데 화들짝 놀라 축담에 나자빠진 어머니는 그길로 입원하여 일년 가까이 병원생활을 해야 했다. 엉덩이뼈와 왼쪽 무릎관절이 조각나 도무지 붙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집 부근의 칠선녀 점집에 취직한 것은 어머니가 목발신세를 지면서부터였다. 칠선녀 무당은 성한 사람을 믿지 않았다. 전에 일을 도와주던 이가 금고를 가지고 줄행랑을 놓은 적이 있었던데다, 사지 멀쩡한 남편조차 돈을 뜯어갈 뿐 평생 빈둥대는 한량이었기 때문이었다. 점집 바람잡이로는 어머니가 최적이었다. 부잣집 마님 같은 편안한 얼굴로 푸짐한 입담을 풀어놓으며 어머니는 당신의 다리를 두드렸다.
여기 어르신 말씀 무시했다가 이렇게 되었다니까. 조심해라, 푸닥거리 한번 해야겠다, 내가 그 말을 귓등으로 흘렸거든. 병원에서도 희한하다지.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없다는 거지. 멀쩡하던 다리가 어떻게 하루아침에 산산조각이 날 수가 있냐는 거야.
헌 양옥집을 처분하고 점집 뒷방으로 이사든 후에야 우리 형제는 학교 납부금을 제때에 낼 수 있었다. 때도 없이 들려오는 무당의 사설만 제외하면 낡은 한옥인 점집은 그런대로 살만 했다. 우리 형제는 경쟁이라도 하듯 무당의 사설을 따라 외웠다.
일년은 열두달 과년은 열석달 소월은 스무아레 대월은 서른날에 정칠월 이팔월 삼구월 사시월 오동지 육섣달 번개같이 넘어가도 만인간 입담에다 관재구설 막으시고 남이 하는 감기고뿔 행여 먼저 막으시고 마음에 먹은 대로 앞에 번히 있는 대로 손길 던져 발길 옮겨 재수 붙고 머수 붙어 소원성취 고이 시켜 수명장수 시켜주옵소사.
나에 비해 박윤명의 어린시절은 편안했다. 큰길가 철물점집 외아들. 큰 부자도 아니었지만 남에게 손을 벌릴 필요도 없었던 가정형편. 점, 운세 따위와 거리가 멀었던 그가 이제 사주쟁이를 해보겠다고 나선 데에는 나와 관계가 전혀 없다고 말할 수는 없겠다.
고등학교 1학년, 학년말 시험이 얼마남지 않았을 때였다. 인근의 시립도서관에서 박윤명을 만난 적이 있었다. 점심때 도시락을 먹으면서 윤명이 내게 물었다. 점집에서 사는 것이 무섭지 않으냐, 꺼림칙하지 않으냐, 무슨 이야기 끝에 나온 말인지는 몰라도 아무튼 그런 내용이었다. 녀석의 질문이 고까웠다.
박윤명, 네가 사주팔자가 뭔지 음양오행이 뭔지 알기나 하냐?
나는 침을 뱉듯 쏘아붙였다.
그것들이 다 미신이고 허튼짓이고 사기라면, 옛날부터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올 수 있었겠냐? 사람 눈에 보이는 것만 진리인 줄 아냐? 사주팔자는 철학이다, 동양철학. 철학이 학문 중의 으뜸인 건 알고 있냐?
내가 알기로 윤명은 그날 시험공부를 전혀 하지 않았다. 밤이 되어 도서관 문을 닫을 때까지 서가에 꽂힌 사주, 운세풀이 책을 모두 꺼내다가 그것들만 읽어댔다. 의외였다. 쉬는 시간에도 영어단어를 외우던 녀석이었다. 신경이 흐트러진다고 교실에서 돌아다니는 만화, 잡지책도 넘겨보지 않던 녀석이었다. 며칠 후 하교길에서 윤명이 말을 붙였다.
재미있더라, 사람의 운명을 예견한다는 게. 내게는 관운은 있는데 재운이 없더라. 게다가 요절할 팔자고.
좋은 거 알았구나. 명 이으려면 우리집 와서 굿 한번 해야 되겠구나.
나는 걸음을 재우쳤다.
어차피 나와는 다른 길을 갈 놈이었다. 나보다 훨씬 나은 학벌로, 나와는 비교되지 않을 만큼 중요한 사회 거물이 되어, 보란듯 행세하며 살아갈 놈이었다. 예측대로 녀석은 고등학교 졸업 후 국립대학에 보란듯이 입학했고 나는 그보다 등록금이 세 배는 비싼 서울 반대편 쪽의 사립대학에 다니느라 어머니의 부러진 다리 신세를 톡톡히 져야 했다.
“그런데 쟤, 아무래도 놈팽이 생긴 것 같지? 바라진 궁둥이하며 얼굴에 윤기가 도는 게. 사장은 요새 거들떠보지도 않잖아.”
심씨가 갑자기 귀엣말을 했다. 현미였다. 폭 좁은 미니스커트를 입은 현미가 찻쟁반을 들고 걸어가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말 조심해! 사장 귀에 들어가면 살인 나.”
“뭐? 내 귀에 안 들어온 거 뭐?”
사장이었다. 나는 하마터면 주저앉을 뻔했다. 심씨도 깜짝 놀라 뒷걸음질을 쳤다.
“당장 스톱시켜. 이것들이 누구 장사를 말아먹으려고.”
사장의 손가락이 창가를 가리켰다. 현미……가 아니라 박윤명이었다. 녀석은 어느새 홀에 들어와 손님 둘을 상대로 사주풀이를 하고 있었다. 나는 얼른 윤명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사장은 조금 전 홀에서 나간 중년 여자들과 맞닥뜨린 게 틀림없었다.
“사모님, 지금 여기저기 아프시죠?”
나는 윤명의 메모지를 내 앞으로 끌어놓았다. 오십대 갱년기 여자의 건강상태야 누구라도 뻔했다. 아픈 데 많아, 온몸이 아파. 여자가 끄덕였다.
“몸이 안 좋으신 게 딱 나오네, 평생 재운도 있고 자식들도 괜찮고. 사장님 사주 좀 불러보세요. 가정 가진 주부님들은 식구 전체 사주를 넣어야 제대로 짚이거든요.”
여자가 부르는 대로 나는 생년월일을 쓰기 시작했다. 남편, 딸, 아들. 오천원이 아니라 이만원. 사주풀이 값이야 당연히 사주를 본 사람 수대로 계산이 되었다. 녀석이 입을 벌린 채 나를 바라보았다.
아들이 열여덟, 고3 나이였다. 분명했다. 여자의 당면한 고민거리는 아들의 진학문제였다.
“관운이 있기는 한데. 수시 입학 넣으셨네.”
연말이었다. 며칠 남지 않은 본고사 지망생이라면 그 어미가 한가로이 까페에 앉아 사주를 보고 있겠는가. 아니. 여자가 고개를 흔들었다. 나는 재빨리 얼넘겼다. 그 봐, 이 아들 고집이 있어. 그래도 괜찮아요, 본인이 원하는 대로 돼요.
“대학시험이야 일년 남았고. 왜 그런지 모른다니까? 중간에서 내가 피가 마른다니까?”
여자가 윤명을 향했다. 윤명이 안경을 추어올렸다. 여자는 부자간에 벌어지는 상황을 푸지게 늘어놓기 시작했다. 새벽에 학교 보내려면 그깟 놈 깨우지도 마라 화를 내고. 밥상머리에서 마주치면 미련한 놈 밥먹을 줄은 아냐 면박을 주고. 고만고만한 이야기를 시시콜콜 이어가는 동안 윤명은 그저 끄덕이고 있었다. 그러시군요, 속상하시겠네요. 한바탕 속을 풀어낸 여자가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식구들의 사주를 물었다. 윤명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사주라는 게, 아기가 첫발자국을 떼기 시작한 자리, 뭐 그런 정도의 의미지요. 부자지간에 살이 낄 리 없고요. 표현이 서투르신 것 같네요. 아들에 대한 정은 지극하신데.”
그렇지, 제 핏줄이 밉기야 하겠어. 여자가 이번에는 남편의 무뚝뚝한 성정에 대해 장황히 늘어놓았다. 윤명은 또 끄덕이기 시작했다. 윤명이 고개를 끄덕일 때마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주풀이도 심리상담도 아니었다. 대낮의 찜질방, 하릴없는 여자들이 주고받는 한담 이상 아무것도 아니었다.
사장이 윤명의 등뒤 자리에 앉는 것을 보고 나는 나를 부르는 테이블로 걸음을 옮겼다. 마음이 가벼웠다. 윤명이 선불한 월세야 보름이 지났으니 반을 떼어 장부에서 지불하면 되었다. 수전노 사장이 그것도 아까워하면 까짓 삼십만원, 내가 물어주어도 그만이었다.
한바탕 사주풀이를 끝내고 다른 테이블로 건너가며 윤명 쪽을 돌아보았다. 무언가 잘못되어가고 있었다. 윤명은 여전히 그녀들과 얘기중이었다. 사장 역시 윤명의 등뒤에 바짝 들러붙어 그들의 대화를 엿듣고 있었다. 사장의 급한 성격으로 보아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일에 집중할 수 없었다. 수없이 고개가 뒤로 돌아갔다. 아저씨, 빨리 해주세요. 앞에 앉은 여대생이 투덜거렸다. 다시 돌아보았을 때에는 윤명도, 윤명과 마주 앉았던 중년 여자들도, 사장도 보이지 않았다. 벌써 해고? 윤명은, 다른 테이블에서 다른 손님을 맞고 있었다.
“그냥 좀 놔둬봐.”
주방에서 과일을 점검하던 사장은 조금 전과는 딴판으로 느긋했다.
녀석은 어차피 일을 그만두게 되어 있었다. 우선 돈벌이가 되지 않았다. 녀석은 단돈 오천원 손님 한명을 대하는 데에 한시간 이상을 소모했다. 녀석의 대화 스타일에 부담을 느껴 손님 쪽에서 거부하는 경우도 꽤 있었다. 일당 2,3만원벌이 가지고는 집에 들여가기는커녕 월세 30만원에 자신의 출퇴근 차비, 식사비조차 충당하기 빠듯할 터였다. 심씨와 나는 한시간에 평균 네 사람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일당 6,7만원 이상, 월 이백만원 목표. 이쪽에서 얘기를 이끌어가고 결론까지 내어주는 식이었다. 손님이 무언가를 묻거나 자기 이야기를 늘어놓아 시간이 지연될 경우에는 시계를 자꾸 본다든지 하여 눈치를 주는 게 통례였다. 단골은 없었다. 똑같은 사주쟁이에게 똑같은 사주를 두 번 볼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알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한달이 겨우 지났을 뿐인 윤명에게 단골이 생기고 있었다. 손님들 중에 윤명을 특정하여 기다리는 사람이 생겨난 것이다. 한 사람과의 대화가 한시간 가까우니 기다리는 시간도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별 불평 없이 자기 순서를 기다렸다. 제 볼일을 보러 갔다가 다시 오는 사람도 있었다.
손님들의 태도도 마뜩찮았다. 나나 심씨 앞에서는 입을 꾹 다물고 ‘어디 맞춰봐라, 이 엉터리 점쟁이야’ 식의 태도를 취하면서 녀석 앞에서는 상담실에 불려온 학생처럼 다소곳하게 자신들의 고민을 털어놓았다. 음료는커녕 공짜로 제공되는 물 한컵 권하지 않는 인간들이 녀석에게는 비싼 생과일 음료, 어떤 때는 같이 식사를 하자고 부득부득 팔을 잡아끌기도 하는 것이었다. 그랬겠네요, 그렇죠. 녀석은 손님의 생년월일 따위를 묻지도 않았다. 그저 끄덕이고 귀를 기울여줄 뿐이었다.
“사주까페가 아니라 민원상담실, 넋두리 처리장이로군.”
윤명의 손님들이 혼자 와서 한 테이블씩 진을 지차 심씨가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
내일 아침에 일찍 오시죠. 두번 세번을 찾아오고도 만족하지 못하는 손님에게 녀석이 친절하게 말하고 있었다. 녀석의 출근시간이 아침 여덟시인 것을 나는 아둔하게도 그제야 알았다. 심씨와 내 출근시간은 정오였다. 주방장이나 여종업원들 역시 일찍 나와봤자 열시였다. 아무도 없는 까페에 녀석이 맨 먼저 들어와 창을 열고 청소를 하고 커피 주전자에 물을 올리는 것이었다. 주방장이나 종업원이 마다할 리 없었다. 어느새 그들은 윤명과 흉허물을 터놓는 사이가 되었다. 주방장이 사고뭉치 자기 동생의 문제를 늘어놓는가 하면 여종업원이 알코올중독인 자기 어머니와의 갈등을 의논했다. 현미마저도 윤명을 오빠라 부르고 있었다. 오빠 같고 선생님 같다고 했다.
녀석이 심리상담을 하건 손님과 수다를 떨건 나는 사주쟁이로서 사주풀이를 했다. 사주를 절대 무시하면 안돼요. 자신의 운과 약점을 알아 세상살이에 대처하는 것이 중요하지요. 사주나 운세를 나 자신이 믿고 안 믿고는 둘째문제였다. 사주를 인정해야 사주까페와 사주쟁이가 존재했다. 사장이고 손님들이고 잠시 녀석에게 솔깃해한다 해서 기본이 밀려날 수는 없었다. 어차피 잠깐이었다. 녀석은 머지않아 까페에서 사라질 놈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신경은 날이 갈수록 팽팽히 당겨진 고무줄처럼 위태로워졌다. 무엇이 고민이십니까, 손님. 윤명의 목소리가 들릴 때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심호흡을 거듭하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손님과 함께 터뜨리는 녀석의 낮은 웃음소리, 듣고 배우라는 듯 나이 어린 여종업원에게까지 존댓말을 갖추는 녀석의 말소리는 까페의 잡다한 소음, 음악소리에도 묻히는 법이 없었다.
사장에게 정식으로 면담을 요청했다. 사주까페의 분위기를 더이상 망칠 수는 없었다.
“박사였어? 어쩐지! 여유랄까 품위랄까, 딴사람하고는 비교가 안되더라고. 그랬구만, 명문대학 출신에 박사였구만.”
사장은 썬글라스까지 벗으며 반색했다. 나는 깜짝 놀랐다. 사장의 조그만 두눈이 서로 너무 떨어져 있었다. 김승우는커녕 매운탕을 끓이는 못생긴 생선을 닮아 있었다. 사장이 홀을 나서자 현미가 나를 낚아챘다.
“아까 아침에 사장님이 윤명오빠 잡고 자기 아들 문제 의논했잖아. 미국 유학 보내면 어떻겠느냐고. 오빠가 한마디로 잘랐어. 부모가 같이 가면 모를까, 아이만 보내면 안된다고. 정말 웃기지, 그 여편네. 아들 핑계대고 미국으로 어디로 괜히 놀러 다니려고.”
하필이면 녀석과 등을 맞대고 일을 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아무나 가르치려 하고 어떤 식으로든 상대방으로부터 인정을 받아야 속이 풀리는 녀석의 돼먹지 못한 습성. 녀석은 손님을 향한 말로 감히 나까지 훈계하기 시작했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이 무엇이겠어요. 사랑하는 이를 위해 나를 바치고 희생할 수 있다는 것 아니겠어요. 사랑은 축복이에요. 하늘에서 내려준 귀한 선물……
“산타클로스를 믿으세요?”
크리스마스가 지난 지 보름 남짓했다. 까페 곳곳에 아직 철거되지 않은 채 남아 있는 장식 트리, 릴, 색전구들이 마치 수십년 그 자리에 걸려 있던 것처럼 흉물스러웠다.
“나이를 먹어 철이 들면 백발 성성한 늙은이가 헌 양말에 사탕을 넣어주는 따위의 유치한 환상에서는 깨어나야죠. 결혼은 현실이에요. 처자식을 거느리고 돈다발을 들여놓지 못하는 사내는 이미 사내도 남편도 아니에요.”
나 역시 내 앞에 앉은 남녀를 통해 반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맞아, 앞에 앉은 여자가 남자의 손등을 꼬집으며 웃었다.
……나쁜 사주니, 궁합은 별 의미가 없어요. 두 사람의 마음만 변치 않는다면, 정말 아무것도 아닌 자그마한 언덕에 불과하죠. 평탄한 평지보다 산과 강, 때로는 늪도 있는 풍경이 아름답지 않아요?
“「동물의 왕국」 보시나? 희한하더라고요. 예전에는 동물이 사람 같구나 감탄하며 보았는데, 요새는 사람이 동물에 지나지 않는구나 자조하게 되더라고요. 남녀간의 순수한 사랑? 운명? 발정기에 든 수컷이 마침 제 앞을 지나는 암컷과 교미하기 위해 물불 가리지 않고 덤벼드는 거죠. 그것도 아주 잠깐.”
내 앞의 남녀가 웃음을 참으며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나는 말을 계속했다.
“결혼하고 석달만 지나봐, 자신들의 감정이 어떻게 변하는가. 어처구니없는 노릇 아뇨? 감당하지도 못할 커다란 족쇄를 만들어 차고는, 신랑 신부 힘찬 출발! 평생 질뚝거리며 온갖 저주를 퍼부어댈 주제에.”
둘의 얼굴이 굳기 시작했다. 나는 개의치 않았다. 윤명의 한층 낮아진 말소리를 모아듣느라 등허리를 뒤로 젖혔을 뿐이었다.
……다른 사람의 말에 너무 휘둘릴 필요 없어요. 소신이 필요하죠. 나 스스로 내 선택과 내 삶에 대해 책임을 질 각오……
“다른 이의 눈에 비친 내가 곧 나란 말이죠. 내가 잘생겼는지 못생겼는지 내가 행복한지 불행한지조차 나로서는 알 수가 없단 말이죠. 내가 하는 행동이 맞는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그걸 평가해주는 것은 남의 눈, 시대의 눈이에요. 혼자 정신 말짱한 척 입바른 소리를 하다가는 빠방! 그 자리에서 사살. 세상이 사격장이에요, 사형장이고요. 눈 깜짝할 새에 처형당하죠. 팔다리가 순식간에 토막이 나고 종이박스에 차곡차곡 포장되죠. 푸줏간의 소처럼.”
용하다, 우리가 정육점 하려는 걸 다 아신다. 여자가 내게서 눈을 떼지 못하며 중얼거렸다. 남자가 말을 더듬었다.
“그, 그러니까 내, 내가, 정육점 하는 거, 사주에 나와요?”
영문 모르는 두 사람은 불쌍하게도 겁을 먹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들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시선을 떼기는커녕 곧 목덜미라도 물어뜯을 것처럼 사납게 노려보았다.
“정육점보다 치킨센터가 어때요? 오리나 칠면조, 아니 이왕이면 홍학이 좋겠군. 과천 동물원에서 홍학 쇼 보셨어요? 맨 앞에 선 한마리를 따라 백여 마리의 홍학들이 똑같이 날갯짓을 하죠. 앞의 놈이 방향을 바꿔 반대쪽으로 가면 또 큰일이나 난 듯 수선을 떨며 따라가고. 죄들 그럴 뿐이지. 남이 하는 몸짓을 따라할 뿐이지. 선택? 소신? 맨 먼저 방향을 바꾸는 맨 앞의 그놈은 다른 홍학들보다 현명하다거나 제 소신을 가졌을까? 천만에. 회초리를 든 조련사, 사료 양을 조절하는 사육사의 의도를 가장 빨리 눈치 채는 놈일 뿐이지. 무리들을 배신하여 따돌림을 당할지언정 조련사와 사육사의 지시를 목숨처럼 따르는, 무리 중에서 가장 비열하고 겁 많은 놈이지.”
잘해나갈 수 있을 거예요.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 상대방의 입장을 먼저 헤아려주고 감싸……
“바람난 아내가 내미는 비타민제를 먹어보셨어요? ‘당신 걸 먹으라고요. 아이 것 뺏어먹지 말고.’ 새된 목소리로 눈을 흘기며. 찜찜하면 약국에 가져가보지 그랬느냐고? 아내의 직업이 간호사예요. 금방 들통이 날 섣부른 짓을 하겠어요? 그러고도 나는 아내의 팬티를 빨아주었지. 직장일을 핑계로 외박을 밥먹듯 하는 여자가 아침마다 벗어놓는 속옷. 친절하게 어깨를 주물러주었지. ‘힘들었지 당신?’”
주위의 손님들이 힐끔거렸다. 녀석의 자리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뒤를 돌아볼 수도, 말을 계속할 수도 없었다. 내 앞에 손님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손님 대신 일만원짜리 비틀린 지폐 한장, 대책 없는 분위기에 짓눌려 제 손으로 아랫도리까지 벗어내린 세종대왕이 두 다리를 꼬아 치부를 가리며 부들부들 떨고 있을 뿐이었다. 심씨가 다가와서 어깨를 툭 쳤다. 누구 얘기야? 누가 남편 독살했어?
그날 밤 나는 물구나무서기 꿈을 다시 꾸었다. 아내와 이혼한 후 거짓말처럼 나를 떠났던 꿈이었다. 꿈에서 나는 두 팔에 온몸을 실은 채 오피스텔 문을 나서고 있었다. 커다란 가위처럼 하늘로 뻗은 두 다리 사이에는 여느 때처럼 큰 종이상자가 끼여 있었다. 그러나 상자는 비어 있지 않았다. 누군가의 시체 토막들이 차곡차곡 담겨 무겁기 짝이 없었다. 어떻게든 그것을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곳에 가져가 파묻어야 했다. 그러나 사람의 눈은 어디에나 있었다. 골목길, 냄새나는 개천가, 너덜너덜 찢긴 비닐하우스, 쓰레기가 산더미처럼 쌓인 들판. 이제는 되었지 박스를 내려놓는 순간 누군가가 내 행동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심씨가 사주풀이를 하는 테이블에 ㄴ대학 노트가 놓여 있음을 보고 나는 쾌재를 불렀다. ㄴ대학이라면, 윤명이 시간강사 일을 맡았던 지방대학이었다. 윤명은 바로 그 대학의 교수임용에서 탈락한 것이었다. 그동안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나는 급히 심씨를 불러냈다. 손님을 바꾸자는 제의에 그는 영문 몰라 했다. 한동안 신명나게 사주풀이를 한 다음, 나는 몸을 앞으로 당겨 말을 이었다.
“박윤명이라고, 아시나 모르겠네. 우리 까페에서 사주풀이를 하거든요. ㄴ대학 사회학과 강의를 맡았다던데. 대학강사가 사주풀이를 한다는 게 아무래도 미심쩍어서요.”
이름은 들은 것 같은데, 학생은 창가 구석자리에 있는 윤명을 돌아보며 갸우뚱거렸다.
“최소은이라고, 과 2년 후배가 있거든요. 그애한테 들은 것 같긴 해요. 우리 4학년은 직접 배우지 않았고요. 걔네들이 와보면 알죠.”
“그러네. 그 학생들이 와보면 알겠네. 이름만 도용할 수도 있으니까. 학교 명예도 걸린 일이고.”
사주를 푼 메모지에 나는 내 이름 대신 심씨의 이름을 크게 적었다. 군중 속의 고독이라고, 사람들 속에 파묻혀 몸을 가릴 수 있으면 더욱 좋고. 윤명의 나직한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그러나 나는 얼른 사장 김대풍을 떠올렸다. 부모의 토지문서를 빼앗으려고 방바닥에 칼을 꽂는 충혈된 눈. 사내에게는 때로 적의 목에 칼을 들이댈 수 있는 결단이 필요한 법이었다.
다음날 아침부터 나는 까페 영업시작 시간인 오전 열한시에 출근했다. 웬일이냐, 반색하는 윤명을 나는 물론 무시했다. 식사 때에도 나는 홀을 비우지 않았다. 여대생 무리가 들어설 때마다 촉각을 곤두세웠다. 녀석이 자신의 제자들과 맞닥뜨리는 명장면을 놓칠 수는 없었다. 한시간이 하루처럼 길었다. 그렇게 닷새 만이었다.
“심선생님이시죠?”
사주풀이를 하고 계산대로 돌아오던 나는 앞에 선 다섯 명의 여대생들을 둘러보았다. 전에 보았던 동그란 얼굴의 사회학과 4학년 여학생이 구원자처럼 눈에 들어왔다. 아아, 나는 용수철 튀듯 준비했던 말을 내뱉었다.
“박도사 어디 계신가, 손님 오셨는데.”
박도사래. 학생들이 킥킥거렸다. 누군가가 주방 쪽으로 급히 돌아들고 있었다. 주방 출입구 앞쪽 창고, 녀석은 그리로 피했음이 분명했다. 청소도구, 허드레 물건을 한쪽으로 쟁여놓고 삐걱대는 의자 두 개를 놓아둔 그곳은 심씨와 내가 만들어놓은 휴게공간이었다. 이리 오세요. 나는 입가에 미소를 담고 학생들을 이끌었다. 딴은, 고급스레 꾸며놓은 널찍한 홀보다 빗자루에 걸레, 헌 커튼과 쿠션 등으로 뒤숭숭하기 짝이 없는 창고에서 저희들의 선생을 발견하는 쪽이 현장감을 더해줄 수도 있었다. 나는 창고문을 열어젖혔다.
“뭐 하냐, 박윤명. 손님 오셨는데.”
창고 안은 깜깜했다. 재빨리 입구에 있는 전등 스위치를 올렸다. 녀석은 출입문 한쪽 벽에 등을 붙인 채 서 있었다. 갑자기 환해진 불빛에 팔을 올려 얼굴을 가렸다.
“박선생님! 선생님 맞구나. 세상에, 우리는 그럴 리 없다고 펄쩍 뛰었는데.”
윤명의 당황, 곤혹스러움. 학생들을 향해 애써 웃음짓는 녀석의 심란한 표정을 나는 외면하지 않았다.
“선생님이 박도사예요? 기발하다. 이거 할 생각은 어떻게 하셨어요?”
여학생들의 웃음이 왁자하게 퍼졌다. 학생들은 이내 윤명을 끌고 밀어 홀로 데려왔다.
“발상의 전환이라더니 완전 히트예요. 그런데 선생님 사주 잘 보세요? 엉터리 아냐?”
걱정 마세요. 저희들이 애들 다 끌고 올게요. 매상 올려드릴게요. 저희는 공짜로 봐주시고. 실습을 하셔야지. 소파에 앉은 다섯 명의 학생들이 한꺼번에 새살거렸다. 윤명 옆에 앉은 학생은 그의 어깨까지 쳐가며 깔깔댔다. 나는 무엇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 없었다. 스승의 적절한 처신, 직업의 귀천, 그런 것들은 이들에게는 전혀 문제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검은 썬글라스의 사장이 홀에 들어선 때가 그때였다. 김승우다! 한 여학생이 소리쳤다. 맞아, 김승우다. 멋져! 나머지 학생들이 호들갑을 떨었다. 윤명이 학생들을 제지했다.
“여기 사장님이셔. 멋있지? 젊으신데 벌써 성공하시고.”
얼떨결에 사장이 여대생들과 인사를 나누기 시작했다. 사장님 너무 세련이다. 카리스마가 있다, 그치? 우리 선생님 잘 봐주세요. 월급도 많이 주셔야 해요. 나는 우리 사장님이 선생님보다 더 맘에 들어. 학생들은 거리낌이 없었다. 옆 테이블의 의자를 끌어다가 사장의 자리를 만드는가 하면 한 여학생은 사장의 팔짱을 끼고 소파에 앉히느라 바빴다.
“장용진씨, 여기 차 한잔씩 돌리지.”
공짜예요? 우리 사장님 멋쟁이, 사랑해요! 학생들이 손뼉을 쳐댔다.
“케이크도 사람 수대로 가져오고.”
나는 사장의 얼굴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호텔에서 들여오는 케이크 조각 숫자를 세는 사람, 늙으신 부모가 와도 단 한쪽 내놓지 않는 사람.
선생님, 강의 한번 하세요. 사장님도 같이 들어요. 우리 선생님 강의 끝내준다니까요? 별명이 활명수예요. 학생들은 계속 짓떠들어댔다. 학생들 사이에 낀 사장은 어느 때보다도 뿌듯한 얼굴로 빙긋거리고 있었다.
현미의 손으로 모자라 나까지 케이크와 음료를 가져갔을 때에는 학생들은 물을 뿌린 듯 조용해져 있었다. 인구이론, 사회계층의 반발, 출산율 저하 따위의 낱말들을 들먹이며 윤명은 진지하게 무언가를 설명하고 있었다. 썬글라스를 낀 사장 역시 입을 꾹 다문 채 꼼짝 않고 앉아 있었다.
물구나무서기 꿈은 계속되었다. 하룻밤에 한번도 아니었다. 꿈에서 깨어나 안도의 숨을 쉬고 다시 잠이 들면 다음 장면이 연속극처럼 이어졌다. 동터오는 새벽을 나는 오피스텔 창가에 선 채로 맞았다. 박윤명이야 따지고 보면 워낙 그런 놈이었다. 눈에서 떠나지 않는 그림은 사장의 빙긋대던 얼굴이었다.
ㄴ대 학생들은 이틀이 멀다 하고 까페에 몰려들었다. 네 명이 일곱 명이 되고 열 명이 되었다. 그들이 나뉘어 한패가 나가고 거기에 새로 온 한패가 덧붙는 식이었다. 최소은을 비롯한 몇명은 윤명을 만나 인사하기 바쁘게 사장을 찾았다. 사장을 만나기만 하면 음료와 케이크가 공짜였다. 그러나 그들을 탓할 수는 없었다. 사장 쪽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루에도 몇번씩 까페에 들러 그녀들이 왔나 둘러보는가 하면 아무도 나타나지 않는 날에는 괜히 짜증을 부리며 홀의 청소상태나 써비스 따위를 걸고넘어졌다.
윤명과 학생들의 만남은 자연스레 금요일 오후 세시로 고정되었다. 윤명의 주제에 대한 간략한 설명이 있고 그에 따른 토론이 이루어졌다. 최소은의 남자친구를 비롯하여 남학생들의 무리도 생겨났다. 인원은 어느새 스물을 넘고 있었다. 그 자리에 특별 대학생 자격으로 사장이 초빙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글쎄, 금요일은 안된다니까? 이 몸이 대학강의를 듣는다. 문화인류학이 뭔지 사회학이 뭔지 너같이 무식한 놈이 알기나 허냐, 병신새끼.
부동산 중개업을 하는 친구의 전화를 사장은 바쁘다면서도 끊지 않았다.
금요일 오전만 되면 사장은 딴사람이 되었다. 손님이 있건 없건 창문틀의 먼지까지 떨어내며 큰소리로 청소를 지휘했다. 정오가 되면 사장이 특별히 주문한 새 과일과 새 케이크가 도착했다. 학생들이 앉는 테이블에 꽃들이 꽂혔다. 현미를 비롯한 여종업원들은 한사람씩 사장에게 점검을 받았다. 너는 대체 이 빤짝이 옷이 어울린다고 생각하냐? 이, 이 낯짝 좀 봐라. 당장 지우지 못해?
나라와 정치에 대한 젊은이들의 자세, 세계평화, 여자들의 성형수술 유행, 재활용되어야 할 물건들, 노인문제. 매주 거론되는 그들의 토론주제는 거창하기도 했다. 사장 역시 학생들 사이에 자리잡고 앉아 열심히 주억거렸다.
학생들의 토론에 사장이 중심이 되는 적은 없었다. 그는 자신이 대학생들 앞에서 당당하게 피력할 수 있는 논리나 의견이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또한 그는 빙긋 미소지을 뿐 잇몸을 드러내고 웃는 적도 없었다. 고르지 못한 치열이 자신의 인상을 해친다는 점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학생들의 웃음소리가 유독 시끄럽다 싶으면 그 자리에는 발간 얼굴의 사장이 끼여 있었다. 사장님 활짝 웃는 모습 한번만 보면 소원이 없겠어. 학생들이 아무리 놀려도 그는 고개를 숙이고 애써 웃음을 참는 것이었다.
학생들의 목소리가 시끄럽다고 항의하는 손님이 있었다. 사장이 자리에서 일어나 손님에게 다가갔다. 죄송합니다 손님. 우리 까페는 대학생들의, 말하자면 문화공간이라서요. 이 나라의 문화발전을 위해서 양해해주셔야겠습니다. 학생들의 웃음소리와 손뼉이 터져나왔다. 사장님 최고! 사장님 멋쟁이! 혀를 차며 나가는 손님의 뒤통수에 대고 사장은 무슨 시대의 매국노 보듯 눈을 흘겼다.
인테리어 업자를 데려와 테이블 사이에 쳤던 칸막이를 빼버리는 작업을 검토한 때가 3월 초였다. 계획을 안 윤명이 그럴 필요까지 없다고 말려도 사장은 막무가내였다.
벌써 생각했어야 했는데. 우리 친구들이 얼마나 불편했을까?
토론이 끝나면 사장은 학생들과 어울려 예약해놓은 인근 음식점으로 갔다. 식사비는 물론 사장의 몫이었다. 이차 삼차로 노래방으로 포장마차로 돌지언정 사장은 학생들을 자신의 호프집으로 데려가는 법은 없었다. 간판이 호프집일 뿐 그곳은 강남의 다른 집들이 대부분 그러하듯 퇴폐적인 분위기가 풍기는 주점이었다. 음침한 칸막이 방에서 취객들이 호스티스를 그러안고 앞가슴에 팁을 찔러주는 모습을 보여줘봤자 자신의 이미지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로마시대 후기에 유행했던 사치풍조, 명품의 흥행, 결국은 그것들로 인해 국력이 쇠퇴하고 이민족의 침입이 이어졌다는 요지의 강의가 있던 날, 나는 사장의 또다른 면을 맞닥뜨려야 했다. 화장실에 가는 척하며 자리에서 빠져나온 사장이 내가 서 있는 계산대로 들어서는 것이었다. 그는 얼른 자신의 팔찌와 명품시계를 풀어 자신의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고개를 숙여 코에 얹은 썬글라스를 몇번이고 썼다 벗었다를 반복했다. 긴 한숨을 쉰 후 썬글라스를 다시 쓰고 나가는 사장은 더이상 세련된 탤런트 김승우가 아니었다. 교수와 선배들에게 밉보이지 않으려고 애쓰는 앳된 신입생이었다.
금요일 오후 내내 사주풀이를 금지시키자 심씨와 나는 사장을 찾았다. 간판에도 씌었듯이 이곳은 사주까페였다. 뜨내기 강사의 강의실, 대학생들의 토론장이 아니었다.
“월세 한 오만원 깎아주면 되겠어? 돈독이 올라서는.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는 거야. 당장이라도 짐 싸.”
예상했던 결과였다. 오만원이면 그런대로 선방이었다. 다른 까페로 옮길 수는 없었다. 잘나가던 사주까페들도 속속 문을 닫는 불경기였다. 하릴없이 돌아서는데 사장이 나를 불러세웠다.
“까페 이름 말야, ‘문화공간’ 어때? 문화, 공간, 폼 나잖아? 갑자기 신내린 듯이 내 입에서 튀어나오긴 했지만. 사주까페라니? 박교수님도 찝찝할 거고. 그리고 참, 강사비를 잊어먹고 있었잖아? 박교수님 생활도 어렵다면서. 한번에 얼마면 되겠어?”
며칠이 지나지 않아 홀에 들어서는 사장을 보고 나는 또 한번 놀라 할말을 잃었다. 티셔츠에 헐렁한 면바지, 그의 머리는 짧은 스포츠형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리고 썬글라스도…… 보이지 않았다. 납작한 뒤통수에 뚝 떨어진 작은 눈. 종업원들의 킥킥대는 웃음소리에 몇번이고 헛기침을 하며 어색함을 달래는 사장은 첫사랑을 시작한 어린 소년처럼 목덜미가 붉었다. 사장은 자신의 새 모델을 찾은 것이었다. 사회학 박사이자 대학생들이 존경하는 교수님, 박윤명이었다.
귀에서 내내 소리가 났다. 신경질적으로 흔들어대는 두부장수의 종소리, 건물 전체에 다급히 울려퍼지는 비상벨 소리. 현미와 몸을 섞으면서도 나는 귀에서 소리를 떨어내느라 수없이 고개를 흔들어야 했다.
“박윤명 좀 꼬셔보지 그래.”
나른히 누운 현미에게 내가 말을 토했다.
“내 스타일 아냐. 나한테는 승우씨뿐이라니까.”
“네 스타일이 뭔데? 사장 봐라, 스포츠 머리에 티셔츠, 박도사 빼다박았잖냐.”
현미 역시 계속되는 내 신경질에 많이 지쳐 있었다. 한동안 입을 다물고 있던 그녀가 겨우 입을 뗐다.
“윤명오빠가…… 나 같은 년한테 흥미나 있겠어?”
“누가 네 오빠야? 말끝마다 이년은!”
난데없는 초인종 소리가 났다. 용진아, 누군가가 내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얼떨결에 문을 연 후 나는 숨이 멎는 줄 알았다. 박윤명이었다. 한손에 양주병을 든 윤명이 집에 들어서려다 말고 깜짝 놀라 서 있었다. 윤명오빠! 맨몸의 현미는 이불로 몸을 가린 채 침대 위에 오도카니 앉아 있었다. 원룸. 문만 열면 온 방안이 훤하게 들여다보이는 오피스텔의 구조가 문제였다.
여유를 찾은 윤명이 안으로 들어서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지 뭐. 너도 외로운 놈이고 현미씨도. 둘이서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나는 담배 한개비를 입에 물고 천천히 운을 뗐다.
“사장한테 이르지는 마라. 나는 괜찮아. 까페 그만둬도 그뿐이고. 그런데 현미가 사창가로 팔려간다. 죽을지도 모른다. 현미가 사장의 계집인 건 알고 있지?”
“무슨 소리야? 사장은 유부남이잖아?”
놀란 박윤명이 현미와 나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너는 김대풍의 참모습을 모른다. 흉악한 놈이다. 인간 말종이다.”
“살려주세요 오빠. 저, 죽어요.”
옷을 갖춰 입은 현미가 울음 섞인 목소리로 애걸하기 시작했다. 나는 사장의 비상식적인 행동에 대해 낱낱이 짚기 시작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까페의 여종업원들을 제 계집으로 만든 정황. 자기 아내에게 폭력을 휘둘러 병원응급실까지 실려간 이야기. 부모 앞에서 방바닥에 칼을 꽂아 토지문서를 빼앗은 이야기. 업소의 과일을 납품하는 매형을 몸종처럼 부리는 성품. 그 정도만으로는 부족했다. 조폭의 일원 김대풍. 돈이라면 살인도 서슴지 않는 비인간. 폭력, 사기 전과. 순진한 계집애들에게 빚을 안겨 포주에게 팔아먹는 과정. 내 눈으로 확인하지 않았지만 이 순간에도 자행되고 있을 이야기들.
“제 빚이 천팔백이에요. 도저히 갚을 수가 없어요. 아무리 일해도 빚은 점점 늘어나기만 하고. 죽고 싶은 마음뿐예요. 시골에 계신 부모님 생각하면 그럴 수도 없고.”
수도꼭지처럼 눈물을 흘려대는 현미는 어느덧 순진무구한 시골처녀가 되어 있었다. 제 스스로 명품 핸드백, 시계, 보석 박힌 팔찌 들에 정신이 팔려 카드빚에 사채까지 얻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얼굴이었다.
“사장이 얼마나 나쁜 놈인지 나 역시 처음에는 몰랐다. 모르는 정도가 아니라 나는 사장을 존경했다. 까페 식구들을 먹여살리는 사장, 이 무서운 불경기에 업소를 이끌어가는 실력. 돈이 최고인 세상 아니냐. 돈을 벌지 못하면 그것이 바로 용서받지 못할 죄 아니냐. 나는 제2의 사장이 되고 있었다. 뼛속 깊이 사장을 닮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러다가 우연히 현미의 얘기를 듣게 되었다. 어쩌다보니 밤도 같이 지내게 되었다. 나는 사장에게 한마디 따지거나 덤벼들지 못했다. 왜냐하면 나는 겁쟁이, 사장을 따르는 충복이니까. 이 까페에 생계가 걸려 있으니까. 네가 처음 까페에 나타났을 때 나는 네가 너무 싫었다. 너랑 사장이 반대편에 서 있었기 때문이지. 그리고 나는, 이미 사장 쪽에 훨씬 기울어져 있었기 때문이지. 지금도 나는 네가 불편하다. 사장이 어떤 나쁜 짓을 해도 나는 그에게 반기를 들지 못한다.”
나는 고개를 숙였다. 신파에 싸구려 창극이었다. 그러면서도 목소리에 울음이 실리는 데에는 무리가 없었다.
“너도…… 이 나라를 이끌어갈 지성인 아니냐. 잘못된 것은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있어야 되지 않냐?”
같이 가라앉는 윤명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집채만한 바위를 쪼개는 것은 조그만 풀씨 하나, 머리카락처럼 가는 균열 한가닥이었다. 윤명과 사장의 틈이 이렇게 벌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이틀 후, 까페에서는 일곱번째 금요일 모임이 있었다. 새로 단장한 까페는 대학생들의 토론장으로 손색이 없었다. 소파 사이에 놓여졌던 칸막이는 말끔히 제거되고 창가마다 비쳐드는 밝은 햇살이 활짝 핀 초화화분들을 간질이고 있었다. 홀 한쪽 모서리에는 새로 장만한 교탁과 의자, 그 뒤로 이동용 칠판이 놓여 있었다. 모임시간이 가까워오자 사장은 얼른 자리를 잡았다. 다소곳이 고개를 숙인 그는 이제 호명을 받으면 선행상장이라도 받으러 뛰어나갈 착한 모범생이었다.
윤명은 새로 놓인 칠판과 교탁에 잠깐 눈을 주었다. 탁자 위에 흰 칠판용 유성펜이 놓여 있었지만 그는 손대지 않았다.
“오늘 주제는 매매춘과 자본주의의 횡포에 대해서입니다.”
교탁에서 약간 비켜선 채로 그는 말을 이었다.
“돈을 벌어 자신에게 딸린 식구들을 먹여살린다는 명제를 만고의 면죄부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인간의 환락, 약한 여자의 몸을 기반으로 삼고라도 돈을 벌기만 하면 된다는 파렴치, 약한 사람들은 얼마든지 짓밟아도 된다는 뻔뻔한 사고를 가지고 있는 인간들을 우리는 단호하게 지적하고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막아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우리 사회가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언제부터 향락주의 황금만능주의에 물들어 인간을 인간 자체로 보지 않고 그가 가진 돈으로 알아보는 세상이 되었습니까. 이것이 바로 자본주의사회의 쓰레기통, 악취 나는 변소가 아니겠습니까. 순진한 아가씨들을 꾀어 환락가로 팔아넘기고 억지로 안긴 빚을 받아내기 위해 폭력을 쓰는 인간들, 이게 말이 됩니까. 토지문서를 빼앗기 위해 부모 앞에서 방바닥에 칼을 꽂는 인간 말종.”
윤명이 짧은 머리칼을 정수리 쪽으로 쓸어올렸다. 그의 시선은 누구에도 향하지 않고 있었다. 평행으로 트인 허공, 아니면 홀 건너편, 사람들이 드나드는 문 쪽을 향해 촛점 없는 눈을 주고 있었다. 학생들의 분위기가 숙연해지고 있었다. 평소와 다르게 서두가 긴 윤명의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그들이 조금씩 알아채가고 있었다. 사장 역시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의자에 똑바로 앉은 채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윤명의 옆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윤명의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다.
“그, 그런 사람이 가령, 가령 있다고 쳐봅시다. 물론 그 젊은이 역시 할말은 있을 것입니다. 자본, 돈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이 사회의 병폐, 생리구조 때문이라고. 그러나 우리는 인간입니다. 만물의 영장, 스스로 존엄성을 지켜나가야 할 우리 인간으로서 그런, 폭력을 휘둘러 아내를 병원응급실까지 실려가게 하는, 이를테면 그런 사람은…… 그 사람들이 그런 해, 행동을 하게 된 데에는 물론 그 역시 어린날에, 어렸을 때……”
윤명은 손수건을 꺼내어 땀을 닦았다. 사장이 뒤를 돌아보았다. 그가 내게 창문을 가리켰다. 윤명이 서 있는 쪽 창문에 커튼을 드리워주라는 말이었다.
“누, 누구나…… 피해자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악인은 없습니다. 부, 부모, 그의 부모가…… 자기 자식을 그렇게 키워놓았으니 자기가 당한들.”
나는 윤명이 서 있는 강단을 향해 똑바로 걸어나갔다. 윤명의 충혈된 눈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는 모두, 서로 이해하고 따뜻하게 받아주어,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는……”
윤명의 시선이 내 가슴, 배, 발끝으로 떨어져내렸다. 그는 두손을 늘어뜨린 채 무방비로 서 있었다. 나는 윤명의 곁을 천천히 스쳐지나갔다. 그는 더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두툼한 커튼이 드리워져 그의 몸피가 그늘로 들어가자 그는 불 꺼진 무대의 배우처럼 교탁 옆에 놓인 의자에 구겨지듯 앉았다. 의자는 무척 편안해 보였다. 사장이 선택하는 데 며칠을 고심한 최고급의 가죽의자였다.
윤명의 발제가 끝났다고 생각하는 학생들이 재빨리 입을 열기 시작했다. 가정폭력, 정말 큰 문제예요. 요새는 남편들도 매 맞아요. 나는 남편 때리고 살아야지. 학생들은 항상 반쯤은 장난이었다. 사장 역시 여느 때와 다름없이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구석에 앉은 학생들에게 떡이 돌아가지 않았음을 지적하느라 엉거주춤 일어나 여종업원에게 손짓을 해댔다.
의자의 팔걸이를 잡고 눈을 감은 윤명은 탈진한 듯했다. 부르튼 입술에 한쪽으로 기울어진 머리통, 녀석은 더이상 투사도 지성인도 아니었다. 먹고산다는 명제 아래 자신의 양심을 파는 사기꾼, 힘없고 배짱없는 소시민에 불과했다.
강의가 끝나면서 최소은의 남자친구가 화장실에 가는 것이 보였다. 계산대로 다가서는 심씨를 잡아 나는 화장실로 이끌었다. 뭘 같이 가? 계집애들같이. 심씨는 픽픽거리면서도 싫지 않은 듯 따라왔다. 소변기 앞에서 바지 지퍼를 올리고 있는 젊은 녀석을 녹록히 내보낼 수는 없었다. 박윤명 말야, 저 친구. 나는 곧바로 말문을 열었다.
“계속 저렇게 사기쳐도 괜찮을까? 박사도 아니면서.”
“무슨 소리야? 박사가 아니었어?”
심씨가 깜짝 놀라 나를 쳐다보았다.
“저 녀석, 영어학원 강사로 내내 먹고살았거든. 어느날 뜬금없이 박사행세를 하더라고. 그러니까 대학 시간강사도 잘렸지. 학벌이 확실하다면 왜 잘렸겠어?”
그, 그런 거였어? 심씨는 어쩔 줄 몰라했다. 세상에, 가짜 박사가 많다고는 해도, 아니, 그 친구는 전혀 그런 쪽으로는…… 최소은의 남자친구는 세면대 앞에서 오래오래 손을 씻었다.
일주일 후, 금요일 모임의 분위기는 지금까지와는 영판 달랐다. 학생들은 다섯 명에 불과했다. 자기들끼리도 그리 친하지 않은 듯 대화도 없이 출입문만 열심히 돌아보고 있었다.
이십분이나 늦게 토론주제를 발표하는 윤명의 목소리 역시 다른 때보다 훨씬 조용하고 조심스러웠다. 토론이 끝나는 것을 기다리지 못하고 계산대로 다가서는 사장에게 나는 사무적으로 말했다.
“오늘 남은 빵 말예요. 손님들한테 돌리시죠. 내일이면 딱딱해질 텐데.”
밤 열한시 퇴근시간, 벗어놓은 코트를 찾으러 휴게실에 들렀을 때 윤명은 그곳에서 혼자 소주병을 기울이고 있었다. 난방이 되지 않아 썰렁한 창고에는 걸레 썩는 냄새가 오늘따라 진하게 묻어났다.
“무엇이 고민이십니까, 잘나가는 교수님.”
코트를 입으며 나는 그의 말투를 흉내냈다. 녀석이 소주잔을 건넸다. 못 받을 이유도 없었다. 녀석과 나란히 의자에 앉았다.
“그래도 사장이…… 호프집 구조를 바꾸겠다고 하더라. 아가씨들도 정리하고.”
윤명이 조용히 입을 뗐다. 나는 단숨에 술을 털어넣고 빈 소주잔을 그에게 건넸다.
“그러네. 네 강의 듣고 개과천선한 모양이네. 그 방 중 하나는 조폭들 몫으로 마련해놓았던 거라는데. 좋겠다, 너는. 길 잃은 어린 양 제 길 찾아주는 재주가 있어서. 그래도 너무 안심하지는 마라. 제 버릇 개 주겠냐. 사장이 여학생들한테 집적거렸잖냐. 그러니까 애들이 안 나오지.”
나를 바라보는 윤명의 서글픈 시선을 나는 피하지 않았다.
“용진이, 네가…… 그런 것 아니고? 제자 애들을 끌어들인 것도, 그애들을 내쫓아버린 것도 네가 꾸민 일 아니고?”
나는 정확하고 또렷하게 말을 이었다.
“사장이 너를 인정한다고, 너를 흉내낸다고 좋아할 것 없다. 사장은 네가 부러웠던 게 아니다. 학생들에게 둘러싸인 네 인기가 부러웠던 거지. 인기 따라 유행 따라 미친 듯이 열광하다가 또다른 대상이 나타나면 우르르 그쪽을 따라나서지. 유치하고 경박한 광대놀음이야 어디 사장뿐이냐. 판만 벌어지면 어디서든 만병통치약 떠벌려대는 싸구려 약장사도 마찬가지지.”
나는 의자에서 일어나 창고문을 열었다. 용진아, 녀석이 등뒤에서 간곡히 불렀다.
“미래는 없다고, 모든 세상이 환멸뿐이라고, 우리 모두 철창 속에 갇혀 그저 한쪽으로 몰려다니는 새떼에 불과하다고 인정하면, 네 마음이 편하냐? 너는…… 믿고 싶지 않냐? 단지 깨닫지 못했을 뿐 무언가가 있기는 있다고 믿고 싶지 않냐?”
ㄴ대학생들은 더이상 오지 않았다. 대학생들뿐 아니라 박윤명 역시 까페에 잘 나타나지 않았다. 이틀 사흘 만에, 어떤 때는 일주일 만에 나타나 아무 일 없었던 듯 사주풀이를 하는가 하면, 밤 아홉시가 넘어 까페문을 미는 적도 있었다. 아무도 그에게 왜 결근했느냐 왜 늦느냐 묻지 않았다. 어떤 행동을 하든 자연스럽게 따뜻하게 받아들여주는 것, 그것이 사장을 비롯한 모든 종업원들의 의리요 그에 대한 최대한의 배려였다.
사주를 무시하면 안됩니다. 딱 맞아떨어지는데 어쩔 거예요. 내가 초년에는 잘 나갔습니다. 세상이 온통 푸른 하늘이었지요. 중년에 파란이 많고 하는 일마다 깨진다더니 이 모양이 되지 않았습니까? 천파에 천역, 되는 일이 없고 몸이 고달프고. 희한하게 맞더란 말이지요. 내 명이 짧다는 것만 빼놓고. 그거 역시 살아봐야 아는 일이지만.
녀석은 마치 나나 심씨처럼 수다스레 떠들어댔다. 테이블에서 테이블로 정신없이 옮겨다니며 피식거리는 윤명을 보고 불안해한 사람은 사장뿐 아니었다. 심씨도 현미도 특히 윤명을 아끼던 털보 주방장도 홀을 들락거리며 짐짐해했다.
칸막이가 없어진 휑한 홀에는 천장까지 닿을 만한 키큰 나무들이 여기저기 들어섰다. 사장은 머리를 다시 기르기 시작했다. 탤런트이자 배우인 김승우의 최신 썬글라스를 구입하여 자신의 간격 넓은 두눈을 무리없이 안경알에 가두었다. 명품 양복 대신 티셔츠를 즐겨 입었지만 그것은 자신의 기호라기보다는 탤런트 김승우가 최근 들어 티셔츠를 선호하는 점과 무관하지 않았다. 필요없어진 교탁과 칠판을 치우며 사장은 들으란 듯 화를 내었다. 문화, 지성, 도덕 운운하는 인간들, 죄다 사기꾼이라니까. 조둥이만 가지고 한강물 팔아먹을 개새끼들.
지겨울 정도로 비가 많았던 여름을 보내고 어느덧 10월, 박윤명은 등산객들에 의해 시체로 발견되었다. 그가 까페에 완전히 발을 끊은 지 석달 만의 일이었다. 실족사뿐 아니라 자살의 가능성이 경찰에 의해 점쳐졌다. 시신이 발견된 곳이 등산로와는 뚝 떨어진 가파른 지형인데다 정작 고인이 디뎠으리라고 추정되는 바위는 위가 평평하여 실족할 위험이 별로 없다는 점 때문이었다.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이제 그는 갔다. 말 그대로 공염불, 소매끝에 잠깐 말려들었다가 허공으로 사라진 바람 한줄기가 되어버렸다. 그와 관련된 나의 모든 감정들, 이를테면 미움, 짜증, 드러내지 않아도 전혀 불편하지 않았던 미량의 미안함, 안쓰러움마저도 더이상 헤적이지 않아도 되게 되었다.
사주쟁이인 내가 단언하건대 인간은 하늘이 정해준 사주, 운세를 거스르지 못한다. 박윤명이 죽은 것은 그 스스로 알아냈듯이 그의 사주가 그러했기 때문이다. 그가 사주팔자를 믿었다면 그는 그대로 이루어졌으니 억울할 것이 없고, 사주를 믿지 않았다면 사주풀이를 하여 돈을 벌어보겠다고 헤덤빈 그의 삶 자체가 사기요 편법이요 가짜였다. 진짜 가치있는 인간, 이 세상을 개선하여 살 만한 세상으로 바꾸어줄 진짜 지도자는 자살하지 않는다. 자살이라니, 그들에게는 실수로라도 죽을 권리가 없다. 그들은 다른 이들의 삶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놓은 사람들이며, 모진 박해와 갖은 역경을 겪는 것 자체가 그들의 존재이유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나는 잘살 것이다. 내 훌륭한 사주대로 말년의 천권과 천수를 누리며 아들딸 낳아 행복하게 잘살 것이다. 그리고 나는 성공할 것이다. 존경하건 경멸하건 사장 김대풍의 본을 열심히 따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그를 뛰어넘어 하늘이 내게 준 권세를 맘껏 양껏 누릴 것이다. 가난하고 능력없는 인간들을 답답하게 내려다보며 거리낌없이 그들을 업신여길 것이다. 하늘의 별을 보기 위해 눈앞에 놓인 떡을 외면할 생각은 없다. 어차피 우리는 인체, 한끼라도 거르면 힘이 빠지고 비굴해지는 살덩어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사주까페여 영원하라. 박윤명은 잘 죽었다. 그러지 않아도 세상에는 쓸데없는 인간들이 너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