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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

 

유폐된 내면의 행로

조경란론

 

 

서영인 徐榮硜

문학평론가, 경북대 강사. 제7회 창비신인평론상으로 등단. 평론으로 「미래를 꿈꾸는 서사의 지난한 역정–황석영론」 「새로운 총체성을 위한 지방과 주변의 리얼리즘」 등이 있음. sinpodo12@hanmail.net

 

 

1. 고립된 내면의 서사

 

등단 후 지금까지 조경란(趙京蘭)은 고립된 개인의 내면에 매우 집요하게 천착해왔다. 그의 소설에서 중심인물과 주변의 관계는 극히 제한적이며 인물들은 제한된 관계 속에서 언제나 무심히 혼자 떠돈다. 이들이 홀로 보내는 일상, 혼잣생각과 내면의 파장만이 서사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화자와 외부 환경과의 격리, 그리고 그 세계를 그저 바라보기만 하는 인물의 시점, 이것이 이른바 세상을 “12자, 8자 통유리로 들여다보고 이해하는”(「불란서 안경원」, 『불란서 안경원』, 문학동네 1997, 303면) 조경란 특유의 독법인 셈이다.‘불란서 안경원’의 통유리 안에서 ‘나’는 언제나 똑같은 옷을 입고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 횡단보도를 건너 가게로 들어오는 고객들을 그저 바라본다. 세계는 ‘언제나’ ‘어디선가’ 본 듯한 사람들로 가득 차 있을 뿐이며 그 무미건조함은 변화없이 지속되고 있다.‘통유리’라는 투명한 차단막으로 자신과 외부의 경계를 분명히하고 그 안에서 꼼짝 않고 버티면서, 칩거 이전을 회고하거나 칩거 이후를 상정하지 않는 태도. 이것이 조경란 소설의 집요한 내면성을 구성한다.

90년대 이후 내면서사의 흐름에 조경란 소설을 한 거점으로 놓을 수 있다면 이러한 내면 자체에 대한 탐색을 중요한 근거로 들 수 있을 것이다. 내면 이외의 것에 관해서는 최소한의 정보만을 남겨둔 채 내면 자체로 곧바로 육박해들어가는 자세는 이른바 ‘억압된 것들의 귀환’이라는 말속에 전제되어 있던, 이념이나 현실의 구체성과 같은 대타항 없이 이미 당연한 경향으로 자리잡은 무심한 존재성을 은연중에 표상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내면 천착은 세계와의 소통은 애초부터 불가능하며 개인들은 각자 고립된 삶을 견뎌나갈 뿐이라는 의식, 그리고 그 의식 속에 고립을 보상해줄 어떤 전통이나 공동체적 위안에 대한 향수를 더이상 남겨놓지 않은 90년대 중·후반의 이른바 신세대 작가들의 세계관을 공유하고 있다. 이모가 사실은 자신의 생모라는 충격적인 사실 앞에서도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식빵 굽는 시간』, 문학동네 1996, 159면)는 ‘강여진’의 태도는 “왜 멀리 떠나가도 변하는 게 없을까, 인생이란”(『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문학동네 1996, 141면)이라는 김영하의 발언과 닮은 데가 있다.

96년 등단 이래 3권의 작품집(『불란서 안경원』; 『나의 자줏빛 소파』, 문학과지성사 2000; 『코끼리를 찾아서』, 문학과지성사 2002)과 3권의 장편(『식빵 굽는 시간』; 『가족의 기원』, 민음사 1999; 『우리는 만난 적이 있다』, 문학과지성사 2001), 한권의 중편(『움직임』, 작가정신 1998), 그리고 최근의 산문집(『조경란의 악어 이야기』, 마음산책 2003)에 이르기까지 조경란은 시종일관 소통불능의 현실 속에서 자신의 내면에 유폐된 인물들을 그려왔다. 결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작가는 개인의 내면과 타인과의 소통, 세계와의 불화와 화해에 관한 일관된 보고서를, 다양한 변주와 실험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타인과의 격리와 소통의 문제, 그 속에서 개인의 상처를 응시하고 치유하는 문제 들은 90년대 소설을 이끌어온 중요한 동력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으며 이제 일정정도의 귀착점에 도달해 있는 듯도 하다. 작가 이력 전부에 이 주제에 관한 풍부한 서사를 담아온 조경란을 통해 우리는 우리 시대 내면서사의 한 흐름을 일별해볼 수 있다. 그러자면 우선 조경란의 소설이 제시하는 개인 내면의 느리고도 우회적인 행보를 인내심을 갖고 뒤쫓아볼 필요가 있다.

 

 

2. 변하지 않는 일상의 늪, 자폐적 내면

 

「환절기」(『불란서 안경원』)는 주변과 관계맺지 않고 홀로 고립되고 그 고립된 상태로부터 벗어나려 하지 않는 개인의 상황을 비교적 선명하게 드러내는 작품이다. 새로 집을 지어 팔기 위해 땅만 보고 산 집에서 ‘나’는 이년째 서로 말을 하지 않고 지내는 동생과 함께 겨울을 나야 한다. 봄이 오면 집을 헐고 다시 지을 테니 겨울 동안만 잘 지내보라는 말을 남기고 어머니와 아버지는 지방의 공사현장으로 떠나버렸다. 한방을 쓴다면 미쳐버리거나 죽을 수밖에 없을 것 같은 동생과 함께 겨울나기. 물건을 집어던지고 욕설을 퍼부으며 동생과 나는 이마가 터지고 피가 흐르는 불면의 밤들을 보낼 수밖에 없다. 동생을 이토록 증오하게 된 이유 같은 것은 기억나지도 않는다. 명백한 것은 이미 나는 동생과 돌이킬 수 없을 만치 심각한 불화상태에 빠져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나’의 고통과 부적응, 고독 역시도 이유없는, 처음부터 이미 주어진 것일 뿐이다. 버스 안에서 만난 미친 여자, 악취로 주위가 모두 코를 틀어막고 있지만 아랑곳 않고 오선지에 악보를 그려넣고 있던 그 여자의 모습을 통해 “전생의 내 것이었을 듯한, 과학적이며 논리적으로는 도저히 설명될 수 없는 그런 불가해한 느낌에 휩싸였던”(같은 책 281면) 것은 주변으로부터 철저하게 격리되어 있는 그 미친 여자에게서 동질감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주위의 상식이나 논리와는 아무 상관 없이 자신의 세계 속에만 칩거하는 자폐적 개인인 그 미친 여자야말로 바로 동생과조차도 한방에서 지낼 수 없는 ‘나’의 또다른 모습이었던 것이다.

고립과 자폐, 불화는 이미 선험적으로 주어진 것이므로 그것은 극복하거나 싸워나갈 것이 아니라 그저 이를 악물고 견뎌야 하는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애당초 ‘봄이 오면’이라고 말했던 엄마의 약속은 의미없는 기약에 불과하다. 통로가 막혀버린 자폐의 공간, 그 끔찍한 폐쇄성은 계절이 바뀌고 새로운 관계가 찾아오리라는 희망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를 이미 증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희망에 대해서 ‘나’는 더욱 잔인하고 단호해진다.‘나’는 이국의 고향으로 보내는 친구의 편지를 분쇄기에 넣어 뭉개버리고 미친 여자가 키우는 화분에 펄펄 끓는 물을 쏟아붓는다. 겨울이 결코 끝나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 이들에게 꽃을 피우고 소식을 전하는 봄이란, 그 앞에서 더욱 단단히 자신을 무장해야만 견딜 수 있는 가혹한 장벽이다.

원인과 근거가 존재하지 않으므로 조경란 소설이 집요하게 견지하는 내면성은 어떤 원리나 방법이라기보다 일종의 ‘태도’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조경란이 고수하는 내면성은 ‘무엇을 위한’이나 ‘무엇에 의한’ 내면성이 아니라 애초부터 이미 존재하고 있었던, 삶 그 자체이다. 원인을 탐구하지도 방향을 정하지도 않은 채 묵묵히 삶을 견디는 태도는, 삶이란 언제나 느닷없는 불행의 연속이고 그것에 저항하는 것은 이미 불가능한 일이라는 의식 속에서 배태된 자기방어의 태도이기도 하다. 그러나 조경란 소설 속에서 소통 불가능하고 관계 불가능한 세계에 대한 인식과 자기방어적 내면의 고수는 정교하게 밀착해 있어서 새로운 출구를 위한 틈입을 쉽사리 허락하지 않는다. 그래서 조경란 식의 ‘원래 처음부터 존재했고 이미 고정된 내면’이 지나는 행로, 그리고 그것의 느리고도 지루한 방향성을 찾기 위해서는 그 출구 없는 폐쇄회로 속을 인내심을 갖고 더 주시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고정된 위치를 좀처럼 벗어나지 않는 한정된 폐쇄회로의 가장 중요한 거점은 바로 ‘가족’이다.

조경란 소설에서 개인을 둘러싼 모든 주변환경은 내성적으로 침묵하며 견디고 참아야 할 어떤 곳이며, 지상에서 가장 친밀하고 안정적인 공동체라 불리는 가족 역시 예외가 아니다. 가족은 화해하거나 소통할 수 없는, 내내 불편하게 시선을 피하면서 어쩔 수 없이 동거해야 하는 불가피한 삶의 조건일 뿐이다. 소설 속에서 가족들은 이미 벗어날 수 없는 불운에 빠져 있다. 아버지의 파산이나 치매 같은 조건 들은 하나같이 개인의 힘으로 어찌해볼 도리가 없는 불가항력적인 재난과도 같다. 가족들은, 빚을 내서 빚을 막고 수시로 집을 나가거나 옷을 벗어던지는 아버지를 지키느라 외출도 하지 못한다. 견디다 못한 자식들은 하나 둘 집을 떠나고 아버지와 그 곁의 어머니는 점점 흐려진 눈빛으로 불안하게 넋을 잃어간다. 「내 사랑 클레멘타인」(같은 책)의 ‘그녀’는 집을 지키고 『가족의 기원』의 ‘유정원’은 집을 나가지만 그 둘의 본질은 크게 다르지 않다. 집을 나가거나 집을 지키거나 불운한 가족들의 암담한 몰락은 결코 그녀들의 곁을 떠나지 않으며, 그래서 그녀들은 도저히 탈출할 수 없는 일상 속에서 겨우 견디며 삶을 지속시키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유정원이 빚더미에 올라앉은 가족들을 버리고 짐을 싸는 데서부터 시작하는 『가족의 기원』은 무언가 새로운 방향을 암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유정원의 가출은 온전한 의미의 탈출도 새로운 출발도 아니다. 견딜 수 없어 떠나왔지만 떠나온 공간 속에서도 여전히 가족은 견뎌야 하는 짐이고 고립과 자폐의 환경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가족으로부터 떠나왔으나 여전히 가족에 얽매여 있는 유정원의 상황은 가족을 떠나면서부터 좀더 가까워진 ‘그’와의 관계 속에서도 나타난다. 그녀가 집을 떠나는 것을 도와주고 새로 구한 집에 매주 두번씩 찾아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돌아가는 그. 그러나 그 역시 그녀가 떠나온 가족들과 그리 다르지 않다. 그는 아비나 오라비처럼 그녀를 돌보려 하고 그녀의 식사를 챙기고 가족과의 불화를 걱정한다. “생선 꼬리와 머리를 떼어내고 몸통 가운데 살을 부서지지 않도록 발라 내 밥그릇 위에 얹어”주는 그를 보며 정원은 “가끔 당신은 내 아버지와 엄마를 닮은 데가 있다”(145면)고 생각한다. 아내 및 두 아이와 헤어질 작정을 하고 “나, 유정원이라는 여자와 또다른 가족을 만들고 싶어”(149면)하는 그는 그러므로 가족의 또다른 대체물일 뿐이다. 가족을 떠난 곳에서 또다른 가족의 대체물을 만나서 일상이 이어지는 과정은 의미심장하다. 견딜 수 없어 떠나왔지만 새로운 시작은 이미 변화없이 지속되는 삶의 일부분일 뿐인 것이다.

그래서 유정원은 가족을 버리고 그를 떠난다. 그러나 가족을 버리고 애인을 떠나도 그녀의 삶이 달라지지 않을 것은 이미 분명하다. 때문에 그녀가 타인과 맺는 관계는 불구적일 수밖에 없다. 연립주택의 입구에 앉아 꼼짝도 않고 지팡이로 바닥을 두드리며 허공을 바라보던 노인. 그녀는 그를 데려와 씻기고 자신의 침대에 눕히고 그 옆에서 오랜만에 단잠을 잘 수 있었다. 그러나 외출한 사이 노인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얼마 후 옥상에서 투신한 사체로 발견된다. 유정원이 유일하게 편안한 소통과 교감을 느꼈던 노인은 아내의 시체와 6개월을 살면서 미쳐가고 있었고 마침내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이 미친 노인은 「환절기」의 미친 여자와도 같은 존재이다. 스스로를 완벽하게 고립시키고 싶어하며 누구와도 소통하지 않고 자신만의 세계에서 침해받지 않고 살고 싶어하는 조경란의 인물들은 이처럼 세상에서 격리된 사람들에게 자신을 투사하는 것이다.

조경란의 가족 이야기는 답답하게 봉쇄된 가족 공간에서 끊임없이 탈출을 꿈꾸지만 결국 그 가족에 얽매여 다시 회귀할 수밖에 없는 인물들의 지루하고 끈질긴 잠행과 견딤에 의해 진행된다. 이 지루하고 끈질긴 잠행의 기록을 통해 좀처럼 변화하기 힘든 견고한 가족이데올로기의 구조가 드러나는데, 이는 조경란 소설의 지독한 자기유폐의 근거를 불충분하게나마 해명해준다. 아버지의 치매나 가족의 파산이 가족을 점점 더 견딜 수 없는 것으로 만드는 근본적 원인이기는 하지만, 가족의 붕괴와 몰락은 가족들의 허영심과 가족에 대한 막연한 낙관에 의해 더욱 가중된다. 어떠한 외부적 고난이 있더라도 부모는 자식을 안전하게 지키고 키워야 한다는 의식, 부모와 소통하지 못하는 자식들이 일방적으로 짊어져야 하는 가족에 대한 의무들, 그 속에서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가족은 애초부터 안락하고 견고하게 늘 그 자리에서 흔들리지 않으리라는 근거없는 믿음들이 오히려 가족을 더욱 암담하게 파괴해나간다. 부모들은 사기를 당하고 부채에 시달리면서도 딸들에게 집안의 형편을 말하지 않고, 딸들이 대학과 대학원을, 시시한 직장의 하잘것없는 사무원과는 다른 삶을 꿈꾸도록 내버려두었다. 이제 걷잡을 수 없게 되어버린 집안의 몰락 앞에서 딸들은 돌연 궁핍한 빈민이 되어 어디선가 돈을 꾸어와야 하고 생활정보지를 뒤적이며 얼마간의 생활비를 지급해줄 직장을 간절하게 찾아야 한다. 치매에 걸린 아버지와 허공만을 바라보며 자꾸 살이 쪄가는 어머니를 무감각하게 돌보고 부양하는 것은 자식들에게 주어진 의무이며 다른 돌파구는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구성원들의 부양과 양육을 가족에 전가하고 대신 혈육의 결속과 친밀이라는 이데올로기를 덧씌우는 씨스템이 가동되는 한 가족이라는 질곡은 쉽게 해결될 수 없는 것이다. 더구나 이미 붕괴해가고 있는 가족 앞에서도 구성원들은 쉽게 그 이데올로기를 포기하지 않는다. 엄마는 빚에 몰린 집안에 유일하게 월급을 가져다주는 딸의 유니폼을 다릴 때 가장 즐거운 얼굴을 하며, 할아버지의 제사음식을 장만할 때 가장 활력에 넘친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지워진 의무와 근거없는 낙관들이 사실은 그 가족을 더 무참하게 무너뜨리고 있다 할지라도 구성원들은 그 가족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부여받을 때만 존재감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스스로 가족이데올로기에 동의하고 그것을 내세우는 일에 적극적인 구성원들은 가족의 붕괴와 몰락을 돌파하는 새로운 가족관계를 생각하지 못한다.

허위적 가족이데올로기를 응시하는 조경란의 시선은 매우 냉정하고 집요하다. 무참하게 무너진 가족공동체의 극한에서 가족들은 집을 나간 맏딸에게 “그래도 너는 우리집 맏딸이잖니”(「유리 동물원」, 『나의 자줏빛 소파』 164면), “우린 가족이잖아. 게다가 언닌 맏딸이기도 하고. 어떻게 이렇게 무책임할 수가 있느냔 말야”(『가족의 기원』 115면)라며 가족이데올로기를 주지시키지만, 그녀들은 “가족은 하나의 이데올로기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이데올로기가 원하는 가족의 모습은 현실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가족의 기원』 41면)음을 결코 잊지 않는다. 그리고 지루하고 굼뜨게 현실을 견디면서 가족이 붕괴되어가는 과정을 확인한다. 모든 식구들이 떠나는 날만을 꿈꾸는 집, 지긋지긋한 견딤이 어서 종결되기만을 기다리면서 그래도 우리는 가족이니까를 되뇌며 어떻게든 함께 지내야 한다고 말하는 모순, 이 모순 앞에서 인물들은 모두 자신만의 내면으로 깊숙하게 칩거한 채 관계와 소통을 거부한다. 그리고 이 거부는 지나친 자폐와 자기방어일 수도 있지만 또한 그 모순을 합리화하는 데 동참하기를 거부하는 태도이기도 하다. 작가는 가족이데올로기가 ‘왜’ 예정된 불운일 수밖에 없으며 ‘왜’ 이다지도 견고한지에 대해 충분히 말해주지는 않지만, 그것이 ‘얼마나’ 견고하고 끈질긴지에 관해서 반복해서, 아주 오랫동안 보여주고 있다.그리고 이 지루하고 끈질긴 응시가 있기에 소설은 회복 불가능한 소통부재의 현실을 근거없는 인간애나 육친애, 개인적 판타지로 봉합하지 않는다. 가족을 떠나왔으나 결국 가족으로 회귀했고 가족을 넘어선 곳에 또다른 가족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가족의 기원』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가족이라는 모순은 또한 인물들이 처해 있는 관계들의 모순이기도 하다. 그래서 오래 버티면서 쉽게 화해하지 않는 조경란의 소설은 개인의 내면에까지 육박해 있는 현실의 고통스러운 단절과 희망부재의 상황을 더욱 절실하게 드러낸다.

 

 

3. 소통부재의 삶을 비껴가는 화해의 방법들

 

쉽사리 자신의 유폐를 거두지 않는 인물들, 그들은 홀로 밥을 해먹고 “퇴각하는 달팽이처럼 아주 느린 걸음으로 시내 이곳저곳을 배회”(「망원경」, 『나의 자줏빛 소파』 41면)하고 우주에 대해 이야기하거나 쏠로이스트의 산행을 상상하면서 시간을 견딘다. 홀로 고립된 인물들이 타인과 관계맺는 방식은 아주 조심스럽고도 제한적인데, 이는 「환절기」의 미친 여자, 『가족의 기원』의 노인, 그리고 「불란서 안경원」의 죽은 할머니와의 관계처럼 쌍방향의 교신과 소통이 아니라 주로 일방적인 공감에 의해 이루어진다. 이들은 완벽하게 세계로부터 고립된 사람들이므로 이는 교신이나 관계맺기라기보다는 인물들의 ‘자기동일시’ 혹은 ‘자기연민’과 더 유사하다. 이와 같은 불구적인 관계맺기와 소통 속에는 실현 불가능한, 혹은 좌절된 욕망의 잔해들이 도사리고 있다. 자신의 내면으로 퇴각한 인물들이 관계와 소통에 대해 병적인 거부감을 보이는 것은 자신이 철저히 고립되어 있을 수밖에 없음을 미리 알아버린 데서 비롯한다. 예컨대 “전문직도 아니었으므로 변변한 성취감도 느낄 수 없는 직장에 그저 아침이면 출근했다가 저녁이면 퇴근하는 단조로운 생활”(「식물들」, 『나의 자줏빛 소파』 193면) 속에서 “전화를 받거나 사장실 청소를 도맡아하지 않으면 안되는 그런 일말고 다른 일들을 하고 싶”(『가족의 기원』 105면)다는 욕망은 쉽게 충족되지 않는다. 전문성도 경제력도 배경도 갖추지 못했으므로 단조로운 생활 외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으며 그러므로 다른 삶으로 비약할 수 있는 계기 역시 쉽게 마련될 수 없다. 주어진 조건으로는 충족시킬 수 없는 다른 삶에 대한 욕망은 필연적으로 거듭되는 좌절을 불러올 수밖에 없고 그것은 상처만 가중시킬 뿐이다. “유폐된 우리들 일상은 아무것도 달라질 게 없”(「목이 긴 사내 이야기」, 『불란서 안경원』 233~34면)으므로 “삶이란 단지 오늘을 견디는 것, 바로 그것뿐”(「불란서 안경원」, 같은 책 304면)이라는 조경란 소설의 기본적인 태도는 가능하지 않은 욕망들이 불러오는 상처와 좌절에 대한 자기방어이기도 하다.

금지된 욕망은 더욱 간절하고 그것을 추구하기에는 실패와 좌절이 너무나 선명하게 예정되어 있다. 예정된 실패와 좌절이라는 막다른 벽 앞에서 작가는 도둑질과 거짓말 같은, 우회적 욕망충족의 방법을 보여준다. 격리된 존재들과의 일회적이고 한정된 소통이 상처받지 않고 욕망을 충족시키는 소극적인 방법이라면, 이에 비해 도둑질이나 거짓말로 욕망을 충족시키는 방법은 한층 더 적극적이다. “가질 수 없다면, 훔치는 수밖에 어쩔 도리가 없”(「우린 모두 천사」, 『코끼리를 찾아서』 110면)다는 말처럼 도둑질은 불가능한 욕망을 충족시키는 전도된 방법이다. 「우린 모두 천사」에서 ‘김요옥’의 화실에 모여든 인물들은 모두 서로 다른 상대를 욕망한다.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하는 불안하고 고독한 인물들의 늘 어긋날 수밖에 없는 교신에의 욕망은 역시 어긋난 방법으로밖에는 충족되지 않는다. 그래서 가질 수 없는 것들, 자신이 아닌 타인을 바라보는 상대의 물건을 훔쳐냄으로써 그들은 합일과 교감의 욕망을 대리충족시킨다. 「유리 동물원」의 ‘그녀’ 역시 지루하고 전망없는 일상을 견디는 방법으로 도둑질을 선택한다. 오피스텔의 관리인으로 취직한 남편과 함께 비어 있는 오피스텔에 숨어든 그녀는 비상열쇠를 가지고 이웃들의 집을 엿본다. 숨어들어온 오피스텔에서는 언제 쫓겨날지 모르고, 남편은 관리실 일말고도 매일 공사장 날일을 나간다. “지상에 방 한칸 갖는 것”이 남편의 소박한 꿈이지만 “적금을 타게 돼도 한동안 이루기 힘든 꿈이라는 것을”(「유리 동물원」, 『나의 자줏빛 소파』 158면) 남편도 잘 알고 있다. 퇴근하여 집이 울리도록 텔레비전을 틀어놓는 남편과 매일같이 돈이 필요하다고 전화를 거는 엄마. 더 좋아질 리는 없고 나빠질 일만 남은 일상 속에서 그녀는 이웃집 여자의 옷을 입고서 친정집의 골목을 헤매고 이웃집에 몰래 들어가 청소를 해놓고 거북이를 돌보고 신용카드를 훔친다. 이웃들과 간단한 인사를 나눌 뿐이지만 그 집의 물건들을 손에 익히고 그들의 옷을 몸에 걸치면서 그녀는 다른 삶을 욕망하고 그것을 충족시키는 것이다. 여기에서 도둑질의 의미는 분명하다. 훔치는 것말고는 가질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것, 그리고 훔치기라도 해서 간절히 욕망하는 무언가를 여전히 갖고 싶다는 것. 그래서 도둑질로 지탱해나가는 삶에는 여전히 변화 불가능한 삶의 조건에 대한 우울한 비관이 깔려 있지만, 욕망을 이어나가며 훔치고 엿볼 것들이 남아 있는 한 적어도 그 욕망들은 좌절되지 않는다.

「마리의 집」(『코끼리를 찾아서』)에서 ‘장말희’는 도둑질뿐 아니라 거짓말을 실현 불가능한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방법으로 채택한다. 그녀를 떠나 돌아오지 않는 ‘그’, 프랑스의 식당을 둘러보고 있을 그와 함께하고 싶다는 욕망은 가지도 않은 휴가를 프랑스로 갔다 왔다고 거짓말을 하게 하고 그가 말한 프랑스산 채소를 실제로 먹어본 것처럼 말하게도 한다. 만년 조감독인 이성현은 그녀 앞에서 작품을 구상하고 있다고 거짓말을 하고 서로의 거짓말이 들통난 둘은 서로가 같은 종류의 사람인 것을 알아챈다. 가질 수 없는 것을 욕망하므로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은 가질 수 없어 고통스러운 삶을 이해한다. 그래서 서로의 거짓말을 알아챈 후에도 이성현은 다음 작품을 이야기하고 장말희는 그것이 정말 궁금하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주목한다. 거짓말을 통해 비로소 불가능한 소통의 길이 열리는 아이러니컬한 순간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러한 소통과 교신은 진짜가 아니기에 그 불가능의 좌절감을 떠올릴 필요가 없고, 거짓말에 숨어 있는 욕망의 진실성을 외면할 수 없기에 무시할 수도 없다. 도둑질과 거짓말이라는 전도된 욕망충족 방법을 통해 조경란 소설은 지나친 자기방어에서 오는 어두움으로부터 벗어난, 좌절을 인지하면서도 그 결정의 순간을 유보하는 균형감각을 확보하게 된다.

그러나 이 균형감각 속에는 아직 해결되지 않은 딜레마가 남아 있다. 현실은 변화하지 않는 일상의 지속이라는 전제에서 다른 삶에 대한 욕망이 출발했다면, 인물들이 욕망하는 다른 삶이란 과연 변화하지 않는 일상의 지속이라는 현실의 한계를 뛰어넘는 것인가에 대한 질문, 욕망의 근거와 구체성에 대한 질문이 빠져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다른 삶을 엿보거나 가장하는 것이 아닌 다른 삶을 불가능하게 하는 조건에 대한 탐구와 질문 속에서만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실제로 「유리 동물원」의 그녀가 엿보는 이웃의 방들은 그녀의 방과 별로 다를 것이 없고, 「우린 모두 천사」에서 다른 이를 바라보는 태도 속에도 새로운 삶의 계기를 발견할 가능성은 없다. 그들이 욕망하는 타인들 역시 그들 자신과 다를 것이 전혀 없기 때문이고 그렇다면 그들의 욕망은 가짜 욕망이다. 「유리 동물원」의 그녀가 비상열쇠를 던져버리거나 「우린 모두 천사」가 김요옥의 자살로 마감되는 이유는 이 전도된 욕망충족 방법이 봉쇄된 삶을 열어줄 출구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도둑질과 거짓말에는 가혹한 견딤과 자폐적 내면을 뛰어넘어 삶은 애당초 그런 것이며 고통스럽게 발버둥치고 스스로를 방어해도 결국은 어쩔 수 없는 것이라는 체념이 깃들어 있다. 그리고 이 체념은 가질 수 없는 것들을 만들어내는 삶의 조건에 대한 불편한 인정, 그리고 그 조건을 뛰어넘는 상상으로 현실과 화해하려는 욕망 사이의 가교가 된다. 헤어지고 죽어 사라졌다 하더라도 여전히 존재하는 인연과 교신을 이야기하는 「동시에」(『코끼리를 찾아서』)는 당혹스러울 정도로 평온하고 다정하게 그 불편한 인정과 불우함을 뛰어넘는, 초월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 「동시에」는 사고로 애인을 잃고 자살을 기도하다 혼수상태로 누워 있는 조카에게 전하는 이모의 혼잣말로 구성된다. 이모는 조카에게 오래 전 헤어졌지만 평생을 그리워한 애인에 대해, 그리고 얼마 전 그 애인의 자살소식을 듣고 방황했던 자신의 경험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모는 한 벌목꾼을 만나 그 방황에서 벗어나는데, 그 벌목꾼은 멀리 떨어져 있는 나무들 사이에서 서로 위험을 알리고 소멸을 준비하는 교신이 이루어짐을 가르쳐주면서 이모가 그를 기억하는 한 이모의 애인 역시 이모를 기억하며 떠올릴 거라고 말한다. 이모는 조카에게 조카의 애인이 “또다른 씨앗의 모습으로 너를 찾아올”(「동시에」, 같은 책 13면) 거라고 나직이 속삭이면서 고통스러운 이별에도 결코 끊이지 않는 인연의 힘을 알려준다. 이 인물들도 사랑을 잃고 상실감에 빠져 있다는 점에서는 전작의 인물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러나 전작들에서 사랑의 상실은 간략한 단문으로 요약되었고 인물들은 잃어버린 사랑을 회고하지 않았으며, 그것이 그 인물들이 시달렸던 상실감과 공허감의 유일한 이유였던 것도 아니다. 「동시에」에서는 인물들의 상실감이 사랑으로 집중되고 있으며 화자는 매우 세밀하게 지난날의 사랑을 회고한다는 점에서 전작들과 확실하게 차별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무엇보다도 이모와 조카가 동시에 처한 이별이 영혼과 인연의 이름으로 위로받고 있으며 그래서 이들은 표면적인 고통에도 불구하고 지극히 평안하고 안정적이라는 점에서 전작들과 결정적으로 다르다.

「동시에」에서 초월적 힘으로 등장하는 나무의 교신처럼, 『코끼리를 찾아서』에는 눈으로 볼 수 없는, 그러나 기척과 흔적으로 존재하는 정령과 영혼이 자주 출몰한다. 「김영희가 흘린 눈물 한 방울」에서는 우연히 구해 들어간 집에서 어떤 보이지 않는 존재들이 ‘나’의 일상을 흔들어놓는다. 잠든 새 집안의 물건들이 어질러져 있고, 느닷없이 수도와 전기가 끊겼다가 다시 들어오는 이상한 일들이 벌어지는 것이다. 선반에서 오래된 사진첩을 발견한 ‘나’는 그 광포한 기척의 주인이 오래 전 그녀가 장애에 대한 거리감 때문에 떠나왔던 한 남자임을 알게 된다. 나중에야 그녀는 그와의 일들이 사랑이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때의 그녀에게는 사랑보다도 쌀과 집이 더 필요했으므로, “사랑이 (…) 가벼운 입김에도 날아갈 정도로 사소한 공기라고 생각했”(같은 책 142면)던 것이다. 집안에 출몰한 그의 정령은 그녀를 공포에 휩싸이게도 했지만 한시적 결별과 어긋남을 초월하여 영원으로 이어지는 인연과 관계의 위력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코끼리를 찾아서」에서는 이 보이지 않는 존재들이 코끼리라는 상징으로 표현된다. 일상 속에서 누군가가 늘 곁에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느낌. ‘나’는 그 기척의 주인을 코끼리라 이름붙였지만, 그것은 처음에 짐작했듯이 ‘이 집의 정령들’이기도 할 것이고 혹은 ‘죽은 할머니나 고모나 삼촌들’이기도 할 것이다. 그리고 이 코끼리에 의해 답답하게 정체된 일상과 유폐된 내면은 견딜 만한 것이 된다.

변화하지 않고 지속되는 무의미한 일상을 견디기 위해 고집스럽게 자신만의 세계 속으로 유폐되어갔던, 충족되지 않는 욕망을 보상하기 위해 거짓말과 도둑질로 짐짓 삶의 무게를 가볍게 하기도 했던, 우울하고 불우한 인물들의 존재감은 정령들에 의해 약화된다. 그들을 괴롭히던 선험적인 불행과 세계의 위해는 이 정령들에 의해 위로받고 그래서 그들은 내내 불화했던 삶의 조건들과 화해한다. 코끼리가 가져다준 안정감은 일그러지고 왜곡된 교신을 평온하고 처연하게 바로잡으며 그래서 조경란 소설은 독자들과도 더욱 안정감있게 교신할 길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날카롭고 우울한 내면들로 어둡고 피폐한 현실의 이미지가 전하던 조경란 특유의 매력이 코끼리에 떠밀려 얼마간 퇴색한 것도 사실이다.

 

 

4. 유폐된 내면의 행로

 

변화 불가능한 현실에 던져졌다는 불행한 개인의식, 그래서 관계로부터 스스로를 단절시키고 내면으로 유폐되는 태도에 의해 지탱되는 서사는 한편으로는 고립된 개인의 소외감을 통해 관계불능의 현실을 침착하고 집요하게 환기하는 힘을 지니지만, 한편으로는 애초부터 출구가 봉쇄되었다는 점에서 지루한 동어반복에 빠질 우려가 있다. 조경란의 소설에서 드러나는 일련의 변화, 봉쇄된 현실에서 한발 물러나와 짐짓 위악을 가장하면서 도둑질이나 거짓말 같은 일탈의 장치를 도입하거나, 초월적 영혼을 불러와 유한하고 불구적인 관계를 이어놓으려는 시도는 정체될 수 있는 서사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한 모색의 산물로 볼 수 있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스스로를 절대적 자폐로 몰아넣을 만큼 단단했던 개인과 외부세계와의 격리, 관계불능의 조건들이 충분한 해명없이 와해되어버렸다는 점이다. 정착해 안주할 집이란 없다며 음울하게 집밖을 헤매던 인물들이 타인의 집을 엿보고 훔치며 그것을 욕망하거나, 초월적 영혼의 힘으로 영원한 인연의 집을 짓게 되는 그 ‘계기들’에 관한 충분한 탐색이 없다면, 이 모색과 시도는 손쉬운 타협에 그칠 우려가 있다. 실상 조경란의 이러한 모색이 전혀 낯설지는 않은 것은 내면서사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고 평가되는 은희경과 신경숙에게서 체념과 초월이라고 말해도 좋을 만한 이러한 경향을 이미 확인한 바가 있기 때문이다. 은희경과 신경숙이 개인의 내면이 현실과 소통하고 갈등하는 접점들에 관해 매우 풍요하고 다면적인 성찰을 감당해냈다는 점은 널리 인정받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들의 관점이 스스로의 긴장을 확보하지 않을 때 그것은 현실에 대한 체념과 냉소의 포즈에, 신화적 사랑의 위안효과에 머물러버릴 수 있다는 우려가 얼마간 현실화된 것도 사실이다. 실제로 소통부재가 불러온 개인의 내면에 집중하는 관점은 그것의 주관성을 과장하거나 자기증식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한계를 내장할 수밖에 없다. 조경란의 변모가 신경숙이나 은희경이 보여준 일정한 패턴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면 그것은 이 주관성의 자기설득력을 충분히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일 수 있다. 그리고 조경란과 유사한 세계관 속에서 고립된 내면의 움직임을 느리게 주시했던 윤성희나 강영숙 같은 젊은 작가들이 최근 변화 불가능한 삶의 무게에서 벗어나기 위해 농담과 아이러니를 소설 속에 자주 도입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조경란은 내밀한 소통과 친교적 관계들에 대해 신경숙보다 훨씬 비관적이며 이 비관성의 무게를 은희경보다 더 의식한다는 점에서 이들 작가와 일정한 차별성을 지니고 있다. 현재 조경란은 이러한 차별성을 근거로 자신의 내면서사를 밀고 나가면서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야 하는 싯점에 서 있으며 그의 변화에 대해 구체적인 단정을 내리기에는 아직 이르다. 체념과 초월의 경향은 확정된 사실이라기보다는 징후에 가깝고 거기에 드리워진 불우함의 그림자는 아직도 세심하다. 엄밀히 말하자면 조경란은 타인과의 소통은 불가능하며 세계는 변하지 않는 일상의 연속이라는 전제에서 아직 한발도 나아가지 않았다. 저마다 다른 상처와 저마다 다른 사연들, 그 개별의 내면이 지닌 고유의 세계를 스스로의 진정성으로 납득하고 그것을 다시 타인의 세계 속에서 소통시키는 일은 소설이 감당해야 할 소중한 영역이기도 하다. 조경란은 내면을 깊이 천착함으로써 외부세계의 피폐함과 소통불능의 현실을 환기하는 힘을 가진 작가이고 그런 의미에서 내면서사의 또다른 방향을 제시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작가이다. 그래서 그의 최근 소설이 보여주는 안정감에도 불구하고, 이전의 불안하고도 폐쇄적인 인물들이 초월을 통한 화해의 유혹에 버티면서 더 질긴 생명력을 발휘하기를 기대하게 된다. 그리고 나아가 선험적이라고 단정지은, 인물들의 고독한 내면을 불러온 원인에 대해서 아직 말하지 않은 것들이 많이 남아 있다는 것도 기억해주었으면 좋겠다. 그 고독한 내면들을 통해 우리 시대의 삭막한 삶을 집요하게 응시하면서, 우리가 ‘왜 이렇게 단자적 개인으로 소외되어 있을 수밖에 없는가’를, ‘우리의 일상은 왜 이렇게 지루하고 감동없이 반복될 수밖에 없는가’를 밝혀낼 때, 그 ‘왜’에 의해 우리 문학의 새로운 길이 열릴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