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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민영 閔暎
1934년 강원도 철원 출생. 1959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斷章』 『용인 지나는 길에』 『냉이를 캐며』 『엉겅퀴꽃』 『바람 부는 날』 『流沙를 바라보며』 등이 있음.
묘비명
나도 이제 내
묘비명을 쓸 때가 돌아온 것 같다.
이런 말을 하면 자네는
아니 벌써? 하고 웃을지도 모르지만
다정하고 잔인했던 친구여,
시간은 이미 자정을 넘었고
눈 덮인 길에는 핏자국이 찍혀 있다.
어쩌면 나는 오랫동안
이때가 오기만을 기다리며 살았는지 모른다.
내가 걸어온 시대는 전쟁의 불길과
혁명의 연기로 뒤덮인 세기말의 한때였고,
요행히도 나는 그것을 헤치고
늙은 표범처럼 살아남았다.
수많은 청춘들이 누려야 할 기쁨조차
누리지 못한 채 꽃잎처럼 떨어지고
거룩한 분노가 캐터필러에 짓밟혀
무덤으로 실려갔을 때도 나는
집요한 운명에 발목 잡혀서
마지막 잎새같이 대롱거렸다.
손을 놓아야 한다!
서커스의 소녀가 어느 한순간
그넷줄을 놓고 날아가듯이
저 미지의 세계로 제비 되어 날아가며
고독한 포물선을 그려야 한다.
그것이 내 마지막 고별의식이 되기를 바라면서……
늙은 솔로몬의 노래
아침마다 새들이
시나몬 나무에 날아와 울 때는
내 마음 설레인다.
갓 핀 새하얀
꽃잎에 가려진 태양은
프리즘의 노래를 유리에 반사하고,
사랑하는 비빈들
떠나간 창틀에서 나는
새들의 예언에 귀기울인다.
─삐 삐 삐 삐, 휘 호로록 휘 호로록!
기다려라, 이제 곧
떠날 때가 돌아오리니……
참아라, 이제 곧
새 하늘이 밝아오리니……
읍내에서
내 노래 빈 들판을 지나
그 언젠가 산으로 가로막힌
계곡 물속에 잦아들 것이라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다.
목숨보다 앞서는
자본의 논리를 술잔에 타 마시고
요란한 호색잡지의 표지처럼
화장한 어린것들이 팔짱을 끼고
극장 앞을 서성거리거나 거웃 핥듯
아이스크림을 빨고 있는 골 빈
풍경들이 눈앞에 어른거려도 나는
무심히 바라보고만 있다.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이 소도시의 밤하늘에 늘
별이 뜨고 안개 낀 달빛이
광장을 비추고 있는 것만은 아니다.
시냇물 속의 물고기 알은 다 썩었고
러브호텔이 들어선 뒷산에서 울던
접동새는 자취를 감추었다.
그리고 어느덧
답답한 가슴을 치며 노래하던
가인의 목소리는
시궁창에 처박힌 불화살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