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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김신용 金信龍
1945년 부산 출생. 1988년 『현대시사상』으로 등단. 시집 『버려진 사람들』 『개같은 날들의 기록』 『몽유 속을 걷다』 등이 있음.
물의 무덤
가뭄으로
말라가는 거대한 저수지 바닥에서, 수몰된
마을이 떠올랐다
온갖 쓰레기와 퇴적물을 뒤집어쓴 채
한때, 사람 사는 마을이었던 것을 기억하게 하는
돌담길과 주춧돌의 흔적만으로—
마을이
산 채로 水葬되었던 마을이,
마치 캄캄한 지하에서 죽은 의문사처럼
불쑥, 떠올랐다
그곳에 마을이 있었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하는데도
그 마을의 이름마저 지워져버렸는데도
다시, 비가 내리면 무덤 속으로 사라져버릴
마을이,
더이상 달도 뜨지 않고, 개도 짖지 않는 마을이
밥 짓는 저녁 연기를 피워올릴 것처럼
지붕 위에 흰 박꽃이라도 터트릴 것처럼
떠올랐다
수의도 없이, 묻혀버린 마을이
이제 붕어나 피라미, 수초들의 집이 된 마을이
물의
무덤 속에서, 그토록
오랜 세월, 썩지 않고 있는
시체,
鄕愁처럼—
그 무엇도 구원해주지 못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더욱 끊임없이 구원에의 손을 내밀어야 하는 자의
빈 손바닥처럼—
검은 마리아
판잣집의, 그 삐걱이는 계단 같은 흉곽을 가진
역 앞, 빈민굴의 그 좁고 어두운 골목 같은 눈빛을 가진
그 골목길을 서성이며, 잠깐 쉬었다 가실래요?
지나가는 남자들의 옷자락을 붙드는, 그 눈웃음에서
거부할 수 없는 쓸쓸함이 묻어나던, 헐값의 숙박비만 지불하면
누구나 쉽게 묵어갈 수 있었던, 퇴색한 벽지와 때묻은 이불
흐린 전등불빛이 유일한 장식품인, 뒷골목의 여인숙처럼
길을 걷다가 쉬고 싶을 때, 그렇게도 쉽게 눈에 띄던
하룻밤 자고 나면 뒤돌아보지 않아도, 그 초라한 간판처럼 너무도 쉽게 잊혀지던
다시 찾아들면, 신음 같은 그 흉곽의 삐걱임으로 더 포근하던
가슴, 구멍 숭숭 뚫린 그 흉벽의 空洞으로, 가족들의 얼굴이 비명처럼 드나들던
그 몸을 팔아, 진폐의 가난을 치유하려 했던
가난을, 가난으로 치유하려 했던
가난이 퇴화하면 무엇이 되는지 뻔히 알면서도
가난을 아기 예수처럼 안고 있었던,
가난을 아기 예수처럼 안고 있었으므로, 자신의 몸이
허물어져가는 마구간처럼 될 수밖에 없었던, 그 거꾸로 선 生
화려한 여관과 러브모텔들이 즐비한 거리에서
실종신고도 없이,
실종되어버린
결코 아기 예수를 낳아본 적 없으므로, 흰색이 아닌
아프리카 흑인의 마리아는 물론 검은 마리아이겠지만
제3세계, 전쟁과 기아로 병든 아프리카의 검은색도 아닌
가난이 세습되는 空의 나라에서 태어나지도 않은,
이 땅의 흙색이면서도, ‘검은 마리아’라고 불리었던
눈물겹게도, 푸줏간에 놓인 고기 한점도 못된.
깡통을 위하여
한때
우리 모두 가난했을 때
판잣집의 쭈그러진 그릇처럼 헐벗었을 때
깡통은,
우리들의 삶의 일부였다
속은 텅 비우고, 껍질만으로 굴러다녀도
깡통은
초라한 꽁초의 집이 되어주었고
천장에서 떨어지는 빗물의 그릇,
뚫린 벽의 바람막이가 되어주었다
스스로 텅 비우지 않아도, 늘 비어 있는
비운다는 그 의식마저 비우지 않아도, 알맹이는 주고
빈 껍질만으로 굴러다니는, 그 깡통 속에
흙을 담으면 화분이 되어주었고
쓰레기를 담으면 쓰레기통이 되어주었다
흙이 담긴 깡통 화분에서 꽃이 핀다고 해서
깡통의 생애가 꽃으로 장식되는 것은 아니지만
깡통 화분이 놓인 山 1번지,
도시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쪽마당 가에 갖가지 빛깔로 핀
깡통 꽃밭을 보며
비록 빈혈이었지만, 우리는 꿈의 어질머리를 앓기도 했다
그 깡통을
발로 차지 말자
홧김의 구둣발로 시궁창에 처넣지 말자
텅 빈 껍질만으로 굴러다니는 알몸이
잿빛의 미래를 펼쳐 보이는, 이 앙다문 몸짓의 물구나무서기라 해도
만나는 그 어떤 것과도 몸 섞으며
버려져 뼈 아픈 것들을 기억하게 한다 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