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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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선 金光善

1961년 전남 고흥 출생. 2003년 『창작과비평』으로 등단. 시집 『겨울삽화』가 있음. kgs0049@hanmail.net

 

 

 

풀통

 

 

풀통이 넘어져 모자란 만큼 물을 채웠다

넘어져 흐른 자리는

굳어 엉기고 점성은 강해져

만지는 손마다 쩍쩍 들러붙는다

풀이라는, 찐득찐득해야 하는 성질

물을 탄 풀은 점성이 떨어지고

느슨해지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대낮을 설명해야 하는 날이 길어졌다

아이들도 말수가 줄었고

아내도 외면하는 날이 많아졌다

넘어진 풀통을 성급하게 일으켜

가슴 깊이 희석해버린, 쉽사리

증발하지 않을 것 같은 수분이지만

그래도 넘어지지는 않겠지

무게의 중심이 어디에 있는지를

일찍 깨우치지 못했어도

서로를 적셔야만 붙는 거라고

조금은 얼룩져도 함께 마르며

딱지가 앉는 거라고, 흡착력은 비록 떨어졌으나

가슴 맞대고 기다리는 사람살이

그래도 아직은 사탕처럼 달기만 하다.

 

 

 

묵은 양파

 

 

겨우내 묵은 양파를 정리하는데

온도와 습도가 허술한 창고에서도

마지막 절규처럼 어둠속 잉태는

노란 싹을 틔웠다 척박한 곳이라도

땅이 아니라도 제 눈물로

싹을 틔울 수 있다는 듯 독기어린 눈으로

섣부른 짓을 몰래 감행한 소행이 밉다

 

내 어디에 그런 쓸개빛 독기가 숨어 있었을까

보란 듯 싹부터 자르고

할 일 다 했다는 듯 태연자약

썩어가는 뿌리를 매정하게 도려냈다

그새를 참지 못하고 교접의 터널을 지나온

한 생명의 부단한 노력도

셈의 논리로 억울한 가슴 보상받듯

시원스럽게 분풀이를 했다

 

젊은 혈기에는 필요없던 살들이었다

구호처럼 뼈대만 필요했으나 이제는

누군가 내 살 속으로 뿌리를 내린 것만 같은데

허물고 지어도 스러져 볼품없는

오늘, 비리고 탁한 첩첩 삶의 부피

무엇을 위해 한 생을 내줄 수 있으랴

뿌리에 길을 터주고 물크러진 살점을

벼리듯 살아온 시간처럼 벗기며

뼈다귀탕집 삶은 등뼈 같은

남은 살 한점 소중하게 바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