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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최영미 崔泳美
1961년 서울 출생. 1992년 『창작과비평』으로 등단.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 『꿈의 페달을 밟고』가 있음.
햇빛 속의 여인
가끔씩 나는 그 방에 간다
밤새 나를 지우고 비워낸 뒤
날카로운 아침햇살에 묶여
차마 일어날 용기가 없어,
눈을 감는다
마지막 그날까지 이 고장난 기계를 끌고
밥을 먹이고 머리를 감기고
지겨운 양치질을 몇번 더 해야 하나?
이를 닦다가 길을 걷다가도, 문득
당신이 기다리고 있는, 그 방을 그려본다
끊어진 손목, 피멍 든 손으로
문을 두드린다
당신─ 너무 빨리 왔군.
언제든지 원할 때 떠날 수 있다는 게
내 삶의 유일한 위안이었지
묘비명을 다시 고쳐쓰고
충분히 지루했던 40년 생애 동안 나를 속였던
수많은 방들을 건너가, 그 방에 간다
구겨진 몸을 담았던 껍질들을 벗으면
도시의 공허가 칼처럼 내리꽂히는 방.
자신의 그림자에 갇힌
여자의 두 발은 움직이지 않는다.
그녀는 그 빛의 사각형 밖으로 걸어나올 수 있을까?
대화상대
레이먼드 카버를 읽으며 나는 그를 지웠다
12월 23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나는 침대에 누워 있었다
아침밥이 소화되지 못한 채 뱃속에서 꾸르륵대고
머릿속엔 전날 헤어진 그의 얼굴이 해석되지 못한 채 걸려 있었다
내가 만난 그의 첫 미소와 마지막 굳은 표정이 겹쳐지고
그가 했던 모든 말들이 돌아누운 가슴속에서 맹렬하게 서로를 부정하고 있었다
그는 내가 그를 사랑할 시간도
미워할 시간도 주지 않았다
레이먼드 카버를 읽고 목욕을 하고
나는 다시 나의 의자에 앉았다
눈 덮인 겨울나무 가지 위에 부지런히 눈을 터는 새를 본다
성탄절날 아침, 내 눈에 잠시 스쳐간 암호 같은 풍경.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은 멀리서 빛나고
지저귀고
당신을 위해
난 이 시를 억지로 완성하지 않을 거다
언젠가, 기쁨도 고통도 없이
굳은 빵에 버터 바르듯
너희들을 추억하리라.
알겠니?
1
살아가는 일이 견딜 수 없어 떠났다.
내가 견딜 수 없는 건 나, 그리고 너.
겨우 생존하기 위해 참아야 하는 것들
부드러움 속에 감춰진 칼날들, 버릇처럼 붙이는 인사말
안녕! 뒤에 숨겨진 무관심과 자잘한 계산
풀리지 않는 생의 방정식. 왜? 또……
담배 한개비가 타는 시간, 절망이 피어오르다 희망과 교대하고
물렁물렁한 것들이 단단해진다
조금씩 자기를 파괴하면서, 결코 완전히 파괴할 용기는 없었지
가슴을 쥐어뜯다가도 금방 살아갈 구멍을 찾고
꿈을 꾸면서도 절망하는 나.
선운사 가는 길에 고인돌을 보았다.
시커먼 돌덩이들이…… 시처럼 반짝였다
그만 멈추고픈 가슴이, 오래된 죽음을 보자 팔팔하게 뛰었지.
이천오백년 된 허무 앞에서, 겨우 1년밖에 안된 연애는 허망할 것도 없었어. 티끌도 아니었어.
단단한 허무에 엉덩이를 비비고 물을 마셨지.
돌덩이들의 무시무시한 침묵, 이끼 낀 세월이 바람에 나부꼈어.
여기, 엄청난 비유가 누워 있으니
멈추어라, 느끼고 생각하며 말하던 것들이여.
사랑하고 싸우던 뜨거운 숨결도, 육체도 영혼도 썩어 증발했으니
순간에서 영원으로 비약하는 인간의 서투른 날갯짓이
이 무거운 적막을 깨뜨릴 수 있는지.
내 속에 고인 침이 돌로 굳기 전에
붙들 무언가가 필요해.
살아가려면 어딘가에 목숨을 거는 척이라도 해야 해.
무르팍에 쌓이는 공허를 견디려면 한밤중에 버튼을 눌러야 해.
그래서 그렇게 네 이름을 부른 거야, 알겠니?
시커먼 고인돌 옆에 솟은 푸른 봉분 두 개.
늙은 주검에 이웃한 싱싱한 주검, 부부처럼 나란한 흙더미가 부러웠어.
2
십년 만에 다시 찾은 선운사.
옛 사랑을 묻은 곳에 새 사랑을 묻으러 왔네
동백은 없고 노래방과 여관들이 나를 맞네
나이트클럽과 식당 사이를 소독차가 누비고
안개처럼 번지는 하얀 가스…… 산의 윤곽이 흐려진다.
神이 있던 자리에 커피자판기 들어서고
쩔렁이는 동전소리가 새울음과 섞인다
콘크리트 바닥 위에 으깨진, 버찌의 검은 피를 밟고 나는 걸었네
山寺의 주름진 기와는 나를 알아보지 못했어
내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