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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신경숙 申京淑

1963년 전북 정읍 출생. 1985년 『문예중앙』으로 등단. 소설집 『풍금이 있던 자리』 『오래전 집을 떠날 때』 『딸기밭』 『종소리』, 장편 『외딴방』 『바이올렛』 등이 있음.

 

 

 

그가 지금 풀숲에서

 

 

그는 한순간 눈을 번쩍 떴다.

눈꺼풀이 달라붙어 있어 뜨려다가 감기를 서너 번 반복한 다음이었다. 강렬한 빛이 눈을 찔러 그는 겨우 뜬 눈을 다시 감았다. 자꾸만 눈을 찔러대는 것이 태양만이 아니라 얼굴을 덮고 있는 가시 돋친 풀 때문이라는 걸 깨달았다.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얼굴을 덮고 있는 것을 걷어내려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비명을 질렀다. 팔꿈치가 으스러지기라도 했는지 고통 때문에 팔을 들어올릴 수가 없었다. 팔꿈치만이 아니었다. 목을 움직일 수도 등을 일으켜세울 수도 없었다. 몸이 반토막 날 것 같은 통증이 그의 전신을 관통했을 때 그는 다시 정신을 놓아버렸다.

어떻게 할 거냐? 어머니가 물었다. 그는 어머니가 무엇을 두고 어떻게 할 거냐고 묻는지를 몰라 빤히 어머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두달 후면 내 생일이잖느냐. 아, 네. 그는 순간 아차 했다. 아, 네,라니. 번번이 당하고도 또 아,네, 하고 말다니. 그러잖아도 생각하고 있었다고 고쳐 말하려는 순간 이미 어머니는 쌀쌀하게 등을 보이고 돌아앉았다. 어머니의 등은 나는 태희가 한살 때 혼자가 되었다,라고 말하고 있었다. 너는 그때 겨우 네살이었다, 느희 남매를 기르느라 택시운전을 하느라 내 등골은 휘어졌어,라고 말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언제나 생신 무렵이 되면, 두달이나 남겨놓은 때를 무렵이라고 표현해도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두어달 전에 벌써 당신 생일 때 어떻게 할 것인지를 물어오곤 했다. 그나 태희나 아내가 먼저 어머니 생신이 곧 다가오는데 어떻게 보내고 싶으세요?라고 물을 겨를을 어머니는 주지 않았다. 보름도 아니고 한달도 아니고 두달 전에 벌써 어머니 생신을 챙기기에는 살아가는 일이 만만치 않았다. 아내는 아내대로, 태희는 태희대로, 그는 그대로. 그런데 야릇한 일이다. 이번에는 두달 후의 생일을 미리 챙기고 있는 어머니가 너무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고 그런 어머니에게 어리광을 부리고 싶어졌다. 생일이 두달밖에 남지 않았는데 아무 말이 없다고 나무라는 어머니의 노한 목소리조차 정겹게 들려 정말 죄송한 생각이 들었다. 서운한 게 있으면 숨기질 못하는 어머니는 아내가 조금만 토를 달아도 아들인 그의 마음이 상하든지 말든지 냉랭한 얼굴로 혼자 사는 태희에게로 가버리곤 했다. 그때마다 그는 다시 어머니를 집으로 모셔오느라 애를 먹곤 했다. 어머니는 여동생 태희와 그가 우애가 좋은 꼴도 보지 못했다. 어쩌다 그가 태희와 전화통화라도 길게 하면 당신만 빼고 저희들끼리 속닥거리는 것으로 받아들이곤 했다. 그런 일이 빈번하다 싶으면 어머니는 그에게는 태희의 흉을, 태희에게는 그의 흉을 늘어놓았다. 그가 태희에게 어머니의 말을 전하지 않듯이 태희 또한 어머니의 말을 그에게 옮기지 않았다. 그러나 맞장구를 쳐주지 않으면 흉보는 내용의 강도는 점점 세졌다. 어머니 말대로라면 태희나 그는 천하에 몹쓸 인간도 그런 인간이 없을 것이었다. 행여 어머니가 어디 아프기라도 하면 일상생활이 마비될 정도로 그들은 분주해졌다. 어머니는 병원 한군데쯤 가보는 것으로 끝나는 경우가 없었다. 관절이 아프면 관절을 잘 고친다는 병원은 죄다 다녀봐야 직성이 풀렸다. 한번은 발등을 다쳤는데 치료를 마치고도 발등을 보호한다고 붕대로 감아두어 나중에 붕대를 풀어보니 그 자리가 하얗게 자국이 남기도 했다. 그나 태희나 아내가 어머니의 건강을 위해 따로 할 일이 없을 지경으로 어머니는 스스로 당신 몸을 챙겼다. 사실 그것이 몸을 돌보지 않아 뒤늦게 놀라는 것보다 낫기는 했다. 어머니는 택시운전을 그만둔 뒤로 맛있는 것은 죄다 먹어봐야 하고 가보고 싶은 데는 죄다 가봐야 하고 좋은 옷이 있으면 죄다 사입어야 하는 분으로 변했다.

그는 간신히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구나, 생각했다.

건강 염려증에 걸린 사람처럼 건강을 챙기던 어머니가 위암으로 이세상을 떠난 지가 벌써 삼년째인데 목소리가 이렇게 생생하게 들리다니. 그는 그만 꿈에서 깨어나고 싶었다. 그러나 여전히 견딜 수 없는 고통으로 인해 눈을 뜰 수가 없었다. 그는 가물가물거리는 실낱같은 의식을 붙잡고 늪속 같은 저편으로 빠지지 않으려고 애썼다. 지금 자신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를 알아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번엔 슬며시 눈을 떠봤다. 팔이 부러졌거나 으깨져 손을 들어올릴 수가 없다는 걸 스스로에게 인식시켰다. 그는 힘겹게 고개를 여러번 좌우로 흔들어서 얼굴을 덮고 있는 풀인지 넝쿨인지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구절초 가시가 그의 광대뼈를 긁어대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잣나무인가. 바람이 일렁일 때마다 허공의 나무가 흔들리며 눈앞을 어지럽혔다. 손바닥을 뻗어 힘을 주어 쥐었을 때 마른 흙이 만져지고 풀이 쥐어졌다. 계속 눈을 뜨고 있는 일조차 힘에 겨워 감았다가 뜨기를 반복하는 동안 그의 눈 속으로 나무들이 쏟아져들어왔다가 달아나곤 했다. 여기는, 자동차들이 질주하는 소리가 바로 귀에 잡히는 여기는, 전신을 훑어대는 통증과는 상관없이 저렇게 파란 하늘이 올려다보이는 여기는 어디인가. 그의 주변에는 산쑥이며 참취 도깨비바늘 들이 노랗거나 하얀 꽃을 피운 채 흩어져 있다. 나뭇잎과 넝쿨 들도 사방으로 퍼져 있다. 그는 왜 자신이 이 풀숲에 버려져 있는지 기억하려고 애를 썼다. 가물가물거리는 의식을 놓쳤다가 자동차가 지나갈 때마다 그 소음과 진동에 의해 겨우 다시 정신차리기를 반복하던 그는 어느 순간 마치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 같은 좌절을 느꼈다. 제천으로 아내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턱대고 액셀러레이터를 밟다가 문득 시간당 주행속도를 가리키는 바늘이 120킬로미터에 가 있는 걸 보고 스스로 여기는 국도인데 싶어 속도를 줄였던 기억. 위험을 느끼며 자동차의 속도를 급히 줄일 때 그의 몸이 핸들 가까이로 쏠렸던 기억도 되살아났다.

그가 장모의 전화를 받은 건 일주일 전이었다. 장모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그를 원망했다. 사람을 그리 보지 않았는데 냉정함이 하늘을 찌른다고 했다. 그가 아내가 머물고 있는 제천에 근 육개월 동안 발걸음을 하지 않아 하는 말이었다. “그래, 이대로 헤어질 텐가?” 장모가 물었다. 그가 침묵을 지키자 장모는 또다시 깊은 한숨을 내쉬며 아내가 그와 헤어지기를 원하고 있다고 말했다. 어떤 결말을 내든 내려와서 아내의 속마음을 들어보라고 했다. 속마음이라는 장모의 표현에 그는 얼떨떨한 기분이 들었다. 아내는 그에게 털어놓을 속마음이 있는지 모르지만 그는 아내에게 아무런 속마음도 없었다. 아내는 얘기를 잘 듣는 사람이지 상대를 눌러가며 얘기를 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어쨌거나 그는 다음주에는 꼭 제천에 가보겠다고 한 뒤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멍하니 앉아서 아내가 헤어지기를 원한다는 장모의 말을 곱씹어보았다. 헤어지기를 원한다고? 그것이 아내의 속마음일까. 그는 느닷없이 아내의 왼손에 뺨을 얻어맞았을 때처럼 분노가 치밀었다. 마치 아내가 이런 수순을 밟으려고 그동안 그 앞에서 연극을 꾸민 게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는 아내가 싫지 않았다. 아내와 헤어지겠다는 생각은 여태 해보지 않았다. 아내의 왼손만 아니라면 그럭저럭 다른 사람들처럼 지낼 것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시간은 그냥 흘러가지 않고 마음을 굳어버리게 하거나 누그러뜨린다. 장모의 전화를 받고 일주일을 보내는 동안 그의 마음은 얼마간 누그러졌다. 어쨌거나 아내를 이대로 계속 처가의 두릅나무 곁에 둘 수는 없는 일이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아내를 데리고 오든지 입원을 시키든지 아니면 아내의 뜻대로 헤어지든지. 그는 아내를 협박할 생각까지 했다. 다시 아내의 왼손이 옛날로 돌아간다면 자신은 그길로 물이 많은 데를 찾아가 자동차와 함께 물속으로 돌진해버리겠다고 말할 생각이었다. 그 협박이 이혼을 생각하는 아내의 마음을 바꿔놓을 수 있을까. 그러다가 그는 그런데 자신이 왜 아내와 헤어지지 않으려고 하는지를 잠시 생각했다. 아내와 열정적으로 사랑해서 맺어진 사이도 아니고 이제 아내가 편안한 상대도 아니다. 왜? 거기까지가 의식을 잃기 전 그가 한 생각이었다. 사고다발지역, 속도 줄임이란 붉은 글자를 보며 말 잘 듣는 사람처럼 이미 줄인 속도를 더욱 줄였던 기억도 났다. 일차선 도로에서 자신의 차를 추월하는 봉고차를 보내며 저, 미친놈이,라고 투덜거렸던 기억도 났다. 어느 순간 중앙선을 넘어오는 트럭을 피하려고 핸들을 확 꺾었던 기억. 핸들이 뽑힘과 동시에 유리창이 깨지는 소리를 들었던가. 몸이 붕 치솟았다. 밤하늘의 별을 얼핏 보았던 것도 같다. 그것이 다였다. 너무나 순간적인 일이어서 위로 붕 치솟았던 기억만 나지 육체가 공중으로 치솟았다가 이 풀숲으로 떨어졌을 때 느꼈음직한 공포에 대한 기억은 전혀 없었다. 몸이 땅에 닿기 전에 정신을 잃었던 것인가. 그는 자신이 완전히 혼자 풀숲에 내팽개쳐져 있다는 것을 겨우 깨달았다. 사고를 당하고 하루가 지났는지 이틀이 지났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밤운전을 하고 있었는데 지금 대낮인 걸 보니 최소한 하룻밤은 지난 모양이었다. 상황을 간파하자 그는 자신도 모르게 어머니―를 불렀다. 부르는 게 아니라 비명에 가까운 내지름이었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풀숲 위 국도를 지나가는 자동차의 소음이 잘라먹었다. 그는 두 손을 움켜쥐었다. 와락 풀이 뜯겨 그의 손에 쥐어졌다. 얼굴 위로 쏟아지는 태양을 피할 수도 없었다. 척추가 부러졌는지 누운 상태에서 조금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조금만 움직여도 등뼈가 뒤틀리는 것 같은 통증이 몰렸다. 그는 비로소 자신이 누구에겐가 발견되지 않으면 어찌해볼 도리 없는, 완전히 고립된 상태라는 걸 깨달았다.

회의는 어떻게 되었을까. 인터넷 쇼핑몰 예티클럽 리빙팀 MD인 그는 월요일 아침에 있을 예정이던 기획회의에 생각이 미쳤다. 내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 그는 무심코 몸을 움직이려다가 다시 기가 꺾였다. 이번 회의는 리빙팀뿐 아니라 패션팀, 주얼리팀, 가전제품팀 등 각 분야의 MD 아홉 명이 참석하는 회의였다. 아직 가을씨즌이지만 다가올 겨울에 대비해서 모든 팀이 집중적으로 상품기획안을 내놓기로 했다. 이미 보름 전에 통보된 회의였고 이번 회의에서 매출을 최대화할 수 있는 기획안에 대해서는 포상이 주어질 것이었다. 주로 겨울의류와 가전제품들이 집중적으로 검토될 것이었다. 이미 도매타운에서 직접 쏘씽하고 있었으므로 모두들 새로운 안을 내려고 골머리를 앓았을 것이다. 도매타운은 보통 저녁 8시부터 새벽 5시까지 문을 열었다. 직접 도매타운에서 상품을 쏘씽하기 시작하면서 가격이 그만큼 저렴하게 책정될 수 있었으나 어둑한 새벽녘까지 도매타운이 몰려 있는 동대문거리를 헤매고 다니는 일이 자주 있었다. 그런만큼 경쟁력은 있었다. 그는 그동안 단 한번의 결근도 매일 밤 10시 무렵에야 이루어지는 매출회의에도 불참한 적이 없었다. 아무 연락도 없이 MD 회의에 참석하지 않은 그를 동료들은 찾고 있을 것이다. 그는 습관처럼 핸드폰을 찾으려고 손을 움직이려다가 또다시 통증에 제지당했다. 그는 자신이 한쪽 신발만 신고 있을 뿐 시계를 차고 있지도 핸드폰을 소지하고 있지도 않다는 걸 깨닫는 데 시간을 한참 소비했다.

그는 발을 까닥여보았다. 구두가 벗겨진 왼발 양말 속 발가락이 움직였다. 구두 속의 오른발도 움직여보았다. 오른쪽은 무릎과 종아리에 힘을 줄 수가 없었다. 한쪽 손만이라도 들어올릴 수 있다면 자신의 뺨을 후려쳐보고 싶었다. 어머니― 어머니― 그의 메마른 입술에서 또다시 비명이 터져나왔다. 아무도 없어요? 아무도 없어요? 그는 풀숲에 버려진 채 소리를 지르다가 풀을 쥐어뜯다가 깜북 의식을 놓다가 다시 깨어나기를 반복했다. 순간순간 공포가 등뼈가 부러진 그의 전신을 훑고 지나갔다. 의식이 있을 때면 머리 위쪽으로 트럭이나 자동차가 질주하는 소리가 귀에 머물렀다. 도로가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진 않다는 데 생각이 미치자 위안이 되었다. 그가 다시 혼미 속으로 미끄러졌다가 깨어났을 때 잣나무며 밤나무며 아까시나무를 향해 아무도 없느냐고 외쳤다. 일어설 수도 앉을 수도 기어다닐 수도 없는 그가 구원을 요청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렇게 외쳐보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그의 외치는 소리를 듣고 있는 것들은 하늘이나 땅이나 나무나 벌레나 그리고 가까운 데서 들리는 도로의 소음뿐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소리조차도 내지를 수 없이 목이 부어올랐다. 그 자신이 들어도 짐승의 소리인지 인간의 소리인지 구분이 안되는 굵은 저음이 외마디처럼 새어나왔다.

그는 종종 퇴근할 수 없을 정도로 일에 파묻혀 지냈다. 선배와 후배 몇몇과 인터넷 신문을 만들어보겠다고,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해 다니고 있던 자동차 회사 홍보실에 사표를 냈다. 그후 몇년 동안 그가 자정 안에 집에 들어가본 날은 손으로 헤아릴 정도였다. 이틀 사흘은 보통이고 일주일씩 사무실에서 기거하는 날들이 이어지기도 했다. 그랬는데도 인터넷 신문 만드는 일은 무산되었다. 그의 퇴직금과 동생 태희가 갚은 돈 이천만원을 모두 날린 셈이 되고 말았다. 그나마 지분을 적게 갖기로 했기 때문에 그 정도에 그쳤다. 높은 지분율을 가지려고 투자금을 많이 냈던 이들이 적지 않아 그는 자신의 손실을 내놓고 이야기하지조차 못했다. 아내가 자신의 왼손이 이상하다며 주무르기 시작한 때가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그가 없으면 아내는 혼자 지냈다. 어머니가 세상을 뜬 후 그는 아내가 혼자 어떻게 지내는지 알지도 못했다. 어머니와 함께 있을 때의 아내는 늘 어머니의 얘기를 듣고 있었다. 어머니는 위암이 재발해 다시 입원해 있는 동안에도 그리고 마지막 숨을 거둘 때까지도 간당간당한 목소리로 아내에게 얘기를 했다. 보증금 5만원에 사글세 얼마씩을 내고 살던 때였다. 어머니는 말한다기보다 쪼로롱쪼로롱 울었다. 손님을 태우고 장충동쪽으로 갔다가…… 건설회사 사장 아들이 운전하는 토요따를 그만 들이박아버렸지 뭐냐. 그때 토요따라고 하면 귀하디귀한 차였어. 나 같은 사람은 평생 엄두를 못낼 차였지. 그런 차를 들이박고 나니 하늘이 그야말로 노랗더라. 그때 돈으로 36만원 견적이 나왔어야. 우리가 살고 있는 방 보증금을 뽑아내도 해결이 되지 않을 돈이었어. 눈앞이 캄캄하더라. 돈이 없으니 내 과실을 몸으로 때울 수밖에 없겠다고 생각해 사고는 아침나절에 났는데 오후 서너시가 될 때까지 사장집 마당에 서서 처분을 기다렸다. 무엇 때문이었는지는 지금도 모를 일인데 나중에 사장이 나오더니 나보고 그만 집으로 돌아가라 하더라.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를 알아듣질 못했구나. 왜냐면 그 사장이 일 열심히 해서 돈 많이 벌어 잘살라고 했기 때문이야. 돈을 벌어서 앞으로 갚으라는 것이 아니라 잘살라고 하다니. 그게 진정 사장이 나에게 한 말인가 싶었다. 왜 가라니까 가지 않느냐는 다그침을 받고 나서 나는 그야말로 사장의 뒷모습에다 대고 머리가 땅에 닿도록 절을 했다. 그리고 사장집을 나왔는데 어쩌냐, 수중에 동전 한푼이 없더라. 애들이 있는 사글세방으로 돌아오려면 버스를 두 번 갈아타야 했는데 버스비조차 없더라니까. 집은 멀고 돈은 없는데 배는 또 얼마나 고픈지. 무슨 용기였을까. 나는 일단 맨 먼저 눈에 띈 중국집의 주렴을 밀치며 안으로 들어갔지. 짜장면 한그릇 좀 달라고 했지. 그리고 솔직하게 지금은 돈이 한푼도 없다, 그러나 배가 너무 고파 걸을 수조차 없다, 우선 먹고 돈은 나중에 갖다주겠다고 했지. 중국집 주인이 내 행색을 훑어보더니 그런 사람이 하루에도 여러명이라고 투덜대면서도 거기 앉아 좀 기다리쇼, 하더라. 많이도 아니고 좀 기다렸더니 짜장면 그릇이 아니라 큰 냄비에다가 짜장면을 가득 담아 내놓으며 실컷 먹으쇼, 하더라. 그날 그 큰 냄비 속에 담긴 짜장면처럼 맛있는 음식을 그 이후로 먹어본 적이 있었나 몰라. 짜장면을 실컷 먹고 나니 담배 생각이 나더라. 짜장면을 치는 사람한데 담배 한 가치만 얻어 피우자, 하니 그는 참 나, 하는 표정으로 잠깐 째려보더라. 한 가치도 아니고 두 가치나 건네주어 연달아 맛있게 피웠다. 차마 버스비는 빌려달라고 못하겠어서 부른 배를 이끌고 거리로 나와 일단 버스에 탔다. 그때는 모자를 쓰고 유니폼을 입은 버스 안내양이 버스비를 일일이 받던 그런 때였어. 안내양이 버스비 내라고 해서 내가 돈이 있으면 내고 탔지 이 사람아, 하며 나도 운전기사다 이러이러해서 이러이러하니 한번 봐달라 하며 실랑이를 벌이는데 버스기사가 안내양보고 내버려두라 해서 싱겁게 끝나고 말았지. 덕분에 공짜로 버스를 타고 애들이 있는 집으로 오지 않았냐. 바꿔타면서 또 한번 실랑이를 벌이기는 했지만 그때는 그럴 힘이 남아 있다는 게 얼마나 좋던지. 나도 참 어지간히 능청맞은 인간이었지야? 토요따를 부숴놓고 돈 안 물은 거, 짜장면을 냄비로 가득 공짜로 얻어먹은 거, 게다가 담배까지 한 가치도 아니고 두 가치나 공짜로 얻어피운 거, 끝까지 버스 공짜로 얻어타고 집에 온 거 아무나 못한다아! 그때 짜장면 한 그릇이 150원이었는데 다음날 300원을 갖다주었단다. 냄비로 가득이었던 짜장면은 두 그릇도 넘었을 테지만 두 그릇으로 쳤어. 담배도 두 가치 얻어피웠으나 네 가치 갚았어. 갚으러 갔을 때는 고마운 마음에 한 보루를 샀으나 막상 그걸 다 주려니 아까운 생각이 들지 뭐냐. 그래도 한갑은 주려고 했는데 담배 두 가치를 빌려준 짜장면 치는 인간이 담배를 끊으려는 참이라면서 한사코 받지 않으려고 해 갚는 데 매우 힘들었던 기억이 나네.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내가 원래 빚지고는 못사는 성미 아니냐. 토요따를 망가뜨린 그 사장집엘 그후 몇년 동안 틈틈이 찾아갔어. 하루 일하고 하루 쉬는 때여서 쉬는 날이면 가서 마당 쓸어주었다. 차도 닦아주었다. 겨울날 밤에 눈이 펑펑 내리면 다음날 새벽에 눈뜨자마자 가서 눈을 치워주었다. 그런 날이 족히 사오년은 이어졌어야. 어느날인가, 사장이 나한테 자기 운전기사로 들어오라고 하더라. 월급을 택시운전사 월급의 배를 주겠다고 했어. 내가 몸으로 하는 일은 환장하게 하니까 밑에 두고 싶었던 거 아니겠냐. 그러나 난 가지 않았어. 내가 빚 갚으러 갔지 취직하러 간 것은 아니었으니까. 남의 밑에 있으면 뭐하냐. 택시운전을 계속하다 보면 개인면허도 나오고 하는데. 그래서 나는 택시운전이나 할랍니다, 했더니 사장이 그러더라. 내 밑으로 들어오지 않으려거든 앞으로는 우리집 마당도 쓸러 오지 마시오. 토요따를 들이박은 빚을 그렇게 갚았니라…… 나는 혼자 자식들 키우면서도 빚지고 살지는 않았어야…… 자식들한테 다 받아내야 되는디…… 시간이 없을랑가비다. 어머니는 얘기 도중에 잠깐씩 눈을 반짝 빛내기도 했다. 작년엔가 그 근처를 지나다가 생각나서 들러봤더니 그 커다란 집엔 주인이 바뀌어 있더라…… 아내는 벌써 수십번은 들어서 다 외워버렸을 어머니의 이야기를 마치 처음 듣는 사람처럼 그것도 감명깊은 듯이 귀담아들었다. 왜 이제야 생각이 나는가. 그때 벌써 아내는 자신의 왼손을 항상 만지작거렸다. 어머니, 네, 네, 그래서요? 하면서도. 아내가 왼손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모습은 그대로 아내의 포즈가 되어버렸던 것 같다. 나중엔 그것이 전혀 어색하지도 이상하지도 않았으니까. 이삼일 만에 한번씩 퇴근해 집에 가면 아내는 변함없이 그를 반겼다. 뜨개질을 하다가 왼손을 주무르며 “어제는 제천집에 갔다 왔어요”라고 말한 때도 있었다. 가끔 아내는 “당신은 왜 내게 아무 말도 안해요?” 묻기도 했다. “무슨 얘기?” 그가 물으면 아내는 “글쎄, 무슨 얘기든지요” 하면서 고개를 숙였다. 원래 그는 말이 없는 성격이었다. 오죽하면 어머니가 그를 “찍새”라고 불렀겠는가. 아내는 어머니가 그를 “찍새야” 하고 불렀을 때 “어머니 찍새가 뭐예요? 새이름이에요?” 하고 물었다. 어머니는 잠시 복잡한 표정을 짓다가 “그래, 새이름이다. 알을 까고 나와서는 죽을 때까지 한번도 울지 않는 새!”라고 했다. 그러면 아내는 아, 그런 새도 있구나, 믿는 눈치였다. 왼손을 만지작거리거나 주무르던 아내가 어느날부터인가 오른손으로 왼손을 붙들고 있는 모습이 종종 눈에 띄었다. 타박상을 당했을 때나 취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왜 그러고 있느냐 물으니 아내는 글쎄 어떻게 대답을 해야 될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고선 “손이 말을 듣지 않아요” 별일 아니라는 듯이 시무룩하게 말했다. 손이 말을 듣지 않는다니. 처음에 그는 아내의 말을 흘려들었다. 손목이 시리다는 것도 아니고 저리다는 것도 아니고 손이 말을 듣지 않는다는 게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지 않기도 했다. 성공할 수 있다며 기세등등하게 모였던 팀을 해체하기로 하고 사무실을 폐쇄하고 있던 때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일자리를 얻어 새 분위기에 적응하느라 곧 몸과 마음이 분주해져 그는 아내의 말을 주의깊게 새기지 못하고 잊었다. 인터넷 쇼핑몰은 어디부터가 할 일이고 어디가 끝인지 알 수 없었다. 어떤 방문자들이 오는지 어떤 제품이 많이 움직이는지를 파악해서 상품을 정하고 디지털 카메라로 촬영하고 가격을 정해 싸이트에 진열을 하는 일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서로 얼굴을 보지 않는 상태에서 주문하도록 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가 원 플러스 원의 경품이벤트 기획으로 머릿속이 꽉차 있을 무렵 아내는 현관문을 열어줄 때도 오른손으로 왼손을 붙잡고 있었고 소파에 앉아서 텔레비전을 볼 때도 오른손으로 왼손을 붙들고 있었으며 책을 읽을 때도 왼손을 꼭 붙들고 읽었다. 그가 바라보면 아내는 “글쎄 내 왼손의 주인이 따로 있는 것 같다니까요” 중얼거렸다. 아내의 왼손이 심각하다는 걸 깨닫는 데는 그로부터도 한참이 걸렸다. 태희의 생일을 앞둔 일요일이었다. 아내는 아침 일찍 태희가 좋아하는 꽃게를 수산시장에 직접 나가서 사가지고 왔다. 간장 게장을 좀 담글까 하였으나 꽃게 값이 너무 비싸서 관두어야겠다며 투덜거렸다. 태희는 탕도 아니고 장도 아닌 찐 꽃게를 큰 접시 위에 올려놓고 파먹는 걸 좋아했다. 아내는 꽃게를 안쳐놓고 식탁을 베란다 창가 쪽으로 옮겼다. 누구라도 그러고 싶을 만큼 볕이 좋은 날이었다. 마침 꽃게철이라 찐 꽃게의 붉은 등짝을 떼어내면 붉은 알이 먹음직스럽게 모습을 드러내곤 했다. 사인용 식탁에 아내와 태희가 나란히 앉고 그 혼자 맞은편에 앉았는데 어느틈에 아내의 왼손이 태희 몫의 꽃게를 쓰윽 집어가는 것 아닌가. 그는 처음에 아내가 장난치는 줄 알았다. 태희도 그런 줄 알았는지 “언니도 참” 눈을 흘겼다. 오히려 아내만이 깜짝 놀라며 오른손으로 왼손을 끌어당겨 무릎에 내려놓고 지그시 누르며 주름이 생기기 시작하는 얼굴을 붉혔다. 그런데 그가 앞접시 위에 놓여 있는 꽃게의 몸통을 반으로 잘라 내려놓았을 때였다. 아내의 왼손이 식탁을 건너와서는 그의 접시 위에 놓여 있는 꽃게 한쪽을 쓰윽 집어다가 자신의 접시 위에 올려놓는 것이었다. 아내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아내는 왼손등을 오른손으로 두들겨패며 “빨리 가져다놓지 못해!” 소리를 내질렀다. 자기 자신에게가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하는 양 같았다. 그것도 여간 노여움을 탄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와 태희는 얼굴이 상기된 채 왼손을 호되게 야단치고 있는 아내를 처음 보는 인터넷 게임 구경하듯이 바라보았다. 아내에게 크게 혼이 난 아내의 왼손은 다시 슬그머니 좀전에 그의 접시에서 집어갔던 꽃게를 제자리에 가져다놓았다. 어색한 식사를 마치고 태희가 돌아간 후 그는 아내에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다. “모르겠어요, 어느날부터인가 왼손이 따로 놀아요.” 아내는 자신의 왼손이 자신의 의도와는 다르게 멋대로 움직이는 일이 그날 처음 있는 일은 아니라고 고백하며 오른손으로 왼손을 찍어누르듯이 붙잡고 있었다.

눈을 찌르던 해가 질 무렵에야 그는 움직이는 것을 포기했다. 꼼짝 못하고 누워서 올려다보는 잣나무들의 키는 족히 30미터는 넘어 보였다. 밑에서 올려다보아서일까. 숲에 붙박인 듯 누워 있는 그의 눈에는 잣나무의 힘이 왕성해 보였다. 짙푸르고 무성한 잎 때문이 아니었다. 잣나무는 어느 그루도 허리를 굽히지 않고 직선으로 곧게 뻗어올라가 있었다. 검은색에 가까운 나무껍질은 깊이가 있어 보이고 가지런하게 이어지는 곁가지들의 매무새는 단정했다. 가지마다 솔방울처럼 생긴 잣송이가 수두룩이 매달려 있었다. 그는 잣송이의 숫자를 세어보았다. 서른 몇까지 세었다가 잊어버리고 마흔 몇까지 세었다가 잊어버리고 다시 세기 시작했으나 그는 스물까지도 세지 못하고 방금 센 숫자가 몇이었는지 잊어버렸다. 잣송이 세기를 포기하고 저렇게 잣나무가 열매를 맺었으니 십이년 이상씩은 되었을 거라고 그는 생각했다. 무슨 생각이든 해야 한다고 그는 생각한다. 생각을 놓쳐서는 안된다고 그는 생각한다. 어디였던가. 일본의 아오모리였던가. 백두산이었나? 압록강 근처였는지도 모르겠다. 옛 동료들과 함께 갔던 그곳에는 높이 치솟은 잣나무 숲길이 있었다. 가문비나무도 섞여 있었는데 눈부시게 아름다운 숲이었다. 버스 안에 있던 사람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모두들 버스에서 내리고 싶어 차를 세워달라고 했다. 예정에 없던 일이었다. 기사에게 잣나무숲이 끝나는 곳에 버스를 세우고 기다리라고 했다. 그들은 걸어서 가겠노라고. 모두들 그걸 희망할 만큼 잣나무의 쭉 뻗은 몸과 푸르디푸른 잎은 늠름하고 아름다웠다. 버스에서 내리지 않은 사람은 그뿐이었다. 그는 전날 마신 술 때문에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 그를 태우고 버스는 울창한 잣나무 숲속을 내달렸다. 훈련된 원숭이들이 높은 곳에 매달린 잣송이들을 따고 있는 풍경이 휙휙 스쳐지나갔다. 잣송이를 채취하는 원숭이들은 노련했다. 싱그럽고 짙푸른 잣나무 사이를 가볍게 옮겨다니며 잣송이들을 툭툭 잘도 따냈다. 원숭이가 아니면 누가 저 높다란 잣나무에 달린 잣을 따낼 수 있겠는가. 그는 인간이 위대하게 느껴졌다. 인간과 다른 종인 원숭이의 특질을 이용해 잣을 따는 데 부려먹다니. 이십여분쯤 후에 다시 버스 안으로 몰려든 사람들 중 누군가가 그랬다. 아오모리인지 백두산인지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가을이 지나고 십일월쯤에는 상아색 잣이 빼곡히 들어찬 잣송이를 실컷 따 방 안에 고구마처럼 쟁여놓고 겨우내 잣을 까먹으며 보낸다고. 국도변 풀숲에 홀로 버려진 그는 잣나무 잎이 저렇게 진한 푸른색이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 잣나무 잎들은 너무 짙푸르러 야성미가 넘쳐흐른다. 잣나무들을 올려다보고 있던 그의 눈이 한순간 흔들렸다. 여기서 빠져나갈 수만 있다면 그도 그래보고 싶어졌다. 그저 잣송이를 방 안 가득히 쌓아놓고 오로지 그걸 까먹으며 한겨울을 보내보고 싶다는 욕망이 들불처럼 일어났다. 이 상황에서 벗어나기만 한다면 무엇이든 다 견뎌낼 수 있을 것 같다. 아무것도 먹지 않고 그저 잣 속에 들어 있는 단백질과 유지방으로 한겨울의 추위 또한 거뜬히 이겨낼 수 있을 것도 같다.

잣나무에서 떨어진 잣송이가 그의 얼굴을 때리고는 밑으로 굴러내렸다. 그는 눈을 번쩍 떴다. 우둘투둘한 잣송이에 얻어맞은 뺨이 파인 듯 아팠다. 이제 해가 지고 밤이 오려는 모양으로 높이 치솟은 잣나무들 사이로 어둠이 깃들이고 있었다. 그는 나뭇가지 사이로 깃들이는 어둠을 응시했다. 여지껏 이렇게 사방이 어두워지는 세상을 응시해본 적이 있었던가. 언제나 무엇엔가 골몰해 있다보면 어느덧 세상은 어두워져 있었다. 그가 살고 있는 도시는 어둠이 내려앉을 틈도 없이 곧 상점이나 가로등의 불이 켜졌다. 해가 저물기도 전에 자동차 헤드라이트에 불을 넣고 다니는 사람이 허다했다. 그는 지금 저렇게 서서히 주변의 빛을 밀어내며 물처럼 밀려오는 어둠보다는 인공불빛에 익숙했다. 어쩌다 23층에 있는 사무실에서 블라인드를 들추고 바깥을 내다보면 셀 수 없이 많은 불빛들이 무리지어 그의 눈 안으로 쏟아져들어오곤 했다. 그럴 때면 그는 눈을 지그시 한번 감았다가 뜨곤 했다. 불빛들이 나방이들처럼 그를 향해 일제히 날아들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지금 숲속에 버려진 채 혼자 어둠이 내리는 걸 지켜보는 그의 눈은 주인을 응시하는 개의 눈처럼 사무친 눈이다. 잣나무 사이로 밀려들어오는 어스름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마치 어스름이 따뜻한 휘장처럼 그를 덮어줄지도 모른다고 여기는 눈빛이다. 그는 다시 한번 소리를 내질렀다. 아무도 없어요? 아무도 없어요! 그는 힘껏 소리를 내지르나 이미 다친 그의 성대는 소리를 제대로 내보질 못하고 웅웅거릴 뿐이다.

아내의 왼손이 식탁 위에서 꽃게를 쓰윽 집어가던 일은 그후에 벌어진 일에 비하면 귀여운 행동이었다. 아내가 캄파뉼라가 자라고 있는 화분에 물을 주고 있는 동안 아내의 왼손은 어느새 분홍색 꽃들을 잡아당겨 이겨놓곤 했다. 아내가 냉장고 문을 닫고 돌아서기도 전에 아내의 왼손은 또다시 열어놓기 일쑤였다. 그 정도는 점점 더 심해져서 나중엔 전등 스위치를 끄기 위해서 삼십분씩 실랑이를 벌일 때도 있었다. 오른손이 스위치를 내리고 몸을 돌리기 무섭게 왼손이 다시 올려놓는 것이었다. 화가 난 아내가 얼굴을 붉히며 왼손을 때리면 이제 왼손은 오른손을 피하기까지 했다. 아내는 눈을 감고도 척척 해내던 일상생활을 점점 할 수가 없게 되었다. 마트에 가면 아내의 왼손은 아내가 잘 알지도 못하는 물건들을 집어들어 밀차에 실었다. 계산대에서 계산을 하려고 보면 예쁘기만 하고 쓸데는 적은 바구니며, 배드민턴 채, 농구공 따위가 나왔다. 길을 가다가 뺨이 통통한 어린아이를 만나면 어느새 아내의 왼손이 쓰윽 나가 아이의 뺨을 꼬집었다. 옷장 문을 열고 입을 옷을 꺼내면 아내의 왼손은 다른 옷을 얼른 집어들었다. 사람들은 아내가 장난을 치는 거라고 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고. 그도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그러나 아내가 무엇 때문에 그런 장난을 친단 말인가. 그가 아내에게 병원에 한번 가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했을 때 아내의 왼손이 그의 뺨을 향해 올라왔다. 한대 치려는 포즈였다. 다급히 아내는 오른손으로 왼손을 꾹 누른 채 그를 쓸쓸한 눈으로 바라보며 “글쎄, 외과를 가야 하나 내과를 가야 하나……” 말을 흐렸다. 언젠가 육십만이천원인 팩시밀리 가격을 담당자의 실수로 육만이백원으로 상품정보란에 올려놓은 적이 있었다. 책정된 가격에서 0을 하나 빼먹은 것이다. 쇼핑몰의 정보는 에누리닷컴이나 다른 검색라인을 통해 삽시간에 퍼지게 되어 있었다. 같은 물건인데 어느 싸이트에서는 얼마에 팔고 또 어느 싸이트에서는 얼마에 파는지 비교해주는 곳이 인터넷 안에는 무수히 많았다. 육십만이천원의 상품이 육만이백원으로 책정되어 있었으니 그날 밤 팩시밀리 가격은 그들의 정보망에 가장 큰 뉴스거리로 포착되었다. 표기를 잘못한 정보가 유통된 지 하룻밤 사이에 주문이 백대가 넘게 들어와 있었다. 잘못된 것이지만 모두들 잠든 밤에 이미 고객과의 계약은 이루어져 있었다. 그러나 육십만이천원인 팩시밀리를 육만이백원에 팔 수는 없는 일이었다. 상품을 댄 업체에서는 만약 뉴스라도 타게 되면 이미지에 타격을 입는다고 불평이 대단했다. 위약금 10프로를 물고라도 계약을 파기하자는 쪽으로 의견을 모았다. 고객만족센터에서 백명이 넘는 고객에게 일일이 전화를 걸기가 벅차 온 직원이 전화걸기에 매달렸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뭔가 좀 이상했다는 반응을 보이며 이해를 해주었으나 그중 얼마는 사장을 바꾸라, 소비자보호원으로 넘기겠다,며 클레임을 강하게 걸어왔다. 그 일을 처리하느라 시달리다 사흘 만에 집에 들어간 날이었다. 아내는 여느날과 마찬가지로 별말 없이 현관문을 따주었는데 그가 안으로 들어서자 아내의 왼손이 그의 뺨을 후려쳤다. 당황한 아내의 오른손이 얼른 왼손을 붙잡았으나 오른손이 제지할 수가 없을 만큼 왼손의 힘이 셌다. 그는 거실에 들어서지도 못한 채 현관에서 아내의 왼손에 뺨을 두 차례나 더 얻어맞았다. 평소의 아내의 힘이라고 믿을 수가 없을 정도로 강도가 셌다. 물리적인 아픔도 아픔이었지만 아내에게 뺨을 얻어맞았다는 수치심이 불끈 치솟아 그는 아무 말도 못하고 아내를 노려보았다. 당황한 아내는 눈물을 글썽이며 집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그의 뺨은 아내의 왼손자국이 붉게 찍히며 부풀어올랐다. 놀이터에서 찾아낸 아내는 자신의 왼손이 밉고 잘라내버리고 싶다며 울었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아내의 왼손은 이후로 걸핏하면 그에게 달려들었다. 그는 이를 닦다가도 얻어맞았고 밥을 먹다가도 얻어맞았다. 그는 점차 아내를 보면 피하는 자세를 취하게 되었다. 서로 민망한 일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남편에게 폭력을 휘두르게 된 아내는 그가 집에 들어오는 날은 다른 방에서 혼자 잤다. 결국 아내는 그가 일 때문에 바빠서 집에 들어오지 못하는 날도 혼자 잤고 그가 집에 들어오는 날도 잠자는 그의 뺨을 한밤중에 후려치는 자신의 왼손 때문에 또 혼자 잤다.

몸이 으스스 추워지기 시작한다. 추위를 느끼자 잣나무 사이로 밀려들어오는 어둠을 응시하던 그의 눈에 불안이 실리기 시작했다. 밤이 깊어지면 이 숲속의 기온은 뚝 떨어질 것이다. 잠이 든 채로 다시 깨어나지 못할 수도 있다. 대체 내가 몰던 차는 어떻게 된 거지? 그는 자동차 생각을 했다. 사고가 난 지점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추락해 사람들이 자동차만 발견하고 그를 발견하지 못한 것인가.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아내의 왼손이 하는 일을 지켜본 이후로는 무슨 일이든 있을 수 있다고 믿게 되었다. 겨우겨우 고개를 돌려서 주위를 살펴보지만 사고차량 같은 건 눈에 띄지 않는다. 자동차의 잔해조차도. 그는 자신이 마치 사체처럼 버려져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 그의 등뼈를 둔중한 것으로 내리친 후 죽었다고 믿고 그를 이 풀숲에 버렸는데 다 죽지 못해 뒤늦게 깨어난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어떻게 이렇게 감쪽같이 혼자만 버려져 있단 말인지. 아내가 자신의 왼손을 바라보는 기분도 이런 것일까. 아내의 왼손의 횡포가 심해질수록 그는 상품정보 속으로 파고들었다. 어떻게 하면 매출구조가 수익구조로 바뀔 수 있는지만 생각했다. 처음엔 상품이 중국에서 저가로 수입해온 것들로 이루어졌으나 그는 인터넷 쇼핑몰도 브랜드 중심으로 바뀌어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오너는 그의 의견에 동의해주었다. 그의 생각은 얼마 지나지 않아 현실로 드러났다. 이제 고객들은 이딸리아나 빠리에서 들여오는 화장품이나 의류, 가방이나 신발 들을 저가에 구매할 수 있는 방법으로 인터넷 쇼핑몰을 이용했다. 그로 인해 한발 앞서 명품들을 싸이트에 올려놓았던 예티클럽은 명품 쇼핑몰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시중에서 아무리 저렴해도 한장에 육칠만원씩 하는 폴로티가 배송비까지 포함해서 이만원 안쪽이면 집까지 배달되었으니 사람들의 구미에 맞는 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뻣뻣한 목을 가로저어보았다. 회한이 스쳐지나갔다. 그가 고객들의 구미에 맞춰 상품을 개발해나가는 동안 아내는 점점 힘이 세지는 왼손을 오른손으로 저지하며 혼자 지냈다. 어느날 아내가 거실 소파에 앉아 있는 그에게 “내 왼손은 외계인손증후군이래요” 하고 말했다. 아내가 그렇게 말할 때 아내의 왼손은 잠잠했다. 그는 아내의 말을 한번에 알아듣질 못해 “뭐라구?” 되물었다. “외계인손증후군요.” 다시 대답하는 아내는 시무룩했다. “그러니까 당신 왼손이 외계인이라는 거야?” 되묻자 아내는 싱겁게 웃기까지 했다. 아내의 웃음을 보자 그는 아내를 치료해줘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못하고 별 희한한…… 하고 비아냥거리는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치료법은 없느냐고 묻지조차 않았다. 아내의 왼손은 걸핏하면 저지할 수 없는 힘으로 그의 뺨을 쳤다. 조심하고 있다가도 한번씩 얻어맞고 나면 얼마나 수치스럽고 황당한지 그는 할말을 잃었다. 그렇다고 쩔쩔매는 아내를 상대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는 아내의 왼손에 얻어맞고 나면 열흘씩 보름씩 집에 들어가지 않았다. 사무실에 아예 야전침대를 구해놓고 그곳에서 자고 깨어났다. 아내는 이틀에 한번 꼴로 그의 옷가지들을 들고 와 경비실에 맡겨놓고 돌아가며 전화를 걸어 “미안해요” 하고 말하곤 했다. 아내가 차라리 어머니처럼 위암에 걸렸다고 한다면 암이라는 존재가 어떤지 알기는 하니까 대책을 세웠을지 모른다. 그러나 평소에는 아무렇지도 않다가 불쑥불쑥 제멋대로 구는 아내의 왼손에 그는 분노가 치밀었다.

어떻게라도 자신의 육체가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은 그는 어둠속에서 손가락을 움직여봤다. 신발이 벗겨진 왼쪽 발가락도 움직여봤다. 처음 얼마간은 공포와 두려움에 질려 배고픈 줄을 모르겠더니 이윽고 허기까지 몰려왔다. 침을 삼키는데 핏덩이가 느껴졌다. 그는 고개를 돌려 입에 닿는 대로 풀 잎사귀를 뜯어 씹어봤다. 흙먼지와 함께 씁씁한 맛이 입 안에 차올랐다. 아내가 만들어주던 따뜻한 음식들. 아욱국이나 두부젓국찌개나 갈치구이나 참나물무침 들. 그는 새삼 아내가 만들어준 음식들이 간이 잘 맞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맛있다고 말해본 적이 있었던가? 그렇게 말해본 기억이 없다. 식탁에서 가끔 아내가 “당신은 진짜 찍새인가봐요!” 했던 말이 무슨 뜻이었는지 그는 문득 깨달았다. 어느날 아내는 그에게 전화를 걸어 그를 다급히 찾았다. “집에 좀 와줘요, 와줘요” 아내는 무슨 일이 있느냐고 그가 물을 틈도 없이 “제발 좀 와줘요” 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그가 갔을 때 집은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화병이 깨지고 벽에 걸린 액자가 내던져지고 신발장의 신발들이 죄다 거실에 내팽개쳐져 있는가 하면 부엌에는 접시며 공기 들이 산산조각이 나 있고 수저통은 뒤집어져 있었으며 바닥에는 숟가락이며 젓가락 들 냄비며 프라이팬 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맥주잔이며 포도주잔 들은 단박에 깨져버린 모양으로 발디딜 틈도 없이 유리조각투성이였다. 그러고도 모자라 아내의 왼손은 커튼을 찢으려 하고 있었다. 아내는 왼손의 완력에 이끌려다니며 “제발 이러지 마, 이러지 마” 마치 정신이 나간 자매를 달래기나 하는 양 왼손을 향해 “이러지 마”라고 외치며 오른손으로 찍어누른 채 통사정을 하고 있었다. “여보, 나 좀 어떻게 해줘요.” 그가 들어서자 아내는 공포에 질린 목소리를 냈다. 그는 두리번거리다가 반쯤 깨진 꽃병을 집어 아내의 왼손을 향해 내리쳤다. 그제서야 아내의 왼손은 잠잠해졌다. 붉은 피가 아내의 팔뚝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날 밤에 아내와 함께 잠자리에 든 것이 또 사단을 불러일으켰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으나 깨진 꽃병으로 아내의 왼손을 내리친 그였다. 그동안 아내의 왼손에 수차례 뺨을 얻어맞았으나 그가 아내처럼 피를 흘린 건 아니었다. 그는 아내를 병원에 데려가 손을 치료하고 아내의 왼손이 난동을 부려놓은 집 안을 치우고 오랜만에 아내와 함께 저녁을 먹고 텔레비전도 보고 잠자리에 함께 들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평화였다. 아내는 그동안 자신의 왼손에 수차례 강타당한 그의 뺨을 어루만지며 그의 품을 파고들었다. 그러나 그가 계속 아내의 왼손을 의식하고 있었던 때문인지 아내와의 관계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한밤중에 그는 답답함에 눈을 떴다. 아내의 왼손이 그의 목을 조르고 있었다. 아내는 땀과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하고 한사코 그의 목에서 왼손을 풀어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가만 있다간 아내의 왼손에 목이 졸려 죽을 것 같았다. 잠이 완전히 깬 그는 두 손으로 아내의 왼손을 밀쳐냈다. 아내는 침대 밑으로 나동그라졌다. 아내는 절규했고 그는 그길로 옷을 입고 나와 사무실로 가버렸다.

그는 차가운 가을밤 잣나무숲에 퍼지고 있는 밤의 냄새를 깊이 들이마셨다. 밤공기 속에는 가을산에 질펀한 용담이나 마타리 뚜깔의 신선한 냄새가 섞여 있었다. 제4의 시장이라고 불리는 인터넷 쇼핑몰은 하루 이십사시간 문닫는 때가 없었다. 언제나 눈을 부릅뜨고 있는 형국이었다. 할인점이 백화점 매출을 넘어섰듯이 이제 얼마 지나지 않아 방문객 중심의 소매타운의 매출액을 인터넷 쇼핑몰이 앞서리라고 그는 판단했다. 그 자신이 쏘씽한 상품이 그의 생각대로 매출을 올리는 데서 그는 뿌듯한 성취감을 느꼈다. 인터넷 포털싸이트를 개설할 꿈을 꾸고 있던 그는 상품을 쏘씽하는 데만 그치지 않고 그와 연계된 다른 상품을 개발해보도록 업체에 권유하는 일도 잊지 않았다. 그 하나하나가 인터넷 시장을 읽는 체험이 되곤 했다. 문득 이 가을밤의 냄새를 리빙상품과 접목시킬 수 있다면 당장 시장에 신선한 바람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 거란 생각을 하다가 그는 허탈해졌다. 여기에서 살아나갈 수 있을지도 모르는 상황에…… 그는 자신이 한심하게 여겨졌다. 태희의 말처럼 인터넷 쇼핑몰이라는 블랙홀에 빠져 세상과 단절되어가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내에게 목이 졸리던 날 밤 절규하는 아내를 두고 사무실에 나온 그는 눈이 벌게진 채 날이 밝을 때까지 의자에 앉아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아내의 왼손에 짓눌린 목을 어루만졌다. 그는 인터넷을 접속시키고 검색란에 외계인손증후군이라고 쳐넣은 뒤 클릭을 해보았다. 검색내용이 없습니다,라는 문구가 떠올랐다. 다음날 오전에 그는 고등학교 동창생 중에 신경정신과 의사가 있다는 것을 기억해내고는 그의 전화번호를 수소문해 전화를 걸어보았다. 별로 친하게 지낸 사이가 아니었으므로 동창생은 뜨악하게 전화를 받다가 그가 혹시 외계인손증후군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느냐 물으니 “뭐 외계인이라구?” 하다가는 “아, 에일리언 핸드 씬드롬을 말하는 거야?” 되물었다. 그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에일리언? “근데 그건 왜 물어?” 싱겁게 전화를 받던 동창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누가 그 병이라도 걸렸대?” “아니야, 그냥 좀 알고 싶어서……” 동창은 잠시 “그러니까……” 하면서 말을 끌었다. “외국에는 몇몇 사례가 있는 모양인데 우리나라엔 글쎄…… 의학적으로 결론난 건 없는데 뇌의 손상과 관련이 있다는 설이 있어. 외국 사례로는 간질환자 중 일부가 뇌수술 후유증으로 그런 증세를 발작적으로 일으키기도 한다고 하는데, 뇌경색 환자에게서도 발견되는 모양이고…… 그러나 객관적으로 결론이 난 얘기는 아니야. 하도 희귀한 경우라서, 글쎄…… 어떻게 말해야 될지 나도 잘 모르겠군. 한쪽 손이 말을 안 듣기도 하고 양손 다 통제에서 벗어나는 경우도 있다고 하는데, 그러니까 손 주인의 의도와는 다르게 행동하는 거지. 그런데 왜 그러나? 네가 혹시?” “나는 아니고……” “그럼 주변에 누가 그런 사람이 있단 말인가?” 그는 동창의 질문을 피한 채 치료법은 없느냐 물었다. “앞서 말했듯이 객관적으로 결론이 난 게 없어서 특별한 치료법은 없어. 자기 암시 같은 심리클리닉을 통해 빈도를 덜하게 하는 정도지. 나도 그 정도밖에 모르네. 그 정도밖에 알려져 있지 않기도 하고…… 혹시 모르니 좀더 알아봐줄까?” 아니,라고 대답하는 그에게 동창은 “주변에 누군가 그런 병을 앓고 있으면 날 찾아오게. 에일리언 덕에 네 얼굴이나 보게” 농을 건네며 전화를 끊었다. 며칠 후에 집에 가보니 아내는 없었다. 빈집의 문을 따고 안으로 들어가보니 “팔을 잘라버리고 싶어요”라는 메모가 식탁에 놓여 있었다. 아마도 그날 밤 그길로 아내는 제천의 처가에 내려간 모양이었다. 그곳에서의 아내의 왼손은 잠잠했다. 뿐인가, 이따금 아내의 왼손은 장모가 기르고 있는 두릅나무들을 정겹게 쓰다듬기조차 하는 모양이었다. 괜찮아졌는가 싶어 아내가 다시 그에게로 돌아오면 아내의 왼손은 다시 발작을 일으켰다. 서너 번 장모와 그 사이를 내왕하던 아내는 결국 제천에 주저앉았다.

어머니가 세상을 뜬 후 집은 먼지의 움직임까지 느껴질 정도로 적막했다. 늘 어머니가 삐치거나 수선을 떨거나 옛날 이야기를 끝도 없이 늘어놓아 아내를 힘들게 한다고 생각했는데 그것만은 아니었는가보았다. 아내는 이따금 그에게 “당신 첫사랑은 어떤 사람이었어요?”라고 물었다. 그가 별대답 없이 얼버무리면 아내는 또 “맨 처음 사랑했던 동물이 뭔지 기억나요?” 하고 물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아내는 처음에 대해서 관심이 많았다. 첫사랑, 처음 가본 곳, 처음 맛있게 먹었던 음식, 비행기를 처음 봤을 때의 느낌들이 어떠했는지 이따금씩 물었다. 그는 그것들에 대해서 별로 할 말이 없었다. 초등학교 동창생, 군산, 잡채, 굉장히 큰 느낌. 그게 그의 답변이었다. 무얼 물어봐도 단답밖에 들을 수 없어서였는지 어느날부터 아내는 그런 질문조차도 하지 않았다. 그는 아내를 처음 만난 날을 기억해보려고 애썼다. 겨울날이었다. 그때는 단지 처음 보는 여자를 만나러 가려는 참인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이미 그전에 눈이 내려 여기저기 길이 엉망이었는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비가 내렸다. 그는 우산과 바바리 깃을 세워 차디찬 겨울비와 바람을 차단하며 길을 걸었다. 어머니의 성화에 못 이겨 맞선을 보러 가는 길이었다. 그가 사귀어온 여자들을 어머니는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허리가 너무 가늘다거나 붙임성이 없다거나가 이유였다. 귀한 대접을 받고 자란 집의 딸이라는 게 이유가 된 적도 있었다. 어머니가 트집을 잡아도 여자들이 먼저 떠나지 않았으면 그의 어머니는 그 여자들 중 한명쯤은 받아들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만난 여자들은 그의 어머니를 한번 만나고 나면 그까지 꺼리곤 했다. 그의 어머니에게서 여자들이 싫어하는 무슨 냄새가 나기라도 하는 모양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약속된 다방에 들어갔을 때 그의 바바리는 비에 젖어 있었다. 그는 잠시 젖은 바바리를 벗어서 들고 있어야 할지 어째야 할지 망설이다가 그대로 다방의자에 앉았다. 처음 본 아내는 눈썹이 짙고 그 아래의 눈이 동그랬다. 다방에 들어올 때는 작아 보였는데 맞은편 의자에 앉아 있을 땐 알맞아 보였다. 서 있을 때보다는 앉아 있을 때 키가 커 보이는 여자였다. 그는 처음 보는 여자와 모과차를 마셨다. 아내는 모과차가 담긴 도자기 찻잔을 두 손으로 감싸고서 차를 마셨다. 시린 손을 모과차에 맡기고 있는 모습이었다. 말없이 모과차를 마시고 그와 아내는 다방에서 나왔다. 그사이 날은 개어 있었다. 눈 내린 후 비가 내려 거리는 온통 질척거렸다. 그만 헤어져야 하는지, 영화라도 보러 가자고 해야 하는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그는 곤혹스러웠다. 아내를 만나러 간 제천에는 절이 하나 있었다. 가을날이면 단풍이 좋아 단풍축제가 열리곤 했다. 그때면 타지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단풍을 구경하러 오곤 했다. 그가 무심코 절에나 갈까요? 했더니 아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택시를 잡아타고 절이름을 대니 십분 만에 그들을 절 앞에 내려주었다. 일주문까지 걷는 길도 역시 질척거렸다. 길 양편으로 헐벗은 단풍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이미 지난가을 단풍든 잎사귀들을 떨어뜨린 메마른 단풍나무 가지에는 빗방울이 맺혀 있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걷다가 그의 어깨가 무심코 단풍나무를 건드리면 빗방울이 여자의 검은 머리 위로 후드득 떨어지곤 했다. 그때마다 여자의 입가에 번지는 미소 때문에 그는 아닌 척하며 자꾸만 단풍나무를 건드렸다. 아내를 처음 만나던 날 무슨 말인가를 더 나눴을 테지만 그에게 그날의 기억은 그것뿐이다. 그는 자꾸만 단풍나무를 건드렸고 나중에 아내가 된 여자는 자꾸만 머리로 얼굴로 튀는 빗방울을 닦아내었다.

밤새들이 지저귀는 소리에 그는 귀를 세웠다. 정신이 든 채로 숲속에서 밤을 보내자니 귀가 저절로 열렸다. 그의 귀는 도로 쪽에서 자동차들이 질주하는 소음 속에서도 그가 누워 있는 근처의 모든 소리를 놓치지 않고 듣고 있다. 거미가 기어와 그의 발목에 줄을 치는 소리, 그 위로 이슬이 맺히는 소리. 낮 내내 나뭇가지에서 잠을 잤을 올빼미가 잣나무를 옮겨다니는 소리, 그를 내려다보며 발톱을 오므리는 소리, 들쥐들이 잽싸게 풀숲을 헤치고 도로 쪽으로 내빼는 소리. 그는 소리들을 듣기 위해 눈을 감았다. 잠들어서는 안된다는 강박증 때문에 귀는 더욱 예민해졌다. 이 밤을 무사히 보낼 수 있을지. 밤새 소리들은 딱딱딱거리는 것도 같고 찌찌찌거리는 것도 같고 초로로로거리는 것도 같다. 다른 때보다 수십배는 예민해진 그의 귀는 비슷하게 느껴지는 새소리들도 구분해내었다. 귀로 모든 소리를 듣고 있던 그는 후딱 눈을 떴다. 어머니의 기척이 느껴졌다. 이미 흙으로 돌아간 어머니의 손과 발이 꿈틀거리며 나무뿌리들을 헤치고 기어올라와 그를 일으켜세우는 듯했다. 어머니는 죽음을 세 시간 앞두고도 살아야겠다는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호흡이 가빠지고 몸속에서 물이 다 빠져나간 상태에서도 어머니는 아내에게 가제수건에 물을 묻혀 혀를 적시게 했다. 말을 할 수 있는 상태가 되면 다른 병원으로 옮기겠다며 입에 담을 수 없는 담당의사의 욕을 해대었다. 뼈에 살가죽만 남아 있는 어머니의 메마른 육체를 보는 것은 고통이었다. 검은 동굴처럼 뚫려 있던 어머니의 두 눈은 임종하는 그 순간에도 내일 아침 태양을 다시 볼 수 있다는 걸 의심하지 않았다. 어둠속에서 새들이 푸드덕거리며 나무 사이를 날아다니고 있다. 동고비일까? 잣나무 줄기에 거꾸로 매달려 있는 새 한마리가 달빛에 비쳐 그의 시야에 잡혔다. 머리나 날개나 꼬리가 푸르스름하고 가슴이며 배에 붉은빛이 스쳐 있다. 계속 내리고 있는 이슬에 온몸이 축축이 젖어가는 그를 향해 동고비는 거꾸로 매달려 있다. 새와 그의 눈이 딱 마주쳤다. 밤이 어떻게 오는지를 보았듯이 아침이 어떻게 오는지를 볼 수 있을까. 그럴 수 있을까. 새를 보는 그의 눈이 간절해졌다.

아내를 세 번 만나고 그가 청혼했을 때 아내는 그 자리에서 고개를 숙인 채 “네” 그랬다. 그로서는 너무나 뜻밖의 대답이었다. 거절당하지는 않을 것 같았으니 청혼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생각해보겠다거나 상의해보겠다라는 말도 없이 아니 잠시 머뭇거리는 기척도 없이 결혼하자는 말에 여자가 바로 네, 하고 나올 줄은 그는 짐작도 못했다. 손을 잡기도 전이고 영화를 보기도 전이고 약속시간에 늦어보기도 전이니 당연히 술을 같이 마셔보거나 기차를 함께 타보기도 전이었다. 여자가 어떤 영화배우를 좋아하는지, 여자가 싫어하는 음식은 무엇인지, 여자가 좋아하는 짐승은 무엇인지 알기도 전이었다. 그런 것들을 알기도 전에 결혼을 했는데 그는 아직도 아내가 무엇을 하고 싶어하는지 무슨 냄새에 이끌리는지를 알지 못했다. 어둠속 새의 눈을 응시하고 있는 그의 눈이 흔들렸다. 여태 그 누구도 어머니마저도 무슨 일에 그렇게 단번에 네, 해주었던 사람이 없었다는 것을 그는 새삼스럽게 깨닫는다. 그 자신 또한 다른 사람에게 그렇게 단번에 네, 하고 대답했던 적이 없었다는 것도. 함께 일하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어머니에게도 태희에게도 그리고 아내에게도. 대답을 해야 할 때면 그는 늘 머뭇거렸다. 특히 네,라고 긍정을 할 때에는 이유를 붙이고 단서를 단 후에 그리했다. 그런 그로서는 아내가 그의 청혼에 네, 하고 단숨에 대답했을 때 기뻤다기보다는 허탈할 지경이었다. 신혼여행때던가, 그가 아내에게 아무리 결혼을 하잔다고 그 자리에서 네, 할 수가 있느냐 물은 기억이 났다. 처음 만났을 때 아내는 그의 바바리를 보고 이미 마음을 정했다고 했다. 바바리? 비에 젖어서? 아니라고 했다. 이미 가을이 지나 겨울인데 홑겹의 바바리를 입고 있는 그가 몹시 추워 보였다고 했다. 게다가 위에서 세번째의 단추가 떨어지려고 대롱거리고 있었다고. 아내는 그날 내내 그 단추가 정말 떨어질까봐 걱정이었다고 했다. 그랬던가. 그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를 모르겠어서 그저 단풍나무 잎 위에 얹어진 빗방울을 떨어뜨리느라 여념이 없었을 때 아내는 그의 바바리에 붙어 있는 세번째 단추를 주시하고 있었던가. 그는 잠깐 자신의 처지를 잊고 숲의 냄새 속에서 빙그레 미소지었다.

달이 지나간다, 그는 배고픔과 추위를 참으려 어둠속에서 웅얼거렸다. 생각 없이 늑대가 지나간다,라고도 웅얼거렸다. 늑대는 지나가지만 표범이며 호랑이며 사자 같은 맹수들은 아름드리 잣나무 한그루씩을 차지하고 앉아 아무도 없는 숲속에 내팽개쳐져 있는 그를 구경하고 있는 듯했다. 맹수들은 낮에는 자고 밤에 움직인다. 신혼여행을 갔던 싱가포르의 어느 강가에 동물원이 있었다. 동물원의 규모는 짐작할 수도 없이 넓어서 밀림이 펼쳐진 듯했다. 동물들의 울이 어디서 어디까지인지 알 수가 없었다. 산굽이를 돌아야 코알라를 볼 수 있었고, 다시 십여분을 걸어야 코끼리를 만날 수 있었다. 낮의 동물원 물속에는 겨우 작은 뱀들이나 오리가 기어다니거나 떠 있고 나무 위에는 크지 않은 새들이 깃질을 했다. 그들은 동물원이 크기만 하지 동물이 별로 없다는 얘기를 나누었다. 그래도 숲이 좋아 낮 내내 동물원에 있었다. 표를 끊을 때는 몰랐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표 한장으로 낮과 밤 어느때나 동물원에 입장할 수 있었다. 밤이 되어 다시 동물원에 들어갔을 때 그들의 눈은 휘둥그레졌다. 낮에 보았던 동물원이 아니었던 것이다. 태양이 밝게 비치던 낮의 동물원에서 평화롭게 놀던 동물들은 어둠속 어디에 있는지 눈에 띄지가 않았다. 대신 어둠과 달빛이 내린 검은 바위 위에 표범이 뱃구레를 내보이며 앉아 있었다. 매와 독수리가 어둠속을 유영했다. 컴컴한 나무숲 속에선 이빨을 드러낸 호랑이가 울부짖는가 하면 달빛을 받으며 늑대가 흰 바위 위로 올라갔다. 조명을 받은 사자는 갈기와 앞발을 세우고 물가에 엎드려 있었다. 어두운 물속에는 크기를 알 수 없는 뱀들이 소리를 내지 않고 기어다녔다. 맹수들이 어둠과 함께 모습을 드러내자 낮에 나와 있던 순한 동물들이 모두 자취를 감추었다. 나뭇가지나 굴 속에 들어가 숨을 죽이고 있을 것이었다. 여기엔 맹수는 없어, 그는 두려움을 밀어내며 웅얼거렸다. 맹수가 있다면 저 새들이 저리 퍼득거리겠는가, 웅얼거릴 뿐인데 이가 딱딱 마주칠 정도로 추위가 느껴졌다. 잠이 들면 끝장이야, 그는 또 웅얼거렸다. 입 안 어디에선가 계속 피가 흐르고 있는 모양이었다. 침을 삼키면 여전히 짭짤한 피맛이 돌았다. 그는 잠들지 않으려고 나무 사이로 엿보이는 달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달을 보는 것도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아내는 어느때든 하늘을 자주 올려다보았다. 아내가 “비가 오려나봐요” 혹은 “어마 달이 떴네요” 하면 그는 그제야 아내가 쳐다보는 하늘을 흘깃 한번 바라보곤 했다. 달이 저렇게 밝으니 분명 제천에서 아내도 달을 바라봤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지금 이 순간 저 달을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자 그의 마음이 일순 간절해졌다. 다시 아내와 함께 달을 볼 수 있는 날이 올까. 오늘밤 이 잣나무숲에서 올려다본 달에 대해서 아내에게 얘기해줄 수 있을까. 달을 스치고 지나가는 저 밤구름에 대해서, 어딘가 물이 많은 곳으로 흘러가고 있을 것 같은 저 느릿한 달의 움직임에 대해서. 노란 달빛 때문인지 밤은 어둡지 않았다. 야성적인 잣나무의 푸른 빛깔조차도 그대로 그의 눈에 들어왔다. 다시 아내를 볼 수 있다면 어느해 십일월쯤엔 아내와 함께 이 숲속으로 잣송이를 주우러 와야지, 그는 생각했다. 무심코 아내의 왼손이 잣을 까고 싶어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던 그의 눈이 반짝 흔들렸다. 언젠가 태희의 목에 둘러진 분홍빛 스카프를 슬쩍 풀어가던 아내의 왼손을 보고 태희가 그랬다. “오빠, 올케의 왼손이 사실은 오빠에게 하고 싶은 올케의 말을 대신하고 있는 거 아니야?” 그가 무슨 엉뚱한 말이냐는 듯 태희를 보자 스카프를 아내의 왼손에게 뺏긴 태희는 “나도 이런 스카프 갖고 싶어요…… 뭐 그런 말 아니냐구?” 하고 덧붙였다. 그때는 짜증스럽게만 들렸던 태희의 말이 눈덩이처럼 불어 그의 가슴을 짓눌렀다. 태희 그애는 그에게 이천만원을 빌려 방을 얻어 독립을 한 후 그 이천만원을 갚기 위해 이년 동안 월급의 80프로를 꼬박 적금들었다고 했다. 내가 빚지고는 못살잖아. 어머니에게서 많이 듣던 소리였다. 태희가 적금을 찾아 빌린 돈을 가지고 왔을 때 그는 그걸 받아 예금을 들어놓았다. 태희가 결혼이라도 하겠다고 하면 내줄 생각이었다. 인터넷 신문을 만들겠다고 투자금을 내놓을 때 그는 퇴직금과 태희에게서 받은 돈을 내놓았다. 곧 채워놓을 수 있다고 믿었으나 신문 일에서 손을 뗐을 때 태희의 그 돈도 날아갔다. 태희가 이년 동안 월급의 80프로를 모은 돈이었다는 생각이 왜 이제야 드는 걸까. 그는 아내에게 별다른 선물을 한 기억이 나질 않았다, 스카프도 목걸이도 신발도 가방도 구두도. 아내가 별다른 불만을 내색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그들 사이엔 그게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했다. 그는 어둠속의 잣나무를 올려다보며 아내는 무슨 옷을 입고 다녔는지, 어떤 구두를 신고 어떤 지갑을 들고 다녔는지 기억해보려고 애썼으나 허사였다. 그는 마음이 흔들렸다. 그런가. 아내의 왼손은 아내의 마음이기도 한 것인가. 아내가 차마 하지 못하는 말의 대신이기도? 마트에 가면 아내의 왼손이 밀차에 쓰윽 집어넣은 것들은 딸기도 아니고 세제도 아니고 시금치도 아니고 농구공이고 배드민턴 채였다. 아내는 농구를 하고 싶고 배드민턴도 치고 싶었던 것이었을까. 밤의 풀숲에 버려진 채 그는 처음으로 아내에 대한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는 아내의 첫사랑이 누구였는지, 꿈이 무엇이었는지, 담배는 피워본 적이 있는지, 무릎 밑의 흉터는 왜 생겼는지, 어머니에게 들었던 얘기 중 무엇이 가장 가슴에 남아 있는지, 지난날이 아니라 지금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맹렬히 궁금해졌다. 아내의 왼손이 하고 싶어하는 일이 따로 있었던 것일까. 아내의 왼손은 그의 뺨을 치고 목을 조르지만 장모가 기르고 있는 두릅나무는 정답게 쓰다듬곤 했다. 아내의 왼손이 다정하게 툭툭 치고 싶은 그런 것이 두릅나무말고 또 무엇이 있을까. 그는 여태 거꾸로 매달려 있는 동고비와 잣나무와 달을 향해 부릅뜨고 있던 눈을 감았다. 그게 무엇인지 알아낼 수 있는 기회가 나에게 오기는 올까? 풀숲 저편 국도를 달리던 차 소리도 끊기고 일순 사방이 적막했다. 풀잎 하나가 그의 손등을 간질였다. 바람이, 아주 미약한 바람이 버려져 있는 그의 몸을 스치고 지나갔다. 깊은 어둠 저편 웅크리고 있던 검은 짐승들이 천천히 몸을 일으켜 그에게 다가오는 기척이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