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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이가림 李嘉林
1943년 만주 출생. 196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빙하기』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순간의 거울』 『내 마음의 협궤열차』 등이 있음. 188267@inha.ac.kr
그 여름의 미황사
내리쳐도 내리쳐도
한사코 솟구쳐나오는 머리통을
그 어떤 도끼로도 박살낼 수가 없었나보다
짙푸른 구곡(九曲) 병풍으로 둘러선
산등성이마다
잘생긴 달마들 기웃기웃 서서
동백꽃들 벙근 젖가슴을 보느라
회동그란 눈에
불이 붙어 있었네
영문 모르고
여름 한문 외우기 공부에 붙들려온
땅강아지 같은 아이들
돌담 너머 뙤약볕에 익어가는 까마중에만
한눈 팔려
생각 사(思)자에 마음(心)이
하나같이 떨어져나가고 없었네
허허, 달마산이 바로 절간이거늘
미련한 중생들은 무엇하러 빈 법당에서 빌고 있는가,
한마디 내뱉고 싶어 죽겠는 건달 나그네
일찌감치 절마당에서 빠져나와
풀숲을 휘젓는데
암여치 한 마리 숫여치를 엎고 나는
그 숨가쁜 활공(滑空)의 순간의 사랑
대낮 무지개를 그리고 있었네
바람개비별 2
오늘 보았는데도
안 본 것같이
오늘 못 보았는데도
본 것같이
그대는 언제나
내 눈꺼풀 위에 서 있어
희한한 무중력의 허공을
걷게 하네
밤을 통하지 않고서는
낮을 볼 수 없는
이 찢겨진 비형(鼻荊)1의 슬픔을
부활절의 태양보다 더 따스한
빛의 옷으로 감싸주는
그대
오늘 보았는데도
안 본 것같이
오늘 못 보았는데도
본 것같이
한발짝 한발짝
생의 비밀을 만들어가는
눈시린 만남의 기적
새겨지네
순간의 거울 10
호수
물고기가 달을 껴안고
몸부림치는지
달이 물고기를 껴안고
몸부림치는지
호수 이불이 한번 들썩 솟구쳤다
내려앉으니
벌거벗은 우주의 밤이 온통
하얗게 뒤집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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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국유사』의 「도화녀(桃花女)와 비형랑(鼻荊郞)」 편에 나오는 진평대왕 시절의 인물로, 왕이 용사 50명을 시켜서 지키도록 했으나 밤마다 성 밖으로 멀리 도망가서 놀다가 새벽 종소리를 듣고서야 집으로 돌아왔다고 전해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