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소설

 

윤성희 尹成姬

1973년 경기도 수원 출생. 199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소설집 『레고로 만든 집』이 있음. hitchike@hanmail.net

 

 

 

유턴지점에 보물지도를 묻다

 

 

1

 

분만실 밖에서 아버지는 담배 한갑을 다 피웠다고 한다. 텔레비전에서는 한해가 저물어가는 거리 풍경을 보여주었다. 눈발이 흩날리고 있었다. 어머니는 여덟 시간째 진통중이었다. 아버지는 시계를 보면서 조금만 더 조금만 더,라고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아버지는 당신의 자식이 새해에 처음으로 태어나는 아이이길 바란다. 그러면 모든 행운이 자기에게로 몰려올 것만 같았다. 가게는 몇달째 적자를 보고 있었다. 겨울이 끝나려면 아직 멀었는데 연탄은 몇장밖에 남지 않았다. 때마침 산부인과에서는 새해 첫아이가 이 병원에서 태어날 경우 소아과를 무료로 이용할 수 있도록 해준다고 했다. 12월 31일 11시 34분에 언니가 태어났다. 30분만 늦게 나왔으면 좋았을걸…… 아버지가 간호사에게 말했다. 그러자 간호사가 이렇게 대답했다. 걱정 마세요. 뱃속에 아직 한명이 더 있거든요. 그 이야기를 들은 아버지는 시계를 보면서 조금만 빨리,라고 외쳤다. 1월 1일 0시 31분에 내가 태어났다. 30분만 빨리 나왔으면 좋았을걸 그랬죠? 이번에는 간호사가 아버지에게 말했다.

어머니는 곧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아버지는 산소호흡기를 낀 어머니의 머리맡에 앉아서 어린시절에 대해 이야기했다. 할아버지는 D시에서 꽤 유명한 나이트클럽의 사장이었다. 할아버지의 교육철학은 오직 한가지였다. 강한 정신력! 할아버지는 한때 D시를 떠들썩하게 만든 유도선수이기도 했다.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뜻에 따라 유도, 태권도, 검도를 배웠다. 여덟달 만에 태어나 온갖 잔병치레를 하며 자라온 아버지에게 운동은 벅찼다. 운동의 강도가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아버지는 점점 말더듬이가 되었다. 이상하게도 아버지의 얼굴만 보면 입이 딱 붙어버리는 거야. 그래도 마지막 말은 제대로 했어. 전 이제 집을 나가겠어요,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거예요,라고. 한번도 더듬거리지 않고 말했어. 아버지는 어머니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어머니는 당신이 낳은 두 딸을 안아보지 못했다. 장례식이 끝나자, 아버지는 언니를 업고 나를 안은 채 고향으로 향했다. 집을 떠난 지 10년 만이었다. 할아버지는 여전히 나이트클럽의 사장이었다.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이번에도 아버지는 더듬지 않고 말했다. 할아버지는 어린 두 손녀를 양쪽 허벅지에 올려놓았다. 나와 언니는 동시에 똥을 쌌고 동시에 울었다. 아이들의 울음소리를 유난히 싫어했던 할아버지는 예전에 사귀던 술집 마담에게 선물하기 위해 사둔 아파트의 열쇠를 아버지에게 주면서 말했다. 나가 살거라. 할아버지는 돌아가시는 그날까지도 나와 언니를 구별하지 못했다.

 

아버지는 늘 바빴다. 매일 할아버지에게 가서 전날의 영업실적을 보고해야 했는데, 그때마다 망할 자식이라는 욕을 들었다. 배다른 동생들이 각자 딴주머니를 차는 바람에 나이트클럽의 경영은 좀처럼 좋아지지 않았다. 아버지에게는 어머니가 다른 동생이 일곱 명이나 있었다. 그중 한 삼촌은 가짜 양주를 제조해 할아버지의 나이트클럽에 팔아넘겼고, 또다른 삼촌은 질 나쁜 안주를 팔아 원가의 다섯 배도 넘는 폭리를 취하고 있었다. 나이트클럽에 출연하는 가수들을 소개하는 조건으로 커미션을 받는 삼촌도 있었다. 아버지는 누가 뭐라고 해도 자신이 큰형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삼촌들은 그 문제에 관심조차 없었다. 제각각 어머니가 다른 그들은 어떤 의미에서 모두 큰형이었다.

우리를 키운 것은 누룽지 할머니였다. 원래는 옆집에 살던 할머니였는데, 누룽지를 너무도 좋아해서 언니가 붙여준 별명이었다. 할머니의 큰아들은 수십억의 빚을 갚지 못하고 야반도주를 했다. 그날 할머니는 동네 친구들과 꽃구경을 갔었다. 할머니의 가방에는 손자에게 주려고 산 바나나가 들어 있었다. 할머니는 자신이 살던 집 대신 우리집 초인종을 눌렀다. 그리고 손자에게 먹이려던 바나나를 우리에게 먹였다. 누룽지 할머니는 자주 졸았다. 밥을 먹다가도 졸고, 텔레비전을 보다가도 졸고, 심지어는 화장실에서 용변을 보다가도 졸았다. 그래서 우리는 조용히 노는 법을 배워야 했다. 요란한 소리가 나는 장난감은 버렸다. 나에게는 언니가, 언니에게는 내가 장난감이었다. 사람들이 누가 언니니? 하고 물으면 우리는 저요, 하고 동시에 대답했다. 그럼 누가 동생이니? 하고 물으면 얘요, 하고 서로 상대방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언니가 걸으면 나는 그 뒤에 서서 언니의 걸음걸이를 흉내냈다. 내가 그림을 그리고 있으면 언니가 내 옆에 앉아서 내가 그린 그림과 똑같은 그림을 그렸다. 우리는 이 놀이를 그림자놀이라고 불렀다. 누룽지 할머니는 우리에게 설탕을 바른 누룽지를 쥐여주면서 말했다. 헷갈려 죽겠다, 헷갈려 죽겠어.

누룽지 할머니는 우리의 얼굴을 쓰다듬으면서 당신의 손자 이름을 중얼거렸다. 헷갈린다는 말을 너무 자주 하더니, 결국 머릿속에 들어 있는 기억들이 뒤엉키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우리는 할머니 앞에서는 더이상 장난을 치지 않았다. 하지만 할머니의 실수는 줄어들지 않았다. 누룽지에 설탕 대신 소금을 바르거나, 국에 간장 대신 식초를 넣었다. 할머니의 음식이 맛이 없어지면서 우리는 밥 대신 우유를 먹었다. 하루에 1리터씩 마셨더니 키가 쑥쑥 자랐다.

거실에는 커다란 카펫이 깔려 있었다. 카펫에는 동그라미, 네모, 세모의 도형들이 그려져 있었다. 카펫 위를 걸을 때는 우리만의 규칙이 있었다. 언니는 붉은색을 밟으면 안되고 나는 초록색을 밟으면 안된다는 규칙이었다. 붉은색 또는 초록색을 피해 카펫을 밟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까치발을 하고 카펫을 걷다보면 자기도 모르게 자꾸 몸이 기우뚱거렸다. 놀이의 규칙을 모르던 아버지가 우리를 한의원에 데리고 가, 얘들이 똑바로 걷질 못해요, 혹시 빈혈이 있나요? 하며 묻기도 했다. 우리는 벽 가운데에 선을 긋고 양쪽에 스티커를 붙였다. 언니가 붉은색을 밟게 되면 내 쪽에 스티커를 붙였고, 내가 초록색을 밟게 되면 언니 쪽에 스티커를 붙였다. 우리가 열살이 되면 그때 더 많은 스티커를 붙인 사람이 언니가 되기로 했다. 사람들이 스티커에 대해 물어보면 우리는 이렇게 대답했다. 착한 일을 할 때마다 하나씩 붙이는 거예요. 그러면 어른들은 엄마도 없는데 참 잘 컸네, 하고 우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한번은 내가 담벼락 밑에 나 있는 민들레를 밟았을 때 언니가 다가와 내 등을 툭 치면서 말했다. 스티커 한개. 우리는 짓밟힌 민들레를 보며 웃었다. 그날 이후로 우리는 길을 걸을 때도 이 놀이를 했다. 아버지는 민들레를 밟아 죽인 후에 웃는 우리의 모습에 큰 충격을 받았는지 아동심리학 박사에게 전화를 걸어 상담을 했다. 결론은 간단했다. 무조건 사랑하세요. 사랑이 부족한 아이들에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아버지는 어떤 일이 있어도 하루에 한번씩 우리를 꼭 껴안아주었다.

버스정류장 앞에 새로운 보도블록이 깔렸다. 하필이면 붉은색 벽돌이었다. 언니는 그 길을 걸을 때마다 붉은 벽돌을 밟지 않도록 조심했다. 두 팔을 벌리고 보도블록 가장자리를 따라 조심스럽게 걷는 언니는 체조선수 같았다. 짜장면 배달하던 오토바이가 속도를 줄이지 못하고 달려들 때도 언니는 그렇게 두 팔을 벌리고 있었다. 나는 혼자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아버지는 하루에 두번씩 나를 꼭 껴안아주었다. 여전히 길을 걸을 때면 초록색은 밟지 않았다. 혹시 나도 모르게 밟게 되면 그날은 집에 돌아와 언니 쪽 벽에 스티커를 붙였다. 누룽지 할머니는 자주 언니 이름을 불렀다. 할머니의 시선은 언제나 내 등뒤를 향해 있었다. 내 뒤에 언니가 서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할머니와 나뿐이었다. 아버지가 할머니를 병원에 보낸 후,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나 혼자가 되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개회충이 눈과 뇌로 파고들었다. 사인은 가까운 가족들에게만 알려졌다. D시에서 최초로 나이트클럽을 개업한 사람의 마지막으로는 어울리지 않는 죽음이었다. 그래서 아버지는 신문 부고란에 심장마비라고 알렸다. 말년에 할아버지는 다섯 마리의 개를 키웠다. 한번도 자식들을 따뜻하게 안아준 적이 없던 할아버지는 개들을 안고 잠이 들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개보다도 사랑을 못 받았다고 생각한 삼촌들이 다섯 마리의 개를 잡아먹었다.

병원 침대에 누워 할아버지가 했던 마지막 말은 거기,였다. 삼촌들은 숨을 헐떡거리는 할아버지에게 물었다. 유언장은 어디 있어요? 어디에 두었나요? 할아버지는 검지손가락으로 병원 천장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거기…… 그리고 다음 말을 잇지 못했다. 아버지가 장례식장을 지키는 사이 일곱 명의 삼촌들은 할아버지의 집을 뒤졌다. 어디에서도 유언장은 나오지 않았다. 삼촌들은 서로 소송을 걸었다. 더이상 아버지를 형이라고 부르는 동생은 없었다. 아버지는 일곱 동생들을 집으로 불러들였다. 나는 유산 따위에는 아무 관심도 없다. 아버지의 말이 끝나자 삼촌들은 눈동자를 굴려대며 못 믿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정말이야? 아버지와 몇달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 첫째 삼촌이 말했다. 정말이야. 하지만 대신 조건이 있다. 내가 재산을 포기하는 조건으로 니들 뺨을 한대씩 쳐도 되겠냐? 삼촌들은 작은방으로 가더니 무엇인가를 의논하기 시작했다. 삼촌들은 차례로 서서 오른쪽 뺨을 아버지에게 내밀었다. 아버지는 삼촌들의 뺨을 한대씩 때렸다.

그날 새벽, 아버지는 편지 한장을 남겨놓고 집을 나갔다. “매달 25일이 되면 돈을 부치마. 건강해라.” 나는 아버지가 남긴 쪽지를 냉장고 문에 붙여두었다. 잠이 오지 않는 날이면 농에 있는 이불을 모두 펼쳐놓고 그 위를 걸었다. 어떤 날은 빨간색 무늬를 건너뛰었고, 어떤 날은 노란색을, 또 어떤 날은 파란색을 건너뛰었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여행사에 취직을 했다. 더이상 아버지의 도움을 받기 싫어 통장을 없앴다. 해지한 통장을 본 순간 더이상 아버지를 만날 수 없을 것 같다는 예감이 어렴풋하게 들었다.

 

 

2

 

아버지는 기차칸에서 돌아가셨다. 아버지의 주머니에서 발견된 것은 부산행 새마을호 기차표와 만원짜리 네 장이 전부였다. 나는 다니던 여행사를 그만두었다. 5년을 일하는 동안 나는 한번도 여행을 가지 않았다. 5년 동안 나는 등받이가 삐뚤어진 의자에 앉아서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의 설렌 얼굴을 마주보고 같이 웃어주었다. 여행사를 그만두고 나는 부산행 새마을호 기차표를 끊었다. 5호 차량 좌석번호 25번. 아버지가 눈을 감은 자리였다. 아버지가 기차를 탔던 서울역에서 시체로 발견된 부산역 사이. 기차가 어디를 통과할 때쯤 아버지의 심장이 멈췄는지 짐작해보면서 나는 서울과 부산을 오갔다.

Q를 만난 것은 기차칸에서였다. 그는 내가 예약한 25번 좌석에 앉아 있었다. 잠을 자는지 눈을 감고 있었다. 이봐요! 나는 Q의 어깨를 흔들면서 말했다. 여기 제 자리거든요. 한참이 지나도 Q는 눈을 뜨지 않았다. Q는 눈을 감은 채 무슨 노래인가를 흥얼거렸다. 노래에 맞춰 손바닥으로 무릎을 두드리며 박자를 맞추고 있었다. 나는 Q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마디마다 굳은살이 박혀 있었다. 이봐요, 안 자고 있다는 거 다 알아요. 얼른 자리 바꿔주세요. 내 말이 끝나자마자 Q가 픽, 하고 웃었다.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Q의 양볼이 붉어졌다. 우리는 삶은 달걀을 사서 두 개씩 나눠 먹었다. Q는 사이다를 마시고는 트림을 했다. 다른 사람 앞에서 트림을 해 본 적이 없다고 내가 말하자 Q는 마시던 사이다를 주면서 말했다. 마셔요. 그리고 한번 해보세요. 나는 사이다를 남김없이 마시고 아주 길게 트림을 했다. 앞자리에 앉은 남자가 뒤돌아보았다. 시원했다. 나는 Q와 친구가 되었다.

Q는 얼마 전까지 지하철 기관사였다. 원래의 꿈은 기차를 몰아보는 것이었는데, 그 꿈을 이루지 못한 대신 가장 비슷한 일을 찾아냈다. 기차에 치여 한쪽 다리를 잃은 Q의 아버지는 Q가 지하철 운전기사가 되던 날 동네잔치를 열었다. 동네사람들은 기차나 지하철이나 마찬가지라며 웃었다. 그날 동네사람들이 마신 술값은 Q의 한달 월급보다도 많았다. 지하철을 몰면서 Q는 하루에 껌을 한통이나 씹었다. 좁고 컴컴한 굴속을 뚫고 지나갈 때면 심장이 답답하게 죄어왔다. 경기가 나빠지면서 지하철에서 자살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지하철을 몰기 시작한 지 일년 정도 지났을 때, 한 여자가 Q의 열차로 뛰어들었다. 하늘색 블라우스에 검은색 치마를 입은 여자였다고 한다. 여자가 열차로 뛰어들기 직전 Q는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평생 잊을 수 없을 거예요, 그 눈을. 지금도 눈만 감으면 그 여자의 눈이 선명하게 보이는 것 같아. 그렇게 말할 때 Q의 눈동자가 얼마나 불안하게 흔들렸는지 나도 모르게 Q의 손을 잡아주었다.

그날 나는 Q를 따라 내렸다. 지난 일주일 동안 나는 서울과 부산을 일곱번 왕복했다. 짐은 없어요? Q의 말에 나는 손바닥을 위로 향하게 하고는 웃었다. 아무것도 없어요. 순간 D시에 있는 집 현관문을 잠그지 않은 게 생각났다. 도둑이 들어봤자 별로 훔쳐갈 것도 없었다. 물건들은 몇달쯤 나를 기다리다가 결국 지쳐 스스로 색이 바랠 것이다. Q는 나를 중국집의 주방 보조로 취직시켜주었다. 사촌형이 외국으로 가면서 자신에게 맡긴 가게라고 Q는 말했다. 나는 눈물을 잘 흘리지 않는 편이라서 양파를 깔 때도 괜찮았다. 열다섯살 때부터 중국집에서 일했다는 주방장은 양파를 깔 때면 어린아이처럼 눈물을 흘렸다.

영업이 끝나면 우리는 주방에 앉아서 소주를 반병씩 마셨다. 안주는 팔다 남은 짬뽕 국물이 전부였다. Q는 불면증에 시달렸다. 나는 Q에게 충혈된 눈으로 손님들을 쳐다보지 말라고 충고해주었다. 가뜩이나 없는 손님, 그마저도 도망가겠어요. 그러자 주방장이 나를 째려봤다. 음식이 맛없어서 손님이 없다는 사실은 아는 모양이었다. 비가 오는 날이면 Q는 만두를 만들어주었다. Q가 만든 고기만두는 정말 맛있었다. 어린시절 울보였던 Q는 만두,라는 말만 나와도 눈물을 그쳤다고 한다. 정말 맛있어요. 나중에 만두가게를 차려도 되겠어요. 나는 입천장이 데도록 뜨거운 만두를 한입에 꿀꺽 삼키면서 말했다. 어머니가 20년 넘게 만들어 주었던 만두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대꾸하며 그가 쓸쓸하게 웃었다.

 

나는 24시간 찜질방에서 지냈다. 한달치 목욕비를 한꺼번에 끊으면 20퍼센트를 할인해주었다. 매일매일 목욕을 했더니 잠이 잘 왔다. 개인 사물함에 들어가지 못하는 물건들을 보면 아예 욕심이 생기질 않았다. 최신식 가전제품을 보아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고, 예쁜 옷을 보아도 사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목욕을 하고 나오다가 바닥을 닦고 있는 여자의 발을 밟았다. 어! 미안해요. 여자는 괜찮다는 듯 목례를 하고는 다시 바닥을 닦기 시작했다. 다음날 나는 수건을 개고 있는 여자의 다리를 깔고 앉았다. 미안해요. 못 봤어요. 나는 다시 한번 사과를 했다. 그 다음날 나는 목욕탕 문을 열고 나오는 여자와 정면으로 부딪쳤다. 여자와 나는 혹이 난 이마를 만지작거리면서 나란히 바닥에 누웠다. 누군가가 수건에 차가운 물을 적셔왔다. 괜찮아요? 여자의 이마에 찬 물수건을 대주면서 내가 말했다. 괜찮아요. 늘 이런 일이 일어나는걸요. 여자가 힘없이 웃었다.

여자의 이름은 W였다. W는 내게 몸에 난 수많은 멍을 보여주었다. 하루에 수십번은 사람들과 부딪쳐요. 가만히 서 있는 내 발을 밟고 나서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죠. 미안합니다. 못 봤어요. 정말 사람들 눈에는 제가 잘 안 보이나봐요. W의 말처럼 나도 W와 부딪치기 전까지는 그녀의 존재를 느끼지 못했다. 어, 이 사람이 언제 여기에 있었지. W와 부딪치고 난 뒤에야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학창시절 W의 별명은 유령이었다. 소풍을 가서 담임선생님이 W를 빼고 인원을 센 적도 있었다. W의 짝은 한학기가 지나도록 W의 이름을 제대로 외우지 못했다. 한번은 유리창을 닦다가 2층에서 떨어진 적이 있었는데, 그때 반아이 중 한명이 유리창을 닦고 있는 W를 보지 못하고 창을 닫았기 때문이었다. W와 일년을 넘게 만나오던 남자친구는 헤어지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난 니가 무서워. 이제 제발 나를 따라다니지 마!

W의 어머니는 꽤 유명한 배우였다. 남편의 외도로 무너진 가정을 지키려고 필사적으로 애를 쓰는 우울증 주부의 역을 해서 사람들의 입에 오르기 시작했다. W는 그녀가 배우가 되기 전에 낳은 아이였다고 한다. 어머니와 외할머니 외에는 아무도 자신의 존재를 모른다며 W가 입꼬리를 비틀면서 웃었다. 아니, 이젠 외할머니가 돌아가셨으니 어머니만 입을 다물면 아무도 내 존재를 모르겠네! W가 혼잣말을 하듯 허공을 보며 중얼거렸다. W와 그 여배우는 얼굴이 전혀 닮지 않았다. 아마 아버지가 못생겼나보지. 나는 W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짐작해보기도 했다. 어머니가 유명해질수록 W는 유령 같은 존재가 되어갔다. 어머니가 연기상을 받던 2년 전 그날, W는 길을 가다 자신의 그림자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깜짝 놀랐다고 했다.

W와 나는 자주 냉면을 먹으러 다녔다. 우리는 뜨거운 탕에서 삼십분 정도 몸을 담그고 난 뒤, 젖은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냉면집을 찾아다녔다. W는 매운 것을 잘 먹었다. 이렇게 매운 것을 먹으면 머릿속이 텅 빈 것 같거든. W는 질긴 면을 입으로 꾸역꾸역 집어넣었다. 매운 음식이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순간, W는 자신이 살아 있음을 느낀다고 했다. W는 자신이 만든 아주 매운 쏘스를 늘 가지고 다녔다. 냉면이 나오면 자신이 만든 쏘스를 더 넣어서 먹었다. 나도 조금씩 W가 만든 매운 쏘스를 먹기 시작했다. 우리는 얼얼한 혓바닥을 쭉 내밀고 숨을 쉬었다. 고춧가루가 다이어트에 효과가 있다는 말이 사실인지 살이 조금 빠지기도 했다.

 

중국집 문을 닫는 날이면 Q가 찜질방으로 왔다. W가 일을 하는 동안, 나와 Q는 요가를 배우고 재즈댄스를 배웠다. 목이 마르면 식혜를 사서 마셨다. 너무 달았지만 살얼음이 뜰 정도로 차가워서 마시고 나면 가슴속까지 시원해졌다. 가족 단위로 찜질방을 찾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다양한 게임을 즐길 수 있는 방이 생겼다. W의 일이 끝나면, 우리 셋은 게임방으로 가서 말 옮기기 게임을 했다. 과일 숫자를 맞추는 게임이나 앞서 가던 돼지를 잡는 게임도 했다. 사람들은 둥그런 탁자에 앉아서 주사위를 굴렸다. 블록이 무너지면 사람들이 와아! 하고 좋아라 했다. 여기저기서 뿅망치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내기가 없는 게임은 싫다고 Q가 말했다. 그래서 우리는 한 게임당 천원씩 걸었다. 나는 삼만원을 잃은 날도 있었다. 돈을 가장 많이 딴 사람이 미역국을 샀다. 그런데 왜 찜질방에서는 미역국을 팔아요? 매점 아주머니에게 물어봤지만 대답해주지 않았다. 미역국을 먹고 나면 각자 흩어져 늘어지게 잠을 잤다. 우리는 밖의 날씨가 어떤지에 대해 관심이 없었다. 일기예보는 보지도 않았다. Q가 누워 있는 W의 발목을 밟아서 인대가 늘어나기도 했지만, 늘 그렇듯이 W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지었다.

하루는 셋이 고스톱을 치고 있는데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앳된 여자애가 다가왔다. 저도 같이하면 안될까요? 넷이 치면 한 사람은 광을 팔아야 한다며 Q가 투덜거렸다. 광을 판 사람은 주로 W였다. 고스톱을 치면 돈을 잃는 법이 없는 Q가 여자애에게 내리 돈을 잃었다. 자신의 지갑에 있는 만원짜리가 고스란히 여자애에게로 가자 마침내 Q가 화를 내면서 말했다. 사실대로 말해. 너 고등학생이지. 고등학생이 놀음을 하면 돼? Q의 입에서 굵은 침이 튀었다. 고등학생인 여자애가 나와 W의 어깨에 팔을 얹고는 아주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제가 비밀 하나 알려드릴게요. 사실 저에겐 보물지도가 있는데, 생각 있으면 저랑 같이 찾으러 가실래요? 가출한 고등학교 2학년짜리 여자애들이란 거짓말을 밥먹듯 한다고 Q가 말했다. 고등학생이 지갑을 꺼내 그 안에서 반듯하게 접힌 종이 한장을 꺼냈다. 거기에는 정교하게 그려진 지도가 있었다. 아버지는 이 지도를 10년 전부터 금고에 보관해두었어요. 다 이유가 있기 때문에 그런 거 아니겠어요? 고등학생은 누가 자신의 말을 엿듣지 않는지 살피기 위해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고등학생의 말을 들을수록 보물이 정말로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렇지 않고서야 가출을 하면서 다른 것도 아니고 달랑 지도 하나만을 들고나왔겠는가. 우리는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다음날 내가 내린 결론은 이거였다. 거짓말을 믿는다고 해서 세상이 망하지는 않지. Q가 내린 결론은 이랬다. 진짜 보물이 나오면 사등분해야 해. W는 우리 둘의 얼굴을 천천히 살펴본 다음에 말했다. 우리 셋은 지금 몹시 심심해.

만일을 위해서 운전을 할 줄 알아야 한다고 Q는 말했다. Q의 충고에 따라 나와 W는 운전을 배웠다. 운전면허를 따는 데 두달이나 걸렸다. 그사이 새벽마다 동네 뒷산을 올랐다. 고등학생이 보여준 지도에 의하면 보물은 산 정상에 있었다. 체력이 좋아야만 보물을 짊어지고 내려올 수 있을 것이라고 우리는 생각했다. 처음에는 약수터까지밖에 못 가겠더니 며칠이 지나자 정상까지 가도 숨이 가쁘지 않았다. 일찍 일어나보니, 새벽이 생각보다 훨씬 수다스럽다는 것을 알았다. 고등학생은 우리가 동네 뒷산을 오르고 운전을 배우는 동안, 지도에 있는 산이 어느 산인지를 알아내는 일을 맡았다. Q는 중학교 동창을 통해 중고트럭을 하나 구입했다. 좌석이 네 개 있는 트럭이었다. 등산용품 전문점에 가서 커다란 배낭을 네 개 샀다. 침낭을 갖는 게 소원이라고 해서 Q에게 침낭을 하나 선물해주었다. 그랬더니 Q는 그날 밤 뒷산에 올라가 내려오지 않았다. 이 침낭 정말 따뜻해. 다음날 산에서 내려온 Q의 얼굴에는 수십방의 모기 물린 자국이 있었다. 긴 장마가 끝난 후 마침내 우리는 출발했다. 삽 두 자루와 곡괭이 두 자루를 트럭에 싣고서.

 

 

3

 

트럭에서는 담배냄새가 심하게 났다. 에어컨은 작동되지 않았다. 창을 열자 날벌레들이 달려들었다. Q가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침을 뱉었다. 바꿀까요? W가 말했다. Q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갓길에 차를 세웠다. W가 운전석 쪽으로 자리를 바꾸려는 순간 고등학생이 말했다. 그런데, 두 분 2종 면허 따신 거 아니에요? 나와 W가 동시에 대답했다. 응. 그게 가장 따기 쉽다고 해서. 그런데 뭐가 문제야? 우리의 말을 들은 Q가 허공을 향해 욕을 하기 시작했다. 이런 멍청한 것들!

고속도로를 빠져나오자 고등학생이 길 안내를 하기 시작했다. 오른쪽으로 가세요. 이대로 한참을 달리다보면 Y자로 갈라지는 길이 하나 나올 거예요. 그 말을 듣고 Q는 우회전을 했다. 하지만 아무리 달려도 Y자로 갈라지는 길은 나오지 않았다. 고등학생은 차를 세우게 하고는 지도를 들고 가로등 밑으로 뛰어갔다. 실내등이 켜지지 않았던 것이다. 한참 만에 돌아온 고등학생이 웃으면서 말했다. 미안해요. 아까 그 삼거리에서 왼쪽으로 가야 해요. Q가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욕을 했다. 이런 멍청한 것!

차는 비포장도로를 한참 달렸다. 차가 덜컹거릴 때마다 W는 밭은기침을 했다. W가 창밖으로 가래를 뱉으려는 순간 차가 멈추었다. 요란한 소리를 내던 엔진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솔직히 말해봐요. 이 트럭 얼마 주고 샀어요? 바퀴를 걷어차며 내가 물었다. 팔십만원…… Q가 마른세수를 하면서 대답했다. 고등학생이 가지고 있는 지도에 의하면 10킬로미터 정도 더 가면 산 어귀가 나온다고 되어 있었다. 우리는 삽과 곡괭이를 각자 하나씩 들고 밤길을 걷기 시작했다. Q는 걸어가는 내내 차를 판 중학교 동창 욕을 했다. 내가 예전에 2백만원 꾼 거 안 갚았다고 이렇게 복수를 하냐, 나쁜 자식! 그 말을 들은 우리는 일제히 Q를 욕하기 시작했다. 산속에서 휘파람소리가 들려왔다. 소름이 돋았다. 새야. 그래 맞아, 새야. 언젠가 텔레비전에서 봤어. W가 중얼거렸다. 그러고는 자기도 따라서 휘파람을 불었다.

마침내 산 아래 도착하자 새벽이 밝아오기 시작했다. 우리는 산봉우리 사이로 뜨는 해를 보면서 기도를 했다. 가슴속에서 붉은 기운이 올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내 평생 이렇게 떨리기는 처음이었다. 그때 옆에 서 있던 고등학생이 말했다. 언니, 왜 이렇게 얼굴이 빨개요? 삽과 곡괭이를 나뭇잎 속에 파묻고 가까운 마을로 내려갔다. 일을 하려면 일단은 잘 먹어야 하는 법이니까. 우리는 토종닭이라고 씌어진 식당문을 두드렸다. 잠옷차림의 남자가 문을 열었다. 한 시간 안에 닭백숙을 해오면 음식값의 두 배를 주겠어요. 배가 고프면 신경질을 내는 Q 때문에 우리는 터무니없는 흥정을 해야 했다. 식당 남자는 잠옷을 입은 채로 닭을 잡으러 갔고, 식당 여자는 머리도 빗지 않고 세수도 하지 않은 채로 음식을 차리기 시작했다. 주문한 지 정확히 56분 만에 음식이 나왔다. 우리는 닭 두 마리를 10분 만에 먹어치웠다.

산은 가팔랐다. 곡괭이는 너무 무거웠다. 게다가 손잡이가 길어서 경사진 언덕을 오르는 데 거추장스럽기만 했다. 있잖아, 삽만 있어도 되지 않을까? 땅을 보니 그리 딱딱한 것 같지도 않고…… 산 중턱에서 곡괭이 두 자루를 놓아버렸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곡괭이를 나뭇잎 아래에 숨겨두었다. 근처에 있는 나무에 붉은 손수건을 묶어 위치를 표시했다. 고등학생이 수첩에 산 중턱, 붉은 손수건 나무, 동쪽으로 3미터,라고 적어두었다.

W가 망원경을 주웠다. 나무에서 새소리가 들리면 W는 걷다 말고 서서 망원경을 꺼냈다. 그러고는 새가 어느 나무에 앉아 있는지를 찾기 시작했다. W 때문에 산을 오르는 걸음은 더욱 더뎌졌다. 고등학생이 나뭇가지에 걸려 있는 모자를 발견했다. 모자는 손이 닿지 않는 가지에 걸려 있었다. W의 망원경을 빌려 모자를 살펴본 뒤 고등학생이 말했다. 제가 좋아하는 상표예요. 우리는 돌을 주워 나뭇가지에 걸린 모자를 향해 던졌다. 떨어질 듯 떨어질 듯 하면서도 모자는 떨어지지 않았다. 집에 돌아가면 똑같은 것을 사주기로 약속한 후에야 고등학생은 모자를 포기했다.

마침내 지도에 그려진 대로 산 정상 부근에서 커다란 바위 세 개를 발견했다. 자, 기념으로 담배나 한대씩 피우죠. 고등학생이 배낭에서 담배를 꺼냈다. 우리는 바위에 둘러앉아 담배를 피웠다. 나도 W도 Q도 처음 피워보는 담배였다. 나와 W와 Q가 각각 바위 위에 섰다. 하나, 둘, 셋, 넷. 그러고는 똑같은 보폭으로 걸었다. 우리 셋이 만나는 지점에 고등학생이 동그라미를 그렸다. 자, 파죠!

땅을 파는 일은 쉽지 않았다. 처음에는 나와 W가 땅을 팠다. 금방 손바닥에 물집이 잡혔다. 무릎이 들어갈 정도로 땅을 팠지만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숨이 찼다. 둘이서 1.5리터 물을 한번에 다 마셨다. Q와 고등학생이 땅을 파는 동안 나와 W는 망원경을 보면서 놀았다. 저기 뭐가 있는 것 같아. W가 100미터쯤 떨어진 곳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나뭇잎에 가려 무엇인지 자세히 알 수 없었다. 경사가 심한 내리막길이었지만 우리는 나뭇가지를 붙잡아가면서 천천히 내려갔다. 미끄러지면서 주황색 풀꽃을 밟았다. 놀란 벌이 요란한 날갯짓을 해댔다. 나뭇잎에 가려진 것은 버려진 등산화였다. 등산화가 버려진 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썬글라스를 발견하기도 했다. 어때 어울려요? 나는 썬글라스를 낀 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정말 근사하네요. W가 박수를 치면서 대답했다.

1미터를 팠더니 커다란 바위가 나왔다. 그리고 그 바위를 가느다란 나무뿌리들이 감싸고 있었다. 나는 구덩이에 조금 전 주운 등산화와 썬글라스를 던졌다. W는 망원경을 던졌다. 고등학생은 담배와 라이터를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수첩을 꺼내 조금 전 곡괭이를 숨길 때 적었던 메모를 찢어 담뱃갑 사이에 끼웠다. Q는 트럭 열쇠를 집어던졌다. 우리는 도로 구덩이를 덮었다. 고속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서로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잠을 잤다. 고등학생은 시내에서 가장 큰 서점으로 가서 지도책 사이에다 보물지도를 끼워두고 왔다.

 

보물을 찾으러 갔다 온 사이, 주방장이 도망을 갔다. 주방에 있던 그릇들과, 냉장고에 가득 들어 있던 음식재료들과, 배달용 오토바이를 가지고 사라졌다. Q는 주방 바닥에 주저앉아 어린아이처럼 울었다. 그만 울고 싶을 때까지 울어요! 나는 Q의 등을 두드리며 말했다. W가 밖으로 나가더니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잠시 후에 냉면 네 그릇이 배달되었다. 이럴 땐 매운 음식을 먹는 게 최고예요. W가 가방에서 매운 쏘스를 꺼냈다. 맞아요. 슬퍼서 울었다고 말하는 것보다는 매워서 울었다고 말하는 게 덜 쪽팔리잖아요. 고등학생이 냉면을 비비면서 말했다. 빈 주방 바닥에 앉아서 우리는 아주 매운 냉면을 먹었다. W는 특별히 Q의 냉면에 자신의 쏘스를 듬뿍 넣어주었다. 그때 내 머릿속을 무엇인가가 스치고 지나갔다. 그래, 바로 이거야! 내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외쳤다.

나는 Q의 중국집 자리에 만두가게를 차리자고 했다. 메뉴는 만두와 쫄면. Q는 만두를 만들고 W는 쫄면을 만들면 될 것 같았다. 주문받고 음식 나르는 일은 나하고 이녀석하고 둘이 하면 되지 않겠어? 나는 고등학생의 머리통을 살짝 건드리면서 말했다. 그러자 고등학생이 나도 끼워줘서 고마워요, 하고는 훌쩍거렸다. 이거 매워서 우는 거예요. 오해하지 마세요. 그렇게 말하고는 입속의 면을 씹지도 않고 삼켰다.

나는 여행사를 다니며 번 돈을 내놓았고, W는 찜질방에서 아르바이트를 해서 번 돈을 내놓았다. 벽을 새로 칠하고 바닥에는 미끄러지지 않는 타일을 깔았다. 금고 바닥에서 유효기간이 지난 복권을 주웠다. 넷은 머리를 맞대고 복권을 긁었다. 먼저 당첨금을 확인했다. 십만원. 당첨숫자는 5였다. W가 천천히 동전을 움직였다. 5라는 숫자가 서서히 윤곽을 드러냈다. 에이 아쉽다. 날짜만 안 지났어도. 고등학생이 연신 아쉽다는 말을 했다. Q는 복권을 카운터 벽에 붙여놓았다. 이게 우리에게 행운을 가져다줄 거야.

고등학생이 Q의 만두를 먹어보고는 한마디 충고를 했다. 피를 좀더 얇게 했으면 좋겠어요. 얇으면서도 쫄깃한 맛이 나게요. 그 말을 듣고 Q는 삼일 동안 주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얇은 피를 만들기 위해 다섯 포대가 넘는 밀가루를 반죽해댔다. W의 쫄면을 먹어본 뒤 고등학생이 말했다. 우리 쫄면의 핵심은 매운맛이에요. 그러니까 단순하게 한가지 쫄면만 팔지 말고 매운맛에 등급을 매겨 팔았으면 좋겠어요. 고등학생의 충고에 따라 우리는 쫄면을 네 가지로 구분했다. 안 매운 쫄면, 조금 매운 쫄면, 아주 매운 쫄면, 그리고 마지막으로 미친 쫄면. 미친 쫄면이라는 이름은 고등학생이 지었다.

만두를 먹기 위해 사람들이 줄을 섰다. 매운 쫄면을 먹어본 사람들이 한마디씩 했다. 이렇게 매운맛은 처음이에요. 가끔 미친 쫄면을 먹는 사람도 있었다. 미친 쫄면을 두 그릇 이상 먹으면 음식값을 받지 않는다고 광고를 했다. 몇사람이 시도를 했지만, 아직까지는 성공한 사람이 없었다. 고등학생은 저녁에 일을 시키지 않았다. 대신 검정고시학원에 보냈다. 일년 만에 고등과정을 마치더니 그 다음해에 대학에 입학했다. 날 닮아서 머리가 좋은 거야. 나와 W와 Q가 서로 우겨댔다. 우리 셋은 돈을 모아 대학등록금을 대주었다. 우리와 비슷한 이름을 내건 만두가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맛을 따라오지는 못했다. 고등학생이 대학을 졸업하던 해에 우리의 재산은 작은 아파트 네 채와 소형차 네 대로 불어났다.

 

밤이 길게 느껴지는 날이면 나는 차를 몰고 고속도로를 달렸다. 한참을 달리다 마음에 드는 휴게소에 들어가 어묵을 한그릇 사먹는 게 유일한 취미였다. 방에 전국지도를 붙여놓고, 붉은색 펜으로 어묵이 맛있는 휴게소에 동그라미를 쳤다. 한번은 밤길을 달리다가 나도 모르게 고향인 D시에 간 적이 있다. 내가 살던 아파트 베란다에 어린아이의 옷이 걸려 있었다. 나는 불이 켜진 거실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문을 열어두고 와서 다행이었다. 집이라는 것은 누구든지 살아줘야 하는 것이니까. 할아버지의 나이트클럽은 없어졌다. 대신 그 자리에 복합상영관이 들어섰다. 나이트클럽은 언제 없어졌나요? 나는 길 건너 노점상에게 물었다. 벌써 없어졌지. 말도 마. 그 아들들끼리 서로 싸우고 난리였잖아. 노점상은 묻지도 않은 이야기까지 늘어놓았다. 상속을 가장 적게 받은 삼촌이 나이트클럽에 불을 질렀다. 삼촌들 중 몇명은 아직까지도 재판중이었다.

12월 31일 밤, 나는 차를 몰고 영동고속도로를 달렸다. 고속도로는 일출을 보러 가려는 사람들로 밀렸다. 나는 앞차의 브레이크등을 바라보며 운전을 했다. 시계가 11시 34분을 가리켰다. 생일 축하해, 언니.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언니가 몇년만 더 살았다면 틀림없이 내가 스티커를 더 많이 붙였을 거야. 그러면 내가 언니가 될 수 있었을 텐데. 치사해! 내 목소리가 라디오 음악소리에 묻혀버렸다. 여주휴게소에서 어묵을 한그릇 사먹었다. 국물을 마시다 말고 나는 내게 말했다. 생일 축하해. 휴게소 벽에 걸려 있는 시계가 12시 30분에서 31분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사람들은 일출을 보러 동해로 향했다. 나는 다음 톨게이트에서 유턴을 한 다음 집으로 돌아왔다. 내일은 서해안고속도로를 달려볼까, 어느 휴게소의 어묵이 맛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