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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
20세기 동아시아의 ‘국학’
동아시아적 시야를 열기 위한 반성
임형택 林熒澤
성균관대 한문교육과 교수. 저서로 『한국문학사의 시각』 『실사구시의 한국학』 『한국문학사의 논리와 체계』 등이 있음. htlim@yulim.skku.ac.kr
*이 글은 “‘National Studies’ in 20th Century East Asia: Reflections for an East Asian Perspective”(Sungkyun Journal of East Asian Studies, vol. 4, No. 1, 2004)의 국문원고를 수정 보완한 것이다.
이 글은 지난 세기 ‘국학(國學)’을 동아시아적 차원에서 조명하여, ‘오늘 우리의 학문은 어떻게 나아갈 것인가’라는 물음에 대해 더불어 사고하고 토론하는 재료를 제공해보자는 취지에서 작성한 것이다.
지난 세기는 벌써 흘러간 물이 되었지만 그 시대의 부채는 한국인의 삶의 저변을 억누르고 있다. 그 상반기에 통과한 식민지적 질곡 때문에 여태껏 ‘정신적 포로’처럼 반응하는가 하면, 하반기의 분단상태는 ‘현실적 족쇄’로서 엄연히 작동하고 있지 않은가. 한국의 국학은 식민지시기의 산물로서 분단시대에 와서 폐기처분을 당했던 터임에도 망령처럼 한국인의 뇌리에서 떠날 수 없었다. 근래 ‘세계화’의 대세에 쫓기는 심경에서 ‘한국학’이란 이름으로 국학은 부활하는 것도 같다.
우리의 눈을 이웃나라로 돌려보면 국학이란 학술현상은 일국적인 것이 아님을 알아차리기 어렵지 않다. 일본의 경우 17세기로부터 유래했던 터이고, 중국의 경우 20세기에 들어와서 국학운동이 한국에 앞서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이는 본고에서 국학을 동아시아적 차원에서 조명하려는 역사적 근거이기도 한 것이다.20세기적 ‘근대’의 극복, 그 부채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문제는 당면한 과제로 생각하는바, 학문하는 사람으로서는 20세기 국학을 냉철하게 반성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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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들어가는 말로 쳰 무(錢穆,1895〜1990)란 중국 현대 학자가 자기의 저서 『국학개론(國學槪論)』의 머리에 얹은 글의 첫 대목을 옮겨보겠다.
학술은 원래 국경이 있을 수 없다.‘국학’이란 개념은 과거에 전승한 바 없으며 장래에도 또한 존립하기 어려울 것으로 생각한다. 단지 한 시대의 명사일 뿐이다.(「弁言」,1933)
‘국학’이란 “한 시대의 명사일 뿐”이라고 단언하고 있다. 진리의 보편성에 비추어 국학의 본질적 의미를 부인한 위의 논법은 십분 타당하다. 하지만 쳰 무의 발언은 원론적 차원에 불과하며, 그 스스로 심혈을 기울여서 『국학개론』이란 저서를 쓴 것이다. 한시적 존재로 규정된 국학, 이 국학을 요청한 시대는 과연 어떤 시대였을까?
국학이란 명사는 지난 20세기 중국 학술사의 무대에 등장하는데, 국학운동이 곧 중국 근대학문의 성립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한국의 경우 역시 (물론 구체적인 경위는 꼭 같지 않지만)‘조선학’ 혹은 ‘국학’이 지금 우리가 수행하는 학문의 길을 개척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런데 진리의 보편성에 대한 인식과 그 실천은 근대학문의 징표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물론 근대의 기본과제가 ‘민족주권’에 있으므로 자국의 정체성을 의도하는 학문을 추구하려는 태도는 응당 필요하지만, 진리의 보편성을 전제로 한 작업이 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그럼에도 하필 국학이란 명사로 근대학문을 일으킨 저 시대배경은 문제적으로 보지 않을 수 없다. 한편으로 흥미로운 사실은, 일본에서 국학은 첫머리에 언급했듯 이미 17세기에 시작하여 18세기에 이르면 뚜렷하게 하나의 학파를 형성하는데,20세기에 와서는 도리어 이 개념이 폐기되었다. 이런 사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실로 적잖은 의문점이다.
이 글에서 나는 20세기 동아시아 삼국에서 각기 존립한 국학, 특히 국학운동의 의미에 관심을 두어 전체적으로 논의해보고자 한다.
물론, 사안 자체가 워낙 방만한데다 중국과 일본에 대해서는 필자의 지식이 별로 미치지 못하고 있다. 본고는, 한국에 관해선 필자가 이미 다룬 터이기에 논의를 간략히 하고 잘 모르는 중국·일본 쪽에 비중을 두었다. 잘 모르므로 공부삼아 해보자고 나선 셈인데 나름으로 뜻이 있다.오늘 우리가 학문하기를 그만두지 않는다면 지금까지 우리가 해오던 학문의 틀을 바꿔야 하지 않을까 한다. 여기에서 관건은, 지난 20세기 국학의 일국적 한계를 넘어서서 동아시아로 시야를 넓혀나가는 데 있다고 믿는다.
지금 동아시아 담론이 무성하고 있다. 동아시아를 어떤 하나의 통일적 공간으로 관심하게 된 것이다. 이제 현재의 과거로 눈을 돌려 동아시아의 ‘역사적 공통성’을 인지할 필요가 생겼다. 우리가 동아시아적 시각으로 연구하고 분석한다고 할 때 어떻게 접근해야 할 것인가? 본고에서 필자는 역사적 공통성에 유의하여, 동아시아 국가들이 지닌 사회·문화의 ‘상동성’ 및 상동성 가운데 차이점(=상이점)을 분석의 착목처로 제기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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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근대의 학술운동사에서 『고사변(古史辨)』의 편찬으로 지울 수 없는 발자취를 남긴 꾸 졔깡(顧頡剛,1893〜1980)은 중국 근대학문의 성립과정상에 두 표점(標點)을 잡고 있다.
국고(國故)를 정리하자는 외침은 타이옌(太炎, 章炳麟, 1869〜1936) 선생이 선창을 했는데, 궤도상에서의 진행은 스즈(適之, 胡適, 1891〜1962) 선생의 구체적 계획에 의해 발동이 된 것이다.(『古史辨』 제1권 自序, 1926)
즉 ‘국고의 정리’,국학은 처음 쟝 삥린(章炳麟)이 시동을 걸었고 다음 후 스(胡適)에 의해 본궤도로 진입했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학술사의 인식구도는 정론으로 받아들여지는 듯 보인다.『중국소설서사학(中國小說敍事學)』이란 책으로 한국 학계에 알려진 쳔 핑위안(陳平原)이란 학자가 최근에 『중국현대학술의 건립(中國現代學術之建立)』이란 좋은 저서를 내놓았는데, 이 책에는 “쟝 타이옌(章太炎)·후 스즈(胡適之)로 중심을 삼아서”라는 부제를 붙이고 있다.‘국고’란 개념은 현대 한국사람들의 귀에 생소하게 들릴 듯한데 이해를 돕기 위해 후 스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국학이란 우리들의 안목에 있어서는 ‘국고학(國故學)’의 줄임말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과거 중국의 일체 문화·역사가 모두 우리의 ‘국고’요, 이 과거의 일체 문화·역사를 연구하는 학문이 곧 ‘국고학’이니 줄여서 ‘국학’이라 일컫는 것이다.(「國學季刊宣言」,1923)
후 스에 따르면 ‘국고’는 과거 자국의 일체 문화·역사를 뜻하는바, 그것을 연구하는 학문을 가리켜 ‘국고학’, 줄여서 ‘국학’이라 한다는 논지이다. 후 스의 이 개념정의를 우리가 그대로 수용할 수 있을지, 특히 국학이 포괄하는 시대범위를 과거사에 국한할 것인지 문제가 아무래도 간단치 않다. 그렇긴 하지만 당시 중국에서 일반화된 통념이고, 한국에서도 역시 크게 빗나가지 않는 개념범주로 여겨지는 것이다. 그러면 먼저 중국의 국학운동을 선도한 쟝 삥린의 발언을 들어보자.
무릇 국학이란 국가가 성립하는 바 원천이다. 내 듣건대 경쟁시대에 처해서 국학에 의존하는 것만 가지고 국가가 자립하기에는 부족하다. 그렇지만국학이 발흥하지 않고 국가가 자립하는 경우도 나는 들어보지 못했다. 또 국가가 망하고 국학이 망하지 않는 경우도 나는 듣지 못했다. 그러므로 오늘날 국학을 흥기(興起)시키는 자 아무도 없다면 그 영향은 곧 국가의 존망에 미칠 터이다. 이 또한 전대에 견주어 더욱더 위태롭지 않은가.(『民報』 제7호,「國學講習會序」,1908)
이 글이 씌어질 당시인 20세기 초, 청말(淸末)의 시대정황을 간략히나마 언급해둘 필요가 있겠다. 쟝 삥린은 신해혁명으로 청조를 타도하고 중화민국을 수립한 쑨 원(孫文,1866〜1925)과 정치노선을 함께한 인물이다. 청조체제의 보전을 주장한 캉 여우웨이(康有爲,1858〜1927), 량 치챠오(梁啓超,1873〜1929)와는 학문적으로뿐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입장이 아주 달랐던 것이다. 쟝 삥린은 캉 여우웨이의 정치노선을 반박하고 민족혁명을 주장하는 글을 발표한 것 때문에 감옥살이를 하고,1906년 출옥하여 일본으로 망명을 한다. 망명지 일본에서 쑨 원과 함께 흥중회(興中會)를 결성, 그 기관지로 『민보(民報)』를 발간했다.『민보』에 실린 윗글에서 천명한 ‘국학강습회(國學講習會)’는 민족혁명을 고취하기 위한 학술운동이었던 것이다.“혁명은 강학을 잊어선 안되고 강학은 혁명을 잊어선 안된다(革命不忘講學講學不忘革命)”는 주장이 그의 지론이었으니, 혁명과 불가분리의 관계를 갖는 강학이 스스로 국학적 성격을 띠게 됨은 당연한 귀결이라 하겠다.
위 인용문의 논지를 요약하면 국학은 국가성립의 원천으로, 국가존망에 직접적 관계가 되는 것으로서 중요시된 것이다. 근대학문이라면 출발단계에서부터 민족주의와 무관하지는 않지만 진리의 보편성과 방법론의 과학성을 기본성격으로 하고 있었다. 근대학문을 ‘국학’으로 표방한 거기에 중국적 특수성이 있다고 하겠다. 다름아닌, 국민국가의 수립 초두에서 당면한 민족현실이었다.
20세기 벽두 중국에서는 ‘제구포신(除舊布新)’으로 표상되는 전면적 변혁과 전환이 과제였다. 게다가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으로 과분(瓜分,분할점거를 뜻하는 중국 근대사의 용어)의 위기를 맞고 있었다. 이런 사태에 직면해 청조 당국은 나름으로 대응하긴 했지만, 부패와 문란으로 실정을 거듭한 나머지 위기는 더 큰 위기를 불러들여 날로 더욱 침중해갔다. 만족(滿族) 지배의 청조체제에서 벗어나는 민족혁명이 무엇보다도 긴급한 과제로 요망되는 상황이었다.
당시 중국의 급진개혁파에 있어서 ‘혁명’이란 말은 곧 청조체제의 전복을 뜻하였다.1쑨 원이 「동맹회선언(同盟會宣言)」은 제1조에서 “되놈들을 몰아내자(驅除虜)”라고 명시한 그것이다. 쟝 삥린의 동지로 혁명대열의 선두에서 자신의 젊음을 송두리째 바친 쩌우 룽(鄒容,1885〜1905)은 『혁명군(革命軍)』이란 책자에서 자서(自序) 끝에 연도를 “황한민족 (皇漢民族) 망국 후 260년”이라 적어놓고 있다. 명·청이 교체된 역사를 완전히 민족의 멸망으로 의식한 것이다. 조선조에서 ‘숭정(崇禎,중국 명나라 마지막 황제 사종思宗의 연호) 후’라고 기년(紀年)했던 것과 외형상으로 닮은꼴이다. 중국의 입장에서는 ‘한족 중심의 중화주의’의 표출로 볼 수 있다. 뿐 아니고, 자유·평등이란 서구적 근대사상이 거기에 주입되어 있다.(『혁명군』이란 책 자체가 민권사상을 고취해서 인민을 혁명의 전사로 일으켜세우려는 취지를 담고 있다.) 청조체제에 억압당하고 있는 상태를 쩌우 룽은 “중국인은 노예”라고 절규한 것이다. 반청(反淸)노선은 근대적인 ‘국민국가’의 수립방향과 일치했다. 청조에서 민국으로의 혁명적 전환은 중국적 민족개념의 성립과정이었던 셈이다.
이 논리의 정치적 실천이 역사적 신해혁명을 불러왔거니와, 학술적 실천으로 중국의 국학이 탄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요컨대, 민족위기가 ‘국학’을 외쳐 불렀던 터이므로, 국학의 성격에 민족주의적 색채가 강렬하게 된 것 또한 필연의 귀결이라 하겠다. 국학 자체를 정의함에 있어서도 “국학이란 나라와 더불어 유래한 것이니 지리에 인연하고 민성(民性)에 근거해 잠시도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鄭實 「國學講習記」, 『國粹學報』 제19기,1906)라는 식으로 ‘일국 고유의 학문’이라고 규정된다. 국가적 자기확인의 학문이다. 그래서 당시 국학을 부르짖은 그 목소리를 대변한 잡지의 명칭 또한 『국수학보(國粹學報)』로 붙여지게 되었다.
그렇다면 쟝 삥린 등과 정치적 입장이 상반되었던 캉 여우웨이나 량 치챠오는 국학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했던가? 쟝 삥린과 캉 여우웨이는 정치적으로뿐 아니라 학문상에서도 학파를 달리했던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쟝 삥린이 고문학파(古文學派)의 마지막 거물로서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중시하는 입장이었던 반면에, 캉 여우웨이는 금문학파(今文學派)의 저물녘의 태양으로서 경세치용(經世致用)에 역점을 두었다고 한다.2이렇듯 입장이 서로 다르지만 마침 서학동점(西學東漸)과 함께 신·구학의 교체가 일어나던 시기에 신학문으로 전환하는 길의 선도자라는 점에서 양자는 역할이 같았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캉 여우웨이는 결코 국학이란 기치를 들지 않았다. 량 치챠오의 경우 그 시대가 요구하는 계몽적 학술운동을 어느 누구보다도 활발하게 벌였지만 국학의식을 공유할 수 없었다. 량 치챠오가 국학개념을 수용하고 국학운동에 동참하게 된 것은 청조가 물러난 이후의 일이었다.
이 무렵 한국의 현실은 어떠했던가? 중국과 유사한, 아니 더 심각한 민족위기의 상황에 처해 있었다.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꿔서 국가의 위상을 높여 나름으로 근대세계에 대응하는 노력을 벌인다.‘애국계몽운동’이라고 부르는, 신문물·신제도를 수용하여 개혁해보려는 움직임이 폭넓게 전개된다. 이 과정에서 신학문이 도입되었으며 국학의식이 강렬하게 일어난다. 중국에서처럼 ‘국학’을 바로 표방하고 나서진 않았지만 ‘본국학’이란 말이 쓰인 사례도 나오고, 내용상에서 보면 국학을 지향하는 학술조류가 어느정도 형성된다.“나라의 근본은 인민에게 있고 인민의 근본은 학술에 있다”(李碩桓 「大韓自强會祝辭」, 『大韓自强會月報』 창간호,1906)는 주장을 통해 민주적인 방향에서 국민주의적 학문을 추구하려는 의도를 충분히 엿볼 수 있다.
우리의 말과 글에 대한 체계적 연구를 처음 훌륭하게 착수한 주시경(周時經,1876〜1914)은 “자국을 보존하며 자국을 흥성(興盛)케 하는 도(道)는 국성(國性)을 장려함에 있고, 국성을 장려하는 도는 자국의 언문(言文)을 존중해 쓰는 것이 가장 중요”(『國語文典音韻學』,1908)함을 지적하였으니 국어학을 ‘국성’과 연관해 국가의 흥망에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고 인식한 것이다. 신채호(申采浩,1880〜1936)는 구학설·구사상을 파괴하지 않으면 신습속·신제도가 건설되지 못한다고 전제하면서도 “국수(國粹)란 것은 자국 전래의 종교·풍속·언어·역사·습관상의 일체 수미(粹美)한 유범(遺範)을 지칭한 것이다.(…) 고로 파괴라 함은 국수를 파괴함이 아니요 악습을 파괴하야 국수를 부식(扶植)함이라”(「담총」,1910)고 과격하지만 명쾌한 논조로 ‘국수의 부식’을 역설하고 있다. 신학문으로의 혁명적 전환을 주장하면서, 신학문을 민족적 자기확인의 학(學)으로 세우고자 한 것이다. 동시대 중국에서 제기된 국학의 논리와 상부상통함이 얼른 느껴진다.
이상 살펴본 바 20세기 초 중국과 한국에서는 신·구학이 교체되는 과정에서 공히 국학이 제기되었다. 이같은 양자의 유사성을 어떻게 설명해야할 것인가? 물론 상호교류에 의한 영향관계도 배제할 수 없겠으나 더욱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측면은 ‘역사적 공통성’이다. ‘상동성’은 한·중 두 나라가 역사적으로 공통의 문화배경을 가지고 있었던데다 당면한 시대상황이 유사했기 때문에 빚어진 현상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상동성 가운데 상이점이 개재될 수밖에 없는데 다양하게 일어난 ‘상이성’에 대해서도 상동성 못지않게 주목할 필요가 있음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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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 두 나라의 역사적 공통성은 주로 두 나라 사이에 지속된 밀접한 관계로 인해 빚어진 현상이다. 그 오랜 관계가 20세기 전후로 크게 성격상의 변화를 일으킨 사실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1894년을 전환점으로 해서 이후에는 근대적 세계상황과 연계되면서 이전과 다른 차원의 상동성이 출현한다.
20세기 초의 상황은 앞에서 이미 거론한 대로이다. 바로 1910년에 한국은 주권상실로 식민지 코스로 들어가게 되며,1911년에 중국은 신해혁명으로 민족혁명이 성공하긴 하지만 이후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과 내부의 분열을 수습하지 못한 채 ‘반(半)식민지’ 코스로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1945년에는 한·중이 다같이 제국주의 일본에 의한 짓밟힘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후의 진로 또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이념적 갈등에 휘말려서 한국은 민족분단의 역사가 시작되며, 중국 또한 이념갈등의 내전 끝에 대륙에는 공산주의정권, 타이완에는 국민당정권이 자리를 잡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19년, 한국에서는 3·1운동, 중국에서는 5·4운동이 각기 일어났다. 식민지 한국은 주권회복이 긴급한 과제였으므로 이른바 ‘만세시위’가 온 세상에 메아리쳤는데, 정치적 목표는 달성하지 못했으나 그 여파가 문화운동으로 전개된다. 지금 우리 눈앞에 펼쳐진 근대문화는 3·1운동으로 시발되었다고 할 수 있다. 중국 5·4운동의 문화운동으로서의 성과와 역사적 의미는 말할 나위 없다.5·4운동과 함께 펼쳐진 신문화운동으로 현대 중국이 출발했다고 보는 것이 통설이다.
3·1운동과 5·4운동의 동시성은 응당 주목할 사실이다. 이 동시성은 우연의 일치로만 돌릴 수 없을 터이다. 만약 우연이라 한다면 내재적인 필연성의 표출일 것이다. 요컨대 역사적 공통성이 초래한 상동성인데, 거기에 상호간의 영향관계 또한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사안이다. 먼저 쑨 원의 3·1운동에 대한 평가의 말을 들어본다.
대저 나라가 망한 지 10년이 못되어서 이같은 대혁명이 일어난 일은 동서고금의 역사에 보기 드문 일입니다. 세계의 같은 인류로서 누군들 귀국의 독립을 위해 원조하기를 바라지 않겠습니까? 더구나 중국과 한국은 순치(脣齒)라, 한국이 망하면 중국도 또한 병들게 됩니다. 한국이 독립하지 못하면 중국도 독립을 보전하지 못할 것은 형세상 필연입니다.(金昌淑「璧翁 七十三年 回想記」, 『心山遺稿』, 국사편찬위원회 1974)
3·1운동 직후에 쑨 원이 한국독립운동가 김창숙(金昌淑)에게 3·1운동의 경위를 자상히 듣고 그 자리에서 했던 발언이다. 이 발언으로 3·1운동이 중국인에게 얼마나 충격과 감동을 주었던가 가늠하기 어렵지 않을 듯하다.“한국이 독립하지 못하면 중국도 독립을 보전하지 못할 것”이라는 양국관계의 인식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하겠다. 돌아보건대 당시 한국과 중국은 ‘전근대적 굴레’를 탈피해야 한다는 공통의 역사적 과제를 안고 있었다. 게다가 제국주의 일본에 의해 한국은 이미 식민화된 상태이고, 중국은 바야흐로 침략·강탈을 당하는 판이었다. 양국은 ‘반일’에 있어서, 그리고 ‘반봉건’에 있어서 공통의 과제를 안고 있었던 셈이다. 중국인이 한국을 바라볼 때 쑨 원은 ‘순망치한(脣亡齒寒)의 관계’3라고 표현했지만, 사실은 동병상련(同病相憐)이 되어 마침 봉기한 3·1운동에 공명이 커질 수밖에 없었으니 3·1은 5·4의 자극제로 작용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앞에서 중국의 국학은 후 스에 의해 본 궤도에 진입한 것이라고 했는데 이 국학은 다름아닌 5·4운동의 학술적 반영이었다. 중국의 경우 5·4운동을 전후해서 신문학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된다. 먼저 신문학운동이 5·4운동을 선도했고, 이어 5·4운동의 여파가 확대되면서 신문학운동 또한 상승, 발전하게 된다. 신문학운동의 주장(主將)은 다른 누구도 아니고 후 스였다. 신문학운동의 주장에 의해 국학운동이 주도된 셈이다.
5·4운동 기간에 신문학운동 진영에서 “국고(國故)를 정리하자”는 주장이 제기되고 『국고(國故)』라는 학술지가 간행되기도 하였다.1923년에는 중국 근대학문의 중심부요 5·4운동의 진원지이기도 했던 뻬이징대학(北京大學)에서 드디어 『국학계간(國學季刊)』이 창간되었던바, 여기에 후 스는 주간으로서 「발간선언(發刊宣言)」을 집필한다.
이 「발간선언」은 마오 쯔슈이(毛子水)가 “국학진흥의 최대 중요문건”(「重印北大國學季刊前記」,1967)이라고 높이 평가하였듯, 중국 학문의 근대적 전환 즉 근대적 학문방법론을 천명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는 우파적 관점이다.1950년대 사회주의 중국은 후 스를 학풍 비판의 최대 표적으로 삼아 공격을 가했는데 그의 학술사상의 위치가 컸다는 반증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후 스가 제시한 국학의 방법론에 대해 두 가지 점을 간략히 지적해둔다.
하나는 자국 학문전통의 비판적 계승이었다. 후 스에게 있어서 국학(=國故學)은 자국 고학(古學)의 전통 계승에 강조점이 두어져 있다. 특히 명말에서 청말에 이르는 3백년을 ‘고학창명(古學昌明)시대’로 칭하고 특히 이 성과를 계승해야 할 것으로 보았다. 그럼에도 “이 3백년 동안에 거의 경사(經師)만 있었고 사상가는 없었으며, 교사자(校史者)만 있었고 역사가는 없었으며, 교주(校註)만 있었고 저작(著作)은없었다”고 냉혹하게 결함을 지적한다. 그가 주장한 바 학문전통의 계승은 비판적 계승을 전제하고 있었다.
다른 하나는 ‘역사적 안광(眼光)’이다. 그는 주장하기를 “국고는 ‘국수(國粹)’를 포함하고 또 ‘국사(國渣,자국 문화의 찌꺼기)’도 포함한다”고 하였다. 쟝 삥린이 주도하던 국학운동의 앞단계에서는 ‘국수’만을 중시해 국학을 대변하는 잡지의 명칭까지 『국수학보』라고 했다. 후 스는 ‘국수’에 ‘국사’까지 포함함으로써 국학의 영역이 “상하 3,4천년의 과거 문화를 포괄하고 일체의 문호(門戶)와 기존의 견해를 타파하게 된다”고 하였다. 이러한 관점을 그는 ‘역사적 안광’이라고 규정지은 것이다. 객관적·총체적 인식의 길을 열었다는 점에서 분명히 종래의 학문과는 방법론적으로 다름이 있다고 하겠다.
그런데 5·4운동과 국학운동을 곧바로 연계시키기에는 어긋나는 측면이 있다.5·4운동의 기본정신은 낡은 중국의 ‘사상혁명’이었다. 후 스가 우파측의 주장(主將)이라면 좌파측의 주장은 쳔 뚜슈(陳獨秀,1879〜1942)인데, 그는 학술을 논하는 자리에서 “성인을 존중하지 말자(勿尊聖)”“옛것을 숭상하지 말자(勿尊古)”“국가를 떠받들지 말자(勿尊國)”고 역설했다.그리고 국학에 직접 언급해서는 ‘국학’이란 개념 자체가 성립할 수 없는 것이라고 여지없이 비판을 가했다.4중국 신문학의 최고봉인 루 쉰(魯迅,1881〜1936)의 국학에 대한 관점은, 직접적 발언을 필자는 아직 찾아내지 못했으나 “선장본(線裝本,고서의 제본형태)은 묶어서 선반에 올려두라”고 반고적(反古的) 입장을 취했던만큼 국학운동에 부정적이었을 것이다. 그는 ‘국수’를 들고 나서는 데 대해 야유하기도 했고,5 쟝 삥린을 추도하는 글에서는 신해혁명 이후 그의 학문활동을 두고 ‘전투적 글쓰기’의 정신이 퇴색했다는 식으로 얕잡는 논조를 펴기도 했다.
국학을 표방할 때 거기에는 이데올로기가 담겨 있게 마련인데 다름아닌 민족주의이다. 좌파적 입장은 국학의 이데올로기를 수용할 수 없었다. 국학의 성격은 대개 우파적 민족주의의 색채를 띤 것이었다.
그렇긴 하지만, 당시 중국의 국학운동은 쳔 뚜슈가 제창한 세 가지 요목 중에서 “성인을 존중하지 말자”와 “옛것을 숭상하지 말자”란 두 가지는 학문의 비판정신으로 수용하고 실천하고자 했다. 루 쉰의 경우 그 자신이 『중국소설사략(中國小說史略)』을 저술하여 ‘중국 역사·문화에 대한 연구’ 즉 국학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던 것은 주지하는 사실이다. 자국의 ‘역사·문화에 대한 연구’는 좌·우의 사상적 경계를 넘어서 호응하고 실천하여 1920년대에 중국의 근대학문은 확실하게 형성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중국의 상황에 비추어 같은 시기 한국의 학술동향은 양상이 사뭇 달랐다. 문학 창작으로 말하면 비록 중국에서처럼 운동적 형태로 활발하게 전개되진 못했으나,3·1운동 이후 신청년들이 주도한 동인지가 창간되고 신문·잡지 등 근대적 매체가 출현해서 새로운 형식의 문예작품들이 봄비에 새싹이 돋듯 발표되었다.3·1운동은 신문학을 촉발하여 마침내 이땅에 근대문학의 성립을 보게 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 점에서 한국 3·1운동과 중국 5·4운동의 문학사적 의미는 상동성이 역력하다.
반면,1920년대 학술분야는 운동적 성격의 움직임은 실로 찾아보기 어려울 뿐 아니라 개별적인 저술도 별것이 없었다. 문학연구서로는 안자산(安自山,1886〜1946)의 『조선문학사』(1922)가 특기할 것이며, 신화 및 시조·민요 등에 대한 관심이 일어난 정도로 그쳤다. 그러다가 1930년대에 들어와서 비로소 근대학문이 성립하게 된다. 국권을 상실한 까닭으로 국학이란 개념을 사용하진 못했지만 ‘조선학운동’이 펼쳐져 반향을 일으켰으며, ‘진단학(震檀學)’이란 이름의 본격적인 학회와 학보가 출현했다. 조선어문학회가 결성되어, 소설사·연극사·한문학사의 정리가 이루어진 것 또한 이 무렵이다. 드디어 한국의 역사·문화의 여러 분야에서 체계적인 연구가 이루어지고 학술저작들이 속속 간행되기에 이른다. 지금 우리가 수행하는 학문의 분과와 체계는 대체로 이 시기에 틀이 갖춰진 것으로 볼 수 있다.
한국의 학술사는 내적으로 문학사에 비해서 지각을 한 꼴이며,중국과 견주어보면 10년 가까운 시차를 보인다. 이는 아마도 대중적 기반보다는 공적 제도에의 의존도가 높은 학술의 특수성이 주 원인일 것이다. 일제의 통제가 학술부문에는 더욱 강고하게, 효과적으로 미칠 수 있었다. 물론 구학문 쪽으로 눈을 돌려보면 한학적 전통의 거유노사(巨儒老師)들이 각지에 엄연히 버티고 있었다. 그러나 식민지 근대는 이런 학문전통을 아예 무시했으므로 구학문은 폐기되고 신학문은 부재한, 일시 학적 공황에 빠져든 모습이었다.
근대학문의 산실은 대학이다. 한국에서도 대학 설립은 20세기 초부터 민족적 숙원사업으로 인식되었다. 애국계몽기에 대학을 설치하기 위한 시도가 있었으나 성사되지 못했는데,3·1운동의 여파로 민립대학 설립을 위한 움직임이 다시 힘차게 일어났다. 식민통치자들은 한국인의 손에 의한 대학 설립은 끝끝내 허용하지 않고 기껏 전문학교를 존치(存置)하는 데 그쳤다. 그러나 민립대학을 설립하자는 운동이 폭넓은 호응을 받아서 이 여론을 묵살하기 어렵게 되자 대신에 그들은 관립대학을 설치했다.1924년에 개교한 경성제국대학(京城帝國大學)이 그것이다.식민지적 조건이 한국에서 근대학문의 성립을 어렵게, 늦어지게 만든 것이다.
그럼에도 1930년대에 근대학문이 성립할 수 있었던 요인은 어디에 있었을까? 기본적인 요건은 학적인 역량의 성장·축적에서 찾아야 하리라 본다. 신교육·신학문으로 향한 열의는 이미 애국계몽운동으로 분출이 되었거니와 국권을 상실한 이후로도 꺾이지 않았다. 교육·학문을 근대 적응의 방도 내지 국권 회복의 길로 확신한 나머지 해외로 유학을 가는 자들이 줄을 이었다. 조선인에게 허용한 문이 좁았지만 경성제국대학에서도 소수정예의 학자를 배출하였다.1930년 무렵이 되면 해외나 국내에서 전문교육을 받아서 학문연구에 종사하는 인원이 각 분야마다 상당수에 이르렀다. 근대학문이 성립할 주체적 조건이 그런대로 갖추어진 셈이다. 아울러 고려해야 할 외적 조건으로서 두 가지 점을 들 수 있다.6
하나는, 일제의 학적 지배에 따른 반응이다. 일제가 추진한 학적 성과가 발전하는 데 영향받고 분발한 면도 무시할 수 없겠으며, 거기서 위기의식 또한 고조된 것이다. 식민통치자들은 왜 끝끝내 대학 설립을 허용하지 않았을까? 식민지 지배를 철저히 하자면 피지배자의 정신까지 지배해야 함은 물론, 피지배 시·공간의 모든 정보를 장악할 필요가 있다. 일제 역시 구왕조의 문서와 전적(典籍)들을 널리 수합해서 자기들 관리하에 둔 한편, 조선사편수회(朝鮮史編修會)를 운영했다. 그러니 그들이 고도의 전문적인 기술과 학문을 교수하고 재생산하는 대학을 피지배자의 손에 넘겨주려 했겠는가. 일제가 주도하는 ‘식민지학’은, 지배권력의 유리한 배경에다 예리한 방법론적 무기를 가지고 조선의 역사를 비롯해서 언어·민속·지리 등 전영역에 걸쳐 조사·연구를 진행, 이미 학적으로도 압도하는 형세였다.“‘조선을 알자’ ‘조선의 과거 및 현재를 따져서 미래의 광명을 밝히자’ 하고 부르짖음이 울연(蔚然)히일어났다. 이러한 외침에 발맞춰 지금 우리의 땅에는 수다한 학술단체가 창립 성장하고 있다.”(『동아일보』 1935년1월1일자)이 신문기사는 당시 사정을 생생하게 전하고 있다.
다른 하나는, 정치운동이 봉쇄되자 찾은 출로이다.1930년대는 일제가 파시즘으로 치달아 침략의 마수를 대륙으로 뻗치면서 사상적으로 경직되어 더욱 엄혹해진 시기였다. 한국사회는 바로 이 30년대 초에 3·1운동 이후 민족전선의 좌·우 분열을 통합한 조직체신간회마저 깨지고, 좌절과 실의의 늪으로 빠져들었다. 정치적 변화를 도모하는 사회운동이 차단된 상황에서 찾은 출구의 하나가 학술 쪽이었다. 조선학운동을 주도했던 잡지 『신조선』이 “정치적 약진이 불리한 시대이니 차라리 문화적 정진에로”(1935년 1월호의 권두언)라고 내건 슬로건은 학술운동으로 진출할 수밖에 없었던 당시 정세를 극명하게 표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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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일본은 적어도 개념상으로는 국학이 부재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이미 18세기에 확립된 국학은 20세기 일본의 근대상황에서 어디로 갔을까?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1914〜96)는 현대 일본 학계의 ‘텐노(天皇)’라고 일컬어지는 학자이다. 그를 ‘학문의 텐노’로 등장시킨 첫 무대는 『일본 정치사상사 연구』라는 저작인데, 일본 군국주의가 극점에 다다른 1940년대에 씌어진 책으로 자국의 근대가 폭력적·독선적으로 작동하는 역사적·사상적 근원을 추구하고 성찰한, 그야말로 고뇌에 찬 작업의 결과물이란 평을 받고 있다. 그래서 ‘시국적 주제의 비시국적 접근’이라 일컬어지기도 한다.
이 문제적 저작에서 분석의 주 대상은 에도(江戶)시대의 유학(=漢學)과 국학이었다. 국학이 일본 근대와 정신적으로 내밀한 관계가 있다고 본 것이다. 천황 중심의 국체(國體)이데올로기에 바로 국학의 이데올로기가 접목된 것이다. 카또오 슈우이찌(加藤周一,1919〜)의 “미또학(水戶學,에도시대 미또번水戶藩에서 일어난 학파로 국학·사학·신또오神道의 근간에 유학사상이 결합됨–인용자)의 ‘국체론’은 메이지(明治) 유신의 원동력이 되지는 않았지만, 유신 뒤 정부의 관제 ‘이데올로기’의 지주로서는 도움이 되었다. 또다시 내려와서 1930년대 천황제 초국주의의 슬로건이 되었던 것은 우리들의 기억에 새롭다”(『일본문학사서설』 2, 시사일본어사 1996,245면)는 지적 그대로다. 요컨대, 국학은 근대일본을 천황제 국가로 출범시키고 군국주의로 치닫도록 만든 정신적 뿌리였다고 할 수 있다.
에도시대의 국학이란 사전적 정의에 의하면 “한학(漢學)에 대칭적 개념으로 일본 고래의 정신문화를 연구해서 밝히는 학문사상”(京大日本史辭典編纂會 『日本史辭典』,創元社 1990)을 가리키는 것이다. 주로 자국 고대의 신화·가요·기록물 등 문학적 유산에 대한 문헌학적 연구에서 시작하여 그 학적 성과는 괄목할 만하고 사상적 깊이까지 만만찮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여기에 우리로서는 물음 둘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하나는 일본이란 나라는 이른 시기에 국학이 어떻게 하나의 독자적 학문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가, 다른 하나는 그런 국학이 근대상황에서는 어디로 갔단 말인가 하는 것이다.
17세기 이래 동아시아의 한·중·일 삼국은 새로운 학풍이 제각각 발전해왔다. 그것을 한국에서는 실학으로 파악해왔으며, 중국에서는 어떤 하나의 개념이 부여되지 않고 종래 고증학적 방법론으로 중시되었는가 하면 ‘박학(樸學, 질박한 학문이란 의미로서 한대漢代의 경학을 청대淸代에 와서 계승한 학풍을 가리킴)’으로 일컬어지기도 하였다. 일본에 있어서는 일본적 신학풍으로 국학과 한학7을 함께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최근 주목할 바, 이런 한·중·일 삼국의 신학풍을 전체로 아울러 보려는 움직임이 일어나는데 실학이란 개념이 통일적 인식의 틀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동아시아 실학’이 학술용어로서 기득권을 얻고 있는 중이다. 여기서 역사적 공통성에 의한 상동성이 뚜렷이 포착되고 상동성 가운데 상이점 또한 저절로 드러난다. 상동성은 다름아닌 ‘동아시아 실학’이다. 일본에서 국학이란 개념이 조기에 성립한 것은 일본적 특수성이지만 그것은 동아시아적 차원의 상동성 가운데 특수성으로 볼 수 있다.
중국은 예로부터 자기를 세계의 중심으로, 아니 자국을 세계 자체로 인식해왔던 터이므로 국학을 분립시킬 현실조건이 근대 이전까지는 부재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 한국의 입장은 중국과는 전혀 다르며, 일본과 비슷했다고 하겠다. 그럼에도 한국은 왜 일본처럼 국학을 일으켜세우지 못했을까? 당시 한국에 국학이 원천적으로 없었다고 할 수 없다. 한국의 실학은 알려진 대로 민족자아에 대한 학적 인식이 주요부분을 이룬다. 즉 한국 실학은 국학적 성격을 내포한 것이다.
일본 학술사에서 한국 실학에 직접적으로 대응되는 성격을 찾자면 한학이다. 일본의 경우 ‘한학’으로부터 떨어져서 대척적인 의미로 국학이 성립한 데 비추어보면, 한국에서는 한학과 국학이 미분화상태로 있었다고 하겠다.이 현상을 낙후성으로 판정한다면 그 관점 자체가 근대주의적인 것이다. 역시 기본적 시각은 상호간의 지리적·문화적 조건의 차이로 이해해야 할 듯싶다. 무엇보다도 중국과는 바다를 사이에 두고 떨어져 있으며 서세(西勢)에 먼저 접할 수 있었던 일본의 위치가 한학과 국학의 분화를 촉발한 조건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반면 한국은 중국과 지리적·문화적 거리가 가까운 것에 비례해서 분화현상이 일어나기 어려웠을 것이다. 어쨌건 우리로서는 일본의 국학이 조기에 성립할 수 있었던 근거로서 자국 고유의 풍부한 문학적 유산―예컨대 『만요오슈우(萬葉集)』 등 가요나 『겐지모노가따리(源氏物語)』 등 소설의 전통―이있었음을 살펴보아야겠으며, 아울러 17〜19세기에 국학의 위상을 세운 저들의 역사적 발돋움에 대해서도 그 내용이며 향방을 주시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이 일본적 특수성을 상징하는 국학이 일본 근대학문의 제도상에서 모호하게 된 문제로 들어가보자. 국학의 전통은 근대국가로 개편되는 과정에서 어디로 사라졌을까? 거기에는 복잡한 우여곡절이 있다. 근대 일본의 교육과 학문의 정점이라 할 수 있는 토오꾜오대학(東京大學)이 개설되는 단계에서 야기된 사건이다.
토오꾜오대학의 개교는 1877년이며 근대국가의 개막인 메이지 유신은 그 10년 전이었다. 근대적 체제개편에 대학제도도 들어 있었던바, 대학을 어떤 방향으로 정립할 것인가를 두고 심각하게 대립하여 10년 동안 다투었다 한다. 국학파와 한학파에 양학파(洋學派)의 3파전이었다. 당초에는 국학파가 기세를 잡았다 한다. 처음 문을 연 대학교의 법규에 “신전(神典) 국전(國典)에 의해 국체를 앙양하고, 한적(漢籍)을 강명(講明)하여 실학실용을 이루게 할 것이다”라는 조목이 보인다. 전자는 국학에, 후자는 한학에 연계되는 것이어서, 국학은 국체의 앙양을 목적으로 함에 대해 한학은 실용적인 차원이었다. 이 국학 중심의 대학설계는 당시 일어난 신또오(神道)의 국교화(國敎化) 운동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고 한다. 국학 중심에서 한학은 양학과 함께 외번학(外蕃學)으로 밀려난다. 그러나 메이지 유신의 사상적 배경을 이룬 때문에 일시 세력을 떨친 국학파(國學派)에 대해 한학파(漢學派)의 반격이 만만치 않았다. 양파의 분쟁이 걷잡을 수 없이 되어 마침내 학교의 문을 닫는 사태에 이르렀다.
국학파와 한학파가 맞붙어 싸우는 단계에서 양학파는 거의 무풍상태에 있었다. 그런 가운데 어느덧 대학의 중심은 양학파에 가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양학파는 어부지리를 얻은 셈이다. 이내 구미의 대학제도로 기울어지면서 국학 중심의 규정은 삭제되었을 뿐 아니라, 한학의 위상도 분과의 하나로 위축되었다.‘양학’ 중심에 맞서 한학의 항의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번 싸움은 대세에 영향을 주지 못했다. 토오꾜오대학이 출범하면서 국학과 한학은 문학부의 제2과에 화한문학과(和漢文學科)란 이름으로 혼거하게 된다.1886년에 화한문학과는 화(和)문학과와 한(漢)문학과로 다시 분가했으며,1889년에 와서 화문학과는 ‘국문학과’로 개명(改名)이 되고 국사과(國史科)란 명칭도 함께 탄생하였다. 이후 일본 학술사에서 국학은 표면상 중요한 위치로는 다시 부활하지 않았다.8
그렇다 해서 일본 근대가 국학을 내면에서 해체하고 국학의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로워졌느냐 하면, 실정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근대학문이 제도적으로 국학을 폐기처분했지만 그 대신 ‘국어’ ‘국사’ ‘국문학’ 등의 개념을 도입한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대학제도의 중심에 국학을 놓으려 한 것은 이데올로기적 성향인데, 국학을 끌어내리고 한학도 뒷전으로 밀어내고 서양학을 중심에 세워서 서구의 대학제도를 도입한 것은 일종의 국가전략이다. 탈아입구(脫亞入歐)와 상통하는 논리라 하겠다. 서구 근대를 모범으로 삼은 이 국가전략이 성공적인 결과를 초래한 일본 근대는 중국·한국과 달리 국학이란 깃발을 들고 나설 이유가 없었다. 전략적 차원에서 국학을 폐기하지만 그 이데올로기조차 폐기한 것은 아니었다. 국학은 근대학문에서 표면상으로 지워지면서 내화되었으니 국어·국문학·국사학 등은 그것이 표출된 형식이다. 이들 ‘국’자 돌림 또한 서구이론으로 무장한 것임은 물론이다.
역사학을 두고 보면 중심에 ‘국사’를 세우고 ‘동양사’와 ‘서양사’를 배치하는 체계를 잡고 있다.‘동양’이란 기실 서양에 대칭되는 의미로서 일본 근대에 설정된 개념이다.문제는 일본 국가의 동양관이다. 이 대목에서 일본의 유명한 기독교 사상가 우찌무라 칸조오(內村鑑三,1861〜1930)의 말에 귀를 기울여보자.
청일전쟁의 구실은 동양평화를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전쟁은 다시 큰 일로전쟁을 낳았습니다. 일로전쟁 또한 그 구실은 동양평화를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또한 더욱 더욱 큰 동양평화를 위한 전쟁을 낳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日露戰爭에서 내가 받은 이익」,『新希望』,1905; 카또오 슈우이찌, 앞의 책 383면에서 재인용)
일본이 러일전쟁에 승리하여 국민적 환희로 들떠 있을 때 한 발언이다. 러일전쟁은 표면적으로 ‘동양평화’를 구실로 삼았다. 이 전쟁의 승리가 “더욱 더욱 큰 동양평화를 위한 전쟁을 낳을 것”이라는 그의 예상은, 만주사변·중국침략에서 태평양전쟁으로 나아간 역사의 진행으로 적중하고 말았다. 어쨌건 일본 근대는 한 종교사상가의 불길한 예견을 적중시키는 방향으로 질주하였다. 거기에 이데올로기적 분식(粉飾)을 하는 데 시녀적으로 기여한 ‘국어’ ‘국문학’ ‘국사학’이 있었던 한편, 식민지 진출에 발맞춰 나아가서 지식을 확장한 ‘동양사학’이 있었다는 점을 오늘의 우리는 마음 깊이 새겨보아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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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로 들어오면서 동아시아의 전통적 세계상(像)은 전도되었다. 여러 천년 동안 세계의 중심으로 자처했던 중국은 주변부로 전락한 반면, 주변부 일본이 급부상한 것이다. 동아시아 전역은 지구적 세계의 주변부이긴 했지만, 이 지역 내에서는 신흥 일본의 패권이 위력을 떨쳐서 한반도가 먼저 짓밟힘을 당했고 그 발자국은 중국대륙으로 뻗어나갔다. 전도된 동아시아는 짓밟고 짓밟히는 상쟁·침탈·억압으로 갈등의 소용돌이였다.
이러한 동아시아 상황에서 중국과 한국의 국학은 위기의식의 반영이었다 할 것이다. 국학을 표면상 배제하고 근대학문을 수립한 일본의 경우는 침략적 제국주의의 국가의지에 국학의식이 저류(底流)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21세기의 동아시아는 무언가 분명치 않으나 20세기와는 아주 다른 새로운 동아시아상을 모색하고 있다. 학문하는 우리로서는 새로운 동아시아상의 밑그림이라도 구상해야 하지 않을까. 이를 위해 20세기 국학을 회고해보았다.
당초 한·중의 국학은 민족위기의 산물이며 빼앗기고 잃어버린 자기 정체성을 찾기 위한 것이었던만큼 방어적·소극적 성격을 띨 수밖에 없었고, 그것의 이념적 기초인 민족주의 역시 자민족중심주의 쪽으로 편협했다. 국학의 태생적 맹점이라 하겠다. 국학은 ‘한시적 운명’을 타고났던 터요, 그렇기에 20세기 당년에 ‘탈(脫)국학’의 방향으로 나아갔던 것 또한 당위성을 인정할 면이 넓다고 하겠다.
반면, 일본 근대는 무력적으로만 아니고 지적으로도 동아시아를 선도하고 압도했음을 우리는 이제 냉철하게 돌아보아,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비판할 것은 비판하는 열린 자세가 바람직하다고 하겠다. 일본의 근대학문은 침략·지배를 위한 학문으로 육성되고 발전하여 다분히 제국주의적 성격을 띠었지만, 실은 그렇기에 더더욱 무서운 근대적 합리성과 치밀성을 갖추었던 터이므로 거기에 수세적이고 편협한 ‘국학적 대응’을 가지고는 처음부터 승산이 없었다고도 할 수 있겠다.
근래 다시 ‘한국학’에 대한 요청이 제기되고 있다. 국학을 외면했던 사회주의 중국 역시 최근에는 자신의 국학을 재평가하려는 움직임이 있는 것 같다. 그렇다 해서 곧 국학의 부활을 뜻하는 것은 아니고, 또 그렇게 되어서도 안될 것이다. 오늘 우리의 학문은 시각 및 방법론의 재정립, 그야말로 새로운 패러다임의 학문을 긴히 필요로 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서 전제해야 할 몇가지 점을 들어둔다.
첫째, 일국사적 시각을 넘어서 동아시아를 하나의 전체로서 사고하고 고구(考究)해야 한다는 것이다.(동아시아학이란 개념을 구사해야 할 것인지는 논의해야겠으나 동아시아적 시야는 필요하며, 그런 의미에서 동아시아는 방법론이다.)
둘째, 우리의 학적 사고는 인류 보편을 항시 고려하여 ‘세계적 지평’에 올라서야 하며, 세계적 수준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동아시아적 시야는 세계적 지평을 획득하는 과정이다.)
셋째, 민족주의는 근대주의와 표리의 관계에 있다. 근대주의의 극복을 통해서 민족주의의 극복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최근에 불거진 한·중의 역사분쟁에 대해 간략히 언급하는 것으로 글을 맺고자 한다.발해는 물론 고구려까지 중국사에 귀속된다는 주장이 대다수의 한국사람에겐 놀랍고 황당하게 들리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자국의 현재 영토 안에서 역사상에 명멸했던 국가들은 모두 ‘지방정권’이란 개념으로 규정한 당대 중국의 논리로 보면 당연한 귀결이 되는 듯하다. 필자는 전공은 아니라도 20세기 동아시아 국학을 반성적으로 논한 처지에서 현안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에 대해서 침묵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든다. 고구려를 굳이 자기 역사로 싸잡아넣는 당대 중국의논리는 현재적 입장을 무리하게 밀고 나아간 것이며 일국사적, 자민족중심적이란 지적을 면할 수 없다. 여기에 한국이 민족주의적으로 맞서는 방식 또한 분란을 상승시키는 역작용을 하기 마련이다. 뿐 아니라, 동아시아의 미래를 위한 동아시아공동체를 지향하는 데 거꾸로 가기가 되기 십상이다. 역시 동아시아 과거 여러 민족의 삶과 다양한 문화를 존중하면서 하나의 전체로 파악하는 통합 동아시아사(史)를 통해서 문제가 저절로 해소되도록 방법론을 강구함이 바람직하니 이런 방향으로 시각 조정이 되어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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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쟝 삥린은 “동족에 의해 (정권이) 교체되는 것을 ‘혁명’, 이민족에 의해 탈취당하는 것을 ‘멸망’이라 하며, 동족에 의한 체제의 바뀌어짐을 ‘혁명’, 이민족을 몰아내는 것을 ‘광복’이라 이른다”고 전제한 다음, 지금 중국의 경우 이민족에 의해 멸망된 경우이므로 광복을 도모한다고 말해야 옳지만 이민족을 몰아내는 데 그치지 않고 정교(政敎)·학술 전반을 개혁해야 하는 까닭에 감히 혁명이라 부르짖는다고 천명한 바 있다.(「革命軍序」)↩
- 캉 여우웨이의 경세치용적 입장과 쟝 삥린의 실사구시적 입장은 현실에 대한 대응방법에서도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학문의 목적을 현실적용에 두는 캉 여우웨이는 ‘탁고개제(托古改制, 옛것에 의탁해서 제도를 개혁함)’를 주장하였는데, 진리의 현실적 객관성을 중시하는 구시(求是)의 입장에서는 그런 태도가 부회착공(附會鑿空, 어거지로 끌어다붙임)으로 비치고 심하게는 곡학간록(曲學干祿, 학문을 왜곡해서 벼슬을 구함)으로 여겨진다. 경세치용을 주장하면 결국 체제 내에서 개혁을 추구하기 때문에 근본적 개혁으로 나아가기는 어렵게 된다.(陳平原『中國現代學術之建立』,臺北:麥田出版2000,35~68면 참조) 캉 여우웨이나 량 치챠오가 개혁을 열심히 부르짖으면서도 끝내 청조를 부정하지 못한 데는 경세치용이란 논리적 장애가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쟝 삥린의 ‘강학불망혁명(講學不忘革命)’이란 주장은 일견해서 구시(求是)적 입장과 정면으로 상치되는 듯하다. 그런데 쟝 삥린에 있어 혁명적 현실참여는 일단 치용(致用)과 다른 차원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학문 방법론상에서 객관적 엄정성을 견지하는 구시(求是)적 입장은 체제 자체에 대한 근원적 성찰을 가능케 한 것으로 생각된다.↩
- ‘순망치한의 관계’란 중국이 근대세계로 진입하면서 가졌던 조선관의 일면이다. 리 훙쟝(李鴻章)은 1876년 조선의 개항이 이루어진 싯점에서 조선이 일본의 영향권으로 들어가면 자국의 동삼성(東三省)이 외부의 위협에 직접 노출된다고 하면서 바로 순망치한이란 말을 쓰고 있다. 조선을 자국의 번방(藩邦, 울타리)으로 간주하는 생각을 노정한 것이다.李鴻章 「論日本派使入朝鮮」, 야마무로 신이찌(山室信一)『여럿이며 하나인 아시아』, 창비 2003, 105〜106면 참조.↩
- 陳獨秀 「隨感錄 1」, 『新靑年』 제4권 제4호,1918;「國學」,『前鋒』 제3호,1924(『陳獨秀選集』,天津人民出版社 1990,199면).↩
- 청말에 제기된 “국수를 보존하자”는 주장에 대해 루 쉰은 “지사들이 국수를 보존하자고 하는 것은 낡은 것을 광복하자는 의미였으며, 고관들이 국수를 보존하자고 하는 것은 유학생들더러 머리태를 자르지 말게 하자는 의미였다”라고 꼬집은 다음, ‘국수’를 마냥 좋다고 말하는 자들에 대해 “쇄국정책을 폐기하기 전에는 전국이 온통 ‘국수’ 천지였으니 도리대로 말하면 응당 좋아야 했을 것이다”라고 야유를 하였다(「수감록 35」,『로신선집』2, 뻬이징: 민족출판사 1987,151면).↩
- 이 대목의 논의는 필자의 「국학의 성립과정과 실학에 대한 인식」, 『실사구시의 한국학』, 창작과비평사 2000,29〜31면에서 원용한 것이다.↩
- 일본에서 한학(漢學)이란 중국의 유학 및 중국에 관한 학문 일반을 가리키는데, 에도시대로 와서 한학이 하나의 뚜렷한 학파를 형성해 한학파(漢學派) 혹은 고학파(古學派)라고 불린다. 그리하여 한학과 국학은 에도시대에 쌍벽을 이루게 된다. 양자는 대립적인 관계로 이야기되고 있으나 한학의 방법론이 국학에 영향을 미치는 상보적 관계도 있었다 한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은 한학파의 큰 학자인 오규우 소라이(荻生邐徠)와다자이 惴다이(太宰春臺)의 경학 저작을 읽어보고 높이 평가한 바 있다.↩
- 이 대목의 서술은 『東京大學百年史』(東京大學出版部1984~86)의 해당부분을 대략 요약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