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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평

 

소통불능을 다룬 두 영화

「사마리아」와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

 

 

김윤영 金倫永

소설가 yoon2828@hitel.net

 

 

김기덕(金基德) 영화에 대해 나는 애정어린 지지자에 속한다. 물론 그의 영화도 빼놓지 않고 봐왔다. 유럽여행 갈 경비를 벌려고 원조교제하는 아이, 역시 친구를 따라 매춘하는 여고생, 자기 딸과 관계맺는 남자들을 ‘징벌’하느라 바쁜 아버지까지, 작위적인 설정들로 가득한 영화 「사마리아」도 역시 보지 않을 수 없었다.‘이 세상은 어차피 개차반이야!’ 하는 발악으로 날뛰는 듯한 스크린을 쳐다보며 나는 몇가지 의문을 품었다. 왜 아버지는 딸과 적극적인 대화를 하지 않는가. 그들은 애초부터 소통할 수 없는 관계였나. 그들의 골이 깊어져도(아버지는 딸을 죽이고 싶을 것이다) 아무 대안도 없는가. 그렇게 영화는 끝났고 극단적인 소통불능은 전과 양상을 달리하면서도 더 두드러진 듯했다. 사랑하지만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고 대화하고 싶지만 그 방법을 모르는 그의 영화 속 주인공들은 대부분 파국에 이르고, 신기하게도 나는 그 엽기적 상황을 보면서 소통에 대한 감독의 강한 열망을, 그것도 냉소적인 게 아니라 너무나 절실하고 뜨겁기까지 한 시선을 느끼곤 했다. 물론 그의 영화를 보는 게 썩 유쾌한 것만은 아니다. 그의 영화는 숙변과도 같다. 지금도 내 몸 어딘가에 반갑지 않은 손님처럼 눌어붙어 있는 듯한 느낌이다. 요즘 세상에 숙변 같은 작품이 어디 흔한가. 그러니 김기덕 영화는 싫든 좋든 정서를 환기시켜줄 수밖에 없다. 그의 영화를 보며 그 역(逆)이 되는 세상을, 원활히 소통되는 인간다운 관계를 꿈꾸고, 이곳이 마초들과 부조리와 폭력 등이 판치는 말도 안되는 세상임을 잊지 않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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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무조건 그의 영화를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슬슬 그의 영화가 지겨워진다는 사람이 늘고, 너무 뻔하다고 불평하기도 한다. 나 역시도 그의 데뷔작 「악어」를 보던 때와는 사뭇 느낌이 다르다. 그때 나는 아직 이십대로 가진 게 없고 결혼도 안했다. 그래서 더욱 그를 지지해야 한다고 믿었을지 모른다.7,8년이 흐른 지금 「사마리아」를 보며 나는 기저귀도 안 뗀 딸아이의 미래를 근심한다. 김기덕은 그대로일지 모르지만 나는 변했다. 그래서인가, 왜 점점 그의 진정성이 덜 느껴지게 되는 걸까. 내가 그의 관객이 되기엔 너무 닳았다는 걸 십분 인정하더라도, 그도 연륜이 쌓이면서 관객과 소통하려는 노력을 해야 하는 게 아닐까 조심스레 생각해본다. 물론 처음부터 그의 영화언어는 거칠고 불친절했지만 알아들을 수 있고 알아듣고 싶었다. 하지만 점점 시험공부하는 심정으로 그의 영화를 보게 될 것 같다. 증오를 근간으로 영화를 만든다고 했던 김기덕 감독, 지금까지 숱한 비판과 공격을 받으며 성장해왔지만, 이젠 다른 궤도에 오를 때도 되지 않았나 싶다. 영화란 관객과의 리드미컬한 소통이라고 여겨온 내게, 이 고집불통 감독과의 소통불능 조짐은 정말 안타깝다. 마스터베이션으로 끝나기엔 그의 영화들이 너무 아깝지 않은가.

 

빌 머레이(Bill Murray)라는 배우를 모른다면 쏘피아 코폴라(Sofia Coppola)의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원제 “Lost In Translation”)라는 영화에 대해 논하기가 상당히 곤란해진다.‘한 중년남자와 젊은 여자가 동양의 낯선 도시에서 만난다. 서로를 깊이 느낀다. 별 기약없이 남자는 곧 떠난다.’ 이런 단순하다 못해 진부한 구성의 영화가 빛을 발한 것은 바로 빌 머레이의 호연에 힘입은 바 크다.중.년.남.자. 이 식상한 분류표에 의해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인물들이 판에 박힌 연기를 해왔던가. 이 처연한 인물군을 빌 머레이처럼 훌륭하게 묘파한 경우를 나는 본 적이 없다. 이 중년사내에겐 동양인의 친절도 거북하기만 하다. 미국에 있는 아내는 남편의 기분 따윈 안중에도 없다는 듯 카펫 따위나 고르길 종용한다. 그는 조용히 읊조린다. 좀 다르게 살아보고 싶어,라고. 사실 빌 머레이는 이런 역할과 전혀 어울릴 법하지 않았다. 냉소적인 유머를 구사하는 코미디 배우인 그가, 머리는 은발이 되고 큰 키는 구부정해져 돌아왔다. 더이상 우리를 웃기려 들지도 않는다. 영리하고 야심 많고 자의식도 강하던 남자가 나이가 들어가면서 피로와 권태에 젖어 천천히 무기력해진 느낌, 이는 보통 품위나 노련함이라고 불리지만 그의 연기는 그 이상을 보여준다. 우울하며 살짝 뒤틀렸지만 사려깊음과 체념을 왔다 갔다 하는 그 무언의 연기와 여백. 한편, 이 주인공을 더 돋보이게 하는 파트너는 여주인공이라기보다 토오꾜오(東京)라는 배경이다. 포스트모던한 메트로폴리스이며 동서양의 문화가 혼재되어 있는 세계 최강의 경제대국, 롤랑 바르뜨(Roland Barthes)가 명명한 ‘기호의 제국’ 수도답게 매혹적이지만 쉽게 융화가 되지 않는 곳이다. 여기선 마치 소통불능이 필연인 듯 더 과장되고 미화된다. 그리고 담백하기 그지없는 영화가 바로 이 지점에서 상당히 흥미로운 암시를 보여주고 있다.영화의 주요 무대인 호텔 하이얏트라는 글로벌 체인은, 미국식을 고수할 수 있게 하는 가장 핵심적이고 안정적인 매개체이고 토오꾜오라는 낯설고 기괴한 도시―여기서 오리엔탈리즘의 혐의는 너무나 은근해서 간과되기 쉽다―적대적이고 모호한 소도구로 기능한다. 더 확장될 수 있는 소통불능이란 근사한 이야깃거리도 이렇게 공간의 구획처럼 밋밋하고 단순하게 로맨스로 전락해버리고 더이상의 깊이있는 성찰을 차단한다. 그와 함께 다국적 기업이나 가벼운 미국식 만남, 그런 권태로운 소통 등에 대한 이미지들은 은밀히 우리에게 긍정적·낭만적 이미지로 유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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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들에 비하면 이 정도는 미미한 수준이며 애초에 이런 소박한 영화에서 짚어낼 문제점이 아닐지도 모른다. 개인주의가 공고한 그들에게 ‘소통불능’이란 주제는, 하이얏트 호텔의 재즈바처럼 말랑말랑하게 녹여져서 미국 여피(Yuppie)들의 한가한 로맨스로 끝나도 충분히 그 진지함을 인정받기도 한다.(실제로 이 영화의 평가는 그렇게 후했다.) 그러나 영화를 보는 일부 관객들, 특히 제3세계의 고단한 관객 일부는 그런 사치스런 소통불능의 포즈에 이제는 좀 질리거나 거꾸로 그런 부유한 선진국민의 자리를 아무 생각 없이 선망하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영화가 끝날 때쯤 한쪽 어깨를 기대고 싶은 빌 머레이의 스산한 매력도, ‘록시뮤직’(roxy music)의 발랄한 노래를 그토록 비통하게 부른 그의 열창에도 불구하고, 씁쓸한 감상은 지울 수가 없었다.

김기덕이 싸우는 불공평함, 혹은 그런 종류의 육식세상, 서로 소통되지 못한 채 물어뜯고 칼부림하는 지극히 한국적인 영화에 넌더리를 내면서도 나는 이 유복한 미국인들의 세련된 방황과 소통불능의 몸짓이 그 성찰에 못 미친다는 걸 깨닫는다. 사려깊은 젊은 여성감독의 수작이 바다 건너오면서 마치 업그레이드된 키치(kitsch)처럼 변질되고 마는 현실이 아쉽긴 하다. 이처럼 나른한 영화도 정말 드문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