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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1499년 가르나따, 문명의 교차로
김재기 장편 『알라 할림』(전3권), 이론과실천 2002
한기욱 韓基煜
인제대 영문과 교수 englhkwn@ijnc.inje.ac.kr
사람들은 복잡하고 불가해한 사태에 직면할수록 쌈빡한 해명에 솔깃해지는 것일까. 보스니아 내전과 코소보 사태, 특히 작년의 9·11과 아프간 전쟁을 거치면서, 냉전 이후 잦아지는 지구촌 곳곳의 분쟁 원인을 문명간의 ‘충돌’에서 찾는 발상이 인기를 누렸다. 갈수록 극단으로 치닫는 팔레스타인과 체첸의 분쟁 역시 이런 생각을 부추긴다. 이스라엘 쪽의 무단점령은 언급조차 않은 채 팔레스타인 쪽의 자살폭탄테러를 이슬람 원리주의의 산물로 부각하는 서구 매스컴들 역시 이런 생각을 유포하는 데 한몫 톡톡히 했다. 에드워드 싸이드는 이런 ‘문명충돌론’이 이슬람문명과 기독교문명 사이의 복잡다단하고 근본적으로 호혜적인 관계를 왜곡하는 위험한 발상임을 누차 경고했지만, 당사자들조차 그의 호소를 귀담아듣는 것 같지 않았다. 김재기(金在起)의 역사추리소설 『알라 할림』이 반가운 것은 ‘문명충돌론’의 손쉬운 도식에 맞서 두 문명의 관계를 새롭게 궁구하기 때문이다.
작가의 문제의식은 이 소설의 시공간적 배경에 이미 함축되어 있는 듯하다. 가령, 이야기의 무대를 1099년 십자군의 예루살렘 약탈이나 1435년 무슬림의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에 맞추어 설정했다면 소설의 구도는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1499년 가르나따(에스빠냐 안달루씨아 지방의 그라나다)의 이야기가 특별할 수 있는 것은 이슬람문명과 기독교문명의 상호관계를 정복이나 충돌의 관점에서보다 교류와 비교성찰의 관점에서 포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찍이 8세기경 아프리카 북부의 무슬림(무어인)이 이베리아반도에 건설한 가르나따 왕국은 1493년에 에스빠냐 여왕 이싸벨에게 재정복된다. 7세기 이상 무슬림이 지배하던 가르나따의 통치권이 기독교인에게로 넘어가고 양 문명의 운명이 교차하는 싯점에서 『알라 할림』은 시작되는 것이다. 게다가, 1492년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발견 역시 작품의 구도 속에 들어오면서 중세와 근대의 분기점이 양 문명의 뒤바뀌는 운명과 겹쳐진다. 주인공인 알리가 무슬림 아버지와 기독교도 어머니 사이에 태어나 양 문명의 경계에 위치하는 것도 우연은 아니다.
두 문명이 교차하면서 생겨나는 복잡한 문제들을 쌍방향의 관점에서 보여주고 그 중층적인 의미를 추적하려는 뜻깊은 발상은 서사적·장르적으로는 ‘잡종’적인 결과물을 낳은 듯하다. (두툼한 3권 분량의 이야기가 필요한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두 문명의 맞물린 관계를 조명하는 역사와 철학, 종교와 인종, 정치와 문화의 큰 이야기가 주인공 알리를 둘러싼 우정과 로맨스, 투쟁과 배신 같은 작은 이야기와 겹쳐진다. 작가는 이 중층적인 서사를 음모극의 플롯과 추리적인 기법으로 엮어나간다.
인종·종교·정치의 차원에서 양 문명의 극단에 위치한 인물들–이를테면 이슬람 무장조직 ‘알하피즈’의 지도자 이브라힘이나 기독교 이단심문관 미겔 신부–이 문명의 ‘충돌’을 기정사실화하여 가르나따를 지배와 반란의 악순환으로 몰아가는 세력이라면 알리와 그의 에스빠냐 친구 로뻬스는 양 문명의 교류와 공존을 모색하는 사람들이다. 작가는 비록 이들 중도파의 노력이 극단주의자들의 음모와 반란에 의해 결실을 맺지 못하지만 그 의의만큼은 충분히 사주고 살려낼 필요가 있다고 역설하는 듯하다. 무슬림의 통치가 기독교의 통치보다 타인종과 타종교에 훨씬 관용적인 것으로 그려져 있는 것도 주목할 만하다. 가령, 에스빠냐 기독교 세력은 무슬림으로부터 통치권을 빼앗자 곧바로 유태인들을 추방하고 나중에는 무슬림들의 서적을 불태우는 야만적인 행위까지 저지른다.
이런 역사적인 사실들의 의미를 되새기는 것도 이 소설을 읽는 재미 가운데 하나이지만 만약 이슬람문명의 구체적인 면모가 핍진하게 그려지지 않았다면 소설의 시공간에 대한 실감은 현저히 떨어졌을 것이다. 이 소설의 놀라운 점은 우리와 아득히 떨어져 있는 역사상의 한 공간을 치밀하게 재구성한 데 있다. 당시 사용된 아랍어 입말이나 이슬람 생활양식들(예컨대 예배와 라마단 풍습 등)을 꼼꼼히 재현하고 알함라(알함브라) 궁전이나 이슬람사원의 분위기를 공들여 묘사한 세목들을 대하면 타문화에 대한 이런 도저한 역사적 상상력과 고증정신이 어디서 나오는지 궁금할 따름이다.
이 작품에 빈번히 등장하는 종교적·철학적 담론 역시 주목할 만하다. 이는 이 작가의 철학교수로서의 이력이 요긴하게 활용된 대목일 터이다. 가령, 이단심문관 미겔 신부나 이슬람 과격파 우마르의 발언들이 그들 각각의 극단적 근본주의의 논리에 따라 그럴법하게 구사되어 있다. 그러나 여러 성격의 담론들 가운데 이 작품의 구도에 가장 의미심장한 울림을 주는 것은 알리와 로뻬스가 양 문명을 대비하고 그 관계를 논하면서 나누는 대화이다. 가령, 로뻬스가 알리에게 하는 말을 들어보라. “어쩌면 당신들 무슬림들은 엄격한 율법으로 육신을 믿음에 매어놓았기 때문에, 오히려 영혼의 자유를 누릴 수 있었던 건지도 모르죠. 당신도 알다시피 우리 주 그리스도나 당신네들의 위대한 예언자 무함마드가 이 땅에 오기도 전에, 고대의 현자들은 이미 엄청난 지혜를 축적해놓았죠. 당신들이 그 지혜를 전수받고 이용할 수 있었던 것도 어쩌면 당신들의 영혼이 그만큼 자유로웠기 때문인지도 모른다는 겁니다.”(1권 350면) 이 구절이 그리스 로마의 고전적 지혜를 서구 기독교가 아니라 이슬람권에서 전수받은 이유를 나름으로 추측한 것이라면 연이은 대목에서 로뻬스는 두 문명의 교류와 엇갈린 운명 속에 서구 근대라는 새 시대가 열림을 예감한다. “하지만…… 오랫동안 우리 기독교들의 스승이었던 당신들의 지혜도 이제 한계에 부딪친 것 같아요. 아무런 혁신도 없이 전통이나 신앙에만 매달리는 동안 고인 물이 썩듯이 당신들의 지혜도 조금씩 썩어갔겠죠. 당신의 조국이 망한 것도 따지고 보면 그 때문일 거예요. 아까도 말했듯이 지중해 저편에서는 지난 수백년 동안 당신들의 젖을 빨며 자랐던 아이들이 이제 어른이 되어 새로운 세계를 준비하고 있어요.”(1권 351면)
종교적·철학적 담론에 촛점을 둔 점에서, 이 작품은 중세 기독교의 여러 종파들의 논법이 정교하게 짜여 있는 움베르또 에꼬의 『장미의 이름』과 비교할 만하다. 게다가 두 작품 모두 추리기법을 활용하는데, 그 방식은 대조적이다. 『알라 할림』의 경우 사건의 발단은 기독교 수도사 옷을 입은 한 사내가 그리스어 암호서찰을 몸에 지니고 죽은 채로 발견되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그 사내의 정체와 암호서찰의 뜻을 해독하기 위한 알리의 지적 모험은 많은 것을 해결하지만 그럴수록 의문은 더 쌓여만 간다. 작가는 『장미의 이름』과 달리 탁월한 추리력의 소유자가 미스터리 사건을 말끔하게 해결하는 식의 구성을 의도적으로 피한 듯하다. ‘알라 할림’(신만이 안다)이라는 제목 자체가 이 점을 강조한다. 하지만 의문의 해결이 곧 또다른 의문을 낳는 구조가 이어지면서 처음엔 촉각을 곤두세우던 독자가 갈수록 지치고 나중에는 아예 흥미를 잃을 수도 있음을 감안했어야 하지 않을까. 작가 자신이 ‘후기’에서 밝혔듯 작품의 “첫째 목표는 독자들을 즐겁게 하는 것”이라면 이런 식의 열린 결말의 추리기법이 왜 즐겁게 느껴지지 못하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어쩌면 독자의 사유가 할리우드식의 말끔한 해결에 길들어 있기 때문인지 모른다. 하지만 이런 추리기법이 이 작품의 진지한 사유 및 담론의 전개와 따로 노는 느낌을 주기 때문에 작품의 흥미가 떨어진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도스또예프스끼의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처럼 ‘말끔한 해결’이나 ‘열린 결말’의 차원을 떠나 주제와 플롯에 필요한 만큼 활용되는 유연한 추리기법이라면 어떨까. 연애 이야기가 작품의 핵심에서 밀려나는 것도 아쉽다. 알리가 집시 여인 ‘알칼바 알칼라’의 농염한 매력에 사로잡히는 과정은 리얼한 바가 있으며 남녀관계를 다루는 솜씨도 상당하다고 생각되는데, 두 사람의 관계는 중동무이한 느낌이다. 하녀 아마의 알리에 대한 애틋하고 지순한 연정도 그 종말에 가서는 너무 간단히 처리된다. 남녀간의 사랑은 결국 이 방대한 작품에서 양념일 뿐인가. 대단한 역작이니만큼 아쉬움도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