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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이시영 시집 『바다 호수』, 문학동네 2004

이불 밖으로 나와 있는 발가락들

 

 

장석남 張錫南

시인, 한양여대 문창과 교수 sssnnnjjj@hanmail.net

 

 

바다-호수

일생이 무엇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지 우리는 명확하게 알지 못한다. 알 수도 없다. 때문에 일부는 ‘운명’이라는 이름에 주어버리기도 한다. 그렇다고는 해도 ‘기억’이 있어서 그것을 채우는 것이 무엇인지 더듬을 수는 있다. 어쩌면 기억이 쌓여서 스스로의 생식능력(판단력)이 생기고부터는 기억 스스로가 ‘먹고 마시며’ 미래를 열어간다는 사실은 이른바 서양식 철학사조의 이름을 들이대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니까 일생이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가 할 때 천생 우리는 기억의 내용들을 내놓을밖에 달리 댈 것이 마땅치 않다. 개인들의 기억의 교집합이 결국은 ‘역사현실’이 될 것이다. 역사현실의 체험도 그러고 보면 개인의 체감 속으로 들어오게, 또 나가게 되어 있다.

역사가 체감으로써 개인과 상응하기 시작한 이른바 근대라는 것도 우리 모국어 권에는 불과 얼마 전에야 도래한 듯하다. 진보라는 차원에서, 우리 개인들이 역사현실에 잇닿아 있다는 자각과 그 자각의 실천과정은 역사의 진화과정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가령 “어쩌다 검찰청 조사라도 있어 늦는 밤이면 벌써 구치소 좁은 방이 그리워지고 부산한 동료들이 이불 속에 파묻어 놓았을 저녁밥이 생각나고 그곳도 집이라고 호송버스가 인덕원 사거리에 이르면 마음이 턱 놓이고 가슴은 뛰는 불빛들로 따스해지는 것이었다”(「집」 전문)고 진술했을 때 이 ‘개인’의 위치를 우리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체제 또는 역사에 빼앗겼으나 한편으로는 또다시 그곳에서도 삶이 이루어지는, 이 역사적 응달이자 체온이 없지 않은 현장을 무엇이라 이름붙일 수 있을 것인가? 혁명적 사고에는 낭만적으로 비춰질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시란 결국 그러한, 아직은 이름이 없는 명명소(命名所)를 찾아다니는 인류의 문법인 모양이다. 이시영(李時英)이 근작에 호출해내는 명명소들, 그 미묘소(微妙所)들의 동서남북은 즐겁고 노엽고 슬프고도 기쁜 ‘시대’와 그 줄기인 개인적 시간의 벽화들이다. 그 개인은 고답적 개인이 아닌, 그러니까 개인과 역사가 미묘한 물꼬를 타고 와서 만나는 소용돌이 형국의 개인이다.

 

잠들면서 내려다보니 이불 밖으로 발가락들이 모두 삐죽이 나와 있다

의왕시 포일동 서울구치소 12舍下9방, 과실치사의 고단한 운전사들이 세상모르고 단잠 든 밤

―「겨울」 전문

 

얼핏 그저 단순하기 그지없는 소품의 그림일 뿐이지만 그 장면을 선택하기까지의 마음의 움직임을 짐작하는 일은 녹록치 않다. 화자의 시선이 머물고 있는 곳은 이불 밖으로 나온 발가락들이다.(과연 그러할까?) 결핍의 표상으로서의 저 맨발은 가련하다. 한겨울 발을 덮으면 코가 나오고 코를 덮자니 발이 나오는 상황에서 발이 나와 있을 때, 얼굴을 가린 인간은 모두가 동질의 것이 되고 만다.‘얼굴’이라는 ‘상부(上部)를 가리고 발가락들[下部]로 나란히 만났을 때 인간은 모두 정답다. 그런데 그 상황의 내부는 복잡하다. 시선의 주인의 죄목이 어떤 것이었든지 관계없이 분노도 연민도 아닌 그저 ‘시선’만을 제시할 뿐이지만 그것은 한군데에 있다고 할 수 없는 방황하는 시선이다.‘과실치사’의 그 ‘발가락들’이 ‘나’를 불편하게 하고 잠 못 들게 일깨우고 있는 것이다.‘고단한 운전사들’, 생계형 직업인인 그들이 한 생명을 송두리째 거두어가는 중대한, 결코 돌이킬 수 없는 일을 저질러놓았을 때 그 ‘사이’에서 화자의 시선은 어디로도 고정되지 않는다. 그 엄청난 사태 앞에서도 세상모르고 단잠을 자는 인간의 타고난 잔혹은 또 어쩌란 말인가. 순간적으로 지나간 단순한 장면이지만 먼 훗날인 ‘지금’까지도 ‘불편’으로 남아 있다가 시의 몸을 거쳐 마음으로부터 놓여나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이렇듯 쏟아져나오는 이시영의 근작에서, 하나이지만 여러 겹으로 얽혀 있는 화자의 시선의 높낮이를 따라가는 일은 ‘매우’ 아프고 또 어떤 경우는 ‘매우’ 유쾌하다.

무엇보다 이시영 시집 『바다 호수』는 그러한 겹시선을 간직한 자가 지난 생애에 겪은 인물들을 그린 벽화다. 사방연속무늬벽화를 연상시키는데 평균에서 더 큰 그림이나 더 작은 그림이 없이 일정한 간격과 결코 도드라진 색채가 없는 담담한 톤이 특징일 것이다. 멀리는 소년시절의 혈육에서부터 가장 가까이 지냈을 문단사람들, 가까이는 박영근(이 시집엔 아직 시인의 후배들이 많이 등장하지는 않는다. 박영근과 김정환 정도다)까지의 인물들이 눈물겹게 얼룩져 있다. 병든 친구가 살던 ‘전북 장수군 번암면’(「고향」)과 같은 오지와 화자의 유년공간, 공동화장실이 남아 있던 청년기의 정릉 골짜기, 멀리 아프리카 사바나와 몽골 초원까지의 공간이 펼쳐지는데 그 중간엔 역시 서울이라는 일상의 화택(火宅)이 중심을 잡고 있다. 그것은 생존과 죽음 사이에 가로놓인 비극과 웃음, 농담과 눈물겨움의 간격이기도 하다.

 

협곡에서의 마지막 날 밤, 맹수들 중 어떤 것은 다 자란 제 새끼들을 캄캄한 절벽으로 떨어뜨려 그중 살아 돌아온 것들만을 데리고 대평원으로 나아간다고 한다. 아침 햇살 아래 늠실대며 빛나는 표범 새끼들의 자랑스런 등이여!

―「사바나」 전문

 

생존의 논리가 가장 첨예한 정글에서 화자의 시선은 냉철해서 내면을 드러내지 않는다. 다만 ‘자랑스러운 등이여!’라는 감탄이 나타나지만 그것이 인간 된 입장에서의 자랑스러움이라는 것은 아닐 것이다. 살아 돌아온 것들은 마땅히 감탄할 만하지만 단순한 감탄의 시선으로만 생각되지 않는 것은 왜일까? 그 시선의 또 한 겹은 다음 시에서 확인할 수 있다.

 

주인의 주검이 살과 뼈로 분리되고 있는 동안 개들은 문밖에서 얌전히 목을 빼고 기다렸다. 이윽고 양동이를 들고 나온 사내가 뼈들을 던져주자 개들은 옛 주인을 한 짝씩 물고 사라졌다. 만년설의 등이 희게 빛나는 아침 대지 속으로.

―「弔喪」 전문

 

이 풍경은 죽음을 향한 풍경을 다시 발견한 것이다. 여기서 ‘향’했다는 것은 죽음을 죽음으로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한 죽음을 ‘처치’하고 있는 측면까지 나타내기 위해서다. 배면의 드리워진 ‘만년설’ 앞에서는 순간에 해당하는 일생을 극단적으로 단순화한 어느 장례를 통해 화자는 역시 아무런 감정노출 없이 발견하고 드러낸다.

좀전에 인용한 두 시의 풍경 ‘사이’, 즉 (삶이 아닌) 생존과 죽음, 어떤 의식(儀式)도 없는, 의식 ‘이전’의 죽음 앞에서 모든 인간은 역시 예의 그 ‘맨발가락들’처럼 다정한 것일 수밖에 없는 것일까? 이 시에는 한때 ‘웬수’나 ‘적’이었을 인물들까지도 따뜻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그것은 저 맨발가락의, 상부를 가린 인간적 정겨움의 차원을 획득한 경지의 표시라 할 수 있다.‘희게 빛나는 만년설의 등’이 결국 시간화된 ‘표범 새끼들의 자랑스런 등’인 것처럼.

이시영의 이번 시집의 벽화는 당연히 체험의 폭발에 해당하는 난숙한 발로로서의 꽃다발 같은 것인데 내부에서 아우성치는 시의 씨앗들을 놓아주는 것들로 읽힌다. 무당의 내부에서는 때로 신기(神氣)가 발버둥친다는 말처럼 창작자로서의 행복한 폭발 같다. 생생하게 날것 그대로 시 속에서 살아 있는, 아니 살아나가고 있는 이 ‘맨살’의 인물들은 자칫 칭찬하거나 찬양하거나 하는 행사조의 그것이 아니다. 백석의 「허준」이나 미당의 「박용래」 같은 실명의 좋은 인물시들과 구분되는 점일 것이다. 김춘수 같은 고답적 인물해석과도 거리를 둔 독특한 위치의 인물들인 셈이다.

유·무명했던 개별적 인간들의 스냅사진 같은 장면을 통한 역사에의 나들이, 우리를 헛웃음 짓게 했던 개별적 사건, 가령 「토일 드라마」나 「문화 스피커」 같은 작품을 통한 한 시대에의 나들이는 그대로 문화사적 가치까지를 아우른다. 우스갯말이 허용된다면 ‘고근학(考近學)’적 파노라마라고 할까? 여하튼 유신시대를 통과해나오는 과정의 흥미진진한 박물지의 일종인 것만은 확실하다. 뜨거웠던 한 시대의 비장함에 대한 반추와 애련을 밑그림으로 한 시대의 담담한 벽화라 할 만하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