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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파란만장 억척어멈들의 난장판
이명랑 연작소설 『삼오식당』, 시공사 2002
서영인 徐榮裀
문학평론가. sinpodo12@hanmail.net
삶이 힘들어 지칠 때 시장에 가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나는 이 말을 믿지 않는다. 질퍽한 시장바닥에서, 요란한 호객의 고함소리에서 고된 삶을 이겨내는 삶의 활력을, 생활의 힘을 배운다고? 정말 그럴까. 끈질긴 생명력이라든가, 시궁창 속에서도 희망을 보는 낙관 같은, 시장을 말하는 숱한 수사들은 실상은 그 속에서 뒤범벅으로 뒹굴고 있는 시끄럽고 번잡한 악다구니와, 인간의 존엄도 사랑도 돈의 위력 앞에 한줌 사치일 뿐이라는 영악한 이기심과 물욕을 감쪽같이 가리려는 그럴듯한 포장이 아닐까. 그렇다면 시장에서 위안을 얻고 삶을 이길 지혜를 배운다는 말은 한낱 구경꾼의 자기만족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이명랑(李明娘)의 『삼오식당』을 읽으며 내심 반갑고 통쾌했던 것도 이 때문이다. 『삼오식당』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시끌벅적한 활기 속에 인심과 인정이 넘쳐나는 후덕한 풍경과는 거리가 멀다. 그들은 대부분 뻔뻔스러움과 몰염치라는 대책없는 무기를 꼬나잡고 있는데, 이는 생활에 찌들린 기나긴 세월의 내공으로 무장된 것이기도 하다. 노름꾼 남편을 박대하면서도 애인인 점원 황씨를 위해서는 온갖 극성과 애살맞음을 마다하지 않는 ‘0번 아줌마’에게 장꾼들의 손가락질은 코웃음거리일 뿐이다. 눈엣가시 같은 ‘봉투아줌마’를 내몰기 위해 재수굿을 하고 굿상에 오른 돼지머리를 봉투아줌마의 입속에 밀어넣어주는 당진상회 할머니, 자신의 행운에만 입이 벌어져 평생의 밑천인 평상을 내놓는 봉투아줌마에게 조금의 위로도 연민도 내보이지 않는 그 뻔뻔함과 몰인정함이라니. 하기야 그들의 뻔뻔함과 경위없음은 하루이틀의 일도 아니고 또 그들만의 것도 아니다. 장터 소문의 근원지이며 도움 안되는 분란의 진원지이기도 한 고물장수 박씨 할머니, 돈 받고 하는 애보기 일을 들쑥날쑥 마음 내키는 대로 해버리면서 욕설과 지청구쯤 아랑곳하지 않는 ‘곤조통 로타리 할머니’, 공중화장실 앞을 지키고 앉아 용변이 급한 사람들을 상대로 잔돈푼을 울궈내는 ‘똥할매’, 이들은 하나같이 영등포시장의 분통 밑천이고 사람들의 분통 앞에서 정작 자신들은 너무나 속편하고 거리낌없는 후안무치의 최고수들이다.
그런데 신기한 일은, 이들이 뻔뻔함과 몰염치를 무기로 시장바닥에서 잘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고, 그 이웃 역시 오늘은 분통을 터뜨리고 이를 갈면서도 내일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이들을 받아들이면서 살아간다는 것이다. 어쩌면 별반 신기한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몇년 전의 애보기에 대한 댓가로 지금까지 삼오식당 냉장고를 제 것처럼 아는 영등포시장 이쁜이 영석이네나, 점원 황씨의 아이를 낳은 엄마를 개 몰듯이 내쫓고 대신 노름빚을 피해 집을 나갔다가 목돈을 쥐고 돌아온 아버지의 보신을 챙기는 0번 아줌마네 딸들은 살아온 세월의 파란만장에서 뒤질 뿐 최고수 할머니들과 크게 다를 것도 없다. 그들은 모두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우리네의 상식으로는 최소한 이 정도는 지니고 살아야 된다고 생각되는 자존심마저도 밑 닦은 화장지 휴지통에 던져버리듯 휙, 집어던져”(133면)버릴 수 있는 이들이다. “들고 돌아올 그 가방 속에 하나 가득 지폐다발이 들어 있기만 하면 (…) 터럭 한올의 미움도, 증오도 없이 그녀를 다시 받아들일 것만 같”(83면)은 시장의 질서와 법 속에서 그들은 함께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 시장의 법은 살기 위해 무슨 짓이라도 해야 하는 생활의 각박함과 고단함이기도 하고, 악착을 떨고 패악을 쳐봐도 결국은 언제나 무시당하는 천한 장사꾼일 수밖에 없는 삶의 설움이기도 하다. 이것을 함께 보고 느끼고 겪은 자들에게 몰염치와 경위없음이, 제 뱃속 챙기기의 이기심이 무어 그리 대단한 허물이겠는가. 이들은 서로의 얼굴에서 자신의 얼굴을 보고, 서로의 과거와 현재에서 자신의 삶의 역정(歷程)을 읽는다. 그래서 영등포 시장바닥에서 40년을 살아온 삼오식당 여주인은, 영석이네에게 냉장고를 내주고, 밥 한상 시키고 온갖 유세를 다 떠는 당진상회 할머니에게 새로 담근 김치를 갖다 바치고, 밥 준비에, 설거지에, 배달에 종종걸음을 치는 자신의 진땀에도 외눈 하나 깜짝 않는 제멋대로인 일꾼 박씨 할머니와 로타리 할머니의 역성을 들고, 똥할매의 화장실 횡포를 성토하는 장꾼들에게 한바탕 호통을 친다.
시장의 풍속에 대한 생생하고 활기 넘치는 묘사보다도, 시장의 날언어들이 펼치는 해학과 넉살의 장관보다도 이 작품을 돋보이게 하는 것은 강퍅한 시장의 저 밑바닥에서 끌어올린 시장 사람들에 대한 공감과 이해 그리고 연민이다. 황씨의 아이를 낳았지만 황씨에게 배신당하고, 집에서 내쫓기는 0번 아줌마의 모습에서도 작가의 분신일 삼오식당 둘째딸은 쓸쓸하고 슬픈 삶의 속내를 읽는다. “거북이처럼 생활을 등에 지고 있는 여자가 하나 그 고달픔을 토로하고, 사내는 여자의 생활에 불어터진 투박한 손을 어루만”(77면)지는 풍경, 그 풍경 속에 잠긴 0번 아줌마는 더이상 뻔뻔하고 행실 더러운 시장바닥 여편네가 아니라 “사람답게 한번 살아보고 싶다고, 허공에다 대고 팔을 휘젓는”(같은 곳) 슬픈 사람일 뿐이다. “누르면 누르는 대로 찌그러지고, 때리면 때리는 대로 멍이 든 채 그저 그 자리에서 가만히 (…) 그가 누구든, 그것이 무엇이든 그저 묵묵히 견뎌내”(220면)는, 탄성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똥할매의 살갗은 그대로 똥할매의 삶이다. 인간의 가장 기본적 욕구인 배설의 순간에도 치욕을 느끼게 하는 똥할매에 대한 증오도 이 세월에 멍들고 삶에 억눌린 똥할매의 몸 앞에서는 잠시 숙연해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인간의 존엄도 삶에 대한 예의도 지킬 수 없는 이 시장바닥의 몰상식과 몰염치가 오히려 인간에 대한 목메는 감동이기도 한 역설의 근원도 여기에 있다.
이쯤 되면 시장에서 삶을 배운다는 소문의 진위를 가린답시고 짐짓 위악을 떨었던 잘난 척은 슬며시 기가 죽는다. 나는 아직 시장에서 위안을 구할 자격도 그 위안을 논할 자격도 없는 것을. 시장에서 삶을 배울 수 있다면 그것은 시장의 활력과 분주함 때문이 아니라 황폐와 남루 그리고 협잡과 비열의 진창 속에서 숨쉬는 삶에 대한 경외와 존중 때문인 것을. 소설 속의 삼오식당 둘째딸이 혼자만 노는 아이에서 ‘미친 개’로, 대학원생으로, 소설가로, 그리고 시장사람으로 다시 돌아오는 긴긴 세월의 수련에 의해 겨우 그 첫머리에 들어선 것처럼 자격을 갖추는 일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다. 그리고 그 길에 들어선 사람에게는 더이상 위안도 삶을 북돋우는 용기도 새삼스럽게 필요하지 않을 것인데, 그들에게 시장은 위안이나 용기가 아니라 ‘그저, 이미 생활’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