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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김기택 金基澤
1957년 안양 출생. 198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태아의 잠』 『바늘구멍 속의 폭풍』 『사무원』 등이 있음. muwoosu@kornet.net
타이어
놀라 돌아보니 승용차가 트럭 앞에서 급정거하고 있다
그 찢어지는 소리가 도살당하는 돼지의 비명소리를 닮았다
도로가 죽음으로 질주하는 타이어를 강제로 잡아당기니
두려움의 끝까지 간 마음이 내지르는 소리가 나는구나
둥글고 탄력있는 타이어도 극한 상황에서는
돼지의 성대를 지나가는 공기처럼 진동하며 우는구나
일그러진 승용차가 견인차에 끌려 떠난 자리에
두 줄기 길고 검은 타이어 자국이 남아 있다
최후까지 악쓰다가 아스팔트 바닥에 붙어버린 마음을
아무것도 모르는 타이어들이 씽씽 밟고 지나간다
물도 불처럼 타오른다
아직 김이나 수증기라는 말을 모르는 아이가
끓는 물을 보더니 물에서 연기 난다고 소리친다.
물에서 연기가 난다?
그렇지. 물이 끓는다는 건 물이 탄다는 말이지.
수면(水面)을 박차고 솟구쳐오르다 가라앉는
뿔같이 생긴, 혹같이 생긴 물의 불길들,
그 물이 탄 연기가 허공으로 올라가는 거지.
잔잔하던 수면의 저 격렬한 뒤틀림!
나는 저 뒤틀림을 닮은 성난 표정을 기억하고 있다.
심장에서 터져나오는 불길을 견디느라
끓는 수면처럼 꿈틀거리던 눈과 눈썹, 코와 입술을.
그때 입에서는 불길이 밀어올린 연기가
끓는 소리를 내며 이글이글 피어오르고 있었지.
그 말의 화력은 바로 나에게 옮겨붙을 듯 거세었지.
물이나 몸은 기름이나 나무처럼 가연성이었던 것.
언제든 흔적없이 타버릴 수 있는 인화물이었던 것.
지금 솥 밑에서 타오르는 불길은
솥 안에서 구슬처럼 동그란 불방울이 되어
무수히 많은 뿔처럼 힘차게 수면을 들이받는다.
악을 쓰며 터지고 일그러지고 뒤틀리던 물은
부드러운 물방울 연기가 되어 공기 속으로 스며든다.
그들의 춘투
5월 아침인데
도로변에 누런 은행잎 같은 것들이 깔려 있다.
바람도 없는데 어떤 것은 팔랑거리기도 한다.
갑자기 구두 밑에서 무언가 물컹한 것이 터진다.
구두 밑을 보니 나방이 으깨어져 있다.
어젯밤은 대단했다고 한다.
불빛이 흘러나오는 빌딩 창마다
나방떼가 새카맣게 붙어 창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고 한다.
야근하던 사람들이 놀라 서둘러 퇴근했다고 한다.
일찍 찾아온 더위 탓이라고 한다.
어제는 낮에 종로를 지나가다
두 시간이 넘도록 차 안에 갇혀 꼼짝할 수가 없었다.
농촌에서 전세버스를 타고 상경한 시위대가
도로 한복판에서 전투경찰과 격렬하게 몸싸움하고 있었다.
이젠 농촌에서도 비닐에 싸여 있는 음식을 먹는다고 한다.
플라스틱병이나 깡통에 든 물을 마신다고 한다.
고체로 된 투명한 공기
밤이면 발광도 하는 공기, 유리창에
나방들은 멋모르고 날아왔다가 부딪쳤을 것이다.
은행잎처럼 바닥에 쌓이면서도
벽처럼 딱딱한 공기를 끝내 이해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