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평
『뉴턴과 아인슈타인, 우리가 몰랐던 천재들의 창조성』, 창비 2003
과학적 상상력의 조건
이지훈 李知勳
한국해양대 강사 jihounlee@hanmail.net
물리학의 응용은 우리 삶의 양식을 바꿔놓았다. 이 과정에서 현대 물리학은 몇명의 스타를 낳았는데 이들의 인기는 할리우드 영화배우에 못지않았다. 그런데 스타가 되는 비결은 배우와 물리학자가 서로 다르다. 배우는 자신이 나온 영화가 알려지고 이해되는 만큼 스타가 된다. 그러면 아인슈타인의 경우는 어떤가? 그가 만든 이론이 이해되지 못하는 만큼 스타가 되었다. 모르는 양이 많을수록, 모르는 깊이가 깊을수록 오히려 인기는 높아졌다. 이상한 일이다.‘모르기 때문에 믿는다’는 중세적 신앙의 태도마저 엿보이지 않는가? 물리학이 사방으로 힘을 뻗칠 때 사람들은 어쩌면 무지에서 우러난 존경과 열광으로 과학의 천재들을 저 먼 하늘의 별자리에 올려놓았다.
홍성욱·이상욱 등이 쓴 『뉴턴과 아인슈타인, 우리가 몰랐던 천재들의 창조성』은 이제 과학 천재들의 ‘탈신화화’를 시도한다. 먼저 그들도 ‘천부적인 능력’을 타고난 것이 아님을 밝힌다. 그렇다. 엄청난 기억력, 계산능력, 남다른 두개골 형태 등이 반드시 창조성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새로운 이론의 틀을 마련한다는 뜻의 창의성이 꼭 천부적인 능력에서 나온 것은 아니다. 그러면 무엇이 필요한가? “기존 이론에 대한 비판적인 견해” “흩어져 있는 개별적 사실들 사이의 연관성을 찾아내는 능력” “집중력과 끈기”(8면) 같은 구체적인 태도와 자질이 필요하다. 이에 따라 저자들은 뉴턴과 아인슈타인의 실제 작업을 꼼꼼하게 되짚어준다. 여기서 나온 교훈 하나. 새 이론은 대개 기존 이론의 한계를 깨달을 때 창조되는데 그 한계를 감지하려면 먼저 기존 이론을 잘 알아야 한다는 점. 그렇다. 근대 과학혁명의 길을 연 갈릴레오 또한 스스로를 전복시킨 중세 임페투스(Impetus) 이론의 대가였다. 온고(溫故) 없이는 지신(知新)도 없다고 할까? 이 책에는 뉴턴의 ‘노트 정리’, 독서법 등도 소개되지만, 이것이 단순히 ‘우등생이 되는 법’과 구별되는 것은 바로 이런 맥락이다.
이 책은 또한 아인슈타인의 작업과정을 되밟으며 창조를 위한 ‘지침’들을 얻어낸다. 특히 와닿는 것은 “오류를 인정하고 과감히 변신”(222면)한다는 것.1914년에 자기가 쓴 논문이 틀렸다고 스스로 용감하게 인정한 것이 일반상대성이론을 완성하는 데 결정타가 되었다. 자기 오류를 인정하기가 어찌 쉬운 일이겠는가? 과학의 문제인 동시에 윤리의 문제이다. 일찍이 스피노자가 새로운 인식의 길을 제안할 때 거기에 ‘윤리학’이란 이름을 붙인 까닭도 이런 맥락과 무관하지 않다. 과학의 혁신이 기존이론의 잘못을 깨닫는 것에서 나온다면, 그 기존의 잘못 속에는 자기 잘못도 들어 있다는 깨달음! 이것을 다른 사람과 더불어 인정하고 바로잡으려는 노력이야말로 과학정신, 또는 창조성의 윤리를 이룬다.
그래서 과학활동은 개방적이며 공동체적이다. 자기 오류를 깨닫는 데에는 다른 사람의 생각을 듣는 것이 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흔히 떠오르는 천재 과학자의 이미지라면 홀로 실험실에 파묻혀 세상의 반대를 무릅쓰고 외롭게 연구하는 모습일 성싶다. 그러나 틀렸다. 과학 탐구는 본질적으로 ‘함께 하는 작업’이다. 다른 문화활동을 한번 떠올려보자. 오해와 무관심 속에서 작업하던 화가나 음악가가 사후에 천재 대접을 받는 경우는 많다. 기술, 도구를 발명하는 영역에도 고독한 발명가라는 캐릭터는 분명히 있다. 반면에 과학의 역사는 다르다. 아리스타르코스(Aristarchos)는 기원전 3세기에 태양 중심의 지동설을 얘기했다. 그럼에도 그를 과학의 천재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단지 자기 생각을 내놓았을 뿐 증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만일 기발한 생각을 내놓는 것이 과학적 창조라면 아마 수없이 많은 천재들이 기억될 것이다. 하지만 과학이론은 늘 당대 과학자 공동체를 납득시켜야 한다. 이 점은 과학논문의 서술양식에서도 엿보인다.18세기 이후 과학 문헌에서는 1인칭 복수형이 주어로 자리잡는다. 과학자 공동체가 성립하면서 1인칭 단수형이 전제하는 저자 중심의 관점이 차츰 사라졌음을 말해준다. 과학활동은 집체적(collective)이다. 그렇다면 과학적 창조성 또한 과학자 공동체와 관련하여 이해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이 책은 ‘협동작업’에 참여하는 것을 창의성을 위한 기본 지침으로 제시한다.
천재의 활동에도 어떤 여건이 필요한가? 이 책은 이 물음에 ‘그렇다’고 대답하며 그 필요조건을 잘 밝혀놓는다. 그러면 충분조건은 무엇인가? 이를테면 ‘천재의 99%는 노력이며 1%는 영감’이라고 할 때 1%는 어디에서 나오는가? 이 책은 속 시원한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는다.“발산적 사고와 수렴적 사고”(246면)를 대조하며, 창의성에 상응하는 전자를 위해서는 후자가 꼭 필요하다는 설명이 있을 뿐이다. 물론 이런 설명은 천재의 통념에서 거품을 뺌으로써, 우리 과학도의 학습을 격려하는 의의가 분명히 있다. 그럼에도1%의 기원은 궁금하다. 누가 과연 그 비밀을 풀 수 있으랴마는 앞에서 인용한 개념 하나를 실마리로 붙들어보자.“흩어진 개별적 사실들 사이의 연관성을 찾아내는 능력.”(8면) 모르긴 해도 과학적 창조에서 으뜸가는 능력이다. 비유컨대 사과가 땅에 떨어지는 현상과 밀물, 썰물이 연관된다는 발상에서부터 뉴턴은 만유인력 법칙을 만들었다. 이렇게 새로운 연관성을 뚫어보는 상상력은 단순히 과학지식을 쌓는다고 생기지는 않는다. 그런데 뉴턴의 상상력은 그가 심취한 유니테리언(unitarian,삼위일체를 부정하고 신의 신성만 인정하는 교파) 교리와 연금술과 관계있다는 견해가 있다. 한편 갈릴레오의 상상력은 그를 후원한 메디치(Medici) 집안의 신플라톤주의, 르네쌍스의 자유로운 문화풍토, 천대받던 공인의 기술문화와 무관하지 않으며, 아인슈타인의 상상력 또한 그가 탐닉한 철학과 음악의 세계와 무관하지 않다는 견해도 있다. 즉 새로운 발상을 내놓은 천재들은 대개 ‘자기 세계 바깥의 생각’에 열려 있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러한 개방성은 과학탐구의 집중을 방해할 듯하지만, 천재는 이것을 오히려 디딤돌로 쓴 셈이다. 인문사회학과 예술의 폭넓은 이해가 자연과학의 상상력을 긷는 샘이 되었다. 따지고 보면 이런 문화적 개방성은 과학 본연의 개방성, 공동체성과 대립하지 않는다. 아인슈타인은 늘 전쟁과 파시즘에 반대하며 일종의 평화적 공동체주의를 지지하는 활동을 벌였는데, 이것이 단지 한 과학자의 여가활동쯤으로 보이지 않는 까닭은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