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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동북아경제중심’의 가능성과 문제점(21세기의 한반도 구상 1)

 

정신 인프라가 ‘동북아중심’의 요체이다

 

 

최병권 崔炳權

조선일보 빠리특파원, 문화일보 논설위원 역임. 현재 시사평론지 『Weekly SOL』의 발행인 겸 편집인. 저서로 『세계시민입문』 『뉴 밀레니엄, 무엇을 생각하고 어떻게 할 것인가』 『아메리카』(공저) 등이 있음. bksol@hanmail.net

 

 

‘동북아중심국가’ 또는 ‘동북아경제중심’이라는 새로운 국가경영비전이 제시됐다. ‘노 비전’ ‘노 리더십’ ‘노 체인지’의 ‘3 노’, 그중에서도 특히 우리가 가장 문제로 삼았던 ‘노 비전’의 한 시대가 끝나는 것 같아 여간 기쁘지 않다. 비전은 항해의 나침반이나 여행길의 신호판과 같은 것이다.

장기발전비전 없이 그냥 되는대로 하루하루를 살다보면 이 일 저 일과 부딪치고,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일이 생기는가 하면 처음 출발할 때 지향했던 목표지점을 잃고 엉뚱한 길로 접어들기 쉽다. 민주화와 함께 만발했던 국민적 기대가 국민적 실망, 국민적 냉소와 허무주의로 끝을 맺은 지난 10년간의 쓴 경험도 국가발전의 밑그림이 애당초 없었거나, 있었다고 하더라도 지극히 정치구호적인 것이었거나, 아니면 처음의 국가발전비전을 누군가가 진행과정에서 왜곡해버린 데에 따른 것이 아니었을까 한다.

노무현 대통령의 ‘참여정부’ 출범을 두고 여러 사람들이 ‘기적’이라고 말한다.과학적으로 분석해도 가능하지 않을 것 같던 일이 현실화됐을 때 우리는 기적이라고 한다. 그러나 기적도 사실 따져보면 인과응보의 법칙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않으며, 그 점에서 기적은 없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기적이래도 좋고 기적이 아닌 합리성의 극적인 안무래도 좋다.

어떻든 새 정부가 들어섰고, 이 새 정부에서 국가의 장기발전비전을 제시하고 있다. 동북아경제중심이 그것이다. 노대통령도 취임식 이후 기회 있을 때마다 ‘동북아경제중심’을 이야기하면서 비전의 실현을 위한 국민통합을 요청하고 있다. 그리고 동북아중심의 장기 국가발전의 방향에 담길 구체적 프로그램을 작성할 실무위원도 구성된다고 한다. 비전과 프로그램, 정책과 실제적인 행동지침들이 곧 제시될 예정이다.

 

모든 낯선 것들에 대해서는 거부감이 없을 수 없다. ‘중심’이라는 말도 우리에게는 낯선 말이다. ‘중심’을 지금 중국 사람들은 흔히 영어의 ‘center’ 또는 ‘institute’의 뜻으로 사용하고 있는 듯하다. ‘중국 과학기술중심’이라고 하면 ‘중국 과학기술연구원’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참여정부가 말하는 ‘동북아경제중심’에서 ‘중심’은 물론 ‘연구소’가 아니고, ‘쎈터’라는 뜻과도 조금 거리가 있는 것 같다. ‘동북아경제중심’을 청와대 쪽에서는 영어로 ‘a northeast business hub’로 표기한다는 말도 있다. “인근 국가로부터의 항의도 있고 해서 고심중”이라고 하는데 영어 표기대로 하면 한국이 동북아 기업활동의 여러 거점 중 하나가 되겠다는 것이다. ‘동북아경제중심’이 주는 메씨지가 상당히 약화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영어 표기가 어떻든 ‘동북아경제중심’은 한국이 동북아에서 우뚝 서는 존재로 새로 발돋움하겠다는 국가경영의 의지로 받아들여진다. 바로 그 때문에 ‘고심’을 하고 여러가지 말들도 생기고 있다. ‘중심이라니 우리가 무슨 중심이냐’는 말에서부터 중국은 그 자체로 하나의 완결된 중심이고, 일본은 지리적으로 동북아 국가지만 정치경제적으로 서방세계에 속할뿐더러 일본이 아시아에서 벗어나 유럽에 들어간다는 ‘탈아입구(脫亞入歐)’를 선언한 지가 언제인데 이제 와서 동북아를 하나의 정치경제단위로 내세우느냐는 말도 없지 않다.

특히 지난 정권에서 고위관료였던 어떤 사람은 ‘동북아경제중심’ 또는 ‘동북아중심국가’에 대해 “인구, 국토 등의 개관적인 변수들을 무시하고 순전히 주관적인 의지에 의해 동아시아의 중심국가가 되겠다고 선언하는 것은 자칫 잘못하면 주변 강대국들로부터 한국이 객관성 없는 환상을 추구하고 부질없는 행동을 할지 모른다는 우려를 유발할 수도 있다”며 “그렇게 되면 우리는 중심국가는커녕 보통국가가 되기도 어려울 수 있다”고 한다. 입 가진 자는 모두 한마디씩 하고 있는데 말은 하지 않는 것보다는 하는 것이 좋다. 비록 그것이 비우호적이거나 빈정대는 것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국가경영의 그림이 크면 클수록 수많은 말의 세례 속에서 비전의 구체적 프로그램이 정교해지고 정책내용이 더욱 풍부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만인의 만가지 말들에 이어 동북아중심국가 또는 동북아경제중심에 대해 한마디 거들고자 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경제중심이든 중심국가든 실체는 하나일 것이다. 한국이 더이상 변방이 되지 않겠다는 것이고, 우리의 운명을 타자에게 맡기지 않고 스스로 개척하겠다는 뜻이 담겨져 있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중심이다. 모든 사물에는 중심이 있고, 중심으로부터 구심력이 나온다. 사람과 물건을 끌어당기는 구심력이 없는 것은 중심이 아닌 것이다. 구심력을 다른 말로 하면 매력일 텐데 매력에도 여러가지가 있다. 약탈의 대상도 분명히 매력이 된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말하는 매력은 약탈의 대상이 되어 군침을 흘리게 하는 지난날의 그런 매력은 아니다.

그곳에 가면 무엇인가를 얻고 배우며 함께 협력해서 더욱더 큰 것을 이룩할 수 있다는 기대와 신뢰가 바로 중심의 매력 포인트이다. 그래서 중심에는 사람과 물건, 지식과 정보가 몰려들고 항상 개방되어 있다. 국경이 열려 있고, 사회가 열려 있으며, 사람들의 마음이 열려 있다. 열려 있지 않고는 사람과 물건, 정보와 지식이 몰려들 수 없는 것이다. 열려 있으면서도 자기 자신을 상실하지 않고 다른 문화와 다른 문물을 받아들여 나의 것을 더욱 풍부하게 하는 것이 중심이다. 그런만큼 중심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위험을 가지고 있다. 중심을 잘못 내세우다가는 남의 것을 흡수, 통합하기 이전에 나의 것을 오히려 흡수, 통합당할 수가 있는 것이다.

또 중심에서 나오는 끌림, 다른 말로 하면 매력의 크기는 나라나 인구의 크기와 비례하는 것도 아니다. 면적이 넓고 인구가 많음에도 전혀 찾고 싶지 않은 나라가 있는 반면 그 반대의 나라도 있다. 끌림은 강함이나 크기와 관계가 없는 것이다. 이 점에서 한국이 동북아중심을 내세웠다고 해서 하등 이상할 것이 없으며 이를 비웃는 것은 어리석음의 징표이거나 악의일 따름이다. 어느 나라에든 중심은 있다. 문제는 이 중심에서 나오는 구심력과 끌림의 강함 또는 약함이다. 작은 나라라도 큰 중심과 강한 끌림을 얼마든지 가질 수 있는데 네덜란드가 바로 그런 나라이다.

 

세계 여러 다국적기업의 유럽 본사가 대부분 네덜란드에 자리잡고 있다. 네덜란드의 구심력에 끌린 것인데, 이것이 네덜란드로 하여금 유럽의 경제중심이 되게 하고 있다. 네덜란드의 이같은 강력한 끌림의 힘은 무엇 때문인가? 로테르담 항구를 비롯한 물류 인프라, 잘 조직된 교통과 정보통신망? 물론 그런 것들도 있다. 그러나 사회간접자본으로서 그 정도의 인프라는 약간의 차이만 있을 뿐 유럽 대부분의 국가들이 갖추고 있다. 네덜란드가 유럽의 경제중심으로 들어서고 있는 것은 사회간접자본으로서의 인프라 외에 더욱 근본적인 것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건강하고 튼튼한 정신 인프라가 그것이다. 네덜란드에는 과소비와 나태, 허장성세와 부패가 원천적으로 봉쇄되는 정신 인프라가 깔려 있고, 교회까지 일상적으로 감시하는 온갖 형태의 비정부조직과 건강한 언론, 시민단체 들이 있다. 그리고 세무공무원이 납세자의 식사 한끼 대접마저 거부하게 하는 무서운 법이 있다. 법 앞에서의 평등이 지켜지고 있고, 공권력이 무차별적으로 행사된다. 공권력이 무차별적으로 행사된다는 것은 학연과 지연, 혈연의 연줄망과 권력과 금력이 법망을 뚫지 못한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이렇게 해서 형성된 사회적인 연대감은 개방에 따른 다국적 공격을 물리치게 한다.

네덜란드에는 ‘불만의 겨울’이나 노동자의 가두시위도 없고 집이 없어 길거리에서 얼어죽는 부랑자도 없으며 빈민가 게토도 없다. 과거 활동경력이 어쨌든간에 최저생계비는 국가가 책임지고 있다. 개방과 무국경의 세계화시대라고 하지만 다국적기업 유럽 본사들이 진출해 있는 네덜란드는 국가가 시장에 의해 무장해제당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네덜란드는 여전히 작지만 빛나고 강한 국가이다. 이것이 네덜란드의 끌림이 되고 있다. 네덜란드에서는 적어도 표면상으로는 모든 것이 자유이다. 모든 것이 자유로운 열린 사회이지 않고는 경제중심이 되기 힘들다. 정당도 수없이 많고 심지어 마리화나까지 합법화되어 있다. 그런데 네덜란드에서 마리화나를 피우는 사람은 이를 법으로 엄격하게 금하고 있는 유럽 다른 나라들에 비해 10분의 1이 채 안된다. 이는 사회의 자율적인 통제 덕분이다. 자율적인 통제는 노사관계 등 네덜란드 사회 전반에서 규범처럼 작용하고 있다. 베아트릭스 여왕의 말처럼 ‘다양성 속의 통일’이 잘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자유와 다양성, 그리고 다양성이 무질서로 흐르지 않는 다양성 속의 통일이 경제중심을 가능케 하고 있다.

네덜란드는 1인당 국민소득이 3만 달러를 넘어선 선진 자본주의사회이다. 그런데도 밍크코트를 파는 가게도 없고 밍크코트를 입는 사람도 없다. 밍크코트를 입고 거리에 나섰다가는 선망의 대상이 아니라 조롱의 대상이 되고 만다. 또 거의 모든 상품의 질과 가격, 모양이 동일하다. 환경운동단체와 동물보호단체 들이 밍크코트를 입은 여자들에게 페인트를 뿌리고 돌을 던지고부터 네덜란드에서 밍크코트가 자취를 감추었다. 과소비와 사치는 자유로운 네덜란드에서 터부가 되고 있는 것이다. 돈이 많다고 해서 질이 좋은 고가의 상품을 구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집도 같고 자동차도 같으며 가구도 이케아 상표의 조립식 가구로 통일되어 있다. 과소비가 애초부터 사회구조적으로 통제되고 있다. 소비문화에 관한 한 네덜란드는 교과서적인 사회주의사회처럼 느껴질 정도이다. 마가린을 먹고 자기들이 생산하는 양질의 버터는 수출하고 있다. 그러나 생산문화에 들어서면 네덜란드만큼 시장경쟁과 이익추구에 높은 비중을 두는 사회도 드물다. 노동시장도 그렇고 자본과 상품, 기술시장도 그렇다. 경쟁에서 지는 것이야말로 네덜란드에서는 악이다.

네덜란드는 깔뱅주의 사회이다.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버는 것은 신의 뜻에 합당한 것이나 번 돈을 자기 마음대로 흥청망청 쓰는 것은 죄악이라는 기독교 신앙이 수백년의 역사를 두고 네덜란드인들의 일상생활을 지배하고 있다. 프로테스탄티즘이 미국에서는 개인주의와 대중소비문화로 발전했으나 네덜란드에서는 정신과 기회의 평등을 사회적인 선택점으로 삼고 개인의 번영보다는 집단의 번영을 더욱 중시하는 문화로 정착했다. 네덜란드는 하나의 큰 마을처럼 운영되고 있다. 문자 그대로의 국가공동체가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네덜란드가 자유와 관용의 나라라고 하지만 과소비와 사치, 게으름, 거친 말과 행동, 이웃의 고통을 외면하는 것에 대해서는 일종의 적대감마저 보인다. 그리고 민주 이상으로 공화의 가치를 앞세운다. 모든 사람이 화합해서 더불어 사는 것이 공화이다. 과소비와 사치, 허영과 게으름, 거친 행동과 이웃의 고통을 외면하는 것을 그들은 공화를 깨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바로 여기서 네덜란드인들이 누리는 자유와 관용의 정신은 공화와 사회정의의 틀 안에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내 돈 갖고 내 마음대로 쓰는데 누가 무슨 소리를 하느냐는 자유가 그곳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법 이전에 사회규범과 정신문화가 이를 허용하고 있지 않다. 그리스도의 휴머니즘에 더 높은 비중을 두는 종교도덕과 사회의 끊임없는 자기혁신, 사회구성원의 연대감에 기초를 둔 자주와 자율, 자조의 공화와 자유에의 실험정신을 그들은 정신 인프라라고 부르고 있다. 이 정신 인프라 위에 문화와 예술이 꽃을 피우고, 이것이 만들어내는 질 높은 국민, 질 높은 사회조직과 공공 써비스, 질 높은 사회간접자본은 사람과 돈, 상품과 기술, 정보와 지식을 끌어들여 네덜란드로 하여금 유럽의 경제중심이 되게 하고 있다. 중심의 끌림은 하드웨어보다는 쏘프트웨어의 산물임을 네덜란드의 예가 증명하고 있다. 이 네덜란드의 정신 인프라를 어떤 사람은 ‘신을 믿는 사회주의’ 또는 ‘신중한 진보주의’라고 부른다. 네덜란드인들은 돈과 권력을 가진 사람이라고 해서 존경하지 않으며, 실업자라고 해서 경멸하지 않는다. 인간은 모두 신이 준 재능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단지 행운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런 평등사상이 임금체계와 조세제도, 검소한 생활습관에 그대로 적용된다. 사람은 물론이고 동물에 대해서도 공격적인 태도를 취하지 말라는 그들의 옛 사상가 에라스무스의 휴머니즘과 깔뱅의 평등사상, 자발적인 애국의 마음이 그들을 유럽의 중심으로 들어서게 한 것이다.

‘우주를 창조한 것은 신이지만 네덜란드를 창조한 것은 네덜란드인’이라는 말 속에는 저지대의 가혹한 자연환경을 자신의 것으로 개조한 네덜란드인들의 강한 국민적 자부심이 들어 있다. 이 국민적 자부심이 그들의 또다른 정신 인프라를 형성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국민적 자부심은 배타적 애국심이 아니다. 네덜란드는 나찌의 침공에 따른 공포가 채 가시지도 않은 2차대전 종전 직후 유럽의 다른 어느 나라보다도 먼저 독일과 경제협력관계를 맺었다. 독일의 재건 없이는 네덜란드의 번영도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그 결과 1950년대 이래 네덜란드와 독일은 세계 최고의 경협 파트너가 되었으며 로테르담을 독일 제1의 항구라고 부르는 사람들까지 생겨났다. 영국, 프랑스와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영국에 대해서는 2차대전 때의 지원을 아직도 고마워하고 있다. 네덜란드는 강대국에 끼인 작은 나라이다. 그런만큼 애국심이 강하다. 그러면서도 유럽 통합에 가장 앞장서고 있다. 그들의 애국심은 이처럼 닫힌 사회의 피동적인 애국심이 아니라 밖으로 뻗어나가는 열린 사회의 능동적인 애국심이다. 네덜란드인들은 아메리카 모델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미국의 세계패권에 대해서는 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무엇이 국가이익에 도움이 되느냐를 국제관계와 외교의 핵심요소로 파악하는 철저한 실용주의에 따른 것이다. 이런 것들이 종합적으로 작용해서 유럽 경제중심의 네덜란드를 만들어냈다.

 

무슨 중심이든 중심은 그 토대가 건강하고 튼튼하지 않으면 중심으로서의 구심력을 발휘할 수 없다. ‘동북아중심국가’ 또는 ‘동북아경제중심’도 예외가 아닐 것이다. ‘빨리빨리’의 날림공사와 썩은 토대 위에 서 있는 상부구조를 가지고는 중심으로서의 역할을 결코 할 수 없다. 말하자면 도로와 항만, 정보통신시설과 최첨단의 금융씨스템의 산업 인프라 이전에 건강하고 튼튼한 정신 인프라가 먼저 요청되는 것이다. 거듭 말하지만 질 높은 국민과 질 높은 공공 써비스, 사회체제 그리고 질 높은 사회간접자본이 있어야만 세계에서든 동북아에서든 중심국가로 나아갈 수 있다. 중심국가 또는 경제중심은 개방을 전제로 한다. 국경이 열리고 사회가 열려야만 낯선 사람과 낯선 문물이 들어오고 이들이 발걸음을 자주 해야만 중심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중심에는 낯선 것들에 대한 관용이 절대적으로 요청된다. 내 것만 최고이고 나와 다른 사람, 나와 다른 생각과 관습, 나와 다른 문화를 배척하거나 형편없는 것으로 본다든가, 아니면 그 반대로 나의 것은 형편없고 남의 것을 무조건 숭상하는 사대주의로는 중심에 들어설 수 없다.

내 것이 중요하다면 남의 것도 중요하며, 땅 위에 나와 다른 수많은 존재와 생각이 있음을 받아들여야 한다. 열린 마음과 관용의 정신이 중심으로의 진입을 위한 첫걸음이다. 마음의 문을 연다는 것은 인간성과 다양성에 대한 존중이고, 획일주의와 유일사상에 대한 거부이다. 나와 다른 색깔의 피부를 가진 사람을 만났을 때 무조건 경멸하거나 숭배해서는 안된다. 열린 마음을 갖는 자는 당연히 인종주의를 거부하고, 자기보다 못났다고 생각되는 상대에게 거들먹거리고 싶어지는 본능의 유혹에 굴복당하지 않는다.우리는 그동안 인종주의를 오만한 서양 백인의 전유물로 생각해왔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일자리를 찾아온 외국 근로자들을 어떤 식으로 대하고 있나? 중국 동포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의 평등과 존엄을 한사코 외면하고 모든 것을 지배와 복종, 정복과 피정복의 관계로만 보는 개발독재시대의 잔재가 우리 머릿속에 뿌리깊게 박혀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 마음 한구석에 자리잡고 있는 피해의식과 반외세 의식, 낯선 사람과 문물에 대한 경계심, 민족문화에 대한 과장된 자부심과 허위의식 및 열등감이 기묘하게 혼합된 심리상태 등은 중심으로의 진입을 가로막고 있다. 이래가지고는 중심으로의 진입은 고사하고 남북한과 500만 해외동포도 하나로 묶을 수 없다. 통일 후 남한 사람한테 열등 국민으로 멸시를 받기보다는 차라리 자폭의 길을 택하는 편이 나을 것이라는 소리가 북한 동포들 입에서 나오고 있다. 통일을 피정복으로 본다면 어느 누구든 마지막 순간까지 통일에 저항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버지의 나라에 왔다가 같은 동포한테 멸시만 받고 가는 중국과 러시아 동포들이 무엇 때문에 한국의 동북아중심에 편입되려고 하겠는가? 그들은 소수민족을 우대하는 중국의 한족에게 우리 이상의 친밀감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열린 마음과 관용의 정신이 없는 상태에서는 당당함이 없을뿐더러 미지의 넓은 세계로 나아갈 용기를 갖지도 못한다. 그 결과 집안일에만 시시콜콜 매달려 우리 동네의 누가 세며 누가 세질 것인가에 온 신경을 곤두세우며 그 이야기로 낮과 밤을 보내게 된다. 또 관심영역이 좁아 지금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도 모르는 채 행동이 굼뜨고 자기가 조금만 잘나면 남을 멸시하고 조금 못났다고 생각하면 남한테 굽실거리며 속없이 친절하나 형제한테는 걸핏하면 시비를 건다. 정든 집과 고향 친구를 떠나 낯선 곳 낯선 사람, 낯선 문물에 대한 두려움과 경멸의 감정을 버리고 낯선 생각과 문화를 접하는 것 자체를 즐거움으로 삼는 도전의 마음이 중심으로 진입하는 길일 것이다. 이런 인간형이 이 시대의 질 높은 국민이다. 질 높은 국민은 다른 그 무엇보다 앞서는 중심국가의 요체라고 생각한다.

질 높은 국민이란 바로 성숙한 민주시민일 것이다. 민주시민은 자기 자신이 타율적인 존재임을 거부한다. 그 반면 모든 것에 책임있게 행동하며 사고한다. 시민은 억압과 독재에 대한 저항, 자존과 계몽의 과정을 거쳐 태어난 역사적 존재이다. 이 역사적 존재인 시민의 자존심과 창발성, 적극성, 책임감이 중심국가의 문을 여는 열쇠가 된다. 독재에 길들여진 사람한테는 민주시민에게서 발견되는 정직과 용기, 창발성과 자존심을 찾아볼 수 없다. 자기 스스로를 존중하지 않고는 남을 존중할 수 없으며, 자존의 마음이 없는 사람은 감시의 눈길만 없다면 언제든지 그리고 무엇이든지 도둑질할 준비를 한다. 이런 사람들은 생각과 행동에서 홀로 서기를 겁내며 지역감정 같은 고리를 만들어 파당을 지으려고 한다. 그들의 주요 관심사 또한 무엇이 옳고 그르냐보다는 누가 이기고 지느냐의 파워 게임에 집중된다. 도덕적 정당함에 관계없이 이길 승산이 보이는 자 주변으로 쥐떼처럼 몰려드는데 이런 사회는 이전의 식민지 사회에 머물러 있는 것과 같다. 이런 사회구조 아래에서는 중심국가가 열리지 않는다.

집에 사람이 찾아오지 않으면 그 집은 중심은 말할 것 없고 변방에 머무는 것조차 어렵다. 사람 사는 집에 사람이 찾아오지 않을 때에는 다 그럴 만한 까닭이 있다. 사람에 따라 사정은 다르겠지만 그 집에 가봐야 별볼일이 없다든가 별볼일은 있을지 모르나 아예 꼴보기 싫다는 생각이 사람의 발길을 끊게 하는 이유일 것이다. 사람이 찾아오지 않으면 새 사조도 들어오지 않고 새 정보와 돈도 들어오지 않는다. 그래서 시대에 뒤진 고루함이 쌓이고 이 고루함이 낙후를 낳게 되며, 낙후가 다시 고루함을 낳는 악순환이 생겨나 점점 중심에서 멀어진다. 집에 사람의 발길이 끊기는 것은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을 상실했기 때문일 것이다. 어떻게 하면 매력 포인트를 상실할 수 있나? 무엇보다 먼저 정색을 하고 망자존대(妄自尊大)의 허장성세를 며칠만 계속하면 된다. 또한 외부인에 대해 의심부터 하는 것이다. 의심이 경계심이 되고 경계심이 적대감으로 표출되면 우리가 남을 배척하기 전에 남이 먼저 우리를 배척할 것이다. 이렇게 하면 우리를 찾는 외부인의 발길을 끊을 수 있고, 중심이 아니라 변방에서 우리끼리 밤낮으로 싸움질을 하다가 남의 종살이 신세로 전락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이땅에 사는 사람들의 마음과 행동이 거칠고 천박하여 낯선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고압적이면 고압적일수록 좋다. 또 뒷돈을 주지 않으면 되는 일이 하나도 없도록 해야 한다. 이렇게 하면 중심에서 스스로 멀어지게 된다.

대단하지도 않은 돈과 힘 자랑으로는 사람의 마음을 살 수가 없다. 사람의 마음을 사지 않고도 우리가 동북아중심국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문자 그대로 그것은 생각의 자유일 따름이다. 힘의 과시와 돈 자랑은 매력 포인트라기보다 오히려 혐오 포인트로 작용하기 쉽다. 자존심에 상처를 주면 상처받은 자들은 더욱 단결한다. 돈과 힘의 과시가 아닌 진정한 인간애의 매력 포인트를 높여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중심으로 가는 길이다.

그리고 또 공격성이 있다. 우리의 지난 시절이 그랬던 것처럼 공격성은 때로 압축성장의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이를 조장해왔으나 일정 단계를 지나면 도리어 발전에 방해가 된다. 우리는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이라고 하지만 과거에는 그랬는지 모르나 지금은 아니다. 한국인의 공격성은 전세계가 알아주고 국제사회에 소문이 나 있다. 겉으로는 평화를 이야기하나 속으로는 평화를 우습게 알고 평화에 냉소를 보내고 있다. 경쟁을 하더라도 공격적으로 남을 앞지르려고 한다. 우리의 공격성은 인간관계에만 그치지 않는다. 자연을 공격해서 파괴하는 동시에 우리의 심성도 파괴하고 있다. 평화와 사랑, 공존을 말하는 사람을 우습게 여기거나 불온시하고 강한 공격성을 보이는 사람을 애국자라고 한다. 이웃이든 자연이든 모두가 더불어 살아가야 할 존재가 아니라 공격과 정복의 대상으로 볼 따름이다. 공격성에 대한 찬양을 멈추고 평화의 힘에 대한 신뢰를 심는 데서 새 출발을 하지 않는 한 중심에 들어설 수가 없다. 우리가 추구하는 중심이 세계패권이 아니라면 말이다. 반문명에서 문명으로 나아가는 길이 중심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민족 전체의 운명이 어떻게 되든 북핵과 북한정권을 공격해버리자는 민족허무주의가 애국심으로 분칠을 하고, 가짜가 진짜 행세를 하는 사이비 돌격대원들이 판을 치는 사회로는 동북아의 중심이 될 수 없다. 공격성을 강하게 드러내는 자를 누가 중심으로 삼고 싶어하겠는가?

어떻게 하면 중심국가의 요체인 건강하고 튼튼한 정신 인프라와 그 위에서 태어나는 질 높은 국민과 질 높은 공공 써비스, 질 높은 사회간접자본을 확보할 수 있나? 첫번째가 정치·언론·교육개혁이다. 정치는 창날과 같은 존재이다. 창날이 녹슬고 무딘 상태에서는 문화와 사회의 창자루를 아무리 갈아끼워도 창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창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한 중심국가는 없다. 그리고 정치가 개혁되어야 국가가 개혁될 수 있다. 그런데 지금 우리의 정치 지도자라는 사람들은 무엇을 하고 있나?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그만이고 꿩 잡는 것이 매이고, 눈앞에 보이는 것을 먼저 삼키는 자가 임자라 한다. 사회정의가 어떻고 기회의 평등이 어떻고 하는 자들에게는 억울하면 출세를 하라고 한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그만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원칙에 얽매이지 않고 유연해야 한다. 이때의 유연함은 페어플레이를 우습게 아는 뻔뻔함과 약삭빠름이다. 여기서는 이 말을 하고, 저기서는 저 말을 하며, 어제 한 말을 오늘 뒤집는다고 하더라도 꿩 잡는 것이 매이기 때문에 하등 문제될 것이 없다. 꿩만 잡으면 그것을 어떻게 잡았든지간에 잡은 자에게는 무한한 찬사가 뒤따른다. 뻔뻔함과 약삭빠름은 지금 이 순간에도 이땅에 넘쳐흐르고 있다. 정당의 국민대표성이라는 것도 필요없고, 당의 이념이나 정강정책, 유권자의 의사도 개의할 것이 못된다. 모든 것이 사적 소유물이다. 어제 국민에게 무엇을 약속했는지 상관없고 또 상관도 하지 말라면서 국민주권의 민주주의 원칙에 등을 돌리라는 배신의 가르침이 어지럽게 춤을 추고 있다.

이렇게 해서 철새 정치인이 태어나고, 단기이익을 추구하는 극단적인 현실타협과 현실안주의 약삭빠름이 원칙을 지키고자 하는 용기있는 정신과 자존의 마음을 압살하고 있다. 이런 속에서는 역사발전의 장기비전을 갖고 나라와 사회발전을 위해 일하고자 하는 자기헌신이 조롱거리가 되기 십상이다. 단기이익을 추구하는 뻔뻔함과 약삭빠름, 무원칙의 현실타협이 현실정치의 이름으로 유행처럼 번지고 있고, 위로부터의 이 유행이 전국민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이런 사회는 이미 부끄러움을 잃은 몰염치의 사회이다. 염치를 잃은 사회는 만인이 만인을 우습게 아는 냉소주의의 날라리 사회이다. 몰염치와 날라리 사회 속에서 정치부패가 자리를 잡는다. 부패는 위로부터 아래로, 아래로부터 위로 확산이 되며, 부패의 급속한 확산 속에 지역 맹주와 추종자 사이에 부패 네트워크가 형성된다. 부패가 네트워크로 가동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고비용의 정치와 선거자금, 이에 따른 부패는 경제적인 측면에서 추가비용을 발생시킬 뿐만 아니라 중심국가의 요체라고 할 국민의 질과 공공 써비스, 사회 씨스템의 질을 떨어뜨린다. 민주주의의 힘이 자기혁신의 능력에 있는 것이라면 정치부패 또한 혁신의 대상에서 제외되어서는 안된다. 정치부패는 민주주의를 형해화하고 시민을 신민화하며, 정치인들 마음대로 시장과 시민사회의 영역을 침범하도록 해 어둠속의 권력을 강화시킨다. 그리고 공공재산과 정부기관을 사물화(私物化)하는 한편 논의와 거래를 밀실에서 물밑 접촉으로 하는 바람에 사회 전반에 불신풍조를 몰고 온다. 그렇게 비밀주의 속에서 형성된 정치부패의 네트워크는 나라 전체의 인적·물적 자원의 배분을 왜곡한다. 정치부패는 민주주의의 불가피한 비용이 아니다. 정치부패가 일상화되고 정치부패 척결작업이 다시 정치논리에 지배당하는 곳에서는 막스 베버의 말처럼 정당이 ‘정치를 위해’ 사는 자가 아니라 ‘정치에 의해’ 사는 자들의 집합장이 된다. 그리고 부패한 정치엘리뜨와 수상한 국제자본 사이에는 국부(國富) 약탈의 협정이 맺어진다. 우리는 이를 라틴아메리카의 비극에서 보았다.

정치부패 네트워크는 네트워크 사이에 권력투쟁이 벌어지지 않는 한 서로가 서로를 감싸주고 비리를 덮어주는 지배 엘리뜨간의 ‘침묵의 협정’을 특징으로 한다. 부패와 비리에 엘리뜨들이 침묵하고 국민들은 자기 운명의 주인이 되지 못한 채 무기력과 냉소주의에 빠져 있는 나라가 역사의 중심에 진입한 전례는 없다. 부패 네트워크의 일원으로 그 속에서 자기존재의 근거를 갖는 이 사회의 이른바 정치 지도자가 스스로 부패 네트워크 해체에 나선다는 것은 현실 속에서 가능한 일이 아니다. 부패한 지도자든 아니든 성공한 사람들은 후광을 갖고 있다. 이 후광에 눈이 부신 국민들이 부패 네트워크의 강대한 힘에 주눅들고 반부패보다는 부패 네트워크에 편입될 날을 기다리는 나라 또한 중심국가가 아니다.

정치부패 네트워크의 해체 없이는 국가개혁은 말할 것 없고 사회개혁과 국민의식 개혁이 이뤄지지 않을 것이며, 따라서 건강하고 튼튼한 정신 인프라가 이땅에 깔리지 않을 것이다. 건강하고 튼튼한 정신 인프라 없이 동북아의 중심이 될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승리의 역사를 거듭하고 있다. 국민이 긴 잠에서 깨어나 부패 엘리뜨들을 압박하고 스스로 정보와 지식의 공급체제를 갖춘다면 난공불락일 것 같은 부패의 요새도 결국은 함락될 것이며 우리 앞에 동북아중심의 새 지평이 열릴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21세기 국가비전이다. 국민은 동원의 대상이 아니라 새 역사 창조를 위한 참여의 주체이다. 주체인 국민의 에너지가 폭발한다면 이루지 못할 일이 없다. 우리의 생활태도를 바꾸고 우리의 교육과 언론을 바꾸며, 우리의 정치를 바꾸고 민주주의를 발전시켜 우리의 미래를 바꾸어야 한다. 집안 당파싸움으로 밤낮을 보내는 주변부에서 세계사의 중심부로 이제는 진입을 해야 할 때이다. 피동과 분열의 20세기와 결별하고, 능동과 통합의 새 역사의 장을 열어야 한다. 국민의 질과 인프라와 공공 써비스의 질을 높여 우리의 경쟁력을 강화하고 공격성 대신 평화의 메씨지를 끊임없이 발하는 것이야말로 동북아중심으로 나아가는 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