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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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현

1972년 서울 출생. 2002년 『문학과사회』 제1회 신인문학상으로 등단. 소설집 『낭만적 사랑과 사회』가 있음.

 

 

 

빛의 제국

 

 

김현수, 33세, Y대학 부설 자살문화연구센터의 계약직 연구원

2004년은 투신자살자의 비율이 유난히 높았던 해로 기록되어 있다.

장유희의 사체가 발견된 것은 2004년 10월의 네번째 금요일 밤이었다. 향년 17세. 그녀는 상습절도 혐의로 소년법상 제7호 보호관찰처분을 선고받고 여성전용 소년원인 비원여자고등학교에 수용중이었다. 경찰이 판단한 직접 사인은 추락에 의한 좌측 후두부 파열. 투신자살이라는 뜻이었다. 유족은 소녀가 자살할 만한 이유가 없다며 강한 의혹을 제기했지만, 그렇다고 자살이 아니라고 단정지을 만한 특별한 증거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서기 2004년에 대하여 나는 많은 것을 기억하고 있지는 않다. 그해 동네 중국음식점의 짜장면 한그릇이 3000원이었으며 사람을 스무명도 넘게 죽인 연쇄살인범이 체포되었고 아테네 올림픽이 개최되었다는 사실은 한국현대사 연감을 통해 확인했다. 자료를 읽는 동안, 까마득히 잊고 있던 그때의 일들이 갑자기 어슴푸레 떠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의 당선자 명단이 소속 정당별로 깨알같이 박혀 있는 페이지의 한 귀퉁이에다 샤프펜슬로 계산을 해보았다. 2022-2004=18. 지금 서른세살이니 그해에 나는 열다섯살이었다. 장래희망을 묻는 설문지에 득의양양하게 ‘노숙자’라고 적어넣은 것이 열다섯살 때인지 열여섯살 때인지, 이도 저도 아니라면 열네살 때인지 헷갈렸다. 다른 녀석들이 한의사, 영화감독, 증권분석가 같은 직업을 써넣었던 것만은 분명했다. 그 틈에서 ‘내 꿈은 노숙자가 되는 거야’라고 말하는 건 적어도 ‘내 꿈은 우주비행사가 되는 거야’라는 것보다는 남자다워 보인다고 생각하던 시절이었다. 사춘기였으니까. 현대사 연감에 의하면 정부가 전국의 노숙자 및 부랑자들을 보호시설에 강제로 수용한 것이 2010년 6월이었다. 요즘 아이들은 노숙자라는 단어 자체를 모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자 어쩐지 좀 섭섭해졌다.

이제껏 나는 과거의 일에는 별 관심을 두지 않고 살아온 편이었다. 한국전쟁이나 한일 국교정상화, 1990년대의 외환위기 같은 것을 주제로 다루는 주말 밤의 TV 다큐멘터리쇼는 지루해서 보지 않는다. 그 시간에는, 양가의 반대를 무릅쓰고 열렬한 사랑을 불태우는 연인들이 나오는 드라마를 시청하거나, 사귄 지 육개월째인 여자친구와 데이트를 한다. 지금까지 나는 일상이란 그저 앞으로 흘러가는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말이다.

모교의 자살문화연구센터의 연구원이 된 건 약 한달 전부터다. 새로 발족하는 연구소의 계약직 연구원 모집요강에는 대화학(對話學) 박사과정 수료 이상이라는 자격요건이 명시되어 있었다. 연구소장인 사회학과 허교수는 지도교수의 추천서를 들고 찾아간 나를 꽤 호의적인 태도로 대했다.

“자네, 요새 보기 드물게 반듯한 가정에서 자랐군. 그 점이 특히 안심이 되네.”

나는 적잖이 당황했다. 양친이 법적인 부부관계를 유지한 채 삼십년 이상 살아온 것은 확실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타인에게 반듯하다는 평가를 들을 만큼 대단한 가정은 아니었다. 그리고 반듯한 가정이라니. 그렇게 주관적인 가치판단이 들어 있는 표현은 위험했다. 자칫 극렬 보수주의자의 이미지로 낙인찍히기 십상이었다. 허교수는 과연 학교 안팎에 소문난 대로 거칠 게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나는 원하던 대로 이년 임기의 계약직 연구원이 되었다. 기뻤다. 언론에서 매일 실업률 해소방안에 대해 떠들어대는 이런 불안한 시기에 전공을 살려 취업에 성공했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우리 같은 비실용적인 전공으로는 더욱 그렇다. 이제는 인간관계의 내밀한 커뮤니케이션 같은 가치는 유행 지난 양복에서 나는 좀약 냄새만큼이나 낡은 것으로 취급되는 시대다. 자살문화연구센터를 사람들은 자문연이라고 줄여 불렀다. 대형 씨스템을 선호하는 근래 대학연구소의 추세에 비춰볼 때 자문연은 비교적 조촐한 규모의 조직이었다. 상근조교 한명 외에 박사급 연구원 예닐곱명이 속해 있을 뿐이었다. 행동과학, 법의학, 청소년 발달심리학 등 연구원들의 전공은 제각각 달랐지만, 자신이 이곳에서 정확히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모르고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하긴 대학부설 연구소라는 곳의 정체가 원래 다 그렇고 그렇지만 말이다. OECD 가입국가별 자살 증가율에 관한 실태보고서 따위를 정리하며 시간을 보내는 댓가치고는 적잖은 연봉이었으므로 나는 새로운 생활에 그럭저럭 만족했다.

며칠 전 아침, 허교수가 나를 호출했다.

“자네, 비원여자고등학교에 대해 알고 있나?”

“W시에 있는 소년원 시설 말씀이십니까? 얼마 뒤에 철거된다는.”

“아, 철거되는 것은 아니고 박물관이 된다는구만. 누구 머리에서 나온 발상인지 참.”

그는 별안간 목소리를 낮추었다.

“김박사, 이제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듣게. 2004년 10월에 그곳에서 여자아이 하나가 죽었네. 옥상에서 떨어졌지. 뭐든 주먹구구식으로 처리해버리던 시대였으니 자살로 덮어버리기도 쉬웠을 거야. 하지만 이게 말이야, 그냥 묻어버리기에는 석연찮은 구석이 아주 많은 케이스거든. 알겠나? 이제부터 우리는 그녀의 안타까운 죽음에 얽힌 미스터리를 풀어가야 하네.”

나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가 하는 말을 제대로 이해하기는 힘들었다.

“사소해 보일 테지만 이건 김박사의 예상보다 훨씬 커다란 프로젝트가 될 거야. 세상이 뒤집힐 수도 있지. 내가 무슨 얘기를 하는지 알아듣기 어렵다는 거 잘 알아. 하지만 애써 머리로 분석하려 들지 말고 가슴, 그래 가슴으로 바라보라고! 인권 차원에서만 봐도 이건 아주 심각한 사건이거든. 자살이 사실은 자살이 아니었다는 것, 지금처럼 높은 자살률의 뒤편에 실은 음험한 음모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 그렇게 접근을 해보자는 거지. 우리 자살문화연구센터의 첫번째 프로젝트로서 아주 의미있는 일이 되리라는 확신이 드는군.”

허교수가 웃자 새하얀 의치가 작위적으로 반짝였다. 치석과 니코틴의 흔적으로 더러워진 치아를 새것으로 전면 교체하는 시술이 대유행이었다. 나는 입술을 다문 채 미소지었다. 뭔가 고약한 데 얽히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치밀어올랐지만 꿀꺽 삼킬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신희경, 45세, 비원여자고등학교의 책임교도관

우리 비원여자고등학교에 오신 것을 진심으로 환영해요. 처음 내방하시는 분들은 많이들 놀라시죠. 우리 학교가 이렇게 경관이 수려한 곳에 위치해 있다는 걸 모르셨나봐요. 소녀들이 사는 집답게 아늑하고 오밀조밀하게 꾸며놓았다는 감탄도 많이 하십니다. 우리 비원학교는 2004년 여름 문을 열어 올해로 개교 18년째를 맞고 있습니다. 민영으로서는 최초의 청소년 교화기관이죠. 아, 소년원이라는 단어는 사용하지 말아주세요. 지난 세기말인 1997년에 이미 소년원의 현판을 일반학교로 바꾸는 법령이 시행되었답니다. 소년원보다는 고등학교라는 용어가 아이들을 위해 여러모로 더 낫지 않겠어요?

우리 비원 출신들이 사회 곳곳에서 똑 부러지게 제 몫을 다하고 있는 자랑스런 모습들은, 아마 각종 언론을 통해 많이 접하셨을 겁니다. 변호사도 있고 탤런트도 있고 또 보험여왕도 있지요. 그애들은 이곳 출신이라는 걸 감추지 않아요. 비원을 단순히 어릴 적에 거쳐간 학교가 아니라, 자신의 영혼을 깨끗하게 정화시켜준 고마운 마음의 본향으로 여기고 있답니다. 인간이란 원래 연약한 영육을 소유한 존재가 아니겠어요? 더군다나 모든 것이 아직 미성숙하고 판단력도 부족한 어린 나이에 뭘 제대로 알까요? 몰라서 저지른 범죄는 개인의 죄가 아니라 사회와 국가의 책임입니다. 따뜻한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면 하나하나 맑고 착한 아이들이에요. 성인범에 비해 교화 가능성이 수십배는 더 높답니다.

아이들은 모두 열여섯살 이상 스무살 미만입니다. 고등학생 나이에 해당하는 여자아이들만 살고 있지요. 아시는 대로, 소년분류심사원에서 제7호 처분을 받은 뒤 이곳에 오게 됩니다. 초범은 보통 6호 처분을 받고, 7호는 반복해서 잘못을 저지른 경우예요. 처음부터 여기 오는 애들은, 그러니까 아무래도 좀 심한, 누굴 죽였다든지 하는. 아아, 그런 얘기는 그만두죠. 본성이 사악한 아이는 거의 없으니까요. 문제는 환경입니다. 지금까지 수많은 아이들을 지켜본 제가 내린 결론으로는 틀림없이 그렇습니다. 아이들이 이곳에 머무르는 기간은 대개 육개월에서 이년까지입니다. 그 이상 있는 아이들도 있고요. 기간은 저희가 자의대로 정하는 게 아니라 분류심사원에서 이곳에 보낼 때부터 지정해줍니다. 물론 재범의 우려가 높다거나, 사회로의 복귀가 조금 걱정스러운 경우에는 담당교사의 재량에 따라 교화기간을 연장할 수 있지요. 이곳을 떠나 집으로 돌아가야 할 때, 가기 싫다고, 여기에 더 있고 싶다고 우는 아이들도 퍽 많답니다. 그런 게 바로 가르치는 저희의 보람이지요.

자, 이제 학교 안을 둘러보시겠어요? 일반적인 고등학교와 다른 점은 거의 없답니다. 시설은 오히려 우리가 훨씬 고급스러워요. 교문의 동쪽에는 수업을 받는 학교동(棟)이, 서쪽에는 기숙사동(棟)이 있습니다. 가운데 건물은 실내수영장과 도서관이고요. 오백명을 한꺼번에 수용할 수 있는 계단식 강당도 있습니다. 교과수업은 주간 스물다섯 시간을 넘지 않습니다. 오후에는 네일아트나 헤어디자인, 보석감정 같은 실용 클래스를 열지요. 어차피 일반학교로 돌아가기보다는 사회에 곧바로 나가야 하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전통적으로 오후반 수업에 대한 아이들의 호응이 좋습니다. 기상시간은 일주일 내내 오전 여섯시 반입니다. 아이들이 이곳 생활에서 가장 힘들어하는 부분이죠. 하지만 개교 이래 지금까지 철저히 고수해온 기본규율입니다. 교정교육이란 거창한 게 아니라 아주 작은 생활습관을 바꾸는 것에서부터 출발하거든요. 아이들의 심신 발달에 알맞은 환경을 조성하고 안정된 생활 속에서 성장 가능성을 최대한 신장시킴으로써 사회적응력을 길러 민주국민으로 사회에 복귀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소년원법의 규정입니다.

교훈은 ‘사랑으로 거듭나자’, 설립이념은 ‘국친(國親)’입니다. 부모가 제 노릇을 제대로 하지 못할 때 그 역할을 국가가 대신한다는 의미이지요. 미성년자를 보호하고 감독하는 부모로서의 의무. 우리는 말하자면 국가로부터 부모역할을 위탁받은 거구요. 진정 현명하고 자애로운 부모라면 말썽부리는 자녀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늘 고민하겠지요? 저희 교사들도 어떻게 하면 사랑하는 아이들을 온전한 정상인으로 만들 수 있을지 늘 머리를 맞대고 연구한답니다. 그것이 이사장님이 내리신 지침이지요. 이사장님? 유동협 의원님 말입니다. 참으로 대단한 분이세요. 그분이 이 사회와 국가에 대해 가진 투철한 사명감은 범속한 우리들이 감히 헤아리기 어려운 경지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정말로 큰일을 하실 분이에요.

아이들이 기거하는 방은 이인일실입니다. 싱글침대 두 개와 책상 두 개, 개인사물함과 옷장이 비치되어 있습니다. 원래는 한방에 열명가량 기거하는 내무반식 구조였는데 오년 전에 이사장님께서 사비를 털어 내부를 초현대식으로 싹 바꾸셨지요. 국내의 어느 대학기숙사와 비교해도 부럽지 않은 수준의 인테리어일 겁니다. 자부해요. 사적으로 가지고 들어올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교복과 체육복, 양말과 브래지어, 손톱깎이와 생리용품까지 생활에 필요한 일체를 우리가 지급한답니다. 식당은 일층에 위치해 있습니다. 일급 영양사 선생님 두 분이 매일의 식단을 짜시지요. 심신을 편안하게 하기 위해 비타민과 미네랄이 충분히 함유된 재료를 듬뿍 사용하고요. 지나친 육류 단백질 섭취가 공격적인 습성을 야기할 수 있다는 연구결과가 발표된 뒤에는 육류를 가급적 자제하고, 생선과 식물성 단백질 위주로 공급합니다. 카페인은 전혀 제공되지 않지요. 끽연은 절대금지입니다. 적발시에는 생활점수 사십점을 감점하지요. 합산점수가 오십점 이하인 아이들은 징벌대상이 됩니다. 일주일간 징벌방에 수용하고 외부면회를 삼개월간 금지당하는 벌을 받게 돼요. 총점 삼십점 이하는 퇴교입니다. 퇴교당하면 성인교도소로 가야 합니다.

솔직히 몇년 전까지만 해도 금연관리가 참으로 어려웠어요. 아이들의 생활을 들여다볼 수 있는 수단이라곤 각 방과 복도에 설치된 폐쇄회로 화면이 전부였으니까요. 방문자들이 버리고 간 꽁초를 주워 피우기도 하고 어디서 구하는 건지 아예 한갑씩 몰래 숨겨두고 피우는 간 큰 녀석들도 간혹 있었습니다. 카메라가 설치된 곳을 절묘하게 피해가며 피워대는 거죠. 그러다 걸리는 경우가 한달이면 꼭 두어 건은 되었어요. 하지만 문제는 거의 해결되었습니다. 전국 교화시설 아이들의 팔뚝에 마이크로 칩을 내장하는 법안이 국회를 통과한 다음부터 말입니다. 이제는 메인 컴퓨터를 통해 아이들 각각의 몸상태를 일일이 체크할 수 있게 되어서 여러모로 아주 편리하답니다.

이런 곳이 곧 문을 닫는다는 건 너무나도 안타까운 일입니다. 여기서 청춘을 다 바친 제 입장에서 하는 얘기가 아니에요. 이건 넓게 보면 국가적 손실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 비원학교의 사례는 국제적으로 저명한 범죄학 심포지엄에서도 몇번이나 의제로 다루어졌습니다. 또 CNN을 비롯한 세계 곳곳의 유명 방송사에서 취재를 해가기도 했지요.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말레이시아와 케냐 정부에서는 아예 우리 학교를 본떠 소녀전용 교화기관을 새로 만들었답니다. 말레이시아의 오프닝 행사에는 우리 이사장님 이하 교사대표단이 귀빈 자격으로 초대받아 참석하였어요. 여자 선생님들은 태극문양으로 만든 드레스를 맞춰입고 파티장에 입장했답니다. 아, 얼마나 자랑스럽던 순간인지. 영원히 잊지 못할 거예요.

그러나 세상은 너무도 빠르게 변하고 있습니다.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지요. 다음달에 아이들 몸속의 마이크로 칩을 신형으로 교환하면, 그걸 부착한 아이들은 각자에게 정해진 생활구역 밖으로 단 일미터도 벗어날 수 없게 된다고 해요. 중앙씨스템에 이상 경보음이 울리는 순간 바로 경찰이 출동하게 된다지요. 이제 제7호 처분을 받은 아이들을 사회 밖으로 따로 격리하지 않고서도,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 장치를 개발한 사람은 곧 대통령 표창을 받을 거라고 하더군요. 비원여자고등학교는 비록 문을 닫지만, 사라지는 것은 아니에요. 학교 전체를 박물관으로 만들 예정이거든요. 일선 중고교생들을 대상으로 단체견학 신청을 받고, 사회적 성공을 거둔 비원여고 졸업생들을 주축으로 강사진을 구성해서 청소년 범죄예방교육의 산실로 활용할 겁니다.

더 궁금한 점은 없으신가요? 글쎄, 2004년 10월이라면 너무 까마득한 옛일이 돼놔서. 자료를 한번 찾아볼게요. 장유희. 1988년 출생. 2004년 사망. 흐음, 절도를 네 번이나 하다니 죄질이 별로 좋지 않군요. 뉘우치지 못하고 똑같은 잘못을 반복하는 경우가 가장 문제입니다. 장유희는 비원여고가 문을 열면서 국립소년원에서 이감되어온 경우네요. 초기 적응에 여러가지 트러블이 있었을 겁니다. 모친은 가출, 부친은 극심한 알코올 중독. 전형적인 빈곤가정 출신이군요. 원생들 중에 퍽 흔하게 발견되는 유형입니다. 이런 가정의 아이들을 고위험군(群)으로 분류해서 출생시부터 특별관리에 들어가도록 하는 법안을 지금 국회 복지위원회에서 심의중입니다. 우리 사회의 근본적인 안전판 확충을 위해서는 최선의 방법이 되리라고 확신해요. 그런데 장유희에 대해 무엇이 궁금하신 거죠? 현실을 견디지 못할 만큼 나약한 성품을 가졌으니 남의 물건에 손을 댔을 거고, 또 그만큼 참을성이 부족하니 죽음을 선택했겠지요.

 

박은정, 35세, 가정주부

저는 그냥 평범한 아줌마예요. 어렸을 땐 아줌마란 소리를 내 입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날이 올 줄은 몰랐죠. 아줌마들은 하루종일 뭘 하면서 시간을 보낼까, 밥하고 설거지하고 아침드라마 보고 낮잠 자고 또 밥하고 빨래하고 청소하는 하루가 지겹지는 않을까 궁금해했던 것 같아요. 근데 막상 아줌마가 돼보니 지겨울 것도 없고 지겹지 않을 것도 없고 하루하루가 그냥저냥 흘러가네요. 이만하면 행복하죠. 네, 행복하다고 생각해요. 애들 건강하고 남편도 큰 능력은 없지만 그만하면 가정적이거든요. 요즘처럼 경기도 나쁘고 세상이 어수선한 때에 네 식구 별탈 없이 편안히 사는 것만으로도 복받은 일이다 싶긴 해요. 나이가 들어갈수록 매사에 조심스러워지고, 또 지켜야 할 것도 많아지네요.

제가 거기 있었다는 거, 애아빠는 몰라요. 속이려고 작정한 건 아닌데 그냥 일이 그렇게 돼버렸어요. 부부 사이에는 비밀이 없어야 한다는 말, 왜 모르겠어요. 그치만 비밀도 비밀 나름이죠. 혼인신고할 때 얼마나 마음 졸였는지 몰라요. 구청에서 컴퓨터 딱딱 두드리면 나에 대해 다 뜰까봐. 남편은 자꾸 물어봐요. 왜 너는 학교 때 친구가 하나도 없냐. 졸업앨범도 없냐. 몸이 약해서 학교를 못 나갔다고 대충 둘러대기는 했는데 도둑이 제 발 저리다고 이 남자가 무슨 눈치를 챈 건 아닌가 항상 신경쓰이고 그러네요.

얼마 전엔 시댁 식구들이랑 다같이 텔레비전을 보는데, 거기 같이 있었던 애가 나오는 거예요. 있잖아요, 탤런트 이마리라고. 불우한 과거를 극복했다고 맨날 떠들고 다니는 걔. 저랑 같이 거기 있었던 애예요. 무슨 토크쇼에 나와서는 자기는 거기서 완전히 새사람이 됐다고, 자기를 새로 태어나게 만들어준 유동협이가 평생의 은인이라고 눈물콧물 다 짜내는데 눈 둘 데가 없더라고요. 뒤통수가 화끈화끈대고. 화장실 가는 척 그냥 슬그머니 일어나버렸어요. 그 가시나 머리가 어떻게 된 건 아닐까 걱정스러워요. 당최 그 거지 같은 과거가 뭐가 자랑스럽다고 자꾸 우려먹는지 참. 옛날 거기 있을 때부터 이사장이랑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거 유명했죠. 보나마나 연예계에서 이만큼 클 때까지 이사장이 뒤를 봐줬을 거예요. 이사장이 옛날부터 연예계 쪽에 발이 되게 넓은 거 같았거든요. 우리 거기 있을 때도 별의별 가수들이 다 위문공연하러 오고 그랬다고요. 아니, 인기 한창 많은 연예인들 말고 좀 한물간 그런 사람들 있잖아요.

외부 방문객은 꽤 많았어요. 손님들이 오면 우리는 전부 강당에 집합해야 했죠. 그전에 일단 복장검사를 받아야 했어요. 손톱은 아주 짧게, 때가 끼어 있어도 안돼요. 교복 블라우스의 플랫칼라에는 티끌만한 얼룩도 있어서는 안되고, 블라우스를 치마 밖으로 빼입었다면 마이너스 십점이죠. 재킷 단추에 새겨진 학교 로고가 뒤집혀 있으면 그것도 감점대상이 되었는걸요. 한번은 어떤 애가 흰 커버양말 대신 맨발에 구두를 신고 강당에 왔다가 교도대원들한테 끌려나갔어요. 우리는 목이 졸린 생쥐처럼 조용히 눈을 내리깔고 있었죠. 그 당시 P시에서 싸움으로 짱먹다 온 애였는데 그렇게 나가더니 다시 돌아오지 않았어요. 생활점수가 낙제였던 거죠. 좀 칠칠맞지 못해서 교도관한테 사사건건 죽어나던 애였거든요. C시의 여자 교도소로 갔다, 지리산 어디의 보호감호소로 갔다, 아니다, 이사장이 술집에 팔아버렸다, 애들 사이에서 별별 소리가 다 나왔지만 아직도 몰라요. 그때 걔는 어디로 갔을까요. 어디서 나처럼 아줌마가 되어 아이 키우며 살고 있겠죠? 여하튼 그후론 다들 굉장히 조심했어요. 방문단이 온다는 소식이 전해지면 기숙사 분위기가 아주 침울해지곤 했죠.

제일 싫었던 건 종교단체 사람들. 선물이라면서 싸구려 과자봉지를 들고 와서는 따분한 찬송가 같은 것만 실컷 부르다 가는데 뭐가 좋겠어요. 설교랍시고, 너희는 길 잃은 어린양이니 하느님이 보살펴주실 거라는 짜증나는 얘기만 늘어놓고 말예요. 대학생들이 오면, 그래도 좀 낫죠. 근처에 우리와 자매결연 맺은 대학이 하나 있었는데 그 학생회에서 비원 처음 생겼을 때부터 정기적으로 와서 연극도 하고 노래공연도 하고 그랬어요, 유희 죽던 날처럼. 여대생들을 보면 부럽기도 하고 괜히 나 자신한테 막 화가 나기도 했죠. 그 언니들이랑 친해지고 싶은 맘이 들면서도, 우리 같은 애들을 속으론 틀림없이 비웃을 거다 싶어서 주눅도 들었고요.

유희 죽던 날, 휴우, 그날 일은 기억이 잘 안나요. 거기를 나오면서, 그 안에서 있었던 일들은 깡그리 다 잊어버리자, 머릿속에 아무것도 남기지 말자, 혼자서 입술 꼭 깨물고 다짐했거든요. 그런데 이상하죠? 날씨만은 생생하게 떠오르네요. 흐리지도 맑지도 않고 춥지도 덥지도 않았어요. 일년 365일 중에서도 정작 그렇게 무난한 날은 별로 없잖아요. 비도 안 오고 바람도 불지 않고 나쁠 것도 좋을 것도 없는 날씨, 특이한 데라곤 전혀 없이. 인생도 그렇게 잔잔히 흘러가준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지만 그건 불가능한 꿈이라는 걸 잘 알아요. 그날 하루가 결국 그렇게 끝나버렸듯이.

유희는 예쁜 애는 아니었어요. 똑같은 교복을 입은 애들 사이에 섞여 있으면 얼른 찾아내기 힘든 얼굴을 가졌죠. 돌이켜보면 그땐 무조건 예쁜 게 최고인 줄 알던 나이였어요. 그런데 지나고 보니 눈에 띄게 예쁜 게 꼭 좋은 일만은 아니었겠다 싶기도 하네요. 특히 가진 게 아무것도 없는 여자애가 얼굴이 반반하다면 안 그래도 고단한 인생살이가 더 복잡하게 꼬여갈 확률이 높겠죠. 어리고 가난하고 예쁜 여자애가 선택할 수 있는 삶은 별로 다양하지 못하니까요. 그렇다고 해서 가난하고 예쁘지 않은 여자애가 더 많은 기회를 가질 수 있다는 뜻은 아니에요. 밤거리에 술 취해 너부러져 있는 아저씨 주머니에서 지갑을 슬쩍 빼내다 방범대원한테 정통으로 걸린 저나, 일하던 주유소의 금고에 손을 댔다가 끌려온 유희나, 그짓을 하고 싶어서 한 건 아니었으니까. 몸을 팔았든 돈을 훔쳤든 간에 진짜로 자기가 하고 싶은 일 실컷 하다가 거기 잡혀들어온 애는 하나도 못 봤어요.

저와 유희는 아주 친한 사이는 아니었어요. 바로 옆방에서 지내기는 했지만 같은 방을 쓰는 애들도 열명이 넘었는걸요. 군대 내무반처럼 된 긴 방에서, 우리는 수저통의 젓가락들처럼 잠들어야 했어요. 옆에서 자는 아이와도 몸이 닿지 않으려 애썼는데, 굳이 다른 방에 속한, 저랑 별반 달라 뵈지 않는 아이와 말을 섞게 되지는 않더라고요. 방의 천장에는 소니의 CCTV 카메라가 양끝에 매달려 있었어요. 복도에도, 교실에도, 식당에도, 그리고 화장실에도…… 옷 갈아입는 모습, 밥을 입에 퍼넣는 모습, 생리대를 가는 우리의 모습들을 카메라 렌즈는 꼼짝도 않고 하루종일 지켜보고 있었죠.

사고가 나기 한달쯤 전, 샤워장에서의 일이었어요. 거기 들어간 지 석달 가까이 되도록 저, 생리를 한번도 하지 않고 있었거든요. 아침마다 샤워 커튼도 없는 곳에서 길게 줄을 서 샤워 차례를 기다리는데 신경이 송곳 끝처럼 곤두서더라고요. 그런데 앞의 아이가 샤워를 마칠 생각을 않는 거예요. 일인당 샤워 시간은 삼분이거든요. 까딱 잘못하다간 몸에 비누칠도 못할 판이잖아요. 왈칵 화가 나서 그애의 벌거벗은 어깨를 툭 쳤어요. 쏟아지는 물줄기 속에서 느릿느릿 저를 돌아보는데, 글쎄, 그 아이 울고 있는 거예요. 유희였어요.

“미안해. 미안해.”

못 들었으면 좋았을 텐데 바보처럼 그 말을 듣고 말았어요. 눈물이 나데요. 거기 들어가서 처음이었어요. 그전엔 눈물 흘릴 엄두도 못 냈었다는 걸 그때 알았죠. 그 아이와 관련된 제 추억은 그게 전부예요. 뛰어내렸다는 소식을 듣고, 부러웠어요. 나랑 비슷한 아인 줄 알았는데, 그럴 줄 몰랐는데, 그 아이 정말 용감해요. 제 말뜻 이해 못하실 테지만.

 

장유석, 40세, 자영업자

대체 뭘 알고 싶다는 겁니까? 인터넷에 올렸던 글? 하, 참, 별걸 다 알고 오셨네. 생각을 해보십시오. 멀쩡하던 애가 갑자기 죽었다는데, 그것도 제 발로 옥상에서 떨어졌다는데, 그럼 가족 된 입장에서 어떻게 가만있습니까? 하나뿐인 누이동생이 소년원에서 시체로 발견됐다는 통보를 받으니까 눈앞이 깜깜해지면서 뵈는 게 하나도 없습디다. 시쳇말로 확 돌아버린 거죠.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라는 말, 살면서 실제로 느껴본 적 있으십니까? 그 당시가 또 워낙에 인터넷이 힘이 셀 때 아닙니까. 억울한 일을 당한 뒤에 어따 하소연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싶으면 일단 인터넷에 글을 올리던 시절입니다. 그런다고 죽은 애가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는 거 모르지 않았습니다만, 그래도 울화가 터져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랬던 겁니다. 다른 뜻은 없었습니다. 원래 글을 올린 싸이트가 어디였는지 지금은 기억도 안 납니다. 내 글을 본 다른 네티즌들이 여기저기에 막 퍼다 나르고 그래서 얘기가 커진 거지, 내가 다른 꿍꿍이가 있어서 일부러 일을 확대시킨 건 아닙니다. 나는 그 일에 대해 더이상 할 말이 없습니다. 나도 바쁘다면 바쁜 사람인데 입 아프고 피곤하게 다 지나간 얘기 들먹이고 싶지 않습니다. 아니, 그걸 읽어보고 오셨다면 더더군다나 잘 아시겠군요.

우리 유희 마지막으로 면회했을 때, 그게 유희가 죽기 바로 며칠 전인데, 애가 뺨이 홀쭉하게 빠져 있었습니다. 그전에 다른 시설에 있을 때와는 또 다르게 얼굴빛도 누르뎅뎅하게 떠 있었습니다. 오빠랍시고 뭐 변변히 해줄 것도 없고 해서 속이 미어지는데 얘가 도리어 나를 걱정하는 겁니다. 자기는 하루에 세끼씩 꼬박꼬박 찾아먹는데 오빠 밥은 누가 챙겨주는 사람도 없을 거 아니냐고. 걔가 그렇게 착하고 덧정 많은 애였습니다. 안에서 헤어디자인을 배웠던가봅디다. 그게 제 적성에 잘 맞는다면서 자격증 따가지고 나오면 헤어숍에 취직할 거라고. 고입검정고시 공부를 하는데 자기는 영어, 수학 기초가 달려서 큰일이라고, 그런 얘기들을 했습니다. 미래에 관한 얘기만 했단 말입니다. 자살에 대한 어떤 암시도 없었습니다. 그러던 애가 갑자기 며칠 만에, 제 손으로 목숨을 끊었다는 건 상식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들었습니다.

유족 입장에서 비원여고측의 태도가 좀 섭섭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영안실에서 사체를 안 보여주려고 하는 겁니다. 부모가 있으면 형제는 안된다면서, 앞뒤 분간 못하는 우리 아버지만 한 오초간 시체보관소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나오더란 말입니다. 유희를 보고 나온 아버지는 도살장의 늙은 소처럼 계속 눈물만 흘려댈 뿐 입술을 떼지도 못했습니다. 아무리 백방으로 수소문해봐도, 그때만 해도 비원여고가 생긴 지 얼마 안된 때라서, 거기 있다가 출소했다는 아이는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 안에서의 생활이 어떤지 증언해줄 사람이 없으니 장님 코끼리 더듬듯 그저 막막하기만 했습니다. 그러다 그곳에서 잠시 근무한 적이 있다는 전직 교도관 한사람과 연락이 닿았습니다. 그는 덩치가 왜소하고 눈동자를 유난히 희번덕거리는 남자였는데 유희 얘기를 듣자마자 대번에 자살일 리가 없다고 했습니다. 유희가 떨어졌다는 그 기숙사 옥상이라는 데는 문이 잠겨 있어서 원생들은 들어갈 수도 없는 곳이라고 했습니다. 또 기숙사 방들은 창문을 죄다 쇠창살로 막아 가느다란 팔뚝조차 밖으로 내밀 수 없도록 설계했다는 것입니다. 의지대로 자살도 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그 남자는 안타깝게도 우리 유희를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그걸 미안해하면서, 그는 그 안의 아이들은 다 날개 꺾인 천사들이기 때문에 우리 유희도 분명히 아주 착하고 예쁜 소녀였을 거라고 했습니다. 아직도 고맙게 생각합니다. 사실 그분의 증언이 없었다면 인터넷에 글을 올릴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 전직 교도관이 실은 원생들을 상습적으로 성추행하다가 쫓겨난 사람이라는 얘기는, 나중에 들었습니다. 비원여고측과 오해가 풀린 다음입니다. 유희가 쓴 유서가 발견되고 나서지요. 아, 비원측과는 화해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나도 본의 아니게 그쪽에 피해를 입힌 부분이 있지 않습니까. ‘제 동생의 억울한 죽음을 밝혀주세요’라는 제목의 글이 인터넷을 타고 떠도는 동안 비원여고 쪽에 항의전화도 무척 많이 걸려온 모양입니다. 그래도 어쨌거나 그쪽에서 다 이해해줘서 다행입니다. 명예훼손으로 고발할 수도 있는 건인데 말입니다. 아,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돈? 돈, 돈이라. 그거 저도 참 좋아합니다. 가난하면 좀 불편할 따름이 아니냐고 반문하는 인간들의 입을 찢어버리고 싶을 만큼, 좋아합니다. 나, 무슨 성인군자도 아니고, 바른길만 디디며 살아온 놈도 아닙니다. 그래도, 그래도 말입니다. 하나뿐인 동생이 죽었는데 그 주검을 앞에 놓고 몸값 흥정하는 놈은 아닙니다.

그쪽 사람들이 우리집까지 찾아온 건 맞습니다. 그것까지 부인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부하직원들 데리고 유동협 이사장이 직접 왔습니다. 내심 놀랐습니다. 악수를 해보니 손이 아주 두껍고 따뜻했습니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한글도 모르는 우리 할머니한테 큰절을 했습니다. 그러고는 초저녁부터 취해 방구석에 엎어진 우리 아버지 앞에 무릎 꿇고 앉아 손수건으로 눈가를 훔치더군요. 나, 부모 잘못 만나는 바람에 어릴 적부터 별별 꼴 다 보고 자랐습니다. 돈이든 권력이든, 가진 놈들이 유세 부리고 위선 떠는 모습 신물 나도록 봐왔는데 유동협은 확실히 달랐습니다. 그 뒤로 그 사람 유명해지는 것 보면서 내 예상이 크게 빗나가지 않았다는 걸 알았습니다. 곧 여당의 대통령후보 경선에 출마한다는 뉴스가 들리던데 아마 그 사람 잘될 겁니다. 그 사람, 자기가 가야 하는 곳이라면 세상 끝까지라도 갈 겁니다. 유동협을 따라온 비서가 위로금이라며 봉투를 내밀긴 했습니다만 바로 거절했습니다. 유희가 제 손으로 쓴 유서도 나온 마당에 그걸 받을 이유는 없었습니다. 친필감정? 그런 건 따로 하지 않았습니다. 내 동생 글씨를 설마 내가 모르겠습니까. 어디서 무슨 헛소문을 듣고 오셨는지 모르지만, 내 동생 유희는 자살했습니다. 유서에는, 오빠 미안해,라고 씌어 있었습니다. 오빠 미안해,라구요. 이제, 됐습니까?

 

이마리, 36세, 배우

요즈음 좀 바빠요. 다음주부터 새로운 작품에 들어가거든요. 이번엔 주말연속극이에요. 모든 걸 가진 완벽한 여자의 역할이지요. 아름답고 부유하며 주위의 사랑을 한몸에 받고 있던 그 여자는 어느날 교통사고를 당하게 돼요. 기억상실증에 걸려 괴로워하는데 설상가상 남편이 숨겨놓은 애인이 등장하죠. 어쩌면 그녀에게 닥친 재앙은 남편의 사악한 계략 때문이었는지도 몰라요. 한때는 완벽했던, 몰락한 여자의 곁에는 그녀만을 바라보는 또다른 남자가 있지만 여주인공은 그를 알아보지 못해요. 그녀는 어떻게 될까요? 그래요, 운명의 장난을 극복하고 다시 행복해지겠죠. 드라마잖아요. 이야기의 원형은 시간이 흘러도 달라지지 않아요. 대중은 강렬하고 극적인 라이프 스토리를 원하지요. 물론 그 기준은 점점 높아지지만 중심축은 크게 달라지지 않아요. 주인공은 결국 끝까지 살아남아야 해요. 연약한 두 어깨에 고통을 짊어지고 맞서는 동안 오히려 더욱 완전한 인간으로 진화해야 하죠. 그녀에게는 이제 내면이 생겼거든요. 운명이 할퀴고 간 상처의 흔적 없이 어떻게 어른이 될 수 있겠어요?

나는 거짓말은 하지 않아요. 정직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은 비원여고에서 배웠어요. 비원은 여러모로 나에게 참 많은 것을 가르쳐주었지요. 진정한 의미의 학교라고 할 수 있을 거예요. 그곳에 있을 때는 몰랐지만, 세상에,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되는데 그보다 더 쉬운 일이 어디 있을까요. 그땐 어렸어요. 도망가고만 싶었고 엄살이 통한다고 믿었죠. 겨우 그 정도의 시련을 버거워했다니 부끄러워지네요. 한편으로는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어요. 그때 벼랑끝에 선 느낌을 경험하지 않았다면, 그 모욕감을 넘어서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 아무것도 아니었을 테니까요. 아마 비원여고를 나오지 않았다면 나는 진짜 내가 되지 못했을 거예요.

음, 배우가 되었을 때 선택의 폭은 넓지 않았어요. 소년범 출신이라는 과거는 머지않아 소문이 날 테고 신인 여배우의 일거일동을 옭아맬 게 분명했죠. 군중들은 타인의 추문에 열광하니까요. 나더러 용기있는 여성이라며 치켜세우는 건 반갑지 않아요. 비원여고 출신임을 처음부터 밝히고 시작한 건 용기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에 가까웠는걸요. 마침 세상이 나를 필요로 했다는 건 행운이었죠. 화면 안에서나 밖에서나 정숙한 이미지를 연기하는 여배우는 흔해요. 고상하거나 깜찍한 이미지도 마찬가지죠. 하지만 그들 중 어느 누가, 한 사회의 윤리적 판타지를 충족시켜줄 수 있을까요? 사회의 가장 밑바닥에 있던 아이도 제 꿈을 이룰 수 있다는, 우리는 아무도 소외시키지 않는다는, 그 알리바이가 때로는 이곳에 절실하게 필요하잖아요. 완벽한 착각이라고 해도 말예요. 누군가는 어쨌든 맡아야 할 역할인 거고, 나는 기꺼이 그 역할을 수락한 셈이에요.

장유희라…… 모르겠다고 대답하면 어떻게 하실 건가요? 걱정 마세요. 똑똑히 기억하고 있으니까. 우리는 국립소년원에서 함께 이송되어왔어요. 그앤 날 언니라고 불렀어요. 내가 한살이 많았거든요. 우리는 서로 다르긴 했지만 사이가 나쁜 편은 아니었어요. 행동이 좀 굼뜨다는 이유 때문에 유희를 미워하는 애들도 있었죠. 이해는 가요. 운동장을 뛰다가 한명이라도 처지면 꼭 단체기합을 받거든요. 또 그애, 안에서도 손버릇을 고치지 못했어요. 거기선 담배 한개비가 일주일치 밥보다 더 귀중했거든요. 그런데 그애, 다른 아이들이 숨겨놓은 담배에 손을 대곤 했나봐요. 능력이 따르지 않으면 욕망 자체를 싹 지워야 하는데 그걸 깨닫기는 쉽지 않은 나이잖아요. 그래도 뭐 조금만 너그럽게 생각하면 봐주고 넘어갈 일인데 딴애들은 그렇지 않았나봐요. 그냥 다들 버티기가 힘드니까, 누구 하나를 함께 미워하면 조금이라도 힘이 나리라고 생각했던가봐요. 마음의 일이라도, 마음대로 하고 싶었던가봐요.

희생양이 꼭 유희였으면 하고 바랐던 건 아니에요. 어떤 식으로든 바깥세상에 알리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는 건 인정해요. 원생 하나가 죽는다면, 방송국이며 신문사에서 달려오겠지, 어떻게든 우리를 구출해주겠지, 싶었던 거죠. 정말이지 순진했다니까요. 몇몇이서 계획을 짜긴 했어요. 그야말로 장난처럼 시작한 일이에요. 일종의 현실도피였죠. 목을 매는 방법보다는 높은 데서 떨어지는 게 더 낫겠다는 발상은 내가 했어요. 목매달 끈을 만드는 일이 옥상 문을 열어줄 사람을 구하는 일보다 훨씬 번거로워 보였으니까요. 아무려면 어때요. 어차피 다 장난이었는데. 우리의 목덜미나 엉덩이를 향해 24시간 감시카메라보다 더 집요한 눈길을 보내는 교도관들은 꽤 흔했어요. 겪어보니 사람 사는 곳에는 지옥이든 천국이든 다 얇은 틈새가 있게 마련이더라고요. 개구멍 같은 것 말이에요. 외부방문이 있는 날을 디데이로 잡은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어요. 여러모로 학교 안이 어수선하고 감시도 느슨해지니까요. 그러나 직접 유희의 등을 떠밀었다는 건 엄청난 비약이에요. 너 죽어, 한다고 바로 죽는 사람이 어디 있나요. 반복해서 말씀드렸잖아요. 그 계획은 실제에 옮기려고 의도한 게 아니었어요. 지금 여기의 고통을 잊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었을 뿐이죠. 그러니까 지루한 수업시간에 선생님 몰래 로맨스 소설을 읽으면서 마음 졸이는 그런 행동에 불과했다고요.

그날 밤에 일어난 일의 내막은 나는 전혀 몰라요. 알고 싶지도 않고, 알 필요도 없다고 생각해요. 유희가 온몸으로 항거한 뒤에도 예상과 달리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니까요. 아무도 우리를 구하러 오지 않았으니까요. 아, 누굴 원망했다는 뜻은 아니에요. 그 안의 아이들에게 어디 그럴 자격이나 있나요? 어차피 죄를 짓고 들어간 주제들이잖아요. 그때, 저지른 죄 때문에 벌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다들 살짝 망각했었나봐요. 유희에게는 결과적으로 미안해요. 어떤 식으로든 그애가 알리려던 가치를 지키지 못했잖아요. 유희의 사고가 있고 나서 학교는 거대한 침묵에 휩싸였어요. 다음날부터 일주일 동안 매끼마다 도미회 덮밥이나 난자완스 같은 특별식이 제공되었지요. 후식으론 진짜 생딸기를 얹은 치즈케이크와, 메론맛 아이스크림이 나왔고요.

유동협 의원과 나의 관계? 흐음, 꽤 흥미로운 추측이네요. 편한 대로 생각하세요. 우리의 관계는 어차피 속악한 잣대로 재단하기 어려워요. 20년 가까운 세월을 알고 지냈으니 이만하면 이제 개인적인 관계의 영역은 넘어섰다고 봐야죠. 한가지는 확실해요. 그쪽도 나도 이 게임의 루저(loser)는 아니라는 것. 패배자. 당장 제 앞가림도 못하면서 남의 인생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간섭하는 이들을 나는 그렇게 불러요.

 

김현수, 33세, Y대학 부설 자살문화연구센터의 계약직 연구원

성공적인 대화의 기본원칙은 상대방의 말에 관심을 가지고 집중하는 것이다. 장유희 프로젝트와 관련하여 만난 많은 사람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나에게 자신의 입장을 이야기했다. 그들이 얼토당토않은 허구의 진술을 하고 있다는 의심은 할 수 없었다. 봄이 깊어가고 있었다. 집권여당의 국민경선대회가 조만간 개막될 예정이었다. 제20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할 공식 후보를 선출하기 위해서였다. 열정적인 사회사업으로 국민적 신망을 쌓아온 유동협 의원은 신문지상에서 유력한 후보로 거론되는 중이었다. 라이벌로 지목되는 인사는 4선 의원 출신으로, 지지난번 정권에서 행정자치부 장관을, 지난번 정권에서는 국무총리를 역임한 노회한 정치인이었다. 허교수가 그의 라인이라는 소문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허교수가 원하는 것은 구체적인 물증이었다. 딱딱한 어금니로 깨물면 상처가 나는, 순금(純金)처럼 선연한 증거.

중간보고를 앞두고 나는 희뿌연 안개의 숲속에 서 있는 심정이 되었다. 그들의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장유희의 죽음은 곧 터져버릴 허공의 물방울처럼 헛것이 되어갔다. 하긴 18년 전의 일이니 그 물방울들은 오래 전에 산산이 부서져 자취조차 남지 않았을 것이다. 진작에, 헛것이었을 것이다. 서로 다른 말들이 규정하는 사건의 진실이 오리무중인 채로, 나는 최대한 미루었던 중간보고를 하기로 결심했다. 내가 들은 말들을 그대로 나열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도 없을 듯싶었다. 그들의 증언을 말줄임표 하나까지 타이핑한 녹취록과, 그들의 음성이 담겨 있는 디지털 녹음기를 가지고 나는 자살문화연구센터로 향했다. 열흘 만이었다. 택시 안에서 어젯저녁 4선의원이 경선 출마포기를 선언했다는 라디오 뉴스를 들었다. 그 늙은 정치가는 유동협 의원에 대한 지지를 공식 선언했다고 했다.

“거, 잘됐네. 나라꼴이 이 모양이니 이젠 어쨌거나 좀 강력한 지도자가 나와야 되지 않겠습니까.”

택시기사가 연신 입을 벙긋거렸지만 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몇년 전 최신 공법으로 지었다는 대학본관 빌딩을 지나, 1970년대에 세워진 인문대학 앞을 거쳐, 서기 2000년 완공된 콘크리트 건물에 도착했다. 자문연 사무실은 이 건물의 221호에 위치하고 있었다. 복도의 첫 방이었다. 나는 스스럼없이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사각형의 방은, 텅 비어 있었다. 문밖에 걸려 있던 자살문화연구센터의 현판이 사라진 것을 그제서야 확인했다. 다행히도, 자문연의 첫번째 프로젝트에 관해 통보받던 날만큼 당혹스럽지는 않았다.

나는 터덜터덜 계단을 걸어내려왔다. 건물 밖에 서서, 221호의 창문을 올려다보며 담배 한대를 입에 물었다. 어떤 맛도 나지 않았다. 최근 기록적인 판매고를 올리고 있는, 니코틴과 타르 성분이 전혀 없는 담배였다. 예전에 담배는 두 가지 역할을 했다. 일상에 대한 작은 탈출구, 혹은 육체에 대한 자해. 어린아이 앞에서 담배연기를 뿜어대기라도 하면 그것은 거의 범죄에 가까운 일로 여겨지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 담배는 공기보다 무해하다. 흡연은 완벽한 취향의 문제가 되었다. 그리고 아무도, 비원여고의 소녀들처럼 그토록 절실하게 한개비의 담배를 욕망하지 않을 것이다. 오빠 집에서 사진을 여러장 보았는데도 장유희의 얼굴이 도통 떠오르지 않는다. 어떤 아이였을까. 죽지 않았다면 나보다 두살 많을 여자였다. 어디선가 부딪친다면 짐짓 누나라고 부르며 담배 몇개비쯤은 얼마든지 권했을 텐데. 2004년 10월 22일, 장유희가 사망했다는 사실만이 유일한 증거였다.

 

허교수를 다시 만난 것은 몇 계절이 지난 뒤, 지도교수의 환갑을 겸한 출판기념회 파티에서였다. 그는 내 어깨를 치며 반갑게 아는 체를 했다.

“김박사, 어디 자리는 잡으셨나? 쯧쯧, 큰일이야. 어서 취직을 해야 장가도 가고 할 텐데 말이야. 이 나라 인문과학의 위기가 어디 하루이틀이어야지.”

그의 가짜 치아들은 여전히 희게 번쩍댔다. 나는, 우리가 맺은 2년의 계약기간이 아직도 한참 더 남아 있다고 일깨워주려다 그만두었다. 연구소가 문을 닫은 얼마 후, 나는 집의 우편함 속에 꽤 큰 금액의 현금뭉치가 들어 있는 것을 발견했었다. 나의 지도교수가 그에게 다가와 악수를 청했기 때문에 우리는 더이상 다른 말은 나누지 않았다. 곧 공식행사가 시작되었다. 성공한 제자들이 중심이 되어 진행하는 행사였다. 장내에 불이 꺼지고 베토벤의 쏘나타가 깔렸다. 누군가 경외심에 벅찬 음성으로 지도교수의 약력을 읊는 것을 들으며 나는 조용히 행사장을 빠져나왔다.

그새 날씨가 꽤 쌀쌀해져 있었다. 외투깃을 세우고 길을 걷다가, 구청 담벼락에 새로 설치된 선거벽보판을 보았다. 일렬로 걸린 일곱대의 모니터마다에서 제20대 대통령선거에 출마하는 일곱명의 공식후보들이 환한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첫번째 모니터 속에 유동협이 있었다. 유동협은 얼마 전 소속정당의 국민경선에서 압도적인 스코어로 승리하여 기호 1번의 대권주자가 되었다. 정지된 화면 안에서 그는 한팔로 대여섯살가량의 작은 여자아이를 번쩍 들어올려 껴안고 있었다. 사랑으로 거듭나는 대한민국. 그의 표어가 어쩐지 낯익었다. 그는 승리자가 될 수 있을까. 어쨌든 나는 청년실업률 해소대책과 실업기금의 재원확보를 핵심공약으로 내세운 후보자에게 한 표를 던질 작정이었다. 하늘은 차고 맑았다. 초겨울의 빛이 무심하게 내 눈을 찔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