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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

 

그라운드 제로1에서의 단신

두 시기의 권력, 형평, 전후재건

 

 

마크 쎌던 Mark Selden

빙엄튼대학 교수(사회학 및 역사학). Japan Focus(www.japanfocus.org)를 운영함. 저서로 The Yenan Way in Revolutionary China (1971), War and State Terrorism: The United States, Japan and the Asia-Pacific in the Long Twentieth Century (2003, 공저) 등이 있음. 필자는 이 글과 관련해서 허버트 빅스, 유레이딘 블럭, 존 다우어, 로러 헤인, 개번 머코맥, 스티브 샬롬 등의 비판적인 논평과 제안을 참조했다고 밝히고 있다. 이 글은 2003년 11월 히로시마의 UNITAR(United Nations Institute for Training and Research, 유엔훈련연구원) 아시아사무소 창립총회에서 강연한 원고를 수정·보완한 것이다. 원제는 “Notes From Ground Zero: Power, Equity and Postwar Reconstruction in Two Eras”이며 원문은 Japan Focus에 올라 있다. ms44@cornell.edu

ⓒ Mark Selden 2004 / 한국어판 ⓒ (주)창비

 

 

죠지 W. 부시 대통령은 일본에 대한 미국의 점령통치를 이라크 민주화를 위한 모델로 거듭 제시해왔다. 그런데 일본에 대한 점령통치가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등 현재 전쟁으로 찢긴 사회들을 재건하는 데 시사하는 바가 있는가? 몇몇 유사점들이 두드러지기는 한다. 예컨대, 반세기 전 일본에서처럼 미국은 민주화된 이라크에 ‘주권’을 넘겨주고 아프가니스탄에서는 민주적인 이행을 보장할 의사가 있다고 선언한 것이다. 중동과 중앙아시아 두 지역에서 미국 군대가 확고한 주도권을 쥐고 있는 상태에서 말이다. 그러나 겉으로 드러나는 유사점 너머에는 심각한 차이들이 있다. 미국이 ‘재건’하고자 하는 국가와 민족들, 그리고 두 지역과 두 시기에서 맞닥뜨린 문제들뿐만 아니라 미국의 전략·목표·참여방식에 있어서도 차이가 분명한 것이다.

2004년 6월 16일까지 이라크 내 미군과 연합군의 전사자는 1000명에 급속히 육박해가고 있었다. 전사자 952명은 미군 836명, 영국군 59명, 여타 다국적군 12명 등이다. 그중 694명의 전사는 부시가 이라크전 승리를 선언한 2003년 5월 1일 이후에 발생했으며 최대 희생은 2004년 4월, 그리고 138명의 미군이 전사한 2004년 5월에 발생했다. 2003년 5월 1일 이래 5134명의 미군이 전투중 부상당했으며 비전투중의 부상을 포함하면 부상자는 총 1만6000명에 이른다. 하지만 이 수치는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 계속되는 미군과 연합군 사상자의 규모나 군사충돌 범위와 깊이를 전혀 전달해주지 못하는데, 이런 상황은 개혁·재건·발전을 저해할 정도로 미국이 군사활동에 몰입하는 하나의 중요한 이유가 되고 있다.

2001년 이래 독일의 란데슈툴 지역군쎈터(Landestuhl Regional Military Center)는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을 포함하는) ‘테러와의 전쟁’으로 1만1754명의 군인을 치료했으며 그중 1000명 이상은 정신적인 문제 때문이었다. 이 수치에는 수많은 ‘비전투’ 부상자들이 빠져 있다. 이라크전 시작 이래 미군에 의해 죽은 이라크인 수는 훨씬 더 많지만, 베트남 식의 반발을 두려워해 미 점령당국은 아무런 숫자도 공개하지 않고 있다. ‘핵전쟁 방지와 사회적 책임을 위한 의사모임’ 영국지부(MEDACT)의 2003년 11월 보고서에 따르면, 2003년 3월 이래 사망한 이라크인은 2만명에서 5만5000명 사이로 추정된다. 이라크 바디 카운트(Iraq Body Count)는 2004년 6월 16일까지 죽은 이라크인을 9436명에서 1만1317명 사이로 어림잡았다. 정보에 근거한 모든 관측자들이 동의하는 것은 사망자의 다수가 어린이라는 점이다. 이런 추정치 중 어떤 것에도 전쟁 전후의 급양·의료 체계의 붕괴 같은 현실적인 원인들로 죽은 더 많은 수의 이라크인은 포함되지 않는다. 전투와 관련된 사망자 수는 2004년 봄에 미국이 팔루자와 모술 및 그밖의 도시들을 공격하면서 급상승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국이 임명한 하미드 카르자이(Hamid Karzai) 정권은 수도 카불을 넘어선 지역에서는 거의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고 있다. 군벌들이 그 나라의 대부분을 통제하는 가운데, 미국 및 파키스탄 군대는 부활하는 탈레반과 국내의 무장집단들에 맞서 격렬한 전투를 벌이고 있다. 이라크에서와는 대조적으로 아프가니스탄에서는 미국의 권위가 주로 군사적인 영역에 국한되어 있고, 유엔과 세계은행 및 기타 다양한 비정부기구(NGO)들이 재건을 시도하고는 있으나 자원은 빈약하고 비전은 옹색하기 이를 데 없다.

일본의 경우는 이와 뚜렷하게 대조된다. 6년의 점령기간(1945~51년)에 단 한명의 점령군도 전사하지 않았으며 안보문제는 일본 경찰에 신속히 이양되어 점령당국은 정치적·사회적 개혁, 경제적 구조조정과 재건 그리고 개발에 집중할 수 있었다. 미국의 공격으로 희생된 일본인도 없었다.

우리는 안보의 언어를 또다른 종류의 핵심쟁점들로 번역해볼 수 있다. 예컨대 부시행정부는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를 ‘테러와의 전쟁’의 최전선으로 본다. ‘테러와의 전쟁’은 미국과 이슬람세계의 갈등을 가리는 중심적인 구호이다. 이 갈등은 세계의 가장 비옥한 유전지대에서 미국의 군사적 통제를 확고히 하고 이스라엘의 지위를 높이려는 시도들과 일치하며, 또한 중앙아시아와 중동의 모든 갈등지역에서처럼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두 지역의 반미감정을 격앙시키는 요인들과 일치한다. 일본에 대한 점령통치와 재건 또한 지역적 갈등을 유발하기는 했으나 그 갈등은 외부 즉 한국과 베트남에서 현실화되었고 그런 상황은 일본의 재건과 개혁의제를 손상킨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2차대전, 탈식민주의, 냉전: 전후재건의 역사적 기원들

 

그라운드 제로는 인류 역사상 가장 파괴적인 전쟁에 막을 내리게 한 핵폭격이 지나간 뒤의 폐허 세계를 가리키는 강력한 메타포이다. 히로시마와 나가사끼는 마이클 셰리(Michael Sherry)의 말대로 주요 강대국이 공유한 ‘기술적인 광신주의’의 산물인 저 광대한 살육의 성격을 되돌아보게 한다. 그 광신주의는 히로시마로 치달아 도시민들을 파괴목표로 삼은 전략적 폭격의 승리로 2차대전에서 새로운 절정에 이르렀다. 독일과 영국의 뒤를 이은 미국은 2차대전의 마지막 해에 공중폭격을 동원해 독일과 일본의 수십개 도시를 체계적으로 파괴하여 수십만명에 이르는 민간인을 죽였다. 이 전략은 커티스 르메이(Curtis Lemay)의 명령 아래 일본의 64개 도시를 불사른 후 히로시마와 나가사끼의 절멸에서 완결되었다. 그 살육의 규모, 그리고 차후 미국의 군사입안자들이 한국·베트남·아프가니스탄·이라크에 적용한 전략이 남긴 교훈은 그라운드 제로의 메타포가 모든 국가에 해당되는 얘기라는 것이다.

2차대전은 민간인을 계획적인 공격목표로 삼았기 때문에 테러폭격(terror bombing)이라고 해야 마땅한 것을 신성하고도 정상적인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테러폭격은 하나의 독트린이 되어 미국에 의해 다른 영토에 확장·적용되었으니, 북한에서의 댐과 제방의 파괴, 베트남에서의 오렌지제(Agent Orange) 같은 고엽제의 사용, 그리고 걸프전에서의 열화우라늄무기와 집속탄 같은 새로운 무기의 사용이 그러한 경우다.

그러나 2차대전은 또한 미국으로 하여금 세 가지 인문주의적인 원칙의 틀을 짜고 정당화하는 위치에 서게 했는데, 이 원칙들은 국제적으로 법적·인권적 질서를 새로 짜려는 전후 노력의 중심에 있어왔다. 이 세 가지 원칙이란 뉘렘베르크(Nuremberg) 원칙, 반식민지 투쟁, 그리고 전후재건의 정당화 등이다.

뉘렘베르크의 핵심적인 원칙은 개인들, 특히 중요한 정치적·군사적 지도자들이 전쟁범죄와 반인륜적 범죄에 개인적으로 책임을 지도록 하고 이런 범죄를 저지른 자는 즉결처형 혹은 사면을 받는 대신 공식적으로 재판을 받아야 한다는 선언이다. 이런 점은 유엔과 인권선언을 통해 신성화되고 차후 폭넓게 확장된 새로운 국제인권체제의 토대를 이루고 있다. 하지만 뉘렘베르크와 토오꾜오 그리고 그후 법정들의 배후에 있는 지배적인 강국으로서, 그리고 1945년 이후에 벌어진 많은 주요 전쟁의 주인공으로서 미국은 끈질기게 그 자신과 동맹국의 행위들을 조사나 처벌의 대상에서 제외해온 반면, 자신의 적을 기소하고 처벌할 권리는 주장해댔다. 더욱이, 에드워드 허먼(Edward Herman) 등이 기록하고 있듯이, 베트남과 그후의 전쟁들에서 미국은 전쟁중에 죄수와 민간인을 계획적으로 고문하고 학대했으며, 수십년에 걸쳐 동맹국들의 군사·정보요원 등을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국제 인권규범에 위배되는 행동을 하도록 훈련시켜왔다. 부시행정부에서 이런 행위는 더욱 심해져서 아부 그라이브(Abu Ghraib) 감옥의 잔혹한 학대행위와 다른 전쟁범죄를 염두에 둔 국방부 변호사들은 고문에 대한 제네바협정 등의 조약으로부터 대통령 면책권을 노골적으로 주장하는 전략을 짜내기까지 했다.

끝으로, 미국은 승전국이 자신의 동맹국뿐만 아니라 패전국의 재활에도 기여하는 방식으로 전후재건활동을 벌인다는 것을 뚜렷하게 보여주었다. 그 결과는 전쟁배상과 관련해서 패자가 승자에 의해 으레 더 피를 흘리게 마련이라는 지배적인 논리를 뒤집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패전한 산업국가들의 전후재건은 새로운 헤게모니 전략의 한 축이 되었는데, 이는 여타의 부문들은 군사적으로 종속시킨 채 국제적인 무역과 투자 부문을 가속적으로 회복시키기 위해 구상된 것이었다. 이런 비전의 골간을 마련해준 것은 영구적인 미군기지들과 미군의 해외주둔 네트워크의 창출이었다. 한마디로, 미국의 전지구적 권력과 정당성은 한편으로는 국제적인 인권원칙과 전후재건에 대한 새로운 접근법의 기틀을 잡은 데 있었고, 한편으로는 군사적인 우월성에 있었다.

1945년 이후의 전후재건은 미국의 전략적 우선순위에 맞춰져 있었다. 미국은 패전한 적국, 특히 독일과 일본의 원조·재활·재건을 돕는 한편, 미국의 이익에 부합하는 세계경제를 다시 세우기 위해 꼭 회복시켜야 할 유럽의 동맹국을 선별해 원조를 제공하였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전후 폐허 속에 있던 많은 나라들을 비롯해 이전의 식민지들은 대체로 재건 일정에서 제외되어 그들 스스로 알아서 하도록 방치되었다. 핵심 국가들을 주축으로 한 미국중심의 세계질서 재건은, 국제무역에서 그것이 미국의 이익에 도움이 될 때 복구되는 나라들의 번영에도 기여했다.

일본에 대한 점령통치 당시 미국은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의 경우와 거의 마찬가지로 일본의 문화와 사회에 낯설었다. 하지만 당시는 훨씬 더 주의깊게 미리 계획을 세웠고 교육받은 헌신적 전문가를 비롯한 많은 요원들이 광범위한 분야에 걸쳐 있었다. 지금과 마찬가지로 당시 점령군이 직면한 긴박한 문제는 폐허가 된 나라의 안전보장, 평화확보, 원조제공 등이었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승전국들이 구조적인 문제에 즉각 관심을 돌릴 수 있었다.

점령에 대한 일본 내 저항을 잠재우고 원조·재활·개혁·재건에 즉각 촛점을 맞추는 것이 가능했던 데에는 세 가지 요인이 핵심적으로 작용했다. 첫째로 일본의 경우, 오랜 전시동원에 따른 전쟁피로감, 본토가 공중폭격당한 경험, 15년간의 전쟁 동안 200~300만명 가량의 군인 사망 등을 들 수 있다. 둘째로 상징적인 통치자로 천황을 유지하던 일본정부를 통해 간접통치하겠다는 미국의 결정으로 주요 통치기관과 권위구조가 비록 미국에 의해 제약되긴 했으나 그대로 남게 되었다. 셋째로 점령기의 핵심적인 프로그램이 일본 대중에 의해 광범위하게 포용되었다는 것이다.

신속한 시행, 대중의 반응, 그리고 많은 주요 재건조치들이 긍정적으로 귀결된 데에는 역사적인 요인도 작용했다. 예컨대, 물리적인 산업기반은 파괴되었으나 제도·문화·교육·기술 등의 토대가 손상을 입지 않고 대개 남아 있었기에 기술선진국을 재건하는 데 잇점이 있었다. 또 국가를 파괴와 패배로 이끈 정치·군사 지도자들에 대한 불신임도 한몫 했다. 여기에 일본의 경제적 부흥에 대한 일본과 미국의 관심이 일치한 점도 작용했는데 이 관심은 곧 냉전을 통해 강화되었다. 메이지시대 이래의 민주주의 실험들이 전후 민주주의와 유사한 길을 미리 닦아놓기도 했지만, 일본의 전후재건과 민주화는 경제의 주요 방향을 계획하는 데 국가가 적극적인 주도권을 쥔다는 전통을 토대로 이뤄질 수 있었다.

점령통치 몇해 안에 일본과 미국 간에는 개혁일정에 대한 합의가 있었고 여기에는 평화헌법, 탈군사화, 토지개혁, 노동개혁, 민주화, 여성권리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민주화의 전제가 된 것은 뉴딜에서 영감을 받은 사회개혁들이었다. 토지개혁은 농촌 지배계급의 권력을 타파하고 새로운 질서하에서 이전에 토지가 없거나 수익성 없는 토지를 소유한 상당수의 농민에게 물질적인 이익을 가져다주었다. 이전의 소작농이 점령당국이 책정한 낮은 가격으로 토지를 얻게 됨에 따라 자작농 경작 토지비율이 54%에서 90% 이상으로 증가해 농촌경제가 활성화되었고 농촌의 민주질서를 위한 사회적 기반이 마련되었다. 당시 독립자영농은 전체 토지의 90%를 경작했고 토지가 없는 소작농의 비율은 겨우 7%로 떨어졌다. 이전 군부정권에 의해 분쇄됐던 노동조직이 새로운 노동법에 힘을 얻어 강력하게 부상했다. 여성들 또한 투표권 및 경제적·사회적 권리를 포함해 중요한 권리들을 얻었다.

이와 대조적으로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는 토지·노동·성을 포함한 모든 종류의 사회개혁이 의제에서 배제된 것이 두드러진다. 사실, 점령당국을 운영하면서 민주주의는 그저 수사적으로나 강조하고 실제로는 군사적 통제, 사유화, 전쟁으로 인한 부당이득에 몰두해 있는 공급위주 경제학자들에게 그런 개혁이란 눈엣가시일 수밖에 없다.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의 사회적 위기를 처리하는 개혁일정이 부재한 상태에서 민주주의와 재건은 공허한 약속으로 남아 있다.

하지만 원조·재활·개혁·재건 등에서의 모든 성취에도 불구하고, 일본 점령통치는 모순적인 요소를 함축하고 있었고 그 유산은 긍정과 부정 양쪽으로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다. 전후 일본에 대한 연구들은 군사력과 점령통치의 현저한 특징인 재건 및 개혁 과정 사이의 긴밀한 관계에 충분히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미국은 오끼나와를 군사적으로 식민지화해서, 군국주의적인 길로 다시 나서는 것이 헌법적으로 차단된 일본에 미군을 영구히 주둔시킬 뿐만 아니라 핵무기를 포함한 군사력을 독점하게 되었다. 1950년 이래 일본경제에 동력을 공급해준 한국전쟁 군수품 조달이라는 노다지는 일본재건에 결정적이었다. 미국이 안보를 보장한 상태에서 일본의 국내투자는 경제·산업기반·사회의 재건에 집중될 수 있었다. 냉전의 전선을 따라 나뉜 식민지시대 이후의 아시아에서 미일 양국은 점령통치를 통해 미국 세력권 안의 경제적으로 강력하고 민주적인 일본이라는 비전을 공유하게 되었다.

물론 일본 점령기의 프로그램들이 모두 매끄럽게 진행된 것은 아니었다. 점령당국의 부처들 사이, 그리고 때로는 점령당국과 일본행정부 사이의 교착상태는 일본재벌―전쟁 이전의 경제를 지배했고 점령당국이 처음에는 일본 군국주의와 식민주의 배후의 추진력으로 지목한 경제·금융의 거대 결합체―해체 프로그램들을 무산시켰다. 마찬가지로, 점령당국은 냉전에 대한 점증하는 우려와 3차대전에 대한 예감에 내몰려 1947년에는 개혁에 역행하기도 했는데 이는 전반적으로 노동자와 진보세력에 대한 공격으로 이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화헌법, 토지개혁, 여성의 투표권, 수많은 보건·복지조치를 포함해 강력한 대중적 지지를 누리던 계획들은 충분히 시행되었을 뿐만 아니라, 가장 진척된 몇몇 개혁은 미국이 압력을 가해 축소하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1952년 점령이 형식적으로 종식된 이후에도 유지되었다.

전쟁 직후 몇년간 미국과 소련의 지도자들은 전쟁의 상처를 치유하고 휘하의 국가들을 경제적 성장과 번영의 길로 인도하는 데 사회개혁이 효과적이며 개발국가의 능력이 중요하다는 점을 확신했다. 정말이지, 냉전의 한 요소는 개혁을 촉진하려는 미·소 지도부의 경쟁이었다. 따라서 토지개혁은 혁명적인 중국·베트남·북한에서뿐만 아니라 일본·타이완, 심지어 제한된 범위에서나마 남한에서도 실시되었다. 전후 동아시아에는 상당한 지역에 걸쳐 자본과 시장의 작용을 통제하는 강한 국가들이 등장한 것이다.

미국의 점령통치는 전후 일본의 질서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일본의 식민주의와 군국주의는 제거되고 기본개혁들이 실시되었으며, 그후 50년 동안 국가의 에너지가 회복과 발전 그리고 민주주의에 집중되었던 것이다.

이런 이득은 일본의 독립성을 희생하고 이뤄진 것으로서, 일본은 아시아―태평양 지역과 그 너머에서 치러진 미국의 모든 전쟁과 냉전구도를 묵인하고 지지하게 되었다. 점령은 또한 비록 약화된 형태로나마 제국주의적 체제를 영속되게 하여 민주주의의 범위를 제한하고 전시(戰時) 및 식민지 시기의 잔혹행위들을 충분히 매듭지으려는 노력을 방해했다.

요컨대 개혁과 재건에 대한 일본과 미국의 이익이 대체로 일치함으로써 전후재건기 일본의 성취가 가능했고 그사이에 일본은 동아시아에서 미국 군사력의 중심축이 되었다.

 

 

21세기 초 중앙아시아와 이라크에서의 전후재건

 

일본과 서유럽에 집중된 즉각적인 전후재건의 경험 이후 40년이 지나는 동안 전후재건 문제는 국제적인 담론에서 종적을 감췄다. 한국전쟁, 베트남전쟁, 이란·이라크의 전쟁, 혹은 그 어떤 아프리카 전쟁들도 전후재건을 위한 국제적인 노력을 촉발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소련의 해체 이후, 미국은 다른 국가들과 세계기구들, 특히 유엔과 세계은행을 동원하여 재건사업을 지탱해왔다. 코소보, 소말리아, 동티모르, 캄보디아, 아프가니스탄, 이라크의 다양한 경험들을 보면 이제 전후재건이 분쟁지역을 안정시키는 목적을 띤 하나의 국제규범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20세기 말 세계화 과정의 구성물인바, 좀더 자세히 분석해볼 만하다. 물론 전후재건은 미국이 12년 사이에 여섯 개의 전쟁과 점령의 주요 개입자로 연루되어 있으며 그중 다섯은 이슬람 국가라는 사실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

부시행정부는 민주화와 개발을 결합시킨 일본의 성공사례를 현 재건 노력의 모델로 제시해왔다. 하지만 존 다우어(John Dower), 강상중(姜尙中) 등이 주목했듯이,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의 최근 경험은 일본이 1931년 만주를 군사적으로 강탈한 후의 점령 결과―이는 꼭두각시 국가 만주국을 세우고 15년에 걸친 전쟁을 불러왔는데―와 더 유사하다. 일본이 더 이른 시기에 식민지화한 타이완 및 한국과는 대조적으로, 만주국의 경우는 식민지 이후의 세계를 겨냥해 초기에 주도권을 쥐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 하지만 만주국에서 독립운동세력들을 진압하려는 일본의 시도―가 수포로 돌아가고 결국 전쟁이 중국 전역과 끝내는 진주만으로까지 확산되었는데, 이는 자국과 식민지들, 그리고 전쟁지역에 군국주의화와 억압을 불러왔으며 결국에는 군사적 패배, 제국의 해체, 〔미국에 의한〕 일본의 점령이라는 과정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중국인·몽골인·만주인·이슬람인을 분리하고, 만주국 내의 동화주의적 언어·교육·문화 정책을 통해 각 지역의 토착 언어·문화·종교를 억압하려 한 일본의 시도는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한국과 일본의 수백만 농민들을 이주시킨 것도 마찬가지로 저항을 촉발했는데, 광범위한 토지권이 지역민에서 일본과 한국의 지주들에게 이전되는 결과를 낳았고 이는 근본적으로는 토지절도였기 때문이다. 토오꾜오의 시각에서 보자면, 성공적인 일도 있었다. 일본의 통치는 산업화와 자연자원의 개발을 자극했고 그 상당부분은 신·구 재벌들에 의해 지배되었다. 만주국 문제는 은밀하나 포괄적인 정책방향들―일정한 경제적인 결과들을 산출하기도 했으나 동시에 강렬한 저항을 부른―이 내부의 지지를 얻는 데 실패한 예를 잘 보여준다.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보게 되는 것은 전후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 미국과 국제공동체가 한 역할이 어떤 면에서 미국 주도의 전후 일본 재건보다는 만주국에서의 일본의 접근방법과 더 닮았으며, 그나마 당시 일본이 개설했던 산업·농업 촉진 프로그램이 여기에는 전혀 없다는 점이다.

전후재건에 대한 접근방법에서 2차대전 직후의 시기와 현재를 뚜렷이 구분해주는 다른 결정적인 차이점들도 있다. 소련 붕괴의 여파로 미국은 잠재적 도전자에 대해서는 물론이고, 있음직한 도전자들의 조합에 대해서도 압도적인 무기의 우월성을 지닌 유일한 초강대국이 되었다. 하지만 곧바로 그 힘이 한계가 있으며 공격에 취약하다는 점 역시 분명해졌고 이는 2001년 9월 11일 미국의 힘의 상징인 쌍둥이빌딩에 대한 공격으로 가장 극적으로 드러났다. 9·11이 지나간 자리에서, 미국은 자신이 선택한 시간과 장소에서 선제적으로 정권교체를 꾀할 권리와 의도를 가진다는 것을 선언했다.

이것은 헤게모니에서 제국으로 폭넓게 전환하는 데서, 즉 공동의 이익을 바탕으로 동맹국들에 미국정책에 대한 지지를 호소하던 전략에서 널리 인정된 국제규범을 어기면서까지 미국의 힘에 종속될 것을 주장하는 정책으로 전환하는 데서 중심적인 교의가 되었다. 이런 방향으로의 중요한 발걸음들에는 환경에 대한 쿄오또의정서를 거부하고 무기통제협정들을 폐기하며 유엔의 지지가 없는 상태에서 주요 강대국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미국 주도로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를 침공한 행태들이 포함된다. 9·11 이후, 개연성도 없는 트리오로 이라크·이란·북한을 찍어 ‘악의 축’이라고 부른 것은 미국이 기획한 세계질서의 광대한 범위와 그 호전적인 태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워싱턴이 이슬람세계의 도전으로 간주하여 이에 맞서 미국의 힘을 다시 세우기 위한 새로운 전략은 미 군사력의 전략적 재배치뿐만 아니라 확장된 기지망도 필요로 했다. 찰머스 존슨(Chalmers Johnson)이 기록하듯, 2차대전 이후 미국의 힘이 확실히 팽창했다는 뚜렷한 특징 중 하나는 그 전지구적 기지(base) 구조로서, 이는 직접적인 통치에 입각한 영토상의 제국과는 대별된다. 1990년대의 새로운 현상은, 이전에 미국의 힘이 직접적으로 행사되는 범위 너머에 있던 폭발위험 지역, 특히 한때 소련의 영향권에 있었으며 중앙아시아와 중동이 포함되는 지역에서 미국의 기지들이 확산되었다는 사실이다. 동시에 소련의 위협이라는, 그런 기지들에 대한 낡은 정당화 논리는 증발했다.

부시행정부가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 전쟁을 벌여 군사적 우월성을 추구하는 데 막대한 자원을 쏟아부었음에도 불구하고 정복된 지역들에 안정·민주주의·재건을 구축하는 평화확보 능력은 없음이 증명되었다. 이것이 특히 자명하게 드러난 경우가 이라크인 망명자들 중 입맛에 맞는 사람을 골라 구성한 행정부로의 ‘권력이양’인데, 이것은 이라크의 독립을 위해 필요한 행정제도들은 말할 것도 없고 물질적·재정적 토대가 전혀 갖추어져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또 그 나라를 점령하고 있는 미군이 여전히 지속적으로 공격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 내의 선거일정에 쫓겨 2004년 6월 28일에 그저 형식적으로 이뤄진 것이다. 독립적인 이라크 대신 미국의 강요에 의해 이라크인 망명자들로 구성된 사이비 국가는 중요한 군사력에 대한 통제권이 전혀 없이 장기주둔할 13만8000명의 미군, 2만명의 동맹군, 이 나라 전역에 산재한 기지들에 사적으로 고용된 수천명의 용병들을 통해 현재 미국의 통제에 종속되어 있는 한편, 주요 결정들은 세계에서 가장 커다란 〔미국의 이라크〕 대사관에서 흘러나오고 있다. 마이클 슈워츠(Michael Schwartz)가 지적한 대로, 주권이양 이후의 이라크는 “국가물리력의 합법적인 독점, 사회·경제적 하부구조를 지탱할 물질적인 능력, 감독과 관리정책을 펼칠 능력이 있는 행정적 장치 등”과 같은 주권의 전제조건들을 전혀 가지지 못할 것이다. 이 또한 미국정책의 산물인데, 예를 들어 1945년 미국 점령하의 일본정부가 가졌던 정당성도 가지지 못할 것이다. 그 대신 일본제국주의의 불운한 시기에서 채택된 꼭두각시 국가의 극악한 특징들 대부분을 재생산하고 있다.

현재 미국의 재건방식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사회개혁뿐만 아니라 전후 일본·독일에서의 재건과 그후 경제성장에 결정적으로 중요했던 국가 중심의 접근방법 자체를 미국이 거부하고 있다는 점이다. 미당국은 일찌감치 미래의 이라크정부를 약화시키는 조치를 취한 바 있는데, 한편으로는 근본적인 사회개혁을 배제하고 고수익 사업부문의 상당수를 미국 기업에 넘겨주는 방식으로 경제를 사유화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신자유주의적 과세 방향에 따라 이라크 세금체계를 해체하고 폴 브레머(Paul Bremer) 점령당국이 기안한 97 ‘법률명령’을 통해 그 사이비 국가를 꼼짝할 수 없게 만들었다.

원조와 재건 노력들이 삐걱대고 브레머 당국이 이라크 재건을 위해 미 의회가 할당한 184억 달러의 기금 중 단지 32억 달러만 할당한 상태에서 주권국 이라크라는 외양만 갖추려는 시도가 공허해 보이는 건 놀랄 일이 아니다. 훨씬 더 자원에 굶주려 있는 아프가니스탄의 경우도 본질적으로는 마찬가지다.

미국 원조기관인 케어(CARE)가 내놓은 2003년 9월의 한 보고서에 따르면 군사적 공격, 나라의 상당지역을 통제하지 못하는 카르자이(Karzai) 행정부의 무능력, 힘있는 지역군벌(軍閥)에 의한 광범위한 아편거래 등이 겹쳐져 아프가니스탄의 안정과 재건은 계속 위협받고 있다. 미군이 탈레반정권을 무너뜨린 뒤 1년 반 동안 재건에 필요하리라 추정되던 액수의 약 1%에 불과한 1억9200만 달러 정도의 계획만이 추진되었다. 그 이래로 상황은 오히려 악화된 것으로 보인다.

대다수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의 고향인 농촌지역의 운명은 현재의 아프가니스탄과 2차대전 후 일본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를 아주 극명하게 보여준다. 토지권과 난민의 문제가 아프가니스탄의 경제적·사회적·정치적 삶에서 핵심이지만 아프가니스탄 정부와 유엔, 세계은행, NGO 고문들은 그 문제들을 체계적으로 무시해왔다.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승리가 선언되고 나서 2년 동안 농촌이 직면한 첨예한 문제들, 최우선적으로 축산에 그 다음으로 농업에 생계를 의존하는 사람들의 요구에 촛점을 맞춘 계획들이 시작되었다는 징후는 전혀 없다. 그 문제들은 다음과 같다.

 

▷ 토지권을 둘러싼 종족집단 사이의 충돌로 많은 사람들, 특히 방목에 따른 장거리 생활반경으로 취약함이 커질 수밖에 없는 유목민들이 토지를 상실했다.

▷ 탈레반 통치 마지막 몇년, 그리고 그후 전시에 460만명의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이 주로 파키스탄 혹은 이란으로 이주했다.

▷ 210만명의 난민이 돌아왔으나 그들 대부분이 토지경작권이 없고 재정착에 필요한 계획이나 도움이 거의 또는 전혀 없다.

▷ 탈레반정권 마지막 몇년 동안 아편의 경작과 거래가 실제적으로 사라진 아프가니스탄이 이제 다시 세계 제일의 아편공급 국가로 재부상하고 있다.

▷ 종족갈등으로 수많은 농민과 유목민이 토지에 대한 역사적인 권리를 박탈당했다.

 

한마디로, 전후재건의 근본적인 문제들은 거의 다뤄지지 않았다. 농촌문제들은 매우 심각한 5년간의 가뭄으로 더욱 악화되었다.

그러나 아프가니스탄의 새 정부가 재빠르게 행동한 것이 하나 있었는데, 그 지역에 투자한 국제적 기업들에 토지사용권을 보증하는 법률을 통과시킨 것이다. 이 정부와 이 정부를 자리에 앉힌 강대국의 우선적 관심사를 이보다 더 잘 보여준 것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농촌문제들은 귀향하는 아프가니스탄 난민들, 그리고 종족갈등·이주·가뭄 등으로 강제로 내몰린 유목민들과 농민들에게는 가장 절실한 의미를 지닌 것이다. 이 문제들은 더 폭넓은 문제들, 즉 사회적 형평성 문제나 토지권리를 둘러싼 종족집단간의 격렬한 사회적 갈등이 있어온 역사에 비춰 실행가능한 공동체를 창출하고 재활·개발 문제들에 대한 합의를 이끌어내는 능력 등의 문제들과 필요불가결한 연관성을 가진다.

소련 간섭기에 실패로 돌아간 토지개혁을 감안하면 토지문제는 아프가니스탄에서 특히 까다롭다. 카르자이 정부와 유엔의 원조사절단, 세계은행은 어떤 형태의 토지개혁도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적극적인 선택대상이 아니라는 시각을 공유하고 있다. 미국 혹은 유엔이 연관된 오늘날의 모든 전후재건 노력들에서 토지개혁이 완전히 무시되고 있음은 1940년대 이래 개발의 우선순위 대상에 실로 커다란 변화가 생겼다는 하나의 표시이다. 냉전 종식과 신자유주의적 이데올로기의 승리가 토지개혁과 다른 개혁들을 국제적인 의제에서 제거해버린 것이다.

외부로부터 강제된 어떤 청사진도 아프가니스탄의 유목·농경 공동체들이 지닌 복잡한 문제를 풀 수는 없다. 해결책은 지역적 문제와 가능성, 그리고 복잡한 사회구조를 이루는, 다양한 종족의 요구와 대립적 이해관계에 대한 주의깊은 연구로부터 생겨나야 한다. 타께마에 에이지(竹前榮治)가 적고 있듯, 일본의 토지개혁을 위한 수많은 착상들은 일본의 학자들과 관리들로부터 나왔고 오스트레일리아와 소련의 대표들도 중요한 기여를 했는데, 그러는 동안 미국의 관리들은 처음에 말을 삼갔다. 그런데 그 실질적 과정은 매카서 장군이 토지개혁에 지지를 보이고 난 뒤에야 진척되었다. 일본당국과 점령당국 사이의 광범위한 협상들을 통해서 마침내 일본의 고질적인 소작문제가 제거되고 경제발전의 토대가 마련될 방법이 강구된 것이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정부와 정부의 국제고문들은 토지소유권, 난민정착, 수자원 보존문제를 다루는 유의미한 계획도, 토지 무소유, 기아, 아편재배의 재발―이 점 역시 아편으로 넘쳐난 만주국을 연상시키는데―등에 대한 대안이 될 수 있는 농경·유목 개발계획 등을 아직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

아프가니스탄의 사례는 일본과 서유럽의 전후재건과 여타의 점들에서도 다르다. 이라크와 마찬가지로 아프가니스탄은 오랫동안 외국의 침략에 시달려왔고 종족적·종교적으로 깊은 분열에 직면해 있다. 수십년에 걸친 피해, 막심한 전쟁과 기근 이후에 심각한 공동체적·종족적 분열―강대국에 대한 저항과 통합된 통치를 강화하려는 지역권력들에 대한 저항에 모두 중요한 의미를 갖는―에 직면한 채, 아프가니스탄은 스스로를 재창출하려고 애쓰고 있다. 아프가니스탄 헌법은 현저한 종족적 분열을 일단 인정하는 방향의 몇가지 조치를 취했다. 하지만 깊은 종족적·부족적 분열은 군벌의 분열상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어 이 문제는 여전히 폭발할 위험이 있다.

그런 복잡한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은 극적인 ‘결과들’을 보여주려고 혈안이 된 미국의 정치 때문에 손상되고 있다. 유난히 눈에 띄는 것은 미국이 아프가니스탄과 특히 이라크에서의 미군 전사자 수를 가능하면 재빨리 줄이려고 든다는 점인데, 이라크에서 정통성이 전혀 없으며 자원도 거의 없는 정권에 ‘권력을 이양’한 것을 보면 재건에 대한 모든 희망을 미국이 저버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후재건이란 몇달 만에 평가되는 계획은 아니며 극도로 불안한 상황에서는 결코 그렇게 해서도 안된다.

국가적으로나 지역적으로 안보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인도주의적 위기를 해결하고 건전한 재건과 개혁의 가능성을 찾기 위한 하나의 전제조건이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전쟁으로 찢긴 나라에서 그 국민들의 요구와 실익에 봉사할 재건과 개혁의 의제 역시 안보문제 해결을 진전시키는 하나의 전제조건이다. 아프가니스탄을 위한 실행가능한 재건계획에, 난민의 송환과 정착, 식량 조달, 그리고 유목민과 농경민 사이의 분열뿐만 아니라 종족적·부족적 분열의 핵심에 있는 토지보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형평성있는 계획이 궁극적으로 포함돼야 할 것이다.

 

 

결론

 

2차대전 이후 (마셜플랜 아래) 일본과 유럽의 전후재건에서 미국이 취한 접근방식은 냉전, 9·11, 그리고 일련의 전쟁 후에 채택한 방식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두 시기 모두, 전후재건 프로그램은 미국의 이익에 봉사하도록 기획되었고 여기에는 상설적인 군사기지를 설치해 미군을 주둔시키는 것이 포함됐다. 하지만 미국이 기획한 전후재건의 근본적인 성격과 결과는 시간과 지역에 따라 변해왔다.

냉전 이후, 특히 9·11 이후 미국은 군사문제에 집착함으로써 안보가 생계·존엄·형평의 문제들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보지 못한 듯하다. 일본과 독일의 재활·개혁·재건 방식은 폭넓은 정당성을 누린 강한 정부를 통해 수행되었다. 반면, 미국이 주로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망명자들에서 골라 구성한, 뜨내기 정상배(政商輩) 행정부는 그 나라 안팎에서 정통성을 거의 갖고 있지 못한 정권이다. 토지개혁, 노동개혁, 여성의 권리 등을 통해 민주적 기반을 창출했던 개혁의제들은 이제 시장 일반의 신성성과 특히 미국자본의 우선권에 대한 강경한 이데올로기적 주장으로 대체되었다. 실로, 이전의 다른 곳에서 경제 회복과 발전에 필요한 힘을 제공하던 국가기관들이 지금 여기서는 고의적으로 약화되었다. 자율성을 성취하는 데 필요한 자원이 전혀 없는 이라크 과도정부에 ‘정권을 이양’함으로써 전후 이라크에 대한 미국의 비전이 파산했음이 명백해졌다. 그 결과는 오직, 미국이 장막 뒤에서 계속 지배하고, 미군에 의해 이라크 민간인들이 계속 살육되며, 이라크의 재건과 독립에 필수적인 방향 또는 자원을 제공하는 데 실패하리라는 것뿐이다.

반세기 전의 미국이 일본과 독일에서 강한 정부의 기반을 창출하려고 노력했다면, 오늘날의 미국은 군사력에 집착함으로써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 폭력과 갈등의 지속적인 악순환 가능성이 높아가고 있는데, 이런 순환구조는, 세계의 결정적인 석유자원을 통제하고 있어서 미국으로서는 싸움을 벌일 수밖에 없는 이슬람지역 전체로 확장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申鉉旭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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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그라운드 제로(Ground Zero)는 폭탄이나 핵무기의 낙하지점 또는 피폭 중심지를 의미하는 용어로 ‘지상원점’ 또는 ‘폭발중심지점’을 의미함―옮긴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