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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평
피리 부는 사나이의 선율이 되지 않기를
영화 「화씨 9/11」
김종광 金鍾光
소설가 kckp444@hanmail.net
영화만큼 사전 정보를 심하게 노출하는 예술이 또 있겠나. 신문과 방송에서 노골적으로 선전해줘, 인터넷에서 시끌시끌해, 만남의 자리에서 부담없는 말안주로 사랑받지, 하여튼 그 영화 안 봤어도 본 듯하고, 처음 봤어도 서너 번은 본 것 같은 착각에 시달린다. 사전 정보의 홍수 속에서 지푸라기 건져내듯 보아낸 그 영화에 대한 감상은 과연 자신의 올바른 감상이라 할 수 있을까. 이런 의문이, 예전에 영화를 곧잘 볼 때는 그림자 따라다니듯 했었다.
한데 이번엔 「화씨 9/11」을 ‘거의 사전 정보 없음’의 상태에서 보는 행운을 누렸다.‘부시를 까는 영화란다’와 ‘마이클 무어(Michael Moore)가 감독했다’가 내가 가진 정보의 전부였고, 제목만 보고 2001년 9월 11일의 어마어마했던 미국 뉴욕사태와 상당한 관련이 있는 영화라는 것은, 대한민국 대중이라면 누구나 유추할 수 있는 사실이기에, 좀 모자라는 나도 지레짐작할 수 있었다.
영화를 보면서 웃기도 많이 했다. 이땅의 못 웃기는 개그맨들은 부시를 깊이 연구할 필요가 있다. 특히 부시의 표정연기에 주목해야 한다. 이상한, 짓궂은, 어리벙벙한, 기묘한, 태연자약한, 아무 생각이 없는 듯한,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종잡을 수 없는, 오만가지 표정연기를 그는 탁월하게 해냈다. 물론 그 장면들을 구슬 꿰듯 짜깁기한 사람에게도 경의를 표해야 할 것이다.
부시네 가족과 그들을 둘러싼 공생충(共生蟲)들이 사우디의 어마어마한 기름부자 놈들과 아주 즐겁게 미국 국민을 우롱하고, 남의 나라 국민을 게임하듯 핍박하는 꼬락서니를 보고 있노라니, 분노가 용솟음쳤다. 미국의 가진 자들이 저러하듯 한국의 가진 자들도 제 나라의 가난한 집 청년들을 이라크에 보내려고 혈안이 되어 있구나. 절정으로 타오르는 분노를 부시의 개그는 식혀주곤 했다.
이라크로 아들을 보냈고 그 아들의 죽음을 이야기하면서 울먹이는 미국 어머니의 육성 앞에, 고 김선일씨가 부르짖던 모습과 그 가족의 통곡이 겹쳐질 때, 눈물이 나오기도 했다.
이렇게 「화씨 9/11」은 웃음과 분노와 눈물을 주었다. 정보도 주었다. 플로리다주의 부정선거와, 그것을 공화당이냐 민주당이냐를 따지지 않고 미국 상원의원 모두가 용인해주었기에 부시정권이 끝내 성립될 수 있었다는 것은, 모르고 있던 정보다(내가 이렇게 무식하다). 하지만 나머지 정보들에 대해서는 나도 알 만큼은 아는 바였다. 즉 「화씨 9/11」이 잡아낸 부시정권의 추악한 짓은, 미국과 부시가 하는 짓에 약간의 관심만 지속적으로 갖고 있던 분이라면, 겨우 저것 보여주려고 그렇게나 시끌벅적했나, 혀를 찰 만한 것에 불과해 보였다.
이 영화를 부시정권 때문에 희생당한 모든 죄없는 이들에게 바친다는 결구자막을 박아넣을 정도로 마이클 무어는, 부시정권이 악한 것이지 미국의 대다수 국민은 죄없고 선량하며 양심적이다, 그것을 내가 대표해서 보여주는 것이다,라고 뽐내는 듯하다. 그리고 마이클 무어의 계급적인 시선도 유난하게 느껴졌는데, 아마도 나는 미국의 다인종 잡종 국민을 향해 우리나라에서는 보증수표나 다름없는 민족주의적 잣대를 들이댔나보다.
한 세기 넘게 전세계에서 갖은 만행을 저질러온 선배들의 악성을 계승하여 지금 이 시각에도 이라크에서 무고한 사람들을 학살하고 있는 저들은 과연 누구일까? 부시? 부시네 집안과 그 집안의 동무들? 미국의 가진 자들? 전세계의 가진 자들? 「화씨 9/11」은 너무도 쉽게 답을 발표하고 있다. 미국 국민은 절대 아니다, 그러므로 미국인의 나라인 아메리카 합중국도 절대 아니다, 부시네 집안과 그 떨거지들이다. 잘못은 오로지 그놈들에게 있다고.
그러니까 나는 「화씨 9/11」을 별로 칭찬하고 싶지 않다. 그간 우리가 익히 보아왔던 경위 밝고, 양심적이고, 인류애적인 미국영화 목록에 또하나의 텍스트가 추가되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손바닥으로 가린다고 해서 하늘이 가려지는가? 미국의 한 양심적인 예술인이 부시정권을 거의 코미디성으로, 혹은 씨니컬하게, 혹은 요새 사람들 좋아하는 쿨―스럽게 다큐멘터리를 하나 쏘아올렸다고 해서, 미국이라는 나라에, 그 나라의 구성원 모두에게 면죄부가 주어지겠는가? 마이클 무어 식으로 표현하자면 스스로 위안은 되겠지. 아, 우리는 참으로 좋은 국민이야. 대통령은 또라이지만, 하고 말이다.
천만이 넘는 사람이 감동하고 칭찬한 「태극기 휘날리며」를, ‘저런 게 천만이 보는 영화라니, 조국의 수치다’라고 생각하고 있는 나이므로, 아마도 엉터리일 것이다. 아무튼 세상은 우스운 것이다. 우리가 에어컨 빵빵한 곳에서 부시정권의 추악함을 공부하며 깔깔거리며 분노를 즐기며 눈물을 흘리며 이러저러한 뒤에, ‘저건, 미국이라는 성스러운 나라와 부시님을 매도하려는 불온한 세력의 악마 같은 영화야!’라고 분개하든, ‘참 잘 만든 영화다. 정말 굉장한 반전영화다!’라고 추켜세우든, 마이클 무어의 영화 변천이 도달한 지점에 대해 고담준론하든 그 무엇을 하든, 우리는 그 영화를 재미나게 즐겼다는 것일진대, 그 순간에도 부시와 그 일당은 영화에서처럼 여전히 개그를 펼치며 즐겁게 살고 있으며, 이라크 국민들은 영화에서처럼 여전히 기막힌 환경에서 전율하고 있을 것이다.
「화씨 9/11」이 부시정권과 그들이 벌이고 있는 야만적인 전쟁에 대해 조금이라도 소박한 의미를 지니려면 미국 국민으로 하여금 당장 이라크전쟁을 끝내게 만드는 촉발된 응집력을 야기해야 했을 것이다. 한국 국민들이 부시정권의 닭짓에 덩달아 놀아서는 안된다는, 한 목소리를 형성하는 흐름에 일조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내가 보기엔 정반대로 작용한 것 같다.
미국 국민은 「화씨 9/11」을 보고 이런 생각을 하는 게 아닐까? ‘와, 우리 대통령 정말 또라이다. 정말 많이 해처먹었구나. 저런 놈을 대통령으로 뽑다니…… 부정이 있었다니 정말 부끄럽다. 이라크에 가 있는 못사는 애들 정말 불쌍하다. 이런 생각을 다 하다니 우리는 정말 양심적인 국민이야. 그런데 부시네만 많이 벌었나. 떡고물 팍팍 떨어져서 우리 국민도 벌긴 벌었지. 못사는 애들이 고생 좀 해야지 어떻게 하겠어. 사는 게 다 그렇지 뭐.’
그 「화씨 9/11」이 지금 이라크 파병을 결행했고, 계속 결행하려는 한국에 상륙했다. 나는 저 유약한, 미국의 양심인 척하는 저 다큐멘터리가, 한국에서만큼은 피리 부는 사나이의 선율로 흐르지 않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