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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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유홍준 시집 『喪家에 모인 구두들』, 실천문학사 2004

식육점의 시

 

 

장석남 張錫南

시인, 한양여대 문창과 교수 sssnnnjjj@hanmail.net

 

 

모인-구두들

시집에 핏물이 흥건하다. 문장 곳곳에 왜 이렇게 칙칙한 핏덩어리들을 걸어놓은 것일까? 그 점이 저 흔한 서정시들과 맞서는 점이요 그렇기 때문에 우선 기이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그것은 화자가 이 세상을 하나의 ‘식육 코너’로 취급하려 하기 때문인데 처음부터 그는 “책갈피/넘길 때마다 핏물이 묻어나오는 시집을 묶어/팔고 싶다”(「식육 코너 앞에서」)고 말한다. 그것도 책방이 아닌 식육 코너에서 팔고 싶다고.‘시’에 대한 지독하고도 완곡한 야유요 슬픔에 잠긴 비명이라고 하겠다. 독자는 식육점에서 그의 시를 사다가 피를 뚝뚝 흘리며 읽어야 하고 그것은 어느 순간 끝내 ‘폭식’이 되고야 만다.

 

나는 이유 없이 폭식을 한다 세상은 넓고

접시는 둥글다 이 접시를 비워주시오

접시가 접시를 내민다 접시가

접시를 낳는다 접시 위에

그녀와 나는 앉아 있다

세상의 접시 위에

나와 그녀를 위한 음식이 넘친다

(…)

가죽자루가 가득 찰 때까지 그녀와 나는

최대한으로 부풀어오른다

―「폭식」 부분

 

화자에게 육체는 가죽자루다. 그 자루를 채우는 것은 정신이라기보다는 ‘이유 없는’ 폭식이다. 폭식이 결핍의 현상이라는 사실은 상식적이다. 감각의 계급에서 하위에 속하는 먹는 것, 배설하는 것들의 이미지가 전면에 등장하는 것은 화자가 시를, 세상을 감각대상의 하위에 놓으려는 전략이다.세상 스스로 치욕을 깨닫게 하자는 것인지 모른다. 그 자루는 어머니에게도 해당된다.

 

아버지,어머니자루를끌고다녔지,너덜너덜옆구리터진어머니자루,아버지패대기치던어머니자루,줄줄눈물이새던어머니자루,(…)고구마로만배를채우던어머니자루몰래들어내던참깨자루나를꼭끌어안고죽어버리자던자루,넝마같이덕지덕지덧댄자루,(…)자루에서태어난나는자루를까마득히잊고사는자루,자루가무언지도모르는,자루를낳은자루

―「자루 이야기」 부분

 

숭고한 어머니도 ‘눈물 줄줄 흘리는 하나의 자루’다. 한 가족사의 비참의 풍경이 이토록 적나라하기란 쉽지 않다. 우리는 그렇게 살아왔으면서도 그렇지 않은 척 시치미를 떼고 고상한 눈길을 연습하고 입맛을 연습하고 허위를 연습한다. 그러한 이면을 찌르는 것이 유홍준(劉烘埈)의 시들이고 그래서 그의 시는 달콤하지 않고 아프고 냄새나고 역하다. 그리고 그것이 그의 시의 힘이다.

 

떡방앗간 기계 헐떡거리며 혓바닥을 내민다

떡집 여자 가위를 들고

쉴 새 없이 혓바닥을 자른다

혓바닥 위에

수레바퀴 문양을 찍는다 뜨끈뜨끈한

혓바닥 담은 상자

―「절편」 부분

 

슬리퍼 신은 사람들이 사는 여수에 슬리퍼 벗어놓고 앉아 넙치회를 먹는다 회가 모자란다고 슬리퍼를 썰어 먹을 수는 없다 다행이다

―「고무슬리퍼」 부분

 

빈혈의 일가족이 소의 胎를 삶아 먹는 오후 무딘 낫으로 스윽스윽 소의 胎를 잘라 던지는 오후

―「빈혈」 부분

 

피비린내는 거의 매쪽마다 이어져 있다. 그의 시의 후각은 육신을 먹이는 인간의 잔인성과 결부되기도 하고 치욕스러움과 결부되기도 한다. 그것은 그저 하위 감각대상을 환기함으로써 값싼 연민이나 동정의 발언을 하자는 것은 아니다. 그의 피비린내의 풍경은 두어 겹을 들추면 강하게 정신의 풍경을 연상시킨다. 욕망이 넘쳐나고 넘쳐나지 못한 욕망이 내부에서 썩는다. 그 썩는 욕망이 발견한 풍경이 바로 ‘식육’(「食肉의 문」)으로 대표되는 풍경들인 것이다. 모든 것이 돈으로 환치되는 사회적 가치 위에 ‘주검을 빨던 파리’가 앉고 ‘피를 끓인 국밥’(「도살장 구내식당」)을 욕구하는 육체는 육체가 아니라 ‘정신’의 다른 이름인 것이다.‘후레자식들’(같은 시)의 사회이기 때문이다. 그 사회의 이중성은 아래 시에서 좀더 구체적으로 제시된다.

 

人皮를 빽빽이 걸어놓은 세탁소

 

이건 네 거죽이고

저건 네 마누라 거죽이야 얇디얇은

버닐 커버로 둘러씌워진 거죽마다 명찰을 달아놓은 세탁소

 

다리미질에 지친 사내 계단에 나와 담배를 피우는데

똥 누는 폼으로 쪼그리고 앉아

사타구니 볼록하니 튀어나온 불알 두 쪽,

 

누가 너무 올라붙는 옷은 입지 말라고 했지?

 

창문 열려진

세탁소에 온 동네 거죽들이 흔들거린다

805호 여자 806호 남자 허리를 휘감고 있다

 

내복처럼

살갗에 너무 올라붙는 사람은

왜 입지 말라고 했지?

 

담뱃불에 지져진 구멍 때우려

나, 허름한 내 거죽 들고 세탁소 간다

―「세탁소」 전문

 

세탁소란 말 그대로 세상에 나가기 위해 옷을 손질하는 곳이 아닌가. 한데 그 옷들은 ‘나’를 포함한 타자들의 시선의 대상이지만 그 옷들이 모여 있는 ‘세탁소’는 시선의 ‘맞은편’이 아니라 ‘이면’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가죽자루의 다른 이름인 ‘人皮’들이 명찰을 달고 모여 있고 또 여자는 다른 집에 사는 남자를 껴안고 있다. 인피 속의 삶이 그렇다는 것이다. 그것은 앞서 인용한 인간이라는 ‘가죽자루’ 속의 풍경이고 사회적인 차원에서 보면 현실의 ‘이면’인 것이다. 세탁소의 주인은 타인들의 시선을 사는 ‘다림질’에 지쳐서 ‘불알 두 쪽’을 드러내놓고 쉬고 있다. 그 다림질은 말하자면 사람들의 시선을 다림질한 것인데 그자의 명상은 낮고도 깊다. 다림질에 지쳐 불알 두 쪽이 비어져 나오게 앉아 하는 명상 중에는 이런 것도 있을 것이다.

 

저녁 喪家에 구두들이 모인다

아무리 단정히 벗어놓아도

문상을 하고 나면 흐트러져 있는 신발들

젠장, 구두가 구두를

짓밟는 게 삶이다

―「喪家에 모인 구두들」 부분

 

죽음 앞에서도 역시 삶은 이중적인 것인 모양이다. 아니 다중적인 것인가? 그의 상처의 꽃들인 이 첫시집의 피비린내가 의미로운 것은 그러한 후미진 욕구의 치욕스러움에 과감하게 불을 켰다는 점에서이다. 그 불빛 아래 드러난 의미와 해석의 오솔길들은 여럿이다. 가령 다양하게 변주되는 ‘신발’의 이미지는 매우 중요한 소재다. 그러나 이 짧은 지면에서는 ‘식육의 시’ 몇편밖에 볼 수 없다는 아쉬움이 크다. 끝내 기쁨의 시가 단 한편도 없다는 점은 가슴 아픈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