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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평

 

부르카의 안과 밖

영화 「칸다하르」

 

 

최인석 崔仁碩

소설가. utopian111@hotmail.com

 

 

아프가니스탄에 개기일식이 벌어지고 있다. 그곳에서 한 여자가 절망감에 빠진 나머지 일식이 끝나기 전에 자살하려 한다. 캐나다에 살고 있던 그녀의 언니 나파스가 아우를 구하기 위해 천신만고 끝에 아프가니스탄 인근 국경지방으로 날아오는 것으로 영화 「칸다하르」는 시작된다.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하여 아우가 사는 칸다하르로 들어가려 하지만, 결국 그녀가 도착하는 곳은 아우가 사로잡힌 곳, 부르카라는 감옥이다. 그사이 하루 남짓이 영화 「칸다하르」의 시간적 공간이다. 역사적 공간은 탈레반정권 초기일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나파스가 날아온 하늘, 그리고 그녀가 아우를 위해 들어간 감옥 사이에는 다리가, 아니 다리가 아닌 의족(義足)이 있다. 막막한 사막 한가운데 몇개의 천막이 부스럼처럼 돋아나 있고, 그것이 적십자 병원이다. 그곳으로 찾아오는 사람들은 다 장애인들, 대부분 다리를 잃은 사람들이다. 전쟁으로, 전쟁이 끝난 뒤에도 지뢰를 밟아 다리를 잃은 사람들을 위하여 적십자 헬기는 이곳에 낙하산을 이용하여 의족을 떨어뜨린다. 까마득한 허공에서 떨어져내리는 의족들을 향하여 장애인들은 필사적으로 달려가고, 감독은 그 광경을 오래오래 붙잡고 놓지 않는다. 두 개의 목발, 하나의 다리, 그것들이 사막의 모래땅을 찰 때마다 먼지가 피어오르고, 그들의 뜀박질은 능란하고 재빠르며, 그들이 진지하고 간절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허공에서는 망가진 마네킹 같은 의족이 낙하산에 매달려 떨어져내리는 것이다.

그것은 서글프고 안타깝고 엄숙한 씬이다. 또한 어딘가 비현실적으로 보인다. 이와 같이 내러티브로는 현실적이지만 너무나도 생경하여 어딘가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씬들은 「칸다하르」 곳곳에서 발견된다. 이를테면 온갖 색깔의 부르카를 쓰고 토기 항아리를 인 여인네들의 무리가 막막한 사막을 가로질러 노래를 부르며 결혼식장으로 가는 씬이 또한 그러하다. 그들의 앞에 돌연 나타난 검문소와 검문자들 또한 그러하다. 세상에, 하늘과 땅이 오직 막막하기만 한 그런 곳에 움집 하나 지어놓고 검문소라니. 그러나 바로 그것이 또한 인간의 생사를 좌우하는 권력의 말단이기도 하다.

의족은 부르카와 더불어 「칸다하르」 에서 가장 중요한 이미지로 보인다. 팔을 잃은 남자가 적십자 병원에 찾아와 의수를 달라고 애걸한다. 그러나 그곳에는 의족이 있을 뿐 의수는 없다. 이 남자는 그러면 친구가 다리를 잃었으니 그에게 갖다줄 의족이라도 달라고 말한다. 병원 관계자는 당신 말은 믿을 수 없다, 매일 와서 하는 말이 매번 다르지 않느냐고 힐문한다. 이 남자는 거듭 애걸하다가 거절당하자 이번에는 다리를 잃은 어머니가 쓸 의족이라도 달라고 애걸하기 시작한다. 그의 간청은 끈질기고 악착스럽다. 결국 관계자가 임시 의족을 한쌍 내주자 이 남자는 좀더 좋은 것으로 달라고 애걸하기 시작한다. 그는 끈질기게 애걸하다가 결국은 임시 의족을 챙겨들고 그곳을 떠나는데, 길에서 사람들을 만나자마자 그 의족을 아주 좋은 의족이라고, 언제 지뢰를 밟아 발목이 날아갈지 모르니까 미리 마련해둬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싼값에 줄 테니까 사라고 간청한다. 아내가 쓸 의족을 찾기 위해 이곳에 온 사람이 있다. 적십자 관계자가 이미 1년 전에 그의 아내의 치수에 따라 주문한 의족을 찾아주지만 그는 그것이 너무 크다고, 아내는 결코 그 의족을 쓸 수 없을 거라고 고집하면서, 다른 의족을 달라고 간청한다. 그리하여 아내가 신던 신발을 꺼내놓고 그 신발에 맞는 의족을 고른다. 아내는 이미 발을 잃은 지 오래인데, 그 발에 신던 신발에 맞는 의족을 골라 내고 기뻐하는 것이다. 이런 것을 현실적이라 해야 하는지 비현실적이라 해야 하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나파스가 아프가니스탄 국경에 도착하여 검문에 걸리기까지 만나는 사람들, 목격하는 정황들은 감독의 눈을 통하여 다큐멘터리처럼 침착하게, 꾸밈없이, 최소한의 설명마저 없이 제시되고 있다. 감독은, 한두 군데 예외가 있기는 하지만, 사회적·역사적 배경이나 문맥에 대해서마저 설명도 판단도 하지 않으려 애쓴다. 감독은 거의 모든 배우들을 현지에서 선택했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그런 일이 벌어졌을까. 영화 속에서 미국 출신 흑인의사 역할을 하는 하싼 탄타이라는 배우는 1980년에 미국에서 호메이니에 비판적이었던 이란 외교관을 암살한 사람으로 밝혀졌다고 한다. 그는 배우로 일하다가 성전(聖戰)에 나서 사람을 죽인 것일까, 아니면 어제는 이슬람 전사였으나 오늘은 배우가 된 것일까? 나는 이런 것 역시 현실적이라고 봐야 하는 것인지 비현실적이라고 봐야 하는 것인지 알지 못하겠다.

 

문화평

 

감독의 눈에 드러나는 아프가니스탄의 정황은 어처구니없고 슬프고 안타깝고 절망적이고 엄숙하며 간혹은, 다시 말하지만 비현실적으로 보인다. 꾸란을 가르치는 학교에서 쫓겨난 아들을 두고 어미가 하는 가장 큰 걱정은 공부가 아니라 굶주림이고, 그 학교 앞에는 굶주린 사람들이 빵을 얻기 위해 장사진을 이루어 기다리고 있다. 학교에서 쫓겨난 소년은 돈을 벌기 위해 나파스를 칸다하르까지 데려다주는 일을 맡는데 그는, 아주 조금만 과장하자면, 한걸음을 옮길 때마다 돈을 내놓으라고 요구한다. 심지어는 사막에 버려진 시체에서 뽑아낸 반지를 사라고 집요하고 악착스레 조르고 강요하기를 그치지 않는다. 학교에서 여학생들을 내보내면서 교사는 말한다. 스스로를 개미라고 생각하면 집이 훨씬 더 넓어 보일 것이다, 이제는 학교에 올 것 없으니 집에 남아 있거라. 노상강도에게 전재산을 강탈당하는 와중에도 세 명의 아내와 열 명쯤 되는 자식을 거느린 가장은 저항하는 가족들을 꾸짖으며 계속해서 소리친다. 알라여, 감사합니다, 알라를 찬양할지어다.

그 모든 정황에 대해 감독은 꼭 한군데에서 설명을 시도한다. 미국 출신 흑인의사가 ‘굶주림 때문에 이곳 사람들은 무슨 짓이라도 저지르게 되어 있다’고 하는 말은 이들을 위한 감독의 변명처럼 들린다. 그는 신을 찾기 위해 아프가니스탄에 와서 소련에 대항하여 성전에 참가했으나 신을 발견할 수 없었고, 소련이 물러난 뒤에 내전이 벌어지자 이쪽 진영에서도 싸워보고 저쪽 진영에서도 싸워봤으나 역시 신을 발견할 수 없었으며, 그리하여 지금은 의사 아닌 의사노릇을 하며 여전히 신을 찾는 인물로 그려져 있다. 다소 엉뚱한 미국 흑인이라는 이 설정은 미국에서 맬컴 엑스를 비롯한 흑인운동가들이 이슬람으로 개종한 전통을 강하게 상기시킨다. 더구나 이 역의 배우가 바로 미국에서 살인범으로 수배령이 떨어진 하싼 탄타이다. 미국의 살인범은 이곳에서는 배우가 되어 있다. 이것이 현실적인 일인지 비현실적인 일인지 나는 알 수가 없다.

영화의 시작은 부르카, 영화의 끝도 부르카다. 그러니까 감독은 ‘우리는 이제부터 아프가니스탄이라 불리는 부르카 안의 세계를 엿보게 됩니다’ 하고 말하는 셈이다. 그러나 감독이 시간을 역전시켜 제시한 프롤로그를 제외하고 본다면, 영화는 나파스가 적십자사의 헬기를 타고 겹겹이 땅을 메운 사막의 메마른 산맥을 내려다보는 하늘에서 시작하여 국경에서 그녀가 이름을 묻는 검문자에게 나파스,라고 대답하는 부르카 안에서 끝난다. 부르카를 입은 여자 검문자들이 부르카를 입은 여자들을 검문하는 곳, 부르카에 갇혀 개별성을 박탈당한 이들에게 이름을 추궁하는 곳–하나의 부르카, 하나의 국가, 하나의 체제가 곧 하나의 감옥이라는 것을 감독은 나파스의 입을 통하여 강조하고 있다.

부르카에 갇힌 채 여자들은 루주를 바르고 매니큐어를 칠하고 팔찌를 고르는가 하면, 자살을 기도한다. 그런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도 있는 것이 아니다. 오늘 부르카 속에서 루주를 바른 사람이 내일 자살하는 것이다. 우리도 지난 수십년의 체험을 통하여 잘 아는 사실 아닌가. 그리하여 마지막으로 나파스가 감옥의 철창문 같은 부르카의 틈으로 황혼을 내다보며 ‘오직 너(아우)를 위하여 감옥으로 들어간다’하고 말할 때에 나에게는 그 부르카 너머의 세계야말로 감옥인 듯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