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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세계의 타락에 맞선 작가적 고독

정찬 소설집 『베니스에서 죽다』, 문학과지성사 2003

 

 

염무웅 廉武雄

문학평론가·영남대 독문과 교수. mwyom@yumail.ac.kr

 

 

 

소설가 정찬(鄭贊)의 문학적 행보는 조금 과장한다면 마치 구도자의 그것과도 같은 고독과 신비감의 후광에 감싸여 있다. 이번 작품집의 ‘소설가 주인공’들이 토로하듯이 그는 잘 팔리는 작가, 말하자면 대중적 인기를 누리는 작가는 아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의 소설에 다루어진 문제들이 사변적인 내용으로 가득 차 있다거나 그의 문체가 유별나게 난삽한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의 소설문장은 때때로 시적인 아름다움으로 채색되어 예민한 독자들의 감수성을 자극하기도 한다. 가령, 다음 예문을 읽어보자.

“달은 둥근 공처럼 꽉차 있었다. 나는 눈을 밟듯 달빛을 조심조심 밟으며 산속으로 들어갔다. 바람에서 송진냄새가 났다. 근처에 소나무숲이 있는 모양이었다. 달빛은 어둠이 지운 사물의 윤곽을 오묘하게 되살리고 있었다. 오묘하다는 표현을 쓴 것은, 태양빛이 드러내는 윤곽과는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달빛은 사물이 가진 선과 형상의 많은 부분을 버린다. 하지만 그냥 버림이 아니다.버림으로써 새로운 선과 형상을 드러낸다. 그것은 사물이 갖고 있는 또다른 모습이다.” (263면)

소음과 인공조명에 둘러싸인 오늘의 도시적 환경은 여기 묘사된 것과 같은 음영의 오묘함에 반응할 수 있는 우리의 감각을 퇴화시켰다. 따라서 독자들은 이 장면에서 아름다움을 느끼지만 그와 동시에 자신이 그 아름다움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격절감을 또한 경험하게 된다. 근원적인 것, 완전에 가까운 것, 가장 심오한 것, 또는 우리가 끊임없이 그리로 돌아가고자 하는 것이 언제나 이처럼 부재(不在)의 형식으로 자기를 드러내는 것이야말로 정찬 문학의 비대중성의 일면인 것 같다.

그런데 앞의 인용은 단순한 풍경묘사 이상의 것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우리의 의식적 행동과 사고가 이루어지는 것은 당연히 ‘태양빛이 드러내는’ 실체적 사물들 속에서이다. 그러한 사물들의 명징하고 규범적인 질서 안에서 일상성은 균형과 안정을 유지한다. 이것이 우리가 무심코 살아가는 현실이고 평균적 세속성의 내용이다. 그러나 낮의 세계는 불가피하게 일면적이고 피상적일 수밖에 없다. 빛과 어둠의 끝없는 교체, 그 영원한 순환만이 우주와 생명에 동력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앞의 인용문이 들어 있는 작품의 제목 ‘숨겨진 존재’는 이 작가가 현상의 표면 또는 삶의 외관에 해당되는 것보다 그 심층에 감추어져 있다고 믿어지는 어떤 본질적인 것에 가닿으려는 욕망의 소유자임을 보여준다. 그런 점에서 정찬은 드물게 낭만주의적인 의지의 작가라고 말할 수 있다.

 

정찬은 20년의 작가생활을 통해 네 권의 단편집과 다섯 권의 장편소설을 출간하였다. 유감스럽게도 나는 그중 일부를 드문드문 읽었을 뿐이다. 이 부실한 독서를 근거로 판단하건대 이번의 네번째 단편집은 그동안의 소설작업에 대한 고뇌어린 반성이고 자신에게 닥쳐온 글쓰기의 위기에 대한 이론적 숙고이다.

이 소설집에는 모두 열한 편이 실려 있는데, 그중 세 편만이 화자가 3인칭이고 나머지는 1인칭이다. 하지만 그 세 편에서도 자전소설의 직접성을 완화하기 위한 방편으로 화자〓주인공이 3인칭으로 채택되었을 뿐이고 그것이 작가 자신의 대역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오히려 약간 예외적이라면 「가면의 영혼」의 주인공이 실패한 연극배우이고 「시인의 시간」의 화자가 학창시절 시를 쓴 적이 있는 인물로 설정된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들도 예술가라는 존재의 근원에 대해 묻고 있다는 점에서 소설가가 화자인 딴 작품들과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 본다면 소설집 『베니스에서 죽다』의 모든 주인공〓화자는 사실상 동일인이고 모든 작품들은 동일한 주제의 변주(變奏)로서, 그런 점에서 이 소설집은 여러 단편들의 모음이라기보다 하나의 소설적 연쇄 즉 연작소설이고 소설로 씌어진 소설론 즉 일종의 메타소설이라고 말할 수 있다.

짐작컨대 정찬의 문학적 출발은 세속세계의 타락이라는 비관적 인식이 아닌가 한다. 그에게 세계는 “차갑고 어둡고 불가해한”(306면) 무엇이었고 현실은 “악과 운명의 고통에 신음하는 불완전한”(267면) 것이었다. 이러한 부정적 세계인식이 결정적으로 강화된 계기는 1980년 5월에 주어졌다. “봄날의 학살은 그를 전율”(307면)시켜 그로 하여금 권력자의 발표가 “어떤 거짓보다 더 지독한 거짓, 어떤 학살보다 더 지독한 학살”(308면)임을 깨닫게 하였다. 이제 이 허위와 암흑의 세계에 굴복하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그에게는 소설 쓰는 일, 허구를 창조하는 일밖에 없었다. 소설은 그에게 고요히 빛나는 별이고 어둠을 밝히는 등불이며 “오직 순수만으로 이루어진 천사의 세계”(167면)이자 한없는 경배의 대상이었다. 그는 기꺼이 “그가 갈 수 있는” 하나뿐인 길(10면)로 들어선다.

베니스에서죽다그러나 소설집 『베니스에서 죽다』는 글쓰기 속으로의 몰입의 기록이 아니라 반대로 글쓰기로부터의 추방의 고백이다. 창작의 어려움은 가령 변신의 이미지로 비유되기도 한다. 영화 「베니스에서 죽다」에서 주인공 아셴바흐 역을 맡았던 배우 더크 보가드는 어느 글에서 이렇게 썼다고 작가는 소개한다. “나는 완전히 아셴바흐였다. 내 신체는 그의 영혼을 담기 위한 그릇에 불과했다.”(204면) 그러므로 배우가 한 작품을 끝내고 딴 작품에서 다른 인물을 연기하자면 자기의 신체 속에 들어와 있는 타자의 영혼을 철저히 몰아내고 완벽하게 새 영혼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된다. 이 존재의 전환을 충분히 이루지 못한 「가면의 영혼」의 주인공은 따라서 배우로서 좌절할 수밖에 없다.

「죽음의 질문」에서 작가 K는 힘겹게 소설을 끝내고 나서 오랜 버릇대로 산행을 떠난다. 그가 첫날밤을 보내게 된 곳은 소양호반 청평사 근처의 어느 산장이었다. 넓은 방에서 혼자 비몽사몽 자다가 문 두드리는 소리에 깨어 일어났다. 들어온 것은 검정색 양복을 입은 한 청년이었는데, 그는 여행중이라면서도 손에 든 것이 없었다. 이 청년은 그가 작가임을 알자 차츰 도발적인 질문을 던지면서 그가 지금 작가의 사명을 잊고 안일함 속에 빠져 있다고 질타한다. 놀랍게도 이 수상쩍은 청년은 현실적 존재가 아니라 그의 첫소설의 주인공이었던 것이다. 그는 이 청년의 가차없는 추궁에 파랗게 질려 숨이 막힌다.

물론 이 청년은 작가 K가 쓴 첫작품의 주인공이기도 하지만 그 작품을 쓸 때의 K 자신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K와 청년은 두 사람이면서 한 사람인 분신적·이중적 존재(Doppelgänger)이다. 「죽음의 질문」이라는 작품 자체가 시종일관한 환상소설이 아니고 현실과 환상의 혼합적 편성으로 되어 있는 것도 그러한 이중성을 반영한다. K의 죽음을 암시하면서 소설이 끝난 것은 이 작가의 일종의 자기처형이다.

작가의 소설적 분신이자 작품의 주인공이었던 청년은 「깊은 강」에서는 하진우라는 기인(奇人)으로 변신한다. 소설가인 ‘나’는 우연히 술집에서 하진우를 만나게 되고, 그의 흔적을 좇아 강원도 영월의 어라연까지 찾아가게 된다. 어라연은 오염되지 않은 곳에 깊숙이 숨어 있는 강이자 못이고 또 섬이었다. 하진우는 초겨울부터 봄까지 이곳에 지내면서 일종의 동면상태에 빠진다. 이렇게 몇달 깊은 잠을 자는 동안 그는 삶에 지친 중년남자의 얼굴에서 어린아이 같은 맑고 투명한 얼굴로 바뀐다. 하진우는 말한다. “방안에 가만히 누워 강물이 흐르는 소리를 듣노라면 소리가 몸에 닿소. 눈을 감으면 강물은 어느덧 내 몸 위로 흘러가오. 몸은 강바닥으로 천천히 가라앉고, 세상은 아득히 멀어지오. 세상이 사라지고 강바닥에 가라앉은 몸이 차갑게 식어가면 길이 나타나오. 집으로 가는 길이. 그 길은 황홀하도록 아름답소.”(62〜63면) 꿈꾸는 듯한 목소리로 아름답게 서술되는 이 대목을 읽고 있으면 그것이 다름아니라 예술적 창조의 진정성을 획득하는 과정을 아련히 지시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것은 세속에 훼손되기 이전의 근원적 순수함으로 돌아가는 고난의 순례였다. 그런데 이 어라연에 전깃불이 들어오고 상업화의 조짐이 보이면서 하진우는 그곳에서 더이상 잠을 이룰 수 없게 된다. 그는 마침내 강에서 실종된다.

다른 작품들에서도 작가의 분신은 세속적 현실로부터의 끊임없는 일탈을 시도하고 자발적인 자기소외를 선택한다. 「적멸」의 강선중, 「베니스에 죽다」의 L선배, 「시인의 시간」의 강명원, 「숨겨진 존재」의 떠돌이 화가들은 모두 정찬의 작가의식이 투사된 비타협적 예술가의 고독한 초상들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문학을 한다는 것은 형극의 길을 가는 것이다. 그런데 이 작가가 느끼기에 자신은 그 형극의 고통을 제대로 감내하지 못하고 있을뿐더러 이제 감내할 힘도 줄어든 것 같다. 그래서 때때로 그는 자아의 분열이 시작되기 이전, 글쓰기에서 구원을 찾기 이전의 어린날로 돌아가본다. 떡장사 하는 어머니의 심부름을 갔다가 떡값으로 받아오던 동전을 잃어버리고 눈앞이 캄캄해져 골목을 뒤졌던 일(「은빛 동전」), 겨우 따라갔던 수학여행 길에 큰 실수를 저지르고 망연자실 앉아서 보았던 한 남루한 아이의 환각(「저문 시간」)은 이 소설집에서는 예외적이다. 나는 이런 가슴저린 작품들을 읽으면서 그 때묻지 않은 어린시절을 그리기 위해 왜 작가가 작품 서두에(「은빛 동전」) 또는 말미에(「저문 시간」) 그처럼 아리송한 미학적 함정을 설치했는지 납득되지 않는다.

 

앞에서 이미 시사했듯이 이 소설집의 작품들은 작가 정찬의 일종의 자기비판이다. 정직한 반성과 치열한 자기비판은 모든 지적 작업의 불가결한 토대이다. 자기 내부의 문제에 대한 진지한 성찰 없이 어떻게 바깥세상을 향해 그럴듯한 발언을 내놓을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정찬의 자기비판이 얼마나 엄정하고 객관적으로 타당한 것인지 물어보아야 한다.

그가 현재의 자신에 대해 가혹할 만큼 매섭게 비판적 질문을 던지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가 의혹의 대상에서 처음부터 제외한 문학적 전제들이 있음을 우리는 상기한다. 그는 소설을 속물적 타락에 대비된 고결성의 영역 안에 가두고 온갖 유사종교적 신성함의 의상을 소설에 입힌다. 그런 점에서 소설쓰기는 그에게 원천적으로 불가능 또는 비현실에 대한 도전의 성격을 지닌다. 그러나 근대소설의 성립은 작가가 ‘타락한 방식으로’ 세계에 접근하는 데서 가능성이 열린 것 아닌가. 따라서 애초 그를 소설로 밀었던 순수주의는 이제 거꾸로 그의 글쓰기를 점점 더 힘들게 하는 장애로 바뀌었다. 자신의 소설가적 이력을 회상한 소설 「섬진강」에서 그는 ‘광주사태’의 충격을 말하였다. 실제로 그의 많은 장·단편들은 광주와 연관되어 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광주’는 1980년 5월의 일만은 아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곁에서, 또 지구 도처에서 수많은 크고 작은 ‘광주’는 진행되고 있다. 이 수많은 ‘광주’들을 향해 소설적 시야가 확대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어떤 특정한 기억에 대한 과도한 집착으로 위축될 우려가 있다.

그러나 물질적 소비와 관능적 향락이 지배하는 이 광란의 시대에 정찬의 순수한 집념과 고고한 행보는 그 자체로서 귀하고 값진 것이다. 다만 나는 최근의 그의 글쓰기에 나타나는 피로의 기색이 걱정스럽다. 또한 그의 집요한 정신주의적 자세가 생산의 다양성과 풍요성을 제약하는 억압적 요인으로 되는 것도 염려스럽다. 지난날의 「산다화(山茶花)」 같은 뛰어난 작품들이 나와서 새로운 활력을 되찾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