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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복제인간의 정체성 혼란
C. 케르너 『블루프린트』, 다른우리 2002
이필렬 李必烈
한국방송통신대 교수, 과학사. prlee@mail.knou.ac.kr
작년 12월 라엘리언(Raelian)들이 복제아기를 탄생시켰다고 발표했을 때, 다시 한번 인간복제에 대한 경고성 발언들이 쏟아졌다. 그러나 그 내용은 6년 전 복제양 돌리가 등장했을 때의 것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여전히 히틀러나 아인슈타인 같은 사람이 여러 명 생긴다는 것에 대한 혐오와 두려움, 기술의 불완전함에 대한 경고, 복제가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행위라는 등의 이야기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거짓일 확률이 높다고는 하지만) 복제아이가 태어나서 자라고 있다는데, 6년 전 인간복제가 단지 하나의 가능성으로 고려될 때 나왔던 이야기가 그대로 반복된다는 것은 우리가 복제인간을 아직도 하나의 센세이션쯤으로 여기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라엘리언이나 쎄베리노 안띠노리(Severino Antinori)의 복제작업은 그렇게 조금 놀라고 성토하고 잊어버릴 정도의 것이 아니다. 이들의 작업은 조만간 결실을 맺을 것이고, 그러면 복제인간이 우리 곁에서 살아갈 터인데, 우리는 이들과 함께 살아갈 준비를 해야 할 뿐만 아니라 그러한 사태를 막기 위해서라도 좀더 진지해져야 하는 것이다.
복제인간의 등장이 초래할 중요한 문제의 하나는 관계의 혼란이다. 이 혼란은 복제아기가 태어나서 성인으로 커갈 때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최초의 체세포 복제동물을 만든 이언 윌머트(Ian Wilmut)도 인간복제를 반대한다고 말하면서 인정했듯이, 불임 부부가 어느 한쪽을 복제해서 만든 아기를 키울 때 나타나는 관계의 혼란은 아이 자신의 정체성 문제에서부터 아이와 부모, 아이와 조부모의 관계에까지 미치는 꽤 복잡한 것이다.
샤를로테 케르너(Charlotte Kerner)의 『블루프린트』(Blueprint, 이수영 옮김)는 인간복제가 가져올 이러한 관계의 혼란을 작은 이야기 속에 아주 적절하게 녹여놓은 소설이다. 작가는 소설 속 주인공의 입을 통해 인간복제에 대해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많은 물음들을 던진다. 소설의 주인공은 뛰어난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인 원본인간 이리스의 복제 쌍둥이다.이리스는 신경세포가 서서히 파괴되어가는 다발성 경화증 발병 후 자신의 능력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아이를 낳아 남은 생애 동안 자기와 똑같은 음악가로 만들고 싶어한다. 그렇지만 그녀는 자연적인 남녀의 생식을 통해서 아기를 낳을 생각은 조금도 없다. 자연의 확률게임에 맡겨버리면 자신의 재능이 발현 안될 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이때 이리스는 우연히 캐나다의 어떤 생식공학자가 인간복제의 기술적 어려움을 해결했다는 기사를 읽고 자기와 똑같은 아기를 만들기로, 즉 자신을 복제하기로 마음먹는다. 자신을 복제하여 최초의 복제인간을 만들어달라는 이리스의 요구를 받아들인 생식공학자는 이리스로부터 난자를 채취하여 핵을 제거한 후, 그 속에 이리스의 체세포 핵을 삽입하여 세포분열을 유도한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배아는 며칠 후 이리스의 자궁에 주입되고 아홉달 만에 이리스의 복제딸(쌍둥이동생) 시리가 태어난다.
시리는 이리스의 유전자를 그대로 물려받고 음악가로 성장하는 데 필요한 거의 완벽한 환경 속에서 자라기 때문에, 이리스뿐 아니라 누가 보아도 최고의 음악가가 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시리가 사춘기에 이를 때까지 이 계산은 착착 들어맞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시리는 아기 때부터 피아노를 배우고, 피아노 없이는 살 수 없게 되고, 조금 커서는 혼자서 작곡을 하게 된다. 시리의 꿈은 어머니(쌍둥이언니) 이리스와 같은, 아니 그녀보다 더 뛰어난 피아니스트가 되는 것이다. 아이의 꿈은 어떤 유혹이 와도 흔들리지 않을 것처럼 확고하다. 간간이 피아노를 멀리하기도 하지만 자신의 원본인 어머니의 체취와 “너는 나의 삶”이라는 속삭임 앞에서는 주술에 걸린 듯 원래 위치로 되돌아간다. 아이는 자기가 어머니의 복제딸이라는 것을 들어서 알고 있지만, 본능적으로 이리스가 자기와 하나라는 것을 느끼기 때문에 이리스가 이끄는 대로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시리가 사춘기에 들어서면서 사정은 달라진다. 시리가 극심한 정체성 혼란에 빠지게 되기 때문이다.
이리스에게는 항상 시리가 자기(너는나, Duich)이고, 자신 또한 시리 자신(나는너, Ichdu)이며, 시리의 삶은 자기 것이다. 그렇지만 사춘기의 시리에게 자기는 아무리 찾아도 없고, 자기 삶 또한 없다. 이리스가 전부이고, 이리스만이 나이고 너이며, 시리 속에서 말하는 사람은 이리스일 뿐, 시리 자신이 하나의 독립된 고유한 인간으로 존재한다고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이 시리를 지극히 혼란스럽게 만들고, 이를 계기로 시리의 입을 통해서 인간복제에 대한 신랄한 물음들이 쏟아진다.
시리에게는 할머니가 있다. 자기 딸 이리스가 낳은 복제아이에 대해 본능적으로 거부감을 가지고 있던 할머니는 어느날 유아기의 시리가 피아노 치는 모습을 보며 소스라치게 놀란다. 그 속에 이리스의 어렸을 때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할머니는 순간적으로 시리와 자신, 오래 전에 죽은 남편과 시리의 관계의 괴상함에 대해 심한 혼란을 느끼고 괴물이라는 소리를 내뱉고 만다. 할머니에게 시리는 딸인가 손녀인가? 수십년 전 자기 딸의 행동을 똑같이 재현하는 이 아이는 정말 자기의 쌍둥이딸로 봐야 하는가? 할머니는 시리가 “30년 전의 이리스와 똑같은 자세로 피아노 앞에 앉아 이리스가 가장 좋아하던 바흐의 푸가를 똑같이 연주하는 소리를 듣게 되자 (…) 처음으로 자신의 딸이 정말로 둘이라는 사실을 퍼뜩 깨닫”고(66면), 자신은 전혀 원하지도 않았고 낳지도 않았지만 자기 딸이 되어버린 시리를 보며 소름으로 몸을 떨었던 것이다.
할머니 입에서 나온 괴물이란 말은 어린 시리에게 깊이 각인된다. 그리고 시리가 사춘기가 되었을 때, 이 말은 시리의 입을 통해 복제를 비난하는 다양한 말로 변형되어서 나온다. 시리는 복제나 복제인간을 그렇게 중성적으로 부르지 말고, 차라리 ‘생식 오용’(Missbrut, Repro abuse)이라고 부르라고 외친다. 시리는 ‘생식 오용’을 어린이 성추행(Missbrauch)과 유사한 것으로 본다. 성추행과 ‘생식 오용’은 둘 다 도덕적으로 파렴치한 짓이다. 그런데 성추행 희생자는 자기에게 닥친 일을 오랫동안 이해하지 못한다. 게다가 가해자를 사랑한다. 마찬가지로 시리 같은 ‘생식 오용’의 희생자도 자기를 찾아나서게 될 때까지 자신의 출생과정을 이해하지 못하고, 원본을 지극히 일방적으로 사랑한다. 그러면 원본은 복제를 사랑하는가? 시리는 복제에 대해 이야기할 때 제발 사랑이라는 말을 쓰지 말라고 소리친다. 사랑을 쏟을 아기를 얻기 위해 복제를 하든, 잃어버린 딸을 다시 찾기 위해 복제를 하든 복제행위는 사랑에서 나온 행동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랑은 “자신의 다른 반쪽을 (…) 찾아 헤매는 것”, 따라서 사랑은 “둘에서 하나를 만들려는 노력을 말하는 것이다”(134면). 그러나 복제자들은 합친 것이 아무것도 없다. 푸른빛 실험실 속에서 냉정하게 계산하며 쪼개기만 했을 뿐이다. 체세포를 뜯어내고, 똑같은 사람을 또 하나 만들고. 시리는 또한 자기자신을 복제하는 것은 유전자-근친상간, 감정-근친상간이라고 말한다. 자기 자신의 유전자 풀(pool)과 똑같은 유전자 풀을 만들어내는 것, 다른 사람과의 아무런 감정교류 없이 자기도취에 빠져 자기와 똑같은 사람을 만들어내는 것이 근친상간적인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시리가 사춘기가 되었을 때 겪는 또 한가지 혼란은 어머니 애인과의 관계로부터 온 것이다. 시리는 첫사랑으로 원본 이리스의 애인을 사랑하게 되고(원본이 사랑하는데, 복제가 원본을 좇아 똑같은 남자를 사랑하게 되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 아닐까?) 급기야는 이리스가 집에 없을 때 손쉽게 이리스 흉내를 내어 남자를 유혹한다. 유혹은 결정적인 순간에 남자가 양심의 가책으로 돌아서서 나감으로써 성공하지 못하지만, 남자 또한 자신의 여자친구와 똑같으면서 더 젊은 시리에게 끌리는 것을 어쩌지 못했고 그것이 잠깐의 ‘외도’를 낳았던 것이다. 이때 원본은 그때까지 너는 나, 나의 삶이었던 복제에 대해 불같이 질투를 하고, 처음으로 시리를 심하게 증오한다. 한 남자를 두고는 쌍둥이의 동일한 하나의 삶이 불가능했던 것이다.
『블루프린트』의 한국어 번역은 꽤 잘 읽힌다. 원본 문장을 하나하나 빠진 부분 없이 옮겼는데도 잘 읽히는 것은 번역에 많은 공이 들어갔음을 보여준다. 간혹 소설 자체가 읽기 어렵고 내용이 쉽지 않다고 느끼는 독자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는 번역 탓이 아니라 주인공의 독백과 3인칭 서술이 교차하는 서술구조와 소설 속에 섞여 있는 약간의 과학지식 때문일 것이다.
『블루프린트』 촌평을 준비하고 있을 때 KBS에서 제작한 인간복제 프로가 방영되었다. 제작자는 프로의 처음과 마지막에 2년 전에 죽은 딸을 복제할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원하는 한 미국여성과의 인터뷰를 내보냈다. 그런데 이 여인의 죽은 딸에게는 아홉살 난 아들이 있다. 이 아들이 엄마를 복제해서 살리자는 제안을 했다고 한다. 만일 딸의 복제가 성공한다면 여인은 죽은 딸을 돌려받아 30년 후에 처음부터 다시 키우는 셈이 된다. 환갑에 아기를 키우는 것이 쉽지는 않겠지만 모녀관계는 그대로이다. 그러면 아홉살 손자는? 복제된 갓난아기가 이 아이에게 엄마나 쌍둥이 이모가 될 수 있는 걸까? 그리고 아이의 아버지는 아기가 되어 돌아온 아내와 어떤 관계가 될까? 결국 복제아기가 태어남으로 인해 관계는 뒤죽박죽이 될 수밖에 없고, 아기는 자라면서 극심한 정체성 혼란을 겪게 될 것이다. 『블루프린트』는 이러한 혼란의 심각성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