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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근대초기소설 연구의 견고한 성쌓기
최원식 『한국계몽주의문학사론』, 소명출판 2002
이주형 李注衡
경북대 국어교육과 교수. jhylee@knu.ac.kr
오랜만에 ‘재미있는’ 연구서를 만났다. 최원식(崔元植) 교수의 『한국계몽주의문학사론』이 그것이다. 요사이 우리 근현대 소설 연구서(논문)들은 거의 재미가 없어 질질 끌며 읽는 편인데 이 책은 ‘단번에’ 읽었다. 다룬 대상들도 중요하거니와 시각·논점·결론이 분명하고 정당하며, 많은 가치있는 정보들을 알려주고, 특히 쉽게 기술해나가고 있기 때문에 ‘재미있는’ 것이다. 매우 복잡해서 많은 생각과 검증행동을 해야 풀 수 있는 내용을 ‘쉽게’ 쓰는 것, 그것은 대상을 자기 손바닥 안에 완전히 잡아쥐었다는 뜻이다. 이 책뿐 아니라 최교수의 논문들은 그래서 늘 재미있다.
이 책은 근대초기소설 즉 1900년대와 1910년대 소설을 대상으로 한 16편의 논문들을 수록했다. 저자는 이 시기 소설 연구에 특히 장기를 보여 1986년에 이미 『한국근대소설사론』을 낸 바 있다. 근대소설의 출발이자 저자의 말대로 ‘굴종하면서 일변 발랄한 사상적 모험의 씨앗을 머금은’ 이 시기의 소설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기술은 우리 근현대 정신사 및 소설사의 올바른 이해와 기술의 첫단추를 꿰는 것인 만큼 그 중요성은 참으로 크며, 따라서 연구대상에 관한 이 책의 의의도 그만큼 큰 것이다.
연구를 진행함에 있어 저자는 ‘바른 인식과 옳은 실천’이라는 명제를 확고히하면서, 먼저 ‘정치적 무의식’에서 벗어나기 위해 ‘국(國)’자 돌림 용어의 수정, ‘한일합방’ 폐기 등 용어의 정립을 분명히했다. 그의 엄정·확고한 역사의식은 작품 현상을 정확히 읽어내는 바탕이 되고 있다. 이 시기 소설에 관한 과거의 많은 논문들은 이런 바탕이 없었기 때문에 문면의 중립적 전달에 그치거나, 심지어는 오해나 왜곡에까지 이르기도 했던 것이다.
소설 연구에서 작품 내·외적 배경이 되는 사실에 대한 정확한 지식은 일반적으로 요구되는 것이지만 특히 그런 사실들과의 관련성이 깊은 이 시기 소설에 대해서는 절대적인 것이다. 사실관계들이 매우 복잡하고, 또 그런 것들이 다른 시대에 비해 정확하게 밝혀져 있지 않은 이 시기에 있어, 사실 지식 여부는 작품해석을 완전히 반대로 할 수도 있고, 중요한 작품현상을 간과해버릴 수도 있다. 결국 필요한 사실 지식을 위해 소설연구자는 실증적 작업에 나설 수밖에 없다. 이 실증은 작품내적 사실에 대한 빈틈없는 의심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나는 특히 이 책에서의 실증작업의 성과에 대해 찬사를 보내고 싶다. 바쁘기 짝이 없는 최교수가 언제 이런 작업을? 그러나 그 답은 의외로 간단할 것 같다. 평소에 워낙 역사기록들을 많이 읽어 역사 정보에 밝은데다, 의심의 촛점이 분명하여 찾는 대상을 쉽게 결정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의심은 단계적으로 계속되고, 거기에 따라 사실들을 차례로 밝혀가면서 끝장을 보는 것이다. 예를 들면 『해안』을 논하다가 “일본공원? 처음 듣는 이름이다”(68면)고 하면서 그것이 자유공원임을 알아내며, 거기서 끝내지 않고 그곳의 역사적 내력을 밝혀 작품내적 의미를 확정한다. 소설에서 최초 의사, 최초 은행고객, 최초 전차 등 흥미를 유발시키는 것들도 많이 찾아내는데, 관련사실을 밝힐 뿐 아니라 이를 단편적 흥미의 대상으로 머물게 하지 않고 작품내적 의미와 연결시킨다. 『몽조』의 작자 석진형의 전모, 『화성돈전』의 저본 관계, 『비율빈전사』의 원저자의 전모 등을 밝힌 것은 특히 중요하거니와, 이를 위시한 많은 실증적 성과만으로도 이 책의 가치는 높다.
작품 배경적 사실의 실증뿐 아니라 작품내적 요소의 엄밀한 분석으로 저자는 작품의 진정한 의미를 훌륭하게 읽어내는데, 그것은 이 책의 중심부분인 최찬식론과 김교제론, 그리고 『설중매』론에서 특히 빛난다. 이 세 편만으로도 독자들은 신소설의 지형도, 그리고 이 시기 시대풍경의 상당부분을 쉽사리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에서 또 하나 주목할 만한 것은, 한 작품 내의 현상들을 고립적으로 보지 않고 당대의 다른 작품, 또는 다른 시기의 작품들과 관련해 소설사적 맥락을 잡으려 한 점이다. 그리하여 『추월색』과 『혈의루』 『산천초목』, 『해안』과 『춘향전』 『홍도화』, 『금강문』과 『설중매』, 『안의성』과 『재봉춘』, 『목단화』와 『자유종』, 『현미경』과 『화의혈』의 연결관계를 밝히고 또한 이들과 『장한몽』 이후의 작품들과의 영향관계도 언급한다.
이상에서 들어본 몇가지만으로도 이 책은 초기근대소설 연구의 성을 단단히 쌓아놓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보완된 논리가 필요할 것으로 보이는 몇가지 사항들을 말해두고자 한다. 먼저 근대문학의 기점에 대한 문제이다. “애국계몽기(1905〜1910)를 근대문학의 기점으로 설정했던 설을 수정하여 1894년으로 올리고 1894년부터 1919년까지를 ‘계몽주의 시대’로 다시 명명하였다”(5면)고 하면서도, 애국계몽기설을 내세우면서 “앞으로 1894년에서 1905년 사이의 운동과 문학에 대한 더욱 정밀한 검토를 거쳐서 관점을 정비하는 것이 과제다”(371면)라는 것으로 끝맺는 과거의 글을 그대로 수록한 것은 의아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산문분야에서는 유길준(兪吉濬), 시가분야에서는 특히 『독립신문』 소재의 노래들” 같은 ‘광의의 문학’을 “새삼 주목”하게 되어(20면)“근대성에 걸맞은 문학적 객관상관물들이 거의 부재하는 1894년에서 1905년 사이의 시기를 근대문학사에서 제외”(15면)한 과거의 입장을 바꾼다는 논리는 힘이 약한 것 같다. 애국계몽기설에 대한 미련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 이 기점문제는 깊이 검토되어야 할 아주 중대한 과제이다.
다음으로 애국계몽기와 1910년대를 소설사 시기구분에 있어 한 시기로 묶어서 볼 것인가의 문제이다. 저자는 “1910년대 문학 전체가 비연속 속에서도 애국계몽기와 연속되고 있”으므로 “하나의 계몽주의 시대로 통합적으로 파악”하고 있다(18면). 그러나 완전한 식민지화라는 현실변화, 애국계몽소설(역사전기소설)의 소멸, 신소설의 오락물화 혹은 계몽성의 약화, 애국계몽소설이나 신소설의 계몽론 혹은 개화론과 이광수 소설의 계몽론 사이의 이질성 등 ‘심각한 단절’의 현상들이 아무래도 중요한 만큼, 재론되어야 할 문제다.
또 ‘한국 근대문학의 아버지’ 혹은 ‘애국계몽기문학사의 중심’을 이인직에서 이해조로 바꾸는 ‘정전(正典) 재편작업’(16면)의 문제이다. 저자로서는 이인직의 ‘친일 여부’만이 아니라 “이해조의 문학적 업적이 이인직을 능가”한다고 보기 때문(157면)이다. 이해조의 업적을 분명히 드러내면서 정당히 평가한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아버지’나 ‘중심’을 규정하려 할 때 ‘관행’이 문제가 아니라 이인직이 신소설을 개발한, ‘최초’의 신소설 작가라는 사실이 아무래도 큰 문젯거리이다. 결국 두 작가에 관한 실제 사실의 기술에 만족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덧붙여 최찬식은 ‘이인직의 계승자’, 김교제는 ‘이해조의 계승자’라는 규정도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이인직과 이해조가 신소설 작가로서 건재한 1910년대 초에 최찬식과 김교제가 “그들을 대신해서 등장”하여 “신소설계를 양분”했다고(21면) 말할 수 있을지 의문이며, 후자들이 전자들을 넘어섰다고 할 수도 없다. 후자들의 일부 작품에서 전자들의 작품들에 나타난 일부 요소들이 복제되고 의식의 동질성이 나타난다는 정도로 기술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을까 한다.
마지막으로, 지나친 해석 혹은 의미부여로 느껴지는 곳들이 더러 있다. 하나만 들어보면, 『해안』에서 경자의 병명 불확실이 ‘의료 온정주의’이고, 대성의 의과 입학이 ‘새시대의 암행어사’인 미국 의사가 되어 귀국하여 경자와의 “공화적 결혼의 완성으로 귀결될 게 뻔”하며 또한 “막강한 의사의 전성시대를 예언하”는 것이라고 하였다(66~68면). 작자는 황참서의 병은 ‘정신병’으로 밝혔거니와 경자의 병증세도 자세히 쓰고 있다. 서양 의학적 병명지식의 문제는 아닌지? 결말의 해석은 작품의 실제보다 과다한 의미부여는 아닌지?
여기 나온 연구성과들은 대부분 매우 견고한 것으로 본다. 위에 든 몇가지 문제들에 대해서도 나는 대체로 반대가 아니라 긍정적이다. 더욱 정밀, 분명한 기술을 바라는 정도이다. 더욱 견고한 성을 쌓아나가기를 기대하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