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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밝은 눈과 예민한 후각

박노자 『당신들의 대한민국』, 한겨레신문사 2001

 

 

유시민 柳時敏

시사평론가 denkmal@hitel.net

 

 

“여기 사정은 살아본 제가 더 잘 알지 않겠습네까!” 이 한마디로 남남북녀(南男北女)가 뜻하지 않게 벌인 즉석 토론은 끝이 났다.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막 튀어나온 것 같은 여인이 말꼬리를 치세우며 쏘아붙이는 데 어찌 당할 수 있으랴. 그 여인은 금강산 안내원 리종금 동무다.

지난 1월 20일 눈 내린 겨울 금강산은 이름 그대로 설봉(雪峰)이었다. 포신이 바다를 향해 삐죽삐죽 솟아 있는 해금강 절벽 감상을 마치고 삼일포 주변을 산책하는 동안 우리 일행과 발걸음을 함께한 안내원 리종금 동무는 올 겨울에 있을 ‘남조선 대통령선거’의 전망에 대해서 이런저런 호기심을 표시했다. 그런데 무심코 던진 내 말 한마디 때문에 화기애애했던 대화가 사뭇 치열한 논쟁으로 비화하고 말았다. “산은 깨끗하게 잘 보존했는데 바위에 새겨진 저 구호들은 어찌해야 좋을꼬?” 이 ‘문제의 발언’을 투철한 당성을 가진 리종금 동무가 좌시할 리 없었다. 우리 둘 사이에는 대충 다음과 같은 요지의 논전이 벌어졌다.

“인민들 스스로 새긴 것입네다. 무엇이 잘못입네까?” “그럼 인민들 잘못이군요.” “우리 인민들이 산을 이렇게 잘 보존했는데 뭐가 잘못이라는 말입네까?” “다 잘못이라는 게 아니라 바위에 글씨를 새긴 것 하나만 가지고 하는 이야깁니다. 산을 깨끗하게 보존하는 일은 남쪽 인민들이 제대로 못했어요.” “그게 왜 인민들 잘못입네까?” “그런 누구 잘못인가요?” “아이들이 잘못을 저지르면 부모한테 책임을 물어야지요. 지도자 책임 아니겠습네까.” “남쪽에서는 지도자가 인민들을 훈육할 책임이 없거든요. 그런데 만약 백년 이백년 후손들이 오늘의 공화국 지도자들에 대해서 다른 판단을 할 경우 저 구호들을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러니까 후세들을 잘 교육해야지요. 지도자의 공적과 은혜를 잊지 않게 말입네다.”

115-418이렇게 시작된 입씨름은 단군릉의 신뢰성 문제, 우리 민족이 과연 단군 자손 단일민족인지 여부와 그 의미, 개인의 운명과 민족의 운명이 맺는 관계, 절대적 진리의 존재 여부에 관한 제법 진지한 대화로 이어졌다. 리종금 동무는 특히 인민과 지도자의 관계에 대해 내가 한 여러 이야기를 북쪽 체제에 대한 비난으로 받아들였는지 대화를 자르고 말았다. “시사평론가 선생님이 저보다 모든 걸 더 많이 아시겠지만, 여기 사정은 살아본 제가 더 잘 알지 않겠습네까!”

거 참 묘하다. 금강산에서 돌아오자마자 박노자 선생의 글을 읽는데, 갑자기 삼일포의 리종금 동무 생각이 나니 말이다. 아하, 남쪽 국회의원들과 함께 온 ‘시사평론가 선생’을 그렇게 사납게 쏘아붙였을 때 리종금 동무의 기분이 바로 이랬겠구먼. 나도 어렴풋이 또는 분명하게 알고 있기는 한데 별로 아름답지가 않아서 의도적으로 모른 척하고 있는 걸 누군가 다른 세계에서 온 사람이 들추어냈을 때 느끼는 당혹감, 뭐 그런 것 아니었을까.

그런데 박노자한테 이렇게 쏘아붙일 순 없다. “야, 네까짓 게 한국사회를 알면 얼마나 안다고 까불어! 난 40년을 넘게 살았다구. 여기 사정은 아무래도 오래 살아본 내가 더 잘 알지 않겠어?” 러시아 쌍뜨뻬쩨르부르끄 태생 블라지미르 띠호노프 씨가 그런 소리를 듣기엔 여기서 보낸 세월이 너무 길다. 10년이면 강산이 한번 변할 세월이고, 그는 그 사이에 이름과 국적이 바뀌어 한국사람 박노자가 되었다.

박노자는 기막히게 밝은 눈과 예민한 후각을 지닌 지식인이다. 그는 한국 땅에 처음 발을 디딘 순간 ‘어머니 품처럼 포근하고 따스한 공기’에 반했고, ‘안암동 골목길에서 풍겨나던 김치와 된장 냄새를 고향의 냄새처럼’ 느꼈다고 한다. 여기까진 뭐 그럴 수 있다고 치자. 한국과 ‘묘연(妙緣)’이 있는 사람이면 그럴 수도 있지. 그런데 참으로 당혹스러운 것은 명색이 비판적 지식인을 자처하는 내가 40년을 넘게 살면서 두루뭉실 인식하고 있던 문제들을 ‘불과’ 10년을 산 박노자가 너무나 분명하게 끄집어낸다는 사실이다. 난 도대체 어디다 정신을 팔고 산 걸까.

『당신들의 대한민국』은 ‘계몽 없는 산업화’의 산물인 한국사회의 전근대성·폭력성·위선·집단주의·연고주의·인종주의·배타성에 대한 생생한 보고서다. 특히 아프게 다가오는 것은 부당한 권위에 굴종하는 문화다. 박노자는 헌사에서 “아직도 감옥에 있는 모든 양심적 병역 거부자들에게 이 책을 바친다”고 썼다. 놀랍고 부끄러운 일이다. 지난 반세기 동안 대한민국의 그 어떤 지식인이 양심적 병역 거부자에게 자기의 책을 헌정했던가.  

지난 시대 우리의 학생운동은 군사독재정권에 정면으로 대항했다. 그러나 그런 학생들 역시 모든 부당한 권위를 전면적으로 거부한 것은 아니었다. 이것이 우리 민주화운동과 진보적 운동의 한계였다. 박노자의 다음과 같은 지적은 고마운 동시에 통렬하다.

“그래도 그들의 아름다운 반란이 결국 중도에 그치고 만 것은 안타깝기 그지없다. ‘부르주아 사회’를 그토록 예리하게 꿰뚫어보던 그들이 그 사회에 정통성을 부여하는 보수적인 교수들까지 ‘교수님’으로서 깍듯이 대접해주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집단주의적·기회주의적 ‘인연’의 논리, 가족주의적인 ‘웃어른의 숭배’가 반란의 열성을 깎은 듯해서 못내 안타까웠다. 왜 하필이면 그들 중 상당수가 ‘민중을 기만하는 기관’이라고 비판하던 보수신문이나 ‘민중을 탄압하는 기관’이라고 비판하던 국정원 같은 조직에 입사해야만 했는가? ‘국가와 민족에 봉사’해야 한다는 ‘대가족적’ 논리가 결국 제도와 타협하는 것까지도 정당화한 것이 아닌가 싶다.” (21〜22면)

다시 금강산에 가면 삼일포의 리종금 동무에게 『당신들의 대한민국』을 한권 선사하고 싶다. 한국인인 나하고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한문을 더 많이 알고, 여기서 대학교육을 받은 나보다 우리 역사를 더 깊이 아는 러시아 사람이, 겨우 10년을 살았지만 40년 넘게 산 나보다 더 예리하게 대한민국 사회를 해부했다는 사실을 안다면, 그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더욱이 그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대한민국이 해부학적으로 동일한 문화적 종(種)에 속한다는 결론을 제시했다면 말이다.

이토록 빼어난 문화 해부학자 블라지미르 띠호노프 씨를 길러 이땅에 보내준 러시아에 찬사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