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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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백민석 白旻石

1971년 서울 출생. 1995년 『문학과사회』로 등단. 장편 『헤이, 우리 소풍 간다』 『목화밭 엽기전』, 소설집 『16믿거나말거나박물지』 등이 있음. stoncold@hitel.net

 

 

 

기원(起源), 작은 절골

 

 

글쎄 그게 벌써 삼십년도 더 전 일이다. 나는 포대기에 싸여 있었다. 흔들이 요람 같은 건 없었다. 방밖 아궁이에선 갈치를 굽고 있었다. 부엌에선 시끄러운 소리가 났다. 큰 발들이 주위에서 쿵쾅 소리를 냈다. 나는 눈을 떴다. 창밖으로 황혼이 지고 있었다. 앞집 슬레이트 처마의 하늘색이 흐릿해지고 있었다. 창밖 먼빛으론 아까시나무가 보였다. 창틀을 찢어놓을 듯이 키가 컸다. 오월 초입이었을 텐데, 꽃송이들을 다 털린 헐벗은 모습이었다. 우듬지엔 봉발처럼 헝클어진 새 둥지가 커다랗게 올라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 너머로 구름기둥 같은 것이, 꺼멓게 하늘로 솟고 있었다. 창틀은 붉었다. 끓이고 지지고 볶을 때의 그 냄새들, 부딪고 깨지고 쿵쾅거릴 때의 그 요란함, 눈을 씻고 봐도 푸른빛 한점 없는 헐벗은 창밖 풍경들이 포대기만큼이나 단단히 나를 감싸고 있었다. 그게 세상이었다.

나는 그게 싫었다. 그래서 목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면서, 이따금 유령거미가 빤히 날 지켜보곤 하는 장롱 밑으로 자꾸 기어들어가려고 했다.

“창틀을 왜 저렇게 칠했어요?”

“뭐 어때서? 수도는 안 놓을 거야?”

“놓을 거예요. 하지만 들키면 벌금이 클 텐데.”

“지들이 안 놔준대서 우리가 놓는 건데 어쩔 거야. 병원에 갔다온 건 어떻게 됐냐? 간이 어찌됐다냐?”

나는 곧 포대기를 떨쳐버리고 일어나 앉았다. 장롱 밑으로 사라지기엔 덩치가 좀 불어 있었다. 길 수 있게 되자 나는 창문 아래에 바싹 가 붙어앉았다. 창밖 풍경은 변함이 없었다. 앞집 처마의 거미줄이 약간 자리를 옮긴 정도였다. 걸음마를 배우게 되었어도, 아까시나무는 헐벗은 모습 그대로였다. 가지들은 새까맸다. 꽃은 단 한송이도 달리지 않았다. 매일 아침과 저녁으로 구름기둥이 시야 저 멀리에서 솟았다. 그것은 곧게 솟아오르다가 하늘에 닿으면 문득 흩어져 창밖 풍경을 물들였다. 집안살림에 흥미가 생기기도 했다. 비로소 매끼니마다 갈치가 불에 올려지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궁이에선 항상 다른 악취가 났다. 방바닥을 울리는 큰 발소리도 항상 같은 게 아니었다. 그것은 때론 여섯 개가 내는 소리였다가 네 개가 내는 소리이기도 했고, 단 두 개뿐일 때도 있었고 이따금은 셀 수 없을 만치 늘어나기도 했다.

“왜 오늘은 약 안 챙겨갔어요?”

“시끄러.”

“그게 무슨 소리냐, 지 건강 생각해서 하는 말인데. 네 낯빛을 봐.”

“가게 앞에 지하철이란 게 놓인대요.”

“그건 또 무슨 뚱딴지냐?”

잉꼬 새장이 처마 물받이에 달려 있었다. 걸음마를 떼고 마루에 나갔을 때 알게 된 사실이다. 어째서 저놈들은 지금껏 울지 않았을까. 잉꼬들은 화병에 꺾어놓은 개나리꽃처럼 결코 울지 않았다. 곧 내 몫의 신발이 생겼고 마당에 두 발을 내려 걷게 되었다. 마당엔 장롱 밑보다 훨씬 많은 것들이 살고 있었다. 귀뚜라미와 지렁이는 너무 많아 지루할 정도였다. 호랑거미는 누구라도 좋아할 현란한 빛깔을 뽐내고 있었다. 흐리거나 비올 때는 달팽이들과 놀았다.

나는 방으로 돌아갈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설 수 있게 되자 나는 등을 꼿꼿이 펴고 창문을 연 다음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붉은 창틀은 이제 내 시야를 가리지 못했다. 아까시나무는 변함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비바람이 흔들건, 뙤약볕이 쬐건, 눈이 쌓이건, 아까시나무는 단색의 헐벗은 자태로 시야 한켠에 비스듬히 버티고 서 있었다. 구름기둥 역시 빠짐없이 아침과 저녁의 하늘을 물들였다.

“병원엔 가봤냐?”

“네. 의사 선생님이, 아파서 성을 내는 거니 대꾸하지 말고 잘해주라네요.”

“다른 말씀은 없으시고?”

“준비하고 있으래요.”

한차례 셀 수 없을 만치 많은 큰 발들이 다녀간 후로 집안에 약간의 변화가 생겼다. 큰 발소리는 네 개가 내는 소음으로 줄어들었고, 아궁이에서 끼니마다 피어오르던 악취의 양과 종류도 줄었다. 반길 만한 변화였다. 나는 이제 사람들이 하는 말소리를 알아듣게 되었다. 실은 전부터 그랬는데 귀찮은 일에 휘말릴까봐 모른 척했을 뿐이다. 내 몫의 바지와 셔츠가 생기자 바깥문 출입을 시작했다. 포대기에 싸여 있었을 때부터 꿈에 그리던 일이었다. 망설임은 없었다. 나는 곧장 아까시나무로 달려갔다. 윗집을 거쳐 약간의 오르막길을 오르면 되었다. 아까시나무는 산비탈을 깎아 만든 축대 위 공터에 있었다.

아까시나무는 역시 실망스러웠다. 굵기는 내 몸통만했고 키는 감히 올려다볼 수 없을 만치 높았지만, 잎 하나 달려 있지 않았다. 불에 그슬린 것도 아닌데 온통 새카맸고 긁으면 껍질이 바스라지며 떨어졌다. 산 가지는 밑동께에서 새로 뻗기 시작한 퍼런 것 하나뿐이었다. 그나마 누가 밟아 짓이겨져 있었다. 내 머리 높이쯤에 도끼자국이 나 있었다. 팬 것은 아니고, 교활하게도 수피를 빙 돌아가며 도려낸 자국이었다. 사망의 원인이요, 살해의 증거였다. 황혼이 다시 지고 있었다. 축대 위에는 항상 황혼이 졌다.

“그래서 어쩌자는 거냐?”

“어쩌기는요. 산 사람은 살아야지요.”

“그게 무슨 말이냐? 몇달이나 지났다고.”

“어머니, 저를 놓아주세요.”

나는 창밖을 내다보는 대신 축대에 올라가곤 했다. 거기는 비할 수 없게 시야가 넓었다. 창틀 따윈 없었다. 시야를 턱하니 가로막는 앞집 슬레이트 처마 같은 것도 없었다. 축대에서 나는 비로소, 내가 꽤 높은 곳에 집을 짓고 산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동네가 모두 내 발 아래에 있었다. 산 중턱까지 옹기종기 달라붙어 올라앉은 집들이 다 내 발 아래였다. 내 위로는 아직 개발되지 않은 산뿐이었다. 군데군데 누렇게 뜨고 헐벗긴 했지만 숲이라고 할 만한 것도 있었다. 구름기둥이 어디서 솟는지도 알게 되었다. 굴뚝 두 개가 시가지 쪽에 우뚝 서 있었다. 아까시나무의 몇배는 될 듯한 높이였다. 시가지 쪽엔 그렇게 높은 것들이 많았다. 구름기둥은 그 굴뚝들에서 솟는 것이었다. 나는 이제 욕지거리를 내뱉을 수 있게 되었다. 욕을 할 줄 알게 되자 친구도 생겼다.

“어머니, 갈게요.”

“그래라.”

“좋은 사람이에요.”

“아무렴.”

다시 큰 발 두 개가 더 사라졌다. 남은 건 내 두 발 소리와, 다른 큰 발소리 두 개뿐이었다. 울지 않는 잉꼬 새장도 함께 사라졌다. 어차피 울지 않는 잉꼬들이었지만, 그래도 집안이 좀 조용해진 듯했고 한결 살 만해진 듯싶었다. 아궁이 악취도 눈에 띄게 줄었다. 나는 안방을 거의 혼자 썼다. 이제 글을 읽을 수 있었다. 그러자 시커먼 연기를 내뿜는 굴뚝들도 더는 기괴해 보이지 않게 되었다. 굴뚝 아래 달린 간판을 분명히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홍제목욕탕’이 그 굴뚝들의 정체였다. 세상의 다른 많은 것들도 즉시 정체를 드러내었다.

나는 자신감을 가지고 동네로 진출했다. 욕지거리는 더 화려해졌지만 간간이 점잖은 단어와 긴 문장도 섞어 썼다. 그만큼 사는 게 복잡해지고 있었다. 우리는 주로 꾀죄한 행색으로 우르르 몰려다니며 동네를 소란스럽게 했다. 내가 가장 꾀죄했다. 손등은 트고 갈라져서 피가 날 지경이었고, 옷에선 오래 빨지 않아 간장냄새가 났다. 내가 그토록 싫어하던 악취가 나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다. 그리고 시끄럽기도 남 못지않았다. 한무리로 엉겨 다니는데 누군가 우리를 불러세웠다.

“얘들아.”

“예?”

“우리 애가 새로 이사왔는데, 친구가 없단다. 우리집에 가서 같이 놀아주지 않겠니?”

맛난 것을 준다는 조건이 붙어 있었다. 우리는 맛난 것의 냄새를 따라, 긴 정원로를 걸었다. 정원로의 끝에서 웬 허약한 아이가 우리를 맞았다. 덩굴장미가 온통 빨갛게 수놓고 있는 잿빛 담장 앞에서였다. 덩굴장미집 아이가 말했다. 안녕. 작은 절골에 가지 않을래? 어찌나 하얗고 가냘픈지 부러진 장미 꽃대 끝에 달린 수액 한방울 같았다. 우리는 길을 알고 있는 개장수집 아이를 따라 작은 절골로 갔다.

 

작은 절골은 그렇게 이어지고 있었다. 누나에서 동생으로, 형에서 동생으로, 한 아이에서 다른 아이로. 내가 작은 절골에 처음 올라가본 것도 다른 아이들을 따라서였다. 달리고 뛸 수 있을 만치 뼈가 굵어지고 근육이 붙으니 자연히 같이 가자는 소리가 나왔다. 아이들이 잠자리의 날개를 접어 손가락 새에 끼워 나타나곤 했을 때 어린 나는 한없이 부러웠다. 이젠 나도 잠자리를 잡아 날개를 떼어내고 목을 비틀고 동글동글 말아 죽일 수 있게 되었다.

작은 절골은 우리 동네가 올라앉은 산의 골짜기였다. 작은 절골이 있다면 큰 절골도 있다는 얘긴데 내가 가보았는지는 모르겠다. 나는 축복받은 곳에서 유년을 보냈다. 그저 생의 첫눈을 떠보니 그 동네였던 거지만, 거기서 논다는 건 축복이었다. 동네의 모식도(模式圖)는 이랬다. 독립문과 이어지는 무악재의 끝에서 시작된다. 굴뚝 두 개가 솟은 목욕탕이 있고 재래시장과 소규모 아파트 단지가 있다. 주차장을 따라 비탈길을 오른다. 닥작닥작 붙은 삭은 기와지붕들과 축대들이 산 중턱까지 올라붙어 있다. 모식도는 산에까지 이어진다. 연탄재가 굴러다니는 좁은 골목을 빠져나가면 어느새 일차 철거를 마치고 조경사업이 시작된 비탈이 나타난다. 묘목들이 나날이 말라죽어가는 그 폐허를 지나면 숲이었고, 그 너머 좀더 깊은 곳에 작은 절골이 있었다. 개울과, 텃밭에 쓰이는 작은 저수지와, 집채만한 바위와, 샘 들이 계절마다 낯빛을 달리하며 우리의 놀이터가 되어주었다. 모식도의 대미, 산꼭대기는 군부대가 장식한다.

적송숲에 둘러싸인 공터가 있었다. 이따금 벽돌조각으로 만든 화덕과 발라먹은 개뼈들이 발견되는 곳이었다. 벗어놓은 흙투성이 옷가지들이 있기도 했다. 우리는 그 펼쳐놓은 옷 위에서 무슨 일이 있었을지 논하며 난감해하곤 했다. 우리는 공터에서 전투를 벌이곤 했다. 줍거나 꺾어온 나뭇가지를 무기 삼아 편을 나누거나 해서, 혹은 아무렇게나 전투를 치르며 놀았다. 사용된 나무들은 다양했다. 조팝나무 가지는 가늘고 탄력이 좋아서 공중을 가를 땐 살벌한 소리가 났다. 봄철엔 시각효과가 대단했다. 머리에 정통으로 맞추면 새된 비명과 함께, 꽃잎들이 포연(砲煙)처럼 부서져 흩날렸다. 아까시나무로도 같은 효과를 낼 수 있었다. 화약내 대신 꿀내가 나긴 했지만 긴 가지 끝에 꽃송이들이 달린 모습을 보고 있자면, 낚싯대 끝에 달린 달큼한 맛의 수류탄이 연상되었다. 적송은 꺾거나 줍기 쉬워 애용되었다. 생나무인 경우 송진이 배어나와서 미운 놈의 기분을 하루종일 버려놓고 싶을 땐 안성맞춤이었다. 마른 가지에서 떨어져 날리는 수피가루들이 산탄 역할을 했다. 그때 우린 나무이름 따윈 몰랐다. 몰라도 좋았다. 몰라도 그건 꽃이고 나무고 골짜기였다. 그런 따윈 몰라도 작은 절골은 늘 거기 있었고, 결코 어디로 가버리지도 않았다. 그래서 축복이었다. 전투들은 장난이 아니었다. 때때로 실제상황이곤 했다. 상대가 울면 전투는 끝난다. 한점 핏물이 올라앉은 꽃송이. 생생하다. 겨울에도 싸움은 그치지 않았다. 적당히 언 눈덩이로는 성에 차지 않아 연탄재를 안에 넣어 쓰곤 했다.

그 멍청한 전투들엔 까닭이 없었다. 우리는 아직 채 열살도 되지 않은 아이들이었다. 그런 아이들이 패싸움을 벌이는 데 까닭이 있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다.

새로 사귄 덩굴장미집 아이는 시늉만 냈다. 아이의 적송 가지는 헐렁이 같을 뿐이었다. 때로는 공터 구석에 우두커니 서 있곤 했다. 몇번 그러자 개장수집 아이가 진짜로 때리라고 했다. 그러곤 제 머리통을 아이의 코앞에 들이밀었다. 때려봐, 찍어봐. 그러자 아이는 적송 가지를 휘둘렀고 퉁 소리와 함께 개장수집 아이는 쓰러졌다. 다음부턴 덩굴장미집 아이의 두 팔에도 힘이 들어갔다.

개장수집 아이가 그런 만용을 부린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우리는 보기만 해도 다리에 힘이 빠지는 선혈을 그 아이는 매일 보고 있었다. 집에서 개를 도축해 고기를 내다팔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당은 핏물이 마를 날이 없었고 늘 굵은 호스가 늘어져 있었다. 내가 포대기에 감싸여 창문을 통해 헐벗은 아까시나무를 보며 유아기를 보냈듯이, 개장수집 아이도 포대기에 감싸여 방문 틈을 통해 가죽을 벗긴 개고기를 보며 유아기를 보냈을 것이다. 그래서 아픈 것은 생각도 않고, 제 딴엔 피를 친숙한 것으로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작은 절골에서 전투만 있었던 건 아니었다. 한여름이면 저수지에 발가벗고 들어가 멱을 감기도 했다. 흙탕물에 벌레, 농약병, 썩은 배춧잎이 떠다니는 저수지였지만 그만큼 시원한 놀이도 없었다. 한겨울이면 개울에서 썰매를 탔다. 스케이트 날이 박힌 썰매는 아니었다. 우리는 굵은 철사를 박아 썼다. 작은 절골 곳곳 바위틈에는 샘도 있었다. 일요일 오후면 교회에 다녀온 여자아이들이 샘에서 멱을 감곤 했다. 나도 한번 봤다. 어찌나 눈이 부시던지, 쏟아지는 물줄기와 여자아이들의 몸뚱이가 구분이 되질 않았다.

 

그러다가 우리는 작은 절골에서 무언가를 발견했다. 태풍이 지나간 며칠 후였다. 축대집은 지붕을 날려먹었고 우리집 텃밭이 토사에 파묻혔다. 듣자니 개장수집에선 똥개가 천둥에 놀라 죽었다고 했다. 작은 절골도 무사할 리가 없었다. 나무를 연탄과 섞어 때는 집이 많았기 때문에 나무들은 수시로 베어졌고 숲은 늘 헐벗고 엉성했다. 무너지는 건 시간문제였다. 우리는 쓸려내려가 움푹 파인, 작은 절골의 한 귀퉁이에 서 있었다.

“저게 뭔 것 같아?”

잡화점집 아이가 물었다. 아직 동네에 슈퍼마켓이라는 게 등장하기 전이었다. 그래서 잡화점집은 생활에 필요한 온갖 것들을 다 갖다놓고 팔고 있었다. 잡화점집 아이가 호기심이 많은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다. 내가 창문으로 죽은 나무를 보고 개장수집 아이가 피 흘리는 개를 보는 동안, 잡화점집 아이는 선반에 올려진 수백종 상품의 때깔 좋은 포장지들을 보고 자랐을 것이다.

“뭐?”

“저거 말야.”

잡화점집 아이는 진흙투성이가 되면서도 새로 생긴 비탈을 기어올랐다. 그리고 약간 돌출되어 있는 지점에 멈춰서선 발로 흙을 쓸어냈다. 우리는 바위인 줄 알았다. 바위는 아니었다. 바위처럼 단단하고 까칠하게 생겼지만 흔히 보던 물건은 아니었다. 그것은 편평한 것이, 길쭉하게 몇 미터나 횡으로 뻗어 있었다. 이번 태풍에 토사에 파묻힌 건지, 아니면 원래 묻혀 있던 것이 태풍에 드러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진흙을 뒤집어쓰고 있어서 우리가 당장 알 수 있는 건, 그게 우리가 처음 보는 물건이라는 것과 어쨌든 바위는 아니라는 것뿐이었다.

“비가 한번 더 오길 기다리자.”

우리가 너나없이 달려들어 진흙을 털어낼 폼을 잡자 덩굴장미집 아이가 말했다. 며칠 후에 다시 비가 왔고, 우리는 지난주에 작은 절골에서 우리가 뭔가 발견했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말끔히는 아니지만 그런대로 진흙이 씻겨나가 있었다. 흙이 한번 더 무너졌는지 그것은 한층 더 길어져 전면을 거의 드러내고 있었다. 콘크리트판으로 된 그것 전면엔 글자 몇개와 아라비아 숫자 몇개가 씌어 있었다. 그 글자들이 영어 알파벳이라는 걸 알아본 아이는 덩굴장미집 아이뿐이었다. 그렇지만 심하게 지워져 있어서 숫자건 알파벳이건 읽을 수가 없었다. 페인트로 칠해진 문양 같은 것도 남아 있었다. 흐릿하긴 했어도 그것이 나뭇잎을 닮은 색이라는 것 정도는 알아볼 수 있었다.

그 콘크리트판 아래 굴이 있다는 걸 발견한 것은 며칠이 더 지나서였다. 다른 아이들이 위쪽에서 놀고 있는 동안 나는 그 아래에서 부슬비를 피하며 축대집 아이와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안방 창문의 아까시나무가 주제였다. 나는 얼마나 못 견디게 보기 싫은지 얘기했다. 그 나무는 축대가 아니라 사실상, 안방 창문에 그리고 내 마음속 깊숙한 곳에 앓는 이처럼 박혀 있었다.

“형한테 얘기할까?”

축대집 아이는 형 얘기를 꺼냈다.

“형한테 도끼가 있거든. 할아버지가 물려줬지. 아예 잘라버리라고 해?”

축대집 아이의 형은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껄렁한 교련복 차림으로 하릴없이 주차장 앞을 서성이곤 했다. 축대에서 아까시나무 밑동에 대고 오줌을 누는 것을 몇번 본 적이 있었다. 나는 범인을 잡았다는 생각에 거의 미칠 뻔했다.

그때 내 등쪽에서 무언가 허물어졌다. 흙더미였다. 나와 축대집 아이는 콘크리트판이 무너져, 우리를 깔아뭉갤 거라는 생각에 비명을 지르며 단번에 십수 미터나 물러났다. 돌아보니 다른 아이들이 판을 딛고 서서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틀림없이 누가 다치거나 죽는 재미난 일이 벌어졌을 거라 기대하는 얼굴들이었다.

새로 허물어진 흙더미 안쪽에서 드러난 것은, 입구가 납작한 굴이었다. 콘크리트판이 어딘가 수상쩍으며 무언가 감추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의구심이 현실로 드러난 순간이었다. 우리는 말을 잃어버렸다. 그러곤 한발한발 조심스레 다가가 손으로 진흙을 더 파냈다. 장롱 밑만하던 입구는 점차 벌어져서 우리 몸뚱이가 기어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넓어졌다.

우리는 가위바위보로 누가 들어가볼 것인지 정했다. 공무원집 아이가 걸렸다. 그 아이는 굴 앞에 무릎을 꿇고 잠시 고개를 돌리고 있더니 울음을 터뜨리며 산 아래로 쏜살같이 달려 내려가버렸다. 우리도 소리를 질러대며 그 뒤를 따라 뛰어내려갔다. 돌봐줄 사람이 없는 무덤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을 수도 있었다. 그 산 곳곳에서, 주저앉고 잡초에 덮인 봉분들이 눈에 띄곤 했으니까. 그 일이 있은 후 공무원집 아이는 한동안 우리와 어울리지 않았다. 골이 났는지, 우리를 보고도 똥그랗게 성난 눈을 떠 보일 뿐 인사도 하지 않았다. 그 아이 집엔 책이 많았다. 동화책도 전질로 있었다. 그 집에서 내가 책을 다시 빌려보게 되기까진 한참이나 걸렸다.

착한 일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나는 아까시나무의 원망을 들어주기로 했다. 나는 축대집 아이에게 도끼를 가지고 나오라고 했다. 아이는 집으로 들어가더니 빈손으로 나왔다. 무거워서 들 수가 없다는 얘기였다. 우리는 광으로 갔다. 지게, 녹슨 낫, 밭 가는 기구들, 절구, 빈 독들이 천장까지 들어차 있었다. 도끼는 문께에 놓여 있었다. 반질반질 손때가 앉은 자루가 거의 내 이마에 왔다. 내게도 너무 무거웠다.

“좀더 큰 다음에 와야겠어. 이를테면 국민학교에 들어간 다음에.”

“뭘 할 건데?”

“네 형 발목을 찍어줘야지.”

아까시나무의 원망은 내 원망이기도 했다. 매일 아침 눈을 뜨자마자 창문으로 죽은 나무를 봐야 하는 심정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몇년째 아무것도 날아와 앉지 않는 새 둥지를 바라봐야 하는 심정도 형언키 어려웠다. 축대집 아이는 내가 자기 형 발목을 찍겠다는데도 아무 반응이 없었다. 어쩌면 그런 협박에 인이 박인 건지도 몰랐다. 손모가지를 잘라버리겠다든가 발모가지를 부러뜨려놓겠다든가 하는 협박은 우리 삶엔 너무 흔해서 하품이 날 정도였다.

으레 우리는 우리만한 나이때는 얻어맞고 크는 것인 줄 알았다. 축대집 아이는 형한테 얻어맞곤 했다. 개장수집 아이는 무시무시한 소리가 나는 호스로 얻어맞곤 했다. 돌층계집 아이도 하루가 멀다 하고 빨갛게 살이 부어서 다녔다. 공무원집 아이는 플라스틱 자로 손바닥을 맞곤 했다. 잡화점집 아이는 우리 꾐에 넘어가 과자 따위를 훔쳐나오다 걸려 얻어터지곤 했다. 때론 우리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우리 핑계를 대다가 더 맞곤 했다. 연탄집 아이는 주로 술찌끼를 훔쳐먹다 혼나곤 했다. 내가 알기로 얻어맞지 않는 아이는 덩굴장미집 아이 하나뿐이었다. 하긴 우리가 봐도 어디 한군데 쥐어박을 구석이 없는 허약한 아이였다. 나이도 우리보다 어렸다. 그 아이는 머리를 맞대고 앉아 소곤소곤 얘기 나누는 것을 좋아했다. 그 집엔 늘 맛난 것과 장난감이 수북했기 때문에 나는 그 아이와 친하게 지냈다. 침대라는 것도 그 집에서 처음 보았다. 나는 아이에게 내 계획을 일러주었다.

“발목이 잘리면 죽지 않을까?”

덩굴장미집 아이가 말했다.

“그럴 거야. 하지만 아까시나무도 죽었잖아?”

 

작은 절골에서 발견한 이상한 것에 대해 잡화점집 아이가 뭔가 알아냈다. 군인들과 연관이 있을 거란 얘기였다. 잡화점집은 산에서 가장 가까운 가게였기에 종종 군인들이 내려와 주전부리를 하곤 했다. 소주나 막걸리 같은 회식거리를 사가기도 했다. 어떤 땐 총을 멘 채이기도 했다. 우리는 귀찮게 달라붙어서 총을 좀 만져볼 수 있겠냐고 묻곤 했다. 군인들은 만지면 총알이 나와서 만진 사람을 죽일 거라고 했다. 잡화점집 아이는 그 군인들이 입고 있는 얼룩덜룩한 군복과 작은 절골 콘크리트판에 그려진 문양이, 색도 모양도 비슷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 말 한마디에 우리는 작은 절골에 다시 모였다.

다들 열 발자국 앞으론 접근하지 않았다. 전에 공무원집 아이가 소리를 지르며 도망쳤기 때문에, 우리 모두 바보 같은 상상들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다시 가위바위보를 했다. 빠지겠다는 아이는 없었다. 첫판에 연탄집 아이가 걸렸고 두번째 판에도 그 아이가 걸렸다.

“난 벌써 들어가봤어.”

움찔하더니 연탄집 아이가 말했다.

“정말?”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의심스런 눈초리를 보냈다.

“그래. 들어가봤어. 뭐가 있었냐 하면 황금풍뎅이가 있었어.”

설명하길, 황금빛이 나는 풍뎅이가 굴 안에서 새끼를 치고 있었다고 했다. 황금으로 만든 것처럼 무게도 엄청났다고 했다. 그러곤 갑자기 오줌이 마려운 표정을 짓더니 산을 내려가버렸다. 우리는 연탄집 아이가 술찌끼를 만날 먹어, 항상 취해 있기 때문에 믿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후로도 연탄집 아이는 오랫동안 그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얼떨결에 나온 거짓말을, 그냥 진실인 양 믿어버리기로 아주 결심을 굳혀버린 듯했다. 그 아이는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황금풍뎅이라는 별명을 달고 다녔다.

우리는 다시 가위바위보를 했다. 겁쟁이와 거짓말쟁이는 필요없었다. 이번에는 돌층계집 아이가 걸렸다. 아이는 놀랍게도 성큼성큼 굴 앞으로 걸어올라가 바싹 땅에 엎드렸다. 콘크리트판이 씌워져 있고 굴이 납작해서, 그러지 않으면 접근을 할 수가 없었다. 아이는 한참이나 엎드려 있었다. 그러곤 일어나 초조해진 우리들 앞으로 와선, 놀란 목소리로 떠들어댔다. 안 보여, 그냥 새까매! 우리는 돌층계집 아이가 겁이 난 나머지 굴 앞에서 눈을 감고 있었다고 생각했다. 눈을 감고 있다가 어두워서 안 보인다고 거짓말을 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그같은 시도들 끝에 우리는 그 굴이, 친구들간의 의를 상하게 하는 요물이라며 경원하기 시작했다. 암묵적인 동의 같은 것이 있었다. 그래도 왕성한 호기심은 어쩌지 못해, 줄곧 그 근처를 떠나지 못했다. 알 수 없는 일은 나중에, 내가 작은 절골에서 황금풍뎅이를 진짜로 잡아봤다는 것이다. 내 손바닥 반만한 크기였고, 몸 전체에서 황금빛이 났고, 무게까지 상당했다. 그것은 아주 힘차게 날갯짓을 하며, 내 손바닥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내년이면 나도 초등학교에 입학할 나이였다. 동네 아이들 중엔 벌써 초등학교에 들어가 가방을 메고 다니는 아이들이 있었다. 키도 좀 자라 있었다. 도끼자루가 겨드랑이께로 내려와 있었다. 나는 축대집에 가서 도끼자루에 대고 키를 재어보곤 했다. 축대집 형의 얼굴엔 뾰루지가 빈틈없이 솟아나고 있었다. 나는 읽고 있던 어린이 성경책을 떠올리곤, 아까시나무를 죽인 벌로 그 형이 나병에 걸린 것이라고 믿었다.

초등학교 입학이 가까워지고 도끼자루가 짧아지는 만큼, 종종 우리의 이해력을 넘어서는 일도 벌어지곤 했다. 어느날 골목을 지나다보니 개장수집 아이가 엉덩이를 깐 채 허리를 굽히고 있었다. 그리고 누군가 불에 벌겋게 달군 연탄집게를 들고, 엉덩이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애가 무슨 치질이야, 하고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개장수집 아이는 나를 보고도 한마디도 못했다. 입가로 침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나는 그 광경이 너무나 기괴하고 무서워 도망쳐버렸다. 아이는 그후로 몇주나 보이지 않았다.

파란대문집 아이는 집에서 토큰을 훔쳐내고 있었다. 그 아이 집 장롱 맨 위 서랍을 열면 버스토큰을 가득 담은 비닐봉지가 있곤 했다. 어찌나 많은지 한줌쯤 집어내도 표가 나지 않았다. 우리는 토큰을 돈으로 바꿔 장난감을 사곤 했다. 그렇게 산 장난감은 축대 여기저기 나 있는 작은 굴들에 감췄다. 들통나는 건 시간문제였다. 우리는 경찰서로 끌려갔다. 이것들 싸그리 구속시키세요. 신문에도 내야겠어요. 기자 안 옵니까? 그때 내 머리 위에선 그런 술취한 목소리가 들렸다.

돌층계집엔 새 식구가 들어왔다. 계모였다. 어느날 그 집에 갔더니 안방문께에 전기솥이 놓여 있고, 시큼한 냄새가 나는 고등어찌개가 한 솥 가득 끓고 있었다. 다른 반찬은 없었다. 우리집보다 반찬 가짓수가 더 없었다. 며칠이 지난 다음 갔을 때도 여전히 반찬은 전기솥의 고등어찌개였다. 다음달에 갔을 때도 그랬고, 계절이 지나서 가보아도 마찬가지였다. 반찬은 고등어찌개 하나뿐이었고, 차게 식어 있거나 끓고 있다는 차이밖엔 없었다. 그리고 그 집 아이들은 전에 비해 더 홀쭉해졌고 꾀죄해졌다. 그 집에선 귀신도 나왔다.

잡화점집은 시련을 겪고 있었다. 아랫동네 시장통에 ‘홍제마트’가 생긴 다음부터였다. 그전엔 그 집보다 수준이 높은 가게를 찾고 싶으면, 버스를 타고 명동으로 나가야 했다. 믿거나말거나박물지社는 그렇게 내 인생에 등장했다. 동네 한복판에, 내 유년의 한복판에 믿거나말거나박물지社가 등장한 순간이었다. 텔레비전 뉴스에선 그런 마트가, 믿거나말거나박물지社가 외국에서 도입한 현대적인 유통체인이라고 소개되기도 했다. 잡화점집엔 단골이 뚝 끊겼다. 아이가 전에 없이 어른스러워진 것도 그즈음이었다. 이제 그 집은 아이들 주전부리나 파는 집이 됐다.

황금풍뎅이 연탄집 아이의 거짓말은 여전했다. 그 집이 진짜 연탄집이었던 건 집에 어른 남자가 있을 때 얘기였다. 지금 그 집엔 빈 리어카와 지게뿐이었다. 우리는 종종 빈 리어카를 타고 골목을 달렸다. 어느날 우리가 화살을 만들어 쏘는 놀이를 하고 있었는데, 연탄집 아이가 이런 말을 했다. 우리 아버지가 화살을 쏘면 나는 잽싸게 화살을 피하곤 했어. 우리는 그냥 무시하고 놀이를 계속했다. 세상에 자기 애한테 화살을 쏘는 부모가 어디 있단 말인가. 우리도 그 정도는 알고 있었다.

공무원집 아이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단순히 공무원집이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우리집 수도는 허가를 받지 않은 수도였다. 그래서 구청 단속이 나오면 며칠 다른 집에서 물을 길어다 먹어야 했다. 때론 내가 바께쓰를 들고 물을 길어야 했다. 우리집 수도는 늘 장독을 거꾸로 해서 씌워놓고 썼다. 그런 탓인지 나는 공무원이라고 하면 무턱대고 눈을 가늘게 뜨고 쳐다봤다. 명절이면 우리집은 동사무소에서 라면이며 밀가루를 타다 먹곤 했다. 나는 혼란스러웠다. 물을 못 먹게 하는 것도 공무원이었고 밀가루를 주는 것도 공무원이었다.

덩굴장미집은 늘 나를 놀래키곤 했다. 그 집에 가야만 볼 수 있는 것들이 있었다. 모터에 브레이크까지 달린 미니자동차에, 침대, 닭장, 무한선로를 질주하는 미니어처 기관차도 있었다. 그중에서도 이층으로 올라가는 나무층계가 가장 놀라웠다. 나는 가정집에 층계가 있을 수 있다는 데 흥분하곤 했다. 동네 집들은 지을 때 나무가 부족했는지 시멘트가 부족했는지 게딱지처럼 지붕이 낮았다. 나는 일도 없이 종일 그 나무층계를 오르락내리락하곤 했다. 덩굴장미집 아이가 언젠가 말했다. 아버지가 외국 어디에 나가 사왔는데, 레코드판처럼 생긴 둥근 것을 기계에 넣으면 소리도 나오고 텔레비전처럼 영상도 나오는 그런 게 있다고. 나는 전축도 몰랐고 라디오도 몰랐다. 그래서 나는 그런 물건을, 전혀 머릿속에서 그려볼 수가 없었다. 아이는 그렇게, 내가 상상도 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얘기해주곤 했다.

 

우리는 아직 작은 절골에서 발견한 그 콘크리트 요물엔 손도 못 대고 있었다. 잊은 척 행동하거나 실제로 잊어먹었거나, 아니면 애써 외면하고 있었다. 나도 그랬는데, 그건 내가 겁쟁이라서가 아니라 다른 은밀한 계획이 있어 신경을 쓸 여유가 없어서였다. 내 눈엔 축대집 형의 발목밖엔 안 보였다.

덩굴장미집 아이와 나는 잠자리를 잡으러 작은 절골에 갔다. 다른 아이들은 없었다. 가을이 지나가고 있어서 동네엔 잠자리가 드물었다. 그 당시엔 동네에도 잠자리가 많았다. 주차장에서 놀다가 하늘이 문득 어두워져 고개를 들면, 수천 수만 잠자리들이 새카맣게 하늘을 메우고 있곤 했다. 작은 절골은 동네 하늘에서 사라진 잠자리들이 계절의 마지막까지 남아 있는 곳이었다.

우리는 개울가와 풀숲을 훑고 다니다가 콘크리트 요물이 있는 데까지 갔다. 지난해 장마철 무너지고 파인 자리가, 이제 단단하게 굳어져 작은 절골의 새 지형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콘크리트판 위에도 마른 풀들이 무성했다. 판 아래 굴은 조금 더 넓어져 있었다.

“수영이가 여기 들어가서 지 삼촌이랑 개를 잡아먹었다고 하던데.”

수영은 개장수집 아이의 이름이었다. 나는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어른들이라면 알 텐데.”

“어른들은 맨날 가는 데만 가잖아.”

덩굴장미집 아이는 뭔가 곰곰 생각하는 듯하더니, 요물 앞으로 걸어올라갔다. 그때 우리와 요물 앞엔 보이지 않는 접근금지선 같은 것이 있어서 열 발자국 이상은 다가가지 않고 있었다. 아이는 별 주저 없이 금지선을 넘더니 굴 앞에 가서 땅에 엎드렸다. 우리 가운데 그 아이가 가장 약하고 어렸다. 나는 설마 무슨 일이 있겠는가 하고 바라보고만 있다가 덩굴장미집 아이의 한쪽 다리가 굴 안으로 사라지자 귀먹은 비명을 질렀다.

한쪽 다리가 사라진 다음 곧바로 다른 쪽 다리도 사라졌다. 그리고 허리까지 굴 안으로 빨려들듯 사라졌다. 나는 머리가 지끈지끈 쑤셔오고 다리에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덩굴장미집 아이는 허리까지 굴에 잡아먹힌 채 고개를 내 쪽으로 쳐들고 알 듯 모를 듯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나는 손을 쳐들어 말리려고 했지만 말이 나오질 않았다.

곧 덩굴장미집 아이의 몸 전체가 굴 안으로 빨려들어갔다. 보이는 건 새하얗게 빛나는 조막만한 얼굴뿐이었다. 잠시 후, 그 얼굴마저 사라졌다. 아이가 요물의 뱃속에서 멀쩡하게 기어나온 건 한참이나 지나서였다. 아이는 놀란 턱을 다물지도 못하고 있는 나에게 손짓을 했다. 거짓말이 아니었어, 아무것도 없어. 나는 소리를 지르며 작은 절골을 뛰어내려와버렸다.

우리는 다른 아이들에겐 그 얘기를 하지 않았다. 그 대신 이제 겨울이 가까웠으니, 뱀들이 그 굴에서 똬리를 틀고 있을 거라고 했다. 연탄집 아이는 다행이라는 듯, 작은 절골에 반달곰이 살고 있는데 그 굴에서 겨울잠을 잘 거라고 또 거짓말을 했다. 그렇게 해서 당분간 그 요물의 뱃속은 우리만의 아지트로 남을 수가 있었다.

덩굴장미집 아이가 아무것도 없다고 한 것은, 우리가 기대하던 것들이 없다는 뜻이었다. 우리가 기대하던 것들이란 귀신, 시체, 뱀, 약 먹고 미친 개, 지네, 문둥이, 옻나무, 쥐, 거미 따위였다. 그런 것들은 없었다. 그 대신 우리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없는 것들이 줄줄이 나왔다. 부러진 개머리판, 형체를 알 수 없이 삭은 천조각, 물 대신 흙이 채워진 수통, 손바닥만한 라이터, 탄피 여러개, 씹은 자국이 있는 군화 한짝, 그리고 우리가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상표의 여러 포장지들.

그 모든 것들은 우리 둘의 작은 머릿속에, 감당할 수 없이 거대한 물음표를 하나씩 찍어놓았다. 이게 다 뭐란 말인가? 하는. 당시엔 이름조차 알지 못하던 것들이었다. 어쩐지 손을 대면 안될 것 같다는, 어렴풋한 경계심이 일기도 했다. 우리는 그 물건들을 굴 한켠에 치워놓고 바깥에서 풀을 뜯어다 배를 깔고 엎드릴 수 있는 자리를 마련했다. 바닥은 차가운 시멘트 바닥이었지만 늦가을의 찬바람을 피할 수 있었다. 그리고 조금 있다보면 금세 온기가 돌았다. 우리는 그 아지트에서 둘이서만 소곤소곤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얼마쯤 지나, 나는 덩굴장미집 아이에게 말도 않고 탄피들을 꺼냈다. 이름은 몰라도, 그걸로 뭘 할 수 있는지는 알고 있었다. 나는 그것들을 꺼내 집으로 가져가 부엌 찬장 아래 감췄다. 그러곤 마음을 다잡곤 하나씩 동네로 가지고 내려갔다.

“형, 이리 와봐.”

나는 동네 껄렁패들이 모이는 담배가게 골목으로 갔다. 그리고 낯이 익은 동네 형들을 불러냈다.

“이거 어때?”

탄피를 보여주자 다들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입꼬리를 일그러뜨렸다.

“어때?”

“뭐가 어때?”

“살 거야, 말 거야? 구하기 힘든데.”

나는 오백원짜리 지폐 한장씩 받고 탄피를 팔았다. 형들에겐 헐값이었지만, 내게는 너무나 큰 돈이었다. 그거라면 택시도 타볼 수 있었다. 세상을 다 가진 듯 뿌듯했다.

 

한겨울이 되었을 때 덩굴장미집에서 나를 찾았다. 누군가 내 꾀죄한 외투를 벗겼다. 그러곤 누런 털이 달린 솜외투를 입혔다. 아이는 제 죽은 형이 입던 거라고 했다. 셔츠도 갈아입고 바지도 갈아입었다. 세수도 하고 머리도 새로 빗었다. 우리는 유난히 기다란 시커먼 자동차를 탔다. 나는 새옷이 불편했다. 그 빌어먹을 것들이 자꾸 살에 쓸려 버석거렸다. 누군가 귀찮게 말을 시키기도 했다. 나는 그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하고 있었다.

우리는 시청 앞 분수를 지나쳐 한참을 더 갔다. 도심에 나와보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나는 통 차를 탈 일이 없었다. 차가 섰다. 차에 남아 있으라고 했다. 덩굴장미집 아이와 나는 차에 남아, 넋을 잃고 차창 밖 풍경을 구경했다. 차가 선 곳은 어느 건물 앞이었다. 벽돌 담장이 아니라 철망 담장이었기에 안쪽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높다란 아치형 입구에는 ‘믿거나말거나박물지社 부설’이라고 페인트로 씌어 있었다. 기둥에는 ‘한남국민학교’라는 길쭉한 나무간판이 걸려 있었다. 믿거나말거나박물지社는 거기에도 있었다. 그때 이미 그 회사는 하나의 세계였다. 젠장칠, 그 회사는 그때 이미 내 삶의 한복판으로 육박해 들어오고 있었다. 학교 마당엔 미끄럼틀과 그네, 시소, 정글짐 같은 놀이기구들이 있었다.

덩굴장미집 아이는 차에 남고, 나는 학교로 들어갔다. 거기서 사진을 찍었다. 태어나 처음 찍어보는 사진이었다. 기분이 묘했다. 그날은 내가 하루종일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된 듯했다. 그러곤 무슨 서류 같은 것을 만들었고, 금방 뽑은 사진을 붙였다. 사무실에 가선, 누군가 묻는 말에 미리 외운 대로 대답을 했다. 나는 덩굴장미집 아이의 이름을 댔다. 나이는 내 나이를 댔다. 나는 덩굴장미집 아이의 이름으로 얌전하다는 칭찬을 들었다. 덩굴장미집 아이는 실제로 얌전했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얌전했던 게 아니라 좀 얼어붙어 있었다.

나는 오후가 다 지나서야 차로 돌아왔다. 덩굴장미집 아이가 재미있었냐고 물었다. 나는 잘 모르겠다고 했다. 그 아이는 내게 고맙다고 했다. 누군가가 또 내게 고맙다고 했다. 우리는 동네로 돌아왔다. 우리는 ‘홍제마트’에 잠깐 들렀다. 누군가 내게, 먹고 싶은 걸 사고 싶은 걸 다 사라고 했다.

“정말요?”

“그럼.”

“얼마나요?”

“네가 갖고 싶은 것 다.”

나는 코너를 몇번씩 돌며 한아름이나 물건을 골랐다. 스낵이며 사탕이며 초콜릿이며, 죄다 평소에 먹고 싶던 주전부릿거리였다. 나는 이렇게 많이 골라도 되는지 은근히 걱정이 됐다. 누군가 그런 내가 귀엽다는 듯, 그 위에 몇가지를 더 얹어주었다. 그러고 나서 다시 덩굴장미집으로 갔고, 내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 일 이후로 덩굴장미집 아이를 꺼리게 되었다. 나는 어쩐지 농락당한 것 같다는 생각을 했고, 아이를 보면 순간순간 기분이 더러워지곤 했다. 한겨울이 고비를 넘겼을 때, 덩굴장미집 아이와 나는 아지트로 숨어들었다. 다른 아이들은 전투를 마치고 텔레비전 만화영화를 보러 집으로 돌아가고 없었다. 우리는 풀방석에 배를 깔고 누워 새로 시작한 만화영화에 대해서, 어제 읽은 동화책에 대해서, 함께 어울려다니는 그 겁쟁이 거짓말쟁이 사고뭉치들에 대해서 입방아를 찧었다.

“나도 겨울만 지나면 국민학생이야.”

“그래.”

“그럼 키도 좀 크겠지. 아직은 턱도 없어.”

나는 도끼에 대해서 말하고 있었다.

“나도 봄엔 학교 들어가.”

굴 밖으로 황혼이 지고 있었다. 동네가 다 환해지고 있었다.

“응? ……내후년이잖아?’

“그렇긴 해.”

하지만 덩굴장미집 아이가 금세 들통날 거짓말을 할 리가 없었다. 봄이 가까운 어느날 나는 덩굴장미집에 불려갔다. 그 집 사람들은 전에 없이 나를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동네의 다른 아이들은 없었다. 나 혼자뿐이었다. 누군가 아주 커다란 사기컵에 코코아를 넘치게 타주었다. 아주 뜨거웠기 때문에 나는 훌훌 입으로 불어가며 마셨다.

“우리 이사간단다.”

누군가 말했다. 내가 놀란 눈으로 덩굴장미집 아이를 바라보자 아이는 말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널 부른 거야. 가기 전에 형민이가 널 꼭 보고 싶다고 해서.”

“내일이면 우리는 이 자리에 없을 거야.”

덩굴장미집 아이가 말했다. 그 바람에 나는 눈물을 터뜨렸다. 내가 보기에도 굵다란 눈물방울이 뚝뚝 흘러내렸다. 코코아 컵에도 떨어졌다. 아이도 울었다. 아이가 우는 모습을 보자 나는 엉엉 소리까지 내며 울었다. 아이도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더러운 기분은 씻겨나갔다. 나는 인사도 할 수 없었다.

나는 집에 돌아와서도 엉엉 울었다. 나는 울면서 고개를 들어 거울을 올려다보았다. 떨리는 내 두 손엔, 내 머리통만큼이나 커다란 사기컵이 쥐어져 있었다.

 

이제 어엿한 초등학생이었다. 반 배정도 받았고 번호도 받았다. 하지만 크게 달라진 건 없었다. 예전만은 못했지만, 변함없이 작은 절골은 우리의 놀이터였다. 내가 나이를 먹는 만큼 새로운 얼굴도 늘어갔다. 전투를 하려고 모이면 반은 낯선 아이들이었다. 초등학교에 들어간 첫해 봄, 우리는 동네 골목에 모여 연탄집 아이가 가져온 술찌끼를 나눠먹곤 해롱거리며 작은 절골로 올라갔다. 그렇게라도 술을 깨지 않으면, 저녁도 못 얻어먹고 집에서 쫓겨날 것이었다. 작은 절골의 봄은 축복받은 것이었다. 우리는 패를 가르고 무기를 주워들었다.

내 이마에서 꽃폭탄이 터졌다. 돌층계집 아이가 휘두른 조팝나무 가지였다. 내가 든 적송 가지는 첫방을 날리기도 전에 부러져버렸다. 잡화점집 아이가 멀찌감치 떨어져서 아까시나무 가지를 날렸다. 내 이마에서 수류탄이 터져 다시 한번 하얗게 꽃잎들이 흩날렸다. 나는 동강난 적송 가지로 돌층계집 아이의 콧등을 후려갈겼다. 움찔 물러나는 것이 스치기만 한 모양이었다. 나는 얼른 돌아서서 잡화점집 아이의 옆구리에 발길질을 했다. 그러곤 엉덩이를 높이 쳐들고 기어서 도망을 쳤다. 아까시나무에 긁혀 벌써부터 팔뚝에 피가 맺혀 있었다. 축대집 아이가 잡화점집 아이를 덮치고 있었다. 내가 새 무깃감을 찾아 주위를 훑는 새, 개장수집 아이가 어깨를 내리쳤다. 어른키만한 마른 대나무였다. 안테나 기둥을 뽑아온 것이었다. 나는 쓰러져선 발로 개장수집 아이를 밀쳐내곤 눈을 부라렸다. 그러곤 새 적송 가지를 찾아 주워들었다. 개장수집 아이를 후려치자 아이는 눈을 비비며 주저앉았다. 나무껍질 산탄이 효과를 발휘한 것이었다. 나는 마음놓고 팼다. 다음엔 공무원집 아이를 쓰러뜨려 올라탄 다음 적송 가지로 목을 눌렀다. 한손으론 뺨을 쳤다. 누가 어깨를 치건 옆구리를 찌르건 아랑곳없었다. 울어, 울어. 그러다가 곧 뒤통수를 차여선 바닥으로 굴렀다. 연탄집 아이였다. 그 아이는 공무원집 아이를 일으켜세우더니 내 가슴팍에 밀어 앉혔다. 공무원집 아이는 주머니에서 강아지풀을 한움큼 꺼냈다. 아이는 강아지풀로 내 온 얼굴을 사정없이 문댔다. 쓰리고 화끈거렸다. 전투가 끝날 때쯤이면 풀독에 벌겋게 부풀어오를 것이다. 축대집 아이가 공무원집 아이를 치워버렸다. 나는 울음을 참으며 공무원집 아이를 쫓아갔다. 아이는 적송 숲을 가로질러 뛰었다. 그리고 곧 시야에서 사라졌다. 숲이 끝나는 벼랑 쪽이었다. 공무원집 아이는 족히 이 미터는 될 벼랑 저 아래에서 무릎을 움켜쥐고 있었다. 나는 아이가 우나 안 우나 살펴보곤 전장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다른 아이들과 싸우다가, 공무원집 아이가 다시 기어올라온 것을 보곤 쫓아가 덮쳤다. 밀쳐 넘어뜨리곤 무릎으로 등을 쳤다. 전투는 이미 지루해져 있었다. 나는 연해 무릎을 아이의 얇은 등에 박아넣었다. 지겨워, 지겨워. 빨리 울어. 꾀죄한 행색에 때투성이 아이들이 우리처럼 두엇씩 엉겨붙어 땅을 구르고 있었다. 그때 뜨거운 물을 끼얹은 듯 등짝이 화끈거렸다. 돌아보니 파란대문집 아이가 길게 휘어진 능수버들 가지를 들고 있었다. 죽어, 죽어. 아이는 샐샐 웃고 있었다. 아이는 팔을 길게 뻗어올리더니 다시 한번 내리휘둘렀다. 무시무시한 비명과 함께 나는 울음을 터뜨렸고, 그날의 전투는 끝이 났다.

우리는 작은 절골에서 내려왔다. 그런 얼굴론 집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나는 축대집으로 갔다. 분한 마음에 계획을 앞당기기로 했다. 광으로 가선 도끼를 집어들었다. 하지만 허리 이상으론 들어올릴 수가 없었다. 나는 도끼를 뒤로 감추고 도끼머리를 질질 끌며 마당으로 들어갔다. 축대집 아이의 형이 발을 씻고 있었다.

“또 한바탕했구나.”

형은 어쩐지 기분이 좋아 보였다. 나는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 형이 오늘 학교에서 짤렸단다.”

축대집 형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담뱃내가 나긴 했지만, 깊고도 부드러운 한숨이었다.

“애새끼 하나가 재수없게 굴기에 패줬지. 졸라 패줬어.”

“………”

“정말 졸라 패줬지. 진짜로 졸라 패줬단다. 봤어야 했는데. 졸라졸라 패줬다구.”

 

축대집 형의 발목은 결국 찍지 못했다. 나는 일천구백팔십년이 되기 전까진 결코 도끼를 들어올리지 못했다. 그리고 내가 도끼를 휘두를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컸을 땐, 그 형이 동네에 없었다. 아까시나무는 베어버릴 필요가 없었다. 결과적으로, 믿거나말거나박물지社에서 그 일을 대신해줬기 때문이다.

새 세기가 시작되었을 때, 나는 옛생각이 나서 그 동네를 다시 찾았다. 이제 그 동네엔 기와지붕들과 골목들과 축대들 대신, 산을 가려버릴 만치 높다랗게 지어진 고층아파트들이 들어서 있었다. 고층아파트들은 예전의 그 모든 정겨운 것들을 흉내내며, 산 중턱까지 겹겹이 쌓여올려 지어져 있었다. 말할 것도 없이, 믿거나말거나박물지社의 아파트들이었다. 그 회사는 내 유년에 시작되었던 그 육박을 완성해, 결국 동네 전부를 자기 세계에 복속시켰던 것이다.

믿거나말거나박물지社라면 능히, 내 옛추억까지도 대신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편협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부정적으론 여기지 않는다. 심지어 현재의 나는, 그들의 일원이기도 하다. 나는 오후 내내 아파트촌을 더듬다가 그냥 내려왔다. 작은 절골로 올라가는 그 연탄재투성이 골목을 찾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축복으로 가는 그 골목들은, 내 기억이 지금 그런 것처럼 어디에선가 막혔거나 지워져버렸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