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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평

 

그 여자들의 시간

영화 「디 아워스」

 

 

이남희 李男熙

소설가. eename@hanmail.net

 

 

미시마 유끼오는 어떤 소설에서 불현듯 출현한 독자라는 얼굴에서 느끼는 두려움을 털어놓았다. 비 내리는 새벽, 자신의 집을 침입한 괴한이 다툼 끝에 경찰에 붙잡혀가면서, 나는 당신의 독자다, 이야기 좀 하자고 외친 일화를 소재로 하였다. 미시마는 제정신이 아닌 괴한의 황폐하고 고독한 얼굴에 충격을 받았다. 작가인 자신이 세상에다 풀어놓는 메씨지가 낯선 타인들의 가슴속에서 변용되어 일어날 메아리가 아마도 그런 얼굴을 하고 있을 거라며 두렵다고 했다.

한동안 나는 작가들이 글을 쓸 때 어떤 얼굴을 상상하는지 열심히 묻고 다닌 적이 있다. 그리고 요즘도 가끔 그렇지만, 때로 어떤 얼굴도 그리지 못한 채 쓴다는 사실을 의식하게 되면 사기라는 생각이 들어 뒤꼭지가 잡아당겨지기도 한다. 내 글이 어떻게 남들에게 가닿고 어떤 반향을 일으키게 되는가 하는 문제는 작가라면 궁금하면서도 한편으로 두려운 것인지도 모른다.

「디 아워스」(The Hours)는 소설이 어떻게 만들어지는가에 더하여 그것이 어떻게 변용되는가까지 보여주려 한 영화이다. 다르게 말한다면 일종의 메타픽션이라고 불러도 될 텐데, 그 단어가 주는 현란한 자기분석이나 비틀기, 해체 등에서 오는 난해함은 없다. 단순하게도 각기 다른 시대를 살아가는 세 여자의 모습을, 그것도 일상에 천착하여 미세한 흔들림까지 섬세하게 좇아감으로써 영화가 끝난 뒤 인생의 의미나 무의미, 정상이나 광기, 그리고 침묵 혹은 글쓰기의 경계 같은 것을 다시 한번 되짚어보게 만든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할리우드의 쟁쟁한 여배우들이 연기한 세 여자가 아니라,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댈러웨이 부인』이다. 이 소설은 영화 속 각기 다른 시대를 살아가는 세 여자의 인생을 연결하는 코드 구실을 하며 이 영화의 외적 형식, 즉 하루의 삶을 좇아감으로써 인생을 보여준다는 얼개를 빌려온 원전이기도 하다. 또 이 소설이 어떻게 씌어졌는지, 그렇게 씌어진 소설이 독자에게 어떤 반향을 불러일으키는지, 또 그것이 현대로 옮겨졌을 때 어떻게 변주될 수 있는지까지도 이야기해주고 있다.

첫번째로 등장하는 인물은 작가인 버지니아 울프이다. 첫 장면은 우즈 강에서 버지니아 울프가 자살하는 것으로 시작되는데, 사실을 따지자면 그건 1941년의 일이며, 잇따라 십수년 뒤로 물러나 1923년 영국 리치먼드 교외에서 『댈러웨이 부인』을 쓰고 있는 하루가 영화의 중심이 된다. 몽따주된 장면처리 때문인지 버지니아 울프가 『댈러웨이 부인』을 쓰고 그로 인해 신경쇠약이 깊어져서 자살한 것처럼 느껴지기 쉬운데, 아마도 감독이 창작의 고통을 과장하여 드라마틱한 이야기를 만드는 할리우드의 관습을 따른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한번 더 생각해보면 울프가 『댈러웨이 부인』을 쓰는 과정에서 광기의 순간까지 근접했다고 할 정도로 극한까지 자신을 밀어붙였던 것이 사실이고 보면, 그다지 무리한 설정이라고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영화 속 울프의 삶은 꼭꼭 닫혀 있는 수인과 같고, 그런 삶을 견디게 해주는 유일한 탈출구가 글쓰기이다. 울프는 절망하면서 이곳 아닌 저곳(영화에서는 혼잡한 런던)을 꿈꾸며 그런 백일몽을 쓰는 것으로 견디고 있다. 여기서 그녀의 글쓰기는 이중적인 모습이다. 글쓰기는 삶을 견디게 해주는 힘이지만, 한편으로는 그로 인해 신경쇠약이 심화되어 삶을 더욱 닫아버리게 되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두번째로 등장하는 로라 브라운 부인의 인생에서 책읽기가 갖는 위치와 비슷하다. 로라 브라운 역시 수인의 삶을 살고 있다. 그녀는 풍요의 시기라는 1951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남편과 어린 아들과 더불어 살고 있다. 남편은 자신의 생일날 아침조차 그녀를 깨우지 않고 손수 아침을 차려먹을 정도로 자상하게 굴지만, 그렇다고 그녀의 절망감은 덜어지지 않는다. 그녀는 『댈러웨이 부인』을 읽는 것으로 삶을 견딘다. 그녀에게도 버지니아 울프가 가졌던 절망감, 이곳 아닌 저곳으로의 동경, 자살충동이 있으며, 그것은 『댈러웨이 부인』을 읽는 것으로 증폭되거나 영향받으며 때로는 위안받기도 한다. 그녀는 소설을 흉내내듯 이웃집 부인과 동성애적 키스를 나누고, 자살을 시도하다가 단념하며, 결국 현재 임신하고 있는 둘째아이를 낳는 대로 멀리 떠나겠다고 작정한 것으로 그려진다. 여기서 책읽기는 그 나름으로 자기 정체성을 찾는 데 일조하고 닫힌 삶을 견디게 하는 도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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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여자의 모습에서 작가와 독자를 읽는다면, 세번째 여성 클라리사 본은 여러가지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 2001년 뉴욕에 사는, 댈러웨이 부인이라는 별명을 가진 오십대 여성 클라리사는 울프의 소설배경을 현대로 바꾸었을 때 가능함직한 변주된 모습이다. 그녀의 하루는 소설 속 댈러웨이 부인의 하루를 그대로 모방하고 있다. 화창한 6월 아침에 일어나 꽃을 사거나 파티를 준비하기도 하며 파티에 올 손님이 미리 오거나, 리처드가 자살한다는 사건들이 그러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클라리사가 출판사 편집인으로 일하며, 시인인 친구 리처드의 문학상 수상을 축하하는 파티를 준비한다는 설정, 그리고 자신의 일화가 리처드의 소설에 등장하는 것에 대한 느낌을 토로하는 등의 장면은 소설을 배태하도록 돕는 환경을 보여주려는 의도로 해석될 수도 있다.

당연한 것일 수도 있으나 세 여자의 모습은 차이가 있다. 버지니아 울프는 예술적인 요구와 현실 사이의 간극에서 괴로워하다가 자살하는 것으로 나오지만, 브라운 부인은 고뇌 끝에 다른 삶을 찾아 탈출하며, 클라리사는 동성의 애인과 딸까지 둔 안정된 관계를 누리고 있다. 세 여자 모두 동성애의 기미를 드러내지만, 그것이 자기파괴로 작용하지 않고 충실한 현재의 삶이 구현되는 것은 현대의 클라리사에 이르러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클라리사의 모습은 모순적이다. 두 여자에 비하여 타인의 시선에 더 종속되어 있는 것으로 그려진다. 독립적인 이미지가 아닌 타인을 돌보고, 관계 속에서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살아가는 여자로 그려지는 것이 의문으로 남는다.

픽션의 세 측면을 샅샅이 들여다보는 것은 어쩌면 픽션이니까 가능할지도 모른다. 여기서 작가나 독자, 환경의 모습은 상당히 이상적으로 그려져 있으며, 따라서 스테레오 타입화되어 있다고 느껴질 정도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영화의 감동이 덜해지는 것은 아니다. 단순히 그녀들의 순간들을 같이 바라봄으로써 인생의 경계선에서 만나게 되는 흔들림이며 떨림, 백열화된 의미 같은 것을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