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문화평

 

가매장된 공동묘지를 파헤치다

제7회 인권영화제

 

 

박신규 朴信圭

본지 편집기자. muse@changbi.com

 

 

이미 문화의 주류가 된 영화는 가장 파급력이 강한 대중적인 오락이다. 거대자본과 뗄 수 없는 상품이기도 하다. 넷(net)문화 확산으로 그 파장은 극장을 넘어 순식간에 열린 공간으로 퍼지면서 영화 소비로 얻는 카타르시스 역시 대량 복제되고 공유된다. 그래서 영화는 일상이 되었다. 주변의 친구, 연인뿐만 아니라 작가들도 만나면 영화 얘기를 하곤 한다. 뭔가 적나라하고 독설적인 솔직함이 드러나기까지는 좀더 많은 시간과 술이 필요하지만 전초전처럼 등장하는 것이 영화다. 영화평론가 못지않게 다들 심도있게, 신나게 떠들어서 애초에 얘기하려고 했던 주제를 까먹기도 한다. ‘영화적 상상력’이란 말도 이젠 충분히 식상하다. 그래서인지 최근 개봉작을 봐도 이미 본 것처럼 밋밋하게 느껴질 때가 많다. 이런 지루한 감상들 탓인지 기억에 남는 것들은 한결같이 충격적인 소재나 관객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드는 영화들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가공된 허구이고 카메라 역시 눈과 어느정도 유리되기 때문에 극장을 나서거나 비디오가 끝나면 짧은 환상에서도 벗어난다. 하지만 허구가 아니면서 끔찍한 현실을 포장하지 않고 전달해주는 다큐멘터리의 경우 사정이 달라진다. 얼마 전 카메라렌즈가 콘택트렌즈처럼 접안(接眼)되어 나와 스크린의 거리가 점점 좁아지는 특별한 경험을 했다. 인권영화제 이야기다.

1996년 처음 시작한 이 영화제는 표현의 자유를 위한 투쟁의 역사였다. 제2회 때는 집행위원장이었던 서준식씨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되기도 했다. 사전심의 없이 영화제를 개최하고, 제주 4·3 항쟁의 진실을 파헤친 영화 「레드 헌트」를 상영했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많은 영화인과 관객의 지지 속에 행사는 해마다 이어졌고 7회째를 맞은 올해 인권영화제(5. 23~28)는, 이주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의 실상, 미국의 전쟁범죄, 여성·장애인 등 소수자의 인권을 다뤘다. 행사를 주관한 인권운동사랑방(www.sarangbang.or.kr)측은 후원자가 줄어들고 재정적으로 열악한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무료상영을 고수했다. 무료상영이 아니더라도 프로그래머·감독·번역자·자원봉사자 등 행사관계자들의 활동을 지켜보면 영화를 통해 세계의 불합리성을 알리려는 소중한 노력을 읽을 수 있다. 어느 시간대에나 입장할 수 있다는 것 때문에 부담없이 서울아트씨네마를 찾았는데, 첫째날의 가벼움은 폐막식에 이르러서는 엄청난 부채로 전환되었다. 대부분의 영화들이 상식을 넘어선 장면을 담고 있어서 불편함이 극에 달했는데도 눈을 돌릴 수 없었다.

이라크전 종전이 얼마 지나지 않은 때여서 미국의 전쟁범죄를 다룬 영화들이 눈길을 끌었다. 미국의 전쟁에 대해서 그간 언론은 허위로 가득 찬 홍보장치 역할을 했고, 사태의 심각성과 이면의 진실을 제대로 전달해주지 못한, 그래서 쉽게 망각하게 하는 통제씨스템으로 작동했다. 하지만 이 영화들은 베트남전을 비롯해 미국이 수행한 전쟁의 역사에서 정당한 명분이란 찾을 수 없고 오직 경제논리만 존재한다는 것을 알려준다. 게다가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 그 어떤 무모함과 잔인함도 서슴지 않는다는 것을 생생하게 드러낸다. 카메라는 종전 후에도 여전히 전쟁은 계속되고 있음을 집요하게 추적한다. 아프가니스탄에선 포로가 된 탈레반 병사들이 컨테이너에 실린 채 무차별 총격을 받아 8천여명 중 3천여명이 사막에 가매장된다(제이미 도란 「아프간 대학살」). 그것을 발굴하는 장면이 화면을 메우면서 스크린 밖으로까지 시체 썩는 냄새가 진동했다. 이라크와의 관계만 보더라도 미국의 빈약한 논리와 양면성이 드러나고 그 속에 민주주의와 인간은 전혀 없음을 보여준다. 그때그때 이익에 따라 후쎄인 정권을 경제적·군사적으로 지원하기도 하고, 반대로 축출하려고 포탄을 퍼붓기도 한다. 미국은 1차 걸프전에서 히로시마 원폭의 7배에 달하는 폭격을 가했고 그 표적은 민간시설까지 포함했다. 또 쿠웨이트·코소보·세르비아·이라크 등에서 미국은 방사능 물질인 우라늄 폐기물로 만든 포탄을 사용해서 수많은 인명을 살상했고 지금도 죽이고 있다. 45억년 동안 잔존하게 되는 이 방사능 물질 때문에 바스라 지역에서는 1차 걸프전 이후 기형아출산이 급증하고, 암사망자가 열배 이상 늘었고 이중엔 태아와 난소암에 걸린 열한살 소녀도 포함되어 있다(제럴드 엉거만, 오드리 브로이 「감춰진 전쟁」). 적수가 되지 않는 이라크를 상대로 한 이 전쟁으로 미국은 원하는 만큼 무기를 소비하고 수출할 수 있었고 중동에 미군기지를 건설하고 석유를 통제할 수 있었다. 명분 없이 똑같은 목적만 있는 전쟁이 더욱 과학적이고 파괴적으로 2003년 또 한차례 수행되었다. 그 배후엔 역시 석유로 대표되는 자본이 있었다.

자본의 논리로 발생하는 인권유린은 비단 전쟁 같은 거대한 폭력으로만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세계 곳곳에, 우리 내부에도 노동문제와 연관되어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 국내 영화들의 촛점은 자본과 분단으로 인해 발생하는 인권유린의 현장에 가 있다.

이주노동자 문제를 다룬 영화들은 이주노동자가 벌써 25만명을 넘어선 우리 사회의 양면성을 보여준다. 「우리는 모두 이주노동자다!」(나두경·만이)는 3D 업종에 종사하면서도 열악한 임금과 비인간적인 대우, 산재와 질병으로 고생하고 ‘단속 추방’의 공포에 떨고 있는 이주노동자들의 투쟁일지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소박한 것이다. 한국의 필요에 의해서 형성된 이주노동자의 존재를 인정하고 노동비자를 발급하라는 것이고, 무엇보다 짐승이 아닌 사람으로 대해달라는 것이다. “우리의 피는 붉다. 한국인들의 피도 붉다. 우리도 사람이다”라고 외치는 이주노동자들의 절규는 낯설지 않다. 인력수출과 인종차별, 처절한 노동운동의 역사를 돌아보건대 우리의 입에서 나왔던 외침이 이제 우리의 귀를 향해 꽂히고 있는 것이다. 영화제 기간에 열린 ‘이주노동자의 날’ 행사엔 영화에 출연한 이주노동자들을 비롯해 각국에서 ‘코리안 드림’을 품고 온 노동자들이 참석해서 그들의 절박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이주노동자의 날’ 행사장면

‘이주노동자의 날’ 행사장면

 

‘올해의 인권영화상’은 김성환 감독의 「김종태의 꿈」이 수상했는데, 십대 때부터 노동자로 일하다가 80년 광주항쟁을 알리기 위해 서울 시내 한복판에서 분신한 김종태 열사의 일대기를 다루고 있다. 이 작품은 사회의 비상식적인 폭력이 감수성 예민하고 명민한 한 젊은이의 삶에 어떤 영향력을 행사하는지 과장된 제스처 없이 잘 묘사하고 있다. 영화의 촛점을 철저히 개인의 사적인 영역에 맞추면서도 70년대의 노동현실과 쿠데타로 인한 역사의 퇴보, 사회의 폭력 씨스템을 탁월하게 드러내고 있다. 이밖에 「필승 Ver. 1.0 주봉희」(태준식)는 2년마다 해고를 유도하는 노동개악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히는 ‘근로자파견법’을 다루었고, 고통스러운 생활 속에도 건강함을 잃지 않는 기지촌 성매매여성들을 그린 「나와 부엉이」(박경태), 가장 기본적인 이동권을 요구하는 장애인들의 투쟁일지인 「버스를 타자」(박종필), 종군위안부의 회환과 고통을 15분의 짧은 영상과 음악에 훌륭하게 담아낸 「침묵의 외침」(안해룡·박영임·김정민우)도 문제의식이 돋보이는 작품들이었다. 특히 「그들만의 월드컵 Ver. 2.0」(최진성)은 거대한 축제에 가려진 미군장갑차 사건이나 일용직 노동자의 집회, 최저임금제 문제 등을 다뤄 인상적이었다. 애국주의와 민족주의를 동일시하는 감독의 이해가 감정적으로 작품에 투영된 것이 아쉬웠지만 젊은 패기와 반항정신이 살아 있는 작품이었다.

인권영화들은 지독하리만치 거짓과 가공을 배제한 극사실주의를 추구하고 있었다. 그래서 영화가 단지 오락이나 지루한 일상의 영역만이 아님을 말하고 있었다. 영화제 내내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이 찢겨진, 셀 수 없는 주검들, 폭력이 당연시되고 동물 이하로 인간이 유린당하는 비이성적인 화면이 난무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사유하는 인간에 대한 불신과 함께, 무엇이 문명이고 야만인지 혼란스러울 정도로 정서적 폐허에 던져졌다. 지상에 존재하는 것들 중 본능을 넘어 동종을 학대하고 대량 학살하는 유일한 종이 인간이라는 사실이 새삼스러웠다. 너무도 현실적이어서 비현실적으로 다가오는 영상은 극장을 나선 뒤에도 사라지지 않았다.

차이와 차별을 구분하지 않고 약자들을 죽음으로 내몰고, 그들을 더럽고 두려운 타자와 차별의 영역으로 간주한다면 세계의 공동묘지는 더욱더 늘어갈 것이다. 자본의 논리로 행사되는 폭력으로 약자와 주변부 인간들은 공동묘지에 가매장되었다. 그것도 시퍼렇게 눈을 뜬 채로. 그러나 그 공동묘지는 성밖에 격리된 것이 아니라 지하철역에, 주택가 한가운데, 도심 한복판에 자리잡고 있다. 시퍼런 눈은 말한다. 나는 살고 싶을 뿐이다, 나를 언제까지 타자로 볼 것인가, 난 이미 당신 안에 있는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