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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어느 포스트모더니즘 작가의 진실게임
P. 오스터 『뉴욕 3부작』, 열린책들 2003
박인찬 朴仁贊
숙명여대 영문학부 교수. chan9320@sookmyung.ac.kr
국내에서도 적지 않은 독자층을 갖고 있는 폴 오스터(Paul Auster)는 대중성과 진지성을 겸비한 당대 미국문단의 대표작가이다. 그의 대표작 『뉴욕 3부작』(The New York Trilogy, 황보석 옮김), 『우연의 음악』(The Music of Chance), 『거대한 괴물』(Leviathan)이 보여주듯이 오스터는 현실에서 흔히 일어날 것 같지 않은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깔끔하고도 유려한 문체로 박진감있게 풀어간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오스터의 소설이 단순히 대중적인 흥미를 채워주는 수준에 머물고 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불확실한 세상에서 작가로서 글을 쓴다는 것, 진실의 탐구, 자아정체성, 우연, 실존과 같은 철학적·도덕적 주제들을 반복해 다룸으로써 독자들에게 삶과 진실에 대한 진지한 성찰의 기회를 제공한다.
80년대 중반에 발표되었던 세 개의 중편 「유리의 도시」(City of Glass) 「유령들」(Ghosts) 「잠겨 있는 방」(The Locked Room)을 한권의 책으로 묶은 『뉴욕 3부작』은 탁월한 이야기꾼으로서의 오스터의 능란함과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실험성이 함께 어우러진 작품으로, 그의 소설 중에서도 가장 우수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세 편의 개별적인 이야기로 작품이 이루어져 있지만, 각각의 이야기는 마주보고 있는 거울처럼 연결되어 있어서 하나의 장편으로도 읽힐 만하다. 무엇보다도 세 편의 이야기에는 작가로서의 탐정, 혹은 탐정으로서의 작가가 공통적으로 등장하여 누군가를 그림자처럼 쫓는다. 추리소설 작가 퀸과 스틸먼 박사(「유리의 도시」), 사설탐정 블루와 블랙(「유령들」), 그리고 앞의 두 중편을 쓴 작가라고 스스로를 밝히는 일인칭 화자와 팬쇼(「잠겨 있는 방」), 이들의 쫓고 쫓기는 탐정 이야기는 3부작 전체의 기본골격이 된다. 게다가 같은 이름의 인물들이 세 편에 반복해서 등장하여 각각의 이야기가 같은 사건을 조금씩 다르게 되풀이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오스터가 탐정소설의 형식을 이와 같이 반복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탐정의 전통적인 역할과 그것의 바탕이 되는 합리주의적 인식론의 입장을 재고하기 위해서다. 명탐정 셜록 홈즈가 그러하듯이, 탐정은 아무리 복잡한 사건이 주어지더라도 논리적 분석과 종합적 사고를 바탕으로 단서들을 하나하나 조합하여 진실을 규명해낸다. 그 어떤 사건도 탐정 주체의 합리적 이성과 인과론적 사고로부터 빠져나갈 수 없다. 이 점은 삶에서 객관적이며 총체적인 진실을 찾으려는 전통적인 작가의 노력과도 일치한다. 오스터의 주인공들도 비슷한 맥락에서 작가와 탐정을 동일시한다. 퀸의 말처럼 그들은 작가와 탐정이 “사물과 사건들의 늪을 헤치며 그 모든 것을 하나로 통합해 의미가 통하게 해줄 생각과 관념을 찾는 사람”이란 점에서 “서로 바뀔 수 있는 존재”라고 믿는가 하면, 사설탐정을 가리키는 영어 단어 ‘private eye’에서 ‘eye’는 “작가의 육체적인 눈, 자신의 내면으로부터 세상을 내다보고 그 세상이 모습을 드러내도록 요구하는 눈이기도” 하다고 생각한다(17면).
그렇다면 과연 오스터의 주인공들은 진실에 이르는 열쇠를 찾을 수 있을까? 무엇이 진실이며, 그 해답은 과연 존재하는 것인가? 이것은 오스터가 탐정 이야기를 소재로 모종의 진실게임을 펼치면서 던지는 물음이다. 사건은 갑작스런 우연이나 예기치 않은 일로 인해 꿈결처럼 시작된다. 잘못 걸려온 전화, 정체 모를 누군가의 부탁, 혹은 잊고 지내던 옛친구의 실종을 접하고서 일에 뛰어든 주인공들은 자기가 맡은 사건이 실제인지 허구인지 자주 혼란스러워한다. 잘 풀릴 듯한 사건도 예상을 뒤엎는 반전과 결말로 그들을 좌절시킨다. 가령 스틸먼 박사의 행적 속에 논리적인 해답이 반드시 있을 것으로 확신하던 퀸은 박사가 자살해버리자 깊은 체념에 빠진다. 맞은편 아파트의 블랙을 그림자처럼 감시하던 블루는 블랙이 오히려 자신을 감시해왔다는 사실을 알고 혼란과 분노에 휩싸인다. 그리고 「잠겨 있는 방」에서 팬쇼는 화자에게 도저히 이해하지 못할 메모가 적힌 공책 한권만을 남긴 채 영원히 종적을 감춘다. 결국 게임의 끝에 가서는 낙심한 주인공들만이 홀로 서 있을 뿐, 진실은 잠겨 있는 방처럼 불가해하고 불명확한 것으로 남는다.
탐정으로서의 진실찾기가 좌절로 끝이 난다면, 사건을 조사하면서 끊임없이 기록을 하는 주인공들의 작가로서의 진실찾기도 상황은 거의 비슷하다. 탐정이 단서들을 모아 사건을 풀어가듯 언어의 조합으로 진실에 다가가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적고 있는 이야기가 진실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언어의 불확실함에 고통을 느낀다. 게다가 언어와 그것이 나타내려는 대상 사이의 괴리감이 그들을 계속해서 괴롭힌다. 그들과 “세상 사이에 있는 커다란 창문처럼 투명”(226면)하다고 믿었던 언어는 더이상 “세상의 실재를 증명”(229면)해주지 못하고, 그에 따라 현실은 사물 없는 이름들과 이름 없는 사물들의 뒤죽박죽으로 다가온다. 진실을 언어로 접근하고 이해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오스터는 탐정이자 작가인 주인공들을 통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우연과 모순, 언어와 세계의 불일치, 그리고 언어와 진실의 불확실성, 오스터의 진실게임이 전하고자 하는 이러한 내용은 기존의 포스트모더니즘 소설이나 이론을 떠올리면 그다지 새로울 게 없어 보인다. 도전적인 실험정신으로 출발한 5,60년대 포스트모더니즘 소설의 문제의식이 포스트모더니즘 이론과 서서히 융합하면서 80년대에 이르러서는 다분히 상투적인 것으로 정형화된 게 아닌가 하는 인상을 오스터의 『뉴욕 3부작』에서 갖게 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탐정소설의 형식을 작품 속으로 끌어들여 고급문학과 대중문학의 간극을 메우려고 한 것도 기존의 포스트모더니즘 소설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스터의 소설에서 나름대로 경청할 만한 메씨지가 없는 것은 아니다.“우연말고는 정말인 것이 아무것도 없다”(9면)는 퀸의 깨달음처럼, 오스터가 바라보는 세상은 근본적으로 임의적이고 우연적이어서 어떠한 인간의 선택도 그런 세상의 그물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여기서 오스터가 강조하는 것은 우연 속에서 맺어진 자아와 타인, 주체와 타자의 관계이다. 흥미롭게도 오스터의 주인공들은 누군가를 쫓으면서 그 타인이라는 거울에 자신을 비추게 되고, 그럼으로써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본다. 타인을 미행하면서 자신을 미행하는 셈이다. 이러한 자기이해의 여정은 타인을 통해 자아가 정의되는 자아정체성의 윤리적 단계로까지 발전한다. 팬쇼의 부인 ‘소피’를 사랑하게 된 「잠겨 있는 방」의 주인공이 “소피와 관계를 맺음으로써 마치 다른 모든 사람들과도 관계를 맺은 것 같은 기분을 느끼기 시작”(357면)하듯이, 자아는 타인과의 관계에서 새롭게 태어난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서 내가 진실로 있어야 할 곳은 나 자신이 아닌 다른 어느 곳이었으며, (…) 그곳은 자아와 비자아 사이에 있는 작은 틈이었고, (…) 그 어디인지 모르는 곳이 바로 이 세상의 정확한 중심”(같은 곳)이기 때문이다.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 그들이 깨달은 자아의 윤리이듯이, 오스터의 주인공들은 불확실한 세상에서도 진실을 좇아 행동하기를 결코 멈추지 않는다. 그들은 언어의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계속해서 이야기하며, 바라던 결과를 달성할 수 있을지 자신없어하면서도 계속해서 밀고 나간다. 그리고 부분적이고 불확실할 수밖에 없다는 걸 알면서도 진실에 대한 깨달음에 이르려고 부단히 노력한다. 이것이 바로 오스터의 진실게임이 제안하는, 포스트모던한 세상 속에서 견디며 그에 맞서 분투하는 실존의 방법이요, 그가 산문집 『굶기의 예술』(The Art of Hunger)에서 역설한 “굶기의 예술” 즉 “필요의, 필요성의, 갈망의 예술” “옳은 대답이라곤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고서 시작하는 예술, 그 이유 때문에 옳은 질문들을 하는 것이 필수적인” 예술의 핵심이다. 절대적이며 확실한 해답이 없더라도 묻고 찾기를 멈추지 말라는 것이다. 어찌 보면 너무나도 당연하여 궁색하기까지 한 오스터의 제안이 오히려 절실하게 들린다면 지나친 말일까. 진실찾기의 여정에서 굶기를 마다지 않는 독자들에게 오스터의 소설이 좋은 벗이 되기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