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평
‘일본’을 전제로 하지 않는 일본사
아미노 요시히꼬 『일본이란 무엇인가』, 창작과비평사 2003
이연숙 李姸淑
일본 히도쯔바시(一橋)대학 언어사회연구과 교수. ys.lee@srv.cc.hit-u.ac.jp
아미노 요시히꼬(網野善彦)는 일본사 연구를 리드하는 거물 역사가의 한 사람이다. 지금까지의 일본사 연구의 흐름을 간략히 요약한다면, 전전(戰前)은 ‘황국사관(皇國史觀)’에 기반을 둔 국수주의 역사학이었고, 전후(戰後)에는 맑스주의적 유물사관의 영향을 받은 ‘전후 역사학’이었다고 할 수 있다. 전후 역사학의 특징은 역사의 근본적인 동인(動因)을 사회경제학적 카테고리에서 찾았으며, 일본사의 각 단계의 사회계급구조 분석을 그 주요한 테마로 삼아왔다. 이같은 연구의 흐름에 대해, 1980년대 무렵부터 계급구조의 분석만으로는 민중의 구체적인 생활모습과 의식 등을 파악할 수 없다는 반성이 일기 시작했다. 이런 반성의 결과가 민속학과 인류학 등의 성과를 받아들인 사회사인데, 그 대표적인 연구자가 아미노 요시히꼬이다. 이런 입장에서 아미노는 『일본사회의 역사』 『일본 중세의 민중사』 『이형(異形)의 왕권』 등 매우 뛰어난 저작들을 발표했다. 원래 아미노의 전공분야는 카마꾸라(鎌倉) 시대, 무로마찌(室町) 시대를 중심으로 하는 일본 중세사였다. 그러나 그는 근년에 들어 일본사의 전체상을 다시 쓰려고 하는 대단히 의욕적인 작업을 시도하고 있다.
아미노는 전전의 일본사 연구뿐만 아니라 맑스주의의 영향을 받은 전후 역사학에 대해서도 매우 비판적이다. 그는 전후 역사학이 천황제 이데올로기의 비판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동질적인 일본의 존재를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고 비판한다. 즉 전후 역사학은 국민국가의 기반이 되는 국민을 초역사적인 존재로 전제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에서 아미노는 ‘국민사’로서의 일본사를 철저하게 해부하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 책(박훈 옮김)의 제목인 “‘일본’이란 무엇인가”(‘日本’とは何か) 하는 물음은 지금까지 무수히 많이 쏟아졌던 ‘일본론’이 던진 물음이기도 하다. 그러나 기존의 일본론은 미리 ‘일본’이라는 대상을 설정한 후에, 그 일본의 구성요소 및 특징을 밝히려고 하는 절차를 밟아왔다. 아미노의 시점이 획기적인 것은, 이처럼 자명한 전제로서의 ‘일본’ 개념 그 자체를 문제시한다는 점에 있다. 그리하여 그는 독자들에게 묻는다. 당신네들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일본’이란 도대체 무엇이냐고.
이 책에서는 지금까지 자명한 것으로 여겨졌던 많은 개념 및 틀을 철저히 검증해, 그것들이 얼마나 역사의 실상을 왜곡해왔는지를 지적한다. 예를 들면, 일본에서 ‘햐꾸쇼오(百姓)’ 하면 곧 ‘농민’을 가리키는데, 이는 에도(江戶) 시대까지 일본사회의 대부분은 자급자족의 정주농민이 차지한다는 완고한 생각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러나 아미노는 어업 및 임업의 중요성과, 바다나 강을 이용한 광범위한 교역 및 유통의 존재를 지적하면서, 이같은 농촌중심주의적인 파악은 실상과 많이 유리된 것이라고 말한다. 또 그에 의하면,‘햐꾸쇼오(百姓)=농민’이라는 도식은, 민중을 정주농민으로 지배하고자 했던 국가의 지배의지에 기반을 둔 것이라고 한다.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일본’은 민족명도 아니고 지명도 아닌 국호(國號)라는 지적이다. 즉 ‘일본’이란 공간은 국가 이전의 자연적인 지리공간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일본국의 지배하에 편입된 영토의 총칭이라는 것이다. 또 ‘일본인’이란 어떤 문화적·사회적 특징에 의해 형성된 민족이 아니라,‘일본’이라는 국가에 등록된 인간집단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이것은 실로 대담한 주장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예를 들어 아메리카 합중국이나 구 쏘비에뜨 연방을 생각해보자. 과연 ‘아메리카 민족’이라든가 ‘쏘비에뜨 민족’ 같은 것이 존재하겠는가? 이에 대한 답은 명확하게 ‘아니다’이다. 그와 같은 민족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아메리카인’이나 ‘쏘비에뜨인’이라는 집단은, 아메리카 합중국이나 쏘비에뜨 연방의 국적 혹은 시민권을 가진 사람들의 총칭이지, 그 집단이 어떤 민족을 형성하고 있다는 의미로는 결코 될 수 없다. 아메리카 합중국이라면 ‘아메리카인’안에 다양한 여러 ‘에스닉 그룹’(ethnic group)이 존재하며, 쏘비에트 연방이라면 러시아인, 우끄라이나인, 까자흐인, 몽고인 등등 여러 민족집단이 존재하고 있다. 국가 이름에 특정의 민족명을 붙이지 않는 국가에서는, 국적으로서 ‘~인(人)’이라는 것과 어떤 민족에 속한다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이다. 예컨대 ‘중국인’은 ‘국민’이며 ‘한족(漢族)’은 ‘민족’을 가리킨다. 이처럼 ‘국민’과 ‘민족’은 전혀 다른 카테고리에 속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쉽게 유추할 수 있듯이, 만약 ‘일본’이 국호이지 민족명이 아니라면 ‘일본 민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일본인’이란,‘일본’이라는 국가가 영토를 확장해나감에 따라 국가 제도에 편입된 사람들의 총칭에 지나지 않게 된다. 즉 ‘일본인’이란 단일한 사회적·문화적 본질을 갖는 실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단일한 ‘일본문화’ ‘일본사회’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단일한 ‘일본인’ ‘일본사회’가 존재하는 것처럼 생각되는 것은, 피지배집단을 단일화·동질화하려고 한 ‘일본 국가’의 강렬한 지배의지가 그같은 인식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단일한 ‘일본인’ ‘일본사회’를 암묵의 전제로 하는 것은, 그같은 ‘일본 국가’의 지배의지를 추인(追認)하는 것이 되고 만다.
아미노에 의하면 ‘일본’이라는 국호는 7세기말에 정해졌다고 한다. 따라서 “‘일본’은 이때 비로소 지구상에 출현했으며 그 이전에는 일본도 일본인도 존재하지 않았다”(20면)고 한다. 더욱이 그때는 동북 지방과 큐우슈우(九州) 남부는 일본이 아니었다. 현재의 칸사이(關西) 지방에 거점을 둔 ‘일본’의 지배자들은 각 지방에 살고 있는 선주민을 정복해 영토를 확장해갔던 것이다. 그 지배의지 또한 참으로 ‘제국주의적’이었다. 그래서 저자는 “‘일본국’은 그 출발점부터 (…) ‘제국주의’적이고, 침략적인 성격을 갖고 있었다”(113면)고 말한다. 그리고 이와 같은 제국주의적인 자세는 “메이지 이후의 국가인 ‘대일본제국’의 모습으로 전면적으로 부활했고,그것이 대실패로 끝난 패전 후의 ‘일본국’에도 여전히 잠재적으로 살아 있다”(115면)고 한다. 또 “그것은 ‘일본’이라는 국호의 의미,‘천황’이라는 칭호의 역사가 사실에 기반하여 백일하에 드러날 때까지는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같은 곳)이라고 역설한다.
아미노는 자신의 연구목적을,‘일본’의 1300년 역사를 “철저하게 총괄하여 그 실태를 백일하에 드러내기 위한”(27면)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일본’이라는 국호는 ‘천황’이라는 칭호와 거의 동시에 나타났다. 이러한 의미에서, ‘일본’의 동일성은 ‘천황’에 의해 지탱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역사를 초월해 ‘일본’이 마치 태곳적부터 존재한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천황제 이데올로기의 최대 효과인 것이다. 이것은 현재의 상징천황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일장기’를 국기로 하고 ‘키미가요(君が代)’를 국가로 하는 ‘국기국가제정법(國旗國歌制定法)’이 정해진 것은 1999년의 일이다. 아미노는 “패전 전의 ‘망령’들이 그 모습을 바꾸어 우리들 앞에 분명히 드러난 바로 지금이야말로 이 총괄 작업을 개시할 최적의 싯점”(같은 곳)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국가란 인간이 어떤 정치적 의지에 의해 만들어낸 인공물이다. 인간이 만든 모든 것은 또한 인간의 손으로 다르게 바꿔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본서에서 아미노는 자주 일본이 “시작과 끝이 있는 역사적 존재”(363면)임을 강조한다. 7세기말에 ‘일본’은 성립되었다. 그렇다면 ‘일본’은 언제 끝나는 것일까? 아미노의 저서는 이 경악해 마지않을 물음조차 피하지 않고 던진다. 사실 본서의 끝부분에서 아미노는 “‘일본’이라는 국호의 타당성 여부, ‘천황’ 자체의 존폐까지도 충분히 시야에 넣고 용기를 가지고 착실하게 전진할 수 있다면”(382면) ‘일본론’의 전망은 넓게 펼쳐질 것이라고 역설한다. 우리들은 아미노의 저서에서 ‘국민사’를 해체하기 위한 ‘용기’를 배울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