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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유목적 텍스트로서의 열하일기
고미숙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그린비 2003
김영 金泳
인하대 교수. kimyoung@inha.ac.kr
요즘 좀 뜨기도 하고 튀기도 하는 자칭 고전평론가 고미숙(高美淑)이 『열하일기』에 대한 유쾌한 해석서를 내놓았다. 그동안 『열하일기』가 “얼마나 소설적 문법에 맞는지 혹은 시대적 모순을 얼마나 ‘리얼하게’ 반영하는지를” 따진, “노쇠하고 피로한 사유”(316면)를 해온 기존의 국문학자들에게 이 책은 분명 당혹감과 충격을 줄 것이다. 왜냐하면 이 책은 기존의 연구서와 다른 독특한 문법과 해체적 글쓰기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찌하랴, 이 책의 저자 고미숙과 함께 <수유연구실+연구공간 ‘너머’>라는 학문적 꼬뮌을 꾸리는 동지 이진경이 『노마디즘』 2(휴머니스트 2002)에서 말한 대로, 차이를 받아들이는 것이 행복하게 사는 길인 것을.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은 우리 문학사의 고전 중의 고전인 『열하일기』를 노마디즘(nomadism, 유목주의)적 시각에서 새롭게 읽어내고 있다. 책의 디자인과 저자 소개부터, 목차와 구성, 글쓰는 방식이 모두가 낯설고 새롭다.
우리가 실학파 문인의 거장으로 존숭해 마지않던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을 유목주의의 관점에서 “무리 가운데 홀로 떨어진 외로운 늑대”(151면)로 비유하고, 『열하일기』를 “이질적인 사유들이 충돌하는 장쾌한 편력이자 대장정”(22면)이자 “언더그라운드에서 웅성거리던 마이너들의 목소리”(39면)를 담아낸 교향악으로 이해하는 시각은 신선함을 넘어 도발적이기까지 하다. 그런데 이러한 시각과 해석은 노마디즘적 관점에서 선 정연한 논리와 동서고금을 넘나드는 변증을 통해 설득력을 더해주고 있다. 물론 연암을 해학의 천재로 이해하거나, 『열하일기』를 단순한 여행기가 아니라 박물학적인 문명비평서이자 온갖 문학장르를 아우르는 걸작으로 이해하려는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열하일기』에서 근대적 사실주의 문인으로서의 위대함을 확인해내고, 거기 담긴 이용후생(利用厚生)의 사회사상을 파악하려는 기존의 연구자가 간과했던 연암의 인간적인 면모나 『열하일기』의 숨겨진 내면들이 이 책의 저자에 의해 전면적으로 재조명되고 있다. 그리하여 『열하일기』를 이 책의 제목 그대로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으로 풀어놓고 있다.
연암은 원래 해학을 좋아했지만 먼 여행길에서 그의 이러한 기질은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열하일기』 가운데 호기심 많은 연암의 인간적 면모를 보여주는 일화를 하나 보자.
“사행들이 더불어 투전을 벌였는데, 소일도 할 겸 술값은 벌자는 심산에서다. 그들은 나더러 투전에 솜씨가 서툴다고 한몫 넣지 않고, 그저 가만히 앉아서 술만 마시라고 한다. 속담에 이른바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라는 셈이니, 슬며시 분하긴 하나 역시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혼자 옆에 앉아서 지고 이기는 구경이나 하고 술은 남보다 먼저 먹게 되었으니, 미상불 해롭잖은 일이다. 벽을 사이에 두고 가끔 여인의 말소리가 들여온다. 하도 가냘픈 목청과 아리따운 하소연이어서 마치 제비와 꾀꼬리가 우짖는 소리인 듯싶다. 나는 마음속으로 ‘이는 아마 주인집 아가씨겠지. 반드시 절세의 가인이리라’ 생각하고 일부러 담뱃불 댕기기를 핑계삼아 부엌에 들어가 보니 나이 쉰도 넘어 보이는 부인이 문쪽에 평상을 의지하고 앉았는데, 그 생김생김이 매우 사납고 누추하다.”(「도강록」)
이 책의 저자는 이렇게 『열하일기』에 자주 보이는 해학을 중세적 엄숙주의를 전복하면서 자유롭게 옮겨다니는 유목적 특이점이자 우발점의 기법으로 해석한다. 연행(燕行)의 도중에 다른 사대부들도 많은 트러블을 경험했을 터이지만, 그들의 언표체계에서는 이런 삽화가 들어설 자리가 없었다. 그런데 연암의 『열하일기』에는 이런 ‘해프닝과 개그’가 어엿하게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 저자에 의하면 이러한 연암의 “유쾌한 유머 행각(?)들은 어떤 대상과도 접속할 수 있는 유목적 능력, 혹은 자신을 언제든 비울 수 있는 ‘무심한 능동성’의 소산에 다름 아니다”(266~67면)는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이 단지 『열하일기』가 지닌 해학과 그 의미만을 해명하고 있지는 않다. 저자는 날카로운 문예적 감식안으로 연암이 즐겨 사용한 은유가 무엇과 무엇 사이의 변주를 일으키는 ‘사이의 수사학’(311면)이며, 열하일기에 실린 「호질(虎叱)」에서 호랑이가 북곽선생과 동리자의 위선을 풍자할 수 있었던 배면에는 ‘에콜로지컬(ecological)한 비전’(346면)이 깔려 있다는 점을 간취해내기도 하다.
이와 같이 『열하일기』를 새로운 것을 추구하던 노마드적 여정의 산물로 파악한 저자 고미숙의 해석은 독특한 해석과 새로운 글쓰기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 책의 튀는 해석은 읽는 재미를 주기도 하지만, 너무 자의적 해석이 아닌가라는 의구심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연암을 “무리 가운데 홀로 떨어진 외로운 늑대”로 이해하는 점이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주지하다시피 연암의 사상과 문학의 형성에는 연행의 체험과 함께 홍대용·박제가·이덕무를 비롯한 소위 ‘연암그룹’이라는 지적 공동체 영향이 컸으며, 연암이 연행을 해야겠다는 결심을 한 것도 연암보다 2년 먼저(1778년) 중국에 다녀온 박제가와 이덕무의 권유와 자극에 의한 것이었다.이런 점을 감안하면 연암을 ‘외롭다’고 한 것은 적절하다고 하기 어렵고, 더구나 ‘늑대’라는 표현은 연암의 이미지와 맞지 않는다고 할 것이다.
그리고 원전 읽기와 해석의 문제점에 대해서도 한마디하고자 한다. 저자는 『열하일기』의 텍스트로 민족문화추진위원회 번역본을 사용하면서 나름대로 새롭게 해석하였다고 하였는데, 어색한 번역이 산견된다. 예컨대 “사람들이 촛불을 켤 필요가 없다”는 의미의 ‘불수인간비고촉(不須人間費膏燭)’에 대해 “인간의 촛불이란 켤 것이 무엇 있나”(148면)로 해석하고 있는 대목이 그렇다. 고전에 대한 새로운 해석도 원전에 대한 엄밀한 독해 위에서 이루어질 필요가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열하일기』를 현대적 감각으로 솜씨있게 ‘리라이팅’한 저자의 새로운 감각과 지적 질주를 의미있는 작업으로 평가하면서, 앞으로 고전을 더욱 폭넓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저자가 ‘새롭고 튀는’ 해석에만 집착하지 말고, 그 시대의 문맥과 축적된 연구성과에도 좀더 깊은 관심을 가져달라는 주문을 덧붙이고 싶다. 옛것을 본받다보면 거기 얽매이기 쉽고, 새로운 것을 추구하다보면 전통에서 얻을 수 있는 지혜를 놓치기 쉽다는 연암의 가르침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고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