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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민영 閔暎
1934년 강원도 철원 출생. 1959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斷章』 『용인 지나는 길에』 『냉이를 캐며』 『엉겅퀴꽃』 『바람 부는 날』 『流沙를 바라보며』 등이 있음.
칸다하르 편지
편지가 오지 않는다.
나는 벌써 한달 가까이
오지 않는 편지를 기다리며
마을 밖 길을 내다보고 있는데,
지쳐서 쓰러진 걸까
자전거 바퀴가 망가진 걸까
오기로 되어 있는 우체부 아저씨는
해가 기운 뒤에도 오지 않았다.
텔레비전에서는 날마다
세계 제일의 고층건물이 속 빈
컨테이너 박스처럼
무너져내리는 그림이 방영되고
군함에서 쏘아올린 미사일이
모래와 바위뿐인 도시를 막가파 식으로
폭격하는 광경을 보여주고 있는데,
왜 죽어야 하는지
왜 살아야 하는지도 모르는
아이들의 새까만 눈동자가
겁에 질려 파랗게 떨고 있었다.
사실, 오기로 되어 있는 그 편지는
내 오래된 아랍인 친구로부터다.
사막의 여우같이 동굴 속에 숨어서
아랍의 대의와 이슬람의 정의를
지키기 위해서 싸우는 다부진 전사.
허나 칸다하르 소인이 찍힌
그 편지는 라마단의 달이
떠오르고 있는데도 오지 않았다.
그 편지를 받았더라도 나는
슬퍼하거나 허둥대지 않을 것이다.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고
두 세기를 넘나들며 재미나게 살았으니까
조금도 서운해할 일이 아니다.
내 낡은 구두는 오대양 육대주의
번화한 도시와 어두운 뒷골목
깊은 강, 항구, 아무것도 없는 텅 빈 벌판
잡목들이 우거진 신들의 무덤과
눈 덮인 장엄한 산을 넘어서
누우 떼를 쫓는 맹수처럼 달려왔으니,
살에 닿기만 해도 소리없이 죽는다는
하얀 가루가 편지 속에 숨어서
목숨을 노린다 해도 나는 결코
피하거나 도망치지 않을 것이다.
죽음은 비극적일수록 멋지다고 하지 않던가?
그럼에도 사람들은 왜 그렇게
호들갑을 떠는지 모르겠다.
사막에 핀 어린 꽃들이
누려야 할 생명의 환희조차 누리지
못하고 흙먼지 속에 파묻히고 있건만
늘어진 뱃가죽 주체하지 못하고
뒤뚱뒤뚱 오리걸음 가쁜 숨 몰아쉬며
늙음을 아쉬워하고 있다니!
그렇다, 유구한 길을 걸어온 자와
이제부터 그 길을 가야 할 자의
값은 다르다.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는 자의 편지를 기다리며 부디
그의 남은 생이 누추하지 않기를 빈다.
뜻대로 되는 일은 아닐 테지만……
우체부 양반,
내일은 아침 일찍이
그 편지 전해주시오, 잉!
가을 산
빨갛게 익은
옻나무 잎이
중국 비단보다 화려하다.
박새 한 마리
솔방울에 매달려
솔씨를 쪼아먹고,
어디선가
풀숲에 숨은 찌르레기가
찌르찌르 찌르륵
가을은 울고 있다.
불꽃놀이
누구든
불꽃같이 살기를 바라지 않으랴.
펑! 하고 터져서
하늘 높이 솟아올라
피었다가 소멸되는 전사의 몸
만다라화 꽃잎.
누구에게나 그런 생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 알면서도
그렇게 살기를 원하지 않으랴
노추한 목숨 화산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