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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조 명 趙 明
1955년 충남 유성 출생. 2003년 『시평』으로 등단. cps0225@hanmail.net
파도의 진화론
너의 정수리에서는 해당화가 피어날 것이며
신생의 박동새는 수평선 너머를 노래할 것이다
절벽아!
나는 진화하기 싫어하는 너의 두개골을 때린다
썰물로 억년을 생각하고 밀물로 억년을 달려와
온몸 던져 깨지면서
옳은 진화를 위한 경전을 새기기 위함이다
정지된 살점은 파내고 살아 있는 뼛골은 돋운다
화강암가슴팍과 흑요암두개골을 1밀리미터 파는데
억겁의 생이 돌아간다 할지라도
어제 같은 오늘은 죽은 내일이다
너의 척추에 산채만한 상실의 구멍이 뚫린다면
연인을 태운 배가 노을을 밀며 들어설 것이다
우리별의 몸뚱이가 통째로 타오르던 날 있었다
우리별의 정신이 칠흑어둠의 냉기로 식어가던 날 있었다
우리들의 별이 마지막 입김을 하늘로 토하던 날
하늘에서는 새로운 물질의 비를 내렸다
그때, 깊은 상처의 골짜기에 바다가 있었다
누가, 스스로 새로워지는 생명을 잉태하고 낳아서 길렀겠느냐
출렁이는 생명의 품에서 몸을 일으켜
타오르는 백색 갈기를 세우고 돌진하는 나의 포효는
바다의 사자후가 아니겠느냐
절벽아!
진화에서 밀려난 너의 두개골 가루를 박차면서
아이들은 눈부신 날갯죽지를 펴고 해변을 날아오를 것이며
어른들은
발바닥 밑으로 무너져내리는 모래의 소리를 들을 것이다.
모계의 꿈
할머니는 털실로 숲을 짜고 계신다. 지난밤 호랑이 꿈을 꾸신 것이다. 순모사 실뭉치는 아주 느리게 풀리고 있다. 한올의 내력이 손금의 골짜기와 혈관의 등성이를 넘나들며 울창해진다. 굵은 대바늘로 느슨하게, 숲에 깃들 모든 것들을 섬기면서. 함박눈이 초침소리를 덮는 한밤, 나는 금황색 양수 속에서 은발의 할머니를 받아먹는다. 고적한 사원의 파릇한 이끼 냄새! 저 숲을 입고 싶다. 오늘밤에는 어머니 꿈속으로 들어가 한마리 나비로 현몽할까? 어머니는 오월 화원이거나 사월 들판으로 강보를 만드실지도 모른다. 그러면, 이백여섯 개의 뼈가 뒤틀린다는 진통의 터널을, 나는 통과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