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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변화하는 시민사회와 새로운 민중운동

 

대담: 시민운동과 민중운동, 이대로 좋은가

 

 

125-106

한기욱

문학평론가, 인제대 영문과 교수, 본지 편집위원 englhkwn@inje.ac.kr

하승창

함께하는시민행동 사무처장 chang@mail.ww.or.kr

 

 

때: 2004년 7월 23일

곳: 창비사 회의실

 

 

한기욱 하승창 선생도 참여한 지난호 창비 좌담에선 4·15총선 이후 기로에 선 시민운동의 새 가능성을 찾는 것에 대한 논의가 적어 아쉬웠습니다. 하선생은 지난호 좌담 이후 시민운동에 관해 진전된 생각을 여기저기서 피력해왔는데, 가령 『기억과전망』 여름호, ‘함께하는시민행동’의 게시판(http://epi.ww.or.kr/chang?cmd=txtlist&item_id=&start_id=4037&end_id=3450&page=),RTV의 인기 프로그램 ‘하승창의 아름다운 세상’을 찾아보면 이런 견해를 접할 수 있습니다. 마침 창비의 이번 특집이 ‘변화하는 시민사회와 새로운 민중운동’이라서, 시민운동이 현재 ‘변화의 여울목’에 서 있다고 판단하시는 하선생을 모시고 시민운동과 민중운동이라는 지금의 시민사회운동 구분법을 재검토하면서 시민사회운동의 새 가능성을 좀더 구체적으로 따져보려 합니다. 향후 시민운동이 민중운동과 어떤 관계를 만들어가야 하고 거기에서 어떤 새로운 가능성이 열릴 수 있겠는가에 촛점을 맞추되, 구체적으로 두 운동의 접점을 빈곤문제와 반전평화운동 중심으로 검토했으면 합니다. 지난호 좌담에서도 시민운동과 민중운동이 자기혁신을 통해 새로운 관계를 열어갈 필요가 있다는 것에 참석자들이 대체로 동의했는데, 어떤 발상과 전망, 어떤 가치지향을 갖고 이 과제에 임해야 할까요? 지금은 4월총선을 지나 행정수도 이전과 이라크파병 문제로 전국이 격동하고 있는데, 이 싯점에서 향후 시민운동의 변화방향은 어떠해야 하고, 주요과제는 어떠한 것이 있는지 말씀해주시죠.

 

 

그동안의 시민운동과 민중운동 관계

 

韓基煜 ‘시민’ ‘민중’범주에 대해 발상을 전환하자는 것은 그 대립적인 이분법을 양자 모두가 지니는‘노동자성’을 통해 넘어서자는 말입니다.

하승창 경실련이나 참여연대 같은 큰 단체를 통해서 90년대 시민운동을 보는 경우가 많고 대체로 그 단체를 시민운동의 전부처럼 느끼는 것 같아요. 시민운동 주체도 그 프리즘에 갇혀 있는 경우가 많다고 생각해요. 특정단체 중심으로 생각하면 90년대 시민운동은 대변형(代辯型) 운동 중심이었고, 그것의 정치적·사회적 영향력은 2000년 ‘총선연대’에서 거의 정점에 달했지요. 그 영향력으로 형성된 전선 앞에는 경실련·참여연대·환경연합·녹색연합 등의 주요단체들이 있었고 전선 뒤의 넓어진 공간에서는 여러 시민운동이 성장할 수 있었죠.90년대 시민운동의 성장은 이들 큰 단체의 노력에 힘입은 바 컸고 그 단체들의 운동이 전부처럼 느껴졌기 때문에 공과(功過) 모두가 큰 단체들에게 돌아갔죠. 그 때문에 최근 들어 그 단체들에 대한 비판이 마치 시민운동 전체에 대한 비판처럼 되고 있는 거죠. 그들이 전선을 일정하게 담당해줘 그 안에서 시민운동이 성장하고 다양화됐지만, 그것 때문에 지금은 거꾸로 시민운동 전체가 비판을 받고 있는 상황인 것 같아요. 실제로 어디를 가나 그 시민단체 외에는 이름도 안 나오고 언론에서도 그 단체를 중심으로 다루고, 사람들의 인식도 그래요. 그러나 이제는 그 프리즘이 걷혀갈 거라고 봅니다. 민주노동당의 원내진출이라는 변화에 따라 대변형 운동의 변화가 예상되는데, 이슈·가치지향·운동방식 등 여러 측면에서 다른 양상을 보여줄 것 같아요.

한기욱 그런 양상에서 소위 민중운동과의 관계가 좀 달라진 것은 없습니까?

하승창 아직은 없는 것 같아요. 지금까지는 사안별 연대가 중심인 것 같고요.

한기욱 그간 두 운동의 관계가 좀 소원했다고 볼 수 있죠. 양자의 협력이나 연대가 활발하지 않은 원인이나 걸림돌은 무엇이라 보십니까?

하승창 90년대 초는 경실련이 시민운동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 그 출범배경에는 민중운동에 대한 비판도 있었죠. 그 점이 우선 양자가 소원해졌다고 보는 이유 중의 하나가 될 수 있죠. 물론 나중에 참여연대가 등장하면서는 관계가 나아졌죠.참여연대 출범 후 사안별로는 아주 폭넓게 연대하기도 했는데 우루과이라운드에 대항한 ‘우리쌀지키기 범국민대책위’나 노동법개정투쟁이 그런 경우예요.

河勝彰 지금부터 시민운동은 거대담론 논의가 오히려 필요한데, 세계와 공동체에 대한 자각을 전제해야만 ‘시민’ ‘민중’ 개념을 넘어설 수 있습니다.

한기욱 중요한 사안들에서 힘을 합쳤다가 다시 소원해진 것은, 시민운동이나 민중운동의 그간의 사정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잘 이해가 안되는 점인데요. 연대가 지속되지 않은 데는 두 운동간의 가치지향이나 체질이 다르다든지 조직작풍에서 현장활동가 사이에 거리감이 느껴졌던 것이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 같은데요.

하승창 제가 경실련에 있을 때는 거리감도 있었던 것 같아요.(웃음) 민중운동 방식이 90년대 초만 해도 여전히 물리력에 기초한 투쟁방식이어서 87년 이후 민주화의 진전으로 합법적 운동을 하려던 경실련 입장에서는 민중운동 진영에 비판적일 수밖에 없었죠. 민중운동 진영에서 볼 때도 그런 경실련이 달갑지 않은 것이었고요.그런 데서 거리감이 생겨났다고 봐야겠죠. 민중운동 내에는 여러 성향이 있고 정치적으로 발전한 경우로 민주노동당이 있지만, 그동안 진보정당 추진위도 있었고 정치권력에 대한 뚜렷한 프로그램을 가진 흐름들도 있었죠. 그 흐름들은 선거를 할 때 정당을 만드는 등 정치권력에 대한 뚜렷한 지향점을 보였죠. 그런데 경실련이나 참여연대를 비롯한 시민운동은 전혀 그런 것이 없었어요. 그런 점에서 같은 위상에서 뭔가 전면적인 연대를 위한 조건이 맞지 않았어요. 말하자면 운동의 지향이나 목표, 방식 등에서 차이가 있었던 거죠.

한기욱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중반까지는 그러리라고 짐작되는데, 사회가 어느정도 민주화되면서는 노동운동 진영이 예전의 80년대 투쟁방식 혹은 민중권력쟁취 지향에서 좀 벗어나 유연해진 측면은 없습니까?

하승창 민중권력 쟁취는 진보정당의 흐름이라고 봐야겠죠. ‘민중권력’이라는 말에 체제 자체를 변혁시키겠다는 것이 포함되기도 하지만 진보정당이 생긴 데에는 어쨌든 체제 안에서 변화를 모색하려는 흐름이 있다고 봅니다. 정치권력의 쟁취과정을 놓고 볼 때 일정하게 유연화된 것이라고 봐야겠죠.

 

 

시민운동은 변혁을 어떻게 바라보는가

 

한기욱 ‘체제변혁’이라는 표현이 나왔는데 지금 말씀은 남한에서의 자본주의체제 변혁을 의미하시는 것 같아요. 노동운동이나 민중운동도 그걸 염두에 두는데, 저는 지금의 세계화 국면에서 일국적 차원의 자본주의체제 변혁이 가능할지 의문입니다. 이런 의미의 체제변혁, 가령 남한사회에서의 사회주의적 변혁과 같은 프로그램이라면 시민운동이 변혁의 주체로 나설 여지는 별로 없을 겁니다. 하지만 일국적 차원이 아니라 전지구적 자본주의체제를 염두에 둔다면, 그리고 그것이 현재 한반도에서 관철되는 좀더 구체적인 양상으로서의 분단체제를 염두에 둔다면 민중운동뿐 아니라 시민운동이 해야 할 몫은 많다고 봅니다.

하승창 과거 체제변혁이란 말이 민중운동이 가지고 있던 민중권력 프로그램을 뜻했지만 지금은 꼭 그렇지는 않죠. 제가 민중운동 내부에 있지 않아 잘 알 수는 없지만, 어떤 경우든 기존 자본주의의 지향을 실현하는 체제로 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시민운동의 경우, 예컨대 경실련에는 시장경제나 자본주의체제 극복 같은 것이 사실 없었다고 봐야겠죠. 경실련의 큰 그림이라면 초창기에 이야기되던 독일식 사회시장경제체제 정도였죠. 어쨌든 시민운동은 체제에 대한 얘기를 안했어요.90년대 들어 이전 패러다임과 냉전체제와 사회주의가 무너지고 난 다음엔 그런 거대담론 얘기는 쏙 들어갔어요. 대신 실사구시나 시시비비 측면에서 구체적인 사안 하나하나를 중심에 두고 활동해왔어요. 거대담론이 인식체계 안에 들어오지 않은 점도 있었고, 기존의 것을 대체할 만한 패러다임이나 담론이 부재한 것도 있었고, 또 그것을 파헤치기에는 아직까지 우리의 실천이나 경험이 쌓이지 않았다는 생각도 있었을 테고요. 이런 점들이 시민운동으로 하여금 체제변혁 문제를 뒷전에 두게 한 것이라고 봐야죠. 그러나 90년대 후반 2000년대로 접어들면서 생태, 평화, 인권, 분단체제 극복 등으로 문제의식이 확장되면서, 시민운동 내에서도 현 자본주의체제의 씨스템이 이런 문제를 해결해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적어졌을 거라고 봐요. 분단체제에 관한 시민운동의 관심은 평화운동 쪽에서 나오고 있죠. 기존 단체들이 못한다고만 하지 말고 운동의 아젠다를 어떻게 더 본격적인 것으로 할 건가, 이런 고민을 발전시키면 더 풍성해질 것 같아요.

한기욱 그런데 경실련이나 참여연대도 현 사회를 좀더 개선하겠다는 의지는 있지 않습니까? 경실련이 계층적으로 중산층 위주라는 비판은 있었지만요. 현재의 여성운동이나 환경운동은 우리 사회를 개선해서 좀더 살 만한 곳으로 만들려는 것 아니겠어요. 다만 체제변혁의 그림을 안 그리고 있다는 생각은 듭니다. 가령 전지구적인 관점에서 보면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는 환경보존을 어렵게 하고, 환경비용을 강대국에서 제3세계 주변국으로, 기업에서 일반시민에게 전가하는 행태를 보이고 있어요. 제3세계의 국가는 이 추세를 막아야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일정정도 이에 동조하거나 아니면 무력해요. 그런 점에서 이에 대한 시민사회의 저항은 세계사적인 차원의 변혁과정에서 일상적으로 전개되는 운동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시민운동 역시 체제변혁과 절대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이고, 다만 그런 시각을 꺼려했던 것이 90년대라면 이제는 시민운동도 나름의 입장에서 조그만 실천이 체제변혁에 기여한다는 것을 깨닫고 스스로 자부심을 갖는 것이 필요하리라 생각합니다.

하승창 90년대에 기득권 세력은 작은 시민운동, 즉 경실련의 재벌개혁운동이나 참여연대의 소액주주운동조차도 체제에 대한 도전인 것처럼 공격하는 경우가 왕왕 있었죠. 그런데 사실 그런 운동은 대부분 체제 안에서 그 체제가 더 공정하고 투명하게 되도록 하는 것이죠.

한기욱 사회합리화 과정이죠. 그런데 체제변혁에는 양날이 다 필요한 것 아닌가요? 우리가 근대적인 합리화 기준에 워낙 미달한 부분이 많기 때문에 그런 사회합리화 운동을 할 필요가 있고, 그 성과 위에서 좀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도록 기준을 높여나가는 시민운동이 필요한데, 경실련이 비판받은 것은 그 이상의 개혁에 대해서는 주저하는 것이 눈에 띄었기 때문인 것 같아요.

하승창 체제개혁이라는 말이 이념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에 쓸데없는 논쟁을 피하려고 의식적으로 외면한 점도 있고, 어떤 체제로 개혁해야 하는지 몰랐기 때문에 그랬다고도 할 수 있죠. 말씀하신 대로 90년대 시민운동은 근대적 합리성 실현에 기여한 운동이었고, 시민운동의 성과인 것도 사실이죠. 그런 성과 위에서, 예를 들면 환경운동의 경우, 생태패러다임에서는 지금의 체제를 바꾸지 않으면 사회가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전제가 있기 때문에, 생태라는 가치를 단순히 보호나 보전이 아닌 체제 자체에 대한 변화와 연계시켜왔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과거 민중운동의 체제변혁과는 사뭇 다를 수 있죠.

한기욱 생태, 양성평등, 평화의 문제 등은 근대 합리성만으로는 해결 가능한 문제는 아닌 것 같아요. 근대를 극복하는 과정이 동시에 필요하죠. 근대가 내재하고 있는 폭력적인 구조나 여성차별, 환경을 파괴하는 개발주의 등은 근대적 합리성으로 해결되기 어렵죠. 개발주의 남용을 약간 막을 수는 있어도 사회 자체를 생태적으로 만들기는 힘들 것 같아요.

하승창 어쨌든 90년대 이후 시민운동은, 사실 우리 사회에서 그렇게 빠르게 성장한 예가 없을 정도이고 외국에서 다 놀랄 정도로 급속하게 성장해왔는데, 그런만큼 사회적·정치적 영향력이 막강한 것이 사실이에요. 지금 직면한 문제들은 이제 시민운동이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것이에요. 대표적인 예가 생태나 젠더의 관점에서 세상을 만들어가려는 것이죠. 기존의 대변형 운동단체 덕분에 근본적인 생각을 하는 단체들이 많이 성장한 것으로 봐야겠죠. 그런 흐름 속에서 지금부터 시민운동은 거대담론이라고 부르던 것에 대한 논의가 오히려 필요하다고 봅니다. 민중운동도 변하고 있고 시민운동도 성장함에 따라 어떤 사회를 꿈꾸는가에 대해 생각할 수밖에 없는 지점에 온 것 같습니다.

 

 

‘시민’과 ‘민중’이란 이분법을 넘어서

 

한기욱 애초에 ‘시민’ ‘민중’을 편의적으로 나누었지 엄밀한 개념적 구분은 별로 없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시민운동과 민중운동이 서로 다른 정체성을 가진 것으로 규정되었는데 지금 싯점에서는 이 구분법에 대해서 검토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하승창 제일 어려운 질문인데요.(웃음) 민중운동이라고 할 때, 엄밀하게 과학적으로 개념화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기층 민중운동이라는 표현을 많이 쓰죠.70년대나 80년대 초반에는 ‘민중운동’ 하면 계급운동을 좀 우회적으로 표현한 측면이 있었죠. 민족이라는 표현에는 통일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듯이 말이죠. 지금 계급계층에 기반한 운동이나 통일 지향적인 운동프로그램의 경우에는 이런 정치적 함의들을 다 담고 있는 것 같아요. 그런데 시민운동은 그런 프로그램을 생각하지 않았고, 그 정치적 함의 때문에 민중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은 것이죠. 그래서 경실련의 경우 ‘보통시민’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정치적인 전망을 다 배제해버린 거죠.

한기욱 엄밀히 말하면 7,80년대에 민중을 노동자계급이나 기층민중의 약호로 쓰는 노선과 노동자·농민·빈민을 포함한 좀더 광범위한 연대세력으로 설정하는 노선이 공존했지요. 전자는 87년 노동자대투쟁을 전후하여 후자를 소시민적 노선이라고 공격하다가 사회주의권 몰락 이후에는 수세로 돌아서면서 다시 ‘민중’을 표방하지요. 그러면서 경실련 등의 비민중적 개혁론자들과 마찬가지로 ‘민중=기층민중’이라는 공식에 묘한 동조를 보입니다.90년대에는 이런 상황에서 민중연대를 민중운동으로, 메이저 시민단체를 시민운동으로 환원하는 편의적이고 조직이기주의적인 발상들이 널리 퍼져 있었다고 봅니다. 그런데 민중과 시민 사이에 분명한 선을 긋고 시작한 경실련과는 달리 참여연대의 경우는 사회의 약자, 소외된 자를 대변하고 껴안는 것을 표방하고 있는데, 그것이 민중과는 어떻게 다른가요? 민중이란 우리 사회에서 소득이나 지위 면에서 낮은 쪽인데요.

하승창 사회적 약자라는 표현은 이미 민중이 갖는 정치적 함의를 빼고 말하는 것이라고 봐야겠죠. 그래서 참여연대의 경우에는 ‘진보적 시민운동’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 같아요.

한기욱 그렇다면 지금 이 싯점에서 민중이란 용어에 담긴 편협한 정치적 함의는 빼야 할 것 같군요.

하승창 그런 맥락에서 오히려 민중이라는 단어를 복원하고 싶다고 말씀하시는 거죠? 저는 그럴 수 있겠다고 봐요.

한기욱 그런 면과 함께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시민에는 무정치성이라는 성향뿐 아니라 민주주의적 정치지향도 분명히 담겨 있고, 시민과 민중의 범주가 상당히 중첩되어 있다는 겁니다.90년대에는 서로 배제의 관점이었다면 현 싯점에서는 중첩되는 지점에 착안해야 할 것 같아요.그래야만 두 운동의 협력과 연대를 여는 실마리를 풀 수 있을 것 같은데요.

하승창 포함되든 배제되든 시민과 민중이라는 개념이 다 그 정치적 배경과 함의가 있고, 역사성이라는 것도 존재하는데 그냥 그대로 사용하게 되면 아무래도 혼란이 발생하죠.

한기욱 그 ‘역사성’이라는 것이 기껏해야 87년 이후 지금까지 십수년에 불과한 것이고 그 잘못된 구분으로 부작용도 심각해지고 있는만큼 지금의 관행적인 어법은 고쳐야 하지 않겠어요? 두 범주를 아우르는 용어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겠는데, 지금 중요한 것은 발상의 전환이라고 봅니다. 사실 신자유주의 세계화로 중산층마저 위협받고 있는 싯점에서 시민과 민중에서 중첩되지 않은 부분이 있다면 중산층의 최상위층, 강남 대형아파트에 살며 귀족적인 생활양식을 추구하는 계층 정도가 아닐까요. 경실련이 토지공개념을 도입하는 등 주목할 만한 개혁안을 내면서도 그 이면에 시민을 중산층으로 환원하여 그들을 대변하는 듯한 발상이 깔려 있었는데 그것이 문제였지 않은가 해요. 사실 그것은 시민운동이 87년 구도에 매여있는 측면인 것 같아요.87년에 6월항쟁과 노동자대투쟁이 거의 동시에 일어났는데, 민중진영은 상당히 혁명적인 투쟁 위주로 나아갔고, 경실련은 다른 대안 찾기나 비폭력운동으로 나아갔기 때문에 서로 배제적인 역할분담으로, 전혀 다른 방향으로 발전한 것으로 보이는데요. 이렇게 양자의 지향이 달랐지만 사실은 양자가 서로에게 필요한 활동을 할 때조차도 87년의 구도에 매여서 서로간의 연대 자체가 상당히 힘들어졌던 게 아닌가 합니다. 참여연대는 좀더 발전적인 경우지만, 지금은 좀더 전향적으로 두 운동의 연대가능성을 찾아야 할 때라는 생각입니다. 현재 세계화하고 있는 전지구적 차원에서 보자면 우리 사회의 대다수 시민과 민중 모두가 형성중인 노동자계급이라고 할 수도 있지요. 물론 이때 노동자계급은 사무직은 물론 지식인노동자까지 포괄하는 광범위한 개념이겠지만요. 시민과 민중의 범주에 대해 발상을 전환하자는 제 말의 취지는 그 대립적인 이분법을 양자 모두가 지니는 ‘노동자성’을 통해 넘어서자는 것입니다. 변혁의 주체를 현재의 노동자계급이나 기층민중에 한정하기보다 자유주의적 중산층까지 포함한 광범위한 연대세력으로 설정하되 이 연대를 예전의 통일전선과 같은 계급계층간 타협의 산물로서가 아니라 바로 이런 ‘노동자성’을 바탕으로 이뤄내자는 뜻이지요. 이렇게 보면 양자가 모두 새로운 모습을 보여줘야 하는데, 특히 민중운동 쪽은 소위 ‘기층민중’의 권익을 위한 투쟁 외에도 시민사회 전반에 대한 포괄적인 개혁프로그램에 적극 나서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하승창 지금 민주노동당 안에서 나오는 것처럼 민중운동이 생태, 환경 등에 관심을 가지겠죠. 민주노총이 사회대책기구 등을 내세우는 것처럼요.‘시민’이란 말은 자기 지향을 잘 드러내는 표현도 아니고, 오히려 배제함으로써 문제가 되는 경우일 텐데, 그것을 넘어서보고자 저는 개인적으로 ‘시민’을 ‘성찰적 시민’이라고 표현하는데요. 중국의 경우 시민사회 대신에 ‘공민사회’라고 표현하더라고요. 우리가 쓰는 시민이라는 말이 단순하게 도시민으로서의 의미만 있는 것은 아니거든요. 도시민보다는 퍼블릭(public), 즉 공민이 강조되는 것이죠. 뭔가 세계와 공동체에 대한 자각을 전제해야만 ‘시민’ ‘민중’ 개념을 넘어서서 다른 그 무엇을 생각해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성찰적 시민이라는 표현도 그런 맥락입니다.

한기욱 그렇다면 민중운동 쪽에서는 성찰적 민중 같은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하승창 그렇다고 봐야죠. 그런 점에서 접점이 있을 수 있겠죠. 기존과는 다른 성찰이 대단히 중요하죠. 그래야 기존의 시민, 민중 개념의 중첩된 부분을 찾을 때 오는 혼란이 걷히고 새로운 접근이 가능하겠죠. 거기에는 거대담론의 영역도 필요하겠지만, 세계적 범주에서 개인의 모습까지 여러 위상에서 논의가 필요하겠죠. 기존의 민중운동은 생태문제나 평화문제를, 또 시민운동은 빈곤이나 실업문제 등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것이 있죠.

 

 

빈곤문제, 어떻게 풀 것인가

 

한기욱 좀더 구체적으로 빈곤문제를 얘기해보는 것이 좋을 것 같군요.IMF 이후의 자료를 보면 빈곤층은 늘어나고 중산층의 입지는 줄어들었습니다.400만 신용불량자,1000만 신빈곤층이란 말이 나오는데 특히 청년실업과 노년층 실업, 비정규직 노동자, 이주노동자 문제 등은 빈곤문제와 겹쳐 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노동운동 혹은 민중운동이 거론은 하고 있지만 사회 전체의 중요한 과제로 제대로 자리매김이 안되고 있는 듯한데요. 민중운동 쪽에서 이 문제에 잘 대응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이고, 시민운동에서는 이 문제에 대해 어떤 프로그램이 있는지 궁금하군요.

하승창 시민운동 전체의 프로그램은 아직 기획된 것이 없다고 봐야 할 것 같아요. 다만 이주노동자 문제나 빈곤문제에 대해서 개별적으로 대응하는 시민운동은 있어요. 자신의 정체성을 민중운동, 시민운동 어디에 두는지는 제쳐두더라도 그런 문제에 대응하는 활동은 존재하는 거죠. 그런데 그것이 운동 전체의 중심과제로 느껴지지 않는 것은 분명하죠. 큰 단체들이 프로그램을 적극적으로 만들지 못하고 있는 점이 그런 느낌을 주었는지도 모르죠.

한기욱 최근 참여연대가 ‘아름다운 재단’과 함께 빈곤문제를 부각시키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최저생계비로 한달 나기 희망 업 캠페인’이라는 체험 프로그램인데, 일종의 나눔의 문화 같은 것을 하고 있어요. 제가 보기에 참여연대다운 발상이고 의제설정이 상당히 돋보이기는 한데, 나눔의 방식으로 해결될 부분도 있지만 사회의 씨스템을 개혁해야만 가능한 측면도 분명히 있어요. 이 문제야말로 시민운동이 민중운동과 연대하여 전향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승창 그게 쉽지는 않을 것 같아요. 나눔의 문화는 이전에도 형평성,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배려라는 측면에서 제기됐고, 배려나 있는 것을 나누는 것이 중요하다는 인식을 갖게끔 하는 행위이죠. 그러나 문제는 끊임없이 빈곤이 발생하는 구조, 공동체의 일원으로 살아갈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 형성에 대한 것이라고 봅니다. 제가 이렇게 말하는 어법 자체가 민중운동적인 어법은 아니지만 그 문제들을 고쳐야 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한 인식에 도달할 수 있는 거죠.

한기욱 새로운 발상으로 보자면 비정규직 문제, 이주노동자의 문제에 양 운동이 좀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마땅할 것 같습니다. 비정규직 문제는 상당히 심각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놀라운 것은 2002년 기준으로 전체 노동자의 56% 정도가 비정규직이고, 임금도 정규직의 50% 이하 수준이라는 것입니다. 더욱 주목할 만한 사안은 남성노동자 중엔 그래도 정규직이 더 많은데 여성노동자는 70%가 비정규직입니다. 남녀불평등과 저임금이 동시에 구조화되어 있는 문제에 대해서, 거대한 체제변혁과 직접 연관되는 것은 아니지만, 민중운동이 마땅히 전향적으로 나서야 할 듯합니다. 아직 산별노조체계가 안되어 있는 탓인지 단위사업장에서는 이 점을 부각시키지 않고 오히려 축소시키려는 분위기도 있는 것 같아요. 노조가입률에서 비정규직이 2.4%, 정규직이 22.7%로 거의 10배의 차이가 나니까 정규직 노동자의 권리가 앞서는 거죠. 그런데 사회 전체적으로 보면 진짜 ‘기층민중’이고 사회적 약자의 전형인 비정규직 노동자와 여성노동자, 최소한의 시민권도 보장받지 못하는 42만에 이르는 이주노동자의 문제에 양 운동이 합세해서 ‘나눔의 문화’보다 더 근본적인 차원에서 이슈화해야 하지 않을까요?

하승창 네, 그렇다고 봅니다. 정규직은 대부분 조직노동자여서 자기를 대변할 수 있는 조직과 싸울 수 있는 토대가 있죠. 비정규직이나 이주노동자를 조직화하기 어렵다는 점이 노동운동의 경우 운동의 적극적 과제로 들어오지 못하게 한 큰 이유라고 봅니다. 그런데 일각의 요구처럼 비정규직이 다 정규직으로 전환되면 그런 문제가 해결이 되느냐, 저는 그럴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런 방식은 아니라고 봅니다. 대체로 정규직 보장에 대한 요구지만 오히려 문제해결을 위해 다른 씨스템이 필요하다는 생각인데, 생산력의 발전이라는 것 때문에 그만큼 정규직형보다 비정규직형 노동방식이 현실에서 많이 존재할 수밖에 없는 꼴을 갖추어가고 있단 말이죠.

한기욱 고용주 쪽에서 비정규직을 늘리는 방식으로 기업의 이윤창출 구조를 꾸리는 경향이 있는데, 그 부분은 제동을 걸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 그리고 비정규직 증가는 기업가의 요구 외에도 달라지는 다양화된 사회에서 기존에는 없던 여러가지 직종이 발생하기 때문이죠. 그 일에서 보람을 찾는다면 좋은 일인데 다만 비정규직이더라도 충분히 먹고살 수 있어야 하고 인간적인 품위, 존엄성 같은 것을 지킬 수 있도록 보장해줘야겠지요. 노동운동 쪽에서도, 지금은 비정규직 노동자나 이주노동자의 상당부분이 노조에 가입되어 있지 않고 제대로 대접도 못 받지만 당연히 노동자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주노동자의 경우는 점점 늘어날 전망인데, 언제까지 임시방편으로 대응할 수 있을까요. 한편 이 문제가 한동안 사각지대에 놓여 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시민운동 쪽에서도 적극적으로 개입할 필요가 있죠. 인권의 측면에서라든지 아니면 최소한의 생존권·생활권의 측면에서라도 접근하고, 그런 부분에서 양대운동이 합세할 필요가 있다고 보는데요.

하승창 주요단체의 핵심적인 과제는 아니라 하더라도, 이 문제에 대해 관심이 없거나 실천을 안하고 있는 것은 아니에요. 이주노동자 문제에는 작은 그룹이거나 종교적 베이스에서긴 하지만 상당히 많이 활동하고 있거든요. 참여연대의 빈곤체험 프로그램처럼 점차 주요단체도 관심을 확대해갈 것이고, 의식적 노력을 기울일 것이라고 봅니다. 문제는 공동체 성원들이 서로 나누거나 국가가 세금을 걷어 나눠주는 방식으로는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것이라는 거죠. 빈곤이 과거에는 나눠서 해결될 성격이 강했다고 한다면 지금은 탈락자의 문제, 아예 취직을 못하게 되는 실업문제가 더 심각한데 문제를 푸는 방식도 좀 달라져야 할 것 같아요.

한기욱 좀더 어려워졌다고 볼 수 있는데 사회안전망을 설치하는 것 외에도 우리 사회의 소비문화적 욕구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가난의 철학’을 논하는 생태주의 운동의 주장, 즉 여러가지 생태파괴를 불러오는, 물질적으로 잘살자는 욕구를 버릴 때만이 세계가 깨끗하고 우리가 건강해진다는 주장은 타당한 면이 있어요. 그러나 가난도 정도의 문제이고, 보통 사람이 최소한의 인간적 존엄성을 지키면서 보람있는 삶을 살 수 있을 정도의 물질적 여건을 갖추는 것이 관건이라고 보는데요.

하승창 개인적 차원에서 의식의 변화가 있을 수도 있겠죠.‘가난의 철학’은 삶의 방식의 변화도 필요하다는 것이잖아요. 그것은 어떻게 보면 빈곤문제가 구조적으로 생길 수밖에 없는 지금의 씨스템을 변화시키는 것이 필요하다는 건데요. 말하자면 비정규직의 증가가 노동방식의 변화 때문에 생길 수밖에 없는, 구조와 관련된 점도 감안해서 문제를 풀어야 한다는 것이 있겠고요. 또하나는 어떤 패러다임이 필요한지는 잘 모르겠지만 다른 사회적 씨스템으로의 전환이 필요한데, 다른 예지만 생태적 관점으로 볼 때 세금문제의 경우 지금 같은 법인세나 소득세 중심의 세제 씨스템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죠. 그런 점에 대한 판단이 없으면 문제를 해결해가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아요. 말하자면 세제의 경우에 재산세나 소득세 등은 근대적인 산업체계에서 생기는 세금구조잖아요? 그런 것이 아닌 다른 세금구조를 통해서 사회적 보상체계를 구축해야 하는 거 아니냐는 거지요.

한기욱 어떤 예가 있을까요? 민주노동당은 부유세를 얘기하는데요.

하승창 부유세는 재산세의 일종인데, 그것에 대해 어떤 사람은 많이 벌어서 사회에 기여하는 사람들의 돈을 뺏어오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어요. 그런데 거꾸로 생태적인 패러다임이 있는 사회체제에서 생각해본다면 쓰레기나 오염물질을 많이 배출하지 않는 곳에 인쎈티브를 주는 씨스템을 만들 수도 있다는 것이죠.

한기욱 지금 재산세나 이런 것들을 유지하면서도 환경세를 도입할 수 있지 않습니까?

하승창 추가적 범주의 세금이 아니라 새로운 패러다임에 기초해서 세금제도를 바꾼다는 것이죠.

한기욱 좀 막연해서 상이 잘 안 잡히는데요.(웃음) 최저생계비를 현실화해서 최소한의 생활을 보장하는 것과 동시에 시민 또는 민중 스스로가 공공재적인 사회복지와 공동체적인 문화공간을 늘려나가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요. 이것은 국가를 압박해서 따낼 수도 있고 지역자치·주민자치운동으로도 가능할 것 같은데요. 예를 들면 컴퓨터가 필요한 시대에 살면서 소득이 적어 컴퓨터가 없는 사람에게는 동사무소를 문화쎈터로 개조해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게 공공재적 대체를 가능하게 하는 거죠. 그리고 ‘성미산 살리기운동’ 사례에서처럼 공동 삶의 터전이 공공재적인 나눔과 누림의 현장이 될 수 있는데, 이런 운동이 확산된다면 우리가 서구 선진사회만큼은 아니더라도 지금의 소득수준으로도 살 만한 사회가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자본주의 소비패턴을 따라가다보면 소득이 아주 많아야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데, 그런 패턴과는 다른 문화적인 가치, 즉 민중문화라든지 시민문화 같은 것들을 건설할 때는 생태주의라는 것이 하나의 필수불가결한 요소가 될 것 같습니다.

하승창 그런데 제가 말하고 싶은 핵심은 가난의 철학이라고 했을 때 우리가 그런 의식을 가지고 살 수 있는 사회적 씨스템이 필요하다는 것이죠. 경쟁에서 이기고 소득도 많아야 하는 지금의 사회씨스템과 사회보상체계 안에서 가난의 철학은 없는 자로 하여금 자족적인 생각을 하게 만드는 것에 불과할 수 있지만, 이 철학이 삶에 적용되는 씨스템이나 사회보상체계가 가능하다면 당연히 삶의 방식에서 중요한 변화가 있게 되겠죠.

 

 

촛불시위, 반전평화운동, 그리고 한미관계

 

한기욱 우리 사회가 자본주의의 지배 정도가 점점 높아진다고는 하지만 성미산 살리기운동이나 부안주민의 핵폐기장 반대투쟁에서 보여준 것은 비자본주의적 삶의 가치를 지켜내려는 노력이 실현되기도 한다는 점에서 참 희망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번엔 반전평화운동에 관해서 말씀을 나누고 싶습니다. 반전평화운동 자체도 그렇지만 이와 함께 등장한 촛불시위는 획기적인 운동방식이라 할 수 있는데 이를 어떻게 보십니까?

하승창 촛불시위는 효순·미선양 사건 때부터 나타났죠? 그 과정은 이전과는 상당히 다른 양상을 보여줬고요. 전에는 그런 규모로 집회를 할 때 조직적 동원이 반드시 문제가 됐는데 2002년 이후부터 그렇지 않았죠. 촛불시위 같은 경우는 기본적으로 인터넷 때문에 가능했다고 보는데, 인터넷 까페나 게시판을 통해 사건에 대한 생각이 많이 표출되었죠. 이전에는 단순히 여론으로 존재했을 가능성이 컸던 것이 거리로 나오면서부터는 사회적인 힘으로 전환했어요. 네트워크 구조를 통해 강제가 아닌 제안으로 자발적으로 참여한 것은 아마 이전과 이후를 가르는 결정적인 요소가 아닌가 싶어요.

한기욱 그 과정에서 부작용도 약간 있었는데, 새롭고 창의적인 운동방식에 기존 운동단체가 못 따라간 듯도 싶어요. 이후에도 운동단체들이 활발하게 순발력있게 움직이지 못한 것 같던데요.

하승창 글쎄요. 그후라면,1989년 경실련 창립을 기점으로 해서 본다면, 시민운동 역사상 아마 가장 대중적인 운동과의 결합은 탄핵무효운동이었던 것 같은데요. 탄핵이 가결되는 순간 인터넷은 인터넷대로 달구어졌고 시민들은 뛰쳐나갈 준비가 되어 있었고요. 시민단체들은 당일에 모여서 ‘순발력있게’ 그것을 어떻게 끌어안을 것인가를 논의했어요. 그래서 ‘탄핵무효’라는 슬로건을 잡았죠. 그 외에 자발적으로 여러 구호가 나왔지만 전체 요구를 하나로 정리해 내걸면서 결합된 거죠. 그날 저녁부터 다음날 광화문에 모이기까지는 순식간에 이루어졌어요. 그것은 이전의 시민운동이나 민중운동 방식은 아니었고 거꾸로 대중의 자발성에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봐야겠죠.

한기욱 반전평화운동에서는 시민운동과 민중운동 사이에 연대와 협력이 어느정도 이뤄지지 않았나요?

하승창 ‘국민행동’과 같은 연대체 속에서 반전평화를 공통이념으로 하고 있는 거죠. 민주노총 같은 경우에도 이라크 파병반대에 힘을 실어 군수물자 관련 생산현장에서 파업을 하겠다고 했는데 잘된 것 같지는 않고요. 하지만 설사 선언적이라 할지라도 그것조차도 이전과는 다른 의식과 실천이라고 생각해요.

한기욱 전지구적인 지평에서 보면 반전평화운동이 2002년 말부터 2003년 이라크전 발발 직전까지 피크를 이루었는데 천만명 가까이가 세계 곳곳의 거리로 나왔지요. 세계사회포럼에서도 반세계화운동에 적극 가담했어요. 전지구적인 지평에서는 두 운동이 조직적인 연대까지는 아니더라도 자연히 결합되는 양상을 보여주기도 했던 것이죠.

하승창 이라크전의 성격이 그런 것이죠.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한 이유는 정말 누가 봐도 침략일 수밖에 없는 요소들, 미국중심의 세계자본주의 씨스템에 반드시 필요한 석유자원 확보나 미국 패권의 유지라는 측면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그에 대한 반대는 평화라는 단순한 가치를 지키는 문제일 뿐만 아니라 그동안 있었던 반세계화운동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국내에서의 운동도 그 범주 안에 있다고 봐야죠. 반전평화운동에서 명시적으로 내건 요구는 아니지만 그런 반세계화 측면이 있다고 봐요. 그런 싸움의 과정에서 우리의 인식이나 생각이 바뀌고 있고요.

한기욱 그런데 시민운동과 민중운동이 연대하여 상당히 창의적이고 광범위한 반전평화운동을 전개했는데도 이라크 추가파병을 막지 못하고 있는 현실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물론 반전평화운동이 대중적으로 더 확산되어야 한다는 지적은 할 수 있겠지만, 김선일씨 피랍살해 사건을 당하고도 추가파병이 이뤄진다면 뭐가 문제인지 좀더 근본적으로 따져봐야 하지 않을까요?

하승창 추가파병은 결국 이루어질 것으로 보이는데요, 김선일씨의 죽음 이후에 파병반대 여론이 확산되기는 했지만 여전히 ‘국익’이라는 관점에서 찬성론도 만만치 않은 게 현실입니다. 그러나 그 국익이라는 것이 남의 나라 침략전쟁에 동원되어 확보되는 것이라면 아무런 정당성도 가질 수 없는, 세계시민으로서의 성찰을 포기하고 자국의 이익 관철이라는 지극히 이기적인 관점에 근거한 것이죠. 시민운동이 반전평화운동에 참여하기는 하지만 소수의 단체를 제외하고 역할을 제대로 찾거나 기여하고 있다고 보기는 힘든 것 같습니다. 현재의 반전평화운동의 주요 흐름은 기존의 민중단체들과 민주노동당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다고 보여지는데, 동원전략처럼 보이는 참여주체들의 의례적 확대가 아닌, 실질적 확대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아마도 파병연장 논란이 있을 것으로 보이는데, 연장은 의회의 동의안 없이는 불가능하므로 결국 의회에 대한 공략과 그 과정에서의 참여주체, 대중적 참여의 확대가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한기욱 추가파병 반대가 무산되면 파병연장 반대에 시민사회가 다시 한번 힘을 모아야겠지요. 한편 정부나 정치권의 파병논리, 소위 ‘국익’이라는 논리도 좀더 실제적으로 검토해봐야 할 듯합니다. 크게 두 가지인데, 하나는 한미동맹을 공고히 하여 북핵문제 해결에 유리한 분위기를 조성하겠다는 것, 다른 하나는 정치적으로뿐 아니라 경제적으로 미국의 힘에 의존하는 현실에서 미국이 한국의 이익을 얼마든지 해칠 수 있다는 논리죠. 가령 무디스사가 한국의 국가신용도를 한 등급만 낮춰도 우리 경제는 엄청난 타격을 입는다는 발상이 청와대 게시판에 공공연히 실리잖아요. 정부측의 이런 국익 논리가 근거없다는 지적은 많이 나왔지요. 저 역시 정부가 실제보다 과장되게 ‘국익’의 내용을 포장하고 있고 대미종속적인 관행과 사유에 매여 한미관계를 냉정하게 판단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국익론 뒤에 깔린 정부 쪽의 우려를 허무맹랑한 것으로 일축하기보다 한국의 대미종속도가 어느 정도인지 철저히 따져보는 반성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봐요. 가령 에너지원을 중동산 원유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현실에서 중동 석유시장을 좌지우지하는 미국의 요구를 쉽게 외면할 수 없겠지요. 또한 미국을 비롯한 외국인이 총 주식의 절반 가까이의 지분을 갖고 주식시장을 쥐락펴락하고 있는 현실에서 무디스사의 등급조정을 간단히 무시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기에 반전평화운동이 뿌리내리고 대중화되기 위해서는 에너지 문제나 경제문제를 포함한 사회 전영역에서 대미종속도를 줄이는 방향으로 우리 사회의 씨스템을 개혁할 필요가 있어요. 반전평화운동이란 따져보면 이렇게 민주적·자주적 개혁작업과 맞물려 있고 크게 보면 분단체제와 세계체제를 극복하는 운동과 다르지 않다고 봅니다.

 

 

신자유주의에 대한 저항과 대안적 질서

 

마지막으로 신자유주의에 대해 얘기를 나눠볼까 합니다. 시민운동과 민중운동의 연대투쟁을 주장할 때, 특히 한국의 구조개혁과 관련해 민중운동 쪽은 신자유주의에 대한 반대를 주요과제로 제기하고 있습니다. 시민운동 쪽에서는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요?

하승창 신자유주의에 대한 단순한 반대만으로는 곤란할 것 같아요. 민중운동의 반대는 현 상태에서의 탈락에 대한 저항이고, 탈락에 대한 저항은 현상태를 유지하자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다 인식할 텐데, 그렇다면 그 다음은 뭐냐라는 것이죠. 민중운동의 저항이 신자유주의에 대한 자각의 계기라는 것에는 다 동의할 테고요. 한편 생태나 인권, 평화라는 가치 자체가 이미 신자유주의에 대한 반대를 추구하는 것이고 그 자체로 충돌하고 있기 때문에, 세계사회포럼이라든가 씨애틀에서의 시위 등 여러 지점에서 이미 시민운동과 세계화가 대립하고 있음도 다 알고 있는 사실이죠. 국내의 시민운동도 대개 마찬가지죠. 어떤 분들은 90년대 초반 경실련의 방식은 아닐 거라고 보는데, 문제는 그 지점에서 민중운동과 어떻게 만나느냐, 단순한 반대라는 지점에서 만나느냐 아니냐 하는 것이죠.

한기욱 민중운동 쪽이 신자유주의의 공세를 물리쳐야 한다고 했을 때 어떤 복안과 대안이 있는지 모르지만, 물리칠 수 있는 사안이 있고 그렇지 않은 것들이 있을 수 있죠. 그러니까 저항의 목표를 터무니없이 잡게 되면 그 저항은 사실 무위로 돌아갈 가능성이 크죠. 저항의 목표와 방법을 단기·중기·장기에 걸쳐 세분하여 대응할 필요가 있겠죠.

하승창 저항의 목표를 장기적으로까지 생각할 수 있다면 문제는 다르겠지만 지금은 현 상태의 유지를 요구하기 위해서, 신자유주의에 반대할 가능성이 있죠.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가져오는 우리 삶의 변화는 비정규직이나 빈곤의 문제에 이미 반영되어 있어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라 것이 폐쇄적 방식으로 저항하고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탈락이 개인만의 책임이 아닐 텐데, 그러면 사회적인 대비나 안전망이 어떻게 되어야 하느냐 하는 문제가 있죠. 동시에 미국중심의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대한 응전이 필요한 것이죠. 따라서 신자유주의에 대한 저항에는 ‘다른 세계도 가능하다’는 전망과 미국 중심의 세계체제의 재편이라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한기욱 민중운동 중에서도 농민운동은 쌀개방 문제에서 세계화와 첨예하게 대립되는데, 지금 제가 알기로는 전국농민회가 식량주권을 내세우면서 쌀개방반대를 외치고 시민운동도 참여하지요. 이런 쌀개방 반대가 어떤 해결책이 될 수 있을까요?

하승창 개방 반대로 해결될 문제는 아닌 것 같아요. 농업에 대한 대책과 별개로, 쌀개방 반대는 노동자들이 구조조정에 저항하는 것과 같다고 봐요. 구조조정 반대만으로 노동자 문제가 해결되지 않듯이 쌀개방 반대라는 것이 탈락을 지체시키고 현상을 유지하는 데 기여할지는 몰라도 근본적인 문제 해결책은 아니겠죠.

한기욱 이 문제 역시 시민운동과 농민운동이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야 할 사안인 것 같군요.

하승창 환경운동은 농업의 환경적 가치, 생태적 가치를 같이 보고 있어요. 예를 들어 농지 유지는 공동체의 지속가능한 발전을 가능하게 하는 측면이 있기 때문에 사회적 보상이 있어야 하고, 그럴 경우에 사회 전체가 보조해주어야 하는 거죠. 쌀 작목에 대한 생산보조금이 가는 것은 시장의 경쟁논리에서는 안되는 것이지만, 다른 부문에 보조금이 가는 경우와는 다르죠. 쌀 작목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서 돈을 주는 것이 아닌 다른 차원이 있죠. 김영삼정부 때 쌀관세 유예화 정책 등으로 개방의 속도를 일정하게 늦췄잖아요? 늦춘 이유는 농업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전환과 그에 따른 보상체계 마련, 그리고 사후대비여야 하는데 그것 없이 돈으로 막 질러댔단 말이죠.40조나 풀었다고 해요. 사실 농민에 기생하는 구조들이 엄청 많은데 금융 씨스템으로 바뀐 농협 등에 돈이 다 들어간 거죠. 그래서 농민들은 오히려 가계부채만 늘어났어요. 그리고 농업에 기생하는 기업이나 농민관련 언론도 아주 많아 돈이 다 그리로 흘러들어가는 거죠. 그래서 돈이 농촌으로 간 것이 아니라 서울로 다시 올라온다는 웃지 못할 얘기들을 하는데 근본적이지 않은 임시방편 때문에 그렇지요. 김영삼정부뿐 아니라 이후 정부도 모두 근본적으로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에 농민이 스스로 나서서 저항할 수밖에 없었죠.

한기욱 아직까지 신자유주의 칼날의 예봉이 무서운데 나중엔 신자유주의보다 더 악랄한 것이 나올 수도 있고, 아니면 기세가 꺾이면서 미국이 부시정권보다는 좀 나은 체제로 갈 수도 있죠. 사실 부시정권의 네오콘(신보수주의자)들은 WTO 중심의 신자유주의적 세계무역질서조차 자기 이익에 부합하지 않으면 거부하려 들거든요.

하승창 그렇죠. 그런데 미국이 그렇게 극단적으로 갈수록 미국에 대한 저항은 심해지겠죠. 월러스틴이 말하는 ‘미국 패권의 몰락’이 시작된 건지도 모르죠. 그러나 그 과정에서 우리에게는 공동체의 파괴가 있는 것이기에 저항은 필연적이죠. 그럼에도 저항만으로, 말하자면 개방반대만으로 해결되지는 않는다는 거죠. 농업문제를 예로 들었듯이 현 상태 유지처럼 보이는 개방반대의 형식이 아니라 근본적 대안을 위해 사회적인 아젠다의 형성과정에는 다른 형식이 필요할 것이라는 거죠.

한기욱 신자유주의에 대한 당장의 저항만으론 부족하지만, 신자유주의에 대한 중·장기적 대응이나 응전이라면 공통적인 것이 있잖아요. 탈락자에 대한 배려도 일종의 대처이고 장기적인 응전을 위해 필요한 조처이니까요. 민중운동 쪽에서는 좀더 직접적이고 적극적인 투쟁사안으로 볼 것이고, 시민운동은 그것보다는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하승창 탈락자의 저항이라는 면에서의 사안별 연대는 민중운동에서 보면 직접적인 자기이해가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 점에서 사안별 연대는 기존의 시민운동이나 민중운동이 가지고 있는 자기정체성에 기초하고 그것을 유지한 상태에서 이루어지겠지요. 그런데 전면적 연대라고 할 때는 대안적 질서에 대한 생각의 공유가 있을 때 가능한 것이죠.

한기욱 기존의 두 운동이 만나서 서로 공유하는 대안적 질서를 당장 만들어내라고 주문하는 것은 무리일지 몰라도, 새로운 발상을 가진 두 운동이 적어도 대안적 질서를 논의하고 만들어가는 데 동참하는 것은 가능하고 또 필요하지 않을까요?

하승창 그렇다고 봅니다. 가능할 뿐만 아니라 그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꿈꾸어야 할 세계,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꾸며내는 세상이 아닌 다른 세상이 가능하다는 것은 세계사회포럼에 참가한 많은 사람들의 공감대기도 합니다.‘세계화에 관한 국제포럼’에서 제시한 지속가능한 사회의 10가지 원칙이라는 게 있습니다. 새로운 민주주의, 부차성의 원칙, 생태적 지속가능성, 다양성, 인권 등인데요, 대안적 질서를 논의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가치지향을 정리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의 민중운동과 시민운동이 언제 어떻게 할지 모르지만 본격적 논의를 시작하게 될 거라고 보는데, 다만 양 운동이 무슨 전면적 합의를 한다거나 이런 방식은 아닐 거라고 봅니다. 운동 전체로 볼 때도 이견이 없는 합의가 이루어지기보다 이견이 있는 합의가 있을 거라고 보는 거죠.

한기욱 1987년 이전처럼 모든 운동권의 통일은 어렵다는 것이죠? 하지만 양 운동이 세계화의 추세나 반전평화의 부분에 대해서는 공통적인 인식과 큰 지향이 있지 않을까요. 대응방식에서 완급과 강조점이 다를 수 있겠지만 못 만나거나 사업을 같이 못할 것은 아닌 것 같고요.

하승창 그렇죠, 다른 모습의 연대가 되겠지만 말이죠.

한기욱 장시간 좋은 이야기 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그간의 시민운동과 민중운동의 이분법적 구분을 허물고 이제는 좀더 전향적인 자세로 서로 만나서 해결해야 할 문제가 많다는 것은 확인된 셈이죠. 이것으로 대담을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