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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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규 金光圭

1941년 서울 출생. 1975년 『문학과지성』으로 등단. 시집 『우리를 적시는 마지막 꿈』 『아니다 그렇지 않다』 『가진 것 하나도 없지만』 등이 있음.

 

 

 

마지막 물음

 

 

전화기도

TV도

오디오세트도

컴퓨터도

휴대폰도……

고장나면

고쳐서 쓰기보다

버리고

새로 사라고 합니다

그것이 더 싸다고 합니다

 

사람도 요즘은 이와 다를 바

없다고 하더군요

 

우리의 가정도

도시도

일터도

나라도

이 세계도…… 그렇다면

고칠 수 없나요

버려야 하나요

 

하나뿐인 나 자신도

버리고

새로 살 수 있나요

 

 

 

미국여행 편람

 

 

아메리칸 에어라인 탑승구에서

한국여권을 보더니 대뜸

카우보이 같은 백인 남성보안원과

흑인 여성보안원이 달려들어서

몸과 짐을 다시 뒤졌다

거대한 미국인이

왜소한 동양인을 붙잡아놓고

짐가방을 속속들이 뒤지고

온몸을 샅샅이 더듬었다

필통과 세면도구를 열어보고

허리띠를 빼보고

구두를 벗기고

양말바닥까지 금속탐지기로 훑었다

세계의 축이 되기에는 너무 작은 나라

한반도가 남북으로 나뉜 것은

그들이 알 바 아니었다

입국과 출국과 통과와 환승

비행기를 타고 내릴 때마다

반복되는 엄중 검색에도 불구하고

U.S.A.를 여행하려는 코리안은

여권과 비행기표와 지갑과 수첩

한꺼번에 넣고 다닐 수 있는

핸드백을 남자들도

휴대하는 것이 편리하다

 

 

 

똑바로 걸어간 사람

 

 

단풍잎과 은행잎이 가을 바람에 흩날리는 어느 오래된 절에서 그를 본 사람이 있다.

 

일주문을 지나서 사천왕문에 다다를 때까지 그는 직선을 그어놓고 그 위를 밟으며 가듯, 곧바로 걷고 있었다는 것이다. 다리를 쩍 벌리고 여덟팔자 걸음을 걷는 관광객들 틈에서, 그는 준수한 사슴의 모습처럼 환하게 눈에 띄었을 것이다.

그가 결코 직선으로 걷는 연습을 한 것은 아니라고 믿는다. 그러지 않아도 그는 평생을 똑바로 걸어온 사람이기 때문이다.

 

속임수도 에움길도 모르고 오로지 한길을 뚜벅뚜벅 걸어온 그는 그렇게 우리 곁을 지나갔다. 조금도 서둘지 않고 똑바로 걸어서 우리를 앞서더니, 어느새 까마득히 멀어지다가, 갑자기 사라져버렸다. 우리는 말을 잃고, 홀린 듯이 그쪽을 바라보았다. 아무런 자취도 보이지 않았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그가 떠난 것을 너무 늦게 알았던 것이다.

 

나중에 어느 천주교 성지에서 여전히 꼿꼿한 자세로 걸어가는 그의 모습을 보았다는 사람도 있다.

언젠가 갑자기 그와 마주치게 되지 않을지, 헛된 희망을 품고, 우리는 오늘도 그를 뒤따라가고 있다.

낙엽을 밟고 가는 그의 발소리나, 그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저 앞에서 들려오기를 기다리는 마음 간절하다.

 

어쩌면 그것은 우리의 뒤쪽에서 곧바로 눈길을 걸어오는 젊은 목소리로 들려올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