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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전성태 全成太
1969년 전남 고흥 출생. 1994년 『실천문학』 신인상으로 등단. 소설집 『매향』이 있음. jstroot@hanmail.net
한국의 그림
이삿날을 받아놓고 아버지는 허리앓이가 도져서 며칠째 거동을 못했다. 어제오늘 일은 아니었다. 평생 무거운 연장가방을 허리에 두르셨으니 칠순을 앞에 둔 노구가 온전할 리 없었다. 묵은 직업병이라 그럭저럭 견디며 지내셨는데 지난 봄 여름 두 철 강원도 어느 사찰 요사채 짓는 일을 해주고 와서는 꽤 심해진 모양이었다. 며칠 동안은 아예 앉지도 못하시다가 침을 맞고 나서는 좀 나아졌다고 어머니가 말했다.
“남의 집 두리기둥 세우는 맛에 제 몸 기둥 무너지는 줄 몰른 인사여, 느그 아부지가. 평생 허리에 붙인 파스만 모아도 웬만한 집 지붕 하나는 일 것이다.”
어머니는 늘 아버지의 일욕심을 못마땅해했다.
하는 수 없이 양평 집을 오가며 이삿짐을 쌀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오래전부터 부모님은 두 분의 고향인 강진으로 내려가 여생을 보낼 계획을 갖고 있었다. 십여년 전에 이미 빈 농가를 하나 사들인 아버지는 틈틈이 오르내리며 집을 고쳐놓았다. 선뜻 이사를 못한 것은 어머니가 별로 내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몸에 익은 자리에서 사는 게 낫다거나 막둥이인 내가 공부가 늦어져서 그거나 끝나는 것 보고 내려가자는 말씀이었는데 정작은 자식들과 멀리 떨어져 지내고 싶지 않은 눈치였다. 그러나 아버지가 일 놓을 기미를 보이지 않으니 이번에는 어머니가 먼저 이사를 주장하였다.
안채 살림은 포장이사를 하기로 했고 나는 행랑 창고의 짐들만 챙기면 되었다. 짐들은 대부분 아버지의 연장들이었다. 대학원 수업이 없는 날 나는 양평으로 내려가 짐을 쌌다. 짐은 포장할 것보다 버릴 게 더 많았다. 더러 짐 속에서 우리 삼남매가 학교를 다니며 쓰던 물건들이 나오기도 했다. 나는 중학교 일학년 때 쓰던 학생모를 발견하고 얼마나 신기해했는지 모른다. 곧 교복자율화가 되었기 때문에 내가 학생모를 써본 것은 그 한해뿐이었다.
아버지의 연장 중에서도 버릴 게 많았다. 날이 못 쓰게 된 대패도 네댓 개가 넘었고 꼭지 나간 장도리며 자루 부러진 크고 작은 망치가 여럿 나왔다. 버리려고 마당 한쪽으로 내놓으면 어머니가 반은 다시 이삿짐 쪽으로 옮겨놓곤 했다. 그건 자루만 새로 해넣으면 된다, 그건 어디 절을 지을 때 쓰던 먹줄통인데 아버지가 섭섭해할 것이다, 그 끌은 잃어버렸다가 일부러 한 행비 해서 되찾아온 것이다. 나는 어머니가 얼마나 부질없는 짓을 하는지 잘 알았지만 모른 척했다.
짐들이 얼추 정리되었을 때 나는 창고 안쪽 시렁에서 웬 멍석처럼 돌돌 말린 채 비닐에 싸인 물건을 발견했다. 텐트나 천막인가 싶어서 마당으로 끌어내놓고 펼쳐보니 마당을 다 덮었다. 그건 놀랍게도 텐트천에 그린 그림이었다. 망치와 삽을 든 노동자들이 함성을 지르며 전진하는 내용의 그림은 우리가 한때 ‘걸개그림’이라고 부르던 것이었다.
“이게 뭐예요?”
“오매, 징한 거. 아직 그것이 있었구나 잉. 대호 아재 거여. 느그 아부지가 언제 한번 딱 노가다 사람들하고 보라매공원으로 데모를 안 갔겄냐. 그냥 품팔이 하는 사람들이 가자고 해서 묻어간 거여. 그때 갖고 온 건디 돌려줘야 쓴다등마 아직도 갖고 있네이.”
그러고 보니 80년대 말인가 아버지는 딱 한차례 일용직 노동자 집회에 다녀온 적이 있었다. 평소 자식들이 데모대에 휩쓸릴까봐 노심초사하던 양반이었다.
“정 못 피하겄으먼 앞에 서지 말고 뒤에 서라. 소리만 지르제 가꾸목은 쥐지도 마라.”
아버지는 그렇게 말하곤 했다.
“근데 왜 이 그림이 우리집으로 왔죠?”
나는 신기한 표정으로 어머니를 건너다보았다.
“대호 아재가 경찰에 잡혀가는 바람에 느그 아부지가 대신 거둬서 싣고 왔단다. 대호라믄 그저 쓸개도 빼줄 양반이여, 느그 아부지는.”
어머니는 힐끗 안방 쪽을 훔쳐보았다.
“뭐란 중 아냐? 대호한테 큰 집을 지어주는 기 소원이란다. 큰 그림 그리는 양반인게 큰 집이 있어야 쓴디야. 테레비에 보일 때마다 하는 말이 노상 그 말이다. 닌장, 팔자 고친 사람 집걱정까지 해주는 거이 느그 아부지여.”
어머니의 말을 들으며 나는 설핏 웃었다.
화가 김대호 아저씨는 한때 아버지를 따라다니던 목수였다. 익히 알려진 대로 그는 ‘걸개그림’이라는 장르를 세계미술사에 올린 장본인이다. 브리태니커 사전에도 ‘걸개그림’이라는 한국의 특수한 미술 장르가 소개되고 그 개척자로 그의 이름이 올라 있다. 요새도 종종 언론에서 그이의 모습을 보는 건 어렵지 않다. 설치미술가가 된 그는 환경파괴, 전쟁의 참상이 빚어지는 곳이면 세계 어디든 달려가 화구를 푼다. 한때 그는 한국의 거리에 큰 그림을 올렸지만 지금은 세계의 광장에다가 그림을 그려 올리는 유명인이 되어 있다.
아버지는 간혹 술을 마시면 말하곤 했다.
“목수여서 그런 큰 화가가 된 거여. 나가 목수일을 갈쳐서 그런 큰사람이 된 거라니께.”
한때 그가 우리집에서 이태를 머문 인연으로 아버지뿐 아니라 온 식구들이 그를 자랑으로 여겨왔다. 별 요상한 그림을 다 그린다며 혀를 차는 어머니도 그가 명사가 된 것만은 은근히 뿌듯해했다.
1986년, 일군의 청년 화가들이 경찰서에 잡혀왔다. 그들은 도심의 빌딩벽에 벽화를 그리다가 현장에서 체포되어온 것이었다. ‘상생도(相生圖)’라는 제목의 벽화는 한반도 형상을 한 태극기를 배경으로 남과 북의 동포들이 서로 손을 잡고 한바탕 신명나게 춤을 추는 내용이었다. 그림배경으로는 진달래가 만발해 있었다. 당국이 보기에 그림은 꽤 불온했고, 자칫 그대로 방치했다가는 새로운 미술운동이 일어날 판이었다.
당시 분위기상 공안당국은 정국 반전의 대어를 낚았다고 판단했다. 화가 간첩단 사건 조작이 착착 진행되어갔다. 그러나 아주 사소한 문제가 발생했다. 잡혀온 청년 하나가 자신은 화가가 아니라고 극구 부인하는 것이었다.
“저는 작업대를 설치하러 온 목수라니까요. 화가분들한테 물어보시면 잘 알 겁니다.”
“하, 이 녀석 보게. 발뺌할 일이 따로 있지. 니 혼자 살아보겠다고 거짓말을 해.”
형사는 뒤통수를 갈겼다. 현장에서 찍은 사진이 증거물로 제시되었다. 사진 속에서 그는 붓을 들고 벽 앞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이것 개나리 맞지? 진달래 옆에다가 요걸 그리고 있는 게 누구야? 개수작 부리지 말고 눈이 있으면 똑똑히 봐, 인마.”
“제가 맞긴 맞는데요, 누누이 말하지만 전 목수가 분명하대도 그러시네, 참.”
“근데 왜 붓을 들고 설치냔 말이야”
“그러니까 그게…… 와 돌아버리겠네.”
그는 몹시 난처하고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작업대를 설치해놓고 옆에서 구경하자니까 화가 양반들이 진달래를 그리잖습니까. 마침 심심하던 차에 제가 한마디 거들었죠. 봄꽃에 진달래만 있느냐고요. 그랬더니 화가 선생이 그럼 또 뭐가 있느냐고 묻더라고요. 개나리도 있다고 했더니, 아 그 양반이 그럼 당신이 직접 그려보라잖습니까. 에이, 저는 농담하는 줄 알고 손사래를 쳤습니다. 그랬더니 붓을 척 건네주며 한번 그려보라는 겁니다. 그까짓 것 저도 개나리 정도는 그릴 수 있겠다 싶어 붓을 들었지요.”
화가들도 한결같이 그의 말이 맞다고 증언해주었다.
일은 그렇게 넘어가는 듯싶었다. 그러나 오후부터 취조 형사가 바뀌었다. 조사과에서 정보과로 바뀐 것이었다. 조사실도 바뀌어 책상과 의자만 덩그러니 놓인 방은 어둡고 을씨년스러웠다. 정보과 형사라는 사내는 말투가 아주 신사적이어서 외려 사람을 긴장시켰다.
“김대호씨, 우리 선수끼리 서로 길게 하지 맙시다.”
형사는 서류철을 펼쳤다.
“자, 학력이 중학교 중퇴군요. 십대에서 이십대 초반을 어떻게 보냈는지 신원이 불분명하고요. 무슨 목적으로 화가들에게 접근했습니까?”
“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작업받침대를 설치해주러 갔습니다. 일당 오만원을 받고 하는 일입니다.”
“그래요? 좋습니다. 좀 구체적으로 들어가보죠. 왜 빌딩벽에 벽화를 그렸습니까?”
형사의 질문에 그가 피식 웃었다. 형사는 큼, 하고 기침을 놓았다.
“나도 궁금해서 물어봤더니 화가 양반들이 그럽디다. 벽이 너무 밋밋해서 보기 좋으라고 그린다고.”
“그림을 분석해보니 진달래꽃이 총 예순일곱 송이인데 죽어간 열사들하고 숫자가 같군요. 어떻습니까?”
“네? 글쎄요……”
“아래쪽 풀은 색깔이 전경들 옷색깔하고 동일해요. 혹시 공권력에 대한 응징을 상징한 겁니까? 대답을 못하시는군요. 좋습니다. 다음, 태극기가 청색 부분보다 적색 부분이 큰데 그건 적화통일을 의미합니까?”
“네? 적화통일이요?”
그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형사는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질문을 계속해나갔다.
“왜 사람들이 태극기를 짓밟고 있습니까?”
“그건…… 제가 옆에서 지켜본 입장에서 단언할 수 있는데요. 밟는 게 아닙니다. 사람들은 그냥 춤을 추는 거지요.”
“왜 춤을 출까요?”
“봄이잖아요.”
“아, 혁명의 봄 말씀이시군. 왜 사람들을 검둥이로 그렸습니까?”
형사는 다시 벽화사진을 내밀었다. 그는 사진을 들여다보기 위해 허리를 접었다.
“밑그림이라서 그렇게 보이는 게 아닌가요?”
“밑그림이라…… 야, 이 자식, 문자 쓰네.”
갑자기 형사가 눈을 부라리며 책상을 쳤다. 그는 깜짝 놀라 허리를 곧게 폈다.
“왜 농민들이 하나같이 헐벗고 굶주린 모습이지? 이건 우리 쪽 농민들이 아니야. 이북 농민들이지.”
“………”
“너 언제부터 그림 그렸어?”
“국민학교 미술시간에 조금 배웠습니다.”
형사는 사진 속 태극기를 짚으며 물었다.
“너 이 빨간색의 보색이 뭐야?”
그는 그것만은 확실히 알고 있었다. 국민학교 3학년 미술시험에 반 아이들이 빨간색의 보색을 청색이라고 했다가 다 틀린 적이 있었다. 선생님은 태극기를 가리키며 저것 때문에 사람들이 많이 착각한다는 말까지 덧붙이며 정정해주었다. 이상하게 그 기억은 또렷했다.
“녹색……”
“미술에 대한 전문지식이 아주 풍부하시구만. 난 네가 덜컥 청색이라고 하면 목수라고 믿으려고 했지.”
그런 식의 질문이 계속되었다. 추궁에 가까운 질문은 백여가지가 넘었다. 목수는 미술시험을 보는 아이라도 된 것처럼 진땀을 흘렸다. 때로 그는 아주 오래전 미술시간에 배운 채도니 명도니 구도니 하는 미술용어들을 어렵게 기억해내야 했다. 그는 간간이 자신의 직업이 목수라고 항변했다. 몇시간의 조사가 끝났을 때 그는 완전히 녹초가 되어버렸다.
“자, 그만 하지. 더 해봤자 괜히 서로 힘만 뺄 것 같고……”
그는 반가운 마음에 고개를 쳐들었다.
“그림을 그리다가 잡혀왔으니까 직업은 화가라고 해야겠어. 목수가 그림을 그리다가 잡혀왔다고 하면 아무도 믿지 않을걸. 우리도 조사가 미진하다고 상부의 질책을 받을 거구. 그럼 다시 신문을 해야 한단 말씀이야. 또 조사를 받고 싶진 않겠지? 화가로 할게. 괜찮지?”
“………”
그는 유치장으로 돌아와 맥없이 주저앉았다. 화가들은 쇠창살을 붙들고 격렬하게 항의하고 있었다. 그러나 벽에 기대어 앉은 그는 완전히 혼이 빠진 모습이었다. 그가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왜 자신이 여기에 잡혀와 있느냐가 아니었다. 자신이 목수라고 아무리 항변해도 받아주지 않는 현실이 비참할 뿐이었다. 차라리 자신이 화가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도대체 무엇이 잘못되었을까? 그는 이 요지경 같은 상황은 물론, 자기 자신도 잘 모르겠는 혼란에 빠져버렸다. 눈뜬장님처럼 살아온 자신의 삶이 부끄러워졌다.
유치된 지 사흘이 넘자 경찰도 간첩단 조작을 포기한 모양이었다. 따뜻한 봄햇살이 창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경찰들도 화가들도 나른한 오후에 맥없이 늘어져 있었다. 중년 경찰 하나는 아예 유치장 창살 앞에 의자를 끌어다놓고 화가들에게 자녀의 대학진학을 상담했다. 그는 딸아이가 무슨무슨 상을 받았으며 지금 어느 대학을 염두에 두고 있는데 입학이 가능할지 물었다. 유치장 안에는 그가 넣어준 신문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사회면 한 귀퉁이에는 ‘청년화가 7명 벽화작업중 연행’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려 있었다. 연행된 화가들 이름 끝에 목수의 이름도 있었다.
칼을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소년이 있었다. 쇳조각을 갈아서 손수 만든 칼로 아홉살 손아귀에 쏙 들 만큼 작았다. 손잡이는 검정 고무줄로 감아서 안정감이 있었다. 소년은 일본식 목조 교사(校舍)가 남아 있는 오래된 학교를 다녔다. 학교는 중산층 주택가에 자리잡고 있었다. 학생들은 주로 그 주택가의 자녀들이었고 산동네 아이들이 일부 섞여 있었다. 정년퇴임을 눈앞에 둔 늙은 담임은 어린아이들을 가르치기에는 지나치게 무뚝뚝했다. 아이들에게 교과서 베끼기나 구구단 암기를 시켜놓고 자신은 교실 뒤쪽 구석진 책상에 앉아 볕을 쬐며 조는 시간이 많았다. 아이들이 떠들어도 내버려두었고, 숙제검사 따위는 하지 않았다. 한 학기가 다 되도록 풍금 뚜껑을 열지 않아 학생들은 2학년 교과과정에서 배워야 할 노래를 배우지 못했다.
오전수업을 마치고 학생들이 돌아가고 나면 그는 짜장면을 배달시켜서 먹고 오후내 졸다가 퇴근했다. 그렇다고 아이들에게 전혀 애정이 없는 건 아니었다. 쉬는 시간이면 그는 곧잘 아이들의 연필을 깎아주곤 했다. 딱히 즐기는 일은 아니었으나 그 일만은 꽤나 열심히 했다. 그가 도루코로 깎아낸 연필은 자동연필깎이에서 나온 것처럼 매끄러웠다. 아이들은 연필이 부러지거나 뭉툭해지면 어느때고 그에게 내밀었다. 그게 무슨 선생님의 관심을 끄는 일이라도 되는 양 학생들은 서로 경쟁하듯이 연필을 맡겼다. 때로는 오십명이나 되는 학생들이 맡긴 연필이 책상에 쌓여서 깎는 일이 사흘씩이나 밀리곤 했다.
어느날 한 아이가 받아쓰기 시험에서 빵점을 맞았다. 답을 써야 할 노트는 백지인 채로 제출되었다. 아무리 무심한 선생이라도 이런 무례한 학생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교사 앞에 불려와 선 아이는 기계총 성성한 빡빡머리에 입성이 꾀죄죄했다. 이 아이가 자기 반 학생인지 의심스럽다는 눈초리로 교사는 소년을 바라보았다. 그만큼 아이는 존재감이 없었다.
“왜 답을 안 썼냐?”
몇번이나 다그쳤으나 녀석은 입을 열지 않았다.
“걔는 연필이 한 자루뿐이래요.”
다른 학생들이 일러바쳤다.
“네 연필이 어떤 거냐?”
교사는 책상 위에 놓인 연필 무더기를 헤쳐 보였다. 얼굴이 빨개진 아이는 마지못해 허리를 굽히더니 쓰레기통에서 몽당연필을 집어들었다. 그건 교사가 더이상 깎을 수 없어서 쓰레기통에 버린 연필이었다. 교사는 좀 짜증이 났다. 연필을 빌려서라도 쓰지 그랬느냐고 나무라자 아이는 끝내 눈물을 떨어뜨렸다. 딴에는 자존심이 무척 상한 눈치였다. 그날 이후로 교사는 될 수 있으면 아이들의 연필을 그날 다 깎아주려고 노력했다. 그건 보통의 일이 아니었다. 며칠 만에 그는 그 일을 잊어버렸고 다시 깎아야 할 연필들이 책상 위에 숙제처럼 쌓였다.
어느날 자습하는 학생들 사이를 오가던 교사는 문득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교실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자신의 발자국이 선명하게 찍힌 교실바닥에는 분필가루가 뿌옇게 내려앉아 있었다. 교사는 눈살을 찌푸리며 주위에 앉은 학생들을 훑어보았다. 바로 옆에 몸을 움츠리고 고개를 숙인 학생이 앉아 있었다. 연필 때문에 빵점을 맞은 바로 그 녀석이었다.
교사는 녀석의 바지가 분필가루로 더럽혀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교실바닥을 그렇게 만들어놓은 범인임이 분명했다. 교사는 아이에게 손을 펴보라고 했다. 소년은 오른쪽 주먹을 꽉 쥔 채 펴지 않았다. 교사는 소년의 손가락을 강제로 벌렸다. 손아귀에 든 건 칼이었다. 선생은 짧게 탄성을 질렀다. 그는 아이의 다른 쪽 손도 펴게 했다. 그쪽에서는 분필이 나왔는데 장승이 조각되어 있었다. 아이가 깎은 것인가 싶게 장승은 아주 정교했다. 교사는 아이에게 가방을 풀어 내용물을 책상 위에 쏟게 했다. 책과 공책 틈에서 나무토막과 분필 들이 쏟아졌다. 하나같이 무슨 형상을 조각한 것들이었다. 각기 다른 모양의 장승이 몇개 더 있었으며 손오공의 여의봉이라든가, 검, 손가락, 심지어는 교사 자신의 얼굴로 짐작되는 눈 감은 노인의 흉상도 있었다. 꽤 오랫동안 익힌 솜씨인 듯 조각들은 제법 그럴듯했다.
“수업 끝나고 남아라.”
교사는 벌로 아이에게 책상 위에 쌓인 연필을 깎게 했다. 오후 한나절, 아이는 그 일을 제법 능숙하게 해냈다. 교사가 낮잠에서 깨어났을 때 아이는 작은 어깨를 옹송그리고 앉아 연필을 깎고 있었다. 서른개 남짓한 연필 끝이 한결같이 가지런했다.
“앞으로 나를 도와서 연필을 깎도록 해라. 그럼 상으로 새 연필을 주겠다. 그리고 더이상 분필을 훔치지 마라.”
소년은 칼을 되돌려받았다. 그는 쉬는 시간마다 연필을 깎았다. 아이들이 앞다투어 그에게 연필을 깎아달라고 했다. 소년은 칼을 놀리는 일이라면 뭐든지 좋아서 그 일을 기쁘게 했다.
졸지에 화가가 된 그는 며칠 동안 구류를 살다가 풀려났다. 남들은 웃자고 그를 두고 관제화가라 부르곤 했다. 다시 목수로 돌아왔지만 그는 더이상 일을 다닐 수 없었다. 그는 실의에 빠져 매일 누워 지냈다. 그러던 어느날 문득 그는 15년 전에 떠난 자신의 고향 산동네를 찾았다.
그는 가파른 길에 서서 하나도 변하지 않은 고향 동네를 바라보았다. 산중턱까지 덕지덕지 붙어 있는 붉은 지붕들, 여전히 지저분하고 냄새나는 냇물, 유난히 흰 빨래들. 얼굴이 피투성이가 된 아낙이 농약병을 들고 가파른 골목길을 불불 기어오르고 있었다. 여자의 치맛자락에는 소년이 달라붙어 울면서 따라가고 있었다.
소년이 5학년이 되었을 때 산동네에 새로 학교가 생겨서 분교를 하게 되었다. 소년은 산동네에 살았으므로 그쪽 학교로 옮겼다. 원래 그의 아버지는 벨트 하청업체를 운영했다. 지하실에 차린 공장에서 노동자 세 명을 데리고 일을 했는데 어느해 여름에 물이 들어서 가죽 원단을 다 버려야 했다. 몇년 동안 번 돈이 한순간에 날아갔다. 아버지는 손해를 만회하려고 새로운 버클 개발에 승부수를 던졌다. 아버지가 개발하려는 버클은 구멍 없이도 벨트를 자유자재로 조이고 풀 수 있는 반자동식이었다. 아버지는 큰 공장에 다니는 기술자를 비싼 임금을 주고 고용했다. 그러나 벌써 일년째 그 일은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으면 술을 마시고 걸핏하면 아내를 때렸다. 그때마다 아내는 농약병을 들고 산으로 올라갔다. 소년은 어머니가 자신을 버리고 도망갈까봐 늘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다. 아이는 너무나 예민해져서 멀리서 집 안의 풍경만 봐도 부모가 싸웠는지 안 싸웠는지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소년은 새 학교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우선 네모난 콘크리트 건물이 주는 딱딱함이 싫었다. 전에 다니던 학교의 타르칠을 한 목조 교사가 그리웠다. 그뿐이 아니었다. 옛 교정에는 아름드리 나무들이 울울했는데 이 학교에는 제 손목 굵기도 안되는 앙상한 나무들이 드문드문 심어져 있을 뿐이었다. 바람이 거칠 데 없이 들이쳐서 마사토 먼지가 뿌옇게 일곤 했다. 무엇보다도 운동장이 너무 작았다. 축구라도 하려 치면 울타리를 넘은 공이 꼬막껍데기 같은 지붕에 얹히기 일쑤였다.
소년은 부모에게 말했다.
“전학 보내주세요.”
“뭐라고? 뭣 때문에 전학을 보내달라는 거냐?”
“운동장이 너무 작아요.”
“이런 철딱서니없는 놈 봤나. 공부하기 싫으니 별 핑계를 다 대는구나.”
아버지는 혼찌검을 내서 아들을 학교로 내몰았다.
소년은 수업을 빼먹는 날이 많았다. 아이들이 학교로 가는 길목에서 그는 길을 거슬러 산으로 올라갔다. 그는 숲을 돌아다니거나 계곡에 앉아 놀기도 했고, 나무토막을 주워다가 무엇인가를 새기며 시간을 보냈다. 일명 ‘산공부’를 시작한 것이다. 점심때가 되면 학생들처럼 도시락을 까먹었다. 낮잠 잘 곳도 필요해서 그는 싸리나무를 꺾어다가 자신만의 아지트를 만들었다. 그곳에서 소년은 만화 ‘허리케인 죠’를 읽고 그것들을 베꼈다. 빨간 모자를 쓴 주인공 죠의 캐릭터도 좋았지만, 체력을 다 소진한 죠가 글러브를 벗은 채 링 코너에서 숨을 고르고 있는 장면은 늘 그의 가슴을 뛰게 했다. 그 장면을 모사하는 데는 일흔여덟 가닥의 굵은 선들이 힘차게 뻗어나가야 했다. 소년은 죠 같은 고아소년은 아니지만 장차 그처럼 챔피언이 되겠다고 결심했다.
그는 몇차례에 걸쳐 정학을 당했다. 그때마다 부모와 선생으로부터 훈계와 체벌이 따랐다. 그는 정말 죠처럼 고아가 되길 간절히 바랐다. 실제로 어느날 그는 산에서 내려가지 않았다. 며칠 전부터 그는 비상식량으로 산도와 웨하스와 라면땅을 사다가 아지트에 모아두었다. 아지트 옆 소나무 가지에는 이제 그가 눈만 뜨면 두들겨야 하는 쌘드백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이 모든 것을 허리케인 죠가 가르쳐주었다. 소년은 숲속 싸리나무 아지트에서 하룻밤을 지냈다. 밤은 춥고 무서웠지만 내려가서 부모님을 만나고 선생님에게 불려갈 일이 더 끔찍했다. 그는 마음이 흔들릴 때마다 죠를 생각했다. 이 모든 역경을 이겨야만 죠가 될 수 있다고.
동이 채 트기 전에 아버지가 공장 노동자들을 데리고 나타났다.
“싸가지없는 자식.”
손전등 불빛 너머에서 아버지는 다짜고짜 뺨부터 올려붙였다.
소년의 어머니는 문을 걸어 잠그고 방바닥에 농약병을 놓았다.
“대호야, 니가 또 그러면 엄마는 죽을란다.”
이듬해 졸업을 앞두고 아버지는 드디어 새로운 버클을 개발했다. 시제품을 만들어 동대문시장에 내놓으니 반응이 좋았다. 아버지는 사채까지 그러모아 본격적인 생산채비를 갖췄다. 예상대로 버클은 날개돋친 듯 팔려나갔다. 그러나 그도 잠깐이었다. 며칠 가지 않아 여기저기서 똑같은 버클이 쏟아져나왔다. 기술을 도용한 크고 작은 업체들이 디자인을 더 세련되게 고쳐 내놓은 것이었다. 1등은 망하고 2등이 성공한다는 이쪽 판의 불문율을 아버지는 무시했던 것이다.
소년의 가족은 서울 변두리의 소읍으로 이사했다. 그곳은 소년이 나고 자란 도시와는 달리 들판 가운데에 있었다. 아버지는 값싼 창고를 빌려 벨트공장을 다시 차렸다. 이제 어머니가 유일한 노동자인 작은 공장에서 아버지는 자신이 개발한 버클을 하청받아 제조했다. 폭음은 더 심해져 매일 얼굴을 맞대고 있는 아내를 때렸다. 아내는 농약병을 품고 들판으로 도망다녔다.
이듬해 소년은 읍내의 실업전수학교에 입학했다. 그곳은 중학교에 진학 못한 가난한 학생들을 위해 설립된 농업학교였다. 학비가 무료인 대신 중등과정 졸업장이 나오지 않았다. 실내수업은 거의 없고 주로 들로 나가 실습하는 일이 많았다. 농부를 길러내는 학교였기 때문에 실습이 중요하다고 했다. 그것은 실습이라기보다 작업이었다. 새마을운동 부역에 동원되어 도로공사장에 나가기도 했고, 강변에서 퇴비용 갈대를 베기도 했다. 개인농장 작업에 동원되는 일은 다반사였다. 학교는 농장에서 사례비를 받아 챙겼다. 어떤 날은 가방을 비우고 산에 올라 하루종일 오리나무 열매만 따모은 적도 있다. 읍을 지나는 국도가 있었는데 학생당 80미터씩 구역이 배당되어 그 관리도 해야 했다. 비가 온 다음날이면 삽을 들고 나가 웅덩이를 메우고 돌을 골라냈다. 오월경에는 길가에 코스모스 모종을 심어야 했다. 학업성적은 누가 더 많은 오리나무 열매를 모았는지, 부역을 몇번이나 나갔는지, 도로 관리상태가 어떤지로 결정되었다.
소년은 그런 학교를 일년 남짓 다녔다. 재미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맨발로 흙을 밟는 촉감은 새로운 경험이었다. 묘하게도 그 촉감에 취하면 몸은 늘어지고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주름이 깊게 팬 농부들을 볼 때면 그들도 어린 나이에 들로 나왔다가 그렇게 단조로운 생활에 취해 한 세월을 훌쩍 보내버린 것 같았다. 초목의 이름을 익히고, 작물들이 기후의 미세한 변화에 적응하며 자라는 것을 지켜보는 일은 경이로웠다. 친구들은 도회지 아이들보다 훨씬 어른스러웠다. 술과 담배의 맛을 알아버린 아이도 여럿이었고, 미꾸라지를 잡아 판 돈으로 여자를 샀다는 친구도 있었다. 닷새에 한번꼴로 가출사건이 일어났다. 대부분 서울로 가는 길목의 군경합동검문소에서 붙잡혀 되돌아왔지만 더러 도보로 가출을 감행해서 성공한 친구도 있었다. 그런 친구들은 이내 학교에서 영웅이 되었다. 그렇게 가출은 끊임없이 부추겨졌다.
어느날 그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마당에 상이 엎어져 있었다. 툇마루에 쓰러져 잠든 아버지는 잠꼬대처럼 욕설을 씨부렁거렸다. 어머니는 들판으로 도망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아버지 곁으로 다가섰다. 주머니 속에서 칼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는 몇번이고 빈손을 빼서 손을 문질렀다.
마침내 소년도 가출을 결심했다. 집을 나서는 그에게 가장 마음에 걸리는 이는 어머니였다. 하지만 어머니가 제 곁을 떠날까봐 계속 두려워하느니 자신이 떠나는 게 더 나을 것 같았다. 그는 스무살이 되기 전에 성공해 돌아오겠다는 편지를 어머니에게 남겼다. 막상 집을 나서니 아주 오래전부터 계획한 일처럼 마음이 가벼웠다. 그는 서리 내리는 늦겨울 들판을 걸어 서울로 향했다.
가출한 아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세 가지뿐이었다. 신문배달이나 구두닦이 아니면 식당종업원이었다. 그의 첫 직장은 신문보급소였다. 그는 수송동, 삼청동, 안국동, 송현동 일대에서 조간 300부, 석간 150부를 배달했다. 한달을 일하고 받는 임금은 6만원이었다. 한겨울 새벽 네시에 신문을 받아 골목을 돌다보면 몸에서는 땀이 흘러도 발가락과 손가락은 남의 살처럼 시렸다. 아침공양 짓는 조계사 아궁이에서 그는 손발을 녹였다. 중국음식점 곁방에서 기거하는 친구에게 빌붙어 지내다가 먹는 것이나 배불리 먹자는 생각으로 그는 내처 그 식당에 취직해버렸다.
“짜장이요!”
어느날 송현동 복덕방에 배달을 갔다가 그는 낯익은 사람과 맞닥뜨리고 말았다. 비좁은 복덕방에 장기판을 벌여놓고 앉은 늙은 주인은 초등학교 2학년 때 담임이었다. 선생은 그의 더벅머리를 해작여 기계총 흉터를 확인하곤 머리를 툭 쳤다.
“칼잽이 김대호 맞구나. 네 이놈, 집을 나왔지?”
선생은 아버지가 찾아올 때까지 그의 귀를 잡고 있었다.
“칼 다루는 데 재간이 있으니 어디 사시미집 같은 델 보내보오.”
아버지에게 인계하며 선생이 말했다.
집은 변한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부모의 공장에서 일을 거들었다. 어머니는 어떻게든 학교에 다시 보낼 궁리를 했다. 반면 아버지는 이미 포기한 눈치였다. 벨트공장 옆에는 스테인리스 그릇을 찍어내는 프레스공장이 있었는데 한창 스테인리스 그릇이 유행하기 시작해서 아버지는 그를 그 공장으로 보내 일을 배우게 했다.
바깥바람을 한번 맛본 그는 몸이 근질거려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머잖아 그는 다시 가출을 감행했다. 이번에는 설렁탕집에 취직했다. 돈이 좀 모이면 체육관에 등록해 복싱을 배울 생각이었다. 잠자리는 식당에 딸린, 전깃불도 들어오지 않는 다락방이었다. 주인은 촛불도 못 켜게 했다. 식당 물건들이 사방 벽을 채우고 가운데 기둥 옆에 겨우 누울 자리가 남았다. 그는 캄캄한 다락방에서 잠자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하루는 식당 탁자를 닦다가 그는 손님이 두고 간 물건 하나를 발견했다. 중년의 사내가 앉았다 간 자리였다. 묵직한 물건은 신문지로 돌돌 말려 있었다. 목수들이 사용하는 끌이었다. 주인이 찾으러 올 때까지 그는 연장을 보관하기로 했다. 다락방에 드러누웠자니 왠지 손이 근질거렸다. 그는 방바닥을 더듬어서 끌을 잡았다. 선뜻한 감촉이 전해지자 마치 어둠속에서 날선 빛에 노출된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연장 날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어보았다. 날은 아주 잘 벼려져 있었다. 그는 아주 오래전 쇠붙이를 주워다가 칼을 만들던 때의 일을 떠올렸다. 운동장 스탠드의 시멘트벽에다가 며칠 동안 칼 모양이 나도록 갈았다. 쇠는 금방 더워져서 몇번이나 여린 살을 다치게 했다. 칼 모양이 갖춰지자 그는 사포와 가죽을 구해다가 날을 벼렸다. 그 칼로 무엇을 해보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그저 칼을 만들고 싶었고, 칼을 만들다보니 세상에서 날이 가장 잘 선 칼을 갖고 싶었을 뿐이다. 칼에 대한 기억이 떠오르자 이내 결 좋은 나무를 깎아내던 칼질의 감촉이 되살아났다. 그는 저도 모르게 끌을 그러쥐었다. 그는 방 가운데에 솟은 기둥에다가 끌을 밀어보았다. 끌은 기둥을 하얗게 밀어냈다. 그는 밤새 손끝으로 더듬으며 기둥 밑동에 어머니의 얼굴을 새겼다.
이튿날부터 그는 다락방에 촛불을 밝혔다. 불빛이 새어나가지 않게 창문을 담요로 가렸다. 그는 매일 밤 일기를 쓰듯 기둥에 끌을 댔다. 무엇을 새기고 조각할 것인지 정해진 건 없었다. 때로는 지나간 날들의 기억이 새겨졌고, 어떤 날은 꿈이 새겨지기도 했다. 잡지 속의 나부(裸婦)들이 새겨지기도 했고, 콜라병과 농약병이 새겨지기도 했다. 그 일을 시작한 후로 다락방은 그의 아지트가 되었다.
“어디에서 뒹굴었기에 옷에 나뭇가루 천지냐?”
가끔 주인여자가 나무라듯이 말했다.
“혹시 쥐가 들어 나무를 쏠고 있는 거 아냐?”
그때마다 그는 주인 내외가 다락방으로 올라가지 않을까 조바심을 쳤다.
기둥에 끌을 댄 지 한달쯤 지날 무렵이었다.
“이 자식아, 아예 서까래를 도려내지 그래!”
배달에서 돌아온 그를 주인사내가 다짜고짜 길바닥에 쓰러뜨리고 밟기 시작했다. 그는 몸을 웅크리고 손으로 머리를 감싼 채 길바닥을 굴렀다.
“저놈 뒀다가는 아주 집을 결딴내겠어!”
주인여자가 옷가지와 가방을 길바닥으로 내던지며 소리쳤다.
“아무리 철이 없기로서니 기둥을 깎는 놈이 있어? 어디 망해먹으라는 짓이지 그래……”
그가 없는 사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는 짐작이 가고도 남았다. 누군가 주인사내를 붙들고 말렸다. 주인사내가 침을 뱉어놓고 물러나 식당문을 닫는 소리가 들렸다.
“괜찮냐?”
겨드랑이로 누군가의 손이 들어왔다.
목소리를 듣고 그는 허리케인 죠가 지금 그의 옆에 와 있다고 생각했다.
“이거 참말로 미안시럽구나.”
한 사내가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필 니가 없는 사이에 올 게 뭐란 말이냐.”
사내는 땅바닥에 널브러진 소년의 옷가지와 가방을 주섬주섬 챙겨 들었다.
“날 따라가자. 이름이 뭐시냐?”
소년은 터진 입술을 실룩여 웃었다.
“대호…… 김대호예요.”
그는 절뚝거리며 사내를 따라나섰다. 사내의 가방에서 연장 부딪는 소리가 들렸다.
“난 박씨다. 목수지.”
유치장에서 나온 지 한달 만에 그는 연장가방을 쌌다. 지방에서 일을 하는 박씨로부터 함께 일을 해보자는 연락이 왔다. 그는 기차역에 가기 위해 시내버스에 올랐다. 학생 하나가 일어난 자리로 그는 걸어갔다. 좌석에는 학생이 두고 간 신문이 놓여 있었다. 그는 신문을 치우지 않고 그대로 깔고 앉았다. 집회 때문에 도로는 극심한 정체였다. 그는 무료함을 달래느라 엉덩이 밑에 깔린 신문을 빼들었다. 무심코 신문을 뒤적이던 그의 눈에 충격적인 사진 한장이 들어왔다. 피를 흘리며 쓰러진 대학생 사진이 대문짝만하게 인쇄되어 있었다. 갑자기 그는 사진 속 대학생이 마치 자신의 모습이라도 되는 듯이 격정에 휩싸여 좌석에서 벌떡 일어났다.
“내려주세요.”
그는 내린 자리에서 한참을 서성였다. 자신이 무엇을 하기 위해 내린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이내 약국이 눈에 띄었고 그는 그곳으로 뛰어들어갔다.
“약사님, 이 학생이 살 수 있을까요?”
그는 다짜고짜 약사에게 신문을 내밀었다. 뜨악해 섰던 약사가 고개를 저었다.
“살기 힘들 것 같은데요.”
그는 무거운 연장가방을 둘러메고 곧장 대학생이 후송된 병원으로 달려갔다. 경찰들이 도로를 몇겹으로 막아서 있었고, 그 너머로는 학생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그는 병원이 건너다보이는 길가에서 하릴없이 서성였다.
이미 기차도 놓친 그는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그를 휩싼 열기는 좀처럼 식지 않았다. 그는 충격에서 헤어날 수가 없었다. 그는 나무판자에다가 신문의 사진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튿날 옆방에서 자취하는 대학생이 그것을 보고 말했다.
“형, 이것을 스무장만 천에 찍어서 가져갈게요.”
그는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그날 오후에 옆방 대학생이 동료학생들과 함께 다시 나타났다.
“형, 여기저기서 더 없느냐고 난리예요.”
대학생들은 그의 자취방을 작업장 삼아 판화를 수천장 찍어갔다. 대학생을 추모하는 시민, 학생들의 가슴에 그의 판화는 리본처럼 걸렸다. 그는 학교로 불려갔다.
“아저씨, 이 그림을 크게 그려서 건물에 걸 수는 없을까요?”
그는 별로 어렵지 않을 것 같았다. 집을 짓듯 먹줄을 퉁겨서 큰 천에 그리면 되리라 생각했다. 그는 곧바로 작업에 들어갔다. 바람에도 잘 견딜 만한 질긴 텐트천을 구했다. 오랜 목수생활에서 얻은 지혜였다.
학교 건물벽에 그의 큰 그림이 걸렸다. 장장 5미터 너비의 대형그림이었다. 사람들은 이를 두고 ‘걸개그림’이라고 불렀다. 그는 학교를 떠나지 않았다. 각지에서 학생들과 지식인들이 영안실 주변으로 속속 집결하고 있었다. 대학생의 장례식이 가까워지면서 세상이 뒤집어질 것처럼 들썩거렸다. 전국에서 집회가 열렸고 데모 대열에는 직장인들까지 가세했다. 거리는 연일 최루탄 연기로 자욱했다.
“당신이 저 걸개그림을 그렸소?”
청년 화가들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 그때마다 그는 부끄러움으로 얼굴이 벌게졌다.
그는 화가들과 함께 대학생의 장례식에 사용할 대형 영정을 준비했다. 영정 크기가 결정되었다. 영정은 1톤 트럭에 부착하여 이동하기로 되었고, 그 이동로도 결정되었다. 문제가 되는 걸림돌은 이동로 중간에서 만나게 되는 육교였다. 장례위원회에서 구청에 확인하여 육교 높이를 확인한 자료를 보내왔다. 설계팀에서 도면이 넘어왔다. 육교 높이는 4미터였다. 그 높이에 트럭의 화물적재함 높이를 감안해서 영정 크기가 재조정되었다. 영정틀 제작은 목수인 그에게 맡겨졌다. 그는 밤마다 설계도면을 가지고 작업장을 빠져나와 고갯마루에 있는 육교 위에 서곤 했다.
드디어 장례식 날이 돌아왔다. 영정차가 앞서가고 만장이 그 뒤를 따랐다. 조문 인파가 거리를 가득 메웠다. 장례차량이 육교 아래 이르렀을 때였다. 영정차가 그 자리에 멈추었다. 백만 인파도 술렁거리며 그 자리에 멈춰섰다. 육교 높이 계산이 틀렸는지 영정이 육교에 한뼘 정도 걸릴 판이었다.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높아갔다. 영정 제작팀은 당황스러웠다.
군중 속에 서 있던 목수가 달려와 트럭 위로 뛰어올라갔고, 이내 영정은 반으로 접혔다. 그건 아무도 상상하지 못한 광경이었다. 그는 영정 도면을 받았을 때 한가지 문제점을 발견했다. 그의 경험으로 도로는 끊임없이 아스팔트 덧씌우기 공사를 하기 때문에 높이가 상승하게 마련이었다. 그는 만일을 대비해 영정틀 중간에 경첩을 설치했던 것이다.
육교 아래를 무사히 통과한 영정차량은 다시 영정을 세우고 전진해갔다. 목수는 군중들 뒤로 처져서 이마의 땀을 훔쳐냈다.
아버지가 복대를 두르고 마당으로 나왔다.
“그 그림은 잘 개어 둬.”
“왜 아직 안 돌려줬어요?”
나는 멍석처럼 그림을 말며 물었다.
“갸가 언제 집 두고 사는 거 봤냐? 목수처럼 노상 돌아댕기제. 손바닥만한 그림도 아니고 저 큰 걸 어디에 간수하라고 돌려주겄냐.”
“아부지, 이런 그림은 집안에 걸어두라고 그린 그림이 아니에요.”
“그 정도는 나도 안다. 그란다고 인자 어디 담벼락이나 길바닥에다가 그런 그림 내거는 세상이냐. 다 역사가 된 그림인게 인자 집이나 크게 지으면 넣어둬야제.”
나는 그림을 질질 끌어서 다시 창고로 넣었다. 아버지는 허리가 아파서 못 도왔고, 어머니는 그 그림이 다시 창고로 들어가는 게 영 못마땅한 눈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