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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표명희 表明姬
1965년 대구 출생. 2001년 창비신인소설상으로 등단. 주요작품으로 「야경(夜景)」 「실리카겔」 「3번 출구」 「탑소호족 N」 등이 있음. pyo7788@hanmail.net
新어가행렬
전철 문이 열리자 오렌지전사는 반사적으로 튀어나간다. 그는 사람들 틈을 이리저리 빠져가며 지하도를 달리다 마지막 계단을 앞두고 멈칫한다. 출구에 선 사람들이 주춤거리며 하나 둘 우산을 펼쳐들고 있다. 비가 오는 모양이다. 일기예보를 들었지만 집을 나설 때만 해도 비 소식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맑은 날씨였다. 번거롭게 우산을 챙기고 싶지 않았다. 지금 문제는 비가 아니라 약속시간이 20분이나 지났다는 사실이다. 그는 단숨에 계단을 올라 사람들을 비집고 나선다. 다행히 맞아도 그만일 정도의 가는 이슬비다. 모임장소는 광화문 들어서서 왼쪽 담장 앞. 인터넷 걷기동호회 뚜벅이들의 ‘우작탈’(우리들의 작은 일탈) 모임이 있는 날이다. 물귀신이 제안한 모임이라 일명 ‘물귀신 작전’으로 이름이 붙여졌다. 오래전부터 별러오던 행사였는데 이번에야 참가할 수 있게 되었네요. 우리 같이 가요. 함께하실 분 빨랑빨랑 리플 달아주셈. 그 아래 참가희망 리플이 예닐곱 개 정도 달려 있었다. 사실 그는 참가신청 리플을 달지도 않았다. 예고없이 불쑥 그들 앞에 나타나고 싶었다. 오렌지전사다운 방식으로. 일기예보 탓이었는지 막판에 여러 명이 참가신청을 취소하는 바람에 그는 어쩌면 물귀신과 단둘이 하는 걷기모임이 될지도 모른다는 꿈에 부풀었다. 우리 같이 가요. 그 구절을 보는 순간 그는 물귀신이 꼭 자신에게 한 말처럼 괜스레 가슴이 설레었다. 그런 환상과 기대 때문에 그는 며칠 잠까지 설쳐가며 오늘의 모임을 준비했다. 그걸 펼쳐놓을 기회만 생긴다면 십중팔구 물귀신의 관심을 끌 수 있을 것이라는 꿈에 부풀어……
닉네임이요? 워낙 물을 좋아해서요. 어릴 적 수영대회에서 메달을 딴 적도 있어요. 물개나 돌고래보다 수영을 잘하는 게 뭐가 있을까 고민하다 떠올린 게 그거예요. 물귀신이라는 닉네임에 사람들이 관심을 보였을 때 그녀의 설명이었다. 혹시 늦은 밤, 강남역 근처에 오면 언제든 연락하세요. 젊은 수컷 회원들의 눈길이 일제히 그녀에게로 쏠렸다. 퇴근 후 편의점에서 ‘알바’하거든요. 밤 11시 이후에 오시면 쌘드위치 공짜로 드릴 수 있어요. 유효기간에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는 거라 더 감칠맛 나요. 사람들은 킬킬대며 물귀신다운 넉살이라고 입을 모았다. 투잡스라는 닉네임이 하나 더 붙을 정도로 그녀는 퇴근 후에도 알바를 뛰는 억척이었다. 그나저나 정말 귀신이 곡할 생활방식이야, 물귀신은…… 외계인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핸드폰 없이 살 수 있지? 핸드폰 없는 그녀보다는 핸드폰을 가진 다른 사람들이 더 불편해했다. 신세대답지 않은 그녀의 생활방식에 사람들의 추측은 분분했다. 카드빚 때문일 거야. 아냐, 핸드폰도 없이 사는 저런 억척이 카드빚을 졌을 리가 없어. 되레 카드회사가 물귀신한테 빚을 졌다면 몰라도. 그건 그러네. 투잡스답게 그녀는 늘 바빴다. 이제 가봐야겠어요. 일하러 가야 하거든요. 일요일 정기모임 때도 물귀신은 오전 일정만 참가하고는 사라졌다. 계모 슬하의 콩쥐처럼 분명 밑 빠진 독에 물을 길어다 붓거나 하는 고달픈 일이 기다리고 있을 것 같지만 그녀는 언제나 밝고 가벼운 걸음으로 멀어져갔다. 당돌하면서도 속내가 깊어 보이는 여자, 억척스러우면서도 여유가 있어 보이는 여자. 오렌지전사의 눈에는 물귀신이 그렇게 보였다.
경복궁이 술렁인다. 궐내 식구들이 종종걸음치며 분주한 가운데 문무대신과 왕실의 종친들이 속속 모여들고 있다. 임금이 이들을 모두 거느리고 종묘로 행차하시어 선조들께 친히 제향하는, 왕실의 제사가 있는 날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와 납일(臘日)을 합해 일년에 모두 다섯 번 치러지는 이 종묘제례는 나랏일 중에서도 단연 첫손 꼽는 의식이었다. 백성들 등뼈 휘도록 부역시켜 만든 궁궐은 버려도 신주는 지켜야 한다는 말이 조정 중신들의 입에서 공공연하게 나올 법했다.
출궁 준비가 시작된다. 침침한 창고에서 뒹굴던 창과 방패와 활과 깃발이 차례대로 나와 군졸들 손에 건네진다. 주름 펴고 먼지 떨고 광내는 일로 손들이 분주하다. 말들도 마구간에서 끌려나와 갈기가 빗겨지고 안장이 얹히고 고삐가 조여진다. 제각기 맡은 의장물에 따라 정해진 자리를 찾아 서느라 잰걸음이다. 문관은 문관끼리 무관은 무관끼리 종친은 종친끼리 활은 활끼리 나팔은 나팔끼리…… 홍동백서 조율이시 좌포우혜 우반좌갱 제상음식마냥 앞뒤좌우로 열과 줄을 맞추어 선다.
한바탕 퍼부을 거 같은데.
황금도끼가 중얼거린다. 그는 녹슨 도끼를 금박지로 잘 감싸 황금도끼로 감쪽같이 변신시킨 참이다.
주변의 몇몇 도끼와 방패들도 황금도끼의 말에 하늘을 올려다본다. 띄엄띄엄 짙은 구름이 보이긴 하지만 언뜻 봐서는 웬 뚱딴지같은 소리, 싶을 정도로 맑은 오월의 하늘이다.
빨리 일 끝내고 시원한 막걸리나 한잔했으면 좋겄네.
자넨 그저 젯밥에만 온통 정신이 팔려 있구먼.
제사에 젯밥 빼면 뭐 남는 것 있나?
건 그렇구먼.
조상 덕에 배 불리는 거지, 흐흐. 할애비 체면 살아 좋고 손주놈 배불러 좋고. 과부 좋고 홀애비 좋고……
여, 거기 도끼들, 모여서 구시렁대지 말고 빨랑빨랑 줄이나 맞춰 서라구.
도끼와 방패, 활과 장검 무리가 이리저리 움직이며 또 한번 술렁인다.
대열이 얼추 정비되자 관원이 옥새를 받들고 임금을 문안한다.
전하, 채비가 다 됐습니다. 출궁 준비를 서두르시지요.
임금은 마침 버선끈을 매는 중이었다.
원, 버선끈 하나 매는 것도 이리 복잡해서야……
동트고 해 넘어갈 때까지 예와 법식을 논하던 유림들이 버선끈 하나 소홀히 했으랴. 색깔과 생김새는 물론 끈 매는 방법도 두툼한 서책에 소상하게 적혀 있는 대로 따라야 했다. 어디 버선끈뿐이었겠는가. 첫 술을 올리는 제주인 임금은 이날을 위해 오례 중 으뜸인 제례의 법식에 따라 일주일 전부터 몸과 마음을 정결히 해야 한다. 음주와 가무를 즐기거나 여색을 탐해서도 안되고 사나흘 전부터는 문상이나 병문안도 하지 않으며 참수형에 관한 문서에는 붓끝도 대지 말아야 한다.
‘보는 것이 믿는 것’이란 동서고금의 진리는 통치에도 두루 먹혀들어 어가행차 때 군주의 위용은 백성들의 존경과 충성심을 단번에 샘솟게 할 수 있었다. 하여 이날 임금의 차림새는 으뜸가는 준비절차였다. 먼저 바지와 저고리, 중단과 상을 입고 그 위에 아홉 가지 수가 놓인 구장복―이 또한 장유유서의 원리에 따라 중국 황제의 십이장복과 황세자의 십장복 다음에 해당하는 것이다―이라는 검은색의 대례복을 입는다. 그 위에 갖가지 장신구들이 덧붙여지며 의상은 형형색색 다채로워진다. 뒤로는 대대를 두르고 앞에는 가슴에서 무릎까지 드리우는 앞치마 모양의 폐슬을 찬다. 허리에는 붉은색 실로 짠 수와 패옥을 걸치는데 수는 허리 뒤쪽에, 옥으로 만든 패는 앞으로 길게 늘어뜨린다. 거기다 오색 구슬이 달린 면류관을 쓰고 옥으로 된 예물을 들면 누구든 한눈에 그가 하늘 아래 최고 권력자임을 알아볼 수 있다. 군계일학(群鷄一鶴)이 아니라 가히 군학일작(群鶴一雀)이라 할 만한 모습으로 새로이 탄생하는 것이다. 만백성의 어버이며 지존의 존재인 임금은 하늘이 보낸 인물답게 멀리서도 금세 알아볼 수 있는 휘황한 모습이어야 한다.
모름지기 옷은 날개라 했건만 이건 숫제 짐보따리 둘러멘 것 같구먼……
벌써부터 진이 빠진 임금은 까다로운 절차의 종묘제례를 끝까지 잘 치를 수 있을지 걱정이다. 하지만 군주의 자리가 어떤 자리인가. 언감생심 어떤 피조물도 넘볼 수 없는, 바로 하늘이 만들어준 자리가 아니던가. 일거수일투족이 거추장스럽지만 임금은 속내를 말끔히 감춘 채 짐짓 근엄한 표정을 드리운다. 어흠, 큰 기침을 떨어뜨리며 어전을 나선다. 대례복 차림의 임금이 위엄있는 걸음을 떼어놓으면, 행여 용안에 한점 햇빛 혹은 한줄기 먼지바람이라도 스칠세라 양산과 부채를 높이 받쳐든 시종들이 그 뒤를 그림자처럼 따른다.
예학의 구현에 온몸을 바친 유학자들이 빼곡히 도열해 있는 왕실에서, 궁궐을 버릴지언정 신주는 포기해선 안된다는 충언을 귓불이 닳도록 들었던 조선의 임금들이 실제로 종묘의 제향을 꼬박꼬박 받들었느냐 하면, 천만의 말씀이다. 군주라는 그 절대적 지위만큼 국사 돌보느라 여력이 없었는지, 오례의 예법 중 제사의 절차가 유난히 까다로워서였는지, 아니면 버선끈을 매다가 문득 예학의 형식이라는 것에 고개가 갸웃거려진 탓인지는 알 수 없으나 임금의 친행은 극히 드물었고 대신들로 하여금 섭행케 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원컨대 전하께서는 춘하추동 사계의 큰 제사에는 친히 제향하시어 선조들께 예를 밝히고 보본(報本)의 정성을 다하시는 게 군왕의 도리인 듯하옵니다.
중신들의 간언이 있을 때면 임금은 으레 사려깊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후로도 왕이 직접 제향하는 일은 가물에 콩 나듯 했다. 그렇다고 오례 중 으뜸가는 예식인 제사가 소홀히 취급될 리는 없다. 나라의 근본과 기강을 온 백성들에게 펼쳐 보이는 의식인만큼 제례는 ‘오례의’에 정해놓은 엄격한 규율과 절차에 따라 성대하게 치러졌다.
임금님 행차가 있는 날이래. 어서 구경 가자.
어가행렬이 있는 날은 사대문 안 사람들도 명절 때처럼 들떠 있었다. 그것만큼 화려하고 볼만한 구경거리는 없었다. 행렬이 지나는 큰길에는 임시가게인 가가(假家)들이 철거되고 관의 지시에 따라 인근 백성들은 길을 손질하는 데 총동원되었다. 처녀와 아낙들이 길바닥의 돌을 골라내고 빗자루로 쓸고 사내들은 황토를 덮은 다음 먼지가 일지 않도록 그 위에 물을 뿌려 길을 단장했다.
이런 옘병, 임금이고 나발이고 우리가 남의 집안 제사에 왜 이 지랄을 떨어야 해. 정작 우리 아버지 제상에는 쌀밥 한그릇 못 올리면서……
흙먼지 사이로 간간이 투덜거리는 소리가 섞여나왔다.
어허, 이 사람 빙퉁그러진 성미하고는. 임금이 만백성의 어버이신데 당연히 왕실 제사를 잘 모셔야지. 자네 부친이야 하늘에서도 선대 임금들께서 책임지고 먹여주실 테니 걱정 붙들어매게. 한번 군주는 영원한 군주, 한번 백성은 세세토록 백성 아닌가.
순종을 백성의 도리로 아는 이의 위로가 바늘에 실 가듯 따랐다.
빙신, 개 풀 뜯어먹는 소리 하고 있네. 네놈은 개구락지 콧구멍에서 수염 난다 해도 상전들 말이라면 믿을 놈이여.
개중에는 그의 불평이 그저 꼬인 심사에서 나오는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이도 있었다. 투덜거림과 다독거림이 번갈아 오가며 나라님 지나갈 길은 번듯하게 단장되었다.
어, 의경들이 길을 막고 섰네. 행사가 시작되려나봐.
사람들이 중얼거리며 걸음을 되돌린다. 정신없이 내달리던 오렌지전사는 미 문화원 앞에서 멈출 수밖에 없었다. 약속장소를 겨우 백 미터 앞두고 길이 막힌 것이다. 물귀신에 대한 기대가 거품처럼 스러지자 그는 자신이 꼭 로렐라이 언덕 주변을 배회하다 뒤집힌 배의 사공 신세 같았다. 허탈감에 다리의 힘이 쭉 빠져나간다. 연 이틀 밤잠을 설친 탓도 컸다. 어젯밤에도 그는 이 행사와 관련한 자료를 찾아 인터넷 싸이트를 들락거리다 새벽녘에야 곯아떨어졌다. 그 바람에 결국 늦잠을 잤던 것이다. 게다가 수첩도 챙겨오지 않아 아무와도 연락할 수 없는 처지다.
광화문 일대 차량 흐름이 일시에 멈추었다. 늘 자동차로 덮여 있던 왕복 20차선 대로인 세종로가 광장이 되었다. 도도하게 흐르는 강물처럼 궁궐 앞으로 거침없이 뻗은, 한양 도성에서 제일 넓었던 길…… 오렌지전사는 정적이 드리운 아스팔트 앞에 넋 놓은 듯 서 있었다. 이조 예조 병조 호조 관청이 죽 늘어서 있어 육조 거리라고 불리던 자리를 지금은 미 문화원과 정부청사와 세종문화회관, 그리고 한국통신과 교보빌딩이 대신하고 있다. 출퇴근길에 혹은 순찰을 돌면서 봐오던 세종로가 안색을 싹 바꾼 것 같다. 빌딩도 광화문도 넓게 펼쳐진 도로도, 보도를 따라 죽 늘어선 사람들도 하나같이 정색을 하며 당신은 누구? 하고 그에게 능청스럽게 되묻고 있다. 야간순찰 때 느끼던 밤거리의 낯섦과도 분명 다르다.
어머 119 구조대원이세요? 아, 오렌지색 유니폼…… 그래서 닉네임이 ‘오렌지전사’구나. 물귀신은 그의 직업에 유별나게 관심을 보였다. 고딩 때 ‘분노의 역류’란 영화 보고 진짜 감동받았어요. 남자였다면 나도 한번 도전해봤을 텐데…… 영화 식으로 접근하면 배신당하기 딱 좋은 직업이에요. 고달픈 건 둘째 치고 제일 힘든 건 언제나 불행과 재난의 현장에 달려가야 한다는 사실이죠. 누군가 자신의 직업에 낭만적인 시선을 들이대면 오렌지전사는 금세 냉소적이 되었다. 그럴수록 의미있는 직업 아닌가요. 그런 일에는 환상의 베일을 한겹 씌우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그녀는 애교있는 목소리로 되받았다. 높은 곳에 올라앉아 그의 생각을 다 내려다보고 있는 듯한 눈치와 아량을 갖춘 채.
어, 차들이 한대도 없네. 도로가 텅텅 비었어, 아빠.
또랑또랑한 꼬마의 외침이 들리더니 아이 하나가 논둑의 개구리처럼 텅 빈 도로로 풀쩍 뛰어든다. 호수에 파랑이 일듯 잠잠하던 도로가 움찔 뒤척인다. 아이들이 하나둘씩 차도로 뛰어든다. 여기저기 아이들의 풀썩거림에 세종로는 금세 운동장으로 변신한다.
휘리리릭~ 이내 경찰의 호루라기 소리가 따라붙고 아이들은 다시 보도로 우루루 쫓겨나온다. 도로 위에 다시 고요가 감돌더니 9,8,7…… 소리없는 카운트다운이 시작된다. 행사의 전조를 알리듯 세종로 한복판을 향해 누군가 힘차게 달린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 남자에게로 쏠린다. 뭔가를 잔뜩 짊어진 남자는 도로 한복판까지 달려가 멈추더니 손에 든 것을 바닥에 내려놓는다. 간이 사다리가 놓이고 사내는 그 사다리 위에 올라선다. 그는 총구를 맞추듯 원통형의 커다란 망원렌즈가 달린 카메라를 광화문을 향해 들이댄다. 지금부터 일어나는 일들 하나하나를 그 렌즈로 포착하리라는 사실을 선언하듯……
행렬이 드디어 움직인다.
진회색 도포에 갓을 쓴 장정 서너 명이 깃대를 들고 성큼성큼 광화문을 걸어나온다. 6척 장신은 족히 돼 보이는 그들은 맨 앞에 서서 길을 인도하는 부령 역할이다. 그들 뒤로 무장한 군사들이 따른다. 갑옷과 창검과 방패를 갖추고 보무도 당당하게 걸으며 행차를 보호하고 군주의 위용을 드러내 보이는 역할이다. 그 다음으로 수많은 깃발과 창, 황금도끼, 화살 따위를 든 의장병과 나발, 피리, 꽹과리 등 악기를 든 취주악대가 따른다. 삘리리리리~ 흥겨운 연주가 울려퍼지자 의장대들의 움직임에 한결 생동감이 더해지고 의장물도 빛을 발한다. 황룡기, 청룡기, 백호기, 현무기가 일제히 허공을 가른다. 어느새 비는 멎어 있다. 비상하는 황룡, 포효하는 백호, 거북을 휘감은 뱀들이 공작·모란·구름 문양과 어우러져 오월 하늘을 수놓는다. 반들반들 비단천에 금실 은실 수놓인 글자들이 허공에서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金, 令, 鼓, 巡視, 淸道, 남원국악고등학교, 金鼓, 全州 李氏 宗親會, 종묘대제 봉행위원회……
행렬이 가까워오자 구경하던 사람들이 우루루 도로 갓길로 다가선다.
깃발 좀 높이 쳐들어! 눈에 확 띄도록 더 높이 쳐들라구! 그리고 걸음도 천천히 걸어. 너무 빠르단 말야. 사람들이 구경할 시간은 줘야잖아!
진행요원이 프린트 용지 말아쥔 손을 이리저리 흔들며 의장대를 향해 소리친다.
구경꾼들이 행렬을 배경으로 자신의 핸드폰 혹은 디지털 카메라를 높이 든다. 찰칵찰칵 수십수백 개의 핸드폰 액정화면이 허공에 난무한다. 말 탄 장수가 지날 때 한컷, 창검 든 포도대장을 배경으로 한컷, 각자 마음에 드는 장면을 등뒤로 깔고 맨 앞에는 자신들의 얼굴을 들이민 채 절걱절걱 저장해 담는다. ‘가랑비가 보슬거리는 광화문 대로 어가행렬 앞에서…… 2004년 5월 2일 12시 40분.’ 어떤 사진은 짧은 멘트와 함께 누군가에게 곧바로 전송되기도 한다. ‘나 지금 광화문 앞에 나와 있지롱~ ^^✱’
잘 봐 아들, 이게 어가행렬이라는 거야. 그 옛날 왕이 조상님 제사를 모시러 종묘로 행차하는 걸 그대로 보여주는 거지. 그만큼 효성이…… 엄마, 나 오줌 마려. 예닐곱살짜리 사내아이를 무동 태우고 열심히 설명해주며 따라걷는 젊은 부부가 있는가 하면, 사진 동호회 회원들, 박물관 문화강좌 수강생처럼 보이는 일행도 보인다. 오늘 무슨 행사 있어요? 어느 행인이 떼거리로 밀려드는 구경꾼과 의장행렬을 발견하고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묻는다. 글쎄요. 가장행렬인가?
우비 있어요, 우비~ 한벌에 천원~! 발 빠른 우비 장수가 중국산 비옷 꾸러미를 한쪽 옆구리에 끼고 사람들 틈을 분주하게 비집고 다닌다. ‘커피’ ‘뻔’이라는 글자가 내걸린 작은 수레도 인파 속에 드문드문 끼여 있다.
아빠, 우리도 이 사람들 따라가자. 인라인스케이트를 탄 어린 딸이 엄마 아빠의 손목을 잡아끈다. 일가족의 스케이트 바퀴가 세종문화회관 앞 보도를 나란히 굴러간다. 가족 나들이에서 풍겨나는 특유의 안정과 여유, 나른한 평화를 여운처럼 남기며…… 도로 갓길에는 순찰차와 방송사, 신문사의 촬영 차량이 합류한다.
오렌지전사의 관심은 이미 눈앞에 펼쳐지는 광경에서 벗어나 있다. 그는 행렬의 끝이 어디쯤일지에 온 신경이 쏠려 있다. 종묘제례까지 아직도 한나절이 소요되는 행사인만큼 포기하기에는 이르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물귀신 일행이 행렬 뒤에 따라붙을 건 분명해 보인다. 어머, 어쩐 일이세요? 그는 물귀신과의 조우를 상상한다. 구경 나왔죠. 저도 워낙 이런 데 관심이 많거든요. 그렇게 은근슬쩍 합류해서는 물귀신과 나란히 걸으며 책과 인터넷에서 채집해온 얘깃거리를 하나씩 펼쳐놓는 것이다. 가령 조선은 열녀 만들기에 왜 그토록 집착했으며 그것이 종묘제례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 혹은 그 시절에는 어떤 소방제도가 있었는지 등등에 관해서…… 지식이나 정보가 시험말고도 써먹을 데가 있다는 게 신비롭기까지 했다. 사실 그는 이런 행사가 있다는 것을 물귀신을 통해 처음 알았다. 그녀는 문화행사라면 뜨르르 꿰고 있는 정보통이었다. 싸이트 운영진답게 물귀신은 사람들을 결집시키는 일도 잘했다. 그녀가 처음 제안한 ‘우작탈’ 모임은 작은 역사기행이라고도 할 수 있는 테마형 걷기였다. 북촌마을 골목길 휘젓기, 사대문 안 정자 찾아헤매기, 또는 한강 따라 유유자적 서울구경 등등. 그런 테마형 걷기를 시도하다가 월드컵 때는 광화문 응원 번개를 주도하더니 급기야 촛불시위에까지 영역을 넓혀갔다. 까페 내에서도 호응이 높아 하루 만에 회원들 수십명을 집결시킬 정도였다. 바빠서 대학 갈 시간이 없었어요. 언젠가 물귀신이 자신의 가방끈이 짧은 이유에 대해 해명했을 때 회원들은 다들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어이 학생들, 옆사람 좀 봐가며 줄 맞춰서 걸어.
무전기를 든 진행요원이 포졸과 포도대장 역을 맡은 지방의 국악고 학생들에게 소리친다. 학생들은 수염을 붙이고 그럴싸하게 갖춰 입긴 했으나 가까이서 보면 사춘기 티가 역력한 앳된 얼굴들이었다. 이들은 이번 행사 덕에 서울 구경할 기회까지 얻은 터라 여기저기 둘러보며 한눈팔기 예사였다.
저 아저씨, 우리가 지금 사열식 하는 걸로 착각하는 거 아냐? 여기가 독재국가야? 바둑판처럼 줄 맞추게……
포도대장이 투덜대자 옆의 포졸이 받는다.
맞아. 줄 같은 건 좀 흐트러져야 자유로운 사회에 사는 것 같지.
시방 때가 어느 때냐. 바야흐로, 임금도 말 한마디 잘못하면 탄핵당하는 시대 아녀.
창 든 포졸 하나가 콧수염을 만지작거리며 과장된 사투리를 늘어놓는다. 그는 풀로 붙인 콧수염이 빗물에 젖어 떨어질까봐 줄곧 조바심이다.
그러고 보니 진짜 임금은 가둬놓고 가짜 임금으로 어가행렬 번듯하게 하네.
방패 든 포졸도 한마디 거든다. 그는 예행연습 때부터 줄곧 경복궁 뒤쪽으로 보이던 청와대에 관심이 쏠려 있었다. 한동안 거세게 몰아치던 탄핵반대 열풍은 헌재 판결을 열흘 정도 남겨두고 잠잠해진 상태다.
야, 시인 중에 교보란 작자도 있냐. 두보 동생인가?
누군가 가리킨 밀크커피색 유리빌딩으로 사람들 시선이 옮겨간다.
유리빌딩에 커다랗게 드리운 현수막에는 노랗고 화사한 꽃그림을 배경으로 시구 같은 한 구절이 적혀 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며 피었나니―KYOBO’ 마지막 글자에 사람들 눈이 멈칫하더니 이내 힐난의 눈초리가 말한 사람에게 쏟아진다.
막 그 앞을 지나던 오렌지전사도 현수막에 눈길이 머문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때마침 현수막을 스치는 바람에 노란 꽃들이 하늘거린다. 글귀와 함께 노란 유채꽃밭이 그의 가슴에 환하게 들어와 앉는다.
이순신 장군 동상 앞을 지날 즈음 멎었던 이슬비가 다시 부슬거리기 시작한다. 덕―덕―덕―젖은 공기 속으로 처연히 북소리가 스며드는가 싶더니 큰북이 따라붙는다. 절굿공이만한 북채를 든 사내가 자신의 키보다 큰 북을 일정한 간격으로 쳐댄다. 덕―덕―덕―한평생 북을 만들어온 어느 장인은 그 소리를 일컬어 덩덩 울림소리가 아니라 사물을 꽉 껴안는 소리라고 했다. 덕―덕―덕―북채의 단조롭고 느린 움직임은 소리가 사라질 때까지 그 음색을 고스란히 전해준다. 가죽을 바치는 소의 울음마냥 둔중하면서도 우직한, 성실과 희생이 속속들이 밴 소리. 그 소리의 여운이 임금의 마음을 움직여 신문고를 떠올리게 한 건 아니었을까. 억울한 백성들이여 북을 울려라. 짐이 친히 너희의 아픔을 보살피리라. 삼경도 훌쩍 넘긴 깊은 밤 궁궐 담장을 넘어 들려오던 북소리는 어떠했을까. 굽이굽이 이어지는 한 맺힌 아우성에 잠인들 제대로 이룰 수 있었을까. 효자동 박 아무개, 팔판동 김생원, 최판서댁 노비의 하소연하며 전국 방방곡곡에서 올라온 촌부, 장돌뱅이의 억울한 속사정이 북 앞에 나립히 줄지어섰을 터. 너도나도 피해자를 자처하는 온갖 다툼에서 시시비비를 가리는 일도 어렵거니와 빛나는 제도에도 잡음은 있게 마련이어서 북소리의 명이 길지는 못했다. 그랬을지언정 그 본래의 뜻만큼은 드높고 아름다웠음을 북채는 일깨운다. 덕―덕―덕―
와, 저기 임금이다.
사람들의 시선이 행사의 꽃이라 할 수 있는 가마행렬로 쏠린다. 가마꾼들로 둘러싸인 가마에는 대례복을 갖춘 임금이 기품있게 앉아 있다. 면류관 아래 비치는 희끗희끗한 머리, 은회색 수염, 근엄한 표정에서 군주로서의 덕과 연륜이 신비롭게 풍겨난다. 행사의 하이라이트를 놓칠세라 취재 카메라는 물론 디지털 카메라와 핸드폰이 일제히 따라붙는다. 임금 역은 고종 황제의 손자이면서 영친왕의 아들인 왕세손이 맡았다. 가마에 둥실 올라앉아 선조(先祖)대의 영화를 떠올리며 감회에 젖을 여유는커녕 정작 임금이 시종일관 받아내야 하는 뭇시선에 일거수일투족이 힘겹다. 고드름 달린 처마마냥 오색 구슬 늘어진 면류관에 목이 뻐근하고, 겹겹이 껴입은 옷에 온몸은 땀으로 비질거린다. 코앞에 치렁거리는 구슬에서 버선코까지 훑다보면 임금의 자리란 결코 타고나는 게 아니라 정수리에서 발가락 끝까지 만들어진다는 사실이 뼈에 사무친다.
양쪽으로 늘어선 가마꾼들이 바퀴 달린 임금의 가마를 천천히 밀고 가면 그 뒤로 제관이 따른다. 이들은 다른 의장행렬과는 달리 전주이씨 종친회에서 나온 왕실의 실제 종친들이다. 희끗희끗한 수염도 깊게 팬 이마의 주름도 바랜 두루마기도 평소의 차림 그대로인 집안 어른들이다. 혈육에서 혈육으로 전해져온 유교의 정신이 골수에 사무친 듯한 표정에서 제관의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그 뒤로 다시 호위부대가 따르면서 천오백여명이 동원된 긴 행렬도 거의 막바지에 이른다.
행렬 뒤에 삼삼오오 무리지어 구경꾼들이 따라붙는다. 크고 작은 무리를 이루며 산발적으로 나아가고 있는 무수한 군중 속에서 누군가를 찾는 건 잿더미 속에서 연필심 찾는 일처럼 무모해 보인다. 오렌지전사는 자신의 열망이 꿈에 지나지 않는 현실 앞에 다시 맥이 풀린다. 물귀신과의 만남은 그야말로 운명에 맡기는 수밖에 없다는 걸, 이런 상황에서는 사람들 물결에 섞여들어 같이 움직이는 것 외에 달리 방법이 없다는 걸 깨닫는다. 삼년째 동호회에 몸담고 있지만 여태껏 물귀신과 개인적으로 가까워질 기회는 별로 없었다. 그녀를 본 것은 서너달 전 남한산성 걷기 모임이 마지막이었다. 수어장대 앞에서 단체 기념사진을 찍은 뒤 그녀는 뜻밖의 질문을 해왔다. 저, 소방 공무원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진지하고 의욕이 넘치는 목소리였다. 공채 동기 중에 여자도 있다는 사실을 덧붙이며 그는 자신의 경험담을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 그녀는 메모까지 해가며 상세하게 캐물었다. 그 일의 고달픔을 누구보다 잘 아는 그로서는 그녀의 열의에 찬 눈빛에도 불구하고 가슴 저 밑바닥에서부터 스멀거리는 안쓰러움을 떨칠 수 없었다. 우리집 대소사도 내 손으로 좌지우지하죠. 스무살이 되면서 우리집의 실질적인 가장이 되었거든요. 언젠가 그가 물귀신의 탁월한 조직력에 대해 찬사를 늘어놓았을 때 그녀가 한 말이었다. 그녀의 강단있는 목소리 밑바닥에 깔려 있던 신산한 기운을 그는 잊을 수 없었다. 그후에도 광화문에서 몇차례 물귀신 작전이 있었지만, 그럴 때마다 오렌지전사는 번번이 비상근무였다. 그날 밤 촛불 물결이 장엄하게 도심의 밤을 수놓다 썰물처럼 빠져나간 뒤, 광화문 일대를 오토바이로 지나던 그는 색다른 감회에 젖었었다. 타다 남은 양초와 구겨진 종이컵과 탄핵반대 종이쪽지가 한켠에 쌓여 있던 광화문 거리는 축제가 끝난 뒤의 운동장처럼 뿌듯함과 쓸쓸함이 교차했다. 오렌지전사는 비각 앞을 지나다 문득 그날 번개모임을 제안한 물귀신을 떠올렸다. 그러자 마치 그녀가 자신의 연인이기라도 한 듯 그리웠다. 아니 더 엄밀하게 말하면, 그는 불쑥 어떤 사명감으로 불타오르는 자신을 느꼈다. 재난의 현장에서 그녀를 구출해내야 한다는, 직업병과도 같은 감미로운 사명감…… 그는 무작정 오토바이 머리를 강남 쪽으로 돌리고는 폭주족처럼 내달렸다. 그녀가 일한다는 편의점도 몰랐고, 또한 그 시간에 거기 있을 거라는 확신도 없었지만 거침없이 달렸다. 한남대교를 앞두고 걸려온 비상전화가 제동을 걸지 않았다면 그는 그날 밤 내내 물귀신을 찾아 강남역 근처를 헤매다녔을 것이다. 오렌지전사, 빨리 돌아와. 출동이야. 삶의 결정적 순간엔 늘 훼방꾼이 도사리고 있었다.
토각―토각―히히잉 히이잉~ 여기저기서 들리는 말울음과 말발굽 소리가 주변의 빌딩 유리벽에 반사되어 떠돌아다닌다. 오렌지전사는 어느새 기마대 행렬 곁을 지난다. 행렬의 움직임은 구경꾼들보다 훨씬 느렸다. 비각을 돌아 그 옛날 운종가라 불리던 종로로 접어들고 이슬비에 말발굽 소리까지 더해지자, 그는 자신이 마치 시간을 거슬러 몇백년 전의 한양 도성을 순시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서른세번의 북소리가 울리는 파루(罷漏)와 함께 통행금지가 풀리면서 도성의 하루는 시작되었다. 궁궐의 보루각에서 시작해 종루와 남대문과 동대문으로 이어지는 타종소리로 사대문이 닫히거나 열렸고 사람들의 발길이 끊기거나 이어지곤 했다. 종소리 혹은 북소리 하나가 사람들의 발과 마음을 묶어놓으며 모든 것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던, 단조롭지만 명징한 시절이 있었다. 자동차와 네온싸인, 돌발적으로 나타나는 폭주족으로 불야성을 이루는 도심의 밤거리를 순찰할 때면 그는 종종 그런 소박하고 평화롭던 시절의 밤거리를 그리곤 했다. 인적이 끊기고 고요와 어둠으로 뒤덮인, 순찰 도는 야경꾼만 오갈 수 있는 한적한 골목길……
토각 토각…… 토각 퍽―토각 퍽―
말발굽 소리에 웬 생뚱맞은 장단이 끼어드나 싶더니 아니나다를까 말의 엉덩이에서 툭툭 배설물이 떨어지고 있다. 말이 서울타워를 향해 고개를 치켜들고 태연스레 지나가는 종로 대로 위에 몇 무더기의 말똥이 기념물처럼 남는다. 낯선 광경에 뜨악해하던 사람들은 엷은 김이 채 사그라지기도 전에 그 오물덩어리를 수긍하는 눈치다. 그러고 나자 그것은 놀랍게도 배설물이라는 제 처지 따위엔 아랑곳없이 횡단보도 하얀 선 위에 척 들러붙은 채 버젓이 존재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아스팔트 바닥과 그럭저럭 어울리는가 싶더니 급기야 비장미까지 풍기면서……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그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살았을 적부터 오가던, 짐승들의 배설물이 수시로 내갈겨지고 먼지가 되어 사라져간 바로 그 자리. 황톳길 위로 자갈이 깔리고 신작로가 생기고 다시 아스팔트가 덮이고 지하도가 뚫리고 또 아스팔트가 덮이기를 지겹도록 되풀이해온 자리에 그것은 시간의 더께를 베개라도 삼은 듯 당당하고 의연하게 들러붙어 있는 것이다. 보신각 앞 사거리에 울려퍼지는 말의 히힝거림도, 짙게 풍겨나는 말의 체취도 바로 엊그제의 일상처럼 여겨진다.
모퉁이 레코드 가게에서 흥겨운 가요가 흘러나온다. 발랄한 리듬에 걸음이 한결 경쾌해진다. 난 모르겠다 모르겠다 뭐가 뭔지 난 모르겠다 널 택하겠다 택하겠다 사랑한다 에라 모르겠다…… 혼성 듀엣 곡에서 남자 가수가 읊조리는 랩 가사가 꼭 오렌지전사 자신의 넋두리처럼 들리는 순간, 그의 눈에 퍼뜩 낯익은 모습이 잡힌다. 머리에 노란색 핀을 꽂고 저 앞에서 가고 있는 여자. 유채꽃 들판이라도 만난 듯 그의 가슴이 일순간 환해진다. 어깨에 닿을 듯 말듯 찰랑거리는 생머리, 등뒤에 매달린 앙증맞은 륙쌕…… 물귀신이 분명하다. 총총거리는 걸음 역시 평소 그녀가 사라질 때의 바로 그 뒷모습이다. 오렌지전사는 허둥대며 사람들을 헤치고 나선다. 어허, 이 사람이 왜 밀치고 난리야. 그의 등뒤로 사람들의 짜증이 쏟아진다. 더러 우산까지 받쳐든 사람들까지 있어 노란 머리핀과의 간격을 좁히기란 여간 힘든 게 아니다. 겨우 다 따라잡았다고 생각했을 즈음, 노란 머리핀이 왼쪽으로 방향을 튼다. 얼굴이 드러나자 그는 멈칫한다. 고글형 안경을 낀 낯선 여자다. 그가 주춤거리는 사이 노란 머리핀은 이내 피맛골 골목으로 사라진다. 뭔가에 홀린 듯 그는 명멸해가는 노란 점을 우두망찰 바라본다. 노래에 빠져 착각한 것일까…… 사람들이 흘끔거리며 그의 곁을 지나간다. 그는 머쓱해진 마음을 추슬러 가던 길을 재촉한다. 물귀신은 배후조종자일 뿐이야. 사람들만 동원하고 정작 자신은 잘 나타나지도 않잖아. 얼마 전 광화문 번개모임 후 사람들이 하던 말이 떠오른다. 어쩌면 그녀는 오늘 이곳에 오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온라인이든 오프라인이든 둘 중 하나만 잘하면 됐지 뭐. 물귀신 형편에 그 정도 하는 것도 난 존경스러워. 물귀신의 속사정을 잘 알고 있다는 듯 회원 하나가 그녀를 감쌌다.
상점이 늘어선 종로 대로변을 지난다. 30% 쎄일 광고문구가 나붙은 구두 매장과 31가지 아이스크림을 파는 가게를 지나며 오렌지전사는 그 숫자에서 곧 닥쳐올 자신의 나이를 보는 것 같다. 탑골공원 앞 넓은 보도를 지나자 보도 폭이 좁아지더니 한켠으로 노점상이 죽 늘어서 있다. 이제 막 장사 준비를 하는 곳도 더러 눈에 띈다. 허연 무 덩어리와 다시마가 둥둥 떠 있는 사각의 스테인리스 스틸 통에서 김이 오르고, 그 뒤로 고구마를 채 썰고 있는 아낙과 꼬치에 오뎅을 꿰는 사내의 분주한 손놀림이 보인다. 꼬치마냥 한 두름 꿰어져 지나가는 대로변 풍경을 따라 3가를 지나고 4가로 들어서자 드디어 종묘 입구가 나타난다. 시간은 다시 몇백년을 훌쩍 거슬러올라간다.
종묘 정문을 들어서니 오월 숲의 싱그런 향기가 성큼 몰려들면서 지친 심신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의장행렬은 정문을 들어서면서 비로소 대단원의 막을 내리며 한쪽 숲길로 사라지고, 구경꾼 행렬은 종묘제례가 거행되는 정전으로 계속 이어진다.
정전 대문으로 들어서자 잿빛 기와지붕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다. 수키와 암키와가 번갈아 포개들며 하염없이 이어지는 기왓장들의 이랑 뒤로 싱그런 오월의 신록이 드리워 있다. 누백년 숲을 이뤄온 나무들의 투명한 연초록 새순들이 잿빛 기와지붕과 어우러져 정전의 중후함을 한껏 살려내는 한편, 앞마당에 겹겹의 울타리로 둘러선 구경꾼들 모습은 어지러울 만큼 다채롭다.
편편한 화강석이 빼곡히 깔린 돌기단에도 위아래가 있어 제례악에서도 당상악을 연주하는 이들은 하늘을 상징하는 상월대에 자리를 잡는다. 마당을 좌우로 나누어 제례악단과 일무를 추는 무용단이 각각 자리를 차지하고 한켠에는 귀빈석과 종친들 자리가 마련돼 있다. 제사 장면을 구석구석 담기 위한 이동식 카메라가 휘휘 허공을 누비며 시운전중이고 정전 양쪽으로 대형 멀티비전이 설치되어 있다.
하나 둘 하나 둘, 마이크 테스트용 멘트가 금속성 잡음과 뒤섞여 신경을 긁어대더니 이윽고 사회를 맡은 집례관이 개회식을 알린다. 연로한 집례관 어른의 목소리는 작고 발음이 분명치 않아 잘 알아들을 수가 없다. 마이크가 언론계 출신 종친회장에게로 넘어가자 소리가 크고 또렷해진다. 종묘는 바야흐로 명실공히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전 세계 사람들의…… 흰 두루마기를 걸친 종친회장의 감회에 젖은 인사말이 마당 가득 울려퍼지는 동안 오렌지전사는 물귀신 일행을 찾아 이곳저곳을 둘러본다. 오락가락하던 비는 어느새 그쳤다. 취재를 하거나 관광 온 외국인이 여기저기 눈에 띈다. ‘파파, 마망’을 외치는 어린 남매 딸린 프랑스인 배낭족 가족도 보이고 ‘기무치’를 외치며 사진찍기에 여념 없는 일본인 단체 관광객도 보인다. 찰칵 찰칵, 먼먼 훗날 빛바랜 앨범에서 아니, 컴퓨터 개인 홈피에서 삶의 한순간을 회상하며 애잔함에 젖게 만들 장면이 각자의 카메라에 담긴다.
여기는 정실이 아닌 후궁 출신 왕비들 신위를 따로 모시는 곳이야. 희빈 장씨의 신위도 여기다 모셨지. 적자와 서자의 구별이 워낙 엄격하던 시대였으니 그럴 수밖에…… 정전에서 멀찍이 떨어진 아래채의 어느 방 앞에서는 한 무리의 대학생들에 둘러싸인 인솔 교수가 열심히 설명을 하고 있다. 학생들은 열심히 귀기울이면서 이따금 수첩에 펜으로 뭔가를 적어넣는다.
제례악이 은은히 울려퍼지는 가운데 마침내 임금과 제관들이 종묘로 들어선다. 임금을 앞세운 제관행렬이 정전의 긴 회랑을 따라 들어와 위패를 모신 제실 앞에 죽 늘어선다. 제1실 태조의 신위를 시작으로 후대 왕들의 신위가 제19실까지 차례로 놓여 있다. 유~세차…… 집례관이 천천히 축문을 읽어내려간다. 당피리, 대금, 해금, 아쟁 등 악기선율 사이사이로 편경소리가 산사의 풍경처럼 맑고 청아하게 울려퍼지는 가운데, 임금이 손수 향을 피워 하늘의 혼을 불러오는 진향을 하고 술을 따라 땅속의 백(魄)을 불러오는 진찬을 하고 비단에 싸인 폐백을 신에게 예물로 올리는 진폐의식을 차례로 거행해나간다.
다시 빗줄기가 후드득거린다. 사람들 머리 위로 일제히 우산이 펼쳐진다. 검정, 노랑, 파랑, 꽃무늬 우산…… 사람들 어깨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던 제례 광경이 우산에 가려지자 양쪽에 높이 솟은 대형 멀티비전이 진가를 발휘한다. 대형 모니터에는 일무의 춤사위가 선명하게 보이고 당피리, 편경, 편종 악기들이 비치는가 싶더니 급기야 제상에 차려진 음식들이 생생하게 클로즈업된다. 하얀 쌀밥과 각종 고기류…… 화면을 가득 메운 제상 음식을 보자 오렌지전사는 갑자기 허기가 밀려든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했건만 그는 여태껏 아무것도 먹지 않았던 것이다. 제상의 젯밥에 침이 꼴깍꼴깍 넘어간다.
제단에 밥 올리는 걸 중지해야 합니다.
일년 내내 종묘 제단에 젯밥이 끊이지 않던 왕조 시절, 하루는 조정 중신이 제상의 밥이 번번이 도둑맞는 일을 문제삼았다.
아니 감히 임금의 제상에 놓인 젯밥을 훔쳐먹다니요. 그런 불경스런 일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 놈들은 마땅히 엄벌로 다스려야 합니다.
오죽하면 제상에 손을 댔겠습니까. 현세의 도를 중시하는 것이 유교의 미덕 아닙니까. 뜬구름 잡는 얘기나 늘어놓는 불교나 도교와는 엄연히 다르지요. 굶주림과 식탐의 원인부터 해결하는 것이 순서겠지요.
중신들의 의견은 팽팽히 맞섰다. 어디 엇갈리는 생각이 젯밥뿐이었으랴. 왕이 죽고 난 후 대비의 상복 입는 기한에 관해서도 어긋났고 그 해석에 따라 패가 갈리면서 파벌이 생겨나 논쟁이 끊이지 않았으니, 성리학을 통치이념으로 한 왕조의 긴긴 세월이 이 당쟁으로 도배되었음을 후손들은 너무도 잘 알고 있다.
비 탓인지 지루한 절차 탓인지 구경꾼들이 하나둘씩 빠져나가고 있건만 제사는 아직도 그 끝을 가늠할 수 없다. 잔에 따라진 술이 제상에 올라가고 절을 하고 손을 씻고 또 잔을 올리고 절을 하고…… 일련의 의식이 지루할 정도로 되풀이된다. 구경꾼이 한번씩 하품을 입에 물고 여기저기 두리번거리는 사이 임금과 제관들은 거듭되는 무릎꿇기와 절하기에 삭신이 욱신거린다.
술이 세 차례 제상에 오르는 3헌례가 끝나면서 제사도 거의 마무리 단계에 접어든다. 긴 노동 끝에 달콤한 결실의 시기가 오듯 음복할 순서가 따른다. 임금은 제상에 올랐던 술을 한잔 쭉 들이켠다. 조상의 음덕이 흠뻑 깃든 술이 빈속을 자르르 훑고 지나자 오장육부가 일제히 깨어난다. 임금은 한 잔을 더 청해 마신다. 술기운이 번지면서 피로와 긴장이 풀리는가 싶더니 차츰 온몸이 느른해온다. 조상신들이 젯밥보다는 이승의 술맛을 못 잊어 이날을 오매불망 기다리는 건 아닐까. 혀끝에 맴도는 술맛을 음미하던 임금의 뇌리에 새로운 의구심이 솟는다. 임금은 세번째 잔을 들이켠 다음 마침내 일어날 채비를 한다. 이제는 궁궐로 돌아가 노곤한 몸을 뉘는 일만 남았다. 축축 늘어지는 몸이 천근만근이나 되는 것 같다. 임금은 처지는 발걸음을 억지로 떼놓으며 문지방을 넘다 버선발을 헛디뎌 휘청한다. 기둥을 붙잡으려던 손이 미끄러지면서 몸은 이내 중심을 잃고 바닥으로 나둥그러진다. 후들거리는 무릎 관절에 술기운까지 겹친 탓이다. 아이고 전하―제관들이 우루루 모여들고 주위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된다. 어의가 불려오고 종친과 신하들, 심지어 문밖의 가마꾼들까지 허둥댄다. 정작 바닥에 너부러진 임금은 이 어수선한 분위기가 마치 강 건너 불구경 같다. 심신이 어찌 이리 편할쏘냐. 면류관이 벗겨지고 대대와 폐슬이 끌러지고 구장복이 헤쳐지고 조였던 버선끈이 풀리자 온몸이 쇠사슬에서 풀려난 것 같다. 처마끝으로 펼쳐진 하늘이 시원하다. 처마와 하늘과 구름 사이로 제관들 얼굴이 주마등처럼 돌아가고 몸은 새의 깃털마냥 훨훨 허공을 떠다닌다. 저 구름 뒤편 어딘가 있을 조상들 자리가 괜스레 탐이 난다. 용상이고 곤룡포고 옥새고 미련 없이 떨쳐버리고 저 구름 위에 둥실 올라 늘어지게 쉬었으면 싶다. 일년에 몇차례 후손들이 차려주는 젯밥이나 얻어먹으며……
구름 사이로 들락거리던 해가 그새 서쪽으로 훌쩍 옮겨 앉았다. 겹겹의 구경꾼 울타리가 풀어헤쳐지더니 정문으로 향한 숲길 따라 길게 이어진다. 오렌지전사는 연신 꼬르륵거리는 배를 움켜쥐고 정문으로 향하는 행렬에 끼어든다. 입구 여기저기에 전세버스들이 대기하고 있다. 캔맥주를 들고 버스 안을 들락거리는 행사 참가자들이 있는가 하면 여기저기 삼삼오오 모여앉아 담소를 나누기도 한다. 불콰한 얼굴도 심심찮게 눈에 띈다. 구경꾼들은 거개가 정문을 나서면서 뿔뿔이 흩어진다.
그는 지친 걸음을 떼놓으며 오늘 일을 떠올려본다. 호랑나비 한마리를 쫓아 온 들판을 헤매다닌 어린날의 기억처럼 하루 일이 백일몽 같다. 하염없이 쏘다녔지만 결국 나비는 손에 넣지 못하고 빈 들판의 기억만 가득했다. 다리는 후들거리고 뱃속은 연신 꼬르륵거리며 성화다.
어느새 오렌지전사는 횡단보도 앞에 서 있다. 다른 세상으로 훌쩍 건네줄 것처럼 아득하게 펼쳐진 종로 대로…… 그는 왠지 아쉽고 허전한 마음을 떨치지 못해 다시 한번 종묘를 돌아본다. 멀리 숲 사이로 수키와 암키와가 가지런히 포개 있는 정전 지붕이 보인다. 고개를 돌리던 그에게 어떤 깨달음이 전광석화처럼 스친다. 종묘도 주변의 숲도, 심지어는 코앞에 펼쳐진 종로 거리도 모두 거대한 세트장이라는 깨우침…… 어가행렬과 종묘제례에 참석했던 임금과 제관과 포졸만 배우인 게 아니었다. 그는 자신도 그 거대한 시대극에 출연한 단역 배우임을 깨닫는다. 아니, 극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이 여전히 카메라 렌즈에 담겨지고 있을지 모른다. 주위를 둘러본다. 무심한 표정으로 서 있는 옆사람도 뒷사람도 행인1, 행인2라는 단역을 맡은 배우들이다. 자신은 오렌지전사 역, 그녀는 물귀신 역을 맡은, 같은 시대극에 출연하는 배우의 운명이었다. 그는 잠시 마음을 진정시킨다. 누군가에 의해 씌어진 이 각본을 그대로 따르고 싶지는 않았다. 누구도 주인공이 아닌, 그래서 모두가 주인공일 수 있는 이 극의 씨나리오를 수정할 자유는 자신에게도 있다.
오렌지전사는 다시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본다. 횡단보도 건너편 사람들 사이에 낯익은 누군가가 있다. 온몸의 신경세포들이 일제히 깨어난다. 유채꽃 같은 노란 머리핀, 어깨 위에 닿을락말락 찰랑거리는 까만 생머리의 여자…… 물귀신이다. 그녀가 환한 미소를 머금고 건너편에 서 있다. 그에게 달려오기 위해 신호등의 카운트다운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오렌지전사, 얼마나 오랫동안 찾아헤맸는지 몰라. 그녀의 속삭임이 또렷이 전해진다.
신호등이 둥실 청사초롱이 되어 솟아오르고 하얀 막대 선의 횡단보도가 오작교가 되어 펼쳐진다. 꿈도 꾸지 못했던 일이다. 그들 앞에 튼튼한 다리가 놓이리라곤…… 빨강 파랑 청사초롱이 한들거리며 앞장을 서고 그녀가 다리 위로 발을 옮겨놓는다. 그때 메씨지가 도착한다. 오렌지전사, 비상출동이야. 그는 바로 이 순간을 위해 그 기나긴 시간을 기다렸다. 출동준비 완료. 그는 답신을 날린 다음 그녀를 향해 힘찬 걸음을 내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