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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이진명 李珍明
1955년 서울 출생. 1990년 『작가세계』로 등단. 시집 『밤에 용서라는 말을 들었다』 『집에 돌아갈 날짜를 세어보다』 등이 있음. muwoosu@dreamwiz.com
성만이
현덕의 동화 「군밤장수」를 읽고
우편소가 있는 사거리
전선주 옆에
조그만 풍로를 앞에 놓고
꼬부리고 꼬부리고
고개를 기우듬히 부채질을
소학교 때 그림을 잘 그렸던 성만이
천재라고 일컬을 만큼 그림 잘 그렸던 성만이
학교 전람회는 물론,
신문사 전람회에도 당당히 입상,
신문에 이름이 크게 났던 성만이
학부형이며 선생님이 그 놀라운 솜씨와 재주에 칭찬을 마지않던 성만이
누구나 일후에 그림길로 나서 크게 성공하리라 믿었던 성만이
을마치를 드립갑쇼?
밤 굽는 철바구니 쥐며 노며
종이봉지를 집어들고
길거리에서 군밤을
행길에서 군밤을
동무들이 상급학교 중학교 정복 정모를 하고 불현 풍로 앞에 와 섰는데
때묻고 해진 조선바지에 양복저고리 입은 주제꼴
여윈 얼굴
컴컴한 얼굴
아버지를 여읜 외로움
가난한 살림을 자신의 잔약한 어깨에 짊어진 외로움
그렇게 그림 잘 그리던 손으로 군밤을 까
그렇게 장래있고 재주있는 손으로 군밤을 까
✽ 성만이: 현덕의 동화 「군밤장수」 속에 나오는 소년 김성만.
✽ 현덕(1909~?): 193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동화와 193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소설로 등단했다. 동화·소년소설·소설 등 많은 작품을 남겼다. 6·25 때 월북했다. 작품집으로 소년소설집 『집을 나간 소년』과 동화집 『포도와 구슬』 『토끼 삼형제』 소설집 『남생이』가 있다.
✽ 동화 「군밤장수」에 나오는 몇몇 표현을 윗시와 아랫시 두 편 여기저기에서 그대로 빌려왔다.
다시 성만이
현덕의 동화 「군밤장수」를 읽고
소학교 때 그림을 잘 그려 이름을 크게 냈던 성만이
살던 동네에서 뜨더니 낯선 동네 길에 나와앉아 군밤을 파는 성만이
소학교 때 학업성적으로 늘 너나를 다투던 동무가 한번 찾아온 후론
매일 군밤풍로 앞을 찾아오지 않을 수 없게 한 성만이
……어떻게라도 그 길을 밟아보지 않구…… 허다 못해 간판그림을 그릴지라도……
찾아와서는 하 탄식하게 했던 성만이
이제는 상급학교 학생이 된 생각 많은 그 동무로 하여금 또
---천재는 흙에 묻히고 마는 법이 없다. 어느 때고 꽃을 피울 날이 있을 것이니 낙망치 마라.
행길에서 도화지며 연필을 넣어주게 했던 성만이
생각 깊기까지 한 그 동무 집에 돌아가서는
성사 없는 격려하는 말로만은 도움이 될 수 없다는 판단에 고심 끝에
낮에는 일하는 업을 갖고 밤엔 야학 같은 데 다니며 동무가 제 길을 열게 도와주시라
엄해서 가까이 할 수 없는 작은아버지를 몇번이고 찾아가 부탁의 말을 넣게 했던 성만이
무엇보다
작가 현덕 선생으로 하여금
산 사람을 보는 듯싶게
날카로운 관찰과 깊은 사랑하는 마음으로 종이 위에 성만, 자신의 일을 옮겨놓을 수밖에 없게 한 성만이
더 무엇보다는
작가 현덕 선생으로 하여금
일제 암흑기인 1939년 1월 『소년』지에
부끄러웠지만 빛나게, 머잖을 희망, 끝에 가서는 어느 유명한 도화선생 밑에서 독실히 그림공부를 하게 될지도 모를, 그런 희망을 보이며, 모두 그 희망을 품어보게 인사를 시킬 수밖에 없게 한 성만이
성만이의 그림은
현덕의 동화 「군밤장수」를 읽고
성만이의 그림은
당연히 무슨 미술관 무슨 갤러리에 있지 않다
현덕의 동화 「군밤장수」 속에 있다
「군밤장수」 속
케케묵고 해진 겉모양의 그림 그리는 책 속에
밤을 굽다가 문득 허리를 구푸려
전대를 뒤적뒤적 꺼내 건네는
먼지를 툭툭 털어 동무에게 건네는
까맣게 때묻은 그림 그리는 책 속에 있다
성만이의 그림은
매일 군밤풍로 앞을 찾아오는 동무가 첫번째로 봤다
그 다음으로 내가 봤다
작가 현덕 선생이야 첫번째라면 더 첫번째이고
나중이라면 제일 나중까지이겠지만
순서는 없다
언제고 이 세 사람이 동시에 같이 보지 않는다면
성만이의 그림은 없다
솜씨와 재주와 장래성이 어우러진
지금은 다만 현실여건이 허락지 않을 뿐인
천재소년 성만이의 그림은 없다
「군밤장수」를 열고
「군밤장수」 속의 군밤풍로 앞으로 바싹 다가가
세 사람이 동시에 한장 한장 같이 보지 않는다면
살아움직이는 듯싶게
선 하나 점 하나 힘이 흐르는
시골여인이며 어린애, 소녀며 차부
깊은 관찰과
깊은 사랑하는 마음이 없고서는 옮겨놓지 못했을
한손엔 어린애 이끌고
한손으론 머리에 인 광우리 잡고 섰는 시골여인
세 소녀아이들의 돌아선 뒷모양
구루마 끄는 차부
장마다 새롭고 느낌이 날카로운 그림은 없다
성만이의 그림은 이렇게
당연히 무슨 미술관 무슨 갤러리에 걸려 있지 않고
어둡고 아팠던 일제 강점기
현덕의 동화 「군밤장수」 속에 씌어 있다